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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아우스테를리츠의 태양

by nasica-old 2013.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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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중앙 프라첸 고지를 강력한 방어선으로 삼고 프랑스 군의 우익, 즉 남쪽을 집중 공략하는 러시아 군과, 이를 역이용하여 러시아 군의 중앙을 돌파하려는 나폴레옹의 '동상이몽'을 보셨습니다.   자신의 우측이 약한 것처럼 보여 줌으로 그쪽으로 적의 병력을 집중시키고 또 그를 역이용하는 것은 좋았으나, 나폴레옹의 이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적의 작전을 저지하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우익은 약해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약했습니다.

 

 

 

(이것이 12월 1일, 아우스테를리츠 바로 전날 밤의 병력 배치도입니다.  거의 텅 비어있는 프랑스 우익 쪽으로 강력한 연합군의 좌익이 이동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지난 편에서 설명드렸듯이, 나폴레옹이 자신의 우익을 약하게 한 것은 이 지역이 연못과 작은 강 (골트바흐 Goldbach), 그리고 조콜니츠 (Sokolnitz)와 텔니츠(Telnitz) 등의 마을 건물들이 얽혀 있어서 방어에 좋은 지역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곳의 방어를 맡고 있던 것은 술트 원수의 제4 군단 휘하에 있는 르그랑 (Claude Juste Alexandre Legrand) 장군의 제3 사단이었습니다.  르그랑의 사단에는 6개 연대, 약 5~6천명의 병력이 있었습니다만, 이곳으로 집중되는 북스게브덴 (Frederick William Buxhowden) 휘하의 키엔마이어 (Michael von Kienmayer)와 랑제론(Louis Alexandre Andrault de Langeron)의 도합 2만에 달하는 병력을 막아내기에는 확실히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르그랑의 연대들은 치열한 전투 끝에 큰 피해를 입고 조콜니츠와 텔니츠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이날 다부, 프리앙과 함께 프랑스 군의 '모루' 역할을 하며 고생을 했던 르그랑 장군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때 연합군 측에게는 뜻 밖에도, 남서쪽에서 새로운 병력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비엔나에 주둔하고 있다던 다부의 제3 군단 병력들이었습니다.  제3 군단이라고 하면 엄청난 대군이 몰려온 것 같지만, 사실 이들의 병력은 그렇게 많지 않은 약 5천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비엔나를 텅텅 비워두고 올 수가 없었고, 또 110km의 거리를 걸어서 48시간 만에 주파해야 했으므로, 행군 실력으로 정평이 난 루이 프리앙 (Louis Friant) 장군의 제2 시단과, 기병대 특유의 기동력을 살릴 수 있는 제4 용기병 사단만을 끌고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그 전날 밤에 이미 인근 레게른 (Raigern) 마을에 도착하여 야영을 했고, 새벽 5시에 다시 출발하여 오전 9시 경에 조콜니츠/텔니츠의 격렬한 전투 현장에 돌입했던 것입니다. 

 

 

 

(12월 2일 전투 당일 오전 9시의 모습입니다.  텅 비어 있던 프랑스 군의 우익으로 다부와 프리앙이 재빨리 달려들어가고, 그와 함께 중앙에서는 술트의 제4 군단이 프라첸 언덕으로 역사적인 진격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직 북쪽에서 란과 바그라티온은 전투를 시작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들의 증원에 힘입어 프랑스 군은 다시 조콜니츠와 텔니츠를 탈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부의 도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익을 지키는 프랑스 군은 1만 남짓한 병력에 불과했습니다.  이미 투입된 2만의 병력에 독토로프 (Dmitry Dokhturov)장군의 1만3천 병력이 추가로 투입되었고, 다부와 르그랑, 프리앙이 지휘하는 프랑스 군은 조콜니츠와 텔니츠에서 그야말로 악전고투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끝끝내 이 마을들에서 완전히 쫓겨나지는 않았고, 중앙의 나폴레옹에게 소중한 시간을 벌어다 주었습니다.  이들의 분전은 오후까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최고 존엄'도 아닌 평범한 인간 주제에 다부와 함께 '우리 장군님 축지법을 쓰신다'라는 칭송을 받은 루이 프리앙 장군입니다.  알고보면 프리앙은 자신의 상관인 제3 군단장 다부와 동서지간이었습니다.  다부는 그의 2번째 부인인 Louise Aimée Julie Davout와 금슬이 좋기로 대단히 유명했는데, 이 루이즈 에메 줄리의 처녀 시절 성은 Leclerc 였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나폴레옹의 여동생 Pauline의 남편인 르클레르의 여동생이었던 것입니다.  아마 이 루이즈에게는 여동생 (또는 언니?)가 있어서, 프리앙과 결혼했던 모양이지요.)

 

 

한편, 중앙에서는 나폴레옹이 서쪽 주란 (Zuran) 고지에 올라 이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이 주란 고지의 높이는 약 270m로서, 그 전날 적에게 내준 프라첸 고지 (약 12m)보다 훨씬 높아서 나폴레옹의 전황 파악에는 훨씬 더 좋았던 것입니다.  그는 적의 중앙인 프라첸 고지에서 속속 우익의 조콜니츠/텔니츠 방향으로 병력이 이동해 내려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오전 8시 30분 경, 나폴레옹은 술트를 불러 그의 제4 군단이 프라첸 고지에 기어오르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를 물었습니다.  술트는 '20분'이라고 답했고, 나폴레옹은 15분 후 진격을 시작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때 그는 아우스테를리츠의 명언인 '이번에 한방 제대로 먹이면 전쟁 자체가 끝난다'(One sharp blow, and the war is over)라고 술트에게 말하며 그의 분전을 부탁했습니다.

 

 

 

(주란 고지 정상에서 내려다 본 아우스테를리츠 전장입니다.  주란 고지는 여기서 나폴레옹이 전투를 지휘한 것을 기념하여 이렇게 기념비가 서있습니다.  아마 이것만으로는 충분한 관광 자원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체코 정부는 이 언덕 꼭대기의 이 기념비가 서있는 작은 땅조각을 '프랑스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선언했습니다.   프랑스 정부하고 이야기는 하고 나서 그렇게 선언했는지 모르겠어요.  그 선언이 관광객 유치에 얼마나 더 도움이 되었는지는 더욱 모르겠습니다.)

 

 

술트의 제4 군단 내에서도 정예병력으로 소문난 생틸레르 (Louis-Vincent-Joseph Le Blond de Saint-Hilaire)의 제1 사단과 방담 (Dominique Joseph Rene Vandamme)의 제2 사단이 프라첸을 향하여 착착 진군해 들어가는 동안, 프라첸 언덕 위의 러시아 군은 이들의 진격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연 같지만 사실은 필연적으로, 프라첸 언덕 아래에는 이 지역 특유의 아침 안개가 자욱히 끼여 있었거든요.  이는 이 일대를 며칠 동안 면밀히 관찰했던 나폴레옹의 계산에 들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가 아침 8시 30분 경에 술트에게 진격 명령을 내린 것도, 이 안개를 계산한 것이었습니다. 

 

 

 

(생틸레르 장군입니다.  그의 이름은 한국식으로 읽으면 성-일레르인데, 프랑스 어의 연음 법칙에 의해서 생-띨레흐 라고 읽는 것이 맞습니다.  흠... 맞을 겁니다... 이 양반은 기병대 대위의 아들로 태어난 하급 귀족이었습니다.  당시 귀족이라는 신분은 군 내에서 오히려 승진의 걸림돌로 작용했는데, 그것을 뚫고 용케 장군까지 올라온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지요.  그는 매우 용감한 군인으로서, 이날도 프라첸 고지에서 심한 부상을 입었습니다만 끝내 전투 현장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지휘를 계속 했습니다.  뒤에 보게 되실 러시아의 북스게브덴과는 아주 비교되는 모습이었지요.  그는 1809년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란처럼 적의 대포알에 다리가 뜯겨나가는 참변을 겪고 전사합니다.  나폴레옹은 그를 팡테옹 란 옆자리에 안장해주지요.)

 

 

이들이 저지대의 안개를 뚫고 마침내 프라첸 언덕 기슭을 기어오르기 시작했을 때, 마침 구름이 걷히면서, 그 유명한 '아우스테를리츠의 태양'이 이 프랑스 사단들이 밀물처럼 장중하게 전진해오는 모습을 극적으로 비추었습니다.  이 모습을 언덕 위에서 비로소 발견한 러시아의 짜르 알렉상드르는 대경실색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계산에 없었던 것입니다.  알렉상드르가 공황 상태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할 때,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의 지위를 빼앗기고 다소 시무룩 해있던 쿠투조프가 마침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대번에 나폴레옹의 전체 전략을 눈치챘고, 여기서 물러설 경우 연합군 전체가 좌우로 분단되어 각개 격파당할 위기에 처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프라첸 정상을 지키던 콜로브라트 (Johann Kollowrat) 장군의 2만5천 병력을 동원하여 생틸레르와 방담의 사단에 맞서 격렬한 방어전을 펼쳤습니다.  

 

 

 

(콜로브라트는 러시아가 아닌 오스트리아 장군입니다.  당시 유럽 사회는 국적보다는 계급을 더 중시하는 '국제적' 분위기가 지배했으므로, 이날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 편성에서도, 오스트리아 장군들이 러시아 군을 지휘하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서로 말이 통했냐고요 ?  고위 장교들끼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랑스어로 이야기했겠지요.)

 

 

아직 연합군에게는 승산이 많았습니다.  허를 찔렸다고는 해도, 지금 프라첸 고지를 기어오르는 프랑스 군은 2개 사단 약 1만5천으로서, 당황한 쿠투조프의 병력의 60%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때 나폴레옹은 왜 고작 2개 사단만을 올려 보냈을까요 ?  그에 대해서는 명확한 이유가 전해지지 않습니다.  아우스테를리츠 전투가 벌어진 프라첸 고지 일대는 상당히 평탄한 평야 지대로서, 지형상 한꺼번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이 그 정도로 제한될 이유가 없었습니다.  병력이 부족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익에 포진한 란의 제5 군단은 그렇다치고, 중앙에는 우디노의 척탄병 사단 뿐만 아니라, 베르나도트의 제1 군단 전체, 그리고 뮈라의 예비 기병대 전체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본인의 강력한 근위대는 말할 것도 없었지요.  어쩌면 그는 지금 올려보낸 2개 정예 사단의 실력을 믿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생틸레르와 방담 사단의 병사들은 나폴레옹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려 1시간 동안의 피튀기는 격전 끝에, 마침내 훨씬 수가 많았던 콜로브라트의 부대를 격파하고 정상에 거의 다 도달했습니다.  무려 1시간 !  이 글을 쓰는 저나 읽으시는 여러분 모두 배낭을 짊어지고 샤를비유 (Charleville) 플린트락 머스켓 소총에 끊임없이 재장전 해가며 1시간 동안 대오를 갖춘 채 거의 2배에 달하는 적과 전투를 벌일 경험은 없었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힘든 중노동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히 이때, 도주하는 러시아 병사들의 등짝을 바라보며 한숨 돌리던 이들은 완전 녹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친 프랑스 병사들 앞에, 다시 한 무리의 싱싱한 오스트리아 군이 나지막한 프라첸 언덕의 경사면을 올라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것은 나폴레옹의 계획에는 전혀 없던 시나리오였습니다.

 

 

 

(훈련 안받은 사람이면 권투 1라운드 3분을 채우는 것도 어려울 만큼, 원래 싸움이라는 것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그래서 미군에서도 정상인이 하루 1500 kcal의 식사를 하는데 비해, 전투식량인 MRE는 한끼가 1250 kcal가 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고수는 언제나 회심의 일격을 날릴 카드를 소매 밑에 감춰둔다더니, 쿠투조프가 뭔가를 준비해 둔 것이었을까요 ?  아니었습니다.  쿠투조프는 이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계획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이 계획에 없던 오스트리아 부대는 원래 랑제론 백작과 함께 조콜니츠/텔니츠에서 격전을 벌어고 있어야 하는 부대였습니다.  지난 편에 잠깐 언급을 했습니다만, 이날 새벽, 바이로터 대령의 복잡하고 심오한 작전 계획에 따라 부대들이 여명 속에 이리저리 이동할 때, 북쪽으로 향하던 리히텐슈타인 (Johann I Joseph, Prince of Liechtenstein) 대공의 기병대가 길을 막는 바람에 이 부대의 남진이 지연되었던 것입니다.  새벽에 그 혼란이 벌어졌을 때, 연합군 간부들은 큰일 났다고 낙담했지만, 이제 그 혼란 덕분에 생각지도 않은 횡재수를 누리게 된 것이었지요.

 

이 오스트리아 부대는 사실 정예 부대와는 거리가 아주 먼, 주로 신병들로 구성된 부대였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뒤로 쳐진 것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이들은 놀라운 용기와 투지를 발휘하여 기진맥진한 생틸레르 사단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생틸레르 사단은 이 애송이 오스트리아 부대에게 밀려 조금씩 경사면 아래쪽으로 뒷걸음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설상가상으로, 생틸레르 사단의 탄약이 거의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원래 당시 병사들은 전투에 나설 때 일인당 60발의 탄약포 (cartridge)를 소지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2~3방의 일제 사격 후 총검 돌격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 60발이 부족한 경우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무려 1시간 동안 프라첸 고지 쟁탈전을 벌이느라, 대부분의 병사들이 탄약을 다 써버린 것이었지요.  탄약이 떨어진 머스켓 소총은 사용하기 거추장스러운 창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생틸레르 사단에게 남은 길은 후퇴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의 종이 탄약포의 모습과 그 장전 방법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폴레옹이 특별히 프라첸 고지 탈환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괜히 생틸레르-방담 사단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놀랍게도 생틸레르 사단의 병사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화약으로 더러워지고 뜨겁게 달아오른 머스켓 총에 총검을 꽂은 채 적을 향해 돌격을 감행한 것입니다.  원래 경험없는 신병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총알보다는 시퍼런 긴 총검에 더 겁을 집어 먹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당시의 라인 배틀에서, 괜히 2~3방의 일제 사격 이후 총검 돌격을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워낙 사거리가 짧고 재장전 속도가 느리다보니, 근접 전투에서는 총으로 쏘는 것보다는 차라리 뛰어가서 적을 총검으로 찌르는 것이 더 빨랐던 것입니다.  이 뜻하지 않은 프랑스 군의 돌격에, 오스트리아 군은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한편, 방담 사단은 프라첸 고지 북쪽의 슈타레 비노흐라디 (Staré Vinohrady, 오래된 포도밭)에서 연합군 수비대를 몰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프라첸 고지는 완전히 프랑스 군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고, 연합군은 완전히 남북으로 양분되어 버렸습니다.  나폴레옹의 작전이 성공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전투 종료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전투의 꽃은 총검 돌격.  우라~ !   근데 이 그림은 아우스테를리츠 그림은 아닙니다...)

 

 

 

나폴레옹은 즉각 지휘 본부를 주란 고지에서 프라첸 고지로 옮기고, 후방에서 대기하던 베르나도트의 제1 군단에게 방담 사단을 지원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매우 적절한 조치였습니다.  중앙이 돌파당한 위기를 보고 짜르의 러시아 황실 근위대가 출동한 것입니다.  짜르의 근위대는 짜르 알렉상드르의 동생인 콘스탄틴 대공 (Grand Duke Constantine Pavlovich)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지친 방담 사단에게 대대적으로 들이닥쳤습니다.  방담 사단은 정예 사단답게 러시아 근위 보병들의 1차 공격을 막아 냈으나, 그 뒤를 이어 들이닥친 근위 중장기병대는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큼직한 검을 휘두르며 달려든 러시아 최강의 기병대는 방담 사단 제4 연대의 1개 대대를 철저히 격파하고 그 대대기를 탈취했습니다.  이것이 아우스테를리츠에서 프랑스 군이 상실한 유일한 군기였습니다. 

 

 

 

(콘스탄틴 대공의 모습입니다.  원래 그의 아버지 파벨 1세는 알렉상드르가 아닌 이 콘스탄틴을 황태자로 책봉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황태자 행세를 하지 않았고, 또 파벨 1세가 암살된 이후에도 황위 등극을 전혀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군사적으로 유능했는가 하면 그것도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즉각 자신의 근위 엽기병(chasseurs)과 기마척탄병 부대를 내려보냈습니다.  러시아의 황실 근위대와 프랑스 황실 근위대가 드디어 정면 충돌한 것이지요.  물론 상황은 아직 싱싱했던 프랑스 황실 근위대가 절대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압도적인 프랑스 근위 기병대의 돌격에 밀려난 러시아 근위 기병대는 퇴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콘스탄틴 대공이 마지막 예비대인 근위 코작 기병대와 중장 기병대를 투입하여 다시 프랑스 근위 기병대를 수적 열세로 몰아넣고 치열한 난투극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저울은 나폴레옹 쪽으로 확연히 기운 상황이었습니다.  러시아 측은 더 이상 투입할 예비대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고, 나폴레옹은 투입할 병력이 차고도 넘치는 상태였거든요.

 

 

 

(이것은 흑해 출신의 코삭 근위대의 모습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렇게 기병들 간의 난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드디어 베르나도트 휘하 드루에 (Jean-Baptiste Drouet) 장군의 보병 사단이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프랑스 기병대가 이 보병들 뒤로 잠깐 대피하여 숨을 돌리는 사이, 보병들이 지친 러시아 기병들에게 머스켓 일제 사격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함께, 나폴레옹이 내려보낸 근위 기마 포병대가 러시아 근위 기병과 근위 보병대에게 근거리에서 산탄포를 쏘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포격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러시아 근위대는 무너져 내려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무질서하게 후퇴하면서 그만 러시아 근위 보병대 한가운데로 뛰어 들고 말았습니다.  결국 보병대까지 대혼란을 일으키며 러시아 근위대는 완전히 패퇴하여 총퇴각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전장에서 가장 큰 피해는 전투 자체가 아니라, 패주할 때 등 뒤에서 추격해 오는 기병대에 의한 소탕전에서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이 중앙부에서의 추격전에서 프랑스 군은 그다지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일단 기병대의 숫자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아직 프랑스 군은 군마를 많이 확보하지 못하여, 일부 용기병(dragoon)들은 기병이면서도 말을 지급받지 못해 보병으로 싸울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이후 오스트리아의 군마를 대량으로 노획하면서 획기적으로 개선되기는 했습니다만, 당장 이때는 프랑스 기병대는 숫적으로 소수였습니다.  그나마 있는 근위 기병대도 방금전 강적인 러시아 근위 기병대와의 힘에 부친 혈전으로 인해 많이 지친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패주하는 러시아 군의 뒤를 쫓기는 했습니다만, 불과 400~500m 만을 추격했을 뿐, 군마들이 지쳐 더 이상의 추격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의 부대에게 도주하는 적들의 추격을 명했으나, 전원 보병으로 이루어진 베르나도트의 부대로서는 추격은 어디까지나 시늉일 뿐, 별다른 전과 확대는 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군의 피해는 컸습니다.  마지막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쿠투조프는 큰 부상을 입었고, 그의 사위인 페르디난트 (Ferdinand von Tiesenhausen)는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도망칠 때 등 뒤에서 이것들이 시퍼런 칼을 뽑아들고 쫓아오면... 그야말로 죽음입니다.)

 

 

추격할 기병이 없었다는 대목을 읽으시고 조금 놀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베르나토트의 제1 군단에는 마렝고 전투에서 맹활약을 보여주었던 켈레르만 (François Etienne de Kellermann) 장군의 경기병 사단이 배속되어 있었고, 또 뮈라의 예비 기병대도 아직 아무런 활약을 안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이들도 무척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살펴보지 않고 있었떤 북쪽, 즉 프랑스 군의 좌익에서였습니다.

 

생틸레르와 방담이 프라첸 고지 위에서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고 있을 때,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전장인 북쪽에서는 당대의 공중전이라고 할 수 있는 기병전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새벽에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해 간 리히텐슈타인 대공의 기병대가 란 원수의 제5 군단의 측면을 덮친 것입니다.  여기서는 원래 편제상으로는 베르나도트의 제1 군단 소속이지만 효율성을 위해 뮈라의 예비 기병대에 배속되었던 켈레르만 장군의 경기병대가 이를 막아섰습니다.  당연히 이 곳에서도 프랑스 기병대는 숫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켈레르만의 경기병들은 놀라운 투지를 발휘하며 1시간 넘게 리히텐슈타인 기병대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다가, 아무래도 전황이 불리해지자 란의 제5 군단이 쳐 준 보병 방진 뒤로 질서있게 퇴각했습니다.  지친 것은 리히텐슈타인 부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기병전이라면 유럽 최고라고 자부하던 뮈라의 짐승스러운 전투 감각이 빛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이때다 싶은 순간 아껴왔던 프랑스 최강 기병대인 흉갑기병대 (cuirassiers)를 투입했습니다.  이들의 투입으로 리히텐슈타인은 결국 울름에서의 분풀이도 못하고 결국 말머리를 돌려 도주해야 했습니다.  (경기병이니 중기병이니 엽기병이니 하는 기병 종류에 대해서는 나폴레옹 시대의 기갑부대 - 흉갑 기병 http://blog.daum.net/nasica/6862374 참조)

 

 

 

(프랑스 군의 자랑인 흉갑 기병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흉갑 기병의 진짜 자랑은 번쩍이는 흉갑과 투구보다는 병사나 말이나 다 커다란 위너들이었다는 점이지요.)

 

 

북쪽에서는 리히텐슈타인의 기병대와 함께, 그루지아의 상남자 바그라티온 (Pyotr Ivanovich Bagration) 대공이 이끄는 러시아 보병들이 프랑스의 열혈남아 란 (Jean Lannes)의 제5 군단과 격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남자'들의 대결에서, 바그라티온은 시작부터 재미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란의 측면으로 돌기 위해 크게 북쪽으로 우회하여 진격하려 했으나, 그가 의도한 경로에는 약 210m 정도 높이의 작은 언덕인 상통 (Santon, 성자의 묘라는 뜻의 불어) 언덕이 있었고, 여기에는 이 언덕의 전술적 중요성을 파악하고 있던 란이 이미 보루를 쌓고 대포까지 올려 놓은 상황이었습니다.  이 상통이라는 이름은 원래 이 언덕의 진짜 이름이 아니라, 이 언덕 위에 있던 작은 탑을 보고 이집트 방면군 출신의 고참병들이 '마치 이집트에서 본 회교 사원의 첨탑 (minaret) 처럼 생겼다' 라며 제멋대로 붙인 별명이었습니다. 

 

아무튼 바그라티온은 이 고지 점령을 목표로 호기 있게 덤벼들었으나, 위에서 아래로 내리 꽂는 프랑스 포병대의 맹포격과 프랑스 경보병 연대의 일제 사격을 받고 그만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러시아 군 포병대가 자리를 잡은 곳 뒤까지 도망쳐 갔고, 이를 추격하던 란이 이번에는 반대로 러시아 포병대의 맹렬한 반격을 받고 저지되었습니다.  하지만 란의 포병대가 질적으로 더 우수했습니다.  란의 포병대는 큰 피해를 무릅쓰고 러시아 포병대를 골라 제압 사격을 했고, 마침내 러시아 포병들을 제거하거나 후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포병대 뒤에 숨어 있던 러시아 군은 포병대가 무너지고 란의 제5 군단이 밀물처럼 진격해오자, 보기 흉하게 전선을 버리고 도주했습니다.  이 곳에서도 의외로 러시아 군의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았습니다.  무질서한 추격전을 벌이다 적의 역습을 받을 것을 걱정한 뮈라가 추격하려는 란을 막아섰기 때문이었습니다. 

 

 

 

(포병은 육군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가장 숙련도를 필요로 하는 병종이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도 바리케이드에서 앙졸라가 정부군의 어떤 젊은 포병 하사관을 사살하려고 할 때 그 포병 하사관의 모습을 '똑똑하고 유능한 젊은이'로 묘사하지요.)

 

 

전과가 가장 컸던 것은 바로 남쪽이었습니다.  하긴 이쪽에 연합군 병력이 가장 많이 투입되었으니, 죽일 적도 여기가 가장 많았지요.  랑제론과 독토로프, 키엔마이어 등이 끈질기게 저항하는 다부에게 막혀 좀처럼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와중에, 이제 중앙은 물론 북쪽까지 상황 정리를 끝낸 나폴레옹이 오후 3~4시 경, 남쪽으로 전 병력을 투입한 것입니다.  이제 압도적인 병력으로 다부를 공격하던 연합군은, 갑자기 북쪽에서 측면을 강하게 때려오는 프랑스 군의 공격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오히려 2방향에서 협공을 받게 된 연합군은 이미 탄약도 거의 바닥난 상황이었습니다.  주로 평지에서 대오를 짜고 라인 배틀을 벌이던 중앙이나 북쪽과는 달리, 건물이나 담벽 뒤에 의존하여 사격전을 많이 수행했던 남쪽에서는 훨씬 더 빨리 탄약이 떨어졌던 것이지요.  상황이 이렇게 되자, 숫적 우세를 가진 상황에서도 프랑스 군을 어쩌지 못하던 연합군은 순식간에 더욱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원래 이 남쪽 방면의 지휘권은 러시아의 북스게브덴 (Friedrich Wilhelm von Buxhoeveden) 장군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양반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것 외에는 쓸 모가 하나도 없는 양반으로서, 전투 현장에서 술을 마시며 부하 장군들에게 알아서 전투를 전개하도록 해놨다가, 상황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듣자 만취한 상태에서 아무런 지시도, 지휘권 이양도 없이 그냥 도주해버렸습니다.  결국 랑제론이나 키엔마이어는 승리가 목표가 아니라 피해 최소화가 더 중요하다고 보고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키엔마이어 휘하에 있던 오라일리 (O'Reilly) 경기병대가 후퇴하는 연합군의 뒤를 어느 정도 착실하게 지켜 주었기에 이들은 전멸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해는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 기병대의 분전...  물론 아우스테를리츠에서의 모습은 아닙니다.  프랑스 군이 썰리고 있군요.)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라고 하는 부분도 여기서 벌어집니다.  '우리가 졌다' 라는 소리가 들리자, 당황한 러시아 군은 프랑스 군이 압박해오는 북쪽과 서쪽을 제외한 모든 방향으로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도주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 약 5천은 남쪽에 있는 얼어붙은 자츠샨 (Satschan) 연못 위로 가로질러 도주했습니다.   이렇게 도망가는 적을 향하여 프랑스 군은 포격을 퍼부었고, 가뜩이나 수천명이 대포까지 끌고 도주하느라 무리가 갔던 빙판이 이 포격에 영향을 받아 깨져 버렸습니다.  이 연못은 사실 물에 빠져 죽을 깊이는 아니었습니다만, 워낙 날이 추웠고 병사들도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격전에 시달리느라 지쳤던 까닭에, 많은 병사들이 차가운 연못 물에 빠져 쇼크사를 당했습니다.   대포들이 수몰된 것은 물론이고요.

 

 

 

(구글을 열심히 뒤져보니 이렇게 보기 싫은 사이트 문자가 새겨진 그림만 하나 있더군요.  그나저나 그 Satschan 은 자스찬이라고 읽는 거 맞나요 ?)

 

 

 

이 연못에서 얼음이 깨진 장면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습니다.  일설에는 나폴레옹이 연못 위로 도주하는 적과, 그들을 노리는 프랑스 군의 포격을 보고 "사람이 아니다, 얼음을 쏴라 !" 라고 명령하여 러시아 군을 더욱 효과적으로 수몰시켰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그건 너무 미화된 이야기라서 사실로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이 설에 따르면 이날 연못에 빠져 죽은 러시아 군의 시체만도 2천구가 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에서는, 얼음이 깨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프랑스 군의 포격보다는 러시아 군 수천명이 대포까지 끌고 얼음 위를 건너다가 발생한 '안전 사고'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물에 빠진 러시아 병사들 중 상당수가 프랑스 군 병사들에 의해 구조되었다고 하고, 또 전투 종료 며칠 후 나폴레옹의 명령에 의해 이 연못 물을 전부 다 퍼내고 보니 사람 시체는 2~3구 뿐이고 말의 시체가 오히려 150여구 정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전설'이 남게 된 것은 소중한 역사 자료가 될 전투 보고서에 '손질' 하기를 좋아하던 나폴레옹의 못된 버릇과, 상대의 천재성이 뛰어날 수록 패전에 대한 책임이 얇아진다는 현실을 직면한 러시아 짜르의 '체면 살리기'가 결합된 결과라고 합니다.

 

전투 결과는 당연히 프랑스 군의 일방적 승리였습니다.  프랑스 군은 총 7만2천, 연합군은 총 8만5천이 있었는데, 프랑스 군의 피해는 전사/부상/포로 다 합해서 8천명 가량에 군기 1개를 상실한 것에 비해, 연합군은 1만5천의 전사/부상 외에도 1만2천의 포로,  180문의 대포, 50개의 군기를 잃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천재성이 드러난 대승이라는 명성에 비해, 의외로 연합군의 피해가 그다지 크지 않다고요 ?  원래 지상 전투에서는 피해가 40%를 넘기면 '전멸'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때 연합군의 피해는 전체의 30%를 넘기는 것으로서, 매우 큰 피해인 것이 맞습니다.  특히, 당시 전투의 승패는 탈취한 군기 및 대포의 숫자로 상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그 숫자에서 연합군은 일방적인 패배 이후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친 것이 맞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때 연합군이 전멸을 면한 것은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프랑스 군에 기병대의 숫자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번 전쟁에서 노획한 군마들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군마 육성에 대해서는 나폴레옹의 수송 엔진 - 말 이야기 http://blog.daum.net/nasica/6862428 를 참조하십시요.)

 

 

이로써 아우스테를리츠의 하루가 저물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번 편은 쓰면서 저 스스로는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았어요.  워낙 유명한 전투이고, 나폴레옹의 머리 속에서 이미 전투 시작부터 결과가 다 정해져 있었던 싸움이었거든요.  솔직히 마치 '져주기로 짜고 치는 축구 경기'를 보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지루해하는 제 모습이 제 글에 반영이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다음 편은 좀더 재미있으실 겁니다.  제가 본 전투 이야기보다 더 좋아하는, 그 후일담 이야기가 이어지거든요.  약 2주 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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