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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빌뇌브, 드디어 넬슨을 만나다

by nasica-old 2012.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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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편에서는 빌뇌브 제독이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페롤 항에 입항하는 모습까지를 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간을 잠시 거슬러 되돌아가, 빌뇌브 요격에 실패하여 풀이 죽은 채로 7월 20일 지브랄타에 상륙한 넬슨의 사정을 보시겠습니다.  그의 임무는 원래 툴롱의 빌뇌브 함대가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봉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전공을 세울 욕심에 너무 느슨한 봉쇄를 펼치다가 빌뇌브가 카리브해까지 달아나 온갖 난동을 부리도록 허락한데다, 결국 페롤 항에 무사 귀환하여 나폴레옹의 전략대로 연합 함대가 강화되는 결과까지 낳았으니 넬슨의 입장은 난처한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는 함대를 반납하고 빅토리 호를 타고 8월 19일 포츠머스 항구에 귀환합니다.  귀환하는 그의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본국에 도착하는대로 해군성 장관들의 질책과 대중의 비난이 쏟아질 것을 예상했으니까요.  그러나, 천만 뜻밖에도 포츠머스 항구에 상륙한 그를 반기는 것은 대중들의 열렬한 환영이었습니다.  신필 김용 선생의 '소오 강호'에서도 이런 대사가 나오지요.

'강호의 일이라는 것은 실력이 1할, 명성이 2할, 나머지 7할은 흑백 양도의 친구들이 체면을 봐주는 것이다'




(이미 넬슨 정도되면 '까임 방지권 100장' 정도는 받아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전체의 90%는 이미 쌓아놓은 명성과 인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소리입니다.  이날 상륙한 넬슨의 경우가 딱 그에 해당했습니다.  이 모든 소동의 원인이 넬슨의 봉쇄 실패였고, 또 많은 물자를 소비해가며 대서양을 오갔지만 아무런 전과를 올리지 못했으니 욕을 먹어도 모자랄 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부지런히 빌뇌브를 추격한 덕택에 카리브해의 식민지가 무사할 수 있었고 또 대서양에서의 영국 상선들의 피해도 최소화된 것이라고 무조건 넬슨을 찬양하기에 바빴습니다.  마치 별로 웃기지도 않는 이말년 만화를 보고 찬양 댓글을 다는 사람들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요.  저도 이말년 팬입니다.)  아무튼 뜻하지 않은 환대에 가슴을 쓸어내린 넬슨은 머튼(Merton)으로 내려가 그리운 엠마의 품에 무려 2년 만에 안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포근함도 며칠 가지 못했습니다. 




(이말년 만화와 무한도전은 간혹 재미가 없더라도 웃어주는 것이 예의)



불과 2주 정도 후인 9월 2일, 해군성의 명령서가 머튼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빌뇌브가 8월 20일 스페인 카디즈에 입항했으니, 그리로 가서 빌뇌브의 연합 함대를 없애버리라는 내용이었지요.  상황은 이랬습니다. 

빌뇌브의 함대는 페롤의 함대와 합류하여 전열함 29척으로 세를 불린 뒤, (나폴레옹의 독촉장에 떠밀려) 8월 13일 북쪽으로 출항합니다.  목적은 로슈포르 항구에서 봉쇄를 뚫고 탈출했던 알레망(Allemand) 제독의 함대와 합류하여 드디어 브레스트(Brest), 즉 강톰 제독의 20여척의 함대가 갇혀 있는 곳으로 가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빌뇌브의 함대는 조금 항진하다가 뭔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항로를 정반대인 남쪽의 카디즈 항으로 바꿔 버립니다.  일설에는 영국 함대의 존재를 인근 스페인 어선들이 알려줬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 일설에는 알레망 제독의 함대와 조우하자 서로 '저거 혹시 영국 함대 아냐?' 하고 화들짝 놀라 서로가 서로에게서 도망치는 추태를 보인 것이라고도 합니다. 

아무튼 이는 '당장 불로뉴로 달려오라'는 나폴레옹의 명령과는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대체 빌뇌브는 무슨 배짱으로 이렇게 명령 불복종을 단행했던 것일까요 ?  이는 빌뇌브가 철저하게 (적의 대포알로부터나 상관의 질책으로부터나) '보신 제일주의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명령을 문서로 만들었던 프랑스 해군성 장관 드크레(Decres)는 명령서 끝에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함대 보존을 위해) 카디즈로 돌아가라'는 문구도 적어 넣었거든요.  생각해보면 원래부터 강력한 영국 해군과 맞서 싸울 의사가 별로 없었던 빌뇌브는 그 문구를 빌미삼아, 수평선에 뭔가 돛대가 나타나자마자 '상황이 여의치 않구나 !'를 외치며 카디즈로 직행할 작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빌뇌브가 카디즈에 입항한 것이 8월 20일이었습니다. 




(대서양에 면한 스페인 남단 항구 도시인 카디즈는 예로부터 스페인의 주요 항구였습니다.  콜럼버스도 아메리카 발견 항해 당시 바로 이곳에서 출항했지요.)



카디즈는 봉쇄 하에 있지 않았었냐고요 ?  물론 봉쇄되고 있었지요.  그러나 콜링우드 (Cuthbert Collingwood) 제독이 카디즈 앞바다에서 빌뇌브가 이끄는 29척의 전열함들을 만났을 때 불행히도 그의 지휘 하에는 불과 3척의 전열함 뿐이었습니다.  오히려 콜링우드의 함대가 빌뇌브의 함대에게 나포당할 처지였지요.  이 위기의 순간에 콜링우드는 미친 듯이 뭔가 신호기를 올렸다내렸다 함으로써 마치 수평선 너머에 대규모 영국 함대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여 빌뇌브로 하여금 이 영국 소함대를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얌전히 카디즈로 들어가도록 유도했습니다.  이때가 바로 8월 20일이었습니다.




(트라팔가 해전 당시 제2인자였던 콜링우드 제독입니다.  이 전투가 이 분의 마지막 전투였는데, 이 한 건으로 이렇게 동상까지 만들어지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사실 그럴만 하기도 하고요.  이 분은 5년 뒤인 1810년, 결국 병으로 지중해 영국 군함 위에서 숨집니다.)



빌뇌브의 카디즈 입항 소식은 콜링우드가 급파한 영국 슬룹함과, 스페인 파발마에 의해 영국 해군성과 불로뉴의 나폴레옹에게로 전해집니다.  당연히 나폴레옹은 대노했습니다.  나중에 울름(Ulm) 편에서 다루겠습니다만, 이렇게 영불 해협으로 오기를 거부하는 빌뇌브로 인해서, 나폴레옹은 이미 영국 침공은 물건너 갔다고 판단하고 캠프를 걷어서 다고 전해집니다.  사실 영국 침공을 포기한 것이 전적으로 빌뇌브 탓만은 아닌데, 나폴레옹은 아무튼 끝까지 자신의 처음부터 잘못된 밑그림 생각은 하지 않고 철저히 모든 것을 부하 탓으로 돌리는 재주가 있는 편이었지요. 




(나에게 실수나 오판이란 없다.  뭔가 잘 안되었다면 다 멍청한 부하들 탓이다.)



나폴레옹의 불행이 영국의 행복이기는 했습니다만, 영국도 나름 바빴습니다.  저렇게 30척 이상의 전열함들로 구성된 적의 대함대라는 물건은 영국 해군성의 본토 방위 계획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고, 또 존재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영국 해군성은 그 존재를 지워 없애기로 작정했고, 그 지우개로는 당연히 넬슨을 택했습니다.  당시 연합 함대를 상대하기 위해 카디즈 항구 앞에 집결하기로 한 영국 함대는 크게 2개 집단으로서, 페롤 항에서 빌뇌브의 뒤를 따라온 칼더 제독의 18척과, 원래부터 카디즈 앞바다에 있던 콜링우드의 8척이 있었는데, 피니스테라 해전 (모든 것은 의지의 문제 - 피니스테라 해전 http://blog.daum.net/nasica/6862521 참조)에서 보여준 칼더 제독의 리더쉽을 보면 도저히 그에게 영국 본토의 안위가 걸린 결전을 맡길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2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육지에 오르지 못하다가 이제 겨우 2주 정도를 집에서 쉬고 있는 넬슨에게 '포츠머스로 가서 빅토리 호를 타고 카디즈로 가라'는 명령서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넬슨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아직 빅토리(HMS Victory) 호는 출항 준비가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며칠 더 엠마의 품에서 쉴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9월 13일, 넬슨은 머튼을 떠나 포츠머쓰를 향했고, 바로 다음날 빅토리 호에 승선하여 곧장 카디즈로 떠났습니다.  그가 카디즈 앞바다에 도착하여 칼더 및 콜링우드의 함대와 합류한 것이 9월 28일이었습니다. 




(영국 로열 네이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넬슨의 피가 스며든 바로 그 군함, HMS Victory입니다.)



넬슨의 함대의 규모는 9월 28일 당시 프리깃 같은 작은 배들을 빼고 전열함만 따지면  총 29척이었습니다.  이만한 규모의 함대가 하나로 뭉쳐 있는 일은 해군의 나라 영국에서도 대단히 드문 일이었습니다.  이 정도 규모의 함대가 모여야 할 만큼 강력한 적 함대가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랬기 때문에 당연히 넬슨이 지휘하게 된 함대도 원래 여기저기서 긁어모아 급조된 함대였습니다.  일단 원래 카디즈 앞바다를 봉쇄하고 있던 콜링우드 제독의 함대가 8척, 거기에 피니에스테라 해전 이후 해협 함대에서 증원군을 받아 더 증강된 칼더 제독의 함대가 18척, 그리고 넬슨이 타고 온 빅토리 호와 나머지 2척의 전함까지였지요.  칼더 제독의 함대도 평소부터 하나로 움직이던 함대는 아니고, 원래 칼더가 페롤 항을 봉쇄할 때 지휘했던 10척에, 빌뇌브의 함대를 요격하기 위해 증원 받은 5척을 합한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아부키르 해전에서처럼 (넬슨의 불꽃놀이 - 아부키르 해전 하편 http://blog.daum.net/nasica/6862485 참조) 넬슨이 오랜 시간 데리고 다녔던 함장들이나 함대는 아니었다는 이야기지요.  뿐만 아니라 인근 해역에 있던 전열함들을 급한 대로 긁어모으다보니, 일부 전열함들은 너무 오래 바다에 나가 있던 것들이라 보급품이 거의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이로 인해 10월 2일, 이들 중 5척은 프리깃 1척과 함께 보급품을 싣기 위해 지브랄타로 보내야 했고, 결국 이들은 트라팔가 해전에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넬슨은 툴툴대는 칼더의 귀향길을 위해 최신예 98문짜리 2급 전함이었던 프린스 오브 웨일즈 (HMS Prince of Wales) 호를 내어줘야 했습니다.  다행히 인근 해역에서 다른 전열함들이 합류했기 때문에, 10월 15일에는 결국 27척의 전열함을 거느리게 되긴 했지요.




(보급품 문제로 트라팔가 해전에 참여하는 영광을 놓친 HMS Canopus입니다. 원래 프랑스 해군의 Franklin으로 태어나 1798년 아부키르 해전에서 넬슨에게 나포된 이후 영국 해군 캐노푸스 호로 개명되었지요.  당시 가장 우수한 항행성의 전열함으로 명성이 자자했으나,빛나는 영광과는 인연이 멀었습니다.  이와 함께 전투에서 빠져야 했던 전열함들은 HMS Queen, HMS Spencer, HMS Zealous, HMS Tigre였습니다.  젤러스 호는 아부키르 해전에도 참여했던 배였고, 티그르 호는 생-장-다르크 포위전에서 스미스 함장이 지휘하여 나폴레옹을 괴롭혔던 바로 그 전함이었지요.)



이에 비해 빌뇌브의 함대는 어땠을까요 ?  빌뇌브의 함대는 총 33척의 전열함으로 증강되어 있었습니다.  원래 툴롱에서 빌뇌브가 최초 출항했을 때의 11척에, 1805년 4월 카디즈에 잠깐 들렀을 때 합류했던 7척 중 2척이 아직 건재했습니다.  (다른 5척은 피니스테라 해전에서 2척이 나포되고 3척이 크게 파손되어 대규모 수리가 필요했습니다.)  로슈포르에서 빠져나온 전열함 2척이 카리브해에서 합류했었고, 또 피니스테라 해전 이후 기어이 입항했던 페롤 항에서 13척의 증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0월 중, 몇척이 카디즈에 추가로 입항함으로써 총 33척의 전열함이라는 근래에 없던 막강한 전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숫자가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프랑스 및 스페인 해군은 포격 훈련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범선의 항행 조작면에서조차 서투른 선원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거대한 선단을 이루면 좀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정작 이렇게 많은 전열함들이 카디즈 항에 빽빽히 모이니 생각지 않았던 문제들까지 터져 나왔습니다.  바로 밧줄과 가로 활대 같은 소모품 문제였습니다.





(범선의 돛대는 사실 배에 영구 고정된 것이 아니라, 저 shroud라고 하는 밧줄들로 양쪽에서 단단히 잡아당김으로써 비로소 고정되는 것입니다.  이런 삭구류는 거친 파도와 바람, 태양 등에 의해 끊임없이 부식되고 손상되었습니다.  또 주돛대는 그런 경우가 많지 않았습니다만, 가로활대, 즉 yard들은 거친 바람 속에서 조금 무리하게 운용하면 금이 가버려 못 쓰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 범선들은 '바람과 하얀 돛'만 있다면 세계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연 친화적인 그린 에너지 선박이었으므로 식량과 물 빼면 연료같은 보급품 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거친 바다에서 범선을 이루는 모든 자재, 그러니까 선체를 이루는 판재는 물론이고 가로 돛대나 각종 밧줄류는 끊임없이 닳고 끊어지고 갈라지는 등 소모가 심했습니다.  그래서 범선이 항구에 귀항하면, 물과 식량은 물론이지만 밧줄과 가로 활대 등의 삭구류도 꼭 보충을 해야 했습니다.  함장과 선원들이 항해술에 능숙하다면 이러한 삭구류 손상을 최소화할 수 있었지만, 당시 프랑스 해군처럼 미숙한 선원들이 거친 대서양을 2번이나 횡단했으니, 빌뇌브가 이끌고 카디즈로 들어온 연합 함대는 이런 소모품이 거의 고갈된 상태였습니다.




(이런 밧줄이 다소 삭았어도 배는 출항할 수 있는 거 아니야 ? 라고 나폴레옹은 생각할지 몰라도 거친 바다에 나가면 이런 밧줄이 삭았느냐 튼튼하냐는 것은 수백명의 삶과 죽음이 달린 문제입니다.)



빌뇌브는 스페인 최대 군항인 카디즈로 일단 성공적으로 들어왔으니 이런 물품을 쉽게 보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만, 그것이 또 쉽지가 않았습니다.  스페인 항구 당국이 이런 대규모 함대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알고보면 빌뇌브 함대는 스페인의 카디즈가 아니라 프랑스의 브레스트로 가야 했거든요.  게다가 카디즈 항구 역시 오랜 시간 영국 해군의 봉쇄에 놓여 있다보니, 밧줄과 목재, 타르 등의 해군용 보급품의 수입이 어려웠습니다.  전에 중립도 힘이 있어야 한다 - 발트해의 포성 http://blog.daum.net/nasica/6862507 편에서 썼듯이, 이런 해군용 보급품은 주로 발트해 지역에서 수입해다 쓰는 편이었는데, 그 수입이 원활치 않은 상태에서 수십 척의 덩치가 산만한 전열함들이 우르르 밀고 들어와 밧줄과 가로활대를 내놓아라고 아우성을 치니 그 요구를 다 들어주기가 어려웠던 것이지요.  이래저래 빌뇌브는 출항 준비에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빌뇌브는 이런저런 지체가 더 기뻤을 수도 있었습니다.  넬슨은 혹여 자신이 왔다는 소식에 그렇쟎아도 소심한 빌뇌브가 더욱 겁을 먹고 나오지 않을까봐 9월 28일 도착하자마자 '내가 왔다는 사실을 적에게 알라지 말라'며 전 함대에 함구령을 내렸고, 또 특유의 '느슨한 봉쇄'를 펼치느라 약 80km 떨어진 수평선 아래에 숨어 있었습니다.  카디즈 앞바다까지는 수평선에 보일락말락 하는 거리마다 프리깃함들을 릴레이로 띄워놓고, 혹시라도 연합 함대가 기어나오면 마치 조선 시대의 봉화대처럼 깃발 신호 (밤에는 불꽃 신호)로 그 소식을 즉각 전달 받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놓은 상태였습니다.  넬슨이 이렇게 꼭꼭 숨어있었지만, 간첩들과 어선들을 통해 프랑스와 스페인도 이미 넬슨이 카디즈 앞바다에서 빌뇌브를 잡으려 수평선 너머에서 칼을, 아니 대포를 갈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빌뇌브로서는 자기가 이끄는 서툴고 너절한 함대를 이끌고 넬슨과 대포알을 주고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니 보급품 부족이라는 핑계거리가 싫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일련의 프리깃들을 정찰선으로 띄워놓고 수평선 뒤에서 웅크리고 '빌뇌브야 나와라' 주문을 외우던 넬슨의 배치도입니다.  출처는 http://www.nelsonsnavy.co.uk/battle-of-trafalgar.html )



하지만 빌뇌브는 여전히 계속해서 나폴레옹의 성화에 시달리고 있는 신세였습니다.  그 말많은 코르시카 촌놈이 '빨리 그 엉덩이를 들고 나폴리로 가라'는 명령서를 9월 16일 보내왔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이미 8월 26일에, 빌뇌브가 북쪽의 브레스트 대신 남쪽의 카디즈로 기어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영국 원정은 단념하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상대하기 위해 동쪽으로 떠나기 시작한 상태였습니다.  프랑스가 오스트리아를 상대하는 기본 전략은 대혁명 직후 국민공회의 프랑스 국방 장관이었던 카르노(Carnot)가 세운 원칙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즉, 남쪽에서는 이탈리아를 통해 티롤을 위협하고, 북쪽에서는 라인강 전선에서 오스트리아의 정면을 노린다는 양동작전이었지요.  나폴레옹이 일개 포병 장교에서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남쪽 이탈리아 전선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기 때문이었고, 가장 최근의 활약도 바로 북부 이탈리아인 마렝고 전투에서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과거 모로 장군이 담당했던 (모로와 나폴레옹 - 호헨린덴 전투 http://blog.daum.net/nasica/6862505 참조) 라인강 전선을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맡고, 자신의 놀이터였던 북부 이탈리아에는 마세나를 보내 과거 자신이 수행했던 역할을 맡겼습니다.  나폴레옹은 빌뇌브의 함대에 병력을 실어, 중부 이탈리아인 나폴리에 상륙시켜 마세나를 지원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은 '만약 그 과정에서 더 적은 수의 영국 함대를 만나게 되면 적극적으로 교전하라'는 주문도 끼워 넣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승리의 조직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라자르 카르노 (Lazare Carnot) 입니다.  정치가로서 뿐만 아니라 뛰어난 수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쿠데타로 실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높이 산 나폴레옹은 그를 다시 불러들여 국방부 장관으로 삼을 정도였는데, 철저한 자코뱅이었던 카르노는 나폴레옹의 종신 통령직은 물론, 황제 즉위에도 반대표를 던졌고, 결국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와 함께 공직에서 물러나 학자의 길을 걷습니다.  공학에 나오는 Carnot's cycle 이라는 것은 그의 아들인 사디 카르노가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빌뇌브는 끝끝내 출항을 거부했습니다.  10월이 되자 보급품 문제가 좀 나아지긴 했는데, 여전히 넬슨을 상대하러 출항하기는 껄끄러웠던 것이지요.  게다가 스페인 제독들이 프랑스 제독의 총지휘 하에 프랑스군을 지원하러 이탈리아에 간다는 생각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  스페인 장교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10월 8일 결국 빌뇌브는 함장들을 모아놓고 '출항을 할지 말지' 투표를 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에, 군대에서 작전 방향을 놓고 '투표'라니요 ?  물론 스페인 함장들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던 이 투표에서 출항은 부결되었고, 빌뇌브는 못 이기는 척 그에 따랐습니다.  과연 빌뇌브는 'fleet in being' 전략을 위해 상관의 명령도 거부하는 신념론자였을까요, 아니면 그냥 넬슨도 무섭고 나폴레옹도 무서운 '보신주의자'였을까요 ?




(지난 편에서도 fleet in being에 대해 설명드렸습니다만, 이런 전열함은 꼭 바다에서 적함을 향해 대포를 쏘고 있어야 그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항구에 퍼질러 앉아 나 이래뵈도 전열함이야 ! 라고 큰소리만 쳐도 영국 함대에게는 큰 부담이 되므로 나름 제 몫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러나 나폴레옹에게는 이 모든 이론이 다 개소리에 불과했습니다.)



그 답은 10월 18일에 나옵니다.  이 날, 빌뇌브는 갑자기 독재자가 되어, '모두 닥치고 출항!'을 외쳤던 것입니다.  빌뇌브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2가지 첩보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먼저, 지브랄타에 영국 전열함 5척과 프리깃 1척이 새로 기항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보급품 문제로 부득이 항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 그 배들이었지요.  그렇다면 넬슨의 함대가 꽤 약해졌을테니, 이때가 출항에 최적기라고 생각했던 것이고, 이것이 빌뇌브가 부하 함장들에게 설명한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핑계에 불과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적지인 지브랄타가 아닌, 아군 진영인 마드리드에서 날아온 첩보였습니다.  즉, 빌뇌브의 무사안일주의에 질려버린 나폴레옹이 마침내 폭발하여 로질리 (François Rosily) 제독을 빌뇌브의 후임자로 파견했고, 그가 마드리드에까지 도착했다는 급보였습니다.  '보신주의자'에게 이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습니다.  넬슨의 대포알이야 잘만 하면 피할 수도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자신의 옷을 벗길 후임자는 절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요.

하필 이날은 그다지 출항에 적합한 날씨가 아니었습니다.  바람이 몹시 약했거든요.  당장 돛을 올리라는 빌뇌브의 명령이 떨어진 것이 10월 18일이었는데, 정작 돛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다음날 아침 6시부터였습니다.  그리고 배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2시간 뒤인 8시 경이었고, 그날 중으로 카디즈 항구 입구를 빠져나간 것은 고작 12척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가 느릿느릿 하나 둘 씩 항구를 빠져 나오는 동안, 이를 지켜보던 영국 프리깃함들은 넬슨이 배치해놓은 연결 고리에 의해 깃발 신호로 이 소식을 넬슨의 빅토리 호에 릴레이 방식으로 전달했습니다.  실제로 넬슨은 이 소식을 2시간 30분만에 보고받을 수 있었습니다. 




(카디즈는 좁은 육로로 육지와 연결된 반도 끝에 있는 요새 도시입니다.  나중에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공하자, 스페인 군부와 의회는 바로 이곳에서 농성하며 프랑스군에게 저항했습니다.  큼지막한 만이 저 긴 반도에 의해 바다와 분리되어 있으므로, 천혜의 항구라고 할 수 있는 지형입니다.)




(1811년 카디즈를 둘러싼 프랑스군과 영-스페인 연합군의 전투가 바로 Sharpe's Fury의 배경입니다.  2006년에 발간된, 비교적 신작이지요.)



그 다음날은 바람이 꽤 심하게 불어대는 거친 날씨여서, 넬슨은 연합 함대의 움직임에 대해 아무 소식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폭풍이 가라 앉고나자, 이제 연합 함대가 카디즈를 모두 빠져나와 서쪽으로 항진 중이라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실제로 빌뇌브의 함대는 10월 20일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겨우 1열 종대의 함대 대형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먼저 약간 서진한 뒤, 이어서 1차 목표인 지브로올터 해협 돌파를 위해 남쪽으로 항로를 변경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후 7시 30분 경, 이 두 함대의 전초병 역할을 하는 프리깃함들끼리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게 됩니다. 

이대로 나간다면 넬슨의 함대와 그것도 야간에 부딪힐 것이 뻔했으므로, 한밤중에 벌어졌던 아부키르 해전의 악몽을 기억하는 빌뇌브는 방향을 북동쪽으로 돌려 일단 회피했습니다.  아마 빌뇌브는 아직도 '운만 좋다면' 넬슨의 손아귀를 빠져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윽고 날이 저물고, 이 두 함대 사이에는 짙은 어둠이 모든 것을 가려 버렸습니다.  이 어둠 속에서, 빌뇌브는 초조하게 밤을 보냈습니다.  과연 날이 밝았을 때, 넬슨이 또 번지수를 잘못 잡고 엉뚱한 방향으로 사라졌을지, 바로 코 앞에 짜잔 하고 나타날지에 따라 그 다음날은 매우 평온한 날이 될 수도, 또는 역사적인 날이 될 수도 있을테니까요. 




(카디즈에서 트라팔가 곶까지는 불과 60km 정도의 거리입니다.  당시 범선으로도 평균 12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항구에서 함대가 다 빠져나오기를 기다리고 또 함대 진형을 갖추고 하느라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서 결국 여기까지 오는데 이틀이 걸렸네요.)



그리고 마침내 날이 밝아 10월 21일의 태양이 떠오르자, 저 멀리 서쪽 약 16km라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그토록 보고 싶지 않던 영국 함대가 똑바로 자신들을 향해 다가 오고 있는 모습이 연합 함대의 망원경에 들어왔습니다.  빌뇌브가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해보니 트라팔가 곶 서쪽이었지요.  빌뇌브는 아직 모르고 있었을테지만, 그들은 향후 100년 동안 영국 로열 네이비의 제해권을 확정지을 역사적 날의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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