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에서는 넬슨의 치명적인 부상에도 불구하고, 영국 함대가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그야말로 완력으로 제압하는 모습까지를 보셨습니다. 이렇게 완승을 거둔 영국 함대는 승리의 환호에 젖어 럼에 물을 탄 그록(grog)이라도 돌리며 축배를 들었을까요 ? 아니면 넬슨의 죽음에 대한 비통함으로 장엄한 슬픔에 빠져 있었을까요 ? 좀더 현실적인 이들은 자신의 몫으로 떨어질 나포 포상금(prize money)가 얼마쯤 될런지 남몰래 계산을 해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과연 현실은 어떠했을까요 ? 수병들에게 넬슨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자 이들은 물론 잠시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지요. 그들에게는 그렇게 넬슨의 죽음을, 그리고 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영국 함대의 많은 전함들이 돛대를 한두개씩, 혹은 모조리 잃었고, 또 홀수선 아래에 대포알을 얻어맞고 물이 콸콸 새들어오는 배들도 많았습니다. 10월 21일 하루 종일 식사도 못하고 치열하게 싸우느라 지치고, 동료들을 잃어서 슬프다고 해서 이렇게 부러진 돛대와 찢어진 돛을 누가 대신 고쳐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바로 그 지친 수병들이 주린 배를 딱딱한 건빵으로 대충 채우고 대규모 수리 작업을 벌여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청소까지 해야 했습니다. 프린스 호와는 달리, 대부분의 전함에서는 수십명~백여명의 사상자가 있었고, 인간이 대포알이나 머스켓 총탄에 맞을 때는 많은 양의 피와 오물을 그 자리에 흩뿌리게 되어 있습니다. 오크 목판에 이렇게 뿌려진 피와 오물은 영국 해군의 기준상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다 닦아내야 했지요. 그나마 자신들이 탄 전함을 수리하고 청소해야 했던 수병들은 복받은 편이었습니다.
(19세기나 20세기나 해군의 아침 일과는 거의 비슷합니다. 청소 청소 청소지요. 수병들이 갑판에 문지르고 있는 것은 성마석, 즉 holystone으로서, 두툼하고 네모난 모양이 성서와 비슷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적함을 나포하게 되면, 그 나포선으로 옮겨타서 긴급 수리를 하고 그 배를 가까운 아군항으로 몰고가는 선원들을 나포조(prize crew)라고 합니다. 이들은 본함보다 훨씬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대개 전함의 승무원의 500~700명이라면, 그 1/10 정도, 즉 50~70명을 나포조로 파견했습니다. 너무 많이 파견하면 모함의 임무 수행에 큰 지장이 생길 테니까요. 하지만 이들이 해야 하는 일은 모함에 남은 수병들보다 훨씬 과중했습니다. 모함이나 나포함이나 부서진 것들을 수리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일반적으로는 모함보다 나포함의 파손 정도가 훨씬 심한 편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랬겠지요. 그러니까 항복했을테니까요.) 훨씬 적은 인원으로 훨씬 더 많은 파손 부위를 수리해야 했으니 나포조로 파견되는 선원들은 일단 죽었다고 봐야 했습니다.
(우리 배가 다 부서졌을 때, 누가 이걸 고쳐주지 ? 바로 여러분 !)
이날 나포된 프랑스 및 스페인 전함들은 하나같이 손상 정도가 매우 심했습니다. 특히 불굴의 르두터블 같은 전함은 그야말로 온전히 남아 있는 물건이 거의 없을 정도였고, 과연 이 배가 지브랄타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거침없이 물이 콸콸 새어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낮 동안에 자신들의 대포로 신나게 부숴 놓은 이런 배들을 수리해야 했던 영국 수병들은 '낮 동안에 좀 살살할 걸' 하고 후회도 했을 겁니다. 게다가 이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많은, 보통 7~8배 되는 적 수병들을 갑판 밑에 가둬두고 감시하는 역할까지 동시에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나포조로 나가는 것은 보통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이유가 뭐냐고요 ? 이들은 긴급 수리만 마치고 나면, 곧장 그 배를 몰고 모항으로 돌아갈 수 있었거든요. 그에 비해 모함은 그 해역에 계속 남아서 하던 초계 임무를 계속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하지만 트라팔가 해전에서의 나포조 수병들은 별로 즐거운 결말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정도의 고난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지, 운명은 이들에게 더욱 가혹한 시련을 보내왔거든요. 그것도 전투 종료 불과 5~6시간 후인 바로 그날밤에요.
(바다가 위험한 것은 프랑스 해군 때문이 아닙니다. 오브리 시리즈의 주인공이자 뛰어난 뱃사람인 잭 오브리 함장조차도 전체 시리즈에서 여러차례에 걸쳐 배를 좌초시키거나 폭풍에 휘말려 침몰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혼블로워(Hornblower)나 오브리-머투어린(Aubrey-Maturin) 시리즈와 같은 해양 소설에는 기본적으로 3가지의 투쟁이 모두 들어있다는 평이 있지요. 그 3가지 투쟁이란 이렇습니다. 외부와 고립된 환경에서의 자기 자신과의 투쟁, 동료 선원들이나 적과 같은 인간과의 투쟁, 그리고 바로 바다라는 자연과의 투쟁입니다. 넬슨은 고립된 함대 내에서는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절대 권력자이지만, 반면에 그 모든 판단과 책임을 혼자서 지고 가야 했다는 점에서 그 누구보다도 내면의 투쟁에 시달린 사람입니다. 엠마와의 축복된 관계를 인정받기 위한 노력, 그러기 위해 빌뇌브를 유인하여 잡아내야 한다는 압박감, 빌뇌브를 놓쳤을 때의 자책감 등등 친한 부하들과도 나눌 수 없어 혼자서 삭여야 했던 갈등이 많았지요. 약 6시간 동안 진행된 트라팔가 해전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투쟁을 정말 잔혹하게 폭발시킨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인간과의 투쟁' 부분만을 주목하고 기억합니다. 하지만, 고된 싸움을 끝내고 동료와 넬슨의 죽음을 슬퍼하던 영국 함대는 물론이고, 영국 해군에게 항복하여 풀이 죽어 있던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조차도 아직 한번 더, 훨씬 더 무자비하고 위험한 상대와의 싸움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바로 바다와의 싸움이었습니다.
바다에서 배를 지휘하는 함장들은 항상 배나 선원들의 상태 못지 않게 날씨의 향방에 많은 신경을 쓸 수 밖에 없습니다. 트라팔가 해전과 같은 거사를 앞둔 상태에서도, 넬슨 역시 날씨 변화의 향방을 계속 신경쓰고 있었습니다. 당시 함장들에게는 위성사진에 의한 제대로 된 일기예보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만, 간단한 액체 기압계를 선실에 두고 기초적인 날씨 변화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 괴테, 영국 해군, 그리고 일기예보 http://blog.daum.net/nasica/6862411 참조) 덕분에 넬슨은 트라팔가 해전이 시작되던 당일 아침, 저녁 무렵이면 폭풍이 불어닥칠 것이라고 예상했고, 전투가 종료되면 전 함대에게 닻을 내리라고 명령을 해둔 바가 있었습니다. 또,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죽어가면서 남긴 많은 말 중에는, '꼭 닻을 내리라고 전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이건 복원된 빅토리 호의 닻입니다만, 당시 빅토리 호의 경우는 프랑스 넵튠에게 포격을 받을 때 이걸 날려 먹었습니다.)
전투를 겪지 않아 돛과 닻, 그리고 수병들이 모두 온전한 전함조차도, 거센 폭풍이 불어오면 파선당하지 않기 위해서 온갖 고생을 다 해야 했습니다. 평상시에는 수병들은 2교대로 돌아가며 쉴 수 있었으나, 이런 폭풍 상황에서는 쉰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함장조차 차가운 바람과 파도에 그대로 노출된 채 흠뻑 젖은 옷차림으로 24시간 이상을 갑판에서 보내는 경우도 많았으니까요. 난파를 막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파도의 방향과 크기 등을 살피면서 그런 파도들을 뱃머리로 타고 넘도록 돛과 키를 잘 조정해야 했는데, 이것도 대단한 기술과 숙련도를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까딱 잘못하여 이런 파도를 배 옆면으로 받았다가는 배가 뒤집히거나 용골이 부러지면서 한순간에 난파 (foundering) 당하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트라팔가 해전에서 살아남은 전함들은 이런 폭풍을 부러진 돛대와 잘려나간 삭구들, 그리고 전투로 인해 대폭 줄어든 선원들만으로 이겨내야 했습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대책은 닻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닻이 바닥에 고정될 수 있는 비교적 낮은 수심에 전함이 위치해 있었다면요. 특히 영국 함대에게는 닻을 내려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폭풍의 방향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불어오는 것이었는데, 당시 영국 함대의 동쪽에는 적국인 스페인 땅이 살짝 불편할 정도로 가까이 있었거든요. 사실 동쪽이 스페인 땅이 아니라 고국인 영국 땅이라고 해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폭풍이 전함들을 가볍게 동쪽으로 몰아붙여 해안가에 좌초시킬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넬슨은 전투 종료 직후에는 닻을 내리라고 지시했던 것입니다.
(육지에 가까운 곳에서 폭풍을 만났을 때는 차라리 저렇게 이물쪽에 닻을 넉넉한 길이로 던져 놓고 파도에 배를 맡기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리에 맞고, 더군다나 하늘과도 같은 넬슨의 유언인데, 과연 영국 함대는 전투 종료 후에 닻을 내렸을까요 ? 안 내렸습니다 ! 하긴 넬슨의 유언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내 여자 엠마에게 충분한 연금을 보장해다오'라는 말조차 '마치 아무도 그런 말 들은 적 없다'는 듯이 가볍게 개무시되어 버리는 마당인데, 그런 사소한 항해 실무 판단은 이제 넬슨의 사후 전체 지휘권을 넘겨 받은 콜링우드가 내리는 것이 맞았겠지요. 그리고 콜링우드는 넬슨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닻을 내리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콜링우드가 닻을 내리지 않은 것도 다 사정이 있어서였습니다. 많은 함선들이 치열한 포격전 속에서 닻을 잃었던 것입니다. 또 닻이 남아 있던 전함들도 차라리 파도를 타며 폭풍을 이겨 내기 위해서는 배를 움직일 공간이 넓은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아무튼 영국 함대는 정말 놀라운 투지와 기술을 발휘하여, 단 한 척의 배도 잃지 않고 무려 1주일이나 계속된 이 거센 폭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력면에서나 함체의 상태면에서나 최악의 상황이었던 나포 전함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가장 심한 손상을 입었던 전함인 르두터블과 뷔생토르는 결국 침몰하고야 말았습니다. 이때 많은 프랑스 포로들이 영국 수병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희생되어야 했던 것은 물론이었지요. 스페인 전함 알게시라스 (Algesiras) 호의 경우는 그나마 좀 해피 엔딩에 속했습니다. 거센 폭풍 속에서 제한된 인원으로 도저히 배의 조종이 어렵게 되자, 나포조로 승선했던 수십명의 영국 수병들은 결국 갑판 밑에 가둬두었던 스페인 선원들을 석방할 수 밖에 없었고, 이들은 당연히 영국 수병들을 제압하고 배를 몰아 카디즈 항구로 무사히 도주했습니다. 하지만 훈훈하게도, 스페인 당국은 이렇게 감시병의 입장에서 포로로 전락해버린 영국 수병들을 폭풍이 끝난 뒤 영국 함대에게로 석방해주는 아량을 베풀어주었습니다.
(트라팔가 해전 이후 불어온 폭풍을 그린 그림입니다만, 저렇게 전함들이 오밀조밀 붙어 있는 상태에서 폭풍이 밀어닥친다면 전함들끼리 부딪혀서 계란처럼 깨질 것이 뻔했습니다. 실제로는 각 전함들은 바람이 거세지면 서로 멀찍이 떨어져 공간을 확보합니다.)
알고보면 스페인은 영국과의 감정이 그렇게까지 나쁜 편은 아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스페인은 나폴레옹에게 코가 꿰여 괜히 원치 않는 전쟁에 말려든 것이니까요. 믿을 만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뒤마누아르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 함대 선두 분대가 2시간 만에 선회하여, 영국 함대에게 포격을 퍼부었는데, 그때 이미 항복한 스페인 전함에게도 포격을 가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 격노한 스페인 수병들이, 자신들을 포로로 잡은 영국 해군 나포조에게 '자신들에게 대포를 맡겨달라, 저 프랑스 놈들에게 포격을 하고 싶다' 라고 간청을 했다는 것입니다. 또 나폴레옹이 '빌뇌브 대신 이 사람이 프랑스 제독이었다면' 하고 칭찬했다는 그라니바(Gravina) 제독은 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간신히 포로가 되는 것을 면하기는 했지만, 그 전투에서 얻은 부상이 악화되어 결국 다음 해 3월에 49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그때의 유언이 '나는 죽지만 행복하게 죽는다... 바라고 믿건대 나는 이제 세계 최고의 영웅 넬슨과 만나러 가기 때문이지' 뭐 그런 식의 약간 닭살 돋는 대사였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의 조국에게 이토록 치욕적인 대패를 안겨준 적장에 대한 감정치고는 상당히... 좀 그렇습니다.
(이분이 바로 그라비나 제독입니다. 미국 독립 전쟁에도 참여했었던 경험많고 능력있는 해군 장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영국 함대가 싸워야 했던 것은 폭풍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폭풍 속에서라면 영국 해군도 혼이 반쯤 나간 상태일 것이라고 판단한 연합 함대의 잔존 세력이 반격을 해온 것입니다. 원래 33척의 전함 중 탈출하여 카디즈로 입항한 것은 11척에 불과했는데, 그나마 항구에서 조사를 해보니 다시 바다로 나갈만 한 상태라고 판정을 받은 것은 5척에 불과했습니다. 포로로 잡힌 빌뇌브를 제외하고 가장 높은 계급이었던 그라비나 제독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상태였으므로, 연합 함대의 지휘권은 치열한 전투를 벌인 뒤에도 무사히 탈출 작전을 성공시킨 전함 플루통 (Pluton)의 함장인 코마오 (Julien Cosmao)에게 넘어갔습니다. 코마오 함장은 전투 2일 뒤인 10월 23일, 과감하게 이 전함 5척 전부와 프리깃함 5척을 다 이끌고 출격, 영국 함대에게 그야말로 폭풍 속에 도전을 했습니다. 하지만 거센 폭풍 속에서는 도전한 측이나 이를 막아선 측이나 정상적인 포격전을 벌일 형편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양측이 폭풍 속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할 때, 작은 프랑스 프리깃함들이 성과를 올렸습니다. 이들이 나포되었던 스페인 전함 2척, 즉 산타아나와 넵튜노에 승선하여 스페인 포로들을 석방하고 배를 다시 되찾은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프리깃함 Themis 호가 되찾은 스페인 전함 산타아나 호를 밧줄로 묶어 견인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산타아나는 돛대가 다 부러졌거든요.)
하지만 역시 이런 거친 폭풍 속에 미숙한 수병들을 데리고 출격을 한 것은 그다지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되찾은 넵튜노는 그만 난파되어 침몰해버렸고, 카디즈에서 재출격한 5척의 전함 중 하나였던 엥동터블(Indomptable)까지 그만 폭풍 속에 침몰해버렸던 것입니다. 이때 엥동터블에 승선했던 1,200명의 수병 중 겨우 100명 정도만 구조되었고, 나머지는 하릴없이 물고기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산 프란시스코 드 아이스(San Francisco de Asis)는 해안가에 좌초되어 버렸고, 라요(Rayo)는 폭풍 속에서 돛대를 잃고 닻을 내렸다가, 결국 지브랄타에서 돌아오던 영국 전함 도네갈 (HMS Donegal) 호에게 나포되었다가 결국 좌초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폭풍과 코마오의 도전 속에서 잠깐 탈출했던 에글(Aigle)과 베르윅(Berwick)도 결국 침몰해버렸습니다. 결국 연합 함대의 재도전은 본전을 못찾은 적자 장사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건들 속에서 프랑스-스페인 수병은 물론이고, 이런 나포 전함들에 승선했던 영국 해군 나포조 수병들도 많이 희생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성과도 있긴 했습니다. 연합 함대가 재도전해오면 결국 나포전함들을 더 빼앗길 것이라고 염려한 콜링우드 제독이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를 비롯하여 손상 정도가 심했던 나포 전함들을 그냥 자침시켜버렸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나포된 전함들 21척 중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영국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고작 4척에 불과했습니다.
(바다는 무서운 것이어서, 바로 육지 옆에서 좌초를 한다고 해도 대부분의 선원들은 목숨을 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최종적으로 나포된 전함 숫자가 겨우 4척이라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나포 포상금 문제로 끌고 갑니다. 전에 넬슨이 거뒀던 대승인 아부키르 해전에서의 나포 포상금이 얼마나 후했는지 보셨지요. ( 아부키르 해전 - 에필로그 http://blog.daum.net/nasica/6862486 참조) 아부키르 해전보다 훨씬 더 큰 승리였던 트라팔가 해전의 결과로는 훨씬 더 큰 포상금이 내려졌을까요 ? 신기하게도, 트라팔가 해전의 나포 포상금에 대해서는 정보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예상보다는 훨씬 박한 포상금이 주어졌다는 이야기지요. 아마 그럴 법도 한 것이, 이 승전보와 함께 대륙에서 나폴레옹이 거둔 눈부신 승리들이 연달아 들어왔기 때문에, 영국 의회도 장교들과 수병들에게 옛다 기분이다 하면서 돈을 펑펑 쓸 처지가 아니었을 겁니다. 이제부터 대륙에서의 전쟁에 쓸 돈이 엄청나게 늘어날 상황이었을테니까요.
트라팔가 해전 이후 약 1년 반이 지난 시점인 1807년 3월 28일자 런던 가제트 (London Gazette) 지에 공고 하나가 난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이 공고에서는 트라팔가 해전에 참여했던 하급 간부(Petty Officers, 포술장, 부항해사 등등)들과 일반 수병에 대한 나포 포상금이 적혀 있습니다. 하급 간부들의 1인당 몫은 10파운드 14실링, 수병들은 1파운드 17실링 6펜스입니다. 이로부터 전체 나포 포상금이 얼마였는지를 대충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런던 가제트 지의 공고입니다. 맨 마지막 줄에 있는 크리스토퍼 쿡이라는 양반은 정부를 대행하여 그런 지불 업무를 맡았던 prize agent 의 이름입니다. 영국에서 금융이 발달한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많은 업무를 민간에 위탁했거든요.)
하
급 간부들과 수병들은 각각 전체 포상금의 2/8 씩을 나누어 갖게 되어 있었고, 총 27척의 전열함과 6척의 프리깃, 슬룹 함에
탔던 수병 수가 17,346명이었습니다. 여기서 하급 간부들의 1인당 몫인 10.7파운드와 수병들의 1인당 몫인 1.875
파운드가 바로 이들의 머리수 비율을 말해 줍니다. 하급 간부들, 그러니까 보조 목공장, 군의관 조수, 해병 하사관 등은 전체
포상금의 1/8을, 그리고 수병들은 전체 포상금의 1/4을 나눠 갖게 되어 있었거든요. 하급 간부 대 수병들의 머리수 비율은
10.7*2/1.875 = 11.4배 정도로 수병들이 많았던 것이지요. 이를 토대로 대충 전체 인원의 8%가 하급 간부이고
91%가 수병이라고 계산하면, 즉 전체 인원의 1%가 상급 간부라고 계산한다면, 전체 포상금은 약 120,000 파운드가
됩니다. 나포된 총 적함의 수가 4척이니까, 1척당 30,000 파운드를 쳐준 것입니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 볼 때 그저
표준적인 포상금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포되어 최종적으로 영국 해군성에 인도된 전함의 수가 고작 4척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아부키르 해전 때에 비하면 너무 초라한 편이었습니다. 아부키르 해전 때는 다 부서져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던 나포함조차도 척당
2만 파운드씩 포상금을 지불했던 것에 비하면 정말 짠돌이 포상금인 셈이지요.
(목숨을 건 댓가는 의외로 저렴했습니다. 대부분의 트라팔가의 영웅들에게 주어진 것은 저 1쉴링 짜리 은화 37.5개였지요. 1787년에 주조된 조지 3세의 1실링짜리 은화입니다.)
씁쓸한 이야기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 공고에서 밝히는 바는, 이 포상금을 Clements Inn 이라는 여관에서 3일간 지불할 예정이니 받아가라는 것과 함께, 이때 못받아가더라도 3개월간은 유예 기간을 두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3개월이라니요 ? 아마 트라팔가에서 살아남은 대부분의 수병들은 당시 또 군함을 타고 어느 먼 바다에서 복역... 아니 복무 중이었을텐데, 3개월 동안에 받아가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 이때 3개월 안에 못 받아가는 수병들의 몫은 전상자들을 치료해주는 그리니치 (Greenwich) 병원의 운영비로 몰수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행정 업무에 밝은 수병들이야 3개월 후에라도 그 돈의 환불을 청구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아마 그 사이에 거친 군함 생활 속에서 사고나 질병, 전투로 사망하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고, 또 무식 때문에 (당시 대부분의 수병들은 문맹이었지요) 그렇게 자신의 몫을 복잡한 행정 절차를 거쳐 찾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의심스럽습니다.
함장들의 경우는 어땠을까요 ? 이런 식으로 계산이 되면 함장들도 1인당 고작 900 파운드 정도 밖에 못 받았습니다. 하지만 함장들이야 이미 지배계급에 있는 사람들이다보니, 의회에서 이런저런 특별 포상 같은 것을 해줬나 봅니다. 가령 산티시마 트리니다드의 항복을 받아내려다가 고작 64문짜리 작은 전함이라는 이유로 쫓겨나는 굴욕을 당했던 HMS Africa의 함장 딕비 (Henry Digby)는 트라팔가 포상금 973 파운드에 (제 계산대로라면 900 파운드인데, 어딘가 계산에 구멍이 있었나봐요) 특별 정부 포상금 2389 파운드 7실링 6펜스를 따로 더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금의 가격을 기준으로 현재 가치를 대충 환산해보면, 딕비 함장의 경우 혼자서 약 10억원을, 수병들은 1인당 약 55만8천원을 받은 셈입니다. 아무튼 있는 놈들은 있는 놈들끼리 해먹는 법입니다. 좀 씁쓸한 이야기지요.
(아프리카의 함장이었던 딕비는 트라팔가 해전 이전에도 나포 포상금 측면에서는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어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적함을 나포할 경우, 그것이 처분되어 정식으로 포상금이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장교들과 선원들에게 자기 돈으로 미리 포상금을 지불하는 하는 배포와 재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하늘은 이렇게 아량있는 사람에게 더 큰 복을 내리는지 1799년 스페인 프리깃함 Santa Brigida 호를 나포하는 행운을 내렸습니다. 여기에는 무려 스페인 달러 은화가 140만개나 실려 있었기 때문에, 선체 가격을 빼고서라도 그 개인의 몫만도 무려 4만 파운드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Santa Brigida 호에 잔뜩 실려 있었다는 piece of eight, 스페인어로는 real de a ocho, 즉 스페인 달러 은화입니다.)
하지만 이런 불행 중 가장 큰 불행은 바로 넬슨의 연인이자, 어떻게 보면 이 트라팔가 해전이 벌어지게 된 간접적인 원인이 된 여인, 엠마 해밀턴에게 떨어졌습니다. 바로 넬슨의 죽음이었지요. 뿐만 아니었습니다. 넬슨은 그 유명한 '잉글랜드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무를...' 깃발을 올리기 전에, 빅토리 선실에서 여러 친우들과 상관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고 있었는데, 거기서도 다소 치졸하다 싶을 정도로 집요하게 '내가 혹시 죽더라도 엠마가 사회적 신분을 유지할 정도의 연금을 계속 지급해주기를 부탁한다' 라고 반복해서 썼다고 합니다. 심지어 냄새나는 빅토리의 선창에서 죽어가면서 남긴 유언 중에도 그 엠마에 대한 풍족한 연금 이야기를 할 정도였습니다. 넬슨도 자신이 죽으면 엠마는 가식적이고 고리타분한 영국 상류 사회에서 배척받을 것이 뻔하니, 하다못해 돈이라도 충분히 있어야 고생 안하고 여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을까요 ?
(트라팔가 해전 직전, 선실에서 편지를 쓰다 고뇌에 잠긴 넬슨... 그의 마음 속은 조국과 명예 외에도 엠마가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넬슨의 그 간절하고도 반복된 부탁이 전혀 없었다는 듯이 모두들 행동했습니다. 넬슨의 공적에 대한 찬사가 끊임없이 쏟아졌고, 아무 한 일도 없는 넬슨의 형인 윌리엄 넬슨이 백작으로 봉작을 받고 곧이어 브론테 (Bronte) 공작령까지 상속받았습니다. 하지만 엠마는 마치 투명 인간 취급을 했습니다. 엠마는 순식간에 알거지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원래 엠마는 예쁜 여자들이 흔히 그러듯이 (흔히 입니다...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허영심이 강하여 사치스러운 편이었고 결정적으로 도박을 즐겼습니다. 넬슨의 죽음과 함께 넬슨이 받던 봉급과 아부키르 해전의 공로로 주어진던 엄청난 액수의 연금도 매정하게 끊었졌는데도, 기존의 라이프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했으니 거지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지요. 엠마는 손가락질보다도 더 무섭다는 무관심 속에서 신용불량자가 되어 빚 때문에 투옥되기도 했으며, 궁핍 속에 딸 호레이시아(Horatia)와 함께 살다가 1815년 전쟁이 끝나기 전 프랑스 칼레(Calais)에서 병사하고 맙니다. 호레이시아는 엠마가 죽은 이후, 영국으로 되돌아 왔는데, 넬슨의 누나들이 이 아이를 지극히 이뻐하며 잘 키워주었다고 합니다.
(호레이시아 넬슨입니다. 딸은 아빠를 닮는다더니... ㅉㅉ 확실히 엄마는 별로 안닮았네요.)
한편, 이 해전의 주인공이었던 넬슨의 장례식 이야기를 안할 수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넬슨의 시체를 어떻게 영국까지 운구했는가에 대한 부분이지요. 원래 해전에서 발생한 전사자의 시체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즉시 바다에 던져 버리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이유는 당장의 전투에 걸리적거리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즉사한 것이 아니라서 일단 선창의 응급실로 내려갔다가 거기서 죽은 부상자들은 나중에 선장의 입회 하에, 수장을 시키는 것이 또한 전통이었습니다. 이때는 모두 원래 돛을 만들기 위해 보관되었던 캔버스 천으로 시신을 감싸고, 발에 포탄 같은 무거운 것을 묶은 뒤 간단한 예배와 함께 바다에 던져 넣었습니다. 어찌 되었건, 함장이건 말단 수병이건, 모두 고향 땅에 묻히기는 어려웠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몇개월 동안 시신이 부패하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하지만 넬슨의 경우는 물론 특별했지요.
(바다에서는 이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넬슨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
흔히 알려져 있기로는 넬슨의 시체를 럼주에 담아왔는데, 그 시체 담은 술통의 럼을 수병들이 몰래 뽑아 마셨다고들 하지요. 그러나 이건 물론 사실이 아닙니다. 일단 넬슨의 시신은 럼이 아니라 브랜디(brandy)에 담아서 보관되었고, 그 브랜디에는 몰약(myrrh)과 장뇌(camphor)를 넣었기 때문에, 사람이 마실만 한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넬슨의 시신을 담은 통은 빅토리 호의 돛대에 묶여 있었고, 또 그 앞에는 해병대원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영국 수병들이 술 앞에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고 해도 거기서 술을 뽑아 마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일단 넬슨의 시체를 선창에 잔뜩 보관된 흔한 럼으로 보존하지 않고, 브랜디로 했다는 것에서부터, 부하 장교들이 넬슨에 대해 어느 정도의 존경심을 보인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탕수수 찌꺼기로 만드는 값싼 술인 럼에 비해, 브랜디는 포도주를 증류하여 만드는 것이라서 비싼 술이었거든요. 당연히 브랜디는 배급품이 아니라 장교들이 개인 돈으로 장만한 개인 물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영국 함대의 장교들은 제독님을 싸구려 럼주에 모실 수는 없으니 자신들 개인 소유의 브랜디라도 내놓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느꼈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넬슨의 시체를 담을 정도의 큰 통을 가득 채우려면, 빅토리 호의 장교들 뿐만 아니라 전체 함대 장교들의 브랜디를 모두 모아야 했을 것입니다. 넬슨의 시신은 빅토리에 실려 일단 가까운 지브랄타로 옮겨졌고, 거기서 속을 납으로 입힌 관에 옮긴 후, 역시 와인 증류주 (그라빠 같은 비숙성 브랜디)를 채워 영국으로 보내졌습니다.
(정작 '넬슨의 피'라는 칵테일은 럼도 브랜디도 아닌, 포트 와인과 샴페인으로 만듭니다. 아무래도 피 색깔을 내려면...)
빅토리에 이렇게 실려온 넬슨은 복잡한 과정을 거친 뒤, 결국 성 바울 대성당 (St. Paul's Cathedral)에서 정말 장엄한 장례식을 치루었습니다. 이곳에는 나중에 동료였던 콜링우드 제독이나 웰링턴 공작, 그리고 윈스턴 처칠까지도 묻히는 곳이지요. 아마도 넬슨 본인은 그런 장례식보다는 엠마에게 연금을 주기를 더 바랬을 것 같습니다. 하긴, 장례식이라는 것이 원래 죽은 사람보다는 그 장례식을 치르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체면을 위한 것이긴 하지요. 넬슨은 평소 원하던 것처럼, 아부키르 해전에서 건져낸 나폴레옹의 기함 오리앙 호의 돛대로 만든 관에 안치되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32명의 제독과 100명 이상의 함장들, 그리고 1만명의 병사 및 수병들이 참석했습니다. 장례식에서 그의 관을 덮었던 국기는 원래 그의 무덤에 함께 넣어져야 했으나, 그 일을 맡은 수병들이 조각조각 내어 기념품으로 나누어 가졌다고 합니다. 삼국지연의에도 관우의 갑옷은 오나라의 군졸들이 다들 한조각이라도 가지고 싶어하는 바람에 산산조각 났다고 하던데, 동양이나 서양이나 그런 점에서는 비슷한가 봅니다.
(원래 영웅은 살아서보다 죽어서 더 빛나는 법이지요.)
이제 좀 행복하고 훈훈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 당시 장교들에게는 포상금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 간절했던 것이 바로 승진이있습니다. 이런 대승이 있었으니 당연히 줄줄이 승진이 있었습니다 ! 보통 이런 승전이 있을 경우 가장 큰 혜택을 보는 사람은 함장이 아닌 선임 사관(the 1st lieutenant)이었습니다. 가문의 연줄이 없을 경우 많은 사관(lieutenant)들은 그냥 평생 늙은 사관으로 지내다가 군대 생활 종치는 것이 보통이었거든요. 나이가 차면 찰 수록 3rd lieutenant가 2nd가 되고, 결국 1st lieutenant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사관급 계급에서 함장급(commander 또는 post captain)으로 넘어가는 것은 정말 가문의 연줄이 대단하든가, 아니면 빛나는 전공을 세우던가 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 해군의 우세가 너무 강하다보니, 해전 자체가 별로 안 벌어졌고 전공을 세울 기회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간만에 벌어진 대해전과, 그리고 이토록 철저한 승리는 정말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 같은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번 승전을 치하하기 위해 해군성은 모든 배의 선임 사관들을 평상시처럼 준함장(commander)으로 승진시킨 것이 아니라, 아예 정식 함장 (post captain)으로 사실상 2계급 승진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유명한 넬슨의 '잉글랜드는 모든...' 깃발을 올렸던 신호 장교 파스코 (John Pasco)는 침울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원래 그는 빅토리의 선임 사관이었으나, 넬슨은 보통 전투 직전에 그 군함의 선임 사관을 신호 장교로 임시 보직 전환하는 버릇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기함이라는 특성상 기인한 일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 그 선임 사관들은 별 불만이 없었습니다. 넬슨은 그로 인해 신호 장교 노릇을 한 선임 사관이 정당한 자기 몫의 승진에서 누락되지 않도록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챙겨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넬슨이 죽어버리고 나니, 파스코의 신세도 엠마와 하등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챙겨줄 제독이 없으니, 그는 이 천금같은 기회에 정식 함장으로의 승진을 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물론 그도 나중에 결국 제독까지 승진하기는 했습니다만, 이때 잃어버린 수년간의 선임 호봉은 영영 찾을 수 없었지요.
(이 사람이 존 파스코이고, 바로 트라팔가 해전 당시인 1805년의 모습입니다. 그래도 이 양반은 당시 얻은 부상으로 인해 250 파운드의 연금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넬슨의 장례식에서 넬슨의 관을 운구하는 팀의 일원으로 뽑히는 영광도 누렸고, (늦기는 했지만) 결국 제독의 계급까지 오릅니다.)
대개의 경우 함장에게 돌아오는 몫은 포상금과 명예 외에는 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아부키르 해전 때처럼 포상금을 펑펑 나눠주지 못하다보니, 대신 본보기로 함장들 두어 명을 파격적으로 제독으로 승진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좀 말썽이 생깁니다.
여러분들께서는 트라팔가 해전에서 여러 전함의 함장들 중 누구의 공로가 가장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 빅토리의 함장 하디 (Thomas Masterman Hardy) ? 로열 소브린 호의 함장 로더람 (Edward Rotheram) ? 이제 넬슨이 죽었으니 전체 함대의 전투 보고서를 쓸 사람은 바로 콜링우드 제독이었고, 보통 이런 경우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가장 가깝게 지냈던 자신의 기함의 함장이 가장 돋보이도록 보고서를 써주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콜링우드는 그 훨씬 전부터, 자신의 기함의 함장인 로더람을 '고집만 센 멍청이' 정도로 생각했고 사이도 좋지 않았습니다. 콜링우드가 집어낸 이 해전의 제1 영웅은 바로 테메레르의 함장 엘리압 하비(Eliab Harvey)였습니다.
(말이 쉬워서 그렇지 한번에 2척의 적함을 나포한다는 것은 정말 실력 뿐만 아니라 운도 받쳐줘야 할 수 있는 위업입니다. 그것을 해낸 트라팔가의 용자 엘리아 하비 함장입니다.)
사실 제가 보더라도, 하비 함장의 공로가 제일 커보이기는 합니다. 빅토리와 로열 소브린 이 두 척의 초기 활약이 돋보이기는 했으나, 로더람은 멍청이라니까 그렇다치고, 빅토리는 결국 어느 한척의 군함도 나포하지 못했고 더구나 불과 74문짜리 르두터블에게 거의 '질 뻔한' 꼴불견을 보였지요. 그에 비해 빅토리를 구해내고 게다가 혼자서 2척이나 나포해낸 테메레르의 하비 함장이 돋보인 것은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넬슨의 부하 함장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봅니다. 이유는 아무래도 하비 함장은 넬슨의 밑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는 '굴러들어온 돌'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는 젊은 나이에 아버지와 형의 유산과 하원의원직을 물려 받아 매우 부자인데다 연줄도 많았고, 게다가 방탕한 생활을 하느라 동료 함장들과는 그다지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했던, 아니 안 맺었던 것입니다. 원래 학교에 새로 전학생이 왔는데, 얼굴도 잘 생겼고 집안도 좋은 부자집 애이지만 성격에 모가 나서 건방지고 재수없게 굴었는데, 중간 고사를 보고 나니 전교 1등까지 해먹더라 하면 주위의 질시를 받을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 군인은 전공으로 말한다고, 하비 함장의 빛나는 전공에 대해서는 다른 함장들도 할말이 별로 없었지만, 그렇다고 넬슨 밑에 복무한지 얼마되지도 않은 하비가 넬슨의 장례식에서 넬슨의 관을 운구하는 몇 안되는 사람으로 뽑혔을 때는 정말 원성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하비 가문에서 설립한 Harvey Grammar School의 문장입니다. 저 Temeraire 와 Redoutable et Fougueux 라는 글자가 보이세요 ? 진짜 재수없지 않습니까 ?)
이렇게 하비가 욕을 처먹은 것은 그의 됨됨이가 정말 재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트라팔가에서의 자신의 용맹과 활약에 대해서 전혀 겸손하지 않게 마구 떠벌이고 다녔고, 자기 가문의 모토를 재수없게도 'Redoubtable et Fougueux' (용맹하고 불같이)로 불어로 새로 정했습니다. 바로 자기가 좌현과 우현에서 한꺼번에 나포한 프랑스 전함들의 이름이었지요. 자기 PR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하비는 그것이 좀 심했나 봅니다. 하지만 그런 PR이 해군성에는 통했는지, 그는 그해 11월, 정말 각별하게도 일개 함장에서 제독으로 특진하게 됩니다. 당시 제독이라는 계급은 전과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연공 서열에 의해서만 진급할 수 있는 것이었거든요. 그래서 아무리 무능하다고 찍힌 함장이라도 명줄만 질기다면 결국 (물론 명칭 뿐이라서 실제 보직은 못받는다고 하더라도) 제독의 지위에 올라갈 수는 있었습니다. 심지어 넬슨조차도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1797년에 제독으로 진급할 수 있었던 것은 세인트 빈센트 (St. Vincent) 해전에서의 공적 때문이 아니라, 그저 연공서열의 순서상 된 것이었습니다. 넬슨은 해군 함장이었던 삼촌의 빽에 힘입어 1777년에 19살의 나이로 일찍 정식 임관을 할 수 있었거든요. 그런 점에서 하비의 출세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제독으로 승진한 것은, 트라팔가 해전의 영광을 같이 했던 다른 함장이 아니라, 트라팔가에서 도망치던 뒤마누아르 (Dumanoir le Pelley) 제독의 4척의 전열함을 오르테가 (Ortega) 해전에서 모조리 사로잡은 임시 제독 (Commodore) 스트레이챈(Sir Richard Strachan)이었습니다. 원래 스트레이챈은 원래 남작 가문이었고, 또 그 연줄로 이미 해병 대령 (colonel of marines)이 되어 있던 유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전에도 설명한 바 있습니다만, 이 해병 대령이라는 계급은 실제로 해병들을 지휘하는 직위가 아니라 일종의 명예직으로서 아무 하는 일 없이 1년에 무려 2,000파운드의 연금만 받아 챙기는 꿀보직이었거든요. 다만 이 해병 대령이라는 보직은 제독으로 승진하면 내놓아야 하는 것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보상인지, 영국 하원에서는 스트레이챈 제독에게 특별히 오트테가 해전의 공로에 대해 1년에 1,000 파운드의 연금을 별도 지급하기로 결의까지 해주었습니다. 정말 있는 놈들끼리 나랏돈을 나눠먹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스트레이챈 제독에게 연 1천 파운드의 연금을 안겨다 준 오르테가 해전입니다.)
아무튼 하비 함장, 아니 하비 제독의 끝은 뭐 그다지 영광스럽지는 못했습니다. 워낙 잘난체 하고 모난 성격이어서, 결국 상관과 말썽을 일으켰거든요. 불과 4년도 되지 않아서 벌어진 바스크 해역 해전 (Battle of the Basque Roads)에서 자기 대신 더 젊은 코크레인(Thomas Cochrane)이 투입된 것에 반발하여 상관인 갬비어 (James Gambier) 제독에게 심하게 대들었다가 결국 해군에서 전역해버리는 사태까지 겪었습니다. 1년 뒤 복직하기는 했습니다만, 그 후로는 전혀 현역으로는 뛰지 못했지요.
영국 쪽 이야기는 그렇다치고, 프랑스 측 인사들의 후일담은 어땠을까요 ? 아시다시피 연합 함대의 최고 지휘관인 빌뇌브(Pierre-Charles Villeneuve)는 별다른 부상도 입지 않은 채 무사히 (?) 영국 해군의 포로가 되어, 부상을 입고 항복한 르두터블의 루카 함장 등과 함께 영국으로 후송되었습니다. 여기서 빌뇌브는 뭐 그리 나쁘지 않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감옥에 가두지도 않고, 일종의 가석방 상태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거든요. 그는 넬슨 제독의 장례식에도 손님으로 참석할 정도였습니다. 이 정도의 자유가 주어진 것은 다른 함장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령 오르테가 해전에서 포로가 된 뒤마누아르 제독은 티버튼(Tiverton)에 머물렀는데, 여름에는 저녁 8시, 겨울에는 오후 4시 전까지 성문 안으로 돌아오라는 제약 조건 외에는 아무런 감시도 붙지 않는 행동의 자유를 누렸습니다. 심지어 뒤마누아르는 트라팔가 해전에서의 자신의 행동 (선회하여 돌아오라는 빌뇌브의 명령을 한참동안이나 무시했고, 또 2시간만에 돌아와서는 별 전투도 하지 않고 그대로 도주한 행동)에 대해 비호의적으로 기사를 낸 타임즈 (The Times) 지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빌뇌브는 포로가 된지 2개월도 되기 전인 1805년 말에 프랑스로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적 총사령관에 대한 일종의 예우였지요. 빌뇌브는 그렇게 돌아오는 길 어느 여관에서,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으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는 좀 말이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자책감에 자살할 인물이었다면 영국에서 자살했겠지요. 더군다나 넬슨의 장례식에 얼굴을 내밀지도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그는 프랑스로 돌아온 뒤 4개월이 훨씬 넘은 뒤에야 죽었습니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다시 해군에 복직하려 할 정도로 약간 뻔뻔스러운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살을 한다 ? 그건 아니지요. 그는 렌느(Rennes) 지방의 어느 호텔, 정확하게는 Hotel de la Patrie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발견 당시 그의 왼쪽 폐에 무려 6번의 자상, 그리고 심장에 1번의 자상을 입은 채였습니다. 자살치고는 매우 이상한 상처였습니다만, 아무튼 프랑스에서는 그의 자살이 공식 보도되었고, 영국 신문들은 나폴레옹의 비밀 경찰이 그를 암살한 것이 틀림없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리는 기사를 냈다고 합니다.
뒤마누아르 제독의 경우는 석방이 좀 늦어서 1809년에야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건도 아니고 2건의 군법회의였습니다. 하나는 트라팔가 해전에서의 그의 행동, 나머지 하나는 오르테가 해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해군 장관 드크레(Decres)에게 뒤마누아르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만, 결국 같은 조직 내에서의 제 식구 감싸기는 요즘 우리나라나 19세기 프랑스 해군성이나 마찬가지였는지, 결국 뒤마누아르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뒤에 뒤마누아르는 현역 보직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왕정 복고 이후에도 살아남아 1819년 해군 중장 계급까지 올라가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당시 해군성 장관이던 드니 드크레(Denis Decres)입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 때 프리깃함들의 지휘를 맡았고, 말타 포위전 때 결국 영국 해군에 항복했습니다. 그러나 항복 전에 3척의 영국 전함을 상대로 무척 영웅적인 저항전을 보여주었으므로, 포로 교환 때 돌아와서 나폴레옹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는 항상 부적합한 인물을 중용하는 선택을 했는데, 일설에 따르면 이는 그의 질투심 때문에 다른 사람이 큰 공을 세우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루카 함장이 중용되지 못한 것을 보면 그럴 듯한 이야기지요.)
프랑스 측에도 영웅이 있었습니다. 바로 르두터블의 함장 루카(Jean Jacques Etienne Lucas)였지요. 그는 영국에서 석방되어 돌아온 뒤, 나폴레옹에 의해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는 등 패전 속의 영웅 대접을 톡톡히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패장으로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함장을 제독으로 승진시킬 수는 없었나 봅니다. 그는 위에서 언급된 1809년의 바스크 해역 해전 (Battle of the Basque Roads)에서도 전함 레굴루(Regulus)의 함장으로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항구에 정박한 프랑스 전함들을 화공선(fireship)으로 공격해오는 영국 해군에 저항하여, 루카 함장은 다시 한번 영웅적인 저항을 보여 줍니다. 만약 이 전투에 코크레인 대신 정말 하비가 투입되었다면 하비와 루카는 2번째로 맞부딪히는 셈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여기서 루카는 좌초된 레굴루 호를 지휘하여 결국 영국 해군의 4차례에 걸친 공격을 격퇴시켰고, 결국 레굴루 호를 다시 바다에 띄우는데 성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카가 제독이 되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아마 전투에서는 용감했어도, 군대 생활은 그다지 원활하게 해내지 못했나 봅니다. 그는 1815년 나폴레옹이 백일천하를 일으켰을 때, 나폴레옹 편에 붙었다가 결국 최종적인 왕정복고와 함께 해군에서 강제 퇴역해야 했고, 불과 4년 뒤인 1819년에 55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크게 기울어진 배가 바로 루카 함장의 레굴루 호입니다. 이렇게 배가 좌초되어 포구가 높은 곳을 향하는 바람에 접근하는 영국 해군 보트를 향해 포격을 할 수 없게 되자, 루카 함장은 함체에 새로 구멍을 뚫어 대포를 쏘는 기지를 발휘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 같아요.)
제가 간추린 이야기도 그렇습니다만, 이런 역사, 특히 전쟁사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영웅들의 이야기로 그려지기 쉽상입니다. 하지만 제 이야기를 읽으시면서 느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역사는 한두명의 영웅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1805년 10월 21일 당시, 빌뇌브가 영국 함대의 지휘관이었고 넬슨이 연합 함대의 지휘관이었다고 해서, 당일 전투의 승패가 바뀌지는 않았을 겁니다. 기본적으로, 트라팔가 해전 승리의 주역은 무식하고, 욕지꺼리를 입에 달고 살고, 입대 이유는 애국심이 아니라 강제로 끌려온 (press된) 것 뿐인, 그렇고 그런 평범한 영국 수병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보상이 고작 1인당 55만 8천원이라는 점, 그나마 대부분 주는 흉내만 냈을 뿐이라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결국 역사의 주역인 민중들은 이렇게 항상 푸대접 받는 법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넬슨의 업적을 비하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빌뇌브가 영국 함대의 지휘관이었다면, 아마 이 날 해전의 결과는 그다지 결정적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피니스테라 해전에서 칼더 제독이 입증(?)을 해보인 바가 있지요. 넬슨의 업적은 영국 해군의 잠재력이 제대로 폭발하도록 이끌어냈다는 점이고, 사실 모든 지휘관이 그렇게 할 줄 아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넬슨이 정말 위대한 지휘관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 해전은 19세기 전체의 역사를 좌우할 정도의 영향을 가집니다. 이 해전은 너무나도 결정적인 전과를 내놓았기 때문에, 이 이후로 근 100년간, 영국 해군의 제해권은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요. 하나의 해전에서 이토록 큰 규모에서 이토록 철저한 승리를 거두어 역사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이후 100년도 넘게 흐른 뒤인 제2차 세계대전의 미드웨이 해전이 벌어질 때까지 없었습니다. (러일 전쟁 당시 도고 제독의 대한해협 해전이 있긴 했습니다만 그건 일본 이야기인데다 지역 분쟁에 불과하므로 무시. 그냥 패스.)
(꼭 일본군이 망해서가 아니라, 미드웨이 해전은 정말 극적이지요. 그래서 찰턴 헤스턴 주연의 영화로도 나왔습니다.)
이렇게 트라팔가 해전 이야기가 종료되었습니다. 이제 다음부터는 울름과 아우스테를리츠로 이어지는 제3차 동맹 전쟁 이야기가 폂쳐집니다. 아래 손가락 표시 눌러서 추천해주시면 감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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