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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진흙과 영광 - 울름 (Ulm) 을 향하여

by nasica-old 2013.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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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오스트리아가 인 (Inn) 강을 넘어 바이에른 영토를 침공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오스트리아도 나폴레옹에게 이미 여러번 당한 경험이 있는지라, 나폴레옹이 속도전으로 나올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러시아라는 든든한 동맹군이 있었으므로, 오스트리아에게 승리의 기회는 러시아와 얼마나 빨리 효율적으로 합류하여 프랑스군에게 저항하느냐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애초에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군이 합류하기 전에는 잠자코 있다가,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 국내에 진주한 이후에 프랑스 침공길에 나서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하지만 국내에 외국군, 특히나 거칠고 투박하기로 악명높은 러시아 군이 잔뜩 진주하는 것을 달가와 할 국왕은 없었습니다.  또 당연히 전쟁은 다른 나라 땅에서 하고 싶지, 자기 나라 영토가 전쟁으로 황폐화되는 것을 원하는 국왕도 없지요.  이런 이유로, 오스트리아는 먼저 바이에른을 침공한 것입니다.  사실 오스트리아는 바이에른을 침공했다기 보다는, 신성로마제국의 수장으로서 대불 동맹 전쟁에 바이에른도 당연히 참전해주기를 요구하며 '진주'한 것이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하지만 앞서 보셨듯이, 바이에른 정부군은 나폴레옹에게 협조하기로 하고 과감히 수도인 뮌헨 (München)을 버리고 뷔르츠부르크 (Wurzburg)로 퇴각하여 거기서 나폴레옹을 기다렸습니다.





(뮌헨 선제후의 궁전인 Nymphenburg 궁입니다.  그림의 모습은 1760년대의 모습이고, 위의 사진은 현대의 모습입니다.  저렇게 아름다운 궁전을 버리고 나폴레옹 편에 붙어야 했던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요제프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을 것 같습니다.)



오스트리아가 바이에른을 전장으로 삼은 것은 바이에른의 친나폴레옹 정책이 거슬렸던 점도 있었습니다만, 바이에른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바이에른의 서쪽에는 또다른 선제후령인 바덴-뷔르템베르크 (Baden-Württemberg) 가 있었는데 바로 이 곳과 프랑스 국경에는 유명한 중부 유럽의 장애물인 '검은 숲' (Schwarzwald, Black Forest)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곳은 전에도 라인 방면군을 지휘하던 모로 장군이 오스트리아 군과 많은 전투를 치루었던 곳입니다.  바이에른을 침공한 오스트리아의 마크 장군은 속도전을 중시하는 나폴레옹은 이 중요 장애물인 '검은 숲'을 시간 들여 관통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니, 이 장애물을 북쪽으로 우회하여 신속히 진격하려고 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불로뉴와 오스트리아의 위치를 살펴 보면, 나폴레옹이 '검은 숲'을 북쪽으로 우회하여 쳐들어 온다면 꼭 거쳐야 하는 곳이 바로 바이에른의 울름 (Ulm) 지역이었습니다. 




(저기 독일 지도 남서부 구석에 초록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바로 유명한 검은 숲, 슈바르츠발트입니다.  사실 뭐 그리 대단한 장애물은 아니었고, 실제로도 이 대삼림 지역을 관통하여 작전한 예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건 기본적으로 맞는 판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울름에 들어앉아 러시아 군이 올 때까지 버티기로 한 것은 잘된 판단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울름은 그렇게까지 견고한 요새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특히 사방이 탁 트인 평원 지역 한 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에, 20만을 넘는다는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가 밀물처럼 달려든다면 포위당하기 딱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불과 8만 정도 밖에 안되는 병력만을 거느린 마크 장군은 그냥 오스트리아 국내에서 러시아 군과 합류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더 나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마크는 2가지 이유에서 울름을 전장으로 정합니다.  첫째, 아무래도 오스트리아 영토가 러시아 군이나 프랑스 군의 군화에 유린되는 것은 오스트리아 수뇌부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어쨌거나 국토 밖에서 싸워야 했습니다.  둘째, 아무리 나폴레옹이 속도전의 귀재라고 해도, 이미 합류를 위해 진군해오고 있는 러시아군보다 더 빨리 프랑스 군이 육박해 올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기동력은 마크의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오스트리아 군이 바이에른의 국경을 넘은 것이 9월 8일인데, 나폴레옹은 그 이전인 8월 27일에 이미 불로뉴 주둔 그랑다르메 (Grande Armee)에게 동진 명령을 내리는 것을 보셨습니다.  나폴레옹의 전술은 기본적으로 기동전이었는데, 이렇게 아예 전쟁 발발 전에 미리 부대를 출동시키는 묘기까지 감행했으니 나폴레옹은 마크의 전략을 시초부터 격파하고 들어간 것이지요.  




(구글 덕분에 이젠 각 지역 간의 거리 측정도 너무 편해졌습니다.  하지만 저건 현대의 도로망을 이은 거리이고, 나폴레옹은 저 루트보다는 훨씬 북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아우크스부르크 및 울름 지역으로 쇄도했습니다.)



'무엇을 상상하건 그 이상을 보여주마'라는 것은 유명한 영화의 광고 카피였습니다만, 과연 나폴레옹의 기동력은 어느 정도였기에 그런 소리가 나왔던 것일까요 ?  일단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가 주파한 거리와 거기에 걸린 시간을 보시지요.  불로뉴에서 출발한 것이 8월 27일이라고 했는데, 술트 (Soult) 가 이끄는 제4 군단이 도나우 (Donau) 강 너머에 있는 아우구스부르크 (Augusburg) 에 무혈 입성한 것이 10월 8일이었습니다.  42일이 걸린 셈이지요.  이 두 지점 사이의 거리는 약 900km입니다.  당시는 요즘처럼 시원한 고속도로가 (될 수 있으면) 직선 구간으로 뚫려있지 않았을테니, 약간 돌아간다고 하면 약 1100km 정도 되겠지요.  이렇게 계산하면 하루에 약 26km씩 행군한 것입니다.  하루에 8시간씩 행군했다고 치면, 시속 3.27km의 속도입니다.

이 속도가 대단한가요 ?  당시 기준으로 보았을 때도 그렇게까지 대단한 기록은 아닙니다.  전에 '나폴레옹과 케사르의 차이점' http://blog.daum.net/nasica/6862388 편에서 언급했었습니다만, 1805년 엘바 섬에서 나폴레옹과 함께 탈출한 600명의 근위대 병사들은 하루에 무려 50km를 걸었습니다.  또 1809년 웰링턴 공작이 탈라베라 전투에서 악전고투할 때, 그를 돕기 위해 영국군 크로포드 장군이 3,000 명의 라이플 소총병을 이끌고 100km에 이르는 거리를 26시간 만에 주파한 사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부 최정예 부대들이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200%의 힘과 용기를 발휘한 것일 뿐, 무려 20만에 달하는 대군이 42일 동안 일관성있게 행군한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당시 영국이나 오스트리아 등의 동맹군 병사들은 하루 16~20km 정도가 보통이었던 것에 비하면, 하루 26km씩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었지요. 




(불로뉴에서 출발하는 부대들을 사열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입니다.)



실제로는 하루에 걷는 거리는 26km보다 훨씬 길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중간 집결지에서는 1~2일씩 휴식하며 다른 부대의 집결을 기다리기도 했을 것이고, 라인 강이나 도나우 강을 건널 때는 양쪽 강가에서 또 훨씬 오래 도하 순서를 기다리거나 다른 부대들이 도하를 마치기를 기다렸을테니까요.   당시 나폴레옹이 지정한 행군 지침에 따르면, 하루에 35~40km를 행군하되, 1시간마다 5분 휴식하고, 하루 거리 중 75%를 주파하고 나면 비로소 30분에서 60분 정도의 긴 휴식 시간을 주었습니다.  점심은 언제 먹냐고요 ?  실은 점심은 커녕 아침이나 저녁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불로뉴에 장기 주둔하고 있을 때야 나폴레옹이 각지에서 수송해다 쌓아놓은 막대한 군수 물자로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했겠습니다만, 속도전을 중시하는 나폴레옹이 일단 행군을 명했을 때는, 그 많은 군수품은 불로뉴에 그대로 남기고 출발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덕택에 병사들은 굶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7개의 급류'라고 불렀던, 7개 군단의 이동 경로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세어 보면 6개 줄기 밖에 안되고, 실제로도 제7군단은 이동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굶는다고 해도, 인간인 이상 42일 동안을 굶고 걸을 수는 없었습니다.  당연히 매일 저녁, 야영지 주변에서는 식량을 구하느라 난리가 벌어졌습니다.  만약 적국의 영토를 통과하는 것이었다면 별로 망설이지 않고 주변 농가나 창고를 털었을텐데, 행군로의 대부분이 프랑스 국내였던지라, 이것이 그다지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일단 병사들을 자유롭게 풀어놓는다면, 주변 마을에 막대한 약탈 피해가 벌어지는 것은 둘째치고, 많은 병사들이 고된 행군과 다가오는 무시무시한 전투를 피해 탈영을 해버릴 가능성조차 많았습니다.  탈영까지는 아니더라도, 확실히 낙오병은 부지기수로 생겨났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각 대대마다 가장 똘똘한 장교들을 선발하여, 이들이 소수 부대를 거느리고 주변 마을에서 식량을 조달해 오도록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무려 20만 대군이 (비록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대군을 몇갈래 길로 나누어 행군하기는 했습니다만) 좁은 지역을 통과하다보니, 이들이 통과하는 지역은 순식간에 메뚜기 떼가 지나가는 지역처럼 황폐화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이 먹을 식량은 물론, 말들이 먹을 건초까지도 남아나는 것이 없을 정도였지요.  그때 주린 배를 움켜쥐고 식량을 기다리는 병사들을 생각하며, 미친 듯이 식량을 구하러 다녔던 그 선발 병참대원들의 고생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큰 고생은 그런 병사들에게 식량을 '조달당했던' 주변 주민들이었겠지요.  많은 경우, 이 병참 장교들은 총칼로 위협하여 식량을 빼앗다시피 했다고 합니다.




(지난 편에 다루었던 저 나폴레옹의 나귀 고삐를 잡고 있는 저 스위스 양반 이야기 기억하십니까 ?)



이때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는 어떤 보상이 따랐을까요 ?  여기에 대해서는 힌트가 있습니다.  1984년에 프랑스 미테랑 (Francois Mitterrand) 대통령이 스위스를 방문할 때, 화제에 오른 마을이 있습니다.  바로 부르-생-피에르(Bourg-Saint-Pierre) 라는 알프스의 작은 마을이었지요.  이 마을은 전에 제가 포스팅한 '나폴레옹, 알프스를 넘다' http://blog.daum.net/nasica/6862503 편에 나오는, 나폴레옹의 목숨을 구해준 길 안내인 도르사즈(Pierre Nicholas Dorsaz)의 고향 마을입니다.  이 마을이 화제가 된 것은 나폴레옹이 약 180년 전에 이 마을에 진 빚 때문이었습니다.  1800년 5월,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귀국한 뒤, 제2차 이탈리아 침공을 위해 알프스를 넘을 때, 이 마을에서 상당량의 물품과 용역을 징발했는데, 그 대금으로 현금을 받은 사람은 나폴레옹의 목숨을 구해준 도르사즈 뿐이었고, 나머지는 그냥 어음 한 장만 달랑 남겨두었던 것이지요.  그 어음에서 명기된 징발 물자 내용은 미반환된 크고 작은 구리 남비 80개, 벌채된 나무 2,037 그루와 통나무 3,150 개, 그리고 그에 따른 마을 주민의 노동 임금입니다.  노임은 하루에 3프랑, 그러니까 약 48,000원으로 계산되었다는군요.  나폴레옹은 이렇게 어음만 한 장 써주고는 나몰라라 했던 것이지요.  나폴레옹이 바빠서 그랬을까요 ?  글쎄요... 몇년 뒤 다시 생 베르나르 고개를 찾아, 마렝고에서 전사한 드제 (Louis Desaix) 장군의 기념비까지 근사하게 만들어 준 것을 보면, 바빠서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애초에 갚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이 184년 전에 진 빚을 현대 프랑스 정부가 갚았다는 훈훈한 (?) 기사입니다.  그러나 이자는 안 갚았다는 조롱조의 구절로 끝맺는군요.)



실은 스위스를 방문한 미테랑 대통령도 이런 마을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국빈으로 방문한 미테랑에게 뜻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던 것입니다.  바로 주민 200명 규모인 부르-생-피에르 마을 대표가 나폴레옹의 180년 묵은 어음을 들고 나타난 것이지요.  아마 미테랑은 적잖게 당황했을 것입니다.  결국 미테랑의 내각 수석이었던 콜리아르 (Jean-Claude Colliard)가 이 마을을 찾아 45,334 스위스 프랑을 현금으로 갚았습니다.  이건 당시 미화로 2만불 정도에 해당하는 돈이었습니다.   뭐 그다지 큰 돈은 아니지요.  하지만 이 금액은 지난 180년 동안 쌓였을 이자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돈이었습니다.  이자까지 계산하면 4만5천 프랑이 아니라 그 500배인 2천만 프랑에 달하는 금액을 갚았어야 한다는군요.  콜리아르는 그 어색함을 풀기 위해 준비해간 기념 동판을 함께 증정했다고 하는데요, 글쎄요... 이제는 스위스도 잘 사는 나라라서 그런지, 이 동판만 받고 그 이자 분에 대해서는 공식 항의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참고로 그 마을의 시장님이 그 동판을 받았는데, 그 양반의 이름이 페르낭 도르사즈 (Fernand Dorsaz) 였습니다.  어쩌면 180년 전 나폴레옹의 목숨을 구해준 그 도르사즈의 후손일지도 모르지요.




(미테랑 대통령의 1981년 모습입니다.  하긴 그때 스위스에게 이자까지 다 갚는다고 하면 여기저기서 자기들에게도 나폴레옹이 진 빚을 이자까지 쳐서 내놓으라는 요구가 유럽 각국은 물론 이집트와 시리아에서도 빗발쳤을 것 같습니다.)



1805년으로 다시 돌아오시지요.  저 부르-생-피에르 마을의 예를 보듯이, 나폴레옹의 병참 장교들은 아마도 저런 무책임한 어음을 쓱쓱 써주고 밀가루나 빵, 소와 돼지를 마구 끌고 갔을 것입니다.  아마 프랑스 국민들은 그런 어음을 들고 먼 파리까지 찾아가서 기어이 돈을 타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동맹국인) 뷔르템베르크나 바이에른의 주민들만 해도, 애초에 갚을 의지가 희박해보이는 그런 어음쪼가리를 들고 그 멀고 험한 여행길을 통해 파리까지 갔을지는 의문입니다.  하물며 적국인 오스트리아에서 징발을 당한 주민들은 아예 그런 피해를 보상받을 생각도 못했겠지요.

먼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과 먹을 것이 부족했다는 것 빼고는 병사들의 고초가 없었을까요 ?  그럴 리가 없지요.  바로 도로가 문제였습니다.  나폴레옹의 독수리 깃발을 든 군단병들이 사를비유 (Charleville) 머스켓 소총을 들고 하루 평균 26km의 속도를 자랑할 때, 2천년 전에 훨씬 더 무거운 방패와 창, 갑옷 및 군장을 짊어지고 역시 비슷한 속도로 걷는, 그리고 역시 독수리 깃발을 앞세운 군단병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로마 군단 (legion) 이었지요.  당시 로마 군단도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처럼 식량과 천막을 다 포기하고 행군했을까요 ?  아닙니다.  그들 뒤에는 식량은 물론, 가죽으로 만든 천막을 실은 소달구지가 든든하게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왜 로마 군단은 이렇게 잘 해낸 일을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는 해내지 못했을까요 ?  바로 도로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이 로마 도로의 단면적만 봐도, 왜 로마가 꿈의 제국이라고 불리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까 ?)



로마인들의 문화 수준에 대해서는, 그리스인들에 비해 독창성이 떨어진다, 완전 표절이다 등등의 악평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공학적인 측면에서는 그리스인들을 완전히 미개인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위엄을 보여줍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도로와 상수도이지요.  로마인들이 도로를 얼마나 정성껏 과학적으로 만들었는지 아직도 그 일부가 유럽 곳곳에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단순히 흙길을 다진 정도가 아니라, 내구성을 위해 기초 공사부터 하고 충전물을 다져 넣은 뒤 표면을 석판이나 자갈로 포장할 정도였고, 도로 옆에는 배수로까지 따로 만들 정도였습니다.  로마인들이 이렇게 도로 건설에 정성을 쏟은 것은 역시 군사적 목적이었습니다.  넓은 제국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고 나아가 더 넓히기 위해서는, 각 지역에 고정 배치된 군단에만 의존해서는 부족하고, 제국 내의 병력을 이리저리 신속하게 이동시키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잘 포장된 도로였습니다.  같은 부대가 걷는다고 해도, 잘 포장된 도로 위를 걷는 것이 진흙 투성이의 비포장 도로를 걷는 것보다 훨씬 빨랐으니까요.  더군다나 천막과 식량같은 무거운 짐을 함께 옮기기 위해서는 포장 도로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위 지도는 유럽 각지의 로마 주요 도로망이고, 아래는 영국에 남아있는 로마 시대의 도로입니다.  정말 로마인들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명한 명언처럼,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로마 제국의 곳곳을 가로지르는 군용 도로들도 오랜 기간에 걸쳐 건설된 것들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나폴레옹은 정권을 잡은지 고작 5~6년 정도 밖에 안 되었지요.  19세기 초 프랑스의 도로 사정은 로마 제국에 비하면 미개 사회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도로의 특징은 비가 오면 온통 진흙구덩이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보면 군대라는 조직에게 가장 친숙한 지형은 바로 진흙 바다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서부전선, 특히 플랑드르 지역의 사정을 보면 진흙과의 투쟁이라는 것이 실감납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봐도, 고구려를 침공한 당태종을 가장 당혹하게 한 것이 사방천지 끝도 없이 펼쳐진 요동의 진흙의 대지였지요.  당나라 군대는 그 넓은 진흙지대에 짚단을 두툼하게 깔아서 길을 만들고 그 길로 이동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후에 보시겠습니다만, 울름에서 항복한 오스트리아 장군들이 나폴레옹 앞으로 인도되어 왔을 때, 그들을 맞이한 나폴레옹의 바지와 장화도 진흙투성이였습니다.






(사막전이 아닌 다음에야 진흙과 전쟁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지요.)



특히나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가 프랑스 중부를 가로질러 동으로 동으로 향하던 9월,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당시 이 원정에 참여했던 장교들의 기록에 따르면 '하늘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런 폭우 속에서 길은 진흙과 빗물로 범벅이 되었고, 아예 도로 자체가 유실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런 비 속에서 병사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행군을 해야 했고, 또 젖은 땅에서 천막도 없이 노숙 (bivouack) 을 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사기가 떨어졌고 불만에 가득찬 웅성거림이 병사들 사이에 가득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런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

뭐 특별한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저 자주 연설문을 작성하여 각 부대에 보내 '황제의 칙령이시다'라며 병사들에게 큰 소리로 낭독해주었고, 이런 대리 연설 속에서 나폴레옹은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곧 벌어질 전투에서의 승리와 영광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연설이 의외로 효과가 꽤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지난 2년 동안 불로뉴에서 갈고 닦은 정예병이었고, 또 이들 중 상당수가 나폴레옹올 따라 리볼리나 마렝고, 심지어 이집트에서 싸웠던 역전의 용사들이었으므로, 나폴레옹이 시키는 대로 하자면 고생은 되지만 그래도 승리는 하더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1805년 61시간 걸렸던 거리를 요즘은 자동차로 4시간 반만에 주파할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 자신은 파리 교외의 생 끌루 (Saint Cloud) 궁에서 9월 24일 오전 4시에 마차로 출발하여, 61시간 뒤인 26일 오후 5시에 프랑스 국경 동쪽 끝인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했습니다.  약 500km의 거리를 61시간 만에 주파했으니, 하루에 12시간씩 달렸다고 하면 시속 13.5km로 달린 것입니다.   원래 나폴레옹은 말을 잘 타는 편이 아니어서, 전투 현장에서만 말을 탔고 장거리 이동시에는 마차를 주로 이용하는 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병사들과 모든 고락을 함께 한 것처럼 이야기가 나돌지만, 알고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던 것이지요.

아무튼, 이런 기동력을 이용하여 나폴레옹은 어떤 작전을 펼쳤을까요 ?  일단은 마크의 예상 그대로 움직였습니다.  당연히 통과에 시간을 잡아먹을 '검은 숲' 지역을 우회한 최단거리로 마크가 위치한 울름을 향해 달려온 것이지요.  하지만 나폴레옹의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했다고 마크가 좋아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나폴레옹의 동선을 마크가 예측했다기 보다는, 마크가 위치한 곳이 어디든 바로 그 곳이 나폴레옹의 목적지였으니까요.  나폴레옹의 목표는 항상 그렇듯이 적의 주력 야전군의 격멸이었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주력군은 마크가 지휘하는 제1군 8만 명 정도가 바이에른을 점거하고 있었고, 칼 대공이 지휘하는 제2군 10만 명이 이탈리아 북동부에서 마세나의 프랑스 이탈리아 방면군과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는 티롤에서 요한 대공이 이끄는 3만 명 정도의 제3군이 이 두 주력군 사이를 연결하고 있었지요.  당연히 나폴레옹의 목표는 마크의 제1군이었습니다. 

왜 주전장이 될 바이에른에 상대적으로 더 적은 병력이 배치되었을까요 ?  곧 당도할 러시아 군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쿠투조프 (Kutuzov) 장군의 약 5만명의 러시아 원정군은 당시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고, 쿠투조프 장군을 포함한 러시아 장교단만 정보 수집 및 작전 협의 차원에서 오스트리아 궁정에 도착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쿠투조프는 현명하게도, 20만 대군이라는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은 바보짓이며, 차라리 동쪽 깊숙히 후퇴하여 갈리시아 (Galicia, 현재의 폴란드-우크라이나 사이의 지역) 까지 나폴레옹을 끌어들인 뒤 거기서 결판을 볼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오스트리아는 반대했지요.




(갈리시아는 저렇게 멀리 떨어진 우크라이나에 있는 곳입니다.  쿠투조프의 스케일이 커도 너무 큰 거 아닐까요 ?)



러시아 및 오스트리아의 수뇌부가 그렇게 갑론을박 하고 있는 사이에도, 나폴레옹의 군단들은 속속 도나우 강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본국과의 보급/통신로가 끊기면 맥을 못 추는 오스트리아 군의 속성을 잘 알고 있던 나폴레옹은 적의 주력이 웅크리고 있는 울름으로 직행하지 않고, 북쪽으로부터 울름의 북서쪽과 북동쪽을 동시에 노렸습니다.  10월 6일에는 이미 프랑스의 6개 군단이 울름의 북쪽과 북서쪽을 장악했고, 10월 8일에는 란느의 제5군단과 뮈라의 예비 기병 군단이 뜻밖에도 울름의 동쪽에 있는 베르팅겐 (Wertingen)을 들이쳤습니다. 




(지도 왼쪽의 붉은색 타원이 검은 숲 지역입니다.  울름 동쪽이자 아우쿠스부르크 북서쪽에 A자로 표시된 곳이 베르팅겐입니다.)



한편, 마크는 이 양반이 정말 오스트리아 군의 총사령관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어설픈 작전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무슨 의도였는지 모르겠으나, 마크는 하루 전인 10월 7일, 이 베르팅겐으로 오펜부르크 (Franz Xavier Auffenburg) 장군 하에 약 5천의 보병과 4백의 기병에 약간의 포병대를 딸려 파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목적이 불분명한 파견대가 베르팅겐에 도착하자마자, 정말 뜻 밖에도 오스트리아 군의 2배가 넘는 프랑스 군이 폭풍처럼 들이 닥쳤습니다.  오펜부르크로서는 재수가 없었던 것이, 이날 맞부딪힌 것은 전에 '나폴레옹의 교과서 - 리볼리 전투' http://blog.daum.net/nasica/6862470 편에서 언급했던 '미친 호색 기병' 라살 (Antoine Lasalle) 이 이끄는 기병대와 함께, 프랑스 군 내에서도 정예병으로 이름이 높았던 '우디노(Nicolas Oudinot)의 척탄병' 들이었습니다.  애초에 압도적인 적군에게 그것도 기습을 당한 오스트리아 군은 별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대패, 수백명의 전사자와 함께 2천명의 포로를 냅니다. 



(도나우 강, 영어로는 다뉴브 강이라고 부르는 이 강은 중부 유럽에서 시작하여 흑해로 흘러 들어가는 긴 강입니다.)



동시에 같은 날 술트의 제4 군단이 베르팅엔 바로 남동쪽에 있는 아우쿠스부르크 (Augsburg) 에 무혈 입성했고, 다부 (Davout)의 제3 군단은 그 북동쪽인 노이부르크 (Neuburg) 에서 도나우 강을 도하했습니다.  북쪽 함부르크에서 남하해온 베르나도트 (Bernadotte)의 제1 군단 및 마르몽 (Marmont)의 제2 군단은 아예 더 동쪽으로 뻗어 아우크스부르크의 남동쪽에 위치한 바이에른의 수도 뮌헨으로 곧장 향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근위대와 함께 울름과 그 동쪽인 잉골슈타트 (Ingolstadt) 사이에서 도나우 강을 건너 남하한 뒤 아우쿠스부르크에 사령부를 차렸습니다. 

잠깐, 나폴레옹의 군단은 모두 7개라고 했는데, 그 제7 군단은 어디 있냐고요 ?  제7 군단은 사실 훈련 중인 부대였습니다.  그 지휘관은 역전의 용사이자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나폴레옹의 원투 펀치인 오쥬로 (Augereau) 였는데, 아무래도 나폴레옹의 정적 모로와 친했던 열혈 자코뱅 오쥬로의 존재는 나폴레옹으로서는 부담스러운 것이었나 봅니다.  오쥬로에게는 실질적인 공을 세울 기회를 가급적 주지 않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은 마크의 예상을 뛰어넘는 전개였습니다.  특히 도나우 강 남쪽이자 울름의 동쪽에 있는, 즉 후방이라고 생각했던 베르팅겐이 적의 손에 떨어졌다는 소식은 당황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울름은 도나우 강 북쪽에 있는 도시이지만 당시 마크의 주력은 도나우 강 남쪽에 있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마크는 나름 기발한 아이디어를 냅니다.  즉, 아직 도나우 강 북쪽 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프랑스 군이 의외로 이미 도나우 강 남쪽으로 진출한 이상, 마크는 아예 역으로 도나우 강 북쪽으로 건너간 뒤 동쪽으로 탈출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마크는 병력을 파견하여 군츠부르크 (Gunzberg) 의 다리들을 점령하도록 합니다. 




(군츠부르크 전투 당시의 각 군의 전개 상황입니다.  붉은색 글자가 오스트리아 군입니다.)



이렇게 마크의 의도는 좋았으나, 하필 네 (Ney) 원수가 지휘하는 제6 군단이 마침 도나우 강 북쪽 강변을 따라 울름으로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네는 말레 (Jean-Pierre Firmin Malher) 장군의 사단에게 군츠부르크를 점령하라고 해놓은 상황이었지요.  프랑스 군 8천과 오스트리아 군 7천이 맞붙은 10월 9일의 이 군츠부르크 전투는 6문이라는 초라한 프랑스 군의 포병대에 비해 26문이나 되는 강력한 포병대의 지원을 받은 오스트리아 군의 우세로 시작했으나, 결국 프랑스 군의 승리로 끝납니다.  여기서 오스트리아 군은 2천의 병력을 잃고 결국 후퇴해야 했고, 마크에게 동쪽으로의 탈출구는 막힌 문이 되어 버렸습니다.




(군츠부르크에서 싸운 오스트리아군의 쥴라이 (Gyulai Ignaz) 장군입니다.  헝가리 출신이라서 성을 이름 앞에 씁니다.  이 양반은 이 날 나폴레옹에게 당한 굴욕을 결국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되갚아 주게 되지요.)



이제 남쪽만 틀어막으면 이 올가미가 완성되고 마크와 그의 군대는 완전 포위되는 형국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남쪽을 틀어막기 위해, 울름 남쪽의 란츠베르크 (Landsberg) 와 메밍겐 (Memmingen) 으로 술트를 파견합니다.  이 절대 절명의 순간에 마크가 취할 수 있는 것은 딱 하나였습니다.  바로 남쪽으로의 대탈출이었지요.  나폴레옹도 술트를 메밍겐으로 파견하면서 당연히 이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마크가 남쪽 티롤을 향하여 줄행랑을 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크가 나폴레옹의 예상을 멋지게 깨는 결단을 내렸고, 덕분에 프랑스 군의 뒤퐁 (Dupont) 장군은 그야말로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습니다.  마크가 보여준 '남자의 결단'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  그 이야기는 2주 쯤 뒤에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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