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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모든 것은 의지의 문제 - 피니스테라 (Finisterre) 해전

by nasica-old 2012.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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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와 올림픽 축구 탓에 약간 부실했던) 지난편에서는 빌뇌브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풀이 죽어 귀환한 넬슨과, 반대로 넬슨이 쫓아왔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 허겁지겁 유럽으로 되돌아가는 빌뇌브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넬슨이 유럽, 정확하게는 지브랄타를 향해 출발했던 것은 6월 13일이었습니다.  이때 넬슨은 빌뇌브가 카디즈 또는 툴롱으로 향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혹시라도 빌뇌브가 그대로 영불 해협 쪽을 향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만약 빌뇌브가 영불 해협으로 그대로 가던가 혹은 강톰 제독의 함대와 합류하기 위해 브레스트 쪽으로 향했다면, 영국의 해협 함대에게도 '혹시 빌뇌브가 그쪽으로 갈지 모르니 대비를 하라'고 통보해주는 편이 나았습니다.  넬슨은 그럴 목적으로 16문짜리 슬룹(sloop)함 큐리외 (HMS Curieux) 호를 영국으로 파견합니다.  그리고 이 큐리외 호가 생각하지도 않은 대박을 터뜨립니다.  영국으로의 항해를 시작한지 약 900마일 지점에서, 한창 동진 중인 빌뇌브의 함대의 꽁무니를 발견한 것입니다.




(큐리외 호의 베츠워쓰 함장은 유명한 시인 바이런 경의 친척이기도 했습니다.  불행히도 이 용감하고 영리한 젊은 함장은 1808년 노르웨이 근해에서 벌어진 덴마크와의 Alvøen 해전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이 그림의 오른쪽 프리깃함이 베츠워쓰 함장의 HMS Tartar 호입니다.  원래 베츠워쓰 함장은 이 타타르 호에 바이런 경을 태우고 함께 카리브해 또는 지중해 항해에 나서기로 약속했었으나, 결국 그 약속은 지킬 수가 없었지요.)



큐리외 호의 함장인 베츠워쓰 (George Edmund Byron Bettesworth)는 당시 불과 20세의 새파란 청년으로서, 아직 정식 함장(post captain)이 아닌 준함장(commander)였습니다.  그가 타고 있던 큐리외 호도 그 프랑스식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원래는 바로 1년전 자신이 나포했던 프랑스 사략선이었지요.   이렇게 젊다 못해 어린 청년이었던 베츠워쓰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침착함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함대의 시야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거리를 유지하며 그 뒤를 추적했고, 결국 빌뇌브가 비스케이 (Biscay) 만을 향하고 있다는 것만을 확인한 뒤, 그대로 영국 런던으로 질주하여 그 소식을 영국 해군성에 알렸습니다.  빌뇌브의 행선지가 어디냐라는 것보다는 빨리 영국 함대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지요.  베츠워쓰의 정확한 판단 덕분에 해군 장관이던 바람 경 (Charles Middleton, 1st Baron Barham)이 이 소식을 받은 것은 아직 빌뇌브가 스페인에 도달하기 훨씬 전인 7월 9일이었습니다. 




(이 분이 바람 경입니다.  이 분의 이름을 딴 전함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 때의 Queen Elizabeth급 전함 HMS Barharm입니다.)



영국 해군성은 당연히 초긴장 상태에 돌입했습니다.  베츠워쓰가 보고한 빌뇌브의 함대의 방향을 그대로 믿는다면, 적어도 영불 해협이나 카디즈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다만 비스케이 만은 워낙 넓은 지역이었으므로, 빌뇌브가 노리는 행선지는 북쪽 끝의 브레스트로부터 중간의 로슈포르 또는 남쪽 끝인 스페인의 페롤 항구까지도 가능했습니다.  어느 쪽을 지켜야 할지 갈팡질팡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바람 경의 지시는 단순했습니다.  전 함대를 동원해서 빌뇌브를 찾아내어 요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프랑스와 스페인 항구들을 봉쇄하고 있던 영국 함대들이 각각 자리를 이탈하여 빌뇌브의 예상 항로를 향했습니다.  브레스트 항을 봉쇄하던 콘월리스 제독의 해협 함대 본진은 북쪽 항로에서 요격망을 펼쳤고, 로슈포르를 막고 있던 전열함 5척으로 구성된 스털링 (Charles Stirling) 제독의 함대는 남쪽 페롤 항을 봉쇄하던 칼더 (Robert Calder) 제독의 전열함 10척의 함대와 합류하여, 피니스테라(Finisterre) 곶 서쪽 100마일 지점에서 혹시 나타날지도 모를 빌뇌브 함대를 기다렸습니다.




(저 하얀 원 속의 항구들이 빌뇌브의 목적지 후보들이었습니다.  중간에는 로슈포르 대신 라로셸이 표시되어 있는데, 로슈포르는 라로셸 바로 아래에 있는 항구입니다.  원래 신교도인 위그노들의 중심도시였던 라로셸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었던 콜베르 Colbert 재상이 별도로 그 옆에 건설한 군항이 로슈포르입니다.)



영국의 봉쇄 함대들이 자리를 비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소식은 즉각 나폴레옹에게도 전달되었습니다.  그는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영국 함대의 행동은 마침내 기다리던 빌뇌브의 함대가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고, 또 영국 함대들이 그를 요격하러 사라진 사이 브레스트와 로슈포르의 프랑스 함대들이 출항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지요.  나폴레옹의 원래 계획과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브레스트와 로슈포르에 전령을 보내 즉각 출항하여 빌뇌브의 함대와 합류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전에서 나폴레옹의 지시는 뭐 하나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브레스트의 강톰 제독은 워낙 견고한 콘월리스의 봉쇄에 사실상 포기를 하고 있었는지, 눈 앞의 영국 함대가 사라지고 난 다음에도, 심지어 나폴레옹의 명령서를 받고 난 다음에도 출항을 못하고 꾸물거리다가 다시 콘월리스의 함대가 되돌아오는 바람에 결국 발이 묶이고 말았습니다.  반대로 로슈포르의 알레망(Zacharie Jacques Théodore Allemand) 제독(사실은 아직 정식 제독이 아닌, 함장으로서 임시 제독 commodore 직위)은 워낙 작은 함대, 즉 전열함 5척에 프리깃 2척, 코르벳 2척만 이끌고 있었는데다, 알레망은 바로 몇달 전에야 이 로슈포르 소함대의 지휘를 맡게 된 터라 의욕이 넘치고 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구체적 명령이 오기도 전에 영국 봉쇄 함대가 없어지자 마자 곧장 출항을 해버렸습니다.  이 알레망 소함대는 곧 벌어질 피니스테레 해전이나 트라팔가 해전에서는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으나, 북대서양에서의 영국 상선들을 공략하며 나름 큰 소동을 일으켰고, 특히 트라팔가 해전의 패배와 대비되면서 알레망을 제독의 지위에 올려주게 됩니다.



(저처럼 목이 짧았던 알레망 제독은 상관들과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킨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1805년에 알레망이 이룩한 전공에 매료되어 해군장관 드크레의 반대를 무릅쓰고 알레망을 정식 제독으로 승진시켰는데, 결국 알레망은 상관들에게 대한 불복종으로 인해 1813년에 해임되었습니다.  백일천하 때 알레망은 나폴레옹 편에 서겠다고 나폴레옹을 찾아갔으나, 그의 성품에 질려버렸던 나폴레옹의 측근들이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되돌려 보낼 정도였습니다.  참고로 이렇게 자질 문제로 백일천하 때 복무를 거절당한 사람은 이 양반이 유일무이했다고 합니다.)



유럽에서 이렇게 자신의 귀환을 맞이하기 위해 난리법석이 일어난 것을 알 턱이 없었던 빌뇌브의 항적을 좀더 보시기로 하시지요.  카리브 해에서 넬슨의 도착 소식을 듣기 전에, 빌뇌브는 약 500만 프랑에 달하는 화물을 실은 영국 상선대를 나포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통해 넬슨의 도착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유럽으로 되돌아가기로 했었지요.  가는 동안에도 빌뇌브는 짭짤한 전과를 계속 올렸습니다.  즉, 6월 30일 빌뇌브 함대는 작은 14문 짜리 영국 사략선을 만나 이를 나포했고, 또 7월 3일에는 약 1,500만 프랑에 달하는 화물을 실은 스페인 갈레온 선 마틸다(Matilda) 호가 영국 사략선 마르스 (Mars) 호에게 끌려가는 것을 목격, 마르스 호를 불태우고 마틸다 호를 되찾았습니다.  총 2천만 프랑이면 현재 가치로 대략 2천5백억원에 해당하니까, 상당히 짭짤한 전과였지요.  하지만 빌뇌브의 귀국 항로가 마냥 쾌적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범선을 타고 거친 대서양을 건넌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거든요.  일단 카리브해에 있을 때,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황열병으로 인해서 상당수의 선원을 잃은 상태였고, 또 하필 이때 대서양의 날씨가 그리 좋지 못한 편이어서 배들의 돛대나 밧줄 등의 삭구가 많이 손상되기도 했습니다.  이미 대서양을 11번이나 횡단한 경험이 있던 스페인 그라니바(Gravina) 제독도 이 때의 항해가 무척 힘들었다고 했으니, 미숙한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의 선원과 장교들에게는 더더욱 힘든 항해였습니다.





이렇게 지치고 만신창이가 된 전함들을 이끌고 오던 연합 함대가 스페인의 북서쪽 끝인 피니스테라 곶(Cape Finisterre) 인근에 도착한 것은 7월 22일이었습니다.  6월 11일 카리브해를 떠난지 41일 째되던 날이었고, 이틀 늦게 출발했던 넬슨이 훨씬 남쪽이자 더 먼 거리였던 지브랄타에 도착한 것이 7월 19일이었으니, 확실히 영국 해군에 비해 항해 솜씨가 뒤떨어지긴 했던 모양입니다.  다만, 이렇게 드디어 도착한 고국 혹은 동맹국 앞에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존재, 즉 칼더 (Calder) 제독의 영국 함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영국 함대는 15척의 전열함에 2척의 프리깃, 그리고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는 20척의 전열함에 7척의 프리깃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서로 마주친 것은 7월 22일 오전 11시 정도였는데, 하필 날씨가 지독하게 안 좋은 날이었습니다.  즉,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데다 안개까지 자욱했습니다.  함대 결전을 벌이기에는 최악의 날씨였지요.  결국 이 두 함대가 느릿느릿 접근하여 첫 포문을 연 것은 무려 6시간이 지난 오후 5시 15분 경이었습니다.  이 5시간 동안 빌뇌브와 칼더 두 제독의 머리 속은 매우 복잡했습니다.  우울하기는 빌뇌브의 마음이 더 우울했고, 복잡하기는 칼더의 머리가 더 복잡했지요.  일단 빌뇌브 본인도, 설마 영국 함대의 요격을 받지 않고 페롤 항에 들어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브레스트 항도 아니고 고작 페롤 항구인데 저렇게 전열함이 15척이나 되는 강력한 함대가 자기 앞을 막고 있을 줄은 몰랐지요.  물론 자기 쪽 함대가 더 크기는 했습니다만, 그는 자기 부하들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배나 수병들이나 모두 긴 항해에 지쳐 만신창이 상태였으므로,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잘 싸울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이 전투에서 스타일을 구긴 칼더 제독입니다.  그러나 귀족들끼리는 다 서로 봐준다고, 원래 귀족 집안이었던 그는 1815년에 기사작위 (Knight Commander of the Order of the Bath)도 받고 잘 살다가 1818년에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한편 칼더 제독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습니다.  그는 원래 페롤 항을 봉쇄하는 지루한 임무를 맡고 있다가 불과 3일 전에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로슈포르 봉쇄 함대와 함께 이 곳에서 빌뇌브의 함대를 요격하기 위해 기다렸습니다만, 그러느라 내팽개치고 온 페롤 항 때문에 아무래도 뒤통수가 간지러웠습니다.  여기서 다시 되풀이를 하자면, 나폴레옹의 기본적인 전략은 카리브해에서 되돌아오는 함대가 영국 봉쇄 함대의 뒤를 노리면, 항구에 봉쇄되었던 프랑스 함대도 그 틈을 타서 출격하여 앞 뒤에서 영국 함대를 포위 격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순간, 나폴레옹이나 칼더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즉, 페롤에 정박하고 있던 12척의 연합 함대 (프랑스 4척, 스페인 8척)이 슬그머니 기어나와서 칼더 함대의 뒤를 들어칠 것이라는 것이었지요.  이렇게 될 경우 칼더의 15척 함대는 총 32척의 연합 함대의 공격을 받게 되므로, 아무리 영국 해군의 솜씨가 뛰어나다고 해도 이는 중과부적일 것이라는 것이 나폴레옹과 칼더의 공통된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예견, 혹은 이해하지 못한 일들이 바다에는 많았습니다.  일단, 페롤에 있던 연합 함대는 빌뇌브가 다가 오고 있는지 어떤지 알지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명령서가 먼 스페인 최북서단인 페롤까지는 오지 않았던 것이지요.  실은 나폴레옹 본인도 빌뇌브가 브레스트로 가는지 로슈포르로 가는지 알지 못했고, 더더욱 페롤로 향하고 있는다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즉, 육지와는 달리 바다에서는 통신이 전혀 원활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페롤 함대도 눈 앞의 칼더 함대가 사라진 것을 보기는 했습니다만, 이것들이 자신들을 꾀어 내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인지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속단할 수가 없었지요.  게다가, 출항 준비라는 것이 하루 아침에 뚝딱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특히나 이날은 바람이 영 시원찮았기 때문에 현재 코 앞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출항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노련한 해군 제독이었던 칼더까지도 페롤 함대의 움직임에 신경을 썼다는 사실은 다소 뜻 밖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칼더는 페롤 함대의 기동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설사 페롤 함대가 기어나온다고 해도, 칼더는 빌뇌브 함대와 페롤 함대 사이에 있었으므로, 만약 바람이 동풍이라면 빌뇌브의 함대가 동진을 못할 것이고, 서풍이라면 페롤 함대가 서진을 못할 것이므로 칼더는 한번에 하나의 함대만 상대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실제로도 페롤 함대는 끝끝내 항구 밖으로 기어나오지 않았습니다.



(피니스테라 해전도입니다.  실제대로 그린다면 그냥 안개와 포연, 가끔씩 번쩍이는 불꽃 정도만 그려야 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상황 속에서, 오후 5시 15분 드디어 지근 거리에 접근한 두 함대는 포문을 열고 교전을 시작합니다.  포문을 연 것은 칼더 쪽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람도 거의 없는 빽빽한 안개 속에 흑색 화약의 짙은 포연이 더해지자, 영국 함대나 연합 함대나 거의 장님 수준이 되어 마구잡이로 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두 함대는 서로 상대방 포문에서 가끔씩 번쩍이는 포화를 보고 그 쪽 방향으로 냅다 대포를 쏘았을 뿐,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두 제독은 물론 각 함의 함장조차도 상황 파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빌뇌브의 기록에 따르면 '연합 함대의 함장들은 안개 속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할 뿐'이었다고 합니다.



(HMS Malta는 원래 아부키르 해전의 프랑스 전함 귀욤 텔 Guillaume Tell 이었습니다 !  이 전함은 아부키르 해전에서 무사히 빠져나간 뒤 당시 프랑스군이 점령하고 있던 말타 섬에 숨어있었습니다. 나중에 말타 섬이 항복할 때 탈출하려다가 결국 영국 해군에게 나포되어 HMS Malta가 되었지요. 이 그림은 당시 나포 장면을 그린 것으로, 종사 위치에서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오른쪽 배가 바로 귀욤 텔입니다.)



꼭 패전한 축구팀만 그라운드 잔디 상태에 대해 불평한다고, 이 날씨는 연합 함대 뿐만 아니라 영국 함대에게도 똑같이 악조건으로 작용했습니다.  대략 영국 함대는 전통적인 일렬 종대로 남서쪽 방향으로 뚫고 들어갔는데, 짙은 안개 속에서 아군의 선두함은 어디에 있고 적함은 어디 있는지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함대 최후미에 있던 80문짜리 전열함 말타 (HMS Malta) 호의 함장 불러 (Sir Edward Buller)는 이 혼란 속에서 잠깐 안개가 걷히자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군 함대는 온데간데 없고 말타 호가 무려 적함 5척에게 둘러싸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타 호는 양쪽 포현의 포문을 모두 가동하여 '17대1'의 싸움을 벌였습니다.  원래 당시 전열함에는 양쪽 포현을 풀 가동할 만큼의 인원이 없었으므로, 한번에 한쪽의 포현만 사용하는 것이 정상이었습니다.  물론 상황이 급해지면 이렇게 양쪽 포현을 모두 한꺼번에 사용하기도 했었으나, 이럴 경우 대포 1문에 배치 가능한 인원수가 절반이 되어버리므로, 특별히 양쪽 포현을 풀 가동하는 훈련을 따로 해놓지 않는다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누가 조준을 할 것이고 누가 장전봉을 다룰 것인지 미리 정해놓아야 하니까요.  능숙하다는 영국 해군에서조차, 모든 전함이 이런 훈련을 해놓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Broadside, 즉 현문 일제 사격은 어디까지나 한번에 한쪽씩만 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Patrick O'Brian의 명작 해양 소설 Fortune of War에서, 주인공 Jack Aubrey는 승객으로 타고 있던 HMS Java의 승무원들이 이렇게 양쪽 포현을 다 쏘도록 훈련 받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프리깃함 USS Consititution과의 대결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되고 맙니다.  그렇지 않아도 포술 훈련을 중요시하던 오브리 함장은 이후로 특히 부하 수병들이 양쪽 포현을 한꺼번에 쏘도록 훈련시키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그런데, 말타는 그런 훈련이 되어 있었나 봅니다.  말타 호는 놀랍게도 그 5척의 적함에게 양쪽 포현에서 일제 사격을 퍼부으며 뚫고나와 계속 전투를 벌여 마침내 84문짜리 스페인 전함 산 라파엘(San Rafael) 호의 항복을 받아냈을 뿐만 아니라, 추가로 74문 짜리 스페인 전함 피르메(Firme) 호의 항복까지 받아냅니다.  물론 말타 호도 돛대가 일부 꺾이고 금이 가는 등 피해가 있었으나, 인명 손실은 5명의 전사자와 40명의 부상자 뿐으로서, 상대적으로 가벼운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타 호의 활약이 사실상 전체 해전의 거의 유일한 전과였습니다. 




(이 양반이 피니스테라 해전의 영웅 불러 함장입니다.)



가뜩이나 안개와 포연 때문에 장님 상태인데 해까지 저물어버리자 더더욱 곤란해진 칼더 제독은 저녁 8시 25분에 전투 중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다음날 해가 뜨면 다시 싸우려는 의도였지요.  그러나 깃발 신호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태였으므로 이후에도 약 1시간 동안 포격전이 계속될 정도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다시 집결해보니, 확실히 이 날 해전의 승리는 영국의 몫이었습니다.  일단 2척의 스페인 전열함을 나포한데다, 총 4척의 적함 (프랑스 1척, 스페인 3척)이 심각한 손상을 입어 전투 불능의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집계된 바에 따르면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의 인명 피해는 전사 155명에 부상 341명, 그리고 포로 1,200명이었습니다.  영국 측도 당연히 피해를 입었습니다.  나포된 전열함은 없었으나, 말타 호를 포함한 2척이 심한 손상을 입어 전투 불능 상태였고, 전사 41명에 부상 158명이었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영국의 승리이긴 했습니다.  특히 원래 15 대 20의 전력이었는데 이젠 12 대 14가 되었으니, 전투가 시작되기 전보다 훨씬 유리한 상태가 된 것이었지요.

두 함대는 다음날 안개가 걷힌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서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수평선에 보일락 말락 할 정도(약 27km)로 떨어진, 서로의 모습이었습니다.  바람의 방향은 연합 함대 쪽에서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즉 연합 함대가 풍상 (weather gauge)을 점유하고 있었으므로 전투 재개의 결정권은 빌뇌브에게 있는 셈이었습니다.  빌뇌브는 이 피니스테라 곶 전투에서의 승리자가 자신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으나, 승리자스럽지 않게도 전투를 재개할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빌뇌브는 이 바람 방향 때문에 페롤 항의 아군 함대가 출항을 못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도 모르지요.  이렇게 서로 대치한 채 아무 의미없는 하루를 보낸 뒤, 이 두 함대는 7월 24일 아침을 맞이합니다.




(당시의 모든 해전에 있어서 바람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졌습니다.  지상전으로 따지자면 누가 더 고지를 차지하고 있는가에 해당할 정도의 사안이었습니다.  위 그림은 1797년의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의 상황도입니다만, 당시 해전도를 그릴 때 바람의 방향을 함께 그리는 것은 그래서 필수적이었지요.)



이 날의 바람은 영국 함대에게 있었습니다.  즉 칼더가 마음만 먹는다면, 즉각 연합 함대에게 다가가 다시 포격전을 벌일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하지만 칼더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저 계속 대치만 하고 있었지요.  이 모든 것이 의지의 문제였을까요 ?  칼더의 변명은 역시 페롤 함대였습니다.  이제 바람이 동풍으로 변했기 때문에, 페롤의 적함대가 출항하여 자신의 뒤를 덮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굳이 빌뇌브와 결전을 벌여 함대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의 일입니다만 이 변명에 대해서는 넬슨 제독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상황'이라며 동조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국 해군 장교들은 칼더의 이 날 행동은 그저 '모처럼 나포한 소중한 스페인 전함 2척'을 지키려는 치졸한 돈 욕심 때문으로 생각했습니다. 

칼더는 충분히 그런 의심을 살 만 했습니다.  페롤 함대가 뒤에서 언제든지 기어나올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럴 수록 더 신속하게 빌뇌브의 함대를 격파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우물쭈물 대치만 하고 있다가는 정말 페롤 함대와 빌뇌브 함대의 합동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칼더 뿐만 아니라, 모든 영국 해군 장교들은 아무런 전공도 세울 수 없고, 또 아무런 나포 포상금 (prize money에 대해서는 스페인 보물선 함대를 둘러싼 모험 http://blog.daum.net/nasica/5311309 참조)도 기대할 수 없는 봉쇄 임무를 싫어했습니다.  그런 지루하고 고된 임무를 2년간이나 수행하고 있다가 뜻하지 않게 나포한 전열함 2척은 군침을 삼킬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1척에 2만 파운드만 받는다고 해도 (아부키르 해전 - 에필로그 http://blog.daum.net/nasica/6862486 참조) 총 4만 파운드, 그 중에서 제독의 몫은 1/8이므로 5천 파운드였습니다.  현재 가치로 대략 15억원에 달하는 돈이었으니, 최영 장군이 아니고서야 그만한 액수에 흔들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페롤 항구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칼더가 나포한 스페인 전열함들만 만지작거리면서 공격하지 않고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빌뇌브도 '바람이 불리해서'라는 핑계를 대고 페롤 입항을 포기하고 카디즈를 항해 줄행랑을 칩니다.  그러나 연합 함대의 항해 실력은 더욱 그를 실망시켜, 도저히 카디즈까지 갈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7월 26일 페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비고 (Vigo) 항으로 입항하여 급한 대로 수리에 들어갑니다.  칼더는 그렇게 도망치는 빌뇌브의 뒷모습을 내심 반기며 나포된 스페인 전열함을 영국으로 보내고 자신은 페롤 봉쇄 임무로 복귀합니다. 




(페롤 항구의 위성 사진입니다.  좁은 만 입구 속에 들어앉은 전형적인 항구의 모습입니다.)



이후에도 칼더에게는 빌뇌브와 대포알을 주고 받을 기회가 한번 더 있었습니다.  대충 수리를 마친 빌뇌브가 7월 30일 다시 북상하여 페롤에 입항하려 한 것입니다.  이때 빌뇌브의 전력은 전열함 15척, 칼더는 여전히 12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충분히 해볼 만한 전력이었지요.  그러나 다시 한번 날씨가 칼더의 발목을 잡습니다.  마침 결정적인 시기에 폭풍이 불어 칼더의 함대는 페롤 항 멀리 밀려 가버렸고, 칼더는 모르고 있었으나 그 짧은 사이에 빌뇌브가 페롤에 입항해버린 것입니다.  이로 인해 가뜩이나 의심받던 칼더에 대한 불만이 영국 해군성 내에서 들끓게 됩니다.  더 이상 저런 인물에게 연합 함대 격파라는 중책을 맡길 수가 없다는 여론이 팽배했던 것이지요.  그 후임으로는 다름아닌 넬슨이 선정되었습니다.

넬슨의 그간 소식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보시기로 하고, 여기서는 의지에 문제가 있었던 사나이 칼더 제독에 대해 집중하기로 하시지요.  그는 넬슨이 추가 전열함을 이끌고 오자 발끈했습니다.  아무도 정면에서 그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았으나, 해군 내외에서 들끓는 여론에 대해서는 그도 다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본국으로 귀환하여 자신의 명예 회복을 위해 군법 회의를 받겠다고 자청했습니다.  넬슨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칼더 제독의 처지를 이해하는 편이었으므로 그를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곧 있을 연합 함대와의 결전, 즉 트라팔가 해전을 위해 전력 손실이 있으면 곤란했으므로, 넬슨은 타고 갈 배편으로 프리깃 한 척을 내주려 했습니다.  그랬더니 또 칼더가 발끈했습니다.  '제독이 귀국하는데 초라하게 프리깃함을 타고 가라는 말인가 ?'  지금 당장도 전열함 수가 부족했던 넬슨은 결국 그에게 전열함 프린스 오즈 웨일즈 (HMS Prince of Wales) 호를 내주었고, 칼더는 염치도 없이 그걸 덥썩 얻어타고 위풍당당(?)하게 영국으로 귀환했습니다. 





(보통 HMS Prince of Wales라고 하면 2차대전 때 일본군 항공기에게 격침당한 이 전함을 떠올리지만, 여기서는 1794년에 진수된 당시로서는 최신예 98문짜리 2급 전함을 말합니다.  이 배는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칼더 제독을 군법 회의에 태워다주느라 피니스테라 해전은 물론 트라팔가 해전까지 참전 기회를 놓치고, 결국 별다른 전과없이 1822년 해체되는 운명을 겪습니다.)



이렇게 별로 아름답지 못하게 귀국한 칼더는 그 뒤의 행동으로 더더욱 욕을 먹었습니다.  그는 그가 군법 회의를 받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벌어질 모든 전투에서 나포될 적함에 대한 나포 포상금에 있어서 자신의 정당한 몫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이 뻔뻔스러운 행동은 '이렇게 당당히 주장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는 꼴이 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왔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썽사나웠던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원했던 군법 회의에 나섰으나, 결과는 그리 좋지 못하여, 공식 질잭(official reprimand)을 받았고, 이후 다시는 현역 보직을 받지 못했습니다. 

자, 여기까지가 트라팔가 해전으로 가는 '쩌리'들의 이야기였습니다.  다음편부터는 빌뇌브 요격에 실패하여 번민에 빠졌던 넬슨의 사정과 함께 본격적인 트라팔가 해전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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