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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Nelson touch - 왜 영국 함대는 2줄인가 ?

by nasica-old 2012.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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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편에서는 10월 21일 아침 6시 경, 빌뇌브 제독이 나폴레옹에게 등을 떠밀려 지브로올터 해협을 돌파하여 나폴리로 가려다가, 트라팔가 곶 앞바다에서 넬슨의 함대와 딱 마주치는 장면까지를 보셨습니다.  아직까지도 빌뇌브 제독에게는 넬슨의 손아귀를 벗어날 희망이 남아 있었습니다.  지브로올터까지는 빌뇌브의 연합 함대가 더 가까운 위치였고, 넬슨은 그 뒤를 쫓는 형국이었습니다.  과연 넬슨을 여러차례 물먹였던 빌뇌브의 미꾸라지 행로는 여기서도 빌뇌브를 구해주었을까요 ?




(이것이 바로 hull down...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지요.)



당시 빌뇌브의 항진 방향은 남쪽, 넬슨은 동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두 함대 사이의 거리는 약 16km였지요.  보통 저 먼 수평선에서 함체는 보이지 않고 (hull-down, 즉 배의 몸체는 아직 수평선 아래에 있다는 뜻 입니다) 적함의 돛만 보이는 위치가 대략 25km 정도의 거리입니다.  이 정도의 거리에서도 대개는 맹렬한 추격전이 시작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따라 잡히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추격자를 따돌리고 회피에 성공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밤의 어둠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명확히 모르고 접근했다가 날이 밝은 뒤 16km 거리에서 서로를 발견한 상태라면, 이미 전투는 피할 수 없는 상태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 경우에 전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도주자의 경우, 당장 불필요한 식수를 뱃전 너머로 쏟아버리고 (이를 두고 water를 start한다 라고 표현합니다) 배를 가볍게 해서 좀더 빨리 달아나려는 노력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사정이 급박할 경우, 가장 무거운 화물인 대포와 대포알을 바다에 던져 버리고 빈 함체만으로 도주하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배나 항공기에서 긴급 상황에 부딪혀 화물이나 연료를 버리는 것을 jettison이라고도 하지요.  19세기 초반 노예 무역이 금지되자, 노예선이 영국 해군 함정에 쫓기는 경우가 생겼는데, 만약 영국 해군에 잡히게 될 것 같으면 아예 인간 '화물'을 이렇게 내버리기도 했습니다.  이는 짐을 가볍게 하는 효과보다는, 나포 당시 싣고 있던 노예의 머리 수에 따라 벌금을 물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빌뇌브는 전열함 33척의 더 우세한 전력을 가진 연합 함대의 지휘관이었습니다.  빌뇌브가 아무리 넬슨과의 교전을 피하고 싶다고 해서, 33척의 함대가 27척의 함대 앞에서 물과 대포를 던져버리고 도주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지중해는 좁은 바다였습니다.  대포까지 던져 버리고 도주하여, 혹시 나폴리에 입항한다고 해도, 그 다음은 어떻게 합니까 ?  대포도 상실한 연합 함대는 이제 아무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고, 아마 영국 전함 불과 5~6척에 의해서도 손쉽게 봉쇄되어 전쟁 기간 내내 아무런 역할, 심지어 'fleet in being'의 역할도 못하고 나폴리에 영영 갇힌 채 썩어버릴 것이 뻔했습니다.

빌뇌브는 넬슨과 한번 맞붙기로 결심합니다.  다만, 좁은 지브로올터 해협, 그것도 영국의 막강 요새인 지브랄타 (Gibraltar)의 코 앞에서 해전을 치를 생각은 없었습니다.  특히, 자신의 함대의 접근은 지브랄타에서도 훤히 보일 것이므로, 자신의 지브로올터 해협 돌파를 강행한다면 지브랄타에서도 영국 전함들이 추가로 기어나와 자신의 앞을 막아설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빌뇌브는 8시 경, 항로를 180도로 돌려 다시 북쪽을 향하도록 깃발 신호를 내겁니다.  다만, 보통 하듯이 선두함부터 차례로 180도로 함수를 돌려 질서정연하게 선회하지 않고, 그냥 함대의 각 전함들이 일제히 각자 180도 선회하도록 합니다.  즉, 기존의 선두함이 선미함이 되고, 기존의 선미함이 선두함이 되도록 한 것이지요. 

이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 자신의 함대의 실력을 잘 알고 있던 빌뇌브는, 만약 보통 하는 식의 순차적인 함대 기동을 하려 했다가는 아예 선회 자체가 제대로 안되고 함대가 엉망진창이 된 상황에서 넬슨의 습격을 받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 어차피 당시 자신의 함대의 배열도 특별한 순서없이 되는대로 줄을 선 것이니, 이 배열의 앞뒤를 바꾼다고 해서 뭐 손해볼 것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 판단은 둘다 옳았습니다.  상대적으로 간단한 선회 방식을 택했는데도, 연합함대 선원들의 미숙함으로 인해 이 선회 기동은 무려 2시간이나 걸렸던 것입니다. 




(이런 삼각돛을 단 요트야 180도 회전이 그나마 쉬운 편이지만, 사각돛을 단 거대한 전열함은 180도 회전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전투 등으로 인해 맨 후미 돛대 (mizen mast) 또는 선수 앞쪽으로 돌출한 선수 돛대 (bowsprit)를 잃은 배는 삼각돛을 달지 못했으므로 아예 선회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애초에 빌뇌브가 선회 신호를 보냈을 때, 빌뇌브의 성향을 잘 알고 있던 휘하 제독 및 함장들은, '저 양반 또 도망칠라고 그러는군 이제 우린 끝장이야' 하며 혀를 끌끌 찼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연합 함대가 전멸하지 않고 그나마 몇척이라도 살아서 카디즈로 기어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빌뇌브가 이때 수행했던 선회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이 선회 와중에도, 당연히 빌뇌브와 그 부하 장교들의 망원경은 넬슨의 함대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넬슨의 함대 진형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넬슨의 함대는 1줄이 아니라 2줄이었던 것입니다.  연합 함대에서는 '저건 또 대체 뭘 하자는 수작들일까?' 라고들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제1차 세계대전 초기의 공중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시지요.  항공기에 의한 전투라는 개념 자체가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조종사들은 뭘 대체 어떻게 싸워야 할지 잘 몰랐습니다.  적기의 정면에서 접근하며 총질을 해야 하나 ?  옆에서 쏘는 것이 유리한가 ?  적기의 조종석에서 잘 안보이는 아래 쪽에서 접근하는 것이 유리할까 아니면 아무래도 위에서 아래로 내리 꽂으며 접근하는 것이 유리할까 ?  그러다가, 차츰 공중전에 대한 경험이 쌓이면서, 어떻게 해야 유리하게 잘 싸울 수 있다는 규칙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독일의 에이스 뵐케가 작성했다는 뵐케 격언 (Dicta Boelcke)입니다.  8가지로 된 이 규칙을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가령 이런 것이지요.  무조건 위에서 공격해라, 가능하면 해를 등 뒤에 둬라, 일단 공격을 시작하면 끝까지 추격해라, 원거리 사격은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우니 발포는 충분히 접근한 뒤에 시작해라 등등입니다.





18세기 들어서, 대형 범선 전열함들의 싸움에서도 이런 규칙이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뵐케 격언처럼 사람 이름이 붙어 있거나 명문화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당시 유럽 해군에서는 모두 받아들이고 있던 규칙을 한 문장으로 묘사하면 대략 다음과 같았습니다.

"적 함대와 싸울 때는, 일렬 종대를 유지한 채로 적 함대와 평행이 되도록 접근한 뒤, 충분히 (아마도 500m ~ 700m ?) 접근한 뒤에야 포격을 시작하고, 어느 정도 포격을 쏟아부어 적병들의 사상자가 많아지면, 적함 옆구리에 우리 배의 측면을 갖다 대고 승선조 (boarding party)가 적함에 뛰어들어 백병전으로 적함을 탈취한다."

양쪽 함대가 같은 전법을 구사했으므로, 결국 두 함대는 두개의 젓가락처럼 평행하게 항해하며 서로의 간격을 줄이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일렬 종대의 진형이 정형화된 것은 주로 함대 사령관의 지휘 편의성과 화력 투사의 효율성 때문이었습니다.  가령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B-17 폭격기들처럼 대충 둥글게 뭉쳐서 적 함대와 격돌한다면 2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저런 폭격기들은 어떤 대형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  다 수십번 많은 희생을 치루고 난 뒤에야 경험이 쌓이는 법입니다.)



첫째, 기함(flagship)에 탄 함대 사령관이 뭔가 신호 깃발을 올려서 '전 함대 동북쪽으로 진로 변경' 명령을 내린다고 해도, 일부 함선에서는 그 신호를 볼 수가 없게 됩니다.  게다가, 당시 전함들은 증기기관이 아닌 돛과 바람으로 움직이는 범선이었으므로, 전체 전함들이 동일한 속력으로 움직이며 초기 진형을 정확히 유지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처음에야 기함의 위치가 정확하게 함대 중앙이었다고 하더라도, 나중에는 기함이 어디에 가서 붙었는지 모르는 상황이 되기 쉬웠습니다.  특히 일단 전투가 개시되어 자욱한 포연이 바다 위를 뒤덮게 되면,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 질서정연한 전투 지휘는 물건너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일렬로 늘어선다면, 그리고 특히 기함이 함대의 중앙에 위치한다면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일렬 종대의 중앙에 위차한 기함의 깃발 신호를 맨 앞쪽 또는 맨 뒤쪽 전함들은 다른 전함들에게 가려져서 잘 볼 수가 없을 것 같다고요 ?  실제로 그랬습니다.  그래서 긴 일렬 종대 옆에, 따로 프리깃 함들이 따라다녔습니다.  중앙의 전함에서 깃발 신호를 올리면,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함대 밖에 위치한 프리깃함들이 그 깃발 신호를 반복해 게양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전체 함대가 기함의 신호를 잘 볼 수 있었고, 또 반대로 일부 전함에서 기함으로 보내는 신호도 이 프리깃함들을 통해서 기함에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일렬로 늘어서서 싸워야 대포들을 효율적으로 발사할 수 있었습니다.  1줄이 아닌 2~3줄로 늘어서서 접근하거나, 또는 대충 둥글게 진형을 짜고 적함대와 교전한다면, 상당수의 아군 전함은 다른 아군 전함에 가려서 적함에게 포격할 기회를 잃게 되므로, 아무래도 모든 전함들이 포격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1줄이 유리했습니다.  또, 당시 전열함들은 대포가 주로 양쪽 측면에만 집중 배치되어 있었으므로, 적함이 측면에 있을 때만 포격을 가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어떻게든 적의 선수(bow) 또는 선미(stern)에 우리배의 측면(broadside)를 갖다대고 일방적인 종사(raking fire)를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적함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기회를 쉽게 내주지 않았으므로, 결국은 양쪽 함대가 그냥 일렬로 주욱 늘어서서 1대1로 무자비한 난타전을 벌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1794년, 영국 함대와 프랑스 함대가 맞붙은 '영광의 6월 1일 전투' 대형입니다.  양쪽이 주욱 일렬로 늘어선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하긴, 결국 여기서도 영국 함대가 프랑스 함대의 전열을 관통하기는 했습니다.)



당연히 1805년 10월 21일 아침, 트라팔가 앞바다의 빌뇌브 함대의 진형은 일렬종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날 아침 빌뇌브의 망원경에 들어온 넬슨 함대의 모습은 1줄이 아닌 2줄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영국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자기 함대의 측면(broadside)에 대해 똑바로 선수(bow)를 직각으로 들이대고 접근해오고 있었습니다.  이건 마치 당시 해전의 기초를 모르는 얼간이들의 전법 같았습니다.  이대로라면 모든 함장들이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자 하는 종사(raking fire) 위치에 영국 함대는 스스로 머리통을 들이대게 되었으니까요.  대체 넬슨은 무슨 생각이었던 것일까요 ?

지난번에 (나폴리 스캔들 - 엠마 이야기 http://blog.daum.net/nasica/6862519 ) 넬슨이 현부인인 파니 넬슨과 이혼하고 엠마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라도, 미적지근한 승리가 아니라 반드시 영국 전체가 입을 떡 벌릴 만한 대승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 바램은 여전히 넬슨의 가슴에 살아있었습니다.  9월 28일 카디즈 앞바다의 영국 함대에 합류했을 때부터, 넬슨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연합 함대의 전멸이었습니다.  그를 위해 넬슨은 스스로 'Nelson touch'라고 이름붙인 전법을 고안했습니다.  이 전법의 핵심은 영국 함대를 3열로 나누어 적의 함대에 돌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정확하게는 3열의 영국 함대 중 2열은 적의 일렬종대에 직각으로 돌입하여 적 함대를 3등분하고, 나머지 1열은 일종의 예비 전력으로 있다가 가장 적절해 보이는 전투 현장에 돌격하여 적함대를 산산조각내는 역할을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번에 언급했듯이, 넬슨의 함대는 보급품 문제로 캐노퍼스(HMS Canopus) 호를 비롯한 5척의 전열함을 떠나보내야 하는 등 애초 계획보다 전열함 수자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실제 트라팔가 해전에서는 어쩔 수 없이 예비대인 제3열을 없앤 2열 종대로 적 함대에 돌입하도록 계획이 변경되었습니다.)

사실 이 전법은 넬슨이 사상 최초로 고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넬슨이 일개 함장으로서 처음 겪었던 대규모 함대 전투였던 1797년 2월의 세인트 빈센트 곶 (Cape St. Vincent) 전투에서 저비스 (John Jervis, 1st Earl of St Vincent) 제독이 워낙 수적으로 열세였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스페인 함대의 전열을 뚫고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넬슨은 엄격하기로 유명했던 저비스 제독의 명령을 무시하고 독단으로 행동하여 적함대의 전열에 먼저 뛰어들어 큰 공을 세운 바도 있었습니다.  (넬슨의 불꽃놀이 - 아부키르 해전 (상편) http://blog.daum.net/nasica/6862484 참조)  하지만 이때도 일렬로 늘어선 스페인 전열함에 대해 뱃머리를 수직으로 들이대고 접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널찍하게 두 그룹으로 떨어진 두 스페인 함대 사이를 통과하려는 것이었지요. 




(1797년 넬슨의 출세 무대였던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의 모습입니다.  검은 색의 영국 함대가 일렬종대로 두 개로 갈라진 스페인 함대의 사이를 돌파하며 선회하는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돌이켜보면 넬슨이 지휘한 대규모 함대 전투는 사실 딱 2개였습니다.  바로 아부키르 해전(넬슨의 불꽃놀이 - 아부키르 해전 (상편) http://blog.daum.net/nasica/6862484 참조)과 코펜하겐 해전(중립도 힘이 있어야 한다 - 발트해의 포성 http://blog.daum.net/nasica/6862507 참조)이었지요.  이 두 해전에서, 넬슨은 두번 다 정박한 적함대와 상대했는데, 두번 모두 일렬로 늘어선 적함들에게 비스듬히 평행으로 접근하여 지근거리에 자리를 잡은 뒤 포격에 들어갔습니다.  특히 아부키르 해전에서는 프랑스군의 미숙함을 십분 활용하여 빛나는 대승을 거두었으나, 코펜하겐 해전에서는 그야말로 평범하게 싸워 평범한 전과를 올리는데 그쳤지요.

그런데 왜 이번에는 이렇게 상식에서 벗어난 전법을 채택했을까요 ?  사실 딱 한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바로 적 함대의 전멸이었습니다.  넬슨이 빌뇌브의 장점 중에 가장 상대하기 곤란했던 점은 바로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간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걱정되는 점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넬슨은 모든 역량을 연합 함대의 탈출 저지에 두었고, 일단 자신의 함대가 빌뇌브의 함대 한 가운데 뛰어들어 난전이 벌어지기만 하면 승리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넬슨이 바라는 것은 깔끔한 2줄이 아니라 바로 이런 뒤죽박죽의 모습이었지요.)



그런데, 전통적인 일렬종대 전술, 즉 각각 한줄로 늘어서서 포격을 주고 받는 고전적인 함대 전술로는 적 함대의 궤멸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 함대 진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지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당시 범선들은 돛과 바람에 추진을 의지했으므로, 전체 함대가 일정한 속도를 내며 질서정연하게 진형을 유지하는 것이 꽤 어려웠습니다.  가장 단순한 대형인 일렬종대인 경우조차도 그랬습니다.  어떤 배는 느리고 어떤 배는 빠를 수 있었으므로 결국 느린 배의 속력에 전체 함대의 속도가 맞춰질 수 밖에 없었는데다, 적의 긴 진형에 비스듬히 접근하여 두 줄의 함대가 완전히 겹쳐지도록 할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게다가 어떻게든 이렇게 적 함대와 마주 서서 포격을 주고 받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적 함대가 아무래도 못 당해내겠다고 판단하여 '각함 알아서 도주하라' 하고 진형을 해체하고 뿔뿔이 도망쳐버리면, 이쪽도 함대 진형을 깨고 그 뒤를 추격해야 했는데, 이럴 경우 역시 통제가 안되므로 추격을 포기하고 일부 적함을 나포하는 것에 만족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넬슨으로서는 그런 일은 절대 없어야 했습니다.  Nelson touch라는 이 전법의 핵심은 사실 적함대의 일렬종대에 2줄 또는 3줄로 직각으로 돌입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최단 시간내에 적함대에 돌입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 이 전술의 핵심은 전체 함대가 사령관의 일사불란한 통제에서 벗어나 개개 전함의 재량에 따라 뒤죽박죽으로 적함과 뒤엉켜 난전을 벌이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각 전함의 함장은 넬슨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해야 했고, 또 각 함장들에게 많은 재량권이 허용되어야 했습니다.  당연히 넬슨도 그 필요성을 명확하게 이해했고, 그래서 두차례에 걸쳐 전체 전열함의 함장들을 자신의 기함인 빅토리에 불러 회식을 하며 자신의 전술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또한, 실제로 전투에 돌입하게 되면 자신의 통제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런 말로 각 함장의 재량권을 명확하게 해주었습니다.

"각 함장은 자신의 배를 적함 옆에 갖다 대기만 하면 최소한 잘못한 일은 없는 셈이다."  (No captain can do very wrong if he places his ship alongside that of the enemy.)




(일단 이 상황까지만 만들면 만사 OK)



하지만 넬슨의 전술을 들은 함장들은 그다지 속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전술에는 몇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첫째, 당연히 주욱 늘어선 적의 함대에 직각으로 돌입하는 영국 함대의 가장 앞에 위치한 전함은 비록 좀 먼 거리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종사(raking fire) 위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1812년 영미 전쟁 당시 미국 프리깃 USS Constitution 에게 무자비한 종사를 당하는 영국 프리깃 HMS Java의 모습입니다.  글자 그대로 '관광'을 당하는 셈이지요.)



적의 함대 전체가 자신의 배에 마음껏 대포알을 쏘아대는 동안, 우리 쪽은 전혀 반격도 하지 못한 채 계속 전진만 해야 했습니다.  당시 범선에는 선수를 향한 포가 아예 안 달려있거나, 있어도 작은 것 1~2문 정도만 있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런 상황은 오히려 적이 환영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종사 위치를 잡으려고 이리저리 선회하며 애를 쓰는 것이 보통인데, 오히려 적이 '날 잡아잡수' 하며 머리를 들이밀다니요 ? 




(컨스티튜션 호가 자바 호에게 종사를 퍼붓기 위해서는 위와 같이 매우 복잡한 댄스를 추어야 했습니다.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답니다.)



둘째, 육전이든 해전이든 모든 전술의 핵심은 아군의 병력은 집중시키고 적의 병력은 분산시키는 것인데, 이 전술은 필연적으로 아군 화력을 크게 분산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반복되는 이야기입니다만, 당시 영국 함대의 전함들은 속도가 제각각이었으므로, 2열종대라는 단순한 진형이라도 제대로 이루려면 어쩔 수 없이 가장 느린 배를 맨 앞에 세우고, 다른 배들은 그 배의 속도에 맞춰 느리게 항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절대 넬슨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지요.  넬슨은 가장 빠른 배를 맨 앞에 내세우고, 가장 느린 배를 맨 뒤에 배치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럴 경우, 맨 앞의 전함이 이미 전투에 돌입하여 1대 17의 싸움을 벌이며 피투성이가 되는 동안, 맨 뒤의 느린 배는 한참 뒤에나 도우러 올 수 있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군사 작전에서 반드시 피해야 하는 것이 바로 축차 투입, 즉 병력을 집중하여 투입하지 않고 강력한 적의 화력 앞에 조금씩 나누어 투입하는 것이거든요.  까딱 잘못하면 적의 일제 포격에 맨 선두에 위치한 전함이 한척씩 차례대로 격파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왕년에 유명했던 게임 스타크래프트 (요즘도 이 게임 하시나요들?) 를 예로 든다면, 일렬 횡대로 주욱 늘어선 적의 마린 보병 앞에, 우리 마린 보병들을 공격 모드도 아니고 이동 모드로 일렬 종대로 달려가도록 지시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럴 경우 남는 것은 한무더기의 케찹 밖에 없다는 것을 다들 잘 아시지요 ?




(저는 오랜만에 보는 그림이에요.  참 남자로 태어나서 청춘을 바칠만한 (?) 게임이었지요.)



넬슨도 당연히 이런 약점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약점은 극복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먼저, 종사를 뒤집어 쓰게 된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프랑스나 스페인 함대의 포격 실력은 형편없을 것이므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기본 해결책이었습니다.  이것도 그럴싸 한 말이긴 했습니다.  사실 종사라는 것은 머스켓 소총의 유효사거리 정도되는 지근거리 (약 70m 이내)에서 쏘는 것이었거든요.  그보다 더 먼 거리에서라면, 당시 대포의 명중률로 보았을 때 그다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 것입니다.  또 종사가 무서운 것은 지근거리에서 발사된 포탄이 배의 세로 길이를 관통하여 전함의 포갑판 전체를 휩쓸어버리는 것이었는데, 거리가 멀 수록 대포알의 위력은 떨어지기 때문에 설령 명중한다고 하더라도 전함을 세로 길이 방향으로 관통하지는 못할 거라고 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당시 대포의 최대 사거리는 약 2km 정도, 유효 사거리는 약 800m 정도로 보았으므로, 이 800m 거리만 어떻게 견뎌낸다면 이 종사 문제는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당시 범선의 속도는 바람 상태에 따라 워낙 들쑥날쑥했지만, 평균 5노트, 즉 시속 9km 정도는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최대 사거리를 생각하면 약 13분 동안, 유효 사거리를 생각하면 약 5분 동안만 견뎌내면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함포는 재장전하는데 숙련된 수병들이 한다고 해도 약 2분이 걸렸으므로, 이 시간 중 최대 7번의 일제 사격을 견뎌야 했는데, 원거리에서는 별로 무서울 것이 없고, 유효사거리 내에서도 최대 3번만 견디면 된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만, 당일 바람이 워낙 약하게 부는 통에, 넬슨은 약 40분간 적의 포격을 뒤집어 써야 했습니다.




(한대의 32 파운드 포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약 10명 정도가 그야말로 필사적인 중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또 넬슨은 적의 밀집된 진형에 아군을 축차 투입하는 것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적은 몇년간이나 항구에서 포도주나 퍼마시던 프랑스 및 스페인놈들이었거든요.  일단 적을 뒤죽박죽 혼전에 끌어들이기만 하면, 일당백의 영국 해군은 1대17로 싸우게 되더라도 결국 적을 압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적의 함대를 2줄로 직각으로 돌입하며 '세동강으로 끊어먹는' 전법을 쓸 것이므로, 최소한 맨 앞에 서서 항진하던 1/3의 적함들은 뒤죽박죽 혼전 속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배를 180도 선회시켜야 했는데, 미숙한 프랑스 스페인 연합 함대의 전함들은 그런 기동을 하는데 적어도 1~2시간은 걸릴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그 시간 동안은 33척 X 2/3 = 22척의 적함을, 아군의 27척이 상대하면 된다고 판단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역시 전투 당일의 약한 바람이 문제였습니다.  바람이 약했던 탓에, 영국 함대의 후미가 전투에 돌입하는 것이 너무 느려졌던 것입니다.  가령 영국 함대의 100문짜리 1급함 브리타니아 (HMS Britannia) 호는 가장 큰 배인 대신 가장 느린 배이기도 했는데, 이 전함은 넬슨의 전열 중간이 원래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전열함은 넬슨의 빅토리 호가 전투에 뛰어든지 무려 2시간이 지나서야 느릿느릿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Nelson touch라는 전술에 있어서 넬슨이 애써 무시했던 취약점들로 인해, 넬슨과 영국 함대는 그 댓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던 것입니다.




(결국 넬슨은 자신의 전술인 Nelson touch에 내재하고 있는 취약점 때문에 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군사 작전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위험은 무릅쓸 수 밖에 없습니다.  이쪽은 100% 안전한 그런 작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으니까요.  넬슨이 바라는대로 영국, 아니 전 유럽이 '입을 떡 벌릴 만한' 대승을 거두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넬슨의 이렇게 아군을 필요 이상의 위험 속으로 내몰면서까지 대승을 간절히 원했던 것이 엠마와의 결혼을 위한 개인적인 욕심에서였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넬슨은 결코 겁장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전열 중 가장 위험한 위치, 즉 선두에 서기로 했습니다.  사실 이건 정상적인 위치는 아니었습니다.  아부키르 해전에서나 코펜하겐 해전에서나, 넬슨은 당연히 함대의 중앙부에 위치를 잡았었지요.  그런데 왜 이번에는 다른 해전에 비해 특별히 더 위험한 위치를 자처했을까요 ?  혹자는 넬슨이 이미 전투 중 부상으로 팔 하나와 눈 하나 뿐만 아니라, 치아의 상당수를 잃을 정도로 불구가 된 몸인데다 이런저런 지병을 많이 앓고 있었으므로, 어쩌면 이 역사적인 해전에서 전사하기를 원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도 비슷한 설이 돌아다니지요.   실제로 넬슨은 평소부터, 7년 전쟁 당시 퀘벡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전사한 울프 (James Wolfe) 장군을 부러워하고 그처럼 극적인 전사를 원했다고 합니다. 




(1759년 9월의 퀘벡 전투에서 영국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준 뒤 전사한 제임스 울프 장군의 모습입니다.)



글쎄요, 하지만 넬슨은 당시 엠마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식적이고 체면을 중시하는 당시 영국 사회에서, 자신이 죽고나면 엠마의 사회적 위치는 추락할 것이 뻔했는데, 넬슨이 엠마를 버리고 죽기를 바랬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넬슨이 선두 지휘를 맡았던 것은, 단순히 그러는 것이 가장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즉, 가장 크고 빠른 전함이 선두에 서야 적의 집중 포격을 잘 견딜 수 있었고, 또 넬슨이 선두에서 적 함대 중간의 어디를 '잘라먹어야' 가장 효과적일지는 전투 순간에 적함들의 배열을 눈으로 확인하고 판단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런저런 위험 요소를 안은 채로, 넬슨은 1805년 10월 21일 아침, 콜링우드 제독과 함께 2열종대의 함대를 끌고 빌뇌브의 함대를 향해 돌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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