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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리 스캔들 - 엠마 이야기

by nasica-old 2012.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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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편에서는 영국 정복을 위해 어떻게 영불 해협을 건널 것인가에 대한 나폴레옹 전략의 개요와 그 내재된 불안 요소를 보셨습니다.  말이 쉽지 영국 함대가 단단히 틀어막고 있는 항구에서 '몰래' 빠져나와 영국 함대의 추격을 뿌리치고 대서양을 건넌다는 계획은 실현 가능성이 별로 높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항구는 폭풍과 파도로부터 배들을 보호하기 위해 입구가 좁은 내포에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뜩이나 조수의 흐름도 복잡한데 오직 바람의 힘으로 둔중한 범선을 몰아 좁은 수로를 빠져나오는 것 자체가 사실 꽤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수로안내인(나폴레옹 시대에도 도선사가 연봉 킹이었을까 ? http://blog.daum.net/nasica/6862408 참조) 이라는 직업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작업을 영국 해군의 감시를 피해서 진행한다 ?  이는 나폴레옹의 뇌내망상과는 달리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인선도 없던 시절, 항구에서 탈없이 빠져나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영국 함대의 봉쇄를 뚫기 위해 날씨가 안 좋을 때 그렇게 한다는 것은 더욱 그랬지요.)



나폴레옹 자신도 이집트 원정 당시 영국 해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출항할 수 있었으나, 이는 당시 국제 정세 상황이, 지중해 내에 존재하는 영국 전함의 수를 0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넬슨과의 숨바꼭질 http://blog.daum.net/nasica/6862476 참조)  그러고도 나폴레옹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 넬슨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었지요.  다른 제독들도 나폴레옹만큼 운이 좋기를 기대할 수 있었을까요 ? 

게다가 영국 해군도 나폴레옹이 계획한 그런 위협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즉, 각 항구에 분산된 프랑스 함대가 항구 밖으로 일제히 쏟아져 나와 하나로 합쳐질 경우 영국 해군을 위협할 정도로 큰 함대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영국 해군의 해결책은 아주 단순한 것이었지요.  각 항구에서 못 빠져 나오도록 입구를 틀어막고 있으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것이었지요.

하지만 나폴레옹의 '대서양을 두번 횡단하는' 복잡한 전략에서처럼, 영국 해군의 이 단순한 전술에도 내재된 불안 요소가 있었습니다.  바로 '영국 해군의 대재앙' 엠마 해밀턴 (Emma Hamilton)이었습니다.   왜 엠마라는 일개 여자가 영국 해군에게 대재앙을 불러왔는지 잠깐 보시지요.




(아니 ?  이렇게 아름다운 소녀가 영국 해군의 재앙이라고요 ?  어찌 이런 일이 ?)



1805년 1월 18일, 프랑스의 비교적 작은 군항인 로슈포르(Rochefort)에서 미시에시(Edouard Jacques Burgues de Missiessy) 제독이 지휘하는 5척의 전열함이 슬쩍 빠져나옵니다.  당시 로슈포르 앞바다에는 그레이브스(Thomas Graves) 제독이 지휘하는 7척의 전열함과 1척의 프리깃함으로 이루어진 영국 함대가 봉쇄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당시 이 함대는 사정이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일단 그레이브스 제독 본인이 1802년 이후 건강상의 문제로 사실상 현역에서는 물러선 상태라서 함대에는 없었고,  기함인 푸드로이연트 (HMS Foudroyant) 호의 함장인 퍼겟(Peter Puget)도 최근 심한 부상을 입어 영국으로 후송되어 당시 푸드로이언트 호의 선임 사관 (1st lieutenant)이던 네셤(Christopher Nesham)이 대신 그레이브스 제독의 깃발을 날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미시에시 제독의 소함대는 영국 함대의 봉쇄를 뚫고 대서양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아직 로슈포르에는 다른 군함들이 남아 있었기에, 미시에시 함대를 추격하는 것은 근처에 있던 코크레인(Alexander Cochrane) 제독의 소함대의 몫이었습니다.   미시에시는 서둘러 원래 계획대로 서인도 제도를 향해 내뺐고, 코크레인도 그 뒤를 쫓았습니다. 




(그레이브스 제독입니다.  이 양반이 당시 기함으로 삼던 푸드로이연트 호 선상에서는 나중에 낯뜨거운 일이 벌어지지요.  자세한 이야기는 본문 중에...)



이때 동시에 탈출해야 했던 것이 강톰(Honore Joseph Antoine Ganteaume) 제독이 지휘하는 전열함 21척의 브레스트(Brest) 함대와, 빌뇌브 (Pierre-Charles Villeneuve) 제독 지휘 하의 전열함 11척의 툴롱(Toulon) 함대였습니다.   그러나 브레스트에서는 아예 탈출을 시도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영국 해협 함대에서 가장 가까운 최대 프랑스 군항이었던 브레스트는 콘월리스 (William Cornwallis) 제독의 해협 함대 (Channel Fleet) 본대가 그야말로 철저하게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조차도 브레스트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무리한 탈출은 하지 말고, 몇달 뒤 툴롱과 로슈포르에서 탈출한 프랑스 함대가 돌아와 영국 함대의 배후를 위협하면 그때 탈출하라고 지시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빌뇌브의 함대는 탈출에 멋지게 성공합니다.  1월 18일 푹풍을 틈타 툴롱을 탈출한 빌뇌브의 앞을 가로 막아야 할 영국 함대가 현장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사라진 영국 함대는 누구 지휘 하의 함대였고 대체 어디에 있었냐고요 ?  이 함대는 바로 넬슨 (Horatio Nelson) 제독이 지휘하는 지중해 함대였습니다.  빌뇌브가 어떨결에 탈출에 성공한 뒤 영국 함대의 행방에 대해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넬슨은 사르디니아 섬 남쪽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




(콘월리스 제독입니다.  이 양반은 C.S. Forester의 소설 Hornblower에서 아무 빽도 없는 임시 함장 혼블로워를 예뻐라하는 인자하고 공정한 제독으로 출연합니다.)



이야기는 1798년 9월 22일, 나폴리에서 시작됩니다.  아부키르에서 그야말로 빛나는 승리를 거두고 (넬슨의 불꽃놀이 - 아부키르 해전 (에필로그) http://blog.daum.net/nasica/6862486 참조) 귀환하던 넬슨은 잠깐 영국의 우방인 나폴리에 입항했는데, 여기서 영국의 나폴리 파견 공사인 윌리엄 해밀턴(Sir William Hamilton)의 부인이 위명이 하늘을 찌르던 그를 만난 자리에서 감격에 겨워 '아, 이게 현실인가요 ?' 하고 외치더니 그의 품에 안겨 혼절을 해버린 것입니다.  이 젊고 아름다왔던 부인의 이름은 엠마 해밀턴(Emma Hamilton)이었습니다.  그리고 넬슨은 이 유부녀와 그 자리에서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엠마 해밀턴은 당시 33세였고, 그 남편인 윌리엄 해밀턴 공사는 무려 67세였습니다.  왜 이런 미녀가 이런 꼬부랑 할아버지와 결혼을 했었을까요 ?   사실 엠마 해밀턴은 양가집 규수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본명은 애미 라이언(Amy Lyon)이었고, 원래 대장장이의 딸이었습니다.  그녀가 태어난지 2달만에 아빠가 사망했기 때문에, 그녀는 과부 어머니 밑에서 아주 곤궁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엠마도 당시 빈곤한 서민 가정의 딸들이 다 그러듯이, 10대 초반까지 옷가게 점원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친구의 영향으로 연예인 병이 걸려, 극장에 나가 단역 역할을 주로 했는데, 역시나 푼돈을 벌 수 있었을 뿐이었지요.  결국 15살 때 그녀는 일종의 기쁨조로 해리 경이라는 (Sir Harry Featherstonhaugh) 귀족의 집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기쁨조라 함은 귀족이 사적인 파티를 벌일 때 흥을 돋구기 위해 술을 권하고 춤을 추는 그런 여자를 말하는 것이지요.  아, (당연히) 옷은 입지 않고 말입니다.  물론 해리 경의 정부 역할도 했었지요.  딸까지 낳았다고 합니다.  물론 애 아빠인 해리 경은 천한 것이 허락도 없이(?) 임신했다고 노발대발했다고 합니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정말 예쁘긴 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들은 모두 엠마가 10대 후반, 그러니까 미모와 젊음이 절정에 달했던 순간에 그려진 것들이라는 점~  영국 여자들은 빨리 늙는다는 점~)



그런데 이 해리 경의 파티에서 엠마는 그레빌(Charles Francis Greville)이라는 진지하지만 약간 덜 떨어진 귀족 아저씨를 만나게 됩니다.  간단히 말해 호구를 하나 물었다고 봐야지요.  결국 엠마는 자기보다 16살 연상인 이 그레빌이라는 귀족의 정부가 되었지요.  이때 엠마의 과거를 지워보려던 이 귀족 아저씨의 요청으로 이름을 애미 라이언에서 엠마 하트(Emma Hart)로 바꾸게 됩니다.   패트릭 오브라이언의 명작 소설 Master and Commander에서, 주인공이자 영국 해군 장교인 잭 오브리를 불륜의 사랑에 빠뜨리는 유부녀 이름이 바로 몰리 하트(Molly Hart)인데, 이 소설 속 여자의 이름은 바로 엠마 해밀턴의 처녀적 이름에서 따온 것이지요. 




(미국 대형 서점에 가면 아예 Aubrey 시리즈를 위한 코너가 따로 있을 정도의 대작인 이 소설이 국내에서는 판매 부진으로 3편까지만 나오고 말았다는 점은 정말 두고두고 아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레빌과의 연애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레빌은 경제적 사정이 여의치 않아지자 지참금이 많은 여자와 결혼하여 그 난관을 타파하겠다는, 남자다운 결심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어차피 천한 계집, 몇년 데리고 놀았으면 이제 질릴 때도 되었겠지요.  하지만 그레빌은 호걸다운 풍모가 있었던지라, 엠마에게 그냥 나가달라는 이야기는 차마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1786년, 엠마에게 한 6개월 동안 날씨 좋고 경치 좋은 나폴리에서 한 6개월 동안 푹 쉬고 오라는 친절한 속삭임과 함께, 나폴리 주재 영국 공사로 있던 친척 아저씨인 윌리엄 해밀턴 경(Sir William Hamilton)에게 보내줍니다.  사실 그레빌은 해밀턴 경에게도 빚을 지고 있었는데, 당시 50대 중반이었던 해밀턴 경은 마침 홀아비 신세였고, 또 미학에 관심이 많아 그것이 골동품이건 보석이건 미녀이건 예쁜 것은 다 수집하는 고상한 취미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21세 낭랑 소녀를 보내주며 자기가 진 채무를 퉁치자는 남자다운 거래를 했던 것입니다.  해밀턴 경은 이 여자의 과거 경력대로, 사교 파티에서 흥을 돋우는 기쁨조로 활용할 계획이었습니다. 




(이건 해밀턴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모습이겠지요)



휴가차 온 줄 알았던 엠마는 나폴리에 와서 이 쭈글쭈글 할아버지를 만나고 나서야 자기가 팔려왔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  당시 돈도 없고 가족도 없는 여자 신세는 글자 그대로 뒤웅박 신세였지요.  엠마는 당시 명사들이 즐겨찾던 사교장으로 이름높던 해밀턴 경의 저택에서 정말 최고의 기쁨조 역할을 합니다.  거기서 그녀는 본인이 'Attitudes (태도)'라고 불렀던 일종의 마임 극을 개발하여 사교계의 큰 인기를 얻습니다.  이 Attitudes라는 것은 엠마가 의상과 소도구들을 이용하여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인물들, 그러니까 메데아나 클레오파트라, 카산드라 등의 인물을 아무 대사도 없이 동작으로 표현하면 손님들이 어떤 인물에 대해 표현하는지 맞추는 놀이였습니다.  해밀턴 경의 고상한 사교회에 초대된 저명한 상류층 인사들은 이 우아한 놀이에 매료되었는데 그 중에는 괴테까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놀이를 할 때 엠마는 속옷을 전혀 입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남자들은 다 똑같지요 ?





(이 그림들은 모두 엠마가 디오니소스 신을 모시는 신화 속 여인으로 분장한 모습입니다.  이 그림 모두는 조지 롬니라는 화가가 그린 것인데, 이 화가 역시 엠마에게 사랑의 포로가 된 상태였지요.)


이렇게 엠마에게 홀딱 빠진 사람들 중에는 바로 해밀턴 경 본인도 있었습니다.  그는 엠마가 온지 5년만인 1791년, 엠마와 정식으로 결혼함으로써 조카 그레빌을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엠마의 나이 26세, 해밀턴의 나이 60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엠마는 태생은 천하지만 똑똑하고 예쁜 계집 엠마 하트가 아니라, 레이디 해밀턴이 되어 상류 사회에 정식으로 입문하게 됩니다.  특히 남편의 임지인 나폴리에서, 나폴리 왕국의 국왕인 페르디난드 1세 (Ferdinand I of Naples)의 부인이자 프랑스 혁명 당시 처형된 마리 앙또와네트의 동생인 마리아 카롤리나 여왕 (Maria Carolina of Austria)의 친구가 되어 정치외교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 됩니다.   그리고 1798년, 드디어 넬슨과 만나 운명적 사랑에 빠지게 되지요.  넬슨의 나이 40세, 엠마의 나이 33세 때의 일입니다.




(카롤리나 여왕입니다.  저렇게 포즈를 취하니 정말 오스트리아 공주다와 보입니다.)



엠마와 만났던 남자들이 엠마와 사랑에 빠진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는 넬슨처럼 자신의 극심한 부상을 정성스럽게 간호했던 현모양처 부인(Frances Nelson)을 둔 유부남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육지보다 바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던 넬슨에게 그냥 후덕하게 생긴 부인은 그저 집안일을 돌보는 파트너였지 사랑의 대상은 아니었나 봅니다.  문제는 엠마에게는 남편이 바로 곁에 있었고, 이 남편인 해밀턴 경은 넬슨을 극도로 존경하고 있었으며, 또 넬슨도 이 인자하고 고상한 취미를 가진 해밀턴 경에게 대해 상당한 경의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넬슨과 엠마가 불륜에 빠지다니, 이게 사람의 탈을 쓰고 할 짓이었을까요 ?

영화 300으로 잘 알려진 스파르타 사람들의 풍습은 현대적인 정서로 볼 때 사실 꽤 야만스러운 구석이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로, 자주 언급되는 부분은 아니지만, 스파르타에서는 나이가 많은 남편이, 젊고 건강한 부인이 강건한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잘 생기고 튼튼한 아이를 낳기 위해서 가장 좋은 처방이 뭐겠습니까 ?  그렇지요 !  사실 말이나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좋은 종마와 암말을 교배시켜야지요.  당시 스파르타의 나이든 남편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평판이 난 잘 생기고 튼튼한 젊은이로 하여금 자기의 아내가 좋은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예 그랬습니다.  이는 아이가 자신의 것이 아닌, 국가의 것이라는 사상이 더 강했던 스파르타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였지요.




(골동품을 수집하는 해밀턴 경의 모습을 풍자한 당시 만화입니다.  저 왼쪽에 걸린 그림들을 보면, 클레오파트라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라는 이름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클레오파트라는 당시 영국 부인들의 복장을 하고 있고, 안토니우스는 영국 해군 함장 제복을 입고 있네요.  케사르가 죽고 나자 클레오파트라의 옆자리를 안토니우스가 차지한 것은 다들 아시지요 ?)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에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유명한 해밀턴 경도 그런 잊혀진 좋은 풍습을 되살리려 했던 것일까요 ?  엠마와 넬슨이 나폴리의 명소들을 떠돌며 노골적인 애정 행각을 벌일 때, 해밀턴 경은 그를 못 본 것처럼, 오히려 장려하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해밀턴 경의 행동까지 더 해져, 당시 엠마와 넬슨의 스캔달은 유럽 사회 최고의 화제거리가 되었습니다.  너무 떠들썩하여, 넬슨이 엠마를 만난 이후 남편에게서 편지를 한 통도 받지 못한 그 부인 파니 (Fanny, Frances의 애칭이지요)는 말할 것도 없고 영국 해군성에서조차 걱정을 할 정도였습니다. 




(넬슨 부인, 즉 Fanny 입니다.  이 분은 젊은 넬슨과 결혼할 때 이미 미망인이었는데, 넬슨은 당시 이 여자의 부자 친척이 이 여자에게 유산을 물려줄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Fanny와 결혼했다고 합니다.)



그러는 사이, 이 세기의 연인에게 혁명의 물결이 덮칩니다.  그들이 꿈같은 밀애를 속삭이던 나폴리 왕국에 프랑스의 후원을 받는 혁명이 밀어닥친 것입니다.  원래 부르봉 왕가 출신으로서, 프랑스 혁명에 큰 원한을 가지고 있던 페르디난드 1세는 나폴레옹이 무서워 차마 군사적 행동에 들어가지는 못했으나, 영국과 오스트리아의 꼬드김에 결국 넘어가서 1798년 11월,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당연히 결과적으로는 프랑스군에게 철저히 패배를 당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나폴리 왕국 내부에서조차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동조하는 내부 혁명이 일어났지요.  서민층보다는 주로 귀족 및 지식인층이 주동한 이 공화국을 지향하는 혁명으로 인해, 나폴리 왕국의 국왕 페르디난드 1세와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는 시실리 섬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때 카롤리나 왕비의 절친이던 엠마가 나름 큰 역할을 합니다.  엠마의 부탁을 받은 넬슨이, 자신의 기함에 나폴리 국왕과 왕비를 시실리로 안전하게 태워준 것이지요.   글쎄요... 아무리 넬슨이 지휘하는 영국 전열함이 더 크고 안전하고 믿음직하다고 해도, 좀 작지만 버젓이 자국 해군 프리깃함이 있는데도 그렇게 외국 군함을 타고 자국민들의 혁명을 피해 시실리 섬으로 피난을 떠나는 국왕을 호위하던 나폴리 프리깃함장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  실제로 그 프리깃함장이었던 카라치올로 (Francesco Caracciolo) 제독은 원래 부르봉 왕가에 충성하던 군인이었으나, 결국 혁명군에 가담하고 맙니다.  문제는 나중에 이를 체포한 넬슨이, 엠마를 통한 카롤리나 왕비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그다지 적절치 못한 과정을 거쳐 교수형에 처해버렸다는 점입니다.  이 일은 넬슨이 공과 사도 제대로 구분 못하고, 게다가 정의로운 국가라는 영국의 이미지를 해친 것으로서 넬슨의 이력에 큰 오점으로 남았습니다.




(카라치올로 제독입니다.  알고 보면 이 양반도 어쩔 수 없이 혁명군에 가담한 것이었는데, 아무튼 넬슨에게 부당하게 살해되어 유명해졌습니다.)




이후에도 넬슨은 건강이 나쁘다는 핑계로 직속 상관인 키쓰(George Elphinstone, 1st Viscount Keith) 제독의 명령도 어기고 엠마와의 열애에 몰입했습니다.   결국 이 소식은 본국에까지 알려져, 당시 해군성 장관(The First Lord of the Admiralty)이던 스펜서 백작(George Spencer, 2nd Earl Spencer)으로부터 '그렇게 건강이 나쁘다면, 외국 궁정에서의 환대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차라리 영국에 돌아와서 휴식하는 것이 어떠냐' 라는 노골적인 비아냥이 담긴 편지를 받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The First Lord of the Admiralty였던 스펜서 백작입니다.  간단히 말해 당시 해군내 최고 권력자였지요.  넬슨 같은 부하를 둔 것은 복이기도 했지만 골치거리이기도 했지요.)



게다가 마침 엠마의 법적인 남편인 해밑턴 경도 본국으로 소환되었으므로, 넬슨은 결국 해밀턴 부부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넬슨은 이 지경이 된 상황 속에서도 정신을 못차리고, 곧장 귀국하지 않고 해밀턴 부부와 함께 자신의 기함 푸드로연트 (HMS Foudroyant) 호를 타고 풍광이 아름다운 시실리와 말타 섬 일대를 유람하는 여유를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날짜를 계산해보면, 그와 엠마 사이에 낳은 사생아인 호레이시아 (Horatia Nelson)는 놀랍게도 바로 이 영국 전열함 함상에서 잉태되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푸드로연트 호가 80문짜리 3급 전열함이라고 해도, 당시 군함들의 열악한 구조상 사실상 사생활이라는 것은 불가능했거든요.  부하들이 다 알건 말건, 바로 옆 선실에 남편인 해밀턴 경이 있는데도 그런 일을 벌였다니, 넬슨의 늦바람은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넬슨은 (해밀턴 경이 딸린) 엠마와의 여행을 최대한 질질 끌며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냥 연락선을 타고 지브롤터를 들러 본국으로 직항하면 되는데, 일부러 피렌체와 오스트리아 빈을 거쳐 함부르크까지 간 뒤 거기서 배를 얻어타고 귀국을 했으니까요.  1800년 7월에 출발하여 11월에야 영국을 도착했으니 아무리 교통 수단이 불편한 시대였다고는 해도 정말 너무한 일이었습니다.




(넬슨과 엠마의 딸 호레이시아 넬슨입니다.  불행히도 엄마보다는 아빠를 더 많이 닮았네요.  그녀는 당시 사회적 손가락질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단 넬슨의 친구인 다른 사람의 딸로 태어난 것으로 했고 넬슨을 대부로, 엠마를 대모로 정하는 편법을 썼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넬슨 가문의 친척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죽을 때까지도 엠마가 자신의 모친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프랑스 전함 기욤 텔이 나포되는 모습입니다.  저 왼쪽 뒤에 있는 전함이 호레이시아가 잉태된 전함 푸드로이연트 호입니다.)




하지만 정작 영국에 상륙하자, 넬슨은 열화와 같은 환영을 받습니다.  역시 군인은 이기고 볼 일이라고, 영국 전체가 이미 2년이나 지난 아부키르 해전의 영웅을 거국적으로 맞이한 것입니다.  넬슨이 가는 곳마다 수많은 환영식과 연회가 열렸는데, 그런 속에서도 넬슨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바로 본부인 파니 넬슨(Fanny Nelson) 때문이었지요.  이미 넬슨의 스캔들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넬슨 부인은 넬슨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해서, 넬슨은 부인과 같은 방에 있는 것조차도 거부했다고 합니다.  넬슨 부인은 별 수 없이 자기냐 엠마냐 양자택일 하라고 편지를 써야 했고, 넬슨은 '그대를 진정 사랑하지만, 엠마를 향한 내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라고 짧은 답장을 보내 본부인을 디스했습니다.  개념이 없다고 지탄받는 요즘 세대의 부부들 중에서도 이렇게 이별을 문자로 통보하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넬슨은 이렇게 이별을 고한 와이프가 살고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는 이후 한번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엠마와 해밀턴 경이 사는 집에서 함께 살았지요.  이렇게 세 남녀가 뒤엉켜 지내는 모습은 누가 봐도 그리 아름답지는 않았습니다.  점잖은 척 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던 당시 영국 상류 사회는 무척이나 당황했습니다.  영국 최고의 영웅이 이런 추잡한 삶을 살고 있다니요 !  결국 영국 해군성은 서둘러 넬슨을 바다로 내보냅니다.  전에 소개드린 바 있는, 덴마크 침공 작전에 투입한 것이지요.  (발트해의 포성 http://blog.daum.net/nasica/6862507 참조)  이것이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솔루션이었습니다.  덕분에 넬슨은 엠마와의 사랑의 결실인 호레이시아가 태어나는 것도 옆에서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이때 넬슨은 뭔가 심경을 굳힌 것 같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즉, 영국 사회의 편견을 이겨내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 가정을 꾸미기 위해서는, 세상의 눈총을 압도할 만한 거대한 스케일의 대승리가 필요하다고요.  지난번 아부키르 해전보다 더 큰 승리를 낚아내면, 와이프와 이혼을 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잠깐, 엠마의 남편인 해밀턴 경은 어떻게 하냐고요 ?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  할아버지인 해밀턴 경이야 곧 늙어 죽을텐데요.  하지만 강인한 덴마크인들과의 전투는 쉽지 않았고, 결국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그다지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습니다.  넬슨은 더 큰 승리를 찾아 러시아 함대를 찾아 얼어붙은 러시아 항구를 뒤졌습니다만, 러시아 함대는 그를 피해 더 추운 곳으로 올라가버렸지요.  그는 결국 큰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귀국해야 했습니다.   이후 넬슨은 일종의 슬럼프 기간을 겪었습니다.  영국을 침공하겠다고 불로뉴에 집결하는 프랑스군과 그들을 수송할 평저선의 대함대를 습격하다가 그로서는 드물게 패배를 당하게도 했습니다.  (불로뉴의 한가운데서 영국 침공을 외치다 http://blog.daum.net/nasica/6862514 참조)




(덴마크 왕자와의 휴전 협정을 위해 코펜하겐에 상륙하는 넬슨의 위엄)



이후 찾아온 아미앵 평화 조약은 넬슨에게 짧지만 행복한 생활을 즐기게 해주었습니다.  이 기간 중 그는 런던 근교인 머튼 (Merton) 지역에 낡은 저택을 구입하여, 여기서 엠마와 (그리고 해밀턴 경과) 함께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때 당시의 엠마는 절정기는 지난 모습이었습니다.  세월에는 장사없다고 그녀도 이때 즈음엔 다소 살이 찐 아줌마의 모습이었고, 또 천상 연예인 기질이 있던 그녀가 화려한 사교계 생활을 그리워했던 반면에, 넬슨은 그런 떠들썩하고 가식적인 모임에서 벗어나 조용한 삶을 원했지요.   그러던 1803년 4월, 드디어 해밀턴 경이 노환으로 사망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달, 영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다시 전쟁이 시작됩니다.  이제 넬슨이 엠마와 당당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미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 즉 오직 대해전과 빛나는 승리를 위한 배경이 갖추어진 셈이었습니다.




(넬슨과 엠마가 살았던 머튼 지역의 모습입니다.  넬슨이 저 집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당시 넬슨이 살던 집은 의외로 작고 낡아빠진 집이었습니다.  그의 재산은 대부분을 와이프가 쥐고 있었거든요.)



사실 넬슨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영국 해군 장교들이 그런 장엄한 대해전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다들 승진 혹은 나포 포상금을 원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기회는 쉽게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해군은 강력한 영국 해군을 겁내어 도통 항구 밖으로 나오질 않았던 것입니다.  넬슨도 당연히 프랑스 군항 봉쇄 임무를 띠고 툴롱 앞바다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가 툴롱 앞바다에 도착한 것이 1803년 7월이었으나, 무려 1년 반이 지난 1805년 1월까지도 그는 프랑스 군함과 포탄을 주고 받을 기회를 전혀 얻지 못했습니다.   프랑스 함대와 엄청난 대해전을 벌인 뒤 빛나는 승리를 거두고 금의환향하여 당당하게 이혼을 하고 엠마와 정식으로 결혼하겠다는 그의 소망은 도무지 이루어질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1년 반 동안 사랑하는 엠마의 얼굴을 보기는 커녕 아예 뭍에 오르지도 못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봉쇄 임무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다가는 엠마가 할머니가 될 때까지 이 애틋한 불륜의 연인은 만날 수조차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요.  넬슨은 뭔가 수를 써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브레스트의 프랑스 함대가 봉쇄당하는 방식입니다.  저런 괴물이 바로  코 앞을 왔다갔다 하는데 어딜 출항한단 말입니까 ?)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가장 강력한 프랑스 함대가 정박해있던 브레스트 항구는 콘월리스 제독이 항구 코 앞에서 철저히 틀어막고 있었습니다.  아예 밖으로 기어나올 생각도 하지말라는 강력한 메시지였지요.  하지만 넬슨은 그런 상황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프랑스 함대가 밖으로 기어나와주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툴롱 항구에서 보이지 않는 수평선 저너머로 전열함들을 후퇴시켜 놓고, 오직 프리깃함 한두척 만을 수평선에 보일락말락 배치해놓았습니다.  이는 사실 상당히 위험한 배치였습니다.   원래 1789년 혁명 발발 이후 초기 봉쇄 작전 때는 영국 해군도 이렇게, 느슨한 형태의 봉쇄망을 짜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작전을 펼쳐보니, 날씨가 험할 때나 야간에 프랑스 함대가 영국 함대의 감시를 뚫고 빠져나가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여, 결국 콘월리스 제독처럼 전열함들을 프랑스 군항 바로 코 앞까지 들이밀어놓고 밀착 봉쇄하는 것으로 작전을 바꿨던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니 실제로도 넬슨은 개인적인 전공을 세울 욕심에 눈이 멀어 국가적 안보를 위험에 빠뜨리는 모험을 감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넬슨은 그런 위험한 도박을 한 댓가를 치릅니다.  다시 이야기가 1805년 1월 18일 빌뇌브 제독의 함대가 툴롱 항을 탈출하는 순간으로 되돌아가도록 하시지요.   당시 넬슨은 정말 프랑스 함대에게 먹음직스런 미끼를 뿌리려 했는지, 무려 300km 정도나 떨어진 곳, 그러니까 코르시카 섬과 사르디니아 섬 사이의 라 마달레나(La Maddalena)라는 곳에 닻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툴롱을 빠져나오는 프랑스 함대의 모습을 확인한 2척의 프리깃함 시호스 (HMS Seahorse) 호와 액티브 (HMS Active) 호가 그야말로 눈썹에 바람을 휘날리며 달려와 넬슨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당시 범선에게 300km의 거리는 아무리 바람이 완벽하다고 해도 2일 이상이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특히 이 두 척의 프리깃함이 관측한 빌뇌브 함대의 방향은 동쪽이었기 때문에, 넬슨은 이 함대가 틀림없이 이탈리아 해안 또는 말타 또는 사르디니아, 어쩌면 그리스나 이집트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쨌거나 프랑스 함대가 통과할 지역은 사르디니아 섬 남쪽이라고 판단을 한 넬슨은 부리나케 함대를 출항시켜 남쪽으로 내달렸습니다.  그러나 빌뇌브가 받은 명령은 지브로올터 해협을 빠져나가 서인도 제도로 향하라는 것이었지요.  빌뇌브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나왔는데, 막상 나와보니 넬슨은 간데없고 텅빈 바다 뿐이었는지라 어리둥절해야 했습니다.  미녀 엠마가 영국 해군의 천라지망에 커다란 구멍을 뚫는 순간이었습니다.




(레이다도, 정찰기도, 하마 못해 증기엔진도 없던 시절에 저렇게 먼 거리에서 무슨 봉쇄를 한다고....)



사르디니아 섬 남쪽에 덫을 치고 기다리던 넬슨은 1월 25일까지도 빌뇌브의 함대가 나타나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계획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는 예전에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함대를 뒤쫓을 때처럼 (넬슨과의 숨바꼭질 http://blog.daum.net/nasica/6862476 참조) 미친 듯이 지중해를 훑고 다닙니다.  그는 먼저 그리스로 갔다가 다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들러 프랑스 함대의 행방을 수소문했습니다.  다시 서쪽을 향해 2월 19일 말타 섬에 기항한 그는 이때서야 비로소 빌뇌브의 함대가 항구를 벗어난지 2일만에 다시 툴롱으로 되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요 ?  정말 프랑스 함대의 실력은 너무나 한심한 지경이어서, 당시 불어대던 폭풍 속에서 함대가 지브로올터를 향해 제대로 항진조차 못하자, 어쩔 수 없이 다시 항구로 되돌아갔던 것입니다.   넬슨은 한편으로는 안심도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몹시 실망도 했고, 또 창피하기도 했습니다.  무려 6주 동안이나 부하들과 선체를 학대해가며 거친 바다를 미친 듯이 훑고다녔는데, 그 결과가 이 모양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과욕으로 하마터면 대영제국 전체를 큰 위협에 빠뜨릴 뻔 했으니, 이제 넬슨도 제 정신을 차리고 밀착 봉쇄 방식을 취했을까요 ?  아닙니다.  넬슨의 야망, 그리고 엠마에 대한 사랑은 이 정도의 불운으로 꺾일 성질의 것이 아니었지요.   그는 여전히 '느슨한 봉쇄에 의한 유인 전법'을 고수했습니다.  더군다나 이런 전법을 썼더니 빌뇌브가 정말로 미끼를 물어 일단 기어나오기는 했쟎습니까 ?  그러니 더더욱 이 전법을 고수해야 했습니다.   그는 한술 더 떠서, 일부러 스페인 바르셀로나 앞바다를 기웃거리며 자신의 함대가 바르셀로나에서 관측되도록 노출시켰습니다.   당연히 그 소식은 육지를 통해 툴롱의 빌뇌브에게 전달되었지요.  그렇게 해놓고 넬슨은 다시 사르디니아 남쪽 해역으로 달려가서 덫을 놓고 기다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넬슨이 바르셀로나 앞바다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빌뇌브는 3월 30일, 다시 툴롱을 빠져 나옵니다.  빌뇌브 제독은 바르셀로나 앞바다에 있다는 넬슨의 포위망을 멀리 우회하기 위해 훨씬 남쪽 해역으로 기어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빌뇌브 자신은 몰랐으나, 그는 넬슨이 쳐놓은 덫을 향해 똑바로 달려가고 있던 것이었지요.  이 모습은 역시 넬슨이 배치해놓은 영국 프리깃함들에 의해 넬슨에게 그대로 전달됩니다.   과연 이번에는 넬슨이 빌뇌브를 잡고 엠마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요 ?  그 이야기는 다음 번에 보시지요.




(잘하면 걸릴 것도 같고... 아슬아슬 안 걸릴 것도 같고...  넬슨은 여전히 빌뇌브가 지중해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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