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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군단 (corps) 이라는 단어의 발음은 왜 콥스가 아니라 코어인지 ?

by nasica-old 2013.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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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편에서는 나폴레옹의 치밀한 전략 때문인지 혹은 오스트리아의 안일한 전략 때문인지, 아무튼 오스트리아 군이 바이에른과의 국경인 인 (Inn) 강을 도하하는 것까지를 보셨습니다.  이로써 그동안 바다에서만 진행되던 제3차 동맹 전쟁이 드디어 유럽 대륙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지요.  손자는 전투의 결과는 이미 전투 시작 전에 결정되어 있다고 말했지요.  과연 이 제3차 동맹 전쟁도 그랬을까요 ?  예, 그랬습니다.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맞붙은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 (Grande Armee, 대육군)는 그 적수였던 오스트리아군이나 러시아군과는 많은 면에서 달랐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이 불로뉴에서 영국 침공을 위해 갈고 닦았던 영국 방면군은 그대로 그랑다르메, 즉 대육군이 됩니다.)



나폴레옹이 대서양 연안의 불로뉴에 집결시켜놓았던 그랑다르메 (영국 방면군의 새 이름) 는 기존의 흔한 'XXX 방면군'이라는 프랑스 군대와도 차원이 달랐습니다.  가령 나폴레옹이 이끌었던 이탈리아 방면군 같은 경우는 그 규모가 4만명 규모였었고, 더 큰 규모였던 모로의 라인-모젤 방면군도 8만명 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는 오스트리아나 러시아 등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18세기, 소규모 모병군 및 용병들이 싸웠던 구성된 유럽의 전장에서 1개 군 (army) 이라고 하는 것은 그 정도 규모가 적절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나폴레옹이 영국을 침공하겠다며 모아놓은 영국 방면군은 규모가 무려 20만에 달했습니다. 




(이는 1796년 제2차 동맹 전쟁 당시의 상황입니다.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방면군은 5만9천명 수준이라고 되어 있으나, 저건 서류상의 숫자일 뿐이고,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에 이끌고 간 것은 4만명 규모였습니다.)



그냥 규모만 크다고 좋은 것이었을까요 ?  위에서 손자 이야기를 꺼낸 김에, 초한지의 한 대목을 보도록 하시지요. 

한나라 고조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뒤, 자신의 대업에 가장 큰 공헌을 했던 초왕 한신을 잠재적 경쟁자로 보고 그 권력을 빼앗은 뒤, 수도인 장안에 사실상 유폐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에 갖힌 호랑이나 다름없던 한신을 불러다 이런저런 잡담을 하다가, 자신의 여러 장군들의 능력치를 물었습니다.  한신은 그 자는 몇천명 군대를 지휘할 재목이다, 그 자는 몇만명 군대를 지휘할 재목이다 이런 식으로 평가를 하지요.  그러다 유방은 한신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치명적인 질문을 합니다.  바로 유방 자신의 능력을 물은 것이지요.  한신은 10만명 수준이라고 약간 아부성 답변을 내놓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어서, 유방은 한신 본인의 능력에 대해서도 물었고, 아직 기개가 죽지 않은 한신은 그 유명한 '다다익선', 즉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라는 답변을 내놓습니다.  이러면서 사실상 한신은 지옥행 티켓을 예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도 고딩때까지만 해도 한문 배웠는데, 이젠 안쓰다보니 읽기는 읽어도 쓰는 건 많이 까먹었군요... 저 익자는 쓰라면 못 쓸 것 같습니다.)



한신의 운명은 뭐 그렇다치고, 한신의 말은 의미를 가집니다.  병력이 무조건 많아도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고, 그만한 규모를 다룰 수 있는 역량이 없다면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것이지요.  가령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군의 편성과 배치를 주관했던 몰트케 장군 (비스마르크를 도왔던 대 몰트케 장군의 조카입니다) 은 지나치게 많은 병력을 편성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습니다.  대도시의 노동자 계급을 마구잡이로 징집할 경우 애써 훈련시켜 놓은 순박한 농민 출신 병사들에게까지 사회주의 사상에 오염될 기회를 준다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였으나, 주된 이유는 아무래도 보급 문제였습니다.  당시 독일의 보급 및 수송 능력이 뻔하고, 또 전선도 좁은데, 지나치게 많은 병력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습니다.




(이 양반은 Helmuth von Moltke the Younger, 즉 소 몰트케라고 불리던 분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그 유명한 슐리펜 작전을 실행한 분이지요.)



그런데 나폴레옹은 무려 20만명 규모의 단일 군 지휘할 능력이 있었을까요 ?  그가 직전까지 다루었던 군대는 정말 5만 수준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통신 및 교통 수단을 고려하면, 한명의 지휘관이 통제할 수 있는 규모의 군대는 그 정도가 고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의 병력이면 한개 전역 (theatre of war)에서의 전쟁을 치르는데는 충분했습니다.  아무래도 수십만의 병력이 충돌했던 아시아의 전쟁 규모에 비해서, 아직 유럽의 인구와 경제 규모는 미약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제 19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전쟁도 십만 단위가 넘어가는 대규모 병력이 한자리에 모이는 규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을 바로 나폴레옹이 마련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무턱대고 병력 규모만 늘여놓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5만군을 다루는 방법과 20만군을 다루는 방법은 당연히 달라야 합니다.  나폴레옹은 세계 최초로 군단 (corps) 이라는 개념을 그랑다르메에 도입했습니다.  군대 다녀오신 분들이야 군단 밑에 사단이 있고, 사단 밑에 여단 또는 연대가 있고, 연대 밑에 대대/중대/소대가 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나폴레옹이 세계 최초로 군단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면, 과연 사단이나 연대 같은 편제는 나폴레옹 이전에도 존재했을까요 ?  존재했습니다.





(Sharpe's Regiment 편에서 Sharpe 소령은 사라져버린 South Essex 연대의 제2 대대를 찾아 영국으로 귀국합니다.  대대가 통째로 없어졌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  군의 부패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문제가 되는 부분이지요.)



제 블로그에서 자주 다루었던 샤프 (Sharpe) 시리즈를 읽어보면, 영국군의 기본 편제는 바로 연대 (regiment) 라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고유의 부대 번호, 심지어 고유의 별칭을 갖는 부대 단위가 바로 연대였고, 이 연대는 일종의 독립 사업체로서, 각 연대 단위로 모병 활동이나 훈련 등을 실시했습니다.  그러면 당시에는 사단 (division) 이나 여단 (brigade) 라는 편제가 없었냐고요 ?  있었습니다.  다만, 사단이니 여단이니 하는 것들은 상설 단위가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임시로 편성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당연히 한신이 말하는 '지휘 능력'은 그저 연대 단위에서 머무르는 수준이었지요.  이것이 17~18세기의 유럽의 군사 편제였습니다.

그러다가 7년 전쟁 때부터 '사단'이라는 개념이 태동하더니, 1792년에는 프랑스 혁명 정부에서 국방장관을 맡았던 카르노 (Lazare Carnot, 총재정부 - 그들의 이야기 http://blog.daum.net/nasica/6862500 참조) 가 상설 단위로 사단을 편성했습니다.  아무래도 대규모 징집에 의해 대규모 부대들을 편성하다보니, 과거의 연대 단위 편제로는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판단이 된 것이지요.  특히 카르노는 훗날 '승리의 설계자'라는 칭송을 들을 정도의 유능한 행정가였습니다.  카르노가 편성했던 사단 편제는 제1, 2차 대불 동맹 전쟁에서 큰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연대나 사단이나, 그저 '연대 몇개를 모아서 만든 더 큰 규모의 편제'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즉 '보병 사단'이라는 단일 병종으로 된 부대에,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기병 연대나 포병 연대들을 지원해주는 수준이었지요.




(누가 뭐라고 해도 군대의 기본 요소는 바로 보병 연대지요.)



따지고 보면 유럽의 전장을 주도했던 이런 '단일 병종'에 의한 편제는 고대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로마군의 기본 편제는 레기온 (legion), 흔히 '로마 군단'으로 번역되는 약 5천명 수준의 보병 부대였습니다.  필럼(pilum)이라는 투창과 스쿠툼 (scutum)이라는 장방형 대형 방패, 그리고 글라디우스 (gladius) 라는 짧은 검으로 무장한 병사들로 구성된 중무장 부대였지요.  물론 로마 레기온 자체도 훌륭한 전투 부대였습니다만, 전쟁을 이런 중장 보병만으로 수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정찰 및 추격을 위한 기병, 원거리 교전을 위한 투창병이나 투석병 같은 경무장 보병도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로마인들은 당시 그리스의 전통을 그대로 따라, 로마 시민으로는 거의 100% 레기온을 구성했고, 기병이나 경무장 보병, 궁병 등은 주로 외국 동맹국의 병력을 활용했습니다.  이렇게 레기온을 보조하는 부대들은 글자 그대로 보조 부대, 즉 auxilia 라고 불리웠습니다.  하지만 로마는 훗날 제국이 된 뒤에도 상당 기간 계속, 로마 시민으로는 중무장 보병인 레기온을, 동맹국 시민으로는 보조 부대인 아우크실리아를 편성하는 정책을 유지했습니다.  즉, 여러 병종을 묶어 하나의 부대로 편성하지는 않았던 것이지요.  때문에 오늘날 영국 땅에서도 고대 로마 제국 시절 브리타니아에 배치되었던 시리아인 궁병의 묘지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저 윗그림은 전형적인 로마 정규 군단병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의 부조 왼쪽 상단을 보면, 저렇게 사각 방패를 든 군단병 외에 시리아식의 뾰족 투구를 쓰고 활을 쏘고 있는 보조 부대의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 단일 병종 위주의 편성을 완전히 바꾼 것이 바로 나폴레옹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누구보다도 보병과 포병, 기병의 연합 공격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령 이쪽에서 기병으로 적의 보병을 공격하려고 할 경우, 적이 밀집 보병 방진을 구성해버리면 기병만으로는 적의 보병 방진을 공격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런 견고한 보병 방진은 포병의 집중 사격에 대단히 취약했으므로, 기병이 포병과 함께 유기적인 연합 공격을 할 경우 그 효과는 200% 이상 발휘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기/포병과 효율적인 작전을 수행할 보병까지 가세한다면 그야 말로 천하무적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이렇게 총검을 촘촘히 모아서 방진을 구성하면 기병에게는 대단히 강인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포가 출동한다면 ?)



그런데 '이탈리아 방면군'이나 '라인-모젤 방면군' 같은 하나의 군 (army) 내부에는 보병과 포병, 기병 부대가 다 존재했습니다만, 그렇게 여러 병종의 부대들이 하나로 통합된 최소 단위는 바로 군 (army) 자체였습니다.  따라서 방면군 휘하 부대들은 항상 독자적으로 전투를 벌일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소수의 아군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 보/포/기병을 유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의 방면군 (mini-army)'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이 바로 군단 (corps) 입니다.  원래 regiment라는 단어도 어원이 영어가 아니라 '레지망'이라는 불어이듯이, corps라는 것도 (p와 s가 묵음인 발음에서 짐작하실 수 있듯이) 불어에서 나온 것이지요.  참고로 corps라는 불어의 어원은 결국 body를 뜻하는 라틴어 corpus에서 나온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20만의 그랑다르메를 총 7개의 군단으로 편성하고, 각 군단은 독자적인 기병과 포병까지 갖추어 그 자체로서 완전히 독립적인 전투가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가령 각 군단마다 약 30문의 막강한 포병 화력을 갖추어, 각 군단장의 판단에 따라 적절한 포병 작전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부대들은 적의 방면군보다는 작지만, 적의 방면군 수준의 편성을 갖춘 복합 병종으로서, 특히 보병과 포병, 기병이 동일 지휘관 밑에서 상시적인 연합 훈련을 했으므로 더욱 효율적이고 유기적인 연합 전술의 구사가 가능했습니다.  이로부터 더 적은 수의 병력으로도 더 많은 적을 상대한다는 나폴레옹군의 위력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특히, 이 각 군단의 군단장들은 나폴레옹과 함께 풍부한 경험을 쌓은 당대 최고의 실력파 장군들이었습니다.  나폴레옹 휘하의 7명의 군단장은 이미 익숙한 이름들인 란(Lannes), 술트(Soult), 다부(Davout), 베르나도트(Bernadotte), 마르몽 (Marmont), 그리고 오쥬로(Augereau) 외에, 그동안 라인 방면군에서 활약하던 네(Michel Ney)였습니다. 




(도중에 배신을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워털루까지 나폴레옹과 함께 했던 네 원수입니다.)



이 군단장의 이름들을 보면서 좀 이상하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일단 네는 그동안 나폴레옹 밑에서는 전혀 싸워본 경험이 없는, 비 나폴레옹파인데도 어떻게 다른 경쟁자들을 젖히고 군단장 자리를 손에 넣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네는 모로 밑에서 호헨린덴 전투를 치룬, 실력파 장군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휘 능력보다는 그의 개인적인 용기로서 더 많이 알려진 인물이었는데, 황후 조세핀의 총애를 받는 수행 숙녀와 결혼함으로써 결국 군단장 자리를 꿰어찼다고 합니다.  이렇게 나폴레옹과의 인척 관계에 의해 중용을 받은 것은 베르나도트도 마찬가지였지요.  그의 처는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의 처제이자, 한때 나폴레옹과 정혼한 사이였던 데지레 클라리(Désirée Clary)였거든요.  그렇다면 나폴레옹과 가장 가까운 인척이자, 또 실력이 없다고 볼 수도 없지만 실력파라고 보기에도 좀 애매한 불꽃남자 조아생 뮈라 (Joachim Murat) 의 이름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  그는 이 7개 군단과는 별도로, 약 2만명 규모의 기병 예비대를 지휘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기병 외에는 별로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남자였던 뮈라 (진정한 불꽃 남자, 조아생 뮈라 http://blog.daum.net/nasica/6862378 참조) 개인을 위해서나, 또 나중에 아일라우 전투 및 보로디노 전투 등에서 보게 되듯 충격 병기로서의 진보된 기병 집단 활용을 위해서나, 정말 신의 한 수라고 할 만한 인사 조치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원수 임명을 보면 그의 고뇌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력파 장군들이 워낙 많은데다, 자코뱅파들에 대한 배려도 해야 했고, 게다가 자신의 인척들 관리까지 해야 했습니다.)



이상한 점이 또 하나 있을 겁니다.  제1차 이탈리아 침공 때 오쥬로와 함께 나폴레옹의 원투 펀치를 구성했던 용장 마세나(André Masséna)의 이름이 빠졌다는 것이지요.  사실 제1차 이탈리아 침공 때나,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가있는 동안 벌어졌던 스위스-이탈리아에서의 작전을 보면, 마세나는 다른 동료 장군들과는 남다르게 한단계 더 상위 레벨이라는 느낌이 드셨을 것입니다.  토르하고 캡틴 아메리카하고 같은 어벤져스 팀이라고 해서 이 둘의 능력치가 같은 것은 아니쟎습니까 ?  실제로도 그랬고, 그래서 이때 마세나는 나폴레옹이 편성한 그랑다르메의 전신인 영국 방면군처럼 독자적인 방면군, 즉 이탈리아 방면군을 따로 맡고 있었습니다.  유독 나폴레옹의 시대에 프랑스에 유능한 지휘관들이 많은 것 같아서 이상한가요 ?  사실 세상에 유능한 사람은 많습니다.  시대를 잘 타고 나야 하고, 또 출신 배경에 상관없이 실력 위주로 인재가 선발되는 시스템만 있다면 언제든지 세상은 유능한 사람들로 꽉 차있습니다.




(인기야 아이언맨이 제일 좋지요.  하지만 어벤져스 중에서 헐크와 토르는 다른 애들과는 레벨이 좀 다른 애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마세나는 어벤져스 중에서 토르 정도에 해당하는 남다른 실력자라고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이에 대적할 오스트리아군이나 러시아군은 아직도 연대 단위의 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오스트리아는 제2차 동맹 전쟁이 패배로 끝난 이후, 유지비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각 연대들을 넓은 제국 방방곡곡으로 분산 배치해 놓았습니다.  원래 소속 지역에서 최소한의 인원으로 연대를 유지하기 위함이었지요.  그로 인해 유지비는 절감되었을지 몰라도, 제3차 동맹 전쟁에 참전하려고 보니, 각지에 흩어진 병력들을 소집하고, 또 바이에른 국경지역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프랑스가 채택하고 있던 국민 개병제식의 대량 징집에 대해서, 오스트리아는 이제 비로소 연구를 시작하는 단계였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카를 대공 (Archduke Charles) 은 1801년부터 이런 군 제도 개혁에 손을 댔습니다만, 수구파 오스트리아 귀족의 반대에 부딪혀 별다른 성과를 아직 만들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특히 카를 대공은 황제 프란츠 2세 (Franz II)의 동생이었으므로, 황제의 질투와 견제까지 맞물려, 제3차 동맹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방면군, 즉 티롤-베네치아 지역으로 전보 발령을 받게 됩니다.  이로써 나폴레옹과 카를 대공의 직접적인 대결은 다시 미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양반이 불행의 칼 마크 폰 라이베리히 장군입니다.)



카를 대공을 대신할 오스트리아의 지휘관은 마크 장군 (Karl Mack von Leiberich) 이었습니다.  이 양반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대를 총 지휘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오스트리아의 문제점을 말해줍니다.  그는 그다지 돋보이지 않는 군 경험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1797~1798년 나폴레옹의 제1차 이탈리아 침공 때, 나폴레옹에게 정말 꼴 사나운 포로가 되었던 경력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오스트리아 황제에 의해 나폴리 왕국군을 지휘하도록 임명받았는데, 막상 나폴리 부대를 지휘하러 가보니, 이 이탈리아어를 쓰는 병사들은 독일어를 쓰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장군 명령에 따를 의사가 전혀 없음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결국 전투는 고사하고 자기 자신의 부하 병사들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놓인 마크는 어쩔 수 없이 적군인 프랑스군의 진영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이렇게 정말 쑥스럽게 프랑스 진영에 들어오게 된 마크의 신분이 포로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프랑스군 내부에서도 혼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결국 나폴레옹 본인의 명령에 의해, 포로로서 파리로 후송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전통에 따라, 마크는 도망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 뒤 파리 시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가석방되었습니다.  그런데, 마크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렇게 포로가 된 것은 좀 억울하다고 생각을 했는지, 그만 2년 만에 오스트리아로 도망을 쳐버립니다. 

이는 당시 신사 사회에서는 상당히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애초에 그렇게 아리송하게 포로가 된 사람이 이미 전쟁이 끝난 상황에서 왜 아직까지 적국에서 포로 생활을 해야 했는지 좀 의문이긴 합니다만, 이로 인해 그는 한동안 오스트리아 군에 등용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카를 대공이 수구파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날 때 복귀한 사람이 바로 이 마크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과거 이력은 군 내부에서 인기가 있을 만한 것이 못되었고, 초장부터 오스트리아 지휘부는 삐그덕거렸습니다.  아마 그런 점을 의식해서였는지, 제3차 동맹 전쟁이 개시되기 직전, 그는 6개 중대로 된 3개 대대가 1개 연대를 이루도록 되어 있던 과거의 편제를, 4개 중대로 이루어진 4개 대대 체제로 변경하는 악수를 둡니다.  이는 아무런 실질적인 이점이 없는, 그야 말로 뭔가 개혁을 위한 개혁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중대장 수가 줄어들고 대대장 수가 늘어났으니 승진한 사람이 있었을텐데, 그런 승진을 통해서 부하들의 마음을 잡아보려고 했던 것일까요 ?  하지만 아무런 관련 훈련도 없이 무턱대고 전투 직전 부대 편제를 바꾸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거의 2년 동안 불로뉴 일대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하며 군단 체제를 다듬었던 것과 무척 대조되는 일이었습니다.




(비켜라 나폴레옹은 이 몸이 상대해주겠다 !!   자신의 상징적인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자꾸만 실질적 지휘권을 행사하려 했다는 페르디난트 대공입니다.  이 양반은 당시 20대 초반이었고, 이건 훗날 40대 이후의 모습입니다.)



게다가 마크 장군은 사실 총사령관도 아니었습니다.  명목상의 총사령관은 페르디난트 대공 (Archduke Ferdinand Karl Joseph) 이라는 20대 초반의 새파란 합스부르크 가문의 왕자였습니다.  전에 호헨린덴 전투에서도 10대 후반의 요한 대공을 총사령관으로 앉히고 노장 라우어 장군을 실질적인 지휘관으로 임명했던 것과 같은 형태였지요.  그 결과가 얼마나 참담한 패배였는지 뼈저리게 느꼈을텐데도, 오스트리아 군은 왕족이 군 총사령관직을 맡아야 체면이 산다는 말도 안되는 전통을 고집했습니다.  이것이 그냥 형식미를 위한 전통이었으면 그나마 나았겠으나, 이는 사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매우 비열한 책임전가를 위한 포석에 불과했습니다.  즉, 혹시 전투가 승전으로 끝나면 그 공은 모두 젊은 왕족이 누리게 되는 것이고, 혹시라도 패배로 끝나면 그 책임을 '보좌를 잘못한' 노장군에게 뒤집어 씌우자는 것이었지요.  실제로 호헨린덴 전투에서도 책임을 뒤집어 쓴 것은 라우어 장군이었고, 나중에 보시겠습니다만 마크 장군도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쓴 뒤 군법 회의를 거쳐 무려 2년간 옥살이까지 해야 했습니다.  이러다보니 오스트리아 장교들은 그저 왕가 및 실력파 귀족들에게 연줄을 대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호헨린덴 작전서를 실질적으로 짰으므로, 패배의 실질적인 책임자 중 하나였던 베이로더 대령 (Franz von Weyrother) 은 요한 대공과 친했던 덕분에,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그대로 승진하여 아우스테를리츠의 작전서까지 짜는 비극을 연출했던 것입니다.

자, 이렇게 상이했던 두 적수가 곧 맞붙게 됩니다.  젊은 프랑스 제국에, 두개의 늙은 제국, 즉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도전을 한 것이지요.  아직 러시아군이 저 동쪽으로부터 도착하려면 한참 남은 상황이었으나, 나폴레옹의 프랑스군도 유럽 대륙 서쪽 끝인 대서양 연안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마크의 계산으로는 시간은 충분했습니다.  과연 그랬을까요 ?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보시기로 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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