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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침공인가 방어인가 - 제3차 동맹 전쟁의 시작

by nasica-old 2013.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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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드디어 나폴레옹이 아우스테를리츠를 향하여 출발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나폴레옹이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대포를 어떻게 운용했는가를 보기 전에 먼저 왜 아우스테를리츠로 갔는지를 알아야 하겠지요.  즉, 왜 3차 대불 동맹 전쟁이 벌어졌는지를 보셔야 합니다.

3차 대불 동맹 전쟁은 2차 동맹 전쟁이 거의 임시방편으로 불완전하게 종료되었기 때문에 발생했던 것입니다.  지난 "검은 나폴레옹 vs. 하얀 나폴레옹 - 대서양 너머의 사정" (http://blog.daum.net/nasica/6862511 참조) 편에서 다루었던 대로, 3차 대불 동맹 전쟁을 완전히 끝냈던 아미앵 (Amiens) 조약은 사실 영국에게 다소 불리하게 체결된 것이었습니다.   프랑스로서는 어차피 한 입에 삼키기에는 힘들었던 이탈리아 중남부, 즉 이탈리아의 교황령과 나폴리 왕국에서 철수하는 것 외에는 뾰족하게 손해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그 동안의 전쟁에서 제해권을 이용하여 프랑스와 스페인, 네덜란드 등 여러 국가에게서 빼앗았던 수많은 해외 식민지들을 다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가령 말타, 서인도 제도, 희망봉 지역, 미노르카 등등에서 모두 철수해야 했지요. 




(1803년 아미앵 조약을 풍자한 영국의 만화입니다.  여기서는 영국과 나폴레옹이 세계를 나눠 먹는 것으로 그려졌으나, 사실 이 조약으로 인해 토해내야 할 영토는 나폴레옹보다는 영국이 훨씬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불 양국은 당연히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고, 그 결과가 고스란히 행동으로 드러났습니다.  양측 다 핵심적인 양보 대상에 대해서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가령 영국이 말타에서 철수하지 않는 것이나, 프랑스가 중립 지역이어야 하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철수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었지요.  게다가 아미앵 조약으로 인해 프랑스 해군이 자유롭게 대양으로 풀려나게 되자, 나폴레옹이 즉각 생 도밍그 섬에 대규모 원정 부대를 파견하는 것을 보고 영국인들은 '거봐라 결국 프랑스놈들만 득을 보고 있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불만은 결국 1년 만에 영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영국이 바다의 왕자라고 해도, 영국 혼자서 프랑스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었습니다.  영국은 부지런히 대륙의 다른 왕국들에게 공작질을 하여 프랑스에 대한 제3차 대불 동맹을 맺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그 목적을 위해 영국은 유럽 각국의 왕가와 권문 세가에 많은 돈을 뿌렸습니다.  이런 제3차 대불 동맹의 결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흔히 나폴레옹이 말끝마다 내뱉었던 것처럼) 영국의 황금이 아니라, 바로 나폴레옹 자신이었습니다.  1804년 3월에 벌어진 나폴레옹의 앙기앵 공작 (Louis Antoine, Duke of Enghien) 사법 살인 사건이 큰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현대적인 눈으로 보면 뭐 그렇게까지 큰 사건일까 싶습니다만, 당시 유럽의 왕족들이 보기에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서, '나폴레옹 저 짐승과는 도저히 정상적인 관계가 불가능하다' 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습니다.  그로 인해 스웨덴은 프랑스와의 외교 관계를 끊었고, 덕택에 영국은 스웨덴을 1804년 12월 첫번째 대불 동맹국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영국은 당장 스웨덴령 포메라니아 (지금은 폴란드 땅)를 일부 빌려서 군사기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요.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앙기앵 공작의 납치 장면입니다.  프랑스의 사법권이 미치지 않는 외국에 살고 있던 앙기앵 공작을, 아예 용기병들을 보내 한밤중에 납치해다가 허술한 급속 재판 이후 총살해버린 것은 당시 유럽 왕족들을 크게 뒤흔든 대사건이었습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박정희가 일본에 있던 김대중을 납치한 것과도 비슷한 일이었지요.)



또한 러시아도 1805년 4월 결국 영국의 대불 동맹에 가입하게 됩니다.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 상태이던 러시아는, 오스만 투르크를 지원하던 영국으로서는 매우 껄끄러운 상대였던 상대였습니다.  지난 "발트 해의 포성" (http://blog.daum.net/nasica/6862507 참조) 편에서 다루었듯이, 영국과 러시아는 짜르 파벨 1세가 암살되기 전인 1801년 사실상 전쟁 상태일 정도였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영국과 손을 잡은 것은 파벨 1세 (Pavel I)가 암살된 후 그 뒤를 이은 알렉상드르 1세 (Alexandre I)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약간 과대망상증에 빠진 양반이었는데, 그는 처음에는 프랑스의 헌법과 나폴레옹 개인에 대해서 극찬을 할 정도로 프랑스파였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종신 통령이 되면서부터 '저건 아니지 않나' 라는 의견을 내놓더니, 결국 앙기앵 공작 처형 사건 이후 '나폴레옹은 괴물 독재자'라고 결론을 내리고 영국과 손을 잡게 된 것입니다.  그는 나폴레옹과 싸우는 것이 인류애를 위한 길이라고 진정으로 믿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을 무찌른 실질적인 주인공, 알렉상드르 1세의 모습입니다.)



한편, 영국의 입장에서는 유럽 대륙에서 전쟁이 빨리 일어나주어야 했습니다.  왜냐고요 ?  영국을 침공하겠다고 불로뉴 해안에 잔뜩 집결한 나폴레옹의 '영국 방면군'을 빨리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거든요.  스웨덴은 좀 그렇다치고, 러시아는 뭔가 큰 도움이 될 법한 묵직한 동맹이었습니다만, 그래도 진짜 뭔가 전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다시 관록의 제국인 오스트리아의 참여가 절실했습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3차 대불 동맹에 끌어들인 것은 또 다시 나폴레옹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북부 이탈리아가 문제였습니다.

오스트리아를 2차 동맹 전쟁에서 탈락시켜 2차 동맹 전쟁을 실질적으로 종료시킨 것은 1801년의 루네빌 (Lunéville) 조약이었지요.  이 조약은 먼저 1800년 6월에 나폴레옹이 거둔 마렝고 전투, 그리고 같은 해 12월에 모로가 거둔 호엔린덴 전투에 의해 궁지에 몰린 오스트리아가 어쩔 수 없이 맺은 화평 조약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별로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1797년 나폴레옹에 의해 팔이 비틀린 채 맺어야 했던 1차 동맹 전쟁 때의 캄포 포르미오 (Campo Formio) 조약의 내용을 재확인하는 것 정도였지요.  그 내용은 오스트리아가 패전국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불공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프랑스의 영향력은 라인강 좌안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말썽이던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파르마 공국 (Duchy of Parma)만 프랑스에게 양보되었고, 기타 치살피나 (Cisalpine) 공화국, 헬베티카 (Helvetica) 공화국 (스위스), 리구리아 (Liguria) 공화국 등은 그 중립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양측이 모두 존중하기로 했습니다.  더불어 바타비아 (Batavia) 공화국 (네덜란드)의 중립성도 보장되었습니다.  대신 파르마를 잃은 부르봉 왕가 사람들에게는 투스카니 대공국을 재조립해서 만든 에트루리아 왕국(Kingdom of Etruria)을 주게 되었고, 연쇄 작용으로 투스카니 공국을 상실한 투스카니 공작에게는 독일 내인 잘츠부르크(Salzburg)가 영지가 주어졌습니다.  또 캄포 포르미오 조약 때 오스트리아에게 양도되었던 베네치아 공화국 및 그 영토도 여전히 오스트리아의 몫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이것이 1796년의 이탈리아입니다.  나폴레옹의 제1차 이탈리아 침공 이후, 이 지도는 크게 변하게 되지요.  저 지도에서, 북서쪽의 사르디니아 왕국과 그 서쪽의 베네치아 공화국 사이의 분홍색 땅에는 별다른 표시가 없는 것이 보이실 겁니다.  저 땅이 바로 롬바르디아입니다.  왜 아무 표시가 없냐고요 ?  실은 저 분홍색 표시 자체가 표시입니다.  즉, 저곳은 오스트리아가 직접 통치하는 곳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직을 겸임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라인강 좌안까지 빼앗긴 것이 몹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겠습니다만, 케사르도 넘지 못했던 라인강이라는 경계선은 지켜 내었으니, 그래도 좀 나은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북부 이탈리아에서도 오스트리아는 최소한의 체면은 지킬 수 있었습니다. 
최소한 리구리아(제노아)나 치살피나(롬바르디아) 등의 지역은 형식적으로나마 중립 지역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스트리아 자신도 과거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쫓겨나기는 했습니다만, 사실상 나폴레옹에게 완전히 점령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북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땅으로 완전히 빼앗긴 것은 작은 파르마 공국 뿐이었으니까요. 




(이 지도는 1803년 경의 이탈리아를 보여줍니다.  이미 치살피나 공화국은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투스카니 공국은 에트루리아 왕국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그대로였지요.  사실상 프랑스의 속국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체면이 무너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1804년 황제에 즉위한 나폴레옹이 내친 김에 1805년 3월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으로 등극한 것입니다.  갑자기 이탈리아 왕국이라는 물건은 어디서 튀어나왔을까요 ?  기존에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던 롬바르디아 지방은 나폴레옹에 의해 1802년에 밀라노를 중심으로 한 치살피나 공화국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치살피나 공화국은 형식적으로는 중립국이었으나 사실 프랑스의 속국이나 다름 없었지요.   이 공화국은 이미 1802년에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그나마 1805년 3월, 나폴레옹이 제멋대로 공화국을 폐지하고 이탈리아 왕국을 선포한 뒤, 자신이 그 국왕에 즉위하여 이미 머리에 얹은 프랑스 황제의 왕관 위에 또 하나의 왕관, 즉 근 800년의 전통을 가진 북부 이탈리아의 왕관인 '롬바르디아의 무쇠 왕관' (Iron Crown of Lombardy)을 쓴 것입니다.  이 '롬바르디아의 무쇠 왕관'은 전통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왕이 로마에 가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의 대관식을 거친 뒤, 돌아가는 길에 당연히 밀라노에 들러 하나 더 얹고 오는 물건이었습니다.  즉, 롬바르디아는 비록 형식적으로는 오스트리아 직할령이 아니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오스트리아의 직접 통치를 받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황제가 된 나폴레옹이 밀라노에 가서 이 무쇠 왕관을 자기 머리에 얹었다는 것은 신성 로마 제국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롬바르디아의 Iron Crown 입니다.)



이는 루네빌 조약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일이었고, 한때 자신의 영토였던 롬바르디아를 완전히 프랑스에게 빼앗기는 것을 뜻했습니다.  아무리 오스트리아가 그동안 프랑스에게 정신없이 얻어터지는 역할만 하는 밥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이건 참을 수 없는 행위였습니다.  왜 나폴레옹은 굳이 이런 도발 행위를 저질렀을까요 ?  일단 나폴레옹 개인의 야망이 있었습니다.  그는 '타인의 야망은 조롱하면서도 자신의 야망에는 밑바닥이 없는' 사람이었거든요.  그가 총사령관으로서 최초로 승리를 거두고 처음으로 오스트리아를 분쇄한 뒤 점령했던 롬바르디아에 대한 욕심이 분명히 났을 것입니다.  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본명은 나폴리오네 부오나파르떼로서, 그 자신에게는 이탈리아어가 모국어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인 롬바르디아는 분명히 의미가 있는 물건이었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런 부유한 지역을 자신의 제국에 편입하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큰 도움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동네북이나 다름없는 오스트리아 놈들에게는 이래도 돼' 라는 판단도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도, 오스트리아는 분명 크게 분개했지만 그렇다고 감히 프랑스와 당장 전쟁을 할 엄두까지는 내지 못했습니다. 




(롬바르디아의 수도인 밀라노는 지금도 파리를 뺨치는 이탈리아 최고의 명품 패션 도시입니다.  그러나 여행 가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 밀라노 대성당 빼면 사실 뭐 별로 볼 건 없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당시 나폴레옹은 영국을 침공한답시고 불로뉴에 무려 20만 대군을 모아놓은 상태였는데, 이렇게 멀리 서쪽 섬나라로 원정을 떠나기 직전에 제국의 동쪽 끝에 위치한 강적인 오스트리아를 격분시킨다는 것은 분명히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사실 나폴레옹이 노렸던 것은 영국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였다는 의심도 꾸준히 제시되었습니다.  일부러 빈틈을 보여서 오스트리아를 다시 한번 밟아주려 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원인이 영국의 황금이든 앙기앵 공작의 살해이든 간에, 3차 대불 동맹이 맺어지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과 그토록 많은 이해 관계에서 충돌할 수 밖에 없는 불편한 이웃인 오스트리아가 결국엔 그 3차 동맹에 가입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역사적으로 프랑스의 동부를 위협하는 구 세력, 즉 신성 로마 제국으로 대표되는 독일 국가들의 연합 구조를 한번 짓밟아 놓고 그 근본 구조를 재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루이 14세 시절부터 내려오던 프랑스의 숙원 과제였으니까요. 


그를 위한 사업의 시작점으로서, 나폴레옹이 일부러 롬바르디아를 병합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당연히 합스부르크 가문의 것이던 롬바르디아의 무쇠 왕관을 공공연하게 차지한다면 둘 중 하나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거든요.  첫째, 만약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나폴레옹의 웅후한 무력에 겁을 먹고 꼬리를 말아쥔다면, 독일 계통의 군소 국가들에게 몰락한 오스트리아의 실체를 뚜렷이 각인시켜줄 수 있었습니다.  둘째, 만약 오스트리아가 이 모욕을 참지 못하고 프랑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면, 어디까지나 침략자가 아닌 정당한 방어자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오스트리아를 철저히 밟아줄 수 있었습니다.  어느 쪽이 되었건, 결국 이는 신성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해체로 이어지는 엄청난 결과를 낳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날아온 젊은 독수리에 의해, 유서깊은 신성 로마 제국의 상징인 쌍두 독수리가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나폴레옹은 이런 쇼를 벌였던 것이었을까요 ? 이미 황제까지 된 몸인데, 만약 전쟁을 하고 싶으면 그냥 황제의 칙령으로 전쟁을 하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  사관학교 시절 그의 친구이자 통령 시절까지 그의 개인 비서 역할을 수행했던 부리엔 (Louis Antoine Fauvelet de Bourrienne)의 회고록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항상 프랑스의 주된 전장이었던 독일에서 (라이벌이었던 모로 장군처럼) 빛나는 승리를 거두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나폴레옹의 황제 직위는 과거 혁명 이전처럼 절대 왕정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프랑스 시민들의 동의 하에 국민 투표로 얻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전쟁을 하고 싶다고 황제 마음대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랬다가 혹시 패배라도 한다면 국민들이 등을 돌릴 것이고, 나폴레옹의 권력 기반은 바로 국민인데 그 지지를 잃었다가는 황제의 자리까지도 빼앗길 것이 뻔했으니까요.  부리엔에 따르면, 그런 점 때문에 나폴레옹은 실제로는 자신이 먼저 침공 계획을 세워놓고는, 항상 침공받는 측이 적어도 겉으로는 먼저 선전포고를 하도록 책략을 꾸미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나폴레옹과 동갑으로서, 사관학교 동기였던 부리엔은 나폴레옹의 친구 중 하나였으나, 공금을 착복하다가 걸리는 바람에 1805년 당시에는 함부르크 자유시 주재 프랑스 대사로 쫓겨난 상태였습니다.  그 때문에 나폴레옹이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 대한 그의 기록은 별로 내용이 없습니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는 이 3차 대불 동맹 전쟁의 결과, 애초에 불가능했던 영국 정복을 제외하고는 나폴레옹이 원하던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으니, 훗날 영국 침공은 나폴레옹이 온 유럽을 멋지게 속인 하나의 거대한 페인트 모션이었다는 이야기가 계속 나왔습니다.  하지만 지난 '트라팔가로 가는 길' (http://blog.daum.net/nasica/6862518 참조) 편에서 보셨듯이, 나폴레옹은 정말 영국을 침공할 생각이었습니다.  그 사실은 나폴레옹이 영국 침공을 얼마나 진지하게 열심히 준비했는지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팔아넘기고 받은 6천만 프랑이라는 거금을 ('불로뉴 한가운데서 영국 침공을 외치다' http://blog.daum.net/nasica/6862514 참조) 이 침공 준비에 거의 다 써버릴 정도였으니까요.  하다 못해 영국 침공 때 공을 세운 부하들에게 수여하기 위해 미리 주조해둔 엄청난 수의 훈장만 보더라도, '만약 이 모든 것이 페인트 모션이라면 정말 대단한 규모의 페인트 모션'인 셈이었습니다.





아무튼 오스트리아는 이 '롬바르디아의 무쇠 왕관' 사건을 계기로 3차 대불 동맹에 한발 더 접근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당장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게 선전 포고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온갖 구태와 특권으로 점철된 오스트리아 지배층에도 냉철하고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인물이 있긴 했거든요.  바로 오스트리아 제일의 명장 카알 대공 (Erzherzog Karl von Österreich)이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과 모로에게 패배를 당한 이후, 이대로는 프랑스 군에게 당할 수 없다고 보고 군사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카알 대공은 현재 상태에서는 오스트리아 군은 도저히 프랑스 군의 적수가 아니라고 보고,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뭐든 새로운 것이라면 다 반대하는 수구꼴통들로 가득찬 오스트리아 귀족들이 이런 카알 대공을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 (Franz II)의 동생이었던 그도 이런 수구꼴통 귀족들의 등쌀에 버티지 못하고 실권을 잃게 됩니다.  그가 실권을 내놓을 수 밖에 없게 된 것은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가 결국 프랑스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은 남부 독일의 바이에른(Bayern, 영어식으로는 Bavaria)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바이에른이 소국이라고는 해도, 독일 국가들 중에서는 프로이센 바로 다음으로 큰 나라였습니다.)



바이에른은 뮌헨(Munchen, 영어로는 Munich)을 수도로 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일원인 선제후(Elector)가 주권을 행사하는 공국(Duchy)이었습니다.  즉 나라가 작아서 왕국(Kingdom)조차 되지 못한 소국이었지요.  당연히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2세의 직접적인 영향권 하에 있어야 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라는 두 고래 사이에서 등이 터지는 새우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모로와 나폴레옹 - 호헨린덴 전투" (http://blog.daum.net/nasica/6862505 참조) 편에서 보셨듯이, 모로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라인 방면군이 오스트리아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호헨린덴은 바이에른의 수도인 뮌헨 동쪽에 있습니다.  즉, 프랑스 혁명 와중에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바이에른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전쟁터가 되기 일쑤였던 것입니다. 




(이 분이 나중에 바이에른의 왕 막시밀리안 1세가 되는 막시밀리안 요제프입니다.  그는 자신의 직위가 일개 선제후에서 왕으로 승격되는 대신, 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이자 조세핀의 친아들인 외젠 보아르네를 사위로 맞아들이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이에른의 선제후였던 막시밀리안 요제프 (Maximilian Joseph)는 당연히 이 두 대국 중 하나를 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선택의 순간이 다소 성급하게 다가왔습니다.  저 멀리 불로뉴에 있던 나폴레옹이  8월 13일 편지를 보내온 것입니다.  내용은 '오스트리아냐 프랑스냐 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중립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매우 부시(Bush)스러운 꼬리말까지 달았습니다.  나폴레옹은 갑자기 왜 이런 협박장을 보냈을까요 ?  이미 나폴레옹의 정보망에는, 오스트리아가 실질적으로 이미 3차 대불 동맹에 가입했고, 비밀리에 병력을 동원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어디까지나 공격을 하는 남자였지 쳐들어오는 적을 막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벌어질 전쟁이라면, 이쪽에서 먼저 선제 공격을 하는 것이 더 유리했지요.

점점 민족주의가 떠오르던 이 시기에 독일어가 모국어였던 막시밀리안은 당연히 같은 독일 민족인 오스트리아를 택했을까요 ?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직전까지만 해도 막시밀리안은 무려 12년간 프랑스 군에서 복무하던 장성급 장교였습니다.  외국인 귀족이 프랑스 군에서 고위 장군으로 복무한다니 현대적인 감각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렵지요 ?  하지만 당시 유럽의 국가 개념이란 민족 등과는 별로 상관이 없고 어디까지나 왕가 가문간의 놀음에 불과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프랑스 혁명 때문에 프랑스 군에 사표를 제출했던 막시밀리안은 곧장 오스트리아 군으로 이적을 할 정도였습니다. 




(이 코 큰 아저씨가 몽겔라스 백작입니다.  지금의 독일 역사에서는 아마 반민족주의자이자 기회주의자 정도로 치부될 것 같습니다만, 실제 평가는 어떨런지 모르겠습니다.)



젊은 시절을 프랑스에서 보낸 막시밀리안은 친 프랑스적인 정서가 강했습니다.  비록 혁명 때문에 쫓겨나기는 했지만, 그 전부터 프랑스에 널리 퍼져있던 계몽 정신이나 프랑스 혁명의 대의에 대해서도 공감하는 바가 컸지요.  그리고 그의 수상이었던 몽겔라스 (Maximilian von Montgelas)도 프랑스 땅이나 다름없는 사보이(Savoy) 출신으로서, 친 프랑스적인 성향이 강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막시밀리안이나 몽겔라스가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봐도, 대세는 나폴레옹이었습니다.  1805년 8월 25일, 바이에른은 프랑스와 군사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운명을 함께 하기로 맹세합니다. 

이 소식을 오스트리아도 알고 있었는지는 다소 불분명 합니다.  나폴레옹과 바이에른 간의 이 조약은 원래 비밀 조약이어야 했거든요.  아무튼 오스트리아는 이미 전쟁을 준비 중이었고, 어차피 프랑스를 침공하기 위해서는 바이에른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다가오는 프랑스와의 중부 독일 지역 전쟁에서 실질적인 도움이 될 만한 유일한 동맹국인 러시아에게도 급전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불과 2주일 뒤인 9월 8일, 오스트리아 영토인 티롤과 바이에른 사이의 자연 국경인 인 (Inn) 강을 건너 바이에른에 진입했습니다.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신성 로마 제국의 지도입니다.  가령 튜링겐의 영토 일부는 프로이센 영내에 마치 섬처럼 똑 떨어져 있는데, 회원 국가간에 자유 통행권이 없다면 몹시 불편할 것 같긴 합니다.)



이것이 바이에른 침공인지, 아니면 단순히 바이에른 진입인지에 대해서도 말이 많습니다.  저 위의 이탈리아 지도에서처럼, 중부 독일의 국경선은 상당히 복잡하여, 한 국가의 영토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따라서 신성 로마 제국의 회원국 간에는 군대를 이동시키기 위해 서로의 영토를 지나가는 것은 늘상 있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 군이 인 강을 건넜다고 해서 이것이 꼭 주권 국가인 바이에른의 영토를 침공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또, 오스트리아로서는 좀더 준비를 철저히 갖추고 또 러시아의 원병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침공 작전을 실시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이유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은 영국을 침공한답시고 유럽 대륙의 서북쪽 끄트머리인 불로뉴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으니까요.  그들이 바이에른 침공 소식을 듣고 달려왔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뒤일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지요.




(저 붉은 색으로 표시된 선이 인 Inn 강입니다.  북쪽의 도나우 강으로 흘러들어가지요. )



(티롤과 바이에른을 가로지르는 인 Inn 강입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이에른이 프랑스와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조약서에 서명한지 불과 2일 뒤인 8월 27일, 나폴레옹은 불로뉴에 집결했던 20만 대군에게 즉각, 그것도 매우 급히 바이에른으로 달려가도록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오스트리아가 바이에른 침공을 시작하기 무려 12일 전입니다.  이런 점을 보면 영국 침공 작전은 정말 속임수에 불과했던 것이고, 나폴레옹의 실제 목적은 오스트리아를 낚는 것에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나폴레옹은 빌뇌브 제독의 함대가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 침공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결국 알고 보면, 나폴레옹은 항상 플랜 A와 플랜 B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나폴레옹은 일이 잘 되어 플랜 A, 즉 영국 침공을 계획대로 진행하게 되면, 바이에른 정도는 희생시킬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뒤를 이을 오스트리아의 프랑스 침공 정도는 프랑스 국내의 2선 병력만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아무튼 운명은 플랜 A를 백지화시켰고, 나폴레옹은 플랜 B를 향해 동쪽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불로뉴에서 빌뇌브의 함대를 기다리는 나폴레옹의 모습입니다.  수평선에 빌뇌브의 함대가 나타나면 영국놈들이 죽는 거고, 안 나타나면 오스트리아 놈들이 곡을 하게 되는 겁니다.  어쨌건 누군가는 피눈물을 흘리게 되는 거지요.)



이 모든 과정에서, 겉으로 드러난 나쁜 놈은 바로 오스트리아였습니다.  약소국인 바이에른을 먼저 침공했으니까요.  나폴레옹은 어디까지나 부당한 침공을 당한 동맹국을 돕기 위해 검을 뽑은 정의의 기사였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가는 곳곳마다 이 사실을 200% 홍보하며 자신의 오스트리아 침공을 정당화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은 언제나 정당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전쟁의 승패가 정당성에 대한 모양새로 결정되는 것  아니었습니다.  확실히 나폴레옹은 바이에른을 지켜주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습니다.  아니, 실은 별다른 대책도 없이 바이에른을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그대로 노출시켰습니다.  나폴레옹이 몽골의 기병들을 이끌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당시 유럽의 도로 사정은 로마 시대만도 못하여 비만 오면 진흙구덩이로 변하기 일쑤일 정도로 엉망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어떻게 바이에른을 구원할 수 있었을까요 ?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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