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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동구의 거인, 나폴레옹 앞에 서다 - 러시아의 짧은 역사

by nasica-old 2013.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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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울름에서 대승을 거둔 나폴레옹이 프랑스 병사들 앞에서 '유럽 제1 보병의 자리를 두고 러시아와 싸우자' 라고 연설하는 장면을 보셨습니다.  당시 유럽의 강대국이라고 하면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정도였습니다.  러시아는 어떤 평가를 받고 있었을까요 ?  분명히 러시아는 군사적으로 강대국이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유럽 사회에서 다소 천대받고 멸시되는 후진국 취급을 받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왜 나폴레옹은 이런 러시아를 유럽 제1의 자리를 놓고 프랑스와 대결할 라이벌로 치켜 세웠을까요 ?  러시아의 잠재력에 대해서 보시려면 먼저 러시아의 역사에 대해 좀 보셔야 합니다.

러시아의 역사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다소 늦게 시작한 셈입니다.  러시아 내륙으로 강을 타고 들어온 바이킹의 후예 루리크(Rurik)가 서기 860년 경 노브고로드 (Novgorod) 에서 지배자로 선출된 것이 키에프 루시 (Kievan Rus)의 시초라고 합니다.  이들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동로마 제국 사이의 무역을 중계하며 나름 번창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그다지 발전된 사회를 이루지는 못하여 그저 몇 개의 공국 (principalities)을 형성하는데 그쳤고, 대단한 왕국(kingdom)을 세우지는 못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동로마 제국의 동방정교를 받아들였지요.  문자도 동로마 제국에서 전해준 그리스 문자를 기반으로 한 키릴 문자를 썼습니다.




(러시아 지역의 최고 도시는 수즈달 (Suzdal) 이었습니다.  몽골군이 휩쓸기 전까지는요...)



(말이 필요없는 징기스칸과 그의 후예들의 위엄...)



이런 러시아 평원의 공국들은 13세기 초에 날벼락을 맞고 산산조각이 나버립니다.  바로 징기스칸의 손자인 바투(Batu)가 이끄는 서방 원정의 직격탄을 맞은 것이지요.   서방 유럽에 비해 미개한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발전된 도시라고 있었던 블라디미르(Vladimir) 및 키에프는 이때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립니다.  이런 원정을 처음 겪어보는 러시아 인들의 충격은 대단했습니다만, 그래도 어디서든 사람은 먹고 산다고, 이들은 몽골 군의 1차 충격파가 지나간 이후 이 새로운 정복자들의 비위를 맞추어 가며 그런대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몽골인들의 압제와 수탈은 심각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나오는 다루가치(Darugachi)가 러시아에서도 행패를 부렸거든요. 



(러시아 엘프녀를 공물로 바치거라 !!!  - 러시아 마을을 돌며 조공을 요구하는 몽골 다루가치의 위엄 - 하악하악)




(어느 흔한 러시아 대공의 최후입니다.  키에프 대공이자 체르니고프 대공이었던 미하일(Michael of Chernigov)은 몽골 군에게 탈탈 털린 이후 떠돌이 생활을 하다, 결국 바투에게 항복하기로 하고 몽골 족 진영에 찾아갑니다.  그는 거기서 바투와 그의 신하들, 그리고 징기스칸의 우상에게 절을 하라는 요구를 받지요.  미하일은 그에 대해 바투는 물론이고 그의 신하들에게도 오체투지하여 절을 하겠으나, 자기는 기독교인이므로 우상에게는 절을 할 수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그의 기개에 대해 바투는 '별 듣보잡이 건방지구나, 그냥 죽여서 개 먹이로 던져줘라'라고 명령했고, 결국 미하일 대공은 몽골의 침공에 저항한 성인의 반열에 오르는 참극을 겪어야 했습니다.)


기존 러시아 인들의 기존 중심지였던 키에프나 블라디미르가 몰락한 이후, 몽골 족의 직접 지배권 바깥 쪽에 있던 북쪽 변방의 모스크바(Moscow)가 새로운 러시아인의 세력으로 떠오른 것이 특기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모스크바도 몽골 족이 세운 킵차크 한국 및 거기서 갈라져 나온 이런저런 칸국 (통칭 Golden Horde)에게 꼬박꼬박 공물을 바치며 굽신거려야 했습니다. 




(통칭 Golden Horde로 불렸던, 칩챠크 한국 및 그 후속 칸국들의 대략적인 세력권입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서방은 서방대로 이 야만인이나 다름없는 러시아인들을 침공해왔습니다.  북구의 강국인 스웨덴과 주로 에스토니아 인으로 구성된 리보니아 기사단 (Livonian Knights)이 몽골 침공 직후 러시아를 침공했는데, 당시 노브고로드 대공인 알렉산더 네프스키 (Alexander Nevsky)가 네바 (Neva) 강 전투에서 스웨덴을,  페이프시-피프카 (Peipsi-Pihkva) 호수 전투에서 리보니아 기사단을 무찔러 러시아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를 지킨 이 알렉산더 네프스키도 몽골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 신세여서, 몽골에게 조공을 바치는 신세에 불과했습니다.





(이때의 전투를 기초로 만들어진 영화가 유명한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Sergei Eisenstein) 감독의 알렉산더 네프스키 (1938년 작)입니다.  이 영화 초반부에 보면 알렉산더가 초원에서 왠 중국 관복을 입은 동양인과 만나서 씨부렁거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당연히 이 동양인 관료는 몽골의 사자입니다.  다만 아이젠슈타인 감독도 당시 고증을 제대로 못했는지 몽골의 사신이라기 보다는 진짜 명나라나 조선의 사신으로 보이더군요.) 


하지만 화무백일홍이라고, 결국 몽골-투르크 칸국도 내부 분열을 일으키면서 점차 약해졌습니다.  반면 그야말로 작은 변방 마을에 불과했던 모스크바는 희대의 영웅 이반 3세 (Ivan III Vasilyevich, 이반 대제)의 지휘 하에, 노브고로드를 복속시키고 강국으로서의 토대를 마련합니다.  이렇게 성공을 거둔 이반 3세는 1476년, 여태까지 해오던 것처럼 조공을 바치라는 그레이트 호르드(Great Horde, 타타르)의 아크맛 칸 (Akhmat Khan)의 요구를 거절해 버립니다.  이에 타타르는 모스크바를 침공하려 했지만, 간이 부은 이반 3세도 군대를 동원하여 타타르 군과 우그라(Ugra) 강을 사이에 끼고 대치했습니다.  결국 타타르는 강을 넘지 못하고 철수했습니다.  이것이 1480년의 일인데, 이것이 러시아가 몽골 칸국의 족쇄에서 벗어난 계기가 됩니다.  사실 이때 이반 3세가 감히 타타르에게 대항하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몽골계 칸국들의 분열 덕분이었습니다.  이미 킵차크 한국은 분해되어 블루 호르드니 그레이트 호르드니 하는 것들로 분열되어 있었고, 특히 당시 이반 3세는 그 중 가장 강성했던 흑해 연안의 크리미아 칸국(Crimean Khanate)와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아크맛 칸은 노가이 칸국의 공격을 받고 죽었고, 타타르는 크리미아 칸국에게 흡수되어 버립니다.  나중에 러시아는 18세기 후반까지 이 크리미아 칸국과 기나긴 투쟁을 벌이게 되지요.




(우그라 강에서 타타르와 대치 중인 이반 3세의 군대)



(조공을 바치라는 타타르의 사신을 내치는 이반 3세의 위엄 또는 만용)



이렇게 힘겨운 중세 시대를 보낸 러시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표트르 대제 (Peter I or Pyotr Alexeyevich) 였습니다.  17세기 초반 이후 러시아의 차르로 군림한 로마노프 가문의 왕자였던 그는 복잡한 가정사 때문에 순조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고 이복 누이인 소피아와의 힘겨운 권력 투쟁을 거쳐 비로소 차르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소년 시절을 음침한 크레믈린 왕궁이 아닌 외국인 거주 구역에서 보냄으로써, 러시아인들의 뿌리 깊은 외국 혐오증에서 걸리지 않고 유럽 세계에 대해 개방적 사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표트르 1세, 보통 표트르 대제로 불리는 양반입니다.)



그는 러시아의 미래가 서방, 즉 유럽에 있다고 보고, 17세기 말 20대 시절을 신분을 감추고 네덜란드나 영국 등에서 보냈습니다.  이때 그는 조선소에서 목공으로 직접 톱과 도끼를 쥐기도 하고, 박물관, 식물원 등을 방문했으며, 여러 종류의 공장을 둘러보고 많은 관리 및 민간인들과 교류하며 지냈습니다.  독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는 포병 훈련을 받고 수료증을 받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18개월 동안 유럽을 주유하고 잔뜩 서양물이 들어서 돌아온 표트르 1세는 러시아를 유럽화 시키는 것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턱수염을 깎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는 성직자와 농부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턱수염을 깎도록 했고, 또 복식도 길고 헐렁한 러시아 전통 복장을 버리고 '헝가리 옷이나 독일 옷'을 입도록 강요했습니다.  심지어 공공장소에 검열관을 두고, 이 규정을 어긴 자의 수염이나 옷을 난도질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변발이건 상투건 수염이건, 아무튼 남자들은 뭔가 깎는 것을 무척 싫어들 합니다.  당시 표트르 대제의 면도 명령에 항의하는 귀족의 모습입니다.)



물론 표트르 1세는 단지 겉멋이 들어서 이런 러시아 전통을 말살시키려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북방 전쟁을 통해 스웨덴을 꺾고 발트 해로 나가는 항구를 손에 넣은 뒤, 거기에 상트 페체르부르그 (Sankt-Peterburg)를 건설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러시아가 유럽 국가들과 교류하며 선진 문물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다로 나가는 길을 손에 넣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가 가진 항구라고는 아르행켈스크 (Arkhangelsk, 영어로는 대천사를 뜻하는 Archangle ) 뿐이었는데, 이는 일년에 불과 6개월 정도만 쓸 수 있었고 나머지 기간에는 얼음이 꽁꽁 얼어붙는 북쪽 백해에 붙은 항구였습니다.  그는 아직 스웨덴과의 북방 전쟁이 끝나기 한참 전인 1703년, 이제 막 점령한 땅, 즉 네바 (Neva) 강이 핀란드 만으로 흘러드는 곳에 상트 페체르부르그라는 이름부터 유럽스러운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부르그라는 말이 독일어로 성벽을 뜻한다지요 ?)  통나무로 만든 투박한 도시였던 모스크바를 대신하여, 표트르 1세가 영국과 암스테르담에서 보고 감탄한 석조 건물들로 이루어진 이 새 도시는 러시아의 새로운 수도가 됩니다.  표트르 1세는 이 도시를 '유럽으로 열린 창문'이라고 불렀지요.




(네바 강 하구에 상트 페체르부르그 건설을 구상 중인 표트르 대제입니다.)



(상트 페체르부르그에 위치한 제정 러시아의 해군성 건물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스웨덴 및 오스만 투르크라는 두 강적에 맞서기 위해, 1705년 대대적인 병역 제도 개혁을 시행합니다.  그는 여태까지 그때그때 무계획적으로 이루어졌던 모병제를 폐지하고, 모든 계층을 대상으로 국민 징병제를 실시했습니다.  당시 군대는 일반 자유민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으나, 표트르 1세는 자유 농인, 사무원들은 물론이고 사실상 귀족들의 사유 노예나 다름없던 농노들까지도 군대에 징집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장교는 귀족층만이 될 수 있었으나, 이제는 반대로 전쟁에서 공을 세워 장교가 되면 자동적으로 귀족이 되도록 했습니다.  이는 국민 개병제를 유럽 최초로 채택한 프랑스 혁명군보다도 무려 90년이나 앞서 이루어진 개혁이었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이미 발트 해에서 저 멀리 태평양까지 이르는 광활한 대제국이었으므로, 이런 국민 징병제는 (질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양적으로는 유럽 최강의 군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런 대규모 징집제는 필연적으로 막대한 세금을 필요로 했습니다.  당연히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경작을 하지 않고 땅을 놀리거나 몇개의 농노 가족들을 작은 오두막집 한채에 몰아넣고 한가구라고 속이는 등의 술수를 부렸으나, 세금 제도를 개편하여 그런 탈법을 막고 국고를 충실히 했습니다.  당연히 이런 개혁 정책은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표트르 1세는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한 전제 정치로 이를 억눌렀습니다.  물론 이런 개혁 정책이 국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농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가령 페체르부르그를 건설하는데 급료도 없이 동원되었던 농노들 수천명이 희생되어야 했습니다.




(아들인 알렉세이를 문초하는 표트르 대제입니다.  무슨 아빠 아들 사이가 저런가요 ?)



키가 2m에 가까웠던 천하장사 표트르 1세는 네바 강에서 보트가 뒤집혀 병사들이 물에 빠지자, 그를 구해내기 위해 52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직접 얼어붙은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그로 인해 얻은 병으로 결국 1725년에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후, 러시아는 다시 나약한 차르 및 여황제들의 지배를 받다가, 1762년 마침내 대제라고 불릴 2번째 군주를 맞이하게 됩니다.  바로 예카테리나 2세 (Yekaterina Alexeevna, Catherine II, Catherine the Great) 였습니다.  당시에는 이미 로마노프 왕가의 남성 직계는 표트르 대제의 아들이자 아버지 표트르 대제의 미움을 받아 처형된 알렉세이 (Alexei Petrovich) 황태자의 아들인 표트르 2세가 사망할 때 끊긴 상태였습니다. 




(표트르 3세의 초상입니다.  일부러 초라하게 그린 것 같은 이 초상화처럼, 그는 와이프에게 뼈 속까지 탈탈 털리고 죽어야 했습니다.)



결국 로마노프 가의 여성 직계를 통해 황위가 이어지다가, 1762년에는 로마노프 가문의 어머니를 둔 덕분에 홀슈타인-고토르프 (Holstein-Gottorp) 공작 가문의 표트르 3세가 차르로 등극했습니다.  그러나 이 표트르 3세는 태어난 곳도 독일의 킬 (Kiel) 항구일 정도로 러시아에 대한 유대 관계가 별로 없었고, 특히 친-프로이센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과 7년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는데, 피터 3세의 이모이자 전임 여황인 엘리자베타 (Elizaveta Petrovna)는 나름 선전하여 프리드리히 대왕을 항복 직전까지 몰고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하필 이때 엘리자베타 여황이 사망했었지요.  1762년 1월 프리드리히 대왕이 브룬스윅의 페르디난트 대공 (Prince Ferdinand of Brunswick) 에게 쓴 편지를 보면, "하늘이 개이고 있다.  전우여, 용기를 내게.  엄청난 희소식을 받았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소식은 바로 엘리자베타의 죽음이었지요.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힘을 합해 프리드리히 대왕을 골로 보낼 뻔 했던 여걸 엘리자베타 여황입니다.)



표트르 3세에게 프리드리히 대왕은 궁지에 몰린 적이 아니라 소년 시절부터의 영웅이었고, 프로이센은 적국이라기보다는 고향 옆동네였습니다.  그래서인지 표트르 3세는 프리드리히에게 항복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강화를 요청했고, 이로 인해 그의 인기는 등극 초기부터 바닥을 기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무척이나 철이 없고 무책임한 인물이었습니다.  친-프로이센 정책이 지나치다 못해 러시아 군복을 프로이센 군복을 흉내낸 것이 틀림없는 스타일로 고치게 하는 등, 군대의 지지를 잃는 행동을 많이 했습니다. 게다가 원래 독일에서 루터파 개신교 신자였던 만큼, 비록 차르가 되기 위해 겉만 개종을 했으나 마음 속은 여전히 루터파 신자였는지, 표트르 대제조차 건드리지 않았던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들의 수염을 깎으라는 명령을 내렸고, 더 나아가 독일 루터파 목사들의 복장을 하라고 강요했습니다. 




(홀슈타인 주의 위치는 저 지도 아래쪽의 노란색 구역입니다.  독일의 주요 군항이자 표트르 3세의 출생지인 키일도 저 곳 소속입니다.  알고 보면 엘리자베타 이후 러시아의 황통을 저 곳이 배출한 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인들의 마음은 표트르 3세의 부인인 예카테리나였습니다.  실은 이 예카테리나도 외국인, 그러니까 독일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조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테 (Sophie Friederike Auguste) 로서, 안할트-체르프스트 (Anhalt-Zerbst)라는 변변찮은 작은 독일 공국의 공녀였습니다.  그녀는 어머니가 홀슈타인-고토르프 (Holstein-Gottorp) 공작 가문 출신이라서 역시 엘리자베타 여황과 먼 친척 관계였습니다.  알고보면 당시 러시아의 황위는 모두 이 작은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령 출신의 남녀가 차지한 것이지요.  그녀와 그녀 어머니가 표트르 3세의 신부 후보로서 처음 러시아에 소박하게 들어왔을 때, 러시아 황실에서는 군악대와 호위 기병대를 보내 이들을 맞이했는데, 이때 그녀의 어머니는 군악대의 영접을 받은 것이 난생 처음이라고 감격할 정도였습니다.




(젊은 시절, 조피 아우구스테 시절의 예카테리나 2세입니다.)



조피, 그러니까 예카테리나는 남편인 표트르 3세와는 달리, 러시아에 적응하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습니다.  시어머니뻘이 되는 엘리자베타 여황에게 잘 보이기 위해 즉각 러시아어 공부에 들어가서 불과 몇개월만에 엘리자베타 여황에게 러시아어로 편지를 써보낼 정도였습니다.  물론 이 편지는 그녀의 가정교사가 대신 써준 것을 베낀 것 뿐이었지만요.  (그나마 이 가정교사와는 프랑스어로 대화를 했습니다.)  또 자발적으로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여, 병에 걸렸을 때도 루터파 목사 대신 러시아 정교회 신부를 불러달라고 부탁하는 감동어린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이런 정성 덕분에, 남편과 마찬가지로 독일 출신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외국=미국인 것처럼, 러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까지도 외국=독일이었다고 합니다) 남편의 인기가 날이 갈수록 새로운 바닥을 굴착했던 반면, 예카테리나의 인기는 그야말로 구국의 대안으로서 상종가를 치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와이프와의 잠자리도 거부하고 침대에서 장난감 밀납 병정을 늘어놓고 병정 놀이만 하던 남편과 사이가 좋을 리 없었던 예카테리나는 이런 상황에서 남편이 자신을 수녀원에 유폐시키고 정부 엘리자베타 보론초프와 결혼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얌전히 당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1762년 6월, 그녀는 자신의 애인인 그리고리 오를로프 (Grigory Grigoryevich Orlov) 가 이끄는 근위 연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당연히 누구에게서도 지지를 받지 못하던 표트르 3세는 즉각 체포되어 폐위되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 목이 졸려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예카테리나의 정부였던 오를로프입니다.  그는 예카테리나의 첫번째 정부도 아니었고, 마지막 정부도 아니었습니다.  예카테리나와의 결혼을 그토록 바랐던 그는, 예카테리나가 결혼까지는 거부하자, 깨끗이 갈라섭니다.  당시에도 쿨한 남녀는 있기 마련이지요.)



이제 여황 예카테리나 2세가 된 그녀는 재위 기간 중에 러시아의 국토를 크게 넓혔을 뿐만 아니라, 또한 유럽 세계에 러시아의 존재감을 확실히 알렸습니다.  일단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오스트리아 및 프로이센과 3등분하여 서쪽으로의 영토를 크게 넓혔고, 남쪽으로는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으로 크리미아 반도를 포함한 흑해 연안 지방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런 영토 정복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유럽의 경찰로서의 러시아의 존재감을 유럽 전역에 알렸다는 것입니다.  이미 러시아는 예카테리나의 시어머니인 엘리자베타 재위 기간 중에 숙적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전했었습니다.  예카테리나는 유럽 대륙에서의 힘의 균형을 가장 중요시했습니다.  그로 인해, 1778~1779년의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 때는 오히려 프로이센의 편을 들어 중재자 역할을 했습니다.  사실 이 전쟁은 실제 전투보다도 동원된 병력들의 열악한 식량 조달 문제로 많은 아사자와 병사자를 내는 바람에 '감자 전쟁'이라는 조롱조의 이름을 얻었는데, 예카테리나는 '5만명의 러시아 군을 파병하겠다'라는 으름장만으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는 위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그림은 오스트리아 및 프랑스와 연합하여 영국에 맞서는 예카테리나 2세를 풍자하고 있습니다.)



특히 영국과는 미묘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1766년에 영국과는 무역 협정을 맺고 우호 관계를 유지했으나, 결코 군사 동맹을 맺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7년 전쟁에서 사실상 승리를 거머쥔 것이나 다름없었던 영국의 실력을, 유럽 대륙의 힘의 균형을 깨뜨릴 잠재적 위협으로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것도 원인이 되어, 나중에 미국 독립 전쟁 기간 중에 벌어진 영국 해군의 무차별적인 봉쇄와 검문에 맞서 예카테리나는 1780년 '무장 중립 동맹'을 결성하여 영국의 제해권에 도전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나중에 그의 아들인 파벨 1세에 의해 제2차 무장 중립 동맹으로 연결되었고, 결국 제1차 코펜하겐 전투로 이어집니다.  (이에 대해서는 '중립도 힘이 있어야 한다 - 발트해의 포성' http://blog.daum.net/nasica/6862507 편을 참조하십시요.)




(1762년 이미 어느 정도 후덕해진 모습의 예카테리나 2세입니다.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은 근위 연대의 군복입니다.)



이런 외치 외에도 예카테리나는 서유럽의 계몽사상의 수입에 열중했습니다.  그녀는 발전된 서유럽의 사상과 법률,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러시아를 더욱 부강한 나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디드로, 볼테르와 같은 당대의 위대한 사상가를 친구로 부르며 서신을 주고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진보적인 사상을 반영한 훈령을 제정하여 서구 사상가들의 찬양을 받았습니다.  또 많은 기숙 학교를 세워 2만명의 학생들을 교육시켰고, 예술계와 출판계에 많은 후원을 하여 장려했습니다. 




(백과전서를 만든 디드로입니다.  그는 예카테리나의 초청으로 상트 페체르부르그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예카테리나의 전제 정치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통치에는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예카테리나의 통치는 어디까지나 세련된 서구 사상으로 페인트칠을 한 전제 정치에 불과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좀더 이야기되겠습니다만, 러시아의 기본 사회 경제 제도는 농노제였는데, 그녀는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전통적인 농노의 권리인, 황제에게 직접 청원할 권리를 폐지하여 오히려 더 악화시켰지요.  뿐만 아니라, 스웨덴 및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으로 흑해와 발트 해의 영토를 얻은 대신, 그 전쟁 비용을 고스란히 부담해야 했던 국민들의 생활은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게다가 진보적인 사상을 반영한 훈령들은 러시아의 성직자와 귀족들에 의해 대부분의 조항이 삭제된 채, 잊혀져 버렸을 뿐이었지요.  실제로 그녀의 재위 기간 중 자유민인 카자흐의 반란이 줄을 이었습니다.  가령 푸쉬킨의 명작 '대위의 딸'의 배경이 되는 푸가쵸프의 반란 (1773~1775)도 이 시기에 일어난 사건으로서, 실제로 '대위의 딸' 소설 속에서도 여주인공이 우연히 공원에서 평복 차림의 예카테리나 2세를 만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푸가쵸프의 모습입니다.  제정 러시아에서는 많은 농민 반란이 있었으나, 정작 농노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고, 반란의 주체는 항상 자유민인 카자흐였다는 것이 에러이긴 합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예카테리나 때부터 러시아 문학의 싹이 튼 것은 좋았으나, 그 속에서 정부 비판이 시작되자, 가차없이 검열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결정적으로,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발생하자, 그 여파가 러시아에도 미칠 것을 겁내어 진보 사상가들을 잔혹하게 탄압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도 세월에는 이기지 못하여, 1796년 뇌졸증으로 사망했습니다.  결국 예카테리나의 러시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서구 사상을 수입했고, 역설적으로 그만큼 진보 사상을 탄압했습니다.  또 그만큼 혁명의 씨앗을 내부 깊은 곳에 품게 되었지요. 




(가슴에 성 요한 기사단, 즉 말타 기사단의 십자가 마크를 달고 있는 성 요한 기사단장이자 러시아의 차르인 파벨 1세입니다.)



이런 모순적인 전제 정치 체제를 가지고 '유럽 대륙에서의 힘의 균형자' 역할을 하려 들었던 러시아의 역할은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인 파벨 1세 (Pavel Petrovich, Paul I)에 의해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사실 이 파벨 1세는 예카테리나와 표트르 3세 사이의 자식이 아니라, 예카테리나와 그 첫번째 정부였던 살티코프 (Sergei Saltykov)라는 귀족 사이에서 난 사생아였습니다.  어쨌거나 러시아의 차르가 된 그는 위대한 어머니의 유지를 이어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나름 균형 감각을 가지고 격동의 시기를 헤쳐 나갔습니다.  지중해로의 진출을 위해 제2차 대불 동맹에 뛰어들어 프랑스와 이탈리아 및 스위스에서 격전을 벌이기도 했지요.  이때 이름을 떨친 명장이 바로 희대의 명장 수보로프 (Alexander Suvorov) 였습니다.  그러다가 말타 섬의 지배권을 놓고 영국과 사이가 벌어지자, 제2차 무장 중립 동맹을 결성하여 넬슨 제독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와 대치하는 등, 다소 혼란스러운 외교 행보를 보였습니다.  심지어 러시아가 자랑하는 코작 기병들을 인도로 보내 인도를 영국으로부터 빼앗겠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상당히 황당한 계획같지만, 정작 영국은 이 계획을 무척 두려워하여 페르시아와 여러 차례에 걸쳐 협정을 맺고 중앙 아시아를 통해 러시아가 남하하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일관성 없는 외교 노선이 '힘의 균형자'로서의 러시아의 입지를 더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긴 한 셈입니다.




(러시아 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는 수보로프 장군.  이것은 나폴레옹의 알프스 등정보다도 앞선 일이었습니다.  다만 이것이 진격이 아니라 후퇴길이었다는 것은 다소 에러...)



난데없이 말타 기사단장 직위를 맡기도 하고, 또 나폴레옹과 적대시했다가 다시 그와 동맹을 맺는 등 대외적으로는 무척 괴퍅한 이미지로 비추어졌던 파벨 1세의 국내 정치는 사실 바람직한 편이었습니다.  그는 농노들과 자유 농민들의 처우 개선을 추진하고 부패한 국가 재정 운영을 바로 잡으려 하는 등, 개혁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올바른 정치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노력은 당시 러시아 귀족들의 이익에 반대되는 것이었지요.  넬슨의 영국 함대가 덴마크와 러시아를 때려 잡겠다고 발트 해를 향해 항해하고 있던 1801년 3월 12일 밤, 파벨 1세는 그의 침실까지 쳐들어온 술에 취한 귀족 반란자들의 칼에 맞아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방금 파벨 1세를 죽이고 아직 그의 피가 손에 묻은 반란자들에 의해 옹립된 그의 아들 알렉상드르 1세 (Aleksandr I Pavlovich) 였습니다.  당연히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이 암살 음모의 주동자 중 한 명이 알렉상드르 본인이라고들 생각하게 되었고 그 의심은 아직까지도 유효합니다.




(어쨌거나 알렉상드르 1세는 19세기 초반 러시아의 힘을 유럽 만방에 알린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우라 ~! )



알렉상드르 1세는 즉각 아버지의 정책을 반대로 뒤집어 영국과 화해했을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및 프러시아와도 우호 협정을 맺었습니다.  그는 매우 감상적인 인물로서, 프러시아와의 우호 협정은 사실 정책 때문이라기 보다는 프러시아 국왕 빌헬름 3세 (Frederick William III) 및 그의 아름다운 왕비 루이제 (Louise of Mecklenburg-Strelitz) 에 대한 개인적 호감과 우정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러시아 귀족들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프랑스 문화와 사상에 대한 존경을 감추지 않아서, 당시 제1통령이던 나폴레옹에 대해서도 무척 호감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종신통령이 되자, 나폴레옹에 대한 환상이 깨져 버렸고, 알렉상드르는 나폴레옹이 진정한 영웅이 아니라 희대의 독재자에 불과하다고 입장을 180도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나폴레옹이 저지른 앙기엥 공작에 대한 '사법 살인'이었습니다.  (나폴레옹 - 호헨린덴 전투 http://blog.daum.net/nasica/6862505 참조)  이 사건을 계기로 알렉상드르는 나폴레옹과는 적대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일국의 황제가 외교 관계를 치밀한 이익 계산이 아닌, 나름 낭만적인 기사도 정신으로 맺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었을까요 ?




(러시아 군의 실력은 과연 ?  --  Substantial !!!)


사실 그런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엇습니다.  러시아는 알렉상드르의 낭만적 패기를 뒷받침해줄 만한 실력을 갖춘 나라였을까요 ?  실제로 갖춘 나라였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아직도 문화적으로는 후진국에 불과했고, 본격적인 서구화가 진행된지는 불과 100년 정도에 불과한 상태였습니다.  러시아 귀족들의 자녀들은 당연히 프랑스 출신의 가정 교사가 가르쳤고, 러시아 귀족들은 외국인과 거침없이 프랑스어로 대화가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들끼리도 프랑스어로 대화를 할 정도였습니다.  전체 국민의 약 50% 가까이가 노예나 다름없는 농노였는데, 일부 산업화된 지역의 공장들도 직공들의 절반 정도는 이런 농노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러시아 군의 기초를 이루었습니다.  당연히 병사 대부분은 문맹이었고, 소위 똑똑한 친구들은 아니었습니다.  공업 생산량도 별로 대단치 않았습니다.




(1800년대 초반의 유럽 각국의 인구 구성표입니다.  정확한 자료는 아닙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광활한 영토와 그에 따르는 많은 인구를 자랑했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프랑스의 인구가 당시 약 3800만 정도로서, 다른 유럽 국가들을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는 그보다 약간 더 많은 4100만 수준이었습니다.  물론 프랑스는 거의 전체 국토가 기름진 축복받은 땅이라서 상대적으로 좁은 영토에서도 그런 인구를 가질 수 있었던 것에 반해, 러시아는 광활한 지역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는 점이 달랐지요.   하지만 당시 군사 기술은 첨단 무기보다는 좀더 많은 총검 숫자에 의존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더 많은 인구는 곧 군사 강국의 잠재력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병사들의 대부분이 문맹이라는 점은 러시아 군의 강인함에 조금도 마이너스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건 어차피 영국군이나 오스트리아군도 마찬가지였거든요.  오히려 긴 세월 동안 귀족들의 착취를 묵묵히 견디며 살아온 농노 병사들의 인내심은 대오를 갖추고 묵묵히 총을 쏘고 또 총을 맞아야 하는 라인 배틀의 시대에 딱 어울리는 병사의 자질이기도 했습니다.




(거칠고 가난하고 이동의 자유마저 없던 러시아 농노들의 삶은 평생 군대에서 말뚝 박는 것과 비슷했을 것 같습니다.)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를 앞둔 시점에서 러시아는 약 30만의 상비군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 숫자는 비록 프랑스 군 전체에 비해서는 작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당시 유럽 어느 국가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 웅후한 병력 규모였습니다.  그리고 러시아는 그 중 5만 병력을 쿠투조프 장군의 지휘 하에 오스트리아로 파병했고, 그 외에도 5만의 병력이 보헤미아에서 뒤를 받치고 있었으며, 또 4만의 병력이 프로이센의 접경 지역에서 대기 중이었습니다.  또, 특별히 1만2천의 황실 근위대까지 차르의 친동생 콘스탄틴 대공의 지휘 하에 파병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남의 나라 전쟁에 선뜻 15만 병력을 파병할 수 있는 나라가 당시 유럽에는 러시아 빼고는 없었습니다.

이제 1805년 11월, 이 15만 병력의 러시아 군이, 잔존 오스트리아 군과 연합하여 나폴레옹의 20만 대군과 결전을 벌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이 전투는 어떤 양상으로 진행되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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