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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비엔나 시민 여러분, 나폴레옹을 만나세요

by nasica-old 2013.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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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 여러분은 도주하는 쿠투조프가 추격하는 나폴레옹에게 뒤렌스타인 전투에서 크게 한방 먹이는 장면까지를 보셨습니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 군과 프랑스 군 모두는 서로가 승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전멸할 뻔 하다가 간신히 도망친 것은 프랑스 군이었지만, 정작 훨씬 우세했던 러시아 군도 비슷한 수의 사상자를 낸 뒤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 후퇴를 계속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이 전투에 대해 모르티에에게 불같이 화를 냈고,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2세가 너무나도 기뻐했던 것을 보면, 아무래도 이 전투는 프랑스 군의 패배가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1792년 당시 25세의 젊은 나이였던 프란츠 2세의 모습입니다.  1805년 당시에는 38세의 장년이었겠네요.)

 

 


하지만 프란츠 2세의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쿠투조프의 후퇴 방향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쿠투조프의 병력은 대략 4만 정도였는데, 그 뒤를 받쳐줄 러시아 지원군을 지휘하는 북스게브덴 (Friedrich Wilhelm von Buxhoeveden 러시아 식으로는 Fyodor Fyodorovich Booksgevden) 과의 합류 장소가 비엔나의 북쪽으로 120km도 넘게 떨어진 브르노 (Brno) 였던 것입니다.  원래 북스게브덴의 지원군은 훨씬 더 일찍 훨씬 더 남쪽까지 와 있어야 했으나, 이렇게 그 이동이 지지부진했던 것은 프로이센 때문이었습니다.  프로이센은 분명히 반프랑스 편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구태여 강적인 프랑스와 피를 흘릴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또 능수능란한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이 중립을 지켜준다면, 영국령 하노버 (Hanover)를 프로이센에게 주겠다는 떡밥을 던져 놓은 상태였습니다.  (왜 하노버가 영국 땅이었고 왜 나폴레옹이 그것을 마음대로 프로이센에게 넘긴다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고향을 잃은 병사들 - King's German Legion http://blog.daum.net/nasica/6862517 편을 참조하십시요.)  이런 사정 때문에,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3세 (Friedrich Wilhelm III) 는 만약 러시아 군이 허락없이 프로이센 영토를 경유해서 통과한다면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엄포를 놓아, 러시아 황제 알렉상드르로 하여금 북스게브덴의 병력을 모조리 오스트리아로 보내는 것을 꺼리게 만들었습니다.  

 

 

 

 

(북스게브덴 중장의 모습입니다.  이름이 무려 효도르...)

 

 

(프로이센의 빌헬름 2세는 초반에 러시아와 으르렁거리기도 했으나, 결국 짜르 알렉상드르와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됩니다.)



나중에 알렉상드르와 빌헬름 3세와의 오해(?)가 풀려서 북스게브덴의 병력이 남하했을 때는 이미 울름 전투가 끝나고 쿠투조프가 걸음아 날 살려라 후퇴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쿠투조프는 나폴레옹의 대군과 맞서기 위해서는 북스게브덴의 병력과의 합류가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북쪽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그러자면 뒤렌스타인 남서쪽에 위치한 비엔나는 포기해야 했지요.  이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자랑스러운 역사 중에, 비엔나가 함락된 적은 1485년 헝가리에게 함락된 이후 단 한번도 없었던 것입니다.  원래 오스트리아라는 이름은 독일어로 Österreich로서, 동방의 제국이라는 뜻입니다.  합스부르크의 왕국인 오스트리아는 결코 고스톱으로 딴 제국이 아니라, 오스만 투르크 등 아시아에서 쳐들어오는 강적들로부터 유럽의 문화와 전통을 그야말로 최전선에서 지켜내며 만든 제국이었습니다.  그에 걸맞게, 비엔나는 강력한 성벽으로 보호된 도시였고, 특히 1805년 당시 비엔나를 둘러싸고 있던 성벽은 1683년 오스만 투르크의 2개월간의 포위를 버티어낸 바로 그 성벽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엔나에는 수백문의 대포와 수만 정의 머스켓 소총, 그리고 엄청난 양의 탄약이 저장된 무기고를 갖춘 무장 도시였습니다.

 

 

 

 

(16세기 후반에 이미 자리를 잡은 요새 도시 비엔나의 위용입니다.)

 

 

 

(1683년 오스만 투르크의 포위 공격을 받는 비엔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철옹성을 버리고 저 멀리 모라비아 (Moravia) 지방으로 합스부르크 왕가가 피난을 간다 ?  이건 견디기 어려운 굴욕이었습니다.  대체 저 멍청한 러시아 촌뜨기들은 그럼 왜 온 것이냐 라는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쿠투조프의 결심은 단호했습니다.  먼저, 1805년 당시의 현대전은 이미 성벽 속에 들어앉아 농성하는 포위전에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특히 당시 비엔나는 이미 주 성벽 너머로도 넓은 교외 주거지가 형성된 대도시로서, 그 교외 주거지도 보조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이런 웅장한 규모의 대도시는 오히려 포위전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많은 시민들이 있어서 식량 비축에도 적절치 않았고, 성벽이 너무 길어서 모든 부분을 다 지킬 수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비엔나는 프랑스 쪽인 도나우 강 서쪽에 있었습니다.  즉, 도나우 강은 프랑스 군의 진격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쪽에서 오는 러시아 원군에게 방해가 되었던 것입니다.

 

 

 

(흘라브룬의 위치가 왜 중요한 지는 글 끝부분에서 보시게 됩니다.  그리고 저 브르노라는 곳이 바로 아우스테를리츠입니다.)

 

 


결정적으로 오스트리아 군은 러시아 군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 군의 주력은 크게 마크 장군의 바이에른 방면군과, 카알 대공의 이탈리아 방면군이 있었는데, 마크 장군의 바이에른 방면군이 괴멸되면서 남은 것이라고는 키엔마이어 장군이 끌고 나온 잔존 세력 1만 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카알 대공의 이탈리아 방면군은 마세나의 프랑스 군에게 밀려난 뒤, 요한 대공의 보헤미아 방면군과 합류하여 8만이라는 대군을 형성하여 비엔나를 향해 북진하고 있었습니다만, 너무 멀어서 당장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이들은 12월 6일에야 비엔나 남쪽 약 120km 지점에 있는 코르멘트(Kormend)라는 헝가리 최대의 요새에 도착하여 무기와 식량 등을 재정비할 수 있었지만, 그 때는 이미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4일 뒤의 일이었지요.  때문에, 당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이라는 이름이 살짝 부끄러울 정도로, 당시 연합군의 주축은 80%가 러시아 군이었습니다.

결국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2세는 식솔들을 이끌고 우아하고 웅장한 합스부르크 왕궁인 쇤브룬 (Schönbrunn) 궁을 떠나, 러시아 군을 따라 쓸쓸히 북쪽으로 피난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유럽을 호령하던 합스부르크 왕가가, 근본도 없이 벼락출세한 코르시카 촌뜨기에게 쫓겨나 촌스러운 러시아 군의 후퇴 행렬에 끼어 피난을 가다니, 그때 프란츠 2세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도도한 황실 왕녀들의 혼란과 슬픔은 대단했을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쇤브룬 궁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뭐 베르사이유 같은 곳에 비하면 새발에 피처럼 느껴지네요.)



하지만 여기서 잠깐, 황제가 궁궐을 버리고 달아나는데, 비엔나 시민들은 어떻게 되는 것이었을까요 ?  훗날 1812년 모스크바 함락 때, 러시아 로마노프 황실을 따라 수많은 모스크바 시민들도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하염없이 피난길을 떠났습니다만, 우아하고 고상한 예술의 도시 비엔나 시민들도 그렇게 비참한 피난길을 떠났을까요 ?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러지 않았습니다.  1812년 모스크바 시민들이 피난을 떠났던 것이 사실 매우 희귀한 사례였고, 대부분의 경우 18~19세기 유럽인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에 적군이 쳐들어온다고 해서 피난을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귀족들이야 돈도 있고, 또 체면상 적군 치하에서 사는 것이 불쾌했으니 자유롭게 떠날 수 있었습니다만,  중산층을 포함한 대부분의 서민들은 일단 피난을 갈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당장의 사업이 있고 지켜야 할 재산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내팽개치고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또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 ?  적군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이렇게 피난갈 필요가 없다고요 ?)


당시 유럽 사회는 기독교라는 공통된 문화를 배경으로, '전쟁도 신사답게 한다'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적의 도시를 함락하면 주민들을 살육하고 약탈, 강간, 방화를 저지르는 야만적인 행위는 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처럼 중국이나 일본의 야만스러운 공격을 당해본 입장에서는 생소한 개념인데, 전쟁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왕가들 사이의 일일 뿐, 멀쩡한 민간인들에게는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족이나 귀족들이 도시 방어를 포기하고 물러나면, 그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들어오는 적군 사령관 앞에 그 도시의 시장 (보통 당시 시장은 귀족이 아니라 부르조아 계층이 맡았지요) 이 도시의 명사들과 함께 나아가 성 문 밖에서 그 도시 성문의 열쇠를 상징적으로 바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건 결코 이적 행위가 아니었고, 당연한 관습이었으므로, 적군이 물러난 뒤 원래 귀족들이 되돌아온다고 해도 시장이나 그 도시 관료들이 이적 행위로 처벌받는 일은 없었습니다.  사실 적들에게서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친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뒤에 남은 시민들을 처벌하겠습니까 ?

 

 

 

(이미 제 블로그에서 여러번 소개드린 벨라스케즈의 명작 '브레다의 항복'입니다.  여기서 패장인 나사우의 유스틴이 도시의 열쇠를 승자인 스페인의 알바 공작에게 바치고 있습니다.)



물론 유럽이라고 다 그렇게 신사다운 전쟁을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종교가 끼어들면 전쟁이 매우 야만스러워져서, 신구교 간의 종교 전쟁 때는 민간인 학살과 약탈이 당연시 되었습니다.  또, 신사스러운 전쟁이 이루어진 나폴레옹 전쟁 시대에도, 적의 도시가 포위군에게 집요하게 반항을 하다가 혈전 끝에 함락된 경우, 피에 물든 공격군은 함락된 도시를 적어도 하루 동안은 마음껏 유린하며 살인 강도 강간을 저질러도 된다는 것이 반쯤 통용되는 불문율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폴레옹, 공성전을 논하다 http://blog.daum.net/nasica/6862436 편 참조)

때문에, 러시아-오스트리아 군이 비엔나에서 농성전을 펼치지 않고 순순히 북쪽으로 물러났을 때, 어쩌면 많은 비엔나 시민들은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만약 농성전을 펼친다면 수만 명의 러시아 군이 비엔나 성내에서 숙식을 했을텐데, 당시 러시아 군은 제2차 동맹 전쟁 당시 이탈리아와 스위스에서 보여준 약탈 실력으로 이름이 높았기 때문에, 비엔나 시민들로서는 러시아 군보다는 차라리 프랑스 군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 생각이 맞았습니다.  11월 13일, 나폴레옹이 아무 저항을 받지 않고, 비엔나 시장으로부터 열쇠를 넘겨 받으며 입성한 이후, 비엔나 시민들이 겪어야 했던 것은 프랑스 군 병사들을 자신들의 집 규모에 따라 배정받아 먹이고 재워야 했던 것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러시아 군이 비엔나에서 농성했다고 하더라도, 비엔나 시민들은 자신들의 집 지붕 아래 러시아 군을 마찬가지로 배정받아 먹이고 재워야 했으므로, 이왕 그럴 것이라면 이반 일병보다는 피에르 일병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당시 프랑스 군도 오스트리아 인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배려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군이 나중에 스페인에서 보여준 야만성은 적어도 이때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지요. 

 

 

 

(러시아 군의 이반 일병보다 프랑스 군의 피에르 일병이 더 세련되고 더 얌전했을까요 ?  글쎄요... 그것도 다 그때그때 다르겠지요.)


이렇게 민간인들의 주택에 몇명씩 병사들을 배정하여 먹이고 재우도록 하는 제도를 숙사 할당제(billeting)라고 합니다.  이 billet이라는 단어는 원래 프랑스 어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프랑스 어로 짧은 편지, 쪽지 등을 billet (비예) 라고 하는데, 병사들이 '이 병사들을 당신 집에서 재우시오'라는 명령서를 들고 찾아오기 때문에 billet라고 하는 것이 숙사 할당제로 굳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는 꼭 적 도시를 점령했을 때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었고, 자국내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일종의 세금이나 부역 같은 것으로서,  국민이라면 당연히 국가에게 바쳐야 할 서비스 중 하나였지요.  병사들이 먹고 마시는 것도 그 민가에는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것인데, 보통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상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적 도시에 주둔했을 때는 더욱 그랬겠지요.

전에 잠깐 소개드린 바 있는 '척탄병 쿠아녜의 회고록' 속에서 필자인 쿠아녜가 맨 처음 징집되어 훈련소를 찾아가는 길에, 어느 민간 주택에 숙사를 할당받아 billet 명령서를 들고 찾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잠깐 보시지요.

 

 

(이 장면은 당시 일병이었던 쿠아녜가 1800년 몬테벨로 전투에서 적의 대포를 빼앗은 공로로 나폴레옹 앞에 불려나와, 나폴레옹으로부터 귀를 '꼬집힘'을 당하는 장면입니다.  그건 나폴레옹 나름대로의 친밀함의 표현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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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은 꾸러미를 겨드랑이 밑에 끼고 출발하여, 첫번째 군사 휴식처인 로조이(Rozoy)에 도착하여 밤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숙사 할당 명령서(billeting order)를 받아다 집 주인에게 제시했는데, 집 주인은 날 본 척 만 척 하며 홀대했다.  그러고 난 뒤 난 뭔가 스튜를 만들 재료를 사러 밖에 나갔고, 푸주간에서 고기를 받았다.  내 손바닥 위에 올려진 고기 조각을 보니 몹시 처량했다.  그것을 들고와서 내 숙사로 정해진 집의 안주인에게 주며 스튜를 만들어달라고 부탁을 한 뒤, 스튜에 넣을 채소거리를 구하러 다시 밖으로 나왔다.  마침내 약간의 스튜가 만들어졌고, 그때 즈음에는 그 집 주인 식구들도 나를 어느 정도 좋게 봐주어 나에게 이런저런 말을 붙여보려고 했다.  하지만 난 그들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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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쿠아녜가 정식으로 부대에 편성된 뒤 부대 단위로 이동하게 되자, 사정이 많이 바뀝니다.)

우리는 가는 길 내내 계속 텐트를 치고 밤을 보냈다.  옥세르(Auxerre)에서 우리는 생-니타스(St. Nitasse)로 이동했는데, 그곳 시민들은 우리를 기꺼이 자기들 집에서 재워주려고 했고, 우리에게 장작과 (매트리스로 쓸) 짚단을 몇 마차 분이나 잔뜩 가져왔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아무 소용 없었다.  우리는 (주민들의 친절에도 불구하고) 그 주민들의 밭에서 덩쿨받침대와 길거리의 포플라 가로수를 베어다 장작으로 태웠다.  우리는 '샹발락의 건달들'이라고 불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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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나름 노련한 병사가 된 쿠아녜는 혼자 있을 때도 숙사 할당제를 120% 활용하는 능수능란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브리(Brie) 지방의 모(Meaux) 시에 도착했고, 여기서 우리는 환대를 받았다.  난 혼자였는데, 파리로 가는 길의 바스 가(Rue Basse)에 숙사 할당을 받아 그 명령서를 보여주러 갔다.  난 글을 읽을 줄 몰랐으므로 누군가에게 부탁하여 그것을 읽어달라고 했다.  뚱뚱한 사람 하나가 내게 말했다.  "그 여자는 부자야.  하지만 그 여잔 자넬 여관으로 보내버릴 걸 ?  자, 이 열쇠장이네 가게로 가라고."  나는 (그 여자 집에 세든) 열쇠장이의 가게로 가서 명령서를  보여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 이 친구야, 우리 마님께서는 자넬 여관에 보내버릴 걸세."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그 마님을 잘 다룰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시간 뒤에 저를 찾아와 주세요." 
"하지만 자넨 그 집에 머물지 못할 거라니까 ?"
"제가 머무는 걸 보시게 될 겁니다.  그것도 아무런 소동 없이 말이지요." 

난 2층으로 올라갔다.  "안녕하십니까, 마님.  여기 숙사 할당 명령서가 있습니다."
"하지만 병사 양반, 난 손님을 받지 않는다우."
"잘 압니다, 마님.  하지만 제가 너무 피곤해서요.  그냥 잠깐 쉬다 나갈 겁니다.  여기 15 수 (15 수면 현재 가치로 대략 1만원, 역주) 를 드릴테니, 마님께서 제게 와인 한 병만 구해주신다면 그것만 마시고 물러 가겠습니다."

그 여자는 15 수를 받아들고 와인을 사러 나갔다.  그 여자가 나가자마자, 나는 옷을 벗어던지고 머리에 손수건을 동여맨 뒤, 그 여자의 침대에 들어가 있는 힘껏 벌벌 떠는 시늉을 냈다.  조금 뒤 그 여자가 돌아와 내가 자기 침대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보고는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 여자는 자기 집에 세든 사람들을 찾아가 이 일을 어찌 해야 할지 상의했다.  그 세입자들은 그 병사가 독감에 걸린 것 같으니 나에게 설탕을 잔뜩 넣은 따뜻한 와인을 만들어 주고, 불을 지펴 걸죽한 수프도 만들어 준 뒤, 따뜻하게 잘 덮어주라고 그 여자에게 말했다.  (이 따뜻한 포도주에 대해서는 로마 병사들과 나폴레옹 병사들이 즐겨마시던 음료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 http://blog.daum.net/nasica/6862405 참조. 역주)  이 고약한 세입자 친구들은 이 구두쇠 여자를 속여먹으며 아주 즐거워 했다.  그날 저녁 그 세입자들이 나를 보러 왔고, 결국 그 여자는 소파에서 보내야 했다.  그 다음날 그 여자는 내게 15 수를 돌려주었고, 난 다른 숙사로 인도되어 갔다.  그 이웃들은 내가 그 여자를 골려먹은 것에 대해 무척이나 고소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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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모파상의 단편 중에도, 1870년 보불 전쟁 때 프랑스 시골 마을에 숙사 할당을 받은 프로이센 군인들과의 일화가 많이 있습니다.  희극도 있고, 비극도 있지요.  여기서는 비극에 속하는 '소바쥬 어머니' 편의 일부를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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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프로이센 군대가 도착했다.  재산과 식량을 기준으로 하여 주민들에게 병사들이 할당되었다.  부유하다고 소문난 그 노파는 네 명을 할당받았다.

그들은 황금색 피부, 황금색 수염, 푸른 눈을 가진 건장한 청년이었다.  그들은 아주 고생을 했을 텐데도 아직 번지르했으며, 점령지에서도 선량하게 굴었다.  이 늙은 여자 집에 자신들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은 그녀에게 최대한 친절을 베풀었고, 또 할 수 있는 한 그녀의 힘든 일과 경비를 덜어 주었다.  아침마다 그들은 우물가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세면을 했다.  눈이 내려 눈부신 날에는 북구사람들의 희고 붉은 살에 물을 흠뻑 적시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소바쥬 어머니는 바삐 오가면서 수프를 준비했다.  그럴 때면 그들은 네 명의 착한 아들들처럼 부엌을 청소하고, 타일을 닦고, 장작을 패고, 감자를 캐고, 옷을 빠는 등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비극이 아니라 아주 훈훈한 이야기 같은데... 왜 비극이 되는지는 이런 블로그 나부랭이 말고, 진짜 책을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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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비엔나에 총 34,000 명의 프랑스 군을 billet 시켰습니다.  아무리 이반 일병이나 표트르 일병보다는 낫다고 해도, 저 위의 쿠아녜 일병의 회고록에 나오는 것처럼 거친 병사들을 자기 아내와 딸과 함께 같은 지붕 밑에서 재운다는 것은 대단한 스트레스였을 것입니다.  또한 가뜩이나 전쟁 때문에 비엔나로의 식량 반입이 원활치 않은 때에 34,000명의 걸신들린 병사들이 염치도 없이 마구 먹어댔으니, 식량 사정도 매우 안 좋았겠지요.  비엔나 시민들의 이런 고생은 1806년 1월 12일, 프랑스 군이 프레스부르크 (Pressburg) 조약 이후 비엔나에서 철수할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약탈 정신은 여기서도 잘 발휘되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피난갈 때 당연히 금고의 금화나 은화 등을 박박 긁어갔습니다.  그런 경화 (specie, 금화나 은화)는 머스켓 소총이나 화약만큼이나 소중한 전쟁 자원이었으니까, 그런 것을 프랑스 군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손가락만 빨고 있을 나폴레옹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당시 나폴레옹은 매우 돈에 쪼들리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후기에서 다루겠습니다만, 당시 나폴레옹을 옥죄어 오던 나쁜 상황들 중 하나가 파리에서 심각한 금융 위기가 임박해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해결을 위해 시급히 떼돈을 가져가지 못한다면 전쟁에서 이긴다고 해도 큰일이 날 판이었거든요.  물론 나폴레옹은 점잖은 황제 체면에 비엔나 시민들의 개인 주택을 털 수는 없었습니다만, 세금이라는 형태로 많은 액수를 비엔나 시민들로부터 징수해냈습니다.   게다가 벨베데레(Belvedere) 궁에서 무려 4백 점에 달하는 미술품들을 약탈하여 파리로 보냈습니다.  이 미술품들은 모두 나폴레옹 박물관 (훗날의 루브르 박물관)으로 보내졌지요. 

 

 

 

 

(비엔나의 또다른 왕궁 복합 건물인 벨베데레 궁의 일부 건물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제적인 수탈 외에는, 나폴레옹은 매우 얌전하고 너그러운 점령자였습니다.  누가 뭐래도 거친 외국 병사들이 시내를 점령하고 있으면 당장의 치안 문제에 대해 시민들이 전전긍긍하기 마련인데, 그에 대해 안심시키기 위해 나폴레옹은 약 1만 명에 달하는 비엔나 국민 방위군 (National Guard, 국민 방위군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앙졸라와 함께 바리케이드로 http://blog.daum.net/nasica/6862535 참조)을 그대로 무장시켜 시내 경비를 서도록 맡겼습니다.  이건 대단한 자신감이었습니다.  고작 34,000의 프랑스 군이 주둔하는 도시에 아무리 예비군이라고 해도 피점령민들 중 무려 1만명을 무장시켜 경비를 맡기다니요 !  뿐만 아니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비엔나에는 엄청난 규모의 무기고가 있었습니다.  철수하는 합스부르크 왕가에서는 워낙 급하게 철수하느라고 그랬는지, 혹은 어차피 프랑스 군에게 무기가 부족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해서 그랬는지, 이 무기고를 폭발시켜 날려버리지 않고 그대로 놔둔 채 철수했었습니다.  나폴레옹도 이 무기고는 오스트리아의 소유물이고, 어차피 곧 오스트리아는 자기 발 밑에 굴복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는지 이 무기고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머스켓 소총이나 대포는 돈이 안된다고 생각해서여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만, 전쟁이 끝나고 돌아갈 때도, 이 무기고는 전혀 건들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바이에른에서 나포한 바이에른 소유의 대포들은 꺼내어 바이에른에게 되돌려 주었습니다.  이와 함께, 전투 현장에서 노획한 오스트리아 군의 머스켓 소총 15,000 정도 함께 바이에른에게 선물했습니다.  나중의 일입니다만, 1809년 다시 나폴레옹이 비엔나에 들어왔을 때는 사정이 많이 달랐습니다.  포격전을 벌이며 비엔나에 입성했고, 또 나폴레옹이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패배한 뒤 급히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이 무기고를 활짝 열어 오스트리아 제 대포들을 마구 끌어내어 썼지요.

 

 

 

(불과 4년 뒤인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가 영원한 프랑스의 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폴레옹의 비엔나 점령이 뮈라의 재치 덕분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건 사실이기도 하고, 사실이 아니기도 합니다.  11월 13일, 비엔나에서 도나우 강을 건너는 다리 하나가 유일하게 남아 있었는데, 다리 건너 편에는 오스트리아 군이 지키고 있었고, 다리에는 폭약통이 장착되어 여차하면 다리 전체를 날려버릴 준비가 다 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뮈라는 용맹하기로 유명한 우디노 (Nicolas Charles Oudinot) 장군의 척탄병 중대를 다리 이쪽 편에 숨겨둔 채, 휘황찬란하게 번쩍거리는 제복을 입고 란 (Lannes) 원수와 함께 두어명의 장교만 데리고 천천히 걸어서 그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다리를 지키던 오스트리아 군이 경고 사격을 하면서 대응 자세를 취하자, 그는 마치 휴전 협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듯이 외치면서 여유있게 걸어왔습니다.  적군이라고 해도, 유명한 최고위급 장성이 2명씩이나 아무런 무장도 없이 걸어나오니, 오스트리아 군 측에서도 머뭇머뭇하면서도 장교들이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나아갔습니다.  이렇게 양측 장교들이 다리 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우디노의 척탄병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어 어 저게 뭐야 저게 뭐야' 하며 어리둥절하는 오스트리아 수비대를 제압하고 다리를 점령해 버렸던 것입니다.  다만, 이 다리 점령은 11월 13일 이미 비엔나가 점령된 다음날의 일이었습니다.  이 다리를 점령했기 때문에 비엔나 점령이 쉬워진 것이 아니라, 도주하는 러시아 군에 대한 추격이 쉬워진 것입니다.

 

 

 

(우디노 장군입니다.  그의 척탄병 부대는 그랑 다르메 중 최정예로 소문이 났는데, 사실 그 주된 이유가 바로 이 비엔나의 다리 사건 덕택이었습니다.)



이렇게 휴전이 이루어졌다고 사기를 치는 것이 전쟁 범죄 아니냐고요 ?  아니었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기만 전술 (ruse de guerre)의 하나로써, 당시 전쟁에서는 적법하게 사용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해전에서는 아군기 대신 중립국의 깃발을 달고 다니다가 방심한 적함을 공격하는 것은 매우 상투적인 관습이었습니다.  지켜야 할 점은 발포하기 직전에는 원래의 깃발로 고쳐 달아야 한다는 것 뿐이었지요.  다만 당시에도 뮈라가 멋지게 해난 이 기만 전술은 신사답지 못한 일이라고 뒤에서 궁시렁거리며 비난하는 분위기가 있기는 했다고 합니다.

 

 

 

(이쯤에서 다시 보는 흘라브룬과 비엔나의 위치...  뒤렌스타인에서 흘라브룬까지 러시아 군이 직진하여 도주하는 동안, 뮈라의 프랑스 군은 도중에 비엔나를 들러서 점령한 뒤에 흘라브룬까지 뒤쫓아가면서도 결국 따라잡는 축지법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잠깐, 나폴레옹이 비엔나를 점령하고, 또 추격대의 선봉인 뮈라가 11월 13일까지 비엔나에 있었다는 것은, 결국 비엔나 사수를 포기하고 대신 북쪽으로 도주했던 쿠투조프의 러시아 군을 완전히 놓아주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인가요 ?  비엔나라는 꼬리를 잘라주고 도망치는 도마뱀 전략이 성공한 것이었을까요 ?  아니었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그저 장교들의 채찍질에 이리저리 소떼처럼 끌려다니던 러시아 보병들의 행군 속도와, 아직도 혁명의 열정을 가슴 속에 간직한 프랑스 병사들의 행군 속도는 그 차이가 엄청났습니다.  11월 13일 다리 점령과 함께 출발한 뮈라의 선봉대는 불과 이틀만에 40km 떨어진 흘라브룬 (Hollabrunn)에서 도망치던 쿠투조프의 뒷덜미에 따라 붙습니다.  아마 그 압도적인 스피드의 차이에 쿠투조프의 마음도 철렁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이로써 쿠투조프도 끝장이었을까요 ?  하지만 프랑스에만 뮈라 같은 상남자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음편에서는 그 러시아 상남자를 만나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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