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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고향을 잃은 병사들 - King's German Legion

by nasica-old 2012.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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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전에 인용했던 글입니다만, 다시 한번 보시지요.

Sharpe's Gold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0년 스페인) ------------------------

로소프 대위에게는 딱 2분이 주어졌고, 그 시간을 잘 썼다.  그가 이끄는 KGL(King's German Legion) 경기병 중대 앞에는 프랑스군의 창기병이 있었고, 저 멀리 계곡 왼쪽 편에서는 프랑스 보병 대대가 싸움에 가세하기 위해 무질서하게 몰려오고 있었다.  물론 로소프는 그 보병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기의 나팔수에게 명령을 내렸고, 그 전진 나팔 소리를 들었고, 그 소리의 음표 하나하나를 즐겼다.  그리고는 군도를 높이 쳐들고 자신의 애마 쏘르(Thor)가 내닫도록 했다.  쏘르라는 이름은, 적병의 얼굴을 물어 뜯고 말발굽으로 짓밟아버릴 수 있는 이런 말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빌어먹을 토끼굴 하나 없는 평평한 계곡 바닥이었으므로, 지형은 아주 좋았다.  로소프 대위는 이런 기회를 주십사하고 늘상 기도하고 있던 터였다.  창기병들은 적의 공격을 어떻게 젖혀내는지도 모르는, 그저 긴 막대기를 든 멍청이들에 불과했다.  창기병과 상대할 때면 그저 그 창끝만 피해서 그 안쪽 공간으로 파고 들기만 하면 상대방의 목숨은 이미 자기 수중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소프 대위는 뒤에서 함께 달리고 있는 부하들의 말발굽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 멋진 광경을 보려고 일부러 안장 위에서 몸을 비틀어 뒤를 보았다. 말들이 어깨를 나란히 한채, 튀어오르는 잔디 덩어리를 말발굽 뒤로 하고, 뽑아든 칼날과 병사들의 이빨이 빛나고... 이런 기회를 갖을 수 있게 해주다니, 지금 영국 왕좌에 앉아있는 저 독일인 왕이 너무나도 고맙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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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의 보병과 기병 사이에서 난도질을 당할 위기에 처한 샤프 대위와 그의 라이플 중대원들을 구해내는 저 로소프 대위와, 그가 이끌고 있는 기병대원들은 모두 독일인입니다.  왜 독일인들이 먼 스페인 땅에서 영국편을 들면서 프랑스군과 싸우고 있는 것일까요 ?  특히 저 소설의 배경인 1810년은 제5차 대불 동맹 전쟁이 바그람 (Wagram) 전투에서 프랑스의 승리로 마무리된 후,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모든 독일 국가들이 나폴레옹의 위엄 아래 숨을 죽이고 있던 때입니다.  감히 어떤 독일 촌놈들이 프랑스에게 칼을 휘두르고 있었던 것일까요 ?

로소프 본인은 물론이고 그의 부하들 대부분은 원래 하노버(Hanover) 출신입니다.   하노버는 엘베 강변인 작센(Sachsen, 영어로는 Saxony) 지방의 일부이지요.  이들이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에 휘말려든 것은 1714년 영국의 앤 여왕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원래 영국은 프로테스탄트 계통인 국교회(Anglican Church)를 신봉하는 나라였지요.  그런데 영국인이라고 다 개신교였던 것은 아니라서, 일부 귀족이나 왕족들 중에는 카톨릭 교도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앤 여왕의 가문인 스튜어트 왕조 내에서는 카톨릭 전통이 꽤 강했나 봅니다.  앤 여왕의 아버지인 제임스 7세만 하더라도 카톨릭 신자였고, 그것이 원인의 일부가 되어 결국 명예 혁명으로 쫓겨나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었습니다.  아무튼 앤 여왕 서거 당시, 그 왕위 계승권 범위 안에 들어있는 가까운 왕족들은 모조리 카톨릭 신자였습니다.




  (이 앤은 '천일의 앤'에 나오는 그 앤이 아닙니다.)



카톨릭 왕에게는 넌절머리가 났던 영국 의회에서는 스튜어트 가문의 피가 섞인 인물 중에서 프로테스탄트 신자 하나가 없겠느냐고 검색을 시작했는데, 의외로 정말 철저하게 없었습니다.  점점 더 족보 검색 범위를 넓힌 결과, 결국 찾아낸 것이 상당히 먼 친척, 그러니까 제임스 6세의 딸인 엘리자벳을 할머니로 둔, 신성 로마 제국 내 독일 하노버 지방의 선제후인 게오르그 1세(Georg I)였습니다.  이 양반이 그 이름 그대로 조지 1세(George I)가 되지요.  즉, 하노버의 선거후, 그러니까 브룬스윅-뤼넨부르크(Brunswick-Luneburg) 공작인 게오르그 1세가 영국 국왕을 겸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영국의 하노버 왕가는 나폴레옹 시대까지 영국 왕위를 쥐고 있었고, 당시 왕은 정신병자로 유명했던 조지 3세(George III)였습니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볼 때는 이렇게 남의 나라 귀족이 갑자기 우리나라 왕으로 온다는 것은 정말 희한한 일이 되겠습니다만, 국가의 왕위라는 것이 민족이나 뭐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유럽에서 힘깨나 쓴다는 가문들 간의 비즈니스였던 시대에는 크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특히나 영국의 실제 권력은 사실 왕이 아닌 의회가 쥐고 있었으니 영어도 할 줄 모르는 독일 귀족이 영국 왕이 되었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전혀 없었지요.  문제가 생긴 것은 1803년이 되어서였습니다.




(젠장, 저는 매주 로또를 사도 당첨이 안되는데, 이 양반은 난데없이 독일 촌구석 군주에서 대영제국의 국왕 조지 1세가 됩니다.) 



영국이 아미앵 조약에 의한 평화를 깨고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하자, 나폴레옹이 영국 침공 준비를 하던 것을 지난 편에서 보셨지요.  하지만 바다가 가로막혀 영국 땅에 발을 올리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발로 걸어갈 수 있는 유럽 대륙에도 영국 영토가 있었습니다.  바로 하노버지요 !  당시 아미앵 조약이 깨질 때 프랑스측의 불만은 왜 영국이 약속대로 지중해의 말타 섬에서 철수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꿩대신 닭이라고, 말타 대신 영국왕의 개인 영토인 하노버 공작령을 들이치기로 하고 모르티에 (Édouard Adolphe Casimir Joseph Mortier) 장군에게 1만3천의 병력으로 하노버를 침공하게 합니다.




(모르티에 장군은 나중에 원수직에 오르고, 나폴레옹 실각 후에도 귀족 지위를 유지합니다만, 루이 필립 때 테러로 암살됩니다.)



당시 하노버는 영국과는 무관하게, 하노버인들로 구성된 독자적인 공작령 정부가 따로 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하노버는 영국과는 무관한, 그냥 조지 3세의 개인 영토였으니까요.  아무튼 이 하노버 공작령에는 자체 군대도 있었고, 약 1만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장난감 같은 군대로 무적의 나폴레옹군과 싸워봐야 무의미한 희생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 하노버 공작령은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항복을 선언합니다.  이것이 술링겐 조약 (Convention of Suhlingen)입니다.  원래 이 조약에 따르면 하노버 공작령에는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그 유지비는 하노버가 지불하며, 하노버 군대는 전쟁 포로로써 프랑스로 끌려가는 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1달 뒤인 7월, 다시 조약이 개정되어 엘베 조약 (Convention of the Elbe 또는 Convention of Artlenburg)이 조인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하노버 공작령은 아예 해체되었고, 나중에 나폴레옹의 동생인 제롬 (Jérôme Bonaparte)을 왕으로 하는 베스트팔렌 왕국((Westphalen, 1807년 성립)의 일부로 편입되어 버렸습니다.   술링겐 조약보다 훨씬 가혹한 조치였지만, 대신 좋아진 점도 있었습니다.  즉, 그 군대는 무기와 장비, 대포 등만을 압수하고 그 신병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독립 국가가 아니었고 프랑스 위성국의 일부였으므로, 그 국민들을 프랑스에 전쟁 포로로 잡아둔다는 것이 무의미했던 것이지요.   당시 이 조약에 서명했던 것은, 영국왕 조지 3세의 아버지 조지 2세가 오랜만에 고향에 들렀다 낳은 사생아였던 발모덴 장군 (Johann Ludwig, Reichsgraf von Wallmoden-Gimborn)이었습니다.  즉 조지 3세의 이복 형제가 조지 3세의 독일 영토를 홀라당 날려 먹은 것이지요.  하지만 발모덴 장군에게 달리 무슨 수가 있었겠습니까 ?



(이 발모덴 장군은 1811년 병으로 사망합니다.)



영국 정부는 이 조약을 당연히 무효라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조지 3세가 이 영토를 되찾은 것은 1813년, 나폴레옹이 제6차 대불 전쟁에서 내리막길을 걸은 다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장 문제가 있었습니다.  무기를 빼앗긴 1만명의 하노버 군대가 바로 그것이었지요.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경우, 이들 중 상당수가 결국 나폴레옹의 병력으로 재활용될 가능성이 컸습니다.  해서, 영국 정부는 이들을 영국으로 실어오기로 합니다.  생각해보면 영국은 당장 나폴레옹의 침공에 대비하여 병력을 늘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마당이었으니 ( 죽음의 상인, 나폴레옹을 스쳐가다
http://blog.daum.net/nasica/6862515 참조), 제대로 훈련된 튼튼한 독일 병정에 그 장교단까지 풀 세트로 딸린 완편 부대가 굴러들어오다니, 이런 횡재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당시 영국왕이었던 조지 3세입니다.  이 하노버 왕가에는 유전병이 있었는지, 그 아들도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었지요.)



하지만 아무리 바다의 지배자 영국이라고 하더라도, 나폴레옹의 눈치를 보고 있는 독일 지방에 당당하게 전함을 끌고 들어가 1만명이나 되는 병력을 실어올 수는 없었습니다.  독일의 항구들이 그 입항을 허가하지 않았을테니까요.  게다가, 이들은 이미 사실상 해체된 군대였으므로, 이들이 보급이나 급료를 제대로 못받고 장기간 방치될 경우 결국 하나둘씩 탈영(?) 아닌 탈영을 하게 되어 녹아 없어질 것이 뻔했습니다.  비록 그 장교들은 신사 가문 출신이고 그 장교직을 돈주고 산 것인지라 (발라클라바 전투의 비극 http://blog.daum.net/nasica/6862454 참조) 본전 생각에라도 영국 왕에게 계속 충성하겠지만, 일반 사병들은 투자한 본전이 없는지라 그렇게 '한번도 본 적 없는, 독일어도 못하는 외국 왕'에게 무작정 충성할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해서 영국 정부는 이들을 일단 니더작센 (Lower Saxony, Niedersachsen) 지방의 함부르크 (Hamburg)로 옮긴 뒤, 과거 한자 동맹의 전통에 빛나는 상업 항구 함부르크의 유력 상인 가문들에게 돈을 아끼지 않고 뿌려 선박들을 긁어모아 이들을 영국으로 실어날랐습니다.  당시 영국이 급히 뿌린 돈이 얼마나 많았는지, 함부르크의 몇몇 가문들이 이 운송 계약으로 떼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13~17세기 북해와 발트해를 주름잡은 한자 동맹 무시하지 마십시요.)



이렇게 낯설고 말도 안통하는 영국으로 이송된 하노버 군은 약 5천명이었습니다.  이미 절반 정도가 그냥 집에 가는 것을 택한 거지요.  과연 탈영하여 집으로 돌아간 친구들이 비겁자였을까요 ?  글쎄요.  이들은 사실 영국과 프랑스의 싸움에 자신들이 피를 흘리며 싸워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약간 더 생각해보면, 분명히 자신의 고향이 프랑스군에 점령당한 상태였으니 분명히 프랑스군은 하노버의 적이고, 적과 싸우는 것이 군인의 의무라는 것을 생각하면 분명히 탈영병이 맞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또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애초에 프랑스군은 하노버를 공격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노버의 주인인 영국왕 조지 3세만 없었다면 말이지요.  그러니 결국 하노버 주민들과 그 아들들인 하노버 병사들은 나폴레옹과 쓸데없이 피를 흘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영국으로 건너간 5천명은 대체 왜 가족과 고향을 버리고 영국행 배를 탔던 것일까요 ?  아마도 생계 문제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프랑스군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군대는 모병제였습니다.  프랑스를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에서는 국민 개병제에 의한 징집은 아직 실행되고 있지 않았고, 프랑스의 적국 중에서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병력을 동원했던 오스트리아에서조차, 일종의 상징적인 징집제인 국방군 (Citizen Army, Landwehr) 제도가 도입된 것은 1808년 6월달 들어서였습니다.   이 제도도 본격적인 징집제는 아니었던 것이, 오스트리아는 그저 만 18세에서 45세 사이의 남자는 모두 '국방의 의무'를 진다고 선언을 했을 뿐, 실제로 소집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귀족 정부는 전국민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는 프랑스식의 국민 개병제는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점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결국 평민층을 무장시키는 결과를 낳아 시민 혁명으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당시 하노버 군을 이루던 병사 대부분은 급료를 받아 먹고 살기 위해 입대한 직업 군인으로서, 군대를 관두면 당장 먹고 살 길이 다소 막막했던 서민들이었지요.  갑자기 직장인 군대가 없어져 당장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워진 마당에, 영국 정부가 급료를 주겠다고 하니 따라나서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지요. 




(와, 저게 엘베 강인가봐요 ?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꼭 가보고 싶네요.  하노버에 있는 하노버 대학 전경이랍니다.)




(어우, 그러나 이 사진을 보니 하노버 여행은 그냥 다른 곳부터 가보고 시간과 돈이 남으면 그냥 한번... 가보고 싶어지네요.)



아무튼 이렇게 영국으로 들어온 5천명의 하노버인들을 주축으로, 1803년 8월 10일 독일인 연대 (King's German Regiment, KGL)가 창설됩니다.  이들은 대부분 하노버 시절 그대로의 독일인 장교들과 독일인 병사들이었으나, 고위 지휘관들은 영국 장교들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실제로는 이 KGL에 들어온 병사들이 다 하노버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이 KGL 병사들이 독일인 특유의 군기잡힌 모습으로 영국인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영국 정부는 돈을 뿌려 현지 독일인들을 매수하여 비밀 모병관으로 활용했고, 이들을 통해 독일 이곳저곳의 가난한 청년들이 영국으로 속속 흘러들어 왔던 것입니다.  덕분에 이 독일인 연대는 3년도 안되어 원래의 3배에 가까운 1만4천명까지 불어났습니다.  이렇게 독일 병사들의 수자는 급증했으나, 하노버 출신 장교들은 그렇게 밀항선을 통해 수입해올 수도 없었고, 또 당시 영국에도 보직이 없어 놀고 먹는 장교들이 많았으므로, 결국 KGL 내에도 영국인 장교들이 꽤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의 지휘나 명령은 처음에는 모두 독일어로 이루어지다가, 1808년 경에는 지휘 명령이 영어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편성된 KGL은 영국 Bexhill이라는 곳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그곳 주민들은 이 영어도 할 줄 모르는 독일 병정들을 코삭(Cossack)이나 뭐 그런 야만족처럼 대했으나, 좀 지내보니 교회 미사 때 경건하게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이나 길거리에서의 행동거지가 썩 괜찮아서, 점차 친숙하게 지냈고, 현지 처녀들과 이 하노버 총각들과 결혼도 꽤 많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원래 KGL은 경보병 대대로 만들려고 하다가, 그 인적 자원이 우수한 것을 보고 기병, 보병, 경보병, 포병 등 전 병종을 다 포함하는 부대로 발전했습니다.)



KGL이 영국군 내에서 명성을 쌓은 것은 주로 스페인 전쟁 때 웰링턴 공작 밑에서 싸우면서부터였습니다.   KGL은 웰링턴 휘하 병력의 약 20%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그 수가 많았는데 (혹은 영국 정규군의 수자가 적었는데), 코루나(Corunna), 탈라베라(Talavera), 부사코(Bussaco), 푸엔테스 드 오노로(Fuentes de onoro), 시우다드 로드리고(Ciudad Rodrigo) 및 바다호스(Badajoz) 포위전, 살라망카(Salamanca) 전투 등에서 KGL은 영국군보다 더 뛰어난 활약을 펼쳐 찬사를 받았습니다.  특히 1812년 7월 23일의 가르시아 헤르난데스(Garcia Hernandez) 전투는 이들의 명성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습니다.  당시 기병대에 대해서 거의 무적이라고 알려졌던 보병 방진을 KGL 기병대가 2개나, 그것도 불과 몇 분 사이에 깨뜨렸던 것입니다.  그것도 무려 4천명의 프랑스 보병으로 이루어진 방진들을, 불과 2개 중대, 총 770명의 기병만으로 다른 보병이나 포병의 지원도 없이 해치운 것이니 정말 대단한 전공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1812년, 기병대 영광의 순간 http://blog.daum.net/nasica/5880589 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보병 방진이 3개인데 왜 2개만 깨뜨렸냐고요 ?  나머지 1개는 싸우지 않고 항복했거든요.)



하지만 KGL의 이름이 가장 많이 들먹여지는 것은 역시 1815년 워털루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KGL은 약 7천의 병력으로 참전했습니다.  특히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던 라 아예 생트(La Haye Sainte) 농장에는 약 400명의 KGL 병사들이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탄약이 다 떨어질 때까지 이 농장을 거센 프랑스군의 집중 공격으로부터 6시간이나 지켜내어, 워털루 전투의 흐름을 바꿔놓는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이들 400명 중 전사나 부상을 면한 병력은 고작 10%인 42명 뿐일 정도로, 전멸에 가까운 큰 타격을 입었지요.  특히 이들을 구원하러 역시 같은 KGL 보병부대가 파견되었으나, 이들은 기다리고 있던 프랑스 기병들에게 정말 철저히 도륙을 당해 역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라 아예 생뜨 농가입니다.)



전쟁이 완전히 끝나고 하노버가 다시 영국왕 조지 3세에게 반환된 후, 비로소 KGL은 고향인 하노버에 돌아와 1816년 해체됩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병정 노릇이 좋았는지, 새로 편성된 하노버 정규군에 새로 입대했다고 합니다.




(1815년, 고향 땅인 하노버에 돌아온 KGL)



이들의 명성이 드높았던 이유 중 하나는, KGL처럼 영국군 내에 다른 국적 병사들로 이루어진 부대들의 군기는 KGL과는 대조적으로 너무나 형편없었다는 점이었을 것입니다.  가령 영국군이 1798년 코르시카를 점령할 때 영국군에게 협조했던 코르시카 망명자들로 구성된 Royal Corsican Rangers는 주로 지중해에서 한가로운 수비대 생활을 하며 느슨하게 지내다가 전쟁이 끝난지 한참 뒤인 1817년에서야 '아참 그런 애들이 있었지' 라는 식으로 해체되었습니다.  특히 악명 높았던 부대는 다름아닌 프랑스인 부대였습니다.  1801년 왕당파 프랑스인들로 만들어진 Chasseurs Britanniques는 역시 지중해에서 한가롭게 지내다가, 1811년 이후 스페인 전쟁에 투입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같은 프랑스인들과 싸우는 것이 좀 불편했는지, 이 부대는 탈영으로 급속히 그 수가 줄어들었습니다.  탈영이 얼마나 심했는지 이 부대는 보초 업무에서도 완전히 배제될 지경이었습니다.   외곽에 보초를 세워놓으면 100% 탈영한다는 것이었지요.   아무래도 같은 동족끼리 싸우라고 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을 영국군 수뇌부에서도 했는지, 프랑스 전쟁 포로 중에서 자원자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부대인 Independent Companies of Foreigners는 유럽이 아닌, 1812년 영-미 전쟁에 투입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군기 문란으로 말썽만 일으키다가 그냥 해체되어버렸다고 합니다.




(영국 쪽으로 간 하노버인들은 이렇게 평판이 좋은데, 왜 우리 쪽에 붙은 하노버인들은 저 모양인가 ?)



동족 상잔하니 KGL에 대해서도 한마디 덧붙이면서 마무리해야겠습니다.  1803년 영국으로 향한 5천명 외에, 집으로 향한 나머지 5천명은 어찌 되었을까요 ?  당연히 개개인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만, 그 운명을 짐작하게 해주는 기록은 있습니다.   당시 하노버를 점령한 뒤 그대로 하노버 주지사가 된 프랑스의 모르티에 (Mortier) 장군이 그해 12월 하노버 군단 (Légion Hanovrienne)이라는 부대를 새로 창설했던 것입니다.  2개의 보병 대대로 이루어진 1개 보병 연대에, 4개 중대로 이루어진 1개 기병 연대가 포함된 것으로 보아, 그 수는 역시 2천명 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틀림없이 1803년 영국행을 택하지 않고 집으로 갔던 그 병사들을 뽑아 썼겠지요.  이들은 영국행을 택한 동료들과는 달리, 높은 탈영률을 보였다고 합니다.  특히 프랑스군은 보급이 나쁘기로 유명했으니 더욱 그랬을 것 같습니다. 




(1808년, 스페인에서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맞붙은 코루나 전투입니다.)



가장 큰 비극은 이들이 1807년 쥐노의 포르투갈 방면군에 배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KGL이 이베리아 반도에 파견된 것은 1808년 무어 장군(John Moore)을 따라 파견되었을 때부터였으니까, 까딱 잘못하다가는 같은 고향 출신의 하노버 병사들끼리 아무 상관도 없는 머나먼 스페인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이 벌어질 수도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프랑스군 소속의 하노버군은 그다지 잘 싸우거나 군기가 잘 잡힌 부대가 아니었는지, 이후 여러 프랑스 장군의 사단으로 이리저리 전속을 다니다가 1811년 마침내 해체되어 다른 독일권 연대에 분산 배치되어버립니다.  약소국 국민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고생을 해야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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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1.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은 추천이나 한번 꾹... 굽신굽신


PS2. 이제 트라팔가 해전을 써야 할 차례인데... 너무 대규모라서 엄두가 안나 KGL 스토리로 대체했습니다.  전에 이사무님이 쓰신 '전투자와 항해자의 해군사' 읽었는데, 그걸 베껴서 옮길까... 그냥 트라팔가는 패스할까... 고민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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