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폴레옹의 시대

트라팔가 해전 (1) - 'Close Action !'

by nasica-old 2012. 10. 7.
반응형

지난편에서는 영국 함대가 Nelson Touch라는 넬슨 제독의 전술에 입각하여 2열 종대라는 매우 특이한 대형으로 빌뇌브의 연합 함대에 돌격해 들어가는 모습까지를 보셨습니다.  지난 편에서 소상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Nelson Touch에는 많은 위험 요소가 담겨져 있었지요.  과연 넬슨 제독의 계산대로 영국 함대는 그 위험 요소들을 다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연합 함대에 뛰어들 수 있었을까요 ?  아니면 과거 수많은 해전에서 증명된 것과 같이, 횡대로 전개한 적의 함대에 함수(bow)를 들이대고 종대로 돌격하는 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뿐이었을까요 ?





(위쪽이 당시의 일반적인 전술이고, 아래쪽 그림이 Nelson touch에서 노렸던 돌파 전술을 묘사한 것입니다.  출처는 BBC에서 만든 트라팔가 해전을 동영상 지도로 보여주는 http://www.bbc.co.uk/history/interactive/animations/trafalgar/index_embed.shtml  입니다.)



빌뇌브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 함장들은 영국군의 이 기괴한 진형을 보고 넬슨이 노리는 바를 곧 깨달았습니다.  그들도 바보가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비정형 전술은 들어본 바가 없었으므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몰랐고, 또 안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미숙한 항해술로는 이제 와서 대형을 바꾸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아무리 봐도 이 순간만큼은 자신들이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적어도 10분~20분 정도는 연합 함대쪽이 응사받을 걱정 전혀 없이 마음껏 포격을 퍼부을 수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접근해오던 영국 함대에서는, 전투 개시전, 선실에서 이런저런 편지를 다 쓰고 나온 넬슨이 그 유명한 ‘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를 올립니다.  원래 넬슨은 expect라는 강압적인 단어 대신 confide라는 온순한 단어를 썼습니다.  그러나 expect라는 단어는 원래 단축 깃발로 암호서(codebook)에 정해진 것이 있어서 한 조합의 깃발로 곧장 단어를 나타낼 수 있었으나, confide는 해군에서 자주 쓰이는 말이 아니라서 단축 깃발 조합이 정의된 것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자주 쓰는 단어로 정의되지 않은 단어는 일일이 영어 스펠링을 하나하나 올려야 했기 때문에, 당시 신호 장교였던 파스코 (John Pasco)가 expect로 바꾸자고 한 것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사실은 duty라는 단어도 암호서에 미리 정의가 되어 있지는 않아서, 결국 하나하나 d-u-t-y로 스펠링을 해야 했습니다.  빅토리 호에서 신호 쪽으로는 가장 뛰어났다는 파스코의 머리 속에서도 duty를 좀더 쉽게 표현하기 위한 대체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나 봅니다.




(당시 신호 장교라는 사람들은 저 깃발 신호의 코드집을 사실상 거의 머리속에 다 외우고 있어야 했습니다.)



저는 넬슨 제독의 이 메시지를 무척 좋아합니다.  뭔가 비장함에 젖어 '이 일전으로 대영제국의 안위가 어쩌고' 하지 않고, 또 '목숨을 바쳐 조국을 위해 저쩌고' 하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너희 각자가 맡은 바 임무만 다 하면 우리는 이긴다'는 자신감과 함께, '너희는 맡은 임무만 수행해라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진다' 라는 뜻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이 신호를 받은 함장들은 내심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기 임무를 다 하라니 ?  아니 그러면 우리가 언제는 자신의 의무를 다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인가 ?' 라는 식으로 살짝 모욕을 느꼈다고들 하지요.  일설에는 원래 넬슨은 'Nelson confide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 를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이 잉글랜드 부분도 문제였습니다.  원래 영국 함대의 2/3는 잉글랜드 출신이 아닌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 독일, 스웨덴, 기타 외국인들로 되어 있었고, 그 중에는 심지어 프랑스인들과 스페인인들까지도 있었거든요.  역시 저런 메시지는 저런 것을 전문으로 하는 문학가가 만들어야 하는 건데 말입니다.  물론 넬슨을 신처럼 떠받들고 있는 수병들은 장교들을 통해 전달받은 그 깃발 신호에 대해 우렁찬 환호로 대응했습니다. 




(넬슨 동상의 바닥에도 새겨진 저 문구는 두고두고 아일랜드 및 스코틀랜드, 웨일즈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습니다.)



파스코가 넬슨의 금과옥조같은 문장에 감히 손을 대어 수정한 것은 괜히 깃발을 더 오르락내리락하기 귀찮아 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파스코가 더 신속한 신호가 가능하도록 문장을 수정한 것은 넬슨이 파스코에게 이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빨리 하게, 전달할 메시지가 하나 더 있으니까 말일세' 라고 재촉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중요했던 것은 바로 그 다음 신호였지요.  그 내용은 'Engage the enemy more closely', 즉 '지근거리에서 적과 교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함포의 사정거리와 정확도를 생각하면, 또 위험천만하게도 포열이 즐비하게 늘어선 적의 측면을 향해 취약한 함수(bow)를 노출한 채 접근 중인 영국 함대의 위치를 생각하면 가장 절실한 부분이 바로 '신속한 접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넬슨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1822년에 영국의 대가 Turner가 그린 트라팔가 해전 그림에서, 한창 전투 중인 빅토리 호가 휘날리고 있는 신호는 England expects...의 끝 3글자인 U-T-Y를 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저 순간에는 'Close Action'을 뜻하는 신호를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유명한 깃발 신호를 내건 것이 11시 45분, 그리고 'close action'을 강조하는 다음 깃발 신호를 내건 것이 12시 15분 경이었습니다.   그 사이가 너무 길다고요 ?  사실 그 사이에 두번의 신호가 더 있었습니다.  하나는 '마스트가 버틸 수 있는 한 돛을 더 펼쳐라'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감히 빅토리 호를 추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던 바로 뒤의 전열함 테메레르 (HMS Temeraire) 호에게 '빅토리 호 뒤에 붙으라'는 신호였습니다.  이때 다가오는 두 줄의 영국 함대는 서로 약 1.6km 정도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즉, 서로가 서로를 돕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지요.  여기서 1차로 영국 함대의 병력은 분산된 셈이었는데, 한술 더떠서 영국 함대의 오른쪽 전열, 그러니까 콜링우드 (Cuthbert Collingwood) 제독의 전열에서, 콜링우드 제독이 탄 기함인 로열 소브린 (HMS Royal Sovereign) 호가 다른 배들보다 월등한 속도로 치고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일반적인 전투의 통제 측면에 있어서는 절대 피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날 넬슨 제독의 지시에 따르면 '일단 무조건 빨리 적에게 접근하여 교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니, 잘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은, 다른 전함들이 로열 소브린 호보다 훨씬 느렸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사실 이 로열 소브린 호는 평소에 그다지 빠른 배가 아니었습니다.  1786년에 건조 비용 67,458 파운드 (현재 가치로는 약 136억원, 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현재 가치로 약 227억원) 를 들여 진수된 100문 짜리 1급 전열함이었던 로열 소브린 호의 별명은 '서부 짐마차' (West Country Wagon) 였습니다.  워낙 느리고 항행성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도 이 로열 소브린 호가 가장 빨랐던 이유는 이 배가 가장 최근에 홀수선 아래에 새로 구리판을 깔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선박들은 홀수선 아래 부분에 얇은 구리판을 입히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요즘 선박들도 홀수선 아래는 흔히 빨갛게 칠하는데, 이때의 전통이 남아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흔히 알려져 있기로는 이렇게 구리판을 입히는 이유가 따깨비나 해초 같은 해양 생물이 바닥에 달라붙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은 그래도 이런 것들이 달라 붙었습니다.  구리판을 입히는 진짜 이유는 이렇게 달라붙은 해양 생물들이 홀수선 아래의 목판을 침식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구리판을 입히건 말건, 주기적으로 배를 항구 내에서 기울인 뒤, 달라붙은 해양 생물들을 떼어내는 보수작업을 해줘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배의 속도는 점점 느려지기 마련이었습니다.  바람이라도 잘 불어주면 이렇게 뱃바닥에 달라붙은 따깨비나 해초가 전체 속도에 미치는 영향이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을텐데, 이날 바람마저 무척 약하여, 이 뱃바닥의 해양 생물이 전체 속도에 미치는 영향이 컸던 것입니다.  그런데, 영국 함대는 모두 오랜 봉쇄 활동에 동원되어 있었으므로, 다들 뱃바닥에 해초와 따깨비들이 빽빽히 붙어있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로열 소브린이 이날 치고 나온 것은 이 배가 특별히 빨라서가 아니라, 다른 영국 전함들이 끔찍하게 느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영국 함대가 넬슨의 계산보다 훨씬 더 오래 더 많은 포격을 견뎌야 했다는 것이었지요.




(당시 배의 바닥 부분이 빨간 것은 붉은 페인트칠을 해서가 아니라, 구리판을 입혔기 때문입니다.  이 구리판은 18세기 중반에 영국 해군에서 처음 테스트해보고, 효과가 좋아서 상업용 선박에도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오직 탄탄한 무역 회사만이 이렇게 구리판을 입힌 배를 띄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copper-bottomed' (구리로 바닥을 입힌) 이라는 단어는 벤처 기업 등이 안전하고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Duckie님 댓글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 배들의 홀수선 아래가 빨간 것은 원래 산화 구리가 주성분인 해양 생물 증식 방지용 페인트를 칠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침내 12시 10분 경, 연합 함대에서 최초의 포격이 시작됩니다.  넬슨의 ‘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 신호가 게양된지 얼마되지 않아서였지요.  최초의 포격은 프랑스 전함인 푸구외(Fougueux, '불같은'이라는 뜻)가 가장 선두였던 로열 소브린 호에게 쏜 것이었습니다만, 최초 포격은 당연히 전혀 명중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포격을 가해오는 연합 함대 전열함들의 숫자가 들어나면서, 점점 명중탄이 늘어났고, 사상자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열 소브린의 사상자 수는 의외로 많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2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로열 소브린의 속도가 그래도 빠른 편이라 집중 포격을 받은 시간이 고작 10분 정도에 불과했다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넬슨의 예측대로, 프랑스와 스페인 수병들의 포격 솜씨가 수준 미달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런 무기들이 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예쁘게 색칠 해놓으라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 군대 뿐이 아닙니다.  전쟁 중이었음에도, 당시 프랑스-스페인 해군은 물론, 심지어 영국 해군 중에도 대포를 닦아만 봤지 실제로는 단 1발도 쏘아보지 못한 포병들이 의외로 많았다고 합니다.)



무거운 24파운드 또는 32파운드 포를 10여명의 수병이 굴리고 장전하는 것은 무척 힘들고, 또 까딱 잘못하면 부상자가 속출하게 되는 위험한 작업이었습니다.  늘상 바다에서 초계 활동을 벌였던 영국 해군도 이런 거포들을 자주 쏴볼 기회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훈련용으로 소모되는 탄약 비용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지요.  원래 영국 해군성의 규정에 따르면, 군함이 출항을 한 이후 첫 6개월 동안은 전체 포의 1/3에 해당하는 개수의 포탄만을 연습용으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다시 그 절반인 전체 포의 1/6에 해당하는 포탄만을 사용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계산해보면, 74문의 대포를 장착한 전열함이 2년간 바다에 나가 봉쇄 활동을 하면서 규정대로만 사격 훈련을 했다고 하면, 그 긴 2년 동안 불과 61발의 포탄만 쏘아볼 수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바다의 왕자라는 영국 해군조차도 이 모양이었는데, 긴 세월을 항구에서만 보낸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의 수병들 중 대다수는 대포라는 물건을 평생 처음 쏴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조준이라는 것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이런 결과는 로열 소브린이 연합 함대의 포화를 뒤집어 쓰며 전진하는 동안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영국 함대가 직각으로 접근하는 와중에 피해가 생각보다 적었던 이유 중에 대해 흔히 나오는 설명 중 하나로, 영국 해군은 포격을 조준할 때 적함의 함체를 쏘도록 훈련받았고, 프랑스-스페인 해군은 적함의 돛과 삭구를 쏘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건 근접 거리에서의 이야기일 뿐, 로열 소브린 호처럼 아직 수백 미터 떨어진 표적에 대해서는 골라 쏘는 것은 고사하고 돛이든 닻이든 맞추기만 하면 다행이었습니다.   따지고보면 당시 범선들은 수면 위에 보이는 대부분의 면적이 돛이었으므로 프랑스군이건 영국군이건 원거리에서 쏠 경우, 운이 좋아 명중한다고 해도 대개는 돛에 맞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그럴 경우 뭔가 기분나쁜 소리와 함께 마치 마법처럼 하얀 돛에 갑자기 구멍이 뻥 뚫리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돛대라는 물건은 한개의 길고 굵은 통나무로 만든 물건이 아니라, 조립품입니다.)



(저렇게 돛대에 수도 없이 묶여있는 밧줄들은 단순히 선원들이 기어오를 수 있도록 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돛대라는 물건은 배의 용골에 못을 박아 고정한 물건이 아니라, 저 밧줄들에 의해 지탱되는 물건입니다.  따라서 대개의 경우 전투 중 돛대가 쓰러지는 것은 대포알에 돛대가 부러지는 경우보다는, 저 밧줄들이 끊겼기 때문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왜 프랑스군이나 스페인군은 맞아도 별로 표시도 안나는 적의 돛을 향해 대포를 쏘았을까요 ?  그건 교리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은 적 수병의 살상을 포격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적의 함선을 탈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적병을 많이 죽여야 했으므로, 당연히 적함의 몸통에 대고 대포를 쏘아야 했습니다.  그에 비해서 프랑스-스페인 해군은 일단 적함을 멈춰 세우는 것을 제1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당시 전열함들은 돛의 힘으로 움직이는 범선이었는데, 이 돛이라는 물건은 돛대나 활대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지탱하는 밧줄들만 끊어놓아도 쉽게 쓰러지는 취약한 목표물이었거든요.  특히 구형탄(roundshot)이 아닌 연결탄(barshot, 두개의 반구 사이를 긴 쇠막대로 연결한 긴 포탄)이나 사슬탄(chainshot, 두개의 roundshot을 쇠사슬로 연결한 포탄)을 쏘면 돛대는 몰라도 각종 삭구들을 끊어버리는데 아주 효과적이었습니다.  어쨌거나, 당시 범선은 복잡하고도 수많은 밧줄에 의해 지탱되는 연약한 물건이었으니까요.  이렇게 적의 돛이나 돛대를 제거하고나면, 적함은 전진은 커녕 좌우 선회도 못하는 앉은뱅이 신세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일단 그렇게 되면 적의 함수(bow)나 함미(stern)으로 다가가 종사(raking)를 퍼부을 수 있었습니다.  대개는 이런 상황이 되면 적함은 항복할 수 밖에 없었지요.





(Bar shot과 chain shot의 모습입니다.  이런 포탄이 운 좋게 적함의 갑판 1m 상공을 지나간다면 갑판 위의 수십명을 다 날려버릴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런 것을 기대할 수는 없고, 대개는 적의 돛대와 활대를 고정한 밧줄을 끊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전함의 돛대는 워낙 튼튼하여 이 정도로는 별 타격을 입지 않았고, 구형탄에 직격되어도 1발 정도는 버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건 이론에 불과했습니다.  태권도가 더 세냐 복싱이 더 세냐처럼 쓸데없는 논쟁이 없는 것처럼, 적함체를 쏘는 것이 더 효과적이냐 적돛대를 쏘는 것이 더 효과적이냐도 의미없는 비교입니다.  정답은 어느 쪽이든 더 빨리 더 정확하게 쏘는 쪽이 유리하다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낙제점을 받았습니다.  연합 함대의 일방적인 포격을 10여분간 뒤집어 쓴 덕택에 사상자가 꽤 났고 각종 돛이 너덜너덜해진데다 맨 윗돛대 (topmast) 하나가 꺾여 볼품없이 대롱거리긴 했지만, 결국 로열 소브린 호는 연합 함대의 전열 속에 성공적으로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로열 소브린 호가 영국 전함들 중 최초로 적의 전열에 뛰어드는 순간, 콜링우드는 로열 소브린 호의 함장 로더람 (Edward Rotheram)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서기 위해서라면 넬슨이 뭘 바칠까 ?"  (What would Nelson give to be here?)

콜링우드의 이 말과 동시에, 이제 거대한 스페인 전함 산타아나 (Santa Ana) 호와 프랑스 전함 푸구외(Fougueux) 호 사이에서 제대로 종사(raking) 위치를 점령한 로열 소브린 호는 산타아나 호의 함미에 대고 지근거리에서의 강력한 종사를 제대로 먹였습니다.  이 단 한차례의 일제 사격에 의해 산타아나 호는 결정적인 피해를 입습니다.  넬슨이 그토록 강조하던, '좀더 근접하여 교전하라'는 지시는 바로 이 때문이었지요.  당시 대포의 사정거리나 위력을 고려하면, 출렁이는 전함의 대포로 먼 거리의 목표물을 향해 포를 난사하는 것은 힘만 뺄 뿐 효과가 크지 않았고, 오로지 코앞까지 다가가서 일제 사격을 먹여줄 때만 포성에 어울리는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이 순간 콜링우드 제독의 머리 속에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을 것입니다.




(트라팔가에서 적 함대의 진열을 관통하는 최초의 영국 전함이라는 명예를 득템 중인 로열 소브린 호의 위엄)



하지만 착각이었습니다.  로열 소브린 호의 진짜 고난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이렇게 종사 위치를 점유했다고 하더라도, 서로 움직이는 전함들 사이에서 그 위치라는 것은 순간적인 것일 뿐이었습니다.  당연히 로열 소브린 호는 곧 방향을 틀어, 일격을 얻어맞고 비틀거리는 산타아나 호의 측면에 자신의 측면을 갖다대고 본격적인 포격전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자 산타아나나 로열 소브린이나 이제는 같은 처지에서 툭탁거리는 입장이 되버렸습니다.  또한 로열 소브린 호도 100문의 대포에 3층 갑판을 갖춘 제1급 함이었지만, 산타아나는 더욱 커서 112문의 대포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적 함대의 도주를 막는답시고 너무 혼자 속력을 내어 뛰쳐 나온 것은 확실히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로열 소브린을 뒤따르던 두번째 영국 전함이었던 74문짜리 3급함 벨아일 (HMS Belleisle) 호는 최소 10분 이상 뒤에나 도착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용감한 주인공이라고 해도, 영화 속이 아닌 다음에야 사실 두 주먹으로 4개의 주먹을 당해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스페인 전함들이 우글거리는 한복판에 그야말로 홀홀단신으로 뛰어 들었으니, 적함들은 아주 잘 걸렸다는 듯이 무더기로 로열 소브린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최소 10분 이상, 로열 소브린은 과장이 아니라 정말 1대5의 처절한 싸움을 벌였습니다.  즉 산타아나 뿐만 아니라, 2척의 프랑스 전함(Fougueux, Indomptable)과 2척의 스페인 전함 (San-Leandro, San-Justo)과도 동시에 교전해야 했습니다. 




(로열 소브린과 격투 중인 산타아나 (중앙)의 모습입니다.)



다행히 뒤따르던 영국 전함들이 뒤늦게 도착하면서, 산타아나를 제외한 다른 적함들은 천천히 로열 소브린을 버려두고 다른 영국 전함들을 상대했습니다만, 이 짧은 시간 동안 로열 소브린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산타아나와 거의 2시간 동안 지근거리에서 맹렬하게 포격을 주고받은 끝에, 결국 오후 2시 15분 경 로열 소브린은 산타아나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역시 시작하면서 제대로 먹여주었던 종사 포격이 유효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로열 소브린도 돛대와 삭구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항해 능력을 상실해버리는 바람에, 전투 내내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표류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어찌 생각하면 로열 소브린이 산타아나의 항복을 받아낸 것은 정말 '의지의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  산타아나는 로열 소브린의 수병들의 갈퀴를 뱃전에 걸고 백병전을 벌이기도 전에 항복했는데, 그때 양측의 사상자 비율을 보면, 로열 소브린은 전체 승무원 826명 중 17%를, 산타아나는 1189명 중 20%를 잃은 상태였습니다.  즉, 양측의 사상자 비율은 비슷한 상태였고, 항복 당시 아직 활동 가능한 수병의 숫자는 산타아나가 오히려 더 많은 상태였습니다. 

두번째, 세번째 전함인 벨아일과 마르스 (HMS Mars) 호도 로열 소브린 못지 않게, 아니 오히려 더 험난한 혈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이미 로열 소브린이 난장판을 만들어놓은 적진 속에 뛰어든 벨아일은 떼를 지어 로열 소브린을 '담그고' 있던 적함들 중 엥동터블(Indomptable, '불굴의' 라는 뜻)과 푸구외(Fougueux)를 자신 쪽으로 돌려세운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이들과 한차례 교전을 하다가 난투극 속에서 이들도 멀어져 버렸으나, 이어서 프랑스 전함들인 아쉴르 (Achille, 아킬레스) 및 에글(Aigle, 독수리)이 연달아 벨아일을 후려갈겼습니다.  게다가 스페인 전함 산-후안-네포무세노 (San-Juan-Nepomuceno) 호는 아예 우현 쪽에 자리를 잡고 벨아일과 열띤 포격전을 전개했습니다.  결국 벨아일도 로열 소브린과 같은 17%의 사상자율을 기록했고, 3개의 돛대가 모조리 부러져 더 이상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홀로 표류하던 벨아일은 자욱한 포연 속에서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지도 못하고 두려움에 떨어야 했는데, 이때 포연을 헤치고 자기 쪽으로 접근해오는 전함을 보고 무척 긴장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만약 프랑스나 스페인 전함이었다면 꼼짝도 못하고 피떡이 되어 항복할 때까지 반복되는 종사를 당하는 수 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다행히도, 이 전함은 영국 해군의 스위프트슈어 (HMS Swiftsure) 호였습니다.  이 때 벨아일 호 승무원들의 안도와 기쁨은 정말 대단했을 것입니다. 




(포연을 뚫고 나타난 배가 아군의 스위프트슈어인 것을 보고,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있던 벨아일이 환호하는  장면입니다.)



마르스 호도 험한 꼴을 봐야 했습니다.  역시 적의 함대를 향해 직각으로 들어오는 것이 좋은 선택이 아니었는지, 적 진형 중 알맞은 틈을 찾아 비집고 들어오는 동안 4차례나 종사를 당한 것입니다.  이어서 프랑스 전함 플루통(Pluton, 그리스 신화의 플루톤)과 1대1 포격전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대포알은 계급을 따지지 않다보니) 더프 함장 (George Duff)까지 전사해버렸고, 98명 (16%)의 적지 않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상대방인 플루통은 더 심하게 당해 192명 (전체 인원의 25%)이라는 상당한 사상자를 내면서도 항복하지 않고 결국 도주하는데 성공합니다.  마르스 호에게는 그야말로 상처만 있었고, 영광은 없었던 셈이었지요.

그 다음으로 연합 함대의 진영에 뛰어든 영국 전함들도 힘든 싸움을 벌여야 했습니다.  특히 벨레로폰 (HMS Bellerophon) 호와 콜라서스 (HMS Colossus) 호의 피해가 심했습니다.  이들은 각각 전체 승무원의 30%와 35%를 잃어야 했는데, 이 정도면 사실상 그 전함의 괴멸에 가까운 피해로서, 보통 이 정도의 피해를 입기 전에 항복하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영국 화가 Thomas Whitcombe이 그린 1798년 아부키르 해전 그림입니다.  중앙에 한창 불타고 있는 배가 나폴레옹의 기함이었던 오리앙 호이고, 그 바로 오른쪽에 돛대가 모두 꺾인 채로 표류 중인 영국 전함이 바로 역전의 용사 벨레로폰입니다.  벨레로폰은 아부키르에서나 트라팔가에서나 정말 험한 꼴을 보아야 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1815년 결국 나폴레옹의 항복을 받아낸 것도 바로 이 벨레로폰 호였습니다.)



벨레로폰 은 (비록 한꺼번에는 아니지만) 5척의 적함과 교전하며 적함들의 수병들로부터 옮겨타기 공격 (boarding)을 당하기도 하는 등, 적의 대포보다는 적의 머스켓 소총과 수류탄 등 적의 소화기 공격에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와중에 역시 쿡 함장 (John Cooke)이 전사했습니다.  벨레로폰은 1798년의 아부키르 해전에서도 만신창이가 되어 돛대를 잃고 표류하는 신세가 되었었지요.  넬슨 제독의 빛나는 승전에는 다 참여하는 영광을 누렸으나, 그 티켓 가격이 만만치 않았던 셈입니다.  콜라서스 호는 너무 느려서 오후 1시 경에나 연합 함대의 진형에 도달할 수가 있었는데, 역시 3척의 적함을 상대하다가 206명의 사상자를 냈고, 그 함장인 모리스 (James Nicoll Morris)도 무릎 약간 위쪽에 적의 대포알을 맞고 다리 하나를 잃어야 했습니다.  그나마 이런 선두함들이 워낙 맹렬히 싸워준 덕분에, 그 뒤에 들어온 영국 전함들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어서, 대부분 5% 정도의 사상률을 냈고, 특히 전열의 맨 끝 부분에 위치한데다 끔찍하게 느려서 콜링우드보다 무려 2시간 뒤에야 전투에 돌입할 수 있었던 98문짜리 전함 프린스 (HMS Prince) 호는 부상자 하나 내지 않는 별로 영광스럽지 않은 영예를 누렸습니다.




(역시 Thomas Whitcombe이 그린 트라팔가 해전입니다.  오른쪽에서 3번째, 즉 흰바탕에 십자표시의 영국 깃발을 날리는 배가 바로 벨레로폰입니다.  물론 이 그림에서는 안 보이지만, 바로 이 장면에서 벨레로폰의 함장 쿡이 전사하게 됩니다.)



자, 콜링우드 전대의 사정은 이쯤에서 접고, 이 전투의 주인공인 넬슨의 사정을 보시지요.  콜링우드는 깨끗한 선저 구리판 덕분에 느린 바람에도 날 듯이 달려가 불과 10여분의 포격만 뒤집어 쓰고도 적함대를 관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넬슨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습니다.  넬슨의 빅토리 (HMS Victory) 호는 무려 40분 넘게 연합 함대의 포격 연습 대상이 되어야 했습니다.  당연히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넬슨은 당연히 빅토리 호의 최후미이자 갑판 중 가장 높은 위치였던 선미루 갑판(poop deck)에 서 있었는데, 여기에 배치되어 있던 해병 8명과 함께 넬슨의 비서인 스콧 (Scott)까지도 전사해버릴 정도였습니다.  또 한번은 대포알이 넬슨과 빅토리 호의 함장 하디 (Thomas Masterman Hardy) 사이를 통과하기도 했었지요.  넬슨은 이렇게 오랫동안 포화를 뒤집어 써야 했던 것은 뱃바닥의 따깨비와 해초 탓도 있었으나, 넬슨이 지그재그 항로를 택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즉, 최단 거리인 직선 항로로 달려가지 않고, 적 함대 중앙을 향해 달리다가 좌로 방향을 틀어 적의 선두 부분으로 돌격하다가 다시 적 함대 중앙을 노리는 우왕좌왕 항로로 전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더 오래 포화를 뒤집어 쓸 수 밖에 없었는데도 이를 굳이 강행한 것은 연합 함대의 선두부를 전투에서 제외시키려는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즉, 넬슨이 연합 함대의 선두 부분을 노릴지 중앙 부분을 노릴지 적으로 하여금 알 수 없게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 처음부터 연합 함대의 기함이자 총사령관 빌뇌브를 태운 프랑스 전함 뷔생토르 (Bucentaure)가 있는 중앙부를 노린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연합 함대의 선두 부분이 그에 대응하여 유턴을 하던가 속도를 늦추어 실제 전투에 참여할 준비 시간을 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연합 함대 선두부를 이끌었던 뒤마누아르 (Pierre Dumanoir le Pelley) 제독이 그전의 알제시라스 만 (Algeciras Bay) 전투에서 보여준, 그리고 나중에 트라팔가 해전에서 결국 보여준 소극적인 태도를 보면, 애초에 곧장 중앙부로 직진했어도 상관없었을 것 같습니다.




(1801년의 알게시라스 전투는 지브랄타와 맞닿아 있는 스페인 항구 알게시라스에서 2차례에 걸쳐 벌어진 전투로서, 첫전투에서는 영국 함대가 크게 불리했으나, 2차에서 다시 영국 함대가 승리를 거둔 전투입니다.)



이 외에도, 콜링우드가 이끈 전대와 넬슨이 이끈 전대는 그 전술에 있어서 미묘한 차이를 드러냈습니다.  가령 콜링우드는 자신의 뒤를 따르는 전함들이 최종 접근 단계에서는 부채살처럼 퍼져서 각자 상대하기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적함을 찾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넬슨은 휘하 전함들이 엄격히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오도록 했습니다.  가령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바로 뒤를 따르던 테메레르가 빅토리를 추월하려고 옆으로 치고 나오자 '빅토리의 함미 위치로 돌아가라'고 신호를 보내어 그를 제지했습니다.  결국 넬슨의 뒤를 따르는 전함들은 빅토리가 휘저어 놓은 위치를 그대로 관통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좀 더 수월하게 전투를 치룰 수 있었습니다.  가령 넬슨의 전열에서 7번째 전함이었던 74문짜리 3급 전함 에이잭스 (HMS Ajax) 호는 빠른 스피드를 이용하여 6번째 전함이자 크고 낡고 느렸던 100문짜리 1급함 브리타니아 (HMS Britannia) 호를 추월하여 빅토리호보다 불과 10분 뒤에 그 난장판 속에 끼어들 수 있었는데, 그 지점의 적함들은 모두 이미 아군 전함과 맞붙어 열띤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에이잭스는 당장 어느 특정 적함을 상대할 필요가 없었고 그저 이미 벌어진 난장판 속을 유유히 떠다니며 그 난장판 속의 적함들에게 마음껏 포격을 퍼부어댈 뿐이었지요.  덕택에 에이잭스 이후에 전투 현장에 돌입한 넬슨 전대의 전함들은 모두 2~4% 정도의 낮은 사상율을 냈습니다. 




(붉은 색이 영국 함대, 파란 색이 프랑스-스페인 함대입니다.  위쪽이 넬슨의 전대이고, 아래쪽이 콜링우드의 전대인데, 콜링우드의 전대는 부채살처럼 퍼져나가며 각자 사냥감을 찾고 있는 것에 비해, 넬슨의 전대는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빅토리의 꽁무니를 충실히 쫓아다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넬슨의 전대(전상자 512명, 총원 대비 8%)가 콜링우드 전대(전상자 1126명, 총원 대비 12%)에 비해 전체적인 사상자 수가 더 적었던 이유는 또 있었습니다.  넬슨과 콜링우드 모두 의도하던 바는 아니었습니다만, 적 함대에 접근하면서 가장 먹음직스러운 목표물, 그러니까 적 함대의 기함 뷔생토르나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136문 짜리 4층 갑판을 갖춘 초대형 스페인 전함 산티니스타 트리니다드 (Nuestra Señora de la Santísima Trinidad) 호, 그리고 역시 거대 전함이었던 112문짜리 산타아나 (Santa Ana) 등을 각자 노리다보니, 넬슨과 콜링우드 모두 적 함대의 중앙부에 돌입해버린 것입니다.  원래 계획에 따르면 넬슨은 전 함대 전체 길이의 1/3 지점, 콜링우드는 2/3 지점에 돌입하게 되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두 전대가 각각 돌입한 두 지점 사이에는 불과 5척의 전함만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콜링우드 전대가 벌여놓은 난장판 속에 넬슨 전대의 전함들이 끼어들어 도와주는 경우도 생겨버렸습니다.  넬슨의 빅토리는 콜링우드의 로열 소브린보다 거의 30분 늦게 전투에 돌입했으므로,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넬슨의 뒤를 따르던 전함들은 일이 더 적었던 것이지요.  




(뷔생토르 호의 모습입니다.  뷔생토르 Bucentaure 라는 이름은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유명사인데, 베니스의 군함에도 이런 이름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그 이름의 어원은 다소 아리송하다고 합니다.  다른 영국 전함이나 프랑스 전함들은 주로 '굴하지 않는' '지치지 않는' 등의 형용사를 쓰거나 '벨레로폰' 또는 '오라이언' 등의 고대 신화 속 이름을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대 신화 속 이름들은 일반 수병들에게는 낯설고 발음하기도 어려웠지요.  가령 벨레로폰의 경우, 실제 수병들은 정식 이름보다는 'Billy Ruffian' (악당 빌리) 라는 비슷한 발음의 별명을 더 애용했다고 합니다. )



하지만 그건 넬슨 전대의 후미 쪽 전함들 사정이고, 넬슨이 탑승한 빅토리 호의 사정은 달랐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적의 집중 포화를 40분간 혼자서 뒤집어 쓰고 돌격해야 했고, 이제 곧 보시겠습니다만 프랑스 함대 내에서 가장 유능한 함장이 이끄는 적함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빅토리가 처음에 노리고 접근했던 적함은 어디에서 봐도 눈에 띌 수 밖에 없는 당시 세계 최대의 전함 산티니스타 트리니다드 호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전례에 따라, 포격 시작 직전 연합 함대가 각자 깃발을 올리자 어느 배가 연합 함대의 기함인 뷔생토르 호인지 드러났던 것입니다.  사실 뷔생토르는 2갑판을 갖춘 80문짜리 3급 전함이었으므로 1급함인 빅토리 호가 노리기에는 다소 작은 상대이긴 했지만, 적의 지휘 통제 능력을 빼앗기 위해서는 당연히 적의 기함을 먼저 쳐야 했습니다.  마침내 오후 1시가 넘어서 빅토리는 뷔생토르의 뒤쪽, 그리고 르두터블(Redoutable, '무시무시한' 이라는 뜻)의 앞쪽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는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이 종사, 즉 raking fire입니다.  이런 사격은 아무래도 근거리에서 먹여야 제대로 먹습니다.)



이 순간, 빅토리의 3개의 포갑판에서 일제 포격 (broadside)이 뷔생토르의 함미에 퍼부어졌습니다.  전혀 빗나갈리 없는 지근거리에서의 제대로 된 종사였지요.  이와 함께, 앞갑판에 장착된 영국 해군만의 독특한 단거리 포였던 68파운드짜리 대형 캐로네이드 (carronade)의 포격이 뷔생토르의 노출된 갑판에 퍼부어졌습니다.   여기에는 구형탄(roundshot)과 함께, 머스켓 총탄 500발이 든 나무통이 함께 장전되어 있었습니다.  적 수병들과 장교들이 밀집된 후갑판 (quarterdeck)에 이 포격이 이루어졌으니 그 피해는 끔찍했습니다.  무려 282명 (그중 197명 사망)이 죽거나 다쳤고 이때 뷔생토르의 함장인 마장디(Magendie)까지 전사해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장디와 함께 서있던 빌뇌브 제독이 부상조차 입지 않고 무사했다는 것은 거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빅토리 호의 68파운드 캐로네이드 포입니다.  일반 대포 (cannon)과 달리 케로네이드는 일종의 저압포로서, 구경은 크지만 장약을 조금만 장전하는 단거리 포였습니다. 때문에 바퀴도 달려 있지 않고, 윤활유를 칠한 나무판 위를 미끄러지면서 발사 반동을 처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40분간 꼼짝 못하고 일방적인 포격을 당하다 이를 한순간에 되갚아준 기쁨도 잠시, 아직 뷔생토르의 함미를 통과하는 중이었던 빅토리 호의 바로 앞 부분에 포문을 즐비하게 열어놓고 반대로 빅토리 호에게 종사를 퍼붓기 직전인 프랑스 전함이 넬슨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원래 넬슨의 예상으로는 연합 함대는 일렬 종대를 이루고 있어야 했으므로, 뷔생토르의 함미 쪽으로 돌파를 하고 나면 탁 트인 바다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연합 함대의 서투른 항행 능력이 오히려 넬슨의 발목을 붙잡은 셈이 되었습니다.  많은 연합 함대의 전함들이 깔끔한 일렬 종대를 이루지 못하고, 군데군데에서 2줄 혹은 3줄의 엉성한 진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이제 막 뷔생토르를 '담그고' 신이 나서 치고나오는 빅토리의 취약한 함수 쪽에는 80문짜리 프랑스 전함 넵튠(Neptune)이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다음 순간, 수십개의 오렌지색 불꽃과 함께 짙은 회색 포연 속에 그 프랑스 전함의 모습이 사라졌고, 넬슨의 귀에는 그 포탄들이 날아들어와 빅토리를 산산조각 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것이 넬슨의 최후였을까요 ?  역시 Nelson Touch는 무리한 전술이었던 것이었을까요 ?




(당시 군함들은 주로 노란색과 검은색을 많이 썼는데, 포문의 안쪽은 주로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었습니다.  아마 그 빨간색 사각형 수십개가 바로 코 앞에서 보인다면 위압감이 대단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분량 조절에 실패한 것 같으니 그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보도록 하시지요.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