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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후퇴의 쿠투조프 vs. 진격의 알렉상드르

by nasica-old 2013.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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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그루지아의 상남자 바그라티온의 분전 덕택에, 쿠투조프의 러시아 군이 뮈라의 맹추격을 뿌리치고 모라비아(Moravia)의 요새 도시인 올뮈츠 (Olmutz, 체코어로는 Olomouc 올로모우츠)까지 무사히 탈출하여, 러시아의 증원군 및 오스트리아 수비군과 합류하는 장면을 보셨습니다. 


 

 

 

(요새 도시로서의 올뮈츠의 위엄... 강을 끼고 있는 철옹성이었습니다.)

 


(현대의 올로모우츠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러시아 군이 무사히 빠져나간 것에 대해, 나폴레옹은 뮈라에게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네가 전체 원정을 말아 먹었다 !" 라면서요.  나폴레옹의 이런 역정은 다소 부당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뮈라가 어리숙하게 바그라티온과 휴전을 맺은 것은 잘못한 것이었습니다만, 애초에 뮈라의 눈부신 활약이 없었다면 그렇게 러시아 군의 꽁무니를 바싹 따라잡을 수도 없었을 뿐더러, 러시아 군이 비록 도망쳤다고 하더라도, 원정 전체 그림은 아직 프랑스 군의 절대 우세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오스트리아 군은 사실상 완전히 분쇄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울름 포위망에 들어가지 않았던 키엔마이어 장군의 병력과, 올뮈츠의 수비 병력 등을 다 합해도, 오스트리아 군은 약 2만5천에 불과했습니다.   명장 카알 대공이 지휘하던 오스트리아의 또다른 야전군인 이탈리아 방면군도 사정이 좋지 못했습니다.  카알 대공은 프랑스의 이탈리아 주둔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마세나 원수에게 밀려나서 북쪽 오스트리아 본토로 철수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쯤에서 어디가 모라비아이고 어디가 보헤미아인지 대략 위치를 알아두시면 이해하시기 편합니다.  둘다 현재의 체코이지요.)



러시아 군은 모두 북스게브덴의 증원군까지 합쳐 봐야 고작 6~7만에 불과했습니다.  비록 간간히 완강한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뒤렌스타인 전투에서나 홀라브룬 전투에서나, 그 느린 기동력과 창의성 없는 전투 솜씨는 프랑스 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하물며 프랑스 군은 그랑 다르메라는 이름에 걸맞게, 무려 20만에 달하는 대군이었습니다 !  여전히 프랑스 군은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에 비해 절대 우위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프랑스 군의 상황이 절대 유리한 것이었을까요 ?  하나하나의 전투를 보면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전체 그림은 무척 흉흉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먼저, 썩어도 준치라고, 오스트리아의 저력이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카알 대공은 마세나에게 패배하여 자꾸만 후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 울름에서의 참변 소식을 들은 카알 대공이 나폴레옹을 남쪽으로부터 견제하기 위해 북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과 대치하던 마세나의 이탈리아 방면군으로부터 후퇴하는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10월 30일에 북부 이탈리아 칼디에로 (Caldiero)에서 벌어진 전투의 결과는 약 3만3천의 병력을 가진 마세나가 거의 5만명의 병력을 가진 카알 대공을 격파하여 9천이 넘는 피해를 입힌 것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이 전투의 실상은 어디까지나 카알 대공의 '후퇴를 위한 견제 전투'였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군의 피해나 오스트리아 군의 피해가 거의 비슷했고, 다만 이 전투 이후 카라 알베르티니 (Cara Albertini)에 주둔해 있던 오스트리아 군이 항복해야 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군의 손실이 9천명으로 불어나 보인 것 뿐이었습니다. 

 

 

 

 

(칼디에로 전투에서의 카알 대공의 모습입니다.)



실제로도, 결과적으로 카알 대공은 티롤의 요한 대공의 병력까지 합해 8만의 병력을 이끌고 (비록 아우스테를리츠 전투가 끝난 며칠 뒤이긴 하지만) 헝가리의 요새 도시 코르멘트 (Kormend)까지 북상할 수 있었습니다.   8만이라는 병력은 아우스테를리츠에 참여한 프랑스 군 전체 병력보다 더 많은 대군이었습니다.  이런 대군이 비엔나 바로 남쪽 코르멘트에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위협이었습니다.  나폴레옹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이후 카알 대공을 견제하기 위해 마세나의 추격군을 제8 군단으로 편성하여 카알 대공의 뒤를 추격하도록 했고, 마르몽의 2군단, 네의 6군단, 다부의 3군단 및 술트의 4군단까지 동원하여 카알 대공이 주둔한 코르멘트를 북남서쪽의 3방향에서 철통같이 에워싸도록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다 부질 없는 이야기입니다만, 만약 카알 대공이 이주일만 더 빨리 북상할 수 있었다면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의 상황은 많이 변했을 것입니다.

 

 

 

(브르노에 A자로 표시된 풍선이 아우스테를리츠입니다.  그 아래 그라츠 옆에 알파벳 없이 표시된 풍선이 카알 대공이 위치한 코르멘트입니다.)



남쪽 상황이 이렇게 흉흉했던 것 못지 않게, 북서쪽 상황도 험악했습니다.  바로 프로이센의 동향 때문이었습니다.  원래부터, 프로이센은 프랑스 혁명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성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이 영국령 하노버(Hanover)를 점령하면서 자신의 앞마당에 발을 들여놓자, 그 감정은 더욱 좋지 않게 되었지요.  프로이센의 프랑스에 대한 악감정이 절정에 달했던 것은 하노버를 점령하고 있던 베르나도트의 제1 군단이, 울름으로 내려가면서 프로이센의 영토인 안스바흐(Ansbach)를 무단으로 통과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간신히 중립을 지키고 있던 프로이센을 크게 자극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프로이센의 국왕 빌헬름 3세 (Friedrich Wilhelm III) 는 '프로이센은 중립'이라는 입장 하에, 러시아 군이 오스트리아 군과 합류하기 위해 프로이센 령 실레지아 (Silesia)를 통과하게 해달라는 청원을 단호히 거절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러시아 군이 프로이센 령 실레지아를 무단 통과한다면 프로이센 군이 즉각 발포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던 험악한 분위기였거든요.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자 빌헬름 3세의 입장이 무척이나 난처해졌고, 또 그만큼 그의 나폴레옹에 대한 악감정은 커졌습니다.

 

 

 

 

(이 예쁜 시골 도시인 안스바흐는 사실 프로이센 영토 밖에 외따로 떨어진 동네였습니다.  당시 중부 독일 지방은 이렇게 왕가들 간의 거래에 따라 영토가 점점이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은 당장 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유는 크게 2가지였습니다. 
첫째, 지난 편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심리전의 귀재였던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짚어내어 그것으로 프로이센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바로 하노버였지요.  지난 '고향을 잃은 병사들 - King's German Legion' http://blog.daum.net/nasica/6862517 편에서 다루었던 것처럼, 영국 왕실의 개인 영토였던 하노버는 영국과는 달리 대륙에 붙어있는 죄로, 나폴레옹에 의해 잽싸게 점령당했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으로서도 이 점령에 뭐 정당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또 프로이센을 비롯한 독일권 국가들에게 경계심만을 줄 뿐이었으므로 하노버는 나폴레옹으로서는 계륵 같은 존재였습니다.  특히 이번 원정에는 대규모 병력이 필요했으므로, 하노버를 장악하고 있던 베르나도트의 제1 군단도 참전시켜야 했고, 그로 인해 하노버는 어차피 지킬 수도 없는 영토였습니다.  실제로 하노버에서 베르나도트의 군단이 물러나자마자, 영국군과 러시아 군, 그리고 스웨덴 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이 잽싸게 상륙하여 하노버를 차지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런 처치곤란한 하노버를 100% 활용했습니다.  즉, 프로이센의 빌헬름 3세에게 '이번에 중립만 지켜준다면 하노버 그냥 너 가져라'라는 흥정을 걸어온 것입니다.

 

 

 

(이 지도에서 짙은 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니더작센, 즉 하(lower) 작센 지방이고, 그 니더작센 지방의 중심 도시가 하노버입니다.)

 

 

 

(저 중심부에 하노버 영역이 표시된 것이 보이시지요.  바로 그 왼쪽 아래에 하늘색으로 하멜른(Hameln)이라고 표시된 지역도 눈여겨 봐두십시요.  저 아래에 다시 한번 언급이 나옵니다.)



빌헬름 3세는 원래 천성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온건주의자였습니다.  그가 나중에 제4차 동맹 전쟁의 비극적 주인공이 된 것은 전쟁파였던 왕비 루이제에게 휘둘린 결과였지요.  그런데 러시아나 오스트리아 등의 동맹군에 붙는다면 이길지 질지 모르는 전쟁의 참화에 (그것도 저 무시무시한 나폴레옹을 상대로 한 전쟁에) 뛰어들어야 했습니다.  그 댓가로 돌아오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유럽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명분 뿐이었지요.  하지만 전쟁에 끼어들지만 않는다면 저 탐나는 하노버가 공짜로 내 손아귀에 들어온다 ???  이건 빌헬름 3세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습니다. 

 

 

 

(생긴 것부터가 얌전한 모범생 스타일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폴란드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폴란드는 프로이센과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3개 강대국에 의해 분할 점령된 상태였습니다.  러시아의 알렉상드르가 '나폴레옹을 치러 가게 프로이센령 실레지아를 통과하게 해달라' 고 요청해왔을 때, 프로이센 측은 자연스럽게 '저 음흉한 놈들이 통과하는 척 하다가 돌연 프로이센 령 폴란드를 점거할지도 모른다' 라고 의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알렉상드르의 부하들 중에는 그런 계획을 권고하는 사람도 있었고, 알렉상드르는 심사숙고한 뒤에 그 안을 폐기했다고 합니다. 

 

 

 

(빨간 부분이 실레지아입니다.  러시아 군이 바이에른으로 급히 진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지역이자, 모두가 탐을 내는 비옥한 영토였지요.)



하지만 알렉상드르가 직접 빌헬름 3세를 찾아와 나폴레옹이라는 독재자로부터 유럽의 자유와 독립을 지켜내려는 자신의 선의를 설명하자, 이야기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적어도 알렉상드르 본인은 정말로 그런 숭고한 이상에서 제3차 동맹 전쟁에 뛰어든 것이었거든요.  진실은 어디서나 통한다고, 직접 프로이센 왕가의 거주지인 포츠담 (Potsdam)까지 찾아와 설득하는 알렉상드르의 정성에 빌헬름 3세도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게다가 알렉상드르는 달콤한 뇌물도 제공했습니다.  즉, 자신과 먼 친척뻘 되는 영국의 조지 3세을 설득하여, 프로이센도 러시아나 오스트리아처럼 영국으로부터 전쟁 보조금을 받도록 해주고, 또 더 나아가 참전 대가로 하노버를 프로이센에게 떼주도록 하겠다 라는 제안을 한 것입니다.  이런 말을 보면 나폴레옹이 러시아 군을 가리켜 '영국의 황금이 땅 끝 저 멀리서 불러온 야만의 군대'라고 지칭했던 것도 다 근거가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프로이센의 수도는 베를린이지만, 프로이센의 왕가인 호엔촐레른 가문의 궁전 소재지는 베를린 바로 옆동네인 포츠담입니다.  포츠담 궁의 18세기 후반의 모습입니다.)



빌헬름 3세가 이 말을 그대로 믿었다면 그야말로 바보 인증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돈을 줄 당사자인인 영국과 상의도 없이 이루어진 보조금 약속이 실천될 리도 없었고, 결정적으로 영국이 멀쩡한 자기 땅인 하노버를 인심좋게 프로이센에게 던져 줄 리도 만무했습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빌헬름 3세는 알렉상드르에게 프로이센의 총검으로 나폴레옹을 겁박하여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꼬리를 내리고 프랑스로 돌아가도록 해주겠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알렉상드르는 만족하여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2세와 쿠투조프가 있는 올뮈츠로 향했지요.

빌헬름 3세가 알렉상드르에게 약속한 것은 구체적으로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즉, 나폴레옹에게 다음과 같은 휴전 조건을 수락하도록 강요하고, 만약 1달 이내에 그런 조건으로 휴전에 응하지 않는다면 18만에 달하는 프로이센 군이 나폴레옹의 후면을 강타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조건이란 나폴레옹에게 롬바르디아, 리구라아, 파르마를 빼앗긴 사르디니아 국왕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주고, 나폴리 왕국과 네덜란드, 독일 소국가들 및 스위스의 독립을 인정하며, 민치오 (Mincio) 강을 오스트리아의 국경선으로 인정하라는 것이었지요.  말하자면 나폴레옹에게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프랑스 국내로 물러가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런 조건을 수락하며 꼬리를 말아 쥘 리가 없다는 것은 아마 빌헬름 3세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래서인지, 알렉상드르에게 큰 소리를 뻥뻥칠 때와는 다르게, 정작 나폴레옹에게 이런 휴전 조건을 수락하라고 겁박할 사절의 출발은 하염없이 연기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알렉상드르가 오해를 풀겠다며 직접 포츠담까지 찾아왔던 것이 10월 25일이었는데, 그때 양국 정상이 처음 접한 소식이 바로 울름에서의 오스트리아 군 항복이었습니다.  이렇게 전세가 나폴레옹 측의 일방적인 승리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도 나폴레옹에게 굴욕을 강요하는 사절을 보내는 것이 과연 잘하는 짓일지 회의감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나폴레옹을 협박할 사절인 하우비츠 (Christian Graf von Haugwitz) 백작은 11월 중순이 되서야 느릿느릿 출발을 했습니다.  애초에 협박 사절이라고 고른 것이 친불파로 소문난 하우비츠 백작이었다는 사실이 빌헬름 3세의 솔직한 내면을 그대로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하우비츠 백작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프로이센의 국익을 크게 해친 셈이 되었지만, 잘 먹고 잘 살다 갔습니다.)



느릿느릿 오건 득달같이 달려오건, 이런 불쾌한 손님을 맞는 나폴레옹의 마음이 가벼울 리가 없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상대는 18만 병력, 그것도 약해빠진 나폴리 군도 아닌 전체 유럽에 명성이 높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 군이었으니까요.  특히 프로이센의 지정학적 위치는 나폴레옹의 원정군의 후방으로서, 나폴레옹을 프랑스 본토로부터 격리시킬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을 위협하고 있던 것은 카알 대공과 프로이센 군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도 매우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금융 위기였습니다.

이 금융 위기의 본질은 나폴레옹 본인이 자초한 것이었습니다.  20만에 달하는 그랑 다르메 (Grande Armee)를 편성하고 유지하려면 정말 무지막지한 돈이 들어갔습니다.  게다가 그런 병력을 바다 건너 영국으로 보내려면 더더욱 많은 돈이 들어갔습니다.  나폴레옹이야 황제의 위엄을 지켜가며 호령하면 그만일지 모르겠으나, 누군가는 거기에 들어가는 막대한 돈을 만들어내야 했는데, 그 중책을 맡은 것은 재무성 장관이었던 바베-마르부아(François Barbé-Marbois)였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은 중산층 위주의 공평한 과세와 프랑스 중앙 은행 (Banque de France, 자본에겐 조국이 없다 - 나폴레옹과 중앙 은행 이야기 http://blog.daum.net/nasica/6862506 참조)의 설립으로 나름 안정을 찾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파산 직전에서 간신히 안정을 찾았다 뿐이지, 프랑스 은행 금고에 막대한 현금 동원력이 보관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베-마르부아의 초상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으나, 이 양반이 북미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판매했던 바로 그 양반입니다.  그는 이 1805년의 금융 위기를 불러온 실수로 인해 나폴레옹을 큰 위기에 빠뜨립니다만, 결국 '멍청했을 뿐 범죄 의도는 없었다'며 용서를 받습니다.  그냥 재무성 장관 자리를 내놓았을 뿐이었고, 그 이후로도 나폴레옹에게 우대받았습니다.)



그런데 파리 시내 공사 및 대규모 군사 원정 계획으로 쓸 돈은 크게 늘었는데, 들어오는 돈은 뻔했으므로, 바베-마르부아의 속은 타들어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경우에 사람은 쉽게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에 혹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바베-마르부아 같은 금융통도 우브라르 (Gabriel Julien Ouvrard)를 두목으로 하는 일단의 상인들에게 휘말려 어리석은 투기에 돈을 쏟아 부었습니다.  즉, 스페인이 프랑스에 지고 있는 부채 채권을 담보로 프랑스 중앙 은행을 비롯한 여러 은행에서 돈을 꿔서 우브라르에게 퍼주었습니다.  스페인 채권의 담보는 멕시코에서 스페인으로 들여올 금괴와 은괴였는데, 불행히도 (사실은 필연적으로) 영국 해군이 멕시코와 스페인 사이에 버티고 앉는 바람에, 스페인 채권은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렸고, 이로 인해 이 전체 투기판이 흔들려 버렸습니다.  프랑스 중앙 은행을 비롯한 파리 주요 은행 금고에 경화(specie)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사람들은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기 시작했는데, 은행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금화나 은화를 내줄 수 없었으므로 지폐를 찍어서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금화나 은화는 이때 우브라르 일당의 금고 속에 들어있었지요.  금화를 인출해 달라고 했는데 돌아오는 것이 지폐 뿐이자, 파리 금융가는 발칵 뒤집혀 일제히 뱅크 런 (bank run)이 일어났고, 지폐로 된 프랑 화의 가치는 곤두박질쳤습니다.  이로 인해 파리의 유서 깊은 은행인 레카미에 (Recamier) 은행이 파산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금융 공황 사태는 러시아 군과의 전투 못지 않게 심각한 위협이었습니다.  애초에 왕이나 황제를 위협하는 것은 외국과의 패전보다는 경제 위기였거든요.  나폴레옹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조치가 빨리, 매우 빨리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레카미에 은행의 소유자인 자크 레카미에의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부인인 쥴리에뜨 레카미에입니다.  이 부인에 대해서는 소문도 많았습니다.  가령 레카미에와 결혼은 했지만 사실은 부인이 아니라 친딸이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결혼은 했으나 이 둘 사이에는 전혀 성적인 접촉이 없어서, 레카미에 부인은 40대가 될 때까지 진짜 처녀였다고 하고, 또 레카미에 부인이 나중에 프로이센의 왕자로부터 청혼을 받고 자크 레카미에에게 이혼을 요청하자, 자크는 부인의 행복을 위해 순순히 이혼 도장을 찍어주었다고 하니, 정말 그런 소문이 나돌만도 합니다.  저 등받이 없는 소파는 지금도 레카미에 소파라고 불리는데, 저 부인이 좋아해서 애용하던 소파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고 하네요.) 



이렇게 남쪽과 북쪽에서 나폴레옹의 측면과 후방이 군사적으로 위협당하고, 또 본국에서는 금융 위기가 터지는 상황이었지만 그것으로 전부 다가 아니었습니다.  최전선에서 나폴레옹은 심각한 병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쿠투조프를 쫓아가서 들이댈 수 있는 병력은 고작 5만에 불과했습니다.  20만이라는 그랑 다르메가 대체 언제 이렇게 녹아 없어졌나요 ? 

그랑 다르메가 녹아 없어진 것은 나폴레옹 전술의 핵심인 기동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기동력을 살리려면 보급을 포기해야 했고, 보급을 포기한다고 해도 병사들은 먹어야 했으므로 현지 조달 (...이라고 쓰고 약탈이라고 읽습니다)에 의존해야 했는데, 20만명의 배고픈 병사떼는 정말 놀랍도록 많은 음식을 먹어치우고도 항상 배가 고팠으므로 가는 곳곳마다 메뚜기떼처럼 황폐한 사막을 만들어놓기 일쑤였습니다.  문제는 어떤 지역도 (심지어는 부유하기로 소문난 롬바르디아나 중부 독일조차도)  그렇게 많은 병력을 먹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폴레옹의 군대는 항상 대군을 이루지 못하고 좀더 작은 단위로 분산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11월 말, 나폴레옹이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과 대치했을 때 그의 수중에는 고작 5만명 정도의 병력 뿐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나폴레옹에게는 술트의 4군단과 란의 5군단, 뮈라의 예비 기병대, 우디노의 척탄병 사단, 그리고 자신의 근위대 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군단들은 모두 다른 견제 임무 수행이랍시고 인근 지역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가령 베르나도트의 1군단은 보헤미아 접경 지대에, 다부의 3군단은 비엔나에, 네의 4군단은 오스트리아 남부에 주둔하고 있었지요.  그나마 5만명이라도 한곳에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나폴레옹이 그답지 않게 보급 부대를 편성하여 이 5만 병력에게 식량을 지속적으로 공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제 러시아-오스트리아 군이 제자리에 멈춰 섰으니 기동전을 펼칠 이유가 없었거든요.

이런 나폴레옹의 처지는 러시아-오스트리아 군도 훤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제 아무리 나폴레옹이라도 물량 공세에는 장사없다는 생각이 당연히 그들에게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에서 실질적인 결정권을 가지고 있던 것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가 아니라 쿠투조프 장군이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연합군에서는 병력수가 많은 쪽이 상전이었으니까요.  쿠투조프의 기본 전략은 나폴레옹이 가장 두려워 하던 것이자, 병법의 대가 손자도 가장 경계했던 그런 싸움이었습니다.  바로 결전의 회피와 후퇴였지요.  원래 모든 원정군은 속전속결을 원합니다.  보급 측면에서 불리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강노지말 (强弩之末)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아무리 센 쇠뇌로 쏜 화살이라도 천보를 날아간 뒤에는 얇은 비단도 뚫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쿠투조프는 나폴레옹이 가장 원하는 것이 신속한 결전이라는 것과, 자신이 자꾸 후퇴할 수록 싸우지 않고도 나폴레옹 군의 전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쿠투조프는 공공연하게 '갈리시아(Galicia)에 나폴레옹을 묻어버리겠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저 지도 오른쪽 상단에 크라코프 Crakow 및 렘베르크 Lemberg 가 위치한 곳이 바로 갈리시아입니다.  아우스테를리츠, 즉 저기 지도에서 브륀  Brunn으로 표시된 곳에서 동쪽으로 200km 이상 후퇴해야 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도 쿠투조프는 자기나라 땅인 우크라이나 깊숙히까지 후퇴하겠다는 이야기는 안했던 것을 보면... 남의 나라 땅이라고 너무 막말을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건 러시아적인 스케일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였습니다.  갈리시아라고 하면 오늘날 폴란드 남부 우크라이나 쪽에 가까운 지역입니다.  당시 대제국이던 오스트리아의 거의 동쪽 끝부분이지요.  세상에 어떤 군주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온나라를 홀라당 적에게 넘겨주고 도망친다는 계획에 대해 찬성할 수 있겠습니까 ?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2세는 쿠투조프의 계획에 당연히 반대했고, 또 러시아나 오스트리아 군의 젊은 장교들은 모두 쿠투조프의 패배주의적인 전술에 대해 깊은 반감과 경멸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특히 북스게브덴의 증원군과 올뮈츠의 수비군이 합류하여 8만5천의 대군이 되자, 고작 5만의 나폴레옹 군에게 이리저리 쫓겨다니는 모습이 영 거북스러워졌습니다.  이런 상황에 연합군 캠프에 나타난 것이 짜르 알렉상드르였습니다.

 

 

 

(이렇게 대머리가 약간 벗겨진 모습만 봐서 그런데, 당시 그의 나이 약관 28세 !)



알렉상드르는 프로이센과의 동맹을 굳건히 맺고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또 그의 나이도 당시 28세로서, 젊다는 나폴레옹보다도 8살이나 어렸지요.  당연히 두려울 것이 없고, 온 유럽이 지켜보는 가운데 빛나는 영광을 차지하고자 하는 욕심이 마음 속에 가득했습니다.  그런 그가 올뮈츠에 도착해서 본 것은 싸우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젊은 장교들과 8만이 넘는 연합군, 그리고 빨리 싸우자고 졸라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 프란츠 2세와 함께, '그냥 후퇴하죠 뭐' 라고 심드렁하게 내뱉는 늙고 뚱뚱한 쿠투조프였습니다.  당연히 알렉상드르는 싸우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상대는 나폴레옹이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가장 경험도 많고 믿을 만한 장군이었던 쿠투조프는 후퇴 작전을 권했습니다.  또 생각해보면 굳이 전략가가 아니더라도, 여기서 싸우는 것보다는 폼은 안 나더라도 후퇴하는 것이 더 확실하게 승리에 다가서는 길이라는 것이 그럴싸 하긴 했습니다.  누가 보기에도 프로이센이 정말 참전하기 위해서는, 또 카알 대공의 군대가 나폴레옹의 측면을 위협하기 위해서는 좀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차에 11월 25일, 나폴레옹으로부터 백기를 든 사절 하나가 찾아옵니다.  최근 장군으로 승진한 나폴레옹의 측근 사바리 (Anne Jean Marie René Savary) 였습니다.

 

 

 

(일설에는 하필 앙기앵 공작의 피가 손에 묻은 사바리를 사절로 보낸 것 자체가 나폴레옹이 알렉상드르를 엿먹이려는 의도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알렉상드르가 반-나폴레옹으로 돌아선 결정적 계기가 앙기앵 공작의 사법 살인 사건이었거든요.)



사바리가 들고온 메시지는 간단했습니다.  "우리 이러지 말고 휴전한 뒤에 말로 하자."  알렉상드르는 '오호, 이것 봐라?'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하의 나폴레옹이, 그것도 빨리 싸우고자 할 줄 알았던 나폴레옹이 휴전을 청한다 ?  이렇게 놓고 보니 나폴레옹의 처지가 몹시 불리해 보이기는 했습니다.  분명히 가용 병력은 연합군 쪽이 더 많았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나폴레옹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들 뿐이었습니다.  알렉상드르는 나폴레옹의 약한 모습 앞에 용기가 치솟았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프란츠 2세가 11월 27일, 별도로 사절을 나폴레옹에게 보내 휴전을 요청하자, 나폴레옹은 그에 대해 그답지 않게 무척 살가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다음날인 11월 28일, 알렉상드르는 혐불파로 소문난 그의 측근인 젊은 돌고루코프 (Mikhail Petrovich Dolgorukov) 백작을 보내 아주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유럽 전역의 점령지에서 물러날 것, 특히 네덜란드를 독립시키고, 벨기에도 네덜란드에게 되돌려 줄 것'이라는 가혹한 조건의 휴전을 제안했습니다.  이 돌고루코프 백작의 보고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화를 내기보다는 무척 근심이 많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모든 첩보를 접하고, 알렉상드르는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이 모든 것은 물론 나폴레옹의 계략에 불과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누구보다도 속전속결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가 두려워 하는 것은 쿠투조프가 평소의 신념대로 하염없이 계속 후퇴를 거듭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이대로 나갔다가는 보급선이 늘어지고 병력이 분산되어 천보를 날아간 화살 꼴이 되기 쉽상이었으니까요.  특히 그를 불안하게 만든 것은 프로이센의 태도였습니다.  11월 29일, 꾸몰거리던 프로이센의 사절 하우비츠 백작이 드디어 나폴레옹의 병영에 도착하여 나폴레옹과 4시간 동안이나 긴 독대를 했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당사자인 하우비츠 백작은 그 회담 내용을 자기 멋대로 왜곡하여 발표할 이유가 충분히 있었으므로 그의 보고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하우비츠가 전달한 프로이센의 휴전 조건에 다 동의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내건 조건은 딱 2가지, 즉 이미 하노버를 점거한 영국-러시아-스웨덴 연합군이 프랑스 령 네덜란드를 침공하지 않도록 프로이센이 중재할 것, 그리고 프로이센이 포위하고 있는 하멜른 (Hameln) 요새에 주둔한 프랑스 군 수비대에게 프로이센이 식량을 공급해줄 것 뿐이었습니다.  사실상 프로이센에게 두손 들었다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온 것은 나폴레옹이 하우비츠를 구워 삶아 프로이센의 준엄한 최후 통첩에 가까운 통지에 대해 제대로 된 답변을 회피했다는 것입니다. 

 

 

 

(콜랭쿠르 장군입니다.  나중에 그는 러시아 대사를 지내며 나폴레옹 내각에서 러시아 전문가로 통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동생이 러시아 원정 중 보로디노 전투에서 전사하는 불행을 겪기도 했지요.)

 


일단 회담을 마치고 나와 숙소로 돌아오자, 곧 콜랭쿠르 (Armand Augustin Louis de Caulaincourt)가 찾아와 '곧 전투가 예상되므로 사절의 안전을 위해 비엔나로 모시겠다, 거기서 탈레랑과 구체적인 휴전 조약에 대해 협의해달라'며 어리둥절한 그를 마차에 태워 보냈습니다.  비엔나에 도착하자 정말 탈레랑이 기다리고 있기는 했습니다만, 탈레랑은 그를 접대만 할 뿐 구체적인 휴전 조약 따위에 대해서는 '제게는 권한이 없습니다' 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3일 뒤, 역사에 길이 남을 아우스테를리츠의 태양이 떠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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