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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트라팔가로 가는 길 - 나폴레옹의 전략

by nasica-old 2012.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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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트라팔가 앞바다로의 긴 여행을 떠나십니다.  트라팔가 해전을 곧장 들여다보시기 전에, 먼저 왜 이 해전이 일어나야만 했는지 그 배경부터 보시기로 하지요.  흔히 트라팔가 해전은 영국 침공을 계획하던 나폴레옹의 야욕을 결정적으로 꺾은 전투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일설에 따르면, 사실 나폴레옹은 처음부터 영국을 침공할 계획이 없었고, 영국 침공은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방심시키기 위한 속임수 동작이었을 뿐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트라팔가 해전이 벌어질 때, 이미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침공을 시작하여 이미 울름(Ulm)을 함락시킨 뒤였지요.  과연 트라팔가 해전은 나폴레옹의 진짜 목적을 쟁취하기 위한 페인트 모션일 뿐이었을까요 ?  진실은 무엇이었을까요 ?



(황제 폐하의 진의는 안개에 싸여...)



먼저 당시 국제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시지요.  1803년 아미앵 조약이 파기되었을 때, 프랑스와 전쟁 상태에 있던 국가는 오직 영국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가 북부 이탈리아를 사실상 프랑스에 병합한 사건으로 인해, 국제 여론은 프랑스에 대해 부글부글 끓고 있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이 1804년 부르봉 왕가의 왕위 계승권에 있어 높은 순위이던 젊은 앙기앵 공작을 불법 납치하여 사실상 '사법 살인'한 뒤부터 (모로와 나폴레옹 - 호헨린덴 전투 http://blog.daum.net/nasica/6862505 참조) 국제 여론이 무척 좋지 않게 돌아갔습니다.  이는 당시 유럽의 정치 윤리를 뒤흔드는 대사건이었으니까요.  오스트리아는 물론이고, 러시아와 프러시아, 그리고 겉으로 볼 때는 별 상관없어 보이는 스웨덴까지도 나폴레옹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상황이었습니다. 




(스웨덴의 구스타프 4세입니다.  이 양반은 특히 나폴레옹의 앙기앵 공작 납치 살해에 열을 받아 3차 대불 동맹에 참여했습니다.  덕분에 그는 원래 스웨덴 영토이던 포메라니아를 말아드셨고, 지금은 그 땅이 독일과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지요.  프랑스에서는 30년 전쟁 때의 스웨덴의 영웅 구스타프 아돌프와 이름만 같았지 능력치는 전혀 딴판이라고 대놓고 비웃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푸셰(Fouche)의 정보망을 통해 나폴레옹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대군을 이끌고 영국 침공을 위해 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대단한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당시 영불간의 해군력 격차가 워낙 심해서, 영국 해군을 격멸한다는 것이 꿈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저 '6시간만 영불 해협에서 영국 해군을 몰아내달라'고 프랑스 해군에게 부탁하는 상황이었지요.  그렇게 '잠깐동안만' 제해권을 확보하여 상륙을 감행한다는 것은, 일이 잘못 되거나 본토에서 다른 전쟁이 벌어질 경우 꼼짝없이 영국 내에 갇혀버릴 수 있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분야에 있어서 쓰라린 경험을 가진 사람이었지요.  바로 이집트에서의 경험이었습니다.  이런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오스트리아와 스웨덴, 러시아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대해 훤히 아는 상태에서도 불안하기 짝이 없는 영국 침공에 나선다 ?  이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1815년에 나폴레옹의 항복을 받아내는 영광(?)을 누린 HMS Bellerophon 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나폴레옹 본인이 입장을 밝힌 바가 있습니다.  1817년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귀양 생활을 하던 나폴레옹과 그의 주치의인 배리 오미어러 (Barry Edward O'Meara) 박사가 그 점에 대해 나눈 대화가 편지로 남아 있습니다.  이 오미어러라는 의사는 나폴레옹이 영국에 항복할 때 탔던 전함 벨레러폰(HMS Bellerophon) 호의 군의관이었다가, 그대로 나폴레옹의 주치의가 된 사람입니다.  이 대화에서 오미어라 박사는 나폴레옹에게 정말 영국을 침공할 생각이었는가, 그것이 정말 성공하리라고 생각했는가를 물었고, 나폴레옹은 단호히 '정말 침공하려고 했었고, 성공을 자신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오미어러는 그에 대해 침공 초기에 런던 점령까지는 가능할지 몰라도, 영불 양국간의 오랜 역사적/민족적 감정 때문에라도 결국 영국 국민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하여 결국 프랑스군을 몰아냈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에 대해 나폴레옹은 자신도 그 점에 대해 생각했는데, 자신은 프랑스에 의한 영국 침공이라는 점 보다는, 국왕과 귀족에 의한 독재에서 영국 서민들을 해방시키러 온 혁명군으로서 영국 침공에 나선 것이라는 점을 부각하여, 귀족들의 토지와 자산을 빼앗아 영국 서민들에게 분배할 생각이었다고 답변했습니다.  즉, 이를 민족간의 전쟁이라기보다는 계급 해방 전쟁으로 승화시키려고 했다는 이야기지요.  글쎄요...  영국 침공 성공 여부를 떠나, 일단 나폴레옹은 진심으로 영국을 침공할 의도가 있었던 것 같기는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오미어러의 예상이 더 맞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아무리 전두환이 밉다고 해도, 일본군이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한국을 침공한다면 여러분은 한국군 편에 서시겠습니까 일본군 편에 서시겠습니까 ?)




(아니, 영국에서 반귀족 계급 투쟁을 일으키겠다고 하던 나폴레옹이 바로 그 해에 황제가 되다니, 뭔가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까 ?)



아무튼 나폴레옹은 정말 영국을 침공할 생각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는 결국 프랑스 빌뇌브 제독과 그의 함대의 무능함 덕분에 시도도 못해보고 무산되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빌뇌브와 그의 함대가 잠깐동안이나마 영불 해협을 장악하여 나폴레옹과 그의 그랑다르메(Grand Armee)가 정말 영국에 상륙했다면, 오히려 나폴레옹의 몰락이 더 빨리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요.   너무 비관적인 예측이 아니냐고 생각들하시나요 ?  하지만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 계획은 근본부터가 잘못된 것이었으므로 정말 실패할 확률이 높았습니다.  왜 그런지는 바로 전에 시도되었던 대규모 영국 침공 작전인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 사건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1588년, 영국 해군과 교전 중인 스페인 무적함대의 모습입니다.)



당시 스페인 무적함대의 임무도 빌뇌브 제독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이 불로뉴에서 막강한 영국 방면군을 거느리고 기다렸듯이, 당시 네덜란드 해안에는 당대 최고의 명장 파르마 공작(Alexander Farnese, Duke of Parma)이 스페인의 전성시대를 만들어준 강력한 테르치오(tercio) 대군을 거느리고 시도니아 공작 (Alonso Perez de Guzman, 7th Duke of Medina Sidonia)의 함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588년 당시 영국 함대는 분명히 스페인 무적함대에 대해서 기술적/전술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스페인 함대를 몹시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칼레 인근에 정박했던 스페인 함대에 대한 화공선 (fireship) 공격 외에는 결국 스페인 함대를 결정적으로 깨뜨리지는 못했고, 그냥 그 뒤를 졸졸 따라가며 괴롭힐 뿐이었지요.   아시다시피 결국 스페인 함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영국을 한바퀴 빙 돌아 스페인으로 귀국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순간적으로나마, 파르마 공작과 그의 군대를 막던 영국 해군은 스페인 함대를 상대하느라 영불 해협을 텅 비워두어야 했습니다.  이때 왜 파르마 공작은 준비해둔 평저선들을 타고 영국으로 상륙하지 않았을까요 ?




(이 분이 바로 당대 최고의 명장이라는 칭송이 자자했던 Alexander Farnese, Duke of Parma 이십니다.)



이유는 파르마 공작은 백전노장으로서,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을 평정할' 그의 무적 군대는 사실 고작 3만명이었고, 그나마 네덜란드 습지에서 장기간 주둔하느라 각종 전염병으로 인해 수가 1만6천까지 떨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아무리 상대가 육군이 허접한 영국이고, (실제로 당시 영국 지상군 조직을 맡아 캠프를 꾸렸던 레스터 백작의 기록을 보면 정말 한심한 아마추어 군대였다고 합니다) 또 시대가 16세기 말이라 인구가 적었다고 해도, 고작 이런 병력으로 영국을 점령한다는 것은 무리수였습니다.  즉, 추가적인 병력 지원과 보급, 그리고 유사시 퇴로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잠깐 바닷길이 뚫렸다고 앞뒤 안가리고 쳐들어가는 것'은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즉, 영국 함대가 스페인 무적함대에 의해 일소되어, 제해권을 스페인이 확실히 장악한 상태가 아니라면, 절대 바다로 나가서는 안되는 것이었지요.  하긴 당장 나가려고 해도, 나사우의 유스티누스(Justinus van Nassau)가 지휘하는 저 가증스러운 네덜란드 신교도의 평저선 함대가 그 앞을 가로막고 있기는 했습니다. 




(이 분이 바로 Justinus van Nassau, 영국인들에게는 나소의 저스틴으로 알려진 그 분이십니다.)




(사실 나소의 저스틴은 거장 벨라스케즈의 이 그림, 즉 '브레다의 항복'으로 더 유명하지요.  다만 이 그림에서 이분은 불행히도 항복하는 역할입니다...)



나폴레옹의 경우도 비슷했습니다.  아무리 그의 영국 방면군이 20만에 달한다고 해도, 정말 20만명이 모든 장비와 군수픔을 들고 바다를 건너려면 사실은 6시간이 아니라 며칠이 필요했습니다.  또 그렇게 건너간다고 해도, 대륙에 있는 그의 적들, 즉 오스트리아나 러시아, 프러시아 등이 그와 그의 군대가 자리를 비운 사이 텅빈 프랑스를 들이친다면 정말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겠지요.  즉, 나폴레옹이 영국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단지 '6시간만 영불해협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영국 해군 주력 함대의 격멸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망상가 나폴레옹 본인조차도 그런 요구사항은 감히 내놓지 못했지요.  즉, 애초에 영국 해군의 격멸없이, 그냥 살짝 피해 상륙하겠다는 계획은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근본부터 잘못되었건 세부 계획만 살짝 잘못되었건, 어차피 상관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절대 권력자였고, 스스로를 천재 내지 초월자로 여기고 있었으므로 다른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으니까요.  나폴레옹은 사실 바다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바다를 경험한 것은 이집트 원정 때가 전부였는데, 좁고 잔잔한 지중해는 거친 대서양과는 완전히 달랐지요.  하지만 나폴레옹과 같은 천재에게는 대서양과 지중해의 차이는 고사하고, 대양에서도 지상군을 움직이듯 전략을 짰습니다.  그가 영국 해군을 따돌리기 위해 세운 계획은, 평상시 그가 보여주었던 작전 패턴의 특성을 그대로 담고 있었습니다.  즉, 과감한 기동과 그에 의한 병력의 집중이었지요.




(영국 Channel Fleet의 모항인 Portsmouth입니다.)



나폴레옹의 기본 전략을 보기 전에, 당시 프랑스 해군의 사정을 보시기로 하시지요.  당시 프랑스 해군의 전열함은 총 40여척 정도였습니다.  다 합쳐 봐야 한때는 49척의 전열함이 모여 있었다는 영국의 해협 함대 (Channel Fleet) 하나만도 못한 전력이었지요.  더 나쁜 점은 이 전열함들이 지중해의 툴롱(Toulons)에 10여척, 대서양의 브레스트(Brest)에 20여척, 로슈포르(Rochefort)에 5~6척 등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측에 승산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영국 해군 전체에는 대략 100척을 상회하는 수의 전열함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전체의 2배 정도였지요.  하지만 영국 해군은 영불 해협 뿐만 아니라 지중해, 발트해, 더 나아가 인도와 아프리카, 서인도 제도 등 사실상 전세계에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뭐 프랑스 연안말고는 뭐 달리 지킬 바다도 없었던 프랑스 해군으로서는 일단 전열함들을 하나로 뭉치기만 한다면, 최소한 영불 해협에서는 승리자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여기서 다시 보는 프랑스 대서양 방면의 주요 군항들의 위치입니다.  저 브레스트와 르 아브르 사이의 게른제(Guernsey)섬은 영국 영토라는 거 아세요 ?  빅토르 위고도 나폴레옹 3세의 치하에서 벗어나 저 섬에서 망명 생활을 했지요.)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같은 생각은 영국도 하고 있었으니까요.  당연히 영국 해군은 이 프랑스의 군항들을 철저히 틀어막고 있었습니다.  이것들이 새어나와서 대함대를 이룰 수 없도록이요.  그런데 그 봉쇄 스타일이 또 영국 제독들마다 조금씩 달랐습니다.  상대적으로 중요한 브레스트를 봉쇄하고 있던 콘월리스 제독의 경우, 정말 물샐틈없이 틀어막는 전술을 쓰고 있는 것에 비해, 지중해의 툴롱을 봉쇄하고 있던 넬슨은 오히려 프랑스 함대가 빠져나와 자신에게 전공을 세울 기회를 줄 수 있도록 일부러 느슨한 봉쇄망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기본으로 그가 세운 계획은 이랬습니다.  먼저 상대적으로 감시가 느슨했던 툴롱의 함대가 어떻게든 넬슨의 감시망을 뚫고 대서양으로 탈출합니다.  그와 동시에 로슈포르에서도 소함대가 탈출한 뒤, 추격하는 영국 함대를 뿌리치기 위해 아주 저 멀리 대서양 건너 서인도 제도에서 이 두 함대가 합류합니다.  그리고는 그곳 영국 식민지인 자메이카 등에서 분탕질을 쳐서 영국 함대들을 그쪽으로 끌어들인 뒤, 다시 전격적으로 프랑스로 되돌아옵니다.  이렇게 2개 함대가 결합하여 강력해진 함대로, 서인도제도에 전함들을 갈라 보내느라 약해졌을 브레스트 봉쇄 함대를 밀어내고 브레스트의 프랑스 주력 함대와 합류합니다.  이렇게 전열함 50척으로 불어난 연합 함대가 그대로 영불 해협으로 밀고 올라와, 영국의 해협 함대와 결전을 벌이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구체적으로 시어니스(Sheerness)와 채텀(Chatham)에 상륙하여 4일 만에 런던을 점령하겠다는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생각으로는 일단 런던의 씨티(City), 즉 주요 은행들이 몰려있는 그 거리를 점령하기만 하면, 포기하기엔 너무 많은 돈을 가진 영국인들은 결국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런던 내의 금융 중심지인 The City의 현재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영국 망했다지만 영국 금융계는 여전히 위엄이 대단하지요.)



그럴 듯 한가요 ?  일단은 그럴싸 합니다.  특히 프랑스 연안에서 바로 코 앞인 영불 해협으로 오기 위해, 그 넓은 대서양을 2번이나 가로지른다는 계획을 보면 정말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의 거창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에는 중대한 오류가 두가지 있습니다. 

첫째, 보병 연대들과는 달리, 전열함으로 이루어진 함대들은 나폴레옹의 의지대로 움직여줄 수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적의 예상을 뛰어넘는 행군을 밥먹듯이 해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병사들이야 다리가 달려 있으니 장교들이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대면 아무리 힘들어도 버둥버둥 움직이는 존재들이었습니다.  때로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동력을 보여주기도 했지요.  하지만 전열함들은 달랐습니다.  이것들은 돛으로 움직이는 물건들인지라, 나폴레옹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대고 총살로 협박을 한다고 해도, 바람이 맞지 않으면 아예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범선들이 역풍을 타고 움직이는 기술도 있었다고는 하지만, 특히 좁은 항구에서 영국 함대의 봉쇄를 뚫고 탈출할 때는 바람은 물론이고 조수도 조건이 맞아야만 출항이 가능했습니다.  조수야 통제는 불가능하더라도 예측은 가능했지만, 바다의 날씨는 그야말로 짐작조차 불가능했지요.  그러니 약속된 시각에 일제히 봉쇄를 뚫고 출항한다는 것도 무리였고, 수천 마일 떨어진 대서양 너머 특정 지점에서 며칠까지 만나자는 약속도 지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예 ?  이거 움직이는 것이 보기와는 달리 어렵다고요 ?)



둘째, 나폴레옹의 계획에 따르면, 약간의 수적 우위가 생긴다면 프랑스 함대도 영국 해군과 충분히 해볼만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해군이라는 것은 군함, 대포와 수병들의 수자 뿐만 아니라, 그 승무원들의 기술 숙련도가 매우 중요한 병종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함대는 영국 해군에게 철저히 봉쇄당하여, 일부 프리깃 등이 가끔씩 항구를 슬쩍 빠져나가 활동한 것 외에는 거의 항구 내에서 썩고 있었습니다.  영국 해군 내에서는 일반 수병들도 landsman(미숙련)이니 ordinary seaman(보통)이니 able seaman(숙련)이니 해서 숙련도에 따른 분류를 했고, 어떤 군함의 전투력을 평가할 때 그 배의 함포 수 못지 않게 그 배의 선원들 중 몇% 정도가 able seaman인지도 따졌습니다.  그런데 하는 일이라고는 항구에 앉아있는 것 밖에 없는 프랑스 함대의 선원들은 대부분이 그런 항해 숙련도가 높아질리가 만무했습니다.  정확한 기록을 찾지는 못했습니다만, 항해에 나서지도 않을 배에 선원들을 모아놓고 먹이고 입히고 급료를 지급했을 것 같지도 않으니, 프랑스 함대의 대부분에는 사실 최소한의 유지보수 활동을 위한 선원들만 배치되어 있었을 것이고, 평상시에는 아예 선원들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니 프랑스 항구를 봉쇄하느라 끊임없이 바다 경험이 쌓이고 있는 영국 해군에 비해, 프랑스 해군의 실력은 날이 갈 수록 점점 퇴보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영어로 읽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Hornblower와 Jack Aubrey를 다 읽었어도 수없이 나오는 tacking이라는 것을 아직도 제대로 이해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 해군 수병 중에도 그런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잘 인식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당시 범선이라는 물건은 자동차처럼 핸들을 좌로 꺾으면 좌로 가고, 우로 꺾으면  우로 가는 그런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범선의 진행 방향을 바꾸는 것만 하더라도, 바람의 세기와 방향, 배의 현재 속도 등을 고려하여 딱 맞는 순간에 많은 선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타륜을 돌리고 돛줄을 풀거나 당겨야 했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배가 순간적인 관성과 바람에 의한 추진력을 잃기 때문에, 돛이 잠시나마 너덜거리며 축 늘어지게 되면서 배의 키는 방향을 돌리지 못하고 배 전체가 기우뚱거리게 되었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영국 해군만 하더라도, 이 동작을 항상 실수없이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함대가 일렬종대로 모여 일사불란하게 순서대로 방향을 바꾸는 동작을 할 때면, 능숙한 영국 함장들도 혹시라도 실수하여 자기의 전열함이 함대 제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볼품없이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이게 될까봐 가슴을 졸이기 일쑤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 전열함들이 하나의 함대로서 빈틈없는 동작을 수행하는 것은 함대 전투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기술이었습니다.  그 능숙하다는 영국 해군도 이 모양이었는데, 실제로 바다에 나가서 돛줄을 당겨본 선원이 몇명 되지도 않는 프랑스 해군은 어떤 지경이었겠습니까 ?  한마디로 프랑스 함대의 전열함 수가 2배가 된다고 하더라도, 과연 영국 함대와 동등한 입장에서 싸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습니다.




(이렇게 난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함대 기동을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걸 잘못하면 바로 raking fire를 뒤집어 쓰고 항복하는 수 밖에요...)



하지만 나폴레옹의 기본 전략에 힘을 보태주는 사건이 1804년 벌어졌습니다.  1804년, 페루 식민지에서 많은 보물을 싣고 스페인으로 향하던 스페인 프리깃함들을 영국 해군이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
1804년, 스페인 보물선 함대를 둘러싼 모험 http://blog.daum.net/nasica/5311309 참조)  스페인은 원래 프랑스 편이었으니 당연한 것 아니냐고요 ?  실은 아니었습니다.  스페인도 부르봉 왕가가 지배하는 나라였으므로, 처음에는 프랑스 혁명군과 전쟁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능력한 스페인군의 졸전으로 인해, 일찌감치 프랑스와 평화 협상을 한 결과, 1796년 제2차 산 일데폰소 조약(the Second Treaty of San Ildefonso)에 의해 비로소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었습니다.  이때, 비록 내키지는 않았으나, 스페인은 평화 조약의 조건에 따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해야 했지요.  이 조약 때문에, 스페인은 굴욕스럽게도 영국 해군에 의해 항구가 봉쇄되고 남미 식민지와 연락이 끊기는 피해를 입습니다.  그러다 1802년 아미앵 평화 조약 (Treaty of Amiens)이 맺어집니다.  이 조약은 주로 영국과 프랑스의 조약이었으나, 사실 네덜란드와 스페인도 그 조약국의 일원이었지요.  스페인으로서는 정말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드디어 영국 해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남미 식민지와의 통상(...이라 쓰고 수탈이라고 읽습니다)을 재개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1년 만에 다시 프랑스와 영국은 전쟁 상태로 되돌아갔습니다만,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려들고 싶지 않았던 스페인은 애써 그 상황을 모르는 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어차피 결국 스페인은 프랑스 편이라고 판단한 영국 해군이 스페인 선박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결국 스페인은 다시 프랑스 편에 서서 영국과, 정확하게는 영국 해군과 싸워야 하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당시 스페인 해군에는 약 20여척의 전열함이 페롤(Ferrol), 카디즈(Cadiz), 카르타헤나(Cartagena)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 배들도 나폴레옹의 상상 속 연합 함대에 가담하게 된 것입니다.  즉, 나폴레옹의 계획에 따르면 총 70척의 전열함들이 한꺼번에 영불 해협으로 밀고 올라가게 되어 있었고, 아무리 프랑스 해군이 미숙하다고 해도 전열함 70척의 함대를 막아내는 것은 영국 해협 함대로서도 쉬운 일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이 분은 Manuel de Godoy y Álvarez de Faria de los Ríos Sánchez Zarzosa 보통은 고도이 공작이라고 부르는 양반인데, 이 양반이 스페인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요.)



바다에 대해 문외한인 나폴레옹은 이렇게 '프랑스 해군도 승리할 수 있다'며 의욕에 불타올랐습니다만, 정작 프랑스 해군 수뇌부는 나폴레옹의 계획에 무척 심드렁했습니다.  이 계획을 실행할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의 총사령관은 빌뇌브(Pierre-Charles Villeneuve) 제독이었는데, 이 양반은 1798년 아부키르 해전에 참전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넬슨의 불꽃놀이 - 아부키르 해전 (하편) http://blog.daum.net/nasica/6862485 참조)  다행인지 불행인지 빌뇌브 제독은 프랑스 함대 후미에 위치했었기 때문에 이 화끈한 해전에서 별다른 활약없이 영국 해군의 위엄만 실컷 구경한 뒤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알고보면 이 아부키르 해전이 빌뇌브 제독의 대해전 경험 중 거의 유일한 것일 정도로, 이 양반은 해전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유일한 대해전의 경험이 빌뇌브에게는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었는지, 이 양반은 영국 해군에 맞서 대포를 쏘는 것에 그다지 열의가 없었습니다.  왜 이런 양반을 최고 사령관으로 뽑았냐고요 ?  더 나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래도 전임자였던 트레빌 (Louis-René Levassor de Latouche Tréville)은 그래도 좀더 경험도 많고 더 적극적이었으나, 1804년에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빌뇌브 제독처럼 미적지근한 태도의 지휘관 때문에 프랑스 해군에 망조가 든 것일까요 ?




(생 도밍그 원정에서도 활약했던 트레빌 제독입니다.  불로뉴에서 영국 해군을 감시하러 산에 오르다 심장마비로 죽었다 합니다.)



글쎄요, 그렇게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 약간 타임 워프를 하여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 해군의 기본 전략에 대해 보시도록 하지요.  당시 독일 해군도 만만치는 않은 전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바다의 지배자는 영국 해군이었습니다.  유틀란트 해전을 제외하면, 독일 함대는 감히 북해로 나아가 영국 함대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는 못했지요.  독일 해군이 겁장이였냐고요 ?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독일 해군은 이 전략을 'fleet in being', 그러니까 '존재 그 자체로 영국 해군을 견제하는 함대'라고 불렀습니다.  따지고 보면 매우 훌륭한 전략이었습니다.  영국 함대는 독일 함대를 봉쇄하느라 끊임없이 바다를 오가며 순찰 항해를 계속하면서 많은 유지비를 써야 했는데, 독일 해군은 편안하게 항구에서 노닥거리면서 소중한 전쟁 물자를 절약할 수 있었으니까요. 




(남자라면 음음... 자기가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에 맞춘 최선의 방책을 마련할 줄도 알아야지요...)



당시 영국과 프랑스 함대의 상황이 딱 그 모양이었습니다.  자신이 영국 해군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프랑스 해군은 그저 항구에 아늑하게 들어앉아, 전열함 숫자만 자랑하고 있으면 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영국 해군은 여러 프랑스-스페인 항구에 앞에 항상 진을 치고 항해하면서 초계 활동을 벌여야 했습니다.  이는 영국 해군에게 끊임없는 훈련이 되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돈과 물자, 그리고 병력을 잡아먹는 개미지옥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범선들은 연료비도 들지 않았을 것이고, 또 수병들은 바다에 있든 육지에 있든 어차피 먹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  당시 범선들도 바다에 떠있자면 요즘 군함 못지 않게 유지비가 많이 들었습니다.  거친 날씨 속에서 항해를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밧줄과 가로활대, 돛 등의 삭구들이 지속적으로 훼손되었고, 나무로 된 선체도 보수를 필요로 했습니다.  이런 소모품들도 꽤 비싼 것이었지요.  게다가 군함이 항구에 들어가게 되면 수병들의 식량도 절약되었습니다.  왜냐고요 ?  수병들을 전역(pay-off)시켜버렸으니까요.  식량은 물론이고 급료도 절약되었지요.  그리고 당시 군함에서는 78%의 사망자가 질병으로, 또 15%의 사망자가 사고로 인한 것이었을 정도로 바다 생활이란 위험한 것이어서 (서바이벌 시리즈 - 나폴레옹 전쟁에서 살아남기 http://blog.daum.net/nasica/6862382 참조) 항해 기간이 길면 길 수록 프랑스군과 싸우기도 전에 바다가 영국 해군을 갉아먹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해군에서 이렇게 죽을 확율은 상당히 낮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차피 프랑스놈들은 기어나오지 않을테니까' 라며 영국 해군도 항구로 돌아가거나, 봉쇄 함대의 전력을 줄일 수도 없었습니다.  봉쇄 작전이라는 것의 특징이, 적 함대보다는 약간 우월한 전력으로, 그것도 24시간 365일 단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프랑스 해군은 평상시 선원들도 배치하지 않고 있고, 또 장교나 선원들의 실력이 너무나 뒤떨어져 사실 별 위협이 되지 못한다고 해도, 영국군 수뇌부 그 누구도 전열함 수십척으로 표현되는 프랑스 해군의 위협을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fleet in being의 위력이었지요.  아무 힘도 들어지 않고도 영국의 전력을 소모시킬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나폴레옹처럼 '닥치고 공격'을 신봉하는 전략가에게 있어(공격이냐 수비냐 - 나폴레옹과 웰링턴 http://blog.daum.net/nasica/6862415 참조), 아무리 효율적이라고 해도 그런 소극적인 전략은 쓰레기에 불과했습니다.  더군다나 영국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영국 해군과는 자웅을 겨룰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나름 효율적으로 영국 해군을 괴롭히던 프랑스 해군은 비전문가가 세운 작전에 따라 영국 해군을 상대하기 위해 무거운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프랑스 함대가 어떻게 패망의 길을 걸었는지는 다음 편에서 보도록 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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