본문 바로가기
나폴레옹의 시대

행군할 때는 손을, 전투에서는 발을 쓰라 - 울름(Ulm)의 항복

by nasica-old 2013. 4. 6.
반응형

지난 편에서는 나폴레옹의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과 함께 오스트리아 군 사령관 마크의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나폴레옹은 마크가 위치한 울름의 북동쪽에서 크게 우회전하며 울름 전역을 포위하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는데, 마크가 재빨리 움직이지 않는다면 유일한 탈출구인 남쪽마저 곧 막힐 위기였지요.   나폴레옹은 마크가 바보가 아닌 이상, 전체 병력을 황급히 빼내어 남쪽의 티롤로 탈출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시간상 그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이미 반쯤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저런 동네가 피난처라면 다들 피난가고 싶을 것 같습니다.  오스트리아 티롤의 아름다운 경치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장군들이 나폴레옹처럼 상식적인 작전을 펼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10월 9일 군츠부르크 전투 직후 마크는 병력을 이끌고 일단 서쪽으로, 즉 원래 위치인 울름 남쪽 방면으로 후퇴했습니다.  이제 나폴레옹의 포위망이 좁아들고 있었으므로, 나폴레옹이 우려하던 대로 마크는 남은 유일한 탈출구인 남쪽 방면으로 냅다 뛰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나폴레옹은 '뭐 어쩔 수 없지' 하며 입맛만 쩝쩝 다시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크는 군츠부르크 전투 바로 다음날인 10월 10일 새벽에, 패잔병들을 몰고 오히려 강을 건너 도나우 강 북안의 울름 시내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현대의 울름 시의 모습입니다.  울름 시는 도나우 강의 북안에 위치한 도시로서, 그다지 견고한 요새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마크는 이후 무슨 생각을 정리하느라 그랬는지 소중한 10월 10일 하루를 허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나폴레옹의 명령을 받은 술트는 오스트리아 군에 대한 포위를 완성하기 위해 남쪽의 메밍겐 (Memmingen) 을 향해 진격 중이었는데도 말이지요.  제일 답답해 하던 것은 부하 장군들과, 그리고 형식적으로 그의 상급자인 페르디난트 대공이었습니다.  대체 우리 사령관은 무슨 생각인 것이냐 ? 라는 것이 일치된 의견이었지요.  특히 페르디난트 대공은 마크와 기본적인 전략에서부터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페르디난트 대공은 이렇게 대책없이 먼 서쪽인 울름까지 쳐들어와서 대기할 것이 아니라, 아우크스부르크와 뮌헨 사이에서 방어선을 짜야 한다는 입장이었지요.  하지만 명색만 최고 사령관이지 24세의 새파란 왕족에 불과했던 페르디난트의 의견을 마크가 중시할 리 없었고, 이에 비위가 상한 페르디난트는 아예 마크와는 말도 섞기가 싫어서 정 할 말이 있으면 서로 편지로만 의견을 주고 받는 불편한 사이가 된 상태였습니다.

이런 지휘관들 사이의 불화가 오스트리아 군 내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란 (Lannes) 의 제5 군단 및 네 (Ney) 의 제6 군단은 모두 나폴레옹의 매제인 뮈라 (Murat) 의 통제를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뮈라는 기병 운용에 있어서만 천재였을 뿐, 군단 규모의 보병 부대들을 어찌 굴려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별 다른 통찰력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뮈라는 이미 도나우 강을 넘어 남하한 란의 뒤를 이어, 네에게도 대부분의 병력을 도나우 강 남안으로 옮긴 후 도나우 강을 따라 서진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럴 경우 강 북쪽에는 네 휘하의 뒤퐁 (Pierre Dupont de l'Etang) 장군이 이끄는 1개 사단 약 5천명 정도의 병력만 남게 되었습니다.  네는 도나우 북안에도 강력한 적군이 남아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병력 배치는 너무 위험하다고 뮈라에게 항의했으나, 뮈라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이때 뮈라가 내뱉은 말은 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지요.

"작전 계획 ?  난 그런 거 모른다네 !  원래 작전 계획이라는 것은 적을 만나고 난 뒤에 만드는 거 아닌가 ?"




(말 등자의 힘으로 나폴리 왕위에 오른 용자의 초상 - 조아생 뮈라의 위엄입니다.)



아무튼 뮈라가 더 상급자였으므로, 네는 그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도나우 강 북안에 뒤퐁 사단만을 남겨놓고 병력 대부분을 남안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리고 북안에서는 뒤퐁 사단이, 남안에서는 네의 군단이 나란히 서진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예측대로라면 텅 비어있어야 할 울름 시를 접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울름 시는 강 북쪽에 있었으므로, 사실상 울름 시의 접수는 강 북안에 남은 뒤퐁 사단의 몫이었습니다.  네의 군단은 이미 남쪽으로 줄행랑을 쳤을 마크의 주력 부대의 뒤를 쫓는 것이 임무였습니다.

10월 11일, 하슬라흐(Haslach)에서 울름을 향해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한 뒤퐁 사단은 오후 들어 뵈핑겐 (Boefingen) 을 지키던 오스트리아 군과 맞닥뜨렸습니다.  애초에 별 것 아니겠지라고 생각하고 이들을 몰아내려 했던 뒤퐁 장군은 곧 이들이 4개 연대로 구성된 강력한 수비대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상황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뵈핑겐에서 프랑스 군과 충돌 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마크가 대규모 병력을 출동시켜 '이번 기회에 프랑스 놈들을 상대로 완승을 한번 거두'려 하면서 상황이 점점 나빠졌습니다.  오스트리아 군이 보병 1만5천으로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기병만도 1만명으로 크게 증원된 것입니다.

상황이 이 정도 되었으면 뒤퐁으로서는 당연히 후퇴를 해야 했는데, 그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적이 대규모 기병대를 출동시킨 것을 보고, 뒤퐁은 여기서 후퇴했다가는 최후의 1인까지 모조리 도륙당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당시 뒤퐁에게는 후퇴를 엄호할 기병이 거의 없었습니다.  실은 근처에서 용기병 (dragoon) 1개 사단이 그의 사단을 지원하고 있었으나, 이들은 소위 foot dragoon으로서, 기병이되 말이 없는 부대였습니다.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 창설 초기에 군마가 부족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지요.  사실 용기병이라는 부대는 적을 만나면 말을 달려 안장 위에서 군도로 싸우기보다는 말에서 내려 짧은 기병총으로 총격전을 벌이는 것이 주특기인, 기병이라기 보다는 기마 보병에 가까운 부대였습니다.  아무튼 이런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뒤퐁은 수비가 아닌 적극적 공세를 펼쳤습니다.




(저희가 볼 때는 기병은 다 그게 그거 같습니다.  특히 경기병 husaar와 엽기병 chasseur는 사실 군복 모양새 빼고는 특징이나 역할조차 똑같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용기병 dragoon은 검이 아닌 기병총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소 불명예스럽지만 말타는 솜씨가 좀 서툴다는 점에서 다른 기병들과는 차이가 나는 존재였습니다.  용기병의 활용도는 기병으로서의 충격 효과보다는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는 기동 보병의 역할이었지요.  이 융잉겐 전투에서 말이 없어 쓸모가 없었던 이 용기병 사단은 제3차 동맹전쟁 이후 오스트리아에서 노획한 군마들로 마침내 기병으로서의 위용을 갖추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수적 열세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뒤퐁이 퍼부운 공격은 적의 우세한 병력에 의해 다 격파되었고, 뒤퐁은 조금씩 후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퇴하면서도 격렬한 전투가 계속 되었습니다.  특히 프랑스 군이 교회 건물을 요새로 삼아 저항한 울름-융잉겐 (Ulm-Jungingen) 마을에서의 전투는 매우 치열했습니다.   마크는 훨씬 우세한 기병을 이용하여 프랑스 군의 뒤로 돌아 포위까지도 가능했으나, 뒤퐁의 측면이 숲으로 보호되고 있어서 적극적인 기병의 활용이나 오스트리아 군의 수적 우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결정적으로, 뒤퐁이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저항하는 것을 본 마크는 이것이 훨씬 더 큰 주력 부대의 전위대일 뿐이고, 곧 뒤에서 대규모 프랑스 군이 몰려올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밤 9시 경에 이런 판단이 들자, 마크는 결국 병력을 철수시켜 다시 울름으로 철수해버립니다.

이 전투의 결과는 놀라왔습니다.  오스트리아 군은 1천명이 넘는 사상자와 함께 3천명의 포로와 2문의 대포를 상실했습니다.  뒤퐁 사단의 전체 병력에 육박하는 숫자의 피해를 본 것입니다.  그에 비해 뒤퐁은 1천명의 사상자 및 포로, 그리고 8문의 대포를 상실했습니다.  아군의 거의 1/5의 병력을 상대로 한 것치고는 오스트리아 군이 거둔 전과는 한심한 편이었지요.




(울름-융잉겐 전투의 영웅 뒤퐁 장군입니다,  그는 원수가 될 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으나, 신병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이끌고 스페인 점령군으로 진주했다가 스페인 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뒤 나폴레옹의 눈 밖에 납니다.  대신 부르봉 왕정 복고 이후, 철저한 반-보나파르트 파가 확실하다는 이유로 중용되지요.)



일이 이렇게 되자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양쪽 군 모두에서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일단 오스트리아 군 내부에서는 이 어이없는 패배와, 그 다음날 마크가 취한 조치 (이 조치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보시겠습니다) 에 대해 격노한 페르디난트 대공이 대놓고 마크의 지휘권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사령관이라는 작자가 앞뒤도 안맞고 목적도 모호한 명령서나 써갈기면서 아군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 빼고 대체 하는 일이 뭐냐라는 식으로 공공연하게 항의했던 것입니다.  명목상의 왕족 지휘관에 실질적인 지휘관으로 노장을 덧붙이는 오스트리아 군의 낡은 전통이 낳은 지휘권의 혼선이었지요. 


한편 프랑스 군에서도 네가 뮈라에게 격렬하게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뮈라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자신의 휘하 사단이 큰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해 네는 화가 날만 했지요.  그렇다고 뮈라 역시 '나의 판단이 짧았네' 라며 순순히 사과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기 떄문에 이 둘의 언쟁은 크게 과열될 위기로 번졌습니다.  하지만 이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은 인척인 뮈라 대신 곧바로 네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네 휘하의 주력 사단들을 다시 모두 강 북안으로 옮길 것을 명령한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네의 주력 사단을 모두 남안으로 도하시킨 것은 뮈라의 판단이라기보다는 나폴레옹이 마크와 그의 주력 부대가 이미 남쪽으로 줄행랑 쳤을 것이라고 잘못 파악했기 때문이었는데, 그에 대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전략을 수정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오스트리아 군의 패배나 프랑스 군의 승리가 유능한 혹은 무능한 지휘관 1~2명 때문이 아니라, 양국 군대의 문화와 상벌 체제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엿보실 수 있습니다.




(뮈라에게 대든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네의 별명은 '용자 중의 용자'였습니다.  특히 그는 1814년 퐁텐블로에서 나폴레옹에게 퇴위를 강요한 원수들의 대변인 역할을 했습니다.  아마 이때 나폴레옹에게 물러나라고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 네의 일생에서 가장 큰 용기가 필요한 사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무튼 다음날인 10월 12일이 되자, 마크는 아무튼 뭔가 하기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휘하 병력을 크게 4등분하고 이들에게 일련의 명령서를 날리기 시작했는데, 희한하게도 먼저 날린 명령서 뒤에 곧 그와 반대되는 취지의 명령서를 날리는 등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가 취한 행동은 4등분한 병력을 각각 여기저기 파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는 울름을 지키게 했고, 하나는 남쪽 티롤로, 하나는 동쪽으로 향하게 하더니 나머지 하나는 북쪽으로 보냈습니다.  대체 무엇을 바라고 이런 조치들을 취했을까요 ?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지금도 없습니다.  일부에서는 개전 초기부터 페르디난트와 작당하여 그에게 반기를 들었던 부하 장군 마이어 (Anton Mayer von Heldensfeld) 를 제거하려고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렇게 어지럽게 부대를 분산 이동시키다보면 오히려 탈출의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그랬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이미 10월 13일에 술트가 메밍겐 (Memmingen) 을 점령하고 남쪽으로의 탈출구를 막아 버렸기 때문이지요.




(10월 14일 엘힝겐 전투가 벌어질 때의 정황입니다.  남쪽에서는 이미 술트가 메밍겐을 정리하고 울름을 향해 북쪽으로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고, 네의 병력은 엘힝겐으로 접근 중이었습니다.)



아무튼 사건은 리에슈 (Johann Sigismund Riesch) 장군의 지휘 하에 북동쪽으로 향한 8천명 규모의 부대에서 터졌습니다.  뒤죽박죽 내려진 명령 덕분에 시간을 지체하다 13일이 되어서야 길을 떠난 리에슈는 엘힝겐 (Elchingen) 방면으로 향했습니다.  당연하게도 여기서 그는 울름에 대한 포위망을 좁혀 오던 네의 부대와 딱 마주쳤습니다.  네의 부대는 2만명 수준의 강력한 군단급이었으므로, 결론은 뻔한 것이었지요.  10월 14일 벌어진 이 전투에서 네 원수는 엘힝겐의 언덕 위에 위치한 수도원에 대해 돌격을 직접 지휘하여 함락시켰고, 전투는 일방적인 오스트리아 군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오스트리아 군은 총 8천 중에 불과 2천만 울름으로 퇴각할 수 있었고, 2천명의 사상자와 4천명의 포로를 냈습니다.  프랑스 군의 피해는 매우 적어서 약 800명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엘힝겐 전투 장면입니다.  저 언덕 위의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이 전투의 클라이맥스였는데, 사실 너무나 맥없이 끝난 전투였지요.)



이때의 공로로 훗날인 1808년, 네 원수는 엘힝겐 공작의 작위를 받습니다만, 사실 이때의 승리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그다지 인상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투 결과가 뭔가 극적인 변화를 만들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때의 공로를 기린다는 것은 약간 오버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하슬라흐 전투에서 절대 열세인 상황을 무릅쓰고 승리를 이끌어낸 뒤퐁 장군의 공로가 더욱 빛났지요.  뒤퐁 장군도 이때의 공로로 백작의 작위를 받긴 했습니다.

엘힝겐 전투의 의의가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이 전투를 기점으로, 오스트리아 군은 그야말로 와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리에슈의 패잔병들이 몰골 사납게 울름으로 퇴각해들어오자마자, 이해할 수 없는 마크의 지휘에 부글부글 끓던 페르디난트 대공이 울름을 사수하라는 마크의 명령을 개무시하고 마침내 총 6천의 기병을 이끌고 울름을 탈영, 아니 탈출했습니다.  그야말로 마크의 권위와 지휘권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후 나폴레옹은 부하들, 특히 사냥개 뮈라를 풀어서 그야말로 사방에서 흩어져 도망치는 오스트리아 군을 '물어 오게' 했습니다.  작은 규모의 소탕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지루하니, 가장 굵은 것만 이야기하면 북쪽으로 향했던 1만5천 규모의 부대가 그 지휘관인 베르넥 (Werneck) 장군과 함께 항복했습니다.  또한 남으로 향했던 옐라치치 (Jellacic)의 4천명 병력도 11월 13일에 결국 요격당하여 항복했습니다.  페르디난트 대공을 따라 나섰던 6천의 기병대는 뮈라의 집요한 추격 대상이 되었는데, 그래도 기병다운 기동력을 발휘하여 6천 중 2천은 기어코 서쪽 보헤미아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페르디난트 대공이 탈출에 성공한 것은 물론이었습니다.  그걸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요.

남은 것은 울름에 남은 마크 뿐이었습니다.  당시 마크에게는 그래도 약 2만4천의 병력이 남아 있었습니다.  마크는 울름 시 뒤편에 위치한 고지의 요새인 미헬스베르크 (Michelsberg) 에 의지하여 농성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이없는 일이 발생해버렸습니다.  10월 15일 네의 전위대가 견제 공격 차원에서 이 미헬스베르크 고지에 돌격을 해보았는데, 천혜의 요새라고 평가되었던 이 요새가 그만 대번에 함락되고만 것입니다.  당시 오스트리아 군의 사기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일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고지가 점령되자, 바로 다음날인 16일부터 울름 시내에 대한 포격이 가능해졌습니다.



(마크의 항복을 받는 나폴레옹입니다.  저 멀리 울름 시의 모습이 보입니다만, 평지에 위치한 도시인데다 ,견고한 성벽 등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젠 나폴레옹 본인까지 친위대와 함께 울름에 도착한 상황이 되었고, 마크에게는 정말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마크가 이런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2가지 중 하나였습니다.  처절한 피해를 무릅쓰고 피비린내 나는 포위전에 돌입하던가, 아니면 나폴레옹과 항복 협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크는 첫번째 옵션을 택할 의사가 전혀 없었습니다.  요새화된 고지인 미헬스베르크도 너무나 맥없이 무너지는 마당에, 허술한 성벽으로 보호된 울름 시가 오래 버틸 것 같지 않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항복이라는 것은 그렇게까지 불명예스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항복에는 무조건 항복이 있고 조건부 항복 (capitulation) 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조건부 항복이라는 것은 군인으로서 충분히 겪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부하 원수들인 뮈라나 란은 물론이고 마세나조차도 항복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번에 언급했듯이, 마크 본인도 이탈리아 전선에서 부하들의 폭동을 피해 프랑스 군에 항복한 전력이 이미 있었습니다.




(리히텐슈타인 공 요한 1세입니다.  그는 비록 나폴레옹의 적이었으나, 나폴레옹의 존경을 받는 점잖고 용감한 왕족이었고, 그의 조국인 리히텐슈타인은 원래 주권국이 아니었으나, 나폴레옹이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시켜버리는 바람에 주권국인 공국 (principality)가 되었습니다.  그는 정치가로서도 진보적인 정책을 많이 펼쳤다고 합니다.  이 울름에서 나폴레옹에게 항복한 리히텐슈타인 공은 곧바로 정식 포로 교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곧이어 벌어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도 합법적으로 참전할 수 있었습니다.)



10월 16일, 마크는 리히텐슈타인 (Johann I Joseph, Prince of Liechtenstein) 공을 프랑스 측 진영에 보내 항복 조건을 협의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관례에 따라 눈가리개를 한 채 말을 타고 프랑스 군 본부 깊숙이 들어온 리히텐슈타인 공이 눈가리개를 풀자, 그 앞에 서 있는 인물은 바로 나폴레옹이었습니다.  이는 리히텐슈타인 공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 군에서는 나폴레옹이 울름 현장에까지 직접 온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리히텐슈타인 공은 울름 수비대 전원이 무기를 들고 오스트리아로 귀환한다는 조건으로 울름을 비워 주는 선에서 항복 조건을 마무리 지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여기서 천부적인 협상가의 수완을 발휘합니다.  그가 내건 항복 조건은 장교들은 정식 포로 교환 이전에는 프랑스 군과의 싸움에 참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오스트리아로 돌아가되, 사병들은 전원 전쟁 포로로서 프랑스로 후송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런 논리로 이런 가혹한 조건을 강요했습니다.

- 오스트리아 군에게는 희망이 없다.  러시아 군의 구원을 기대하는가 ?  쿠투조프의 병력은 아직 보헤미아에 있다.
- 어차피 8일 후면 울름과 그 속의 오스트리아 군 전원은 내 차지가 된다.  내가 8일을 벌자고 그런 양보를 할 것 같은가 ?
- 이전의 사례로 볼 때 오스트리아 군의 약속은 신뢰할 수 없으므로 사병들은 풀어 줄 수 없다.  마크 본인은 사병들의 전투 불참가 약속을 지킬 권한도 없지 않은가 ?
- 오스트리아 왕족인 페르디난트 대공이 이 자리에서 약속한다면 혹시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이미 도주하고 없지 않나 ?




(울름의 항복 장면은 여러 화가가 그렸습니다만,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이 그림입니다.  Charles_Thévenin 작입니다.  울름 시의 모습은 실제보다 더 웅장하게 그려졌습니다.)



이런 조건을 들고 울름으로 되돌아간 리히텐슈타인 공의 심정은 착잡했을 것입니다.  바로 5년 전, 마렝고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둔 나폴레옹과 거기서 패배한 오스트라아 군 사령관 멜라스 사이에서 평화 협정안을 들고 왔다갔다 했던 사람이 바로 본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더 가혹한 조건의 항복 심부름을 다니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의외로 마크 본인의 결심은 빨랐습니다.  리히텐슈타인이 들고 간 조건은 10월 25일 이전에 항복하라는 것이었으나, 마크는 그냥 10월 20일 항복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때 마크가 나폴레옹에게 보낸 항복 서신의 내용은 '다른 장군에게라면 이런 조건의 항복은 하지 않겠지만, 위명이 자자하신 나폴레옹 황제에게는 명예롭게 굴복하겠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별 고민도 없이 항복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나중에 오스트리아에서는 마크가 나폴레옹과 사전에 내통한 것이 아니냐 라는 의심까지 하게 될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과 프랑스 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스트리아 군이 울름에서 행진해 나와 무기를 내려놓고 있습니다.)



바로 그 다음날인 10월 21일, 나폴레옹의 참모장 베르티에가 울름 시내에 들어가 마크와 항복 문서에 서명을 했고, 이어서 오스트리아 군의 항복 사열이 시작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군이 줄줄이 행진하여 나와 프랑스 군 앞에 무기를 쌓아놓는 것을 흐믓하게 지켜 보았습니다.  이어서 마크를 포함한 오스트리아 장군들 10여 명이 나폴레옹 앞에 인솔되어 오자, 그는 승자의 여유를 가지고 그들의 패배를 위로하는 아량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자신도 시리아의 아크레에서 패전을 맛보았다면서, 이 날의 불운의 원인은 여러분이 아니라 영국의 황금과 증오에 오도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에게 있다는 식으로 실컷 일방적인 연설을 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장군들 입장에서는 아무리 고까운 소리라도 그저 입을 다물고 듣는 수 밖에 없었겠지요.




(실제로 나폴레옹은 패자에게는 꽤 관대한 편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프랑스로 후송되는 오스트리아 군에게 나폴레옹이 인사를 하는 장면입니다.)



부하 병사들을 죄다 팔아먹고 자신만 몸 편히 본국으로 돌아간 마크는 나폴레옹의 떠벌떠벌 자랑질을 견딘 것 외에는 별다른 고생없이 자신의 저택에서 더운 물로 목욕하고 푹 쉴 수 있었을까요 ?  그게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항복했던 오스트리아 사령관이 한둘이 아니었건만, 유독 마크의 경우는 본국 정부의 미움을 크게 받았습니다.  항복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작전 지휘가 워낙 어이없기도 했고, 또 애초에 울름에서 너무 쉽게 항복해버린 것도 문제가 되었습니다만, 특히 왕족인 페르디난트 대공과 지휘권을 놓고 마찰을 빚은 것이 그의 입지를 크게 갉아 먹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나폴레옹으로부터 뇌물이라도 먹은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고, 결국 군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싸움에 졌다고 사령관을 잡아 가두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라며 오스트리아 정부에게 마크를 두둔해 주었으나, 적의 변호를 받는 마크의 입장은 더욱 난처해질 뿐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2년 동안이나 옥살이를 하다가, 자신이 군부 핵심에서 밀어내는데 일조했던 인물인 카를 대공의 변호 덕분에 겨우 풀려났습니다.  물론 더 이상 그의 군 경력은 있을 수 없었지요.

마크의 불행에는 사실 세상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진흙과 굶주림 속에서 강행군 하느라 고생했던 프랑스 군 병사들의 마음도 모두 이토록 완벽한 승리를 이토록 적은 희생으로 만들어낸 영웅 나폴레옹에 대한 찬탄으로 가득했습니다.  고대 로마의 어떤 장군은 부하 병사들을 꾸짖을 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하지요.  "너희들은 행군 때는 손을 쓰고 전투에서는 발을 쓰는구나."  즉, 행군할 때는 근처 주민들을 약탈하느라 꾸물거리고, 전투 때는 걸음아 날살려랴 하며 도망치기 바쁘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나폴레옹은 '진정한 전투란 발로 하는 것', 즉 전략적인 기동이 승패의 핵심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여주었습니다.  유혈이 낭자한 전투 끝에 승리하는 것은 멋있어 보일지는 몰라도 가치있는 승리는 아닌 것이지요.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싸우기 전에 승리를 확정짓는 상급 작전이었습니다.  다만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가 고대 로마 장군이 비난했던, '행군 때 손을 쓰는' 버릇도 그대로 가져간 것은 그리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런 식량의 현지 조달 (live off land) 은 나폴레옹 전술의 핵심이자, 나폴레옹의 국제적 인기를 실추시킨 주범이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큰 우회 기동을 통해 울름을 포위하고 마크의 주력 부대를 격파한 것은 훗날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서부 프랑스를 공략하기 위해 세웠던 슐리펜 (Schlieffen) 작전의 모체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계획안을 만든 슐리펜 장군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사망했는데, 죽을 때도 '우익을 더 강화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감탄한 병사들을 모아 놓고 일장 연설을 했습니다.  그때 그는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함과 동시에, 병사들의 자존심을 건드릴 떡밥 하나를 던졌습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전투에는 특히 우리 프랑스 보병의 명예가 걸려있다.  이제 우리는 스위스와 네덜란드에서 이미 결정된 바 있는 질문에 대해서 또 하나의 대답을 보게 될 것이다.  즉, 프랑스 보병과 러시아 보병 중 어느 쪽이 유럽 제1의 군대인가 하는 것이다 !"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러시아 군의 모습입니다.  솔직히 뭐 다른 나라 군대와의 차이점을 모르겠군요.)



즉, 나폴레옹은 프랑스 군이 아니라 러시아 군이 유럽 제1의 군대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울름 작전에서 너무 손쉽게 승리한 병사들의 자만심을 견제함과 동시에 프랑스 군이 유럽 제1이라는 명예를 놓고 더욱 투지를 불태울 수 있도록 부추긴 것입니다.  사실 나폴레옹의 연설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이미 제1, 2차 동맹 전쟁에서 프랑스 군은 러시아 군과 총검을 맞대본 경험이 있었습니다.  특히 제2차 동맹 전쟁에서 수보로프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 군은 그야말로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  오스트리아 군이 러시아 군을 거의 배신하다시피 저버리지 않았다면 마세나가 스위스에서 과연 이길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지요.  나폴레옹이 직접 러시아 군과 대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나폴레옹은 러시아에 대해서 각별한 주의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 나폴레옹은 운명의 1812년 훨씬 이전부터 문화적 후진국이자 변방으로 멸시되던 러시아에 대해 관심이 많았을까요 ?   다음 편에서는 그 이야기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