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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동상이몽 - 아우스테를리츠의 새벽

by nasica-old 2013.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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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러시아 군이 증원군과 합류하는 것을 막지 못해 궁지에 몰린 나폴레옹의 처지와, 그 상황을 파악하고는 지구전 대신 결전을 치르려는 러시아의 짜르 알렉상드르의 결심을 보셨습니다.  나폴레옹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쿠투조프의 전략대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끝없이 동쪽으로 후퇴를 거듭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알렉상드르는 속전속결을 원하는 나폴레옹의 술수에 말려들어 악수를 두게 된 것이었지요.

 

지난 편에서 설명드린 이유로 인해서, 나폴레옹도 무척이나 상황이 안 좋은 편이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을 불안하게 만든 것은 프로이센이 연합군 측으로 넘어가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편에서 설명드린 대로, 험악한 메시지를 들고 온 프로이센의 사절 하우비츠 (Christian Graf von Haugwitz) 백작을 적절히 따돌리기는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공 3개를 들고 저글링을 하는 것처럼 위태위태한 임시 방편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상황을 근본적으로 타개하기 위해서는 눈 앞의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확실하게, 그것도 빠른 시일 내에 격파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정말 병사들을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그는 병사들이 추운 겨울에 모닥불을 피우고 텐트도 없이 밤을 지내는 것을 둘러보며 병사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의 투박한 음식을 집어 먹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그들을 사랑했다면 사실 그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전쟁을 일으키지 말았어야 하는데 말이지요.)

 

 

이를 위해서 나폴레옹은 나름대로 갖은 수를 다 썼습니다.  지난 편에서 보셨던 휴전 제의라든가, 러시아 측 사절에 대해서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인다던가 하는 것은 비용과 노력이 별로 안들어가는 유인책이었지요.  하지만 그런 어수룩한 연기만으로 미끼를 던졌다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 큰 미끼는 진짜 스스로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8만 5천에 달하는 연합군 앞에 불과 5만 몇 천의 병력으로 진군한 것은, 보급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스스로를 약하게 보이려는 미끼였습니다.  물론 보급 문제는 실제로도 심각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수석 비서관이던 콩스탕 (Constant)의 회고록에 따르면, 전투 2일 전부터는 아무런 정식 배급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병사들이 주변 마을에서 제멋대로 약탈한 감자를 구워먹으며 투덜댈 정도였고, 나폴레옹도 그런 병사들 틈에서 구운 감자를 집어 먹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혹시 캠핑장에서 이렇게 감자를 구워드실 일이 있다면, '아, 내가 지금 나폴레옹이 아우스테를리츠 전날 밤 마지막으로 먹은 식사를 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정말 그렇게 주워먹은 감자가 전투 시작 이전의 나폴레옹의 마지막 식사였습니다.)

 

 

하지만 적을 속인답시고 정말 약한 병력으로 적의 대군에 부딪히는 것은 물론 바보짓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전에도 여러번 증명해보였다시피, 작전에서 지리와 기동력을 100% 활약하는 위대한 작전가였습니다.  그의 병력 배치는 언듯 보면 여러 군단들이 대책없이 무질서하게 이곳저곳에 분산된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그의 면밀한 작전에 따라 요충지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가령 마세나와 네의 군단은 8만에 달하는 오스트리아 카알 대공의 병력을 남북 양방향에서 압박하며 견제하고 있었고, 베르나도트의 군단은 만에 하나 있을 수도 있는 프로이센 군의 움직임을 봉쇄할 수 있도록 보헤미아 국경 지대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나폴레옹은 언제든 이 분산된 병력을 집결할 수 있도록 배치를 해놓고 있었습니다.  당장에 그날 중으로 소집할 수 있는 병력은 5만4천에 불과했으나, 이틀이면 7만5천을 모을 수 있었고, 4일이면 8만5천까지도 가능했습니다.  만약 전황이 좋지 않아서 후퇴를 해야 한다고 해도, 그는 며칠 안에 총 병력을 10만으로 끌어올려 다시 재도전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집하는데 하루이틀 걸리는 병력은 당장 도움이 되는 병력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실제 전투가 벌어진다면 최소 2일 전에는 이들에게 이동 명령을 내려야 했는데, 전투가 2일 뒤에 벌어질지, 당장 내일 벌어질지, 혹은 3일 뒤에 벌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는 일이었지요.  증원 병력이 결전 다음날 도착해봐야 아무 도움이 안될 것이지만, 결전 전날 너무 일찍 도착해버려도 문제였습니다.  증강된 프랑스 군을 보고 러시아-오스트리아 지휘관들이 겁을 집어 먹고 결전을 회피한다면 그것도 문제였으니까요.  나폴레옹에게는 결전이 연기되는 것이 패전에 버금갈 정도로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저 멀리 지평선이 약간 솟은 부분 보이시지요 ?  저기가 바로 프라첸 고지입니다.  보시다시피 사실 프라첸 고지는 무척 나지막한 곳입니다만, 사방이 워낙 탁 트인 평원인지라 그 전술적 가치가 커진 것입니다.)

 

 

그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아주 대담한, 실은 너무 대담한 미끼를 던지기로 합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브륀 (Brünn)과 아우스테를리츠 마을 사이에 있는 높은 언덕인 프라첸 (Pratzen) 고지에 올라 주변 지리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고, 주변의 원수들에게 '이 지형을 잘 살펴두게.  여기서 우리는 결전을 벌일 거야' 라고 말했습니다.  당연히 전투에서 고지를 먼저 점령하고 있다는 것은 크나큰 잇점이었습니다.   먼저 대포를 쏘더라도 더 멀리 날아갔고, 적을 향해 돌격을 하더라도 사람이나 말이나 아래로 달려가는 것이 쉽지 위로 올라가는 것은 힘들었으니까요.  특히, 항공기가 없는 시절 높은 곳을 선점한다는 것은 주변 전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잇점을 가진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당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과 프랑스 군을 다 합하면 무려 14만에 가까운 대군이었는데, 이런 대군이 넓은 지역에서 충돌하는 경우 효과적인 전열 통제를 위해서는 전체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고지가 꼭 필요했습니다. 

 

 

 

(오늘날 이 고지 위에는 이렇게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기념비가 들어서 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12월 1일, 이 고지를 적에게 내어주고 멀찍이 후퇴를 해버립니다.  나폴레옹이 미친 것이었을까요 ?  나폴레옹은 이 지형을 며칠 동안 꼼꼼히 살펴본 뒤, 원대한 계획이 머리 속에 들어섰기 때문에 이렇게 행동한 것이었습니다.

 

첫째, 일이 어찌되건 12월 2일에는 반드시 연합군이 프랑스 군을 공격해와야만 했습니다.  그러자면 연합군에게 그럴 만한 이유를 제공해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유리한 프라첸 고지를 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미 11월 30일, 저 멀리 남쪽 비엔나로부터 다부의 제3 군단을, 그리고 보헤이마 국경지대로부터 베르나도트의 제1 군단을 소환해 둔 상태였습니다.  이들이 현장에 도착하려면 아무리 빨리 와도 2일이 걸렸으니, 이미 12월 2일에 연합군과 결전을 벌이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이야기였지요.  나폴레옹이 12월 1일 일찌감치 고지에서 물러나자, 아니나 다를까 연합군은 이게 웬떡이냐 하며 재빨리 프라첸 고지에 기어 올라 고지를 중심으로 양편으로 병력을 배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프라첸 고지 위의 연합군과 고지 아래의 프랑스 군이 근거리에서 대치하면서, 12월 2일 전투가 벌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둘째, 그 일대 지형 특성상, 고지 아래 있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며칠간 주의 깊게 살펴보니, 이 일대는 겨울 아침에 자욱한 안개가 끼는 것이 매일 반복되었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아침까지는, 고지에서 내려다 보더라도 안개 때문에 프랑스 군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다만, 이 안개가 아침 몇 시에 걷힐 지는 당일의 날씨와 바람에 달려 있었는데, 하늘이 나폴레옹 편이었는지 결국 전투 당일, 이 안개와 태양이 러시아의 짜르에게 잊을 수 없는 장관을 목격하게 해줍니다.

 

세째, 나폴레옹이 전투의 기본 목표를 적의 완전 분쇄에 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리한 감제 고지를 장악하고 전투에 임한다면, 전투에서 이긴다고 하더라도 (나폴레옹의 표현에 따르면) '평범한 승리' 밖에는 거두지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이럴 경우,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상처를 핥으며 멀리 동쪽으로 다시 도망친 뒤, 거기서 다시 나폴레옹에게 도전해 올 수 있었습니다.  이는 나폴레옹이 극도로 꺼리는 전개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연합군이 두번 다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확실한 완승을 여기서 반드시 거두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폴레옹은 전투의 1차 목표를 적의 중앙 돌파에 두었습니다. 

 

그러자면 적의 중앙을 약화시켜야 했는데, 왜 강력한 방어 수단이 될 프라첸 고지를 적에게 넘겨주었냐고요 ?  여기서 나폴레옹의 천재성이 발휘됩니다.  전에 '나폴레옹은 어떤 공부를 했길래 군사적 천재가 되었을까 ?' (http://blog.daum.net/nasica/6862360) 편에서도 언급했지만, 나폴레옹의 천재성은 포탄의 탄도 계산이나 머스켓 소총 대열의 획기적인 운용 방법 등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역사서를 비롯한 많은 책을 탐독함으로써, 전장에서 적의 심리를 꿰뚫어보는 경지에 이른 상태였습니다.  그는 프라첸 고지를 내 줌과 동시에, 일부러 자신의 우익, 즉 남쪽 방면에 배치된 병력을 크게 줄여 연합군의 구미를 북돋았습니다.  그는 프라첸 고지를 내주고 우익을 약화시킨다면, 적은 틀림없이 프랑스 군의 우측으로 돌파해 들어올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연합군, 특히 오스트리아 군이 노리는 바는 그렇게 프랑스 군의 남쪽 측면을 파고 듬으로써 프랑스 군이 남쪽의 비엔나 쪽으로 후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는 정확하게 들어 맞았습니다. 

 

 

 

 

(전투 바로 전날인 12월 1일의 상황입니다.  오른쪽의 파란색이 프랑스 군입니다.)

 

 

당시 연합군의 전체 작전은 소극적인 작전으로 인해 짜르의 미움을 산 쿠투조프가 아니라, 젊고 야심만만한 호전파인 오스트리아의 베이로터 (Franz von Weyrother) 장군이었습니다.  이 이름을 기억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양반이 바로 5년전, 1800년 12월 3일의 호헨린덴 전투를 총괄 기획했던 바로 그 양반이었습니다.  ('모로와 나폴레옹 - 호헨린덴 전투' http://blog.daum.net/nasica/6862505 참조)  당시 대령이었던 바이로터는 나폴레옹처럼 화려한 기동력을 발휘하여 적의 배후로 우회하는 화려한 작전을 짰었습니다만, 오스트리아 군의 기동력이 그의 '훌륭한' 작전을 따라가지 못해 결국 호헨린덴 전투의 참패가 일어나게 되었지요.   당시 그의 상관이던 라우어 장군이 모든 죄를 뒤집어 쓰는 덕분에, 그는 무사히 승진하여 이날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도 총괄 작전 기획을 맡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그는 프랑스 군의 우익을 파고 들어 프랑스 군과 비엔나 사이의 연락선을 끊어버리는 과감한 작전을 기획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비엔나를 조속히 탈환하고 싶은 오스트리아 군의 심정을 읽었기 때문에 이렇게 적의 작전을 예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설에는 러시아 군 내부에 나폴레옹의 첩자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1800년 모로에게 불멸의 영광을 안겨 줌과 동시에 제2차 대불 동맹전쟁을 끝장낸 호헨린덴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사실 바로 바이로터 본인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이 프랑스 군의 우익을 노린답시고 병력을 그쪽으로 쏟아붓기 위해서는, 연합군에게 '중앙은 안심해도 돼'라는 확신을 주어야 하는데, 당당한 프라첸 고지처럼 좋은 미끼가 없었던 것입니다.  과연 바이로터 장군은 프라첸 고지를 손에 넣은 12월 1일 밤에, 전체 병력의 40%에 달하는 대군을 남쪽, 즉 프랑스 군의 우익으로 쏟아 붓는 작전 명령서를 열심히 작성했습니다.  이는 마치 바이로터가 최면에 걸린 듯이 명령서를 나폴레옹이 불러주는 대로 열심히 날밤을 새면서 받아적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뒤, 짜르 알렉상드르는 '우리 모두는 결국 거인의 손바닥에서 놀아난 젖먹이였다' 라고 한탄했다는데, 사실 그것이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될 경우, 설령 나폴레옹이 연합군의 중앙을 (프라첸 고지를 기어오르는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돌파한다고 해도, 프랑스 군의 우익이 무너지면서 결국 일진일퇴의 팽팽한 양상이 되어버릴 확률이 있지 않았을까요 ?  아무래도 두 주먹으로 네 주먹을 이길 수 없다고, 우익에서는 프랑스 군의 열세가 확실했으니까요.   여기에 대해서도 나폴레옹은 생각해둔 바가 있었습니다.  물론 우익에서 프랑스 군은 크게 수세에 몰리겠지만, 이 지역은 조콜니츠 (Sokolnitz)와 텔니츠(Telnitz) 등의 마을 건물들과 호수, 강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역이었으므로, 어느 정도 지형지물에 의존하여 어느 정도 성공적인 방어가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다부의 제3 군단이 제 시간 안에 도착해 준다면, 압도적인 병력 차이도 어느 정도 보충이 된다고 판단했지요.  당시 다부의 제3 군단에게 주어진 숙제는 비엔나에서 브륀까지의 110km를 불과 48시간 안에 주파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상식적인 보병 부대의 이동 속도는 하루 15~20km 정도였는데도 말입니다.  기동력이 좋다는 프랑스 군조차도 하루 25km 이상은 다소 무리였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상식적인 수준의 행군일 때 이야기였지요.  만약 다부의 제3 군단이 '상식적인 행군 거리' 내인 50km 이내에 주둔하고 있었다면 연합군은 12월 2일,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 도전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격전이 벌어졌던 조콜니츠와 텔니츠의 현재 모습입니다.  지금은 강이니 호수니 하는 것들이 정리가 잘 되었는지, 전혀 복잡해 보이지 않습니다.  위쪽의 좀더 큰 마을이 조콜니츠이고, 아래 쪽의 작은 마을이 텔니츠입니다.  지도 오른쪽 저 멀리 있는 아우스테를리츠 마을은 실은 이 전투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냐고요 ?  당시 전투 이름은 승리한 지휘관이 '승리를 선언'한 곳의 지명을 따서 짓는 것이 전통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생각들은 오직 나폴레옹의 머리 속에서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 요즘 인터넷 용어로 뇌내망상이라고 하지요.  나폴레옹 주변의 내노라하는 원수들, 즉 술트나 뮈라 등이 보기에 현재 전황은 프랑스 군에게 극히 불리할 뿐이었습니다.  대체 황제는 무슨 생각인 것이냐 ?  왜 이렇게 적은 병력으로 위험천만한 전투를 벌이려 하는 것이냐 ?  물론 황제 앞에서는 쉬쉬했으나, 장군들끼리는 쑥덕쑥덕 뒷말이 많았습니다.  이런 장군들의 불안감은 11월 28일 밤이 되자 드디어 터져 나왔습니다.  황제에게 후퇴를 간언하기로 한 것이지요.  하지만 아무도 감히 나폴레옹에게 후퇴하자라는 제안을 할 정도로 간덩이가 크지는 못했습니다.  일행 중에서 가장 직위가 높은 사람은 뮈라였으나, 그는 홀라브룬 전투에서 이 모든 사단을 일으킨 장본인이라서 나폴레옹에게 크게 질책을 당한 뒤라 더욱 직언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때 술트와 뮈라가 꼬드긴 것이 바로 열혈남아 란 (Jean Lannes) 원수였습니다.  란은 사석에서는 나폴레옹에게 반말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나폴레옹과 친한 친구 사이였거든요.  (불어에서 상대방을 vous 라고 부르면 존칭, tu 라고 부르면 평칭인데, 동사 변형까지도 그에 맞춰서 다 다릅니다.  알고 보면 프랑스가 서방 예의지국...)

 

 

 

(남자 중의 남자, 열혈남아 장 란입니다.)

 

 

원래 란이 나폴레옹과 친구 사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일개 사병 출신에서 이 자리까지 오로지 용기와 전공으로 올라온 실력파라는 것도 있었습니다만, 불굴의 의지를 지닌 점이라든가, 잘 나가다가 테르미도르 반동 때 투옥되는 등 군 경력에서 굴곡을 겪었던 점 등 마저 나폴레옹과 비슷한 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나폴레옹의 제1차 이탈리아 원정 때 아르콜레 다리의 격전에서 나폴레옹을 보호하다 큰 부상을 입었던 것도 무척 크게 작용했겠지요.  부상이라면 술트도 당했지만 술트가 큰 부상을 입은 이후 최일선에 나가는 것을 무척이나 꺼려했던 반면, 란은 그 이후에도 항상 최전선에서 일개 사병처럼 앞장 섰던 점은 무척 달랐습니다.  하물며, 술트는 그 특유의 탐욕성과 비열함이 드러난 반면, 란은 부하들로부터도 존경받는 강직한 성격이었습니다.

 

 

 

(선입견을 가지고 보면 더욱 비열해 보이는 술트입니다.)

 

 

아무튼 란은 뮈라와 술트에게 등을 떠밀려 나폴레옹 앞에 나서서 전략적 후퇴를 건의했습니다.  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나폴레옹은, 란 원수가 적을 앞에 두고 후퇴를 운운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오히려 '자네에게 후퇴하자고 꼬드긴 사람이 대체 누구냐?' 라고 캐물었습니다.   등 뒤에 도열한 동료 장군들의 불안한 시선을 느낀 란은 점잖게 '우리 모두의 생각'이라고 둘러댔습니다.  여기서 끝났다면 그냥 훈훈한 일화로 남았을텐데, 스스로 무척 캥겼던 술트가 그만 사고를 쳤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에게 "제 군단은 남의 몫까지 다해서라도 폐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손발이 오글거리는 아부성 멘트를 날린 것입니다.  란은 생각치도 못한 술트의 배신에 격분하여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아들고 결투를 신청하는 소동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그 후로도 란과 술트의 사이를 영원히 반목케 하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술트의 캐리커처입니다.  그는 스페인 전쟁에서의 잔혹한 행동들 때문에 더욱 좋지 않은 인상을 주었고, 덕분에 Richard Sharpe 소설 시리즈에서도 별로 좋지 못한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이런 소동 속에서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의 그날은 착착 다가왔습니다.  비교적 근처에 있었던 베르나도트의 1군단은 11월 30일에 도착하였으므로 전력에 도움이 되었으나, 다부의 3군단은 워낙 먼 거리를 워낙 짧은 시간 내에 주파해야 했으므로, 연합군이 텅빈 프라첸 고지를 얼씨구나 하며 점거한 12월 1일 한밤중이 되어서도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원래 베르나도트와 다부가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나폴레옹은 이 모든 계획을 다 버리고 후퇴할 생각이었습니다.  용의주도한 나폴레옹은 사실 그럴 경우에 대비하여 퇴각로까지 다 마련해 둔 상태였습니다.  그는 이런 후퇴 작전에서도 적의 의표를 찔러, 남쪽의 비엔나 방향이 아니라 서쪽의 보헤미아 쪽으로 후퇴할 생각이었지요.  어쨌거나 다부의 제3 군단 2개 사단 7천 보다 훨씬 병력이 많은, 베르나도트의 1만3천에 달하는 제1 군단이 도착했으므로, 설령 다부가 늦는다고 하더라도 전투에 임할 생각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12월 1일, 위에서 설명한 대로 프라첸 고지를 내어주며 연합군을 끌어들인 뒤, 그 날 오후 장군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작전을 설명했습니다.  특히 중앙 돌파의 임무를 술트의 제4 군단에게 맡기며, 전진할 때의 대형 등에 대해 세세한 지시 사항을 전달했습니다.  이 전달 사항은 장군들에게서 대령들에게로, 대령들에게서 대위들에게로, 결과적으로 일개 병사들에게까지 전달되어, 전체 군단이 나폴레옹의 작전을 충분히 이해하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때 프랑스 군은 약 6만5천에 대포 약 150문을 갖추고 있었고, 그에 비해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약 8만5천에 대포는 300문을 훨씬 넘기는 막강한 화력을 자랑했습니다.  원래 프랑스 군은 5만을 간신히 넘기는 정도였으나, 11월 30일 베르나도트의 제1 군단이 조용히 합류한 덕분에 병력의 열세를 그나마 보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르나도트 원수입니다.   그는 자코뱅 파로서 나폴레옹과는 브뤼메르 쿠데타 때부터 정치 노선을 달리 했으므로 나폴레옹에게는 무척이나 꺼림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코뱅 파를 달래기 위해서, 또 그리고 그와 동서지간인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가 그를 무척이나 싸고 돌았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그를 제거하거나 내칠 수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브뤼메르 쿠데타 이후 베르나도트를 당시 서류상으로만 프랑스 땅이었던 서부 루이지애나 주지사로 내보내려고 했으나 베르나도트의 거부로 무산되었고, 그 뒤에는 미국 주재 프랑스 대사로 내보내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보나파르트 가문과의 혈연 관계 때문에 그에게 원수 자리를 내줄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런 것을 보면 나폴레옹도 혈연 관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인사 상의 큰 실책이었습니다.  아무튼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베르나도트의 제1 군단은 예비대로 돌려졌고, 결과적으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전투를 하루 앞둔 그날 밤, 나폴레옹은 전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시찰을 돌고 있었습니다.  자정 무렵 외곽 초소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황제가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안 병사들은 황제의 모습을 보고자 그들의 투박한 잠자리에서 짚단을 꺼내 횃불을 만들어 들고는 검소한 회색 코트를 입은 나폴레옹 곁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잠자리에 들었던 인근의 병사들까지 모두 짚단으로 만든 횃불을 손에 들고 몰려나와 난데없는 인산인해가 이루어졌지요.  이때 누군가 "오늘이 황제 폐하의 즉위 1주년되는 날이다 !" 라고 외치자 병사들은 그 유명한 "Vive l'Empreur !" (황제 폐하 만세 !)를 연호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훗날 이 날 이 순간을 자신의 일생 최고의 순간으로 회상했습니다.   한편 이 불빛과 함성으로 이루어진 장관은 프라첸 고지의 연합군에게도 똑똑히 보였습니다.  연합군 인사들 중 일부는 이 광경을 보고, 불리한 상황에서도 프랑스 군이 그 다음날 후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리라고 생각했고, 일부에서는 오히려 프랑스 군이 철수 준비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의 가슴을 벅차게 만든 병사들의 횃불 환호를 묘사한 여러가지 그림들입니다.) 

 

 

다음 날이 운명의 12월 2일, 바로 1년 전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던 날이자, 전세계 역사 교과서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의 날입니다.  약 40년 후 그의 조카는 바로 이 날을 그의 쿠데타 날짜로 지목할 정도로, 나폴레옹이라는 이름과 깊은 연관을 가지게 되는 날짜였지요.  나폴레옹은 순시와 작전 계획 검토 때문에 이날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가, 불과 2시간 만에 일어나 시종장 콩스탕에게 뜨거운 펀치를 준비해오라고 주문한 뒤, 그것을 수석 참모인 베르티에 (Berthier)와 나눠 마셨습니다.  이것이 그날 나폴레옹이 먹거나 마신 식사의 전부였습니다.  (남은 펀치는 콩스탕을 비롯한 배고픈 시종들이 나눠 마셨습니다.)  나폴레옹은 4시 반 경에 각 부대들의 전투 배치를 명했고, 곧 연락 장교들이 이리저리 말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연락 장교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치열한 전투에서 명령서를 전달하는 연락 장교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어 필요한 부대 기동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당시에는 상당히 많았습니다.)

 

 

한편,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 측에서도 새벽부터 분주한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바이로터 장군의 세밀한 작전에 따라, 많은 부대가 남쪽으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이로터 장군은 그 창의력은 몰라도 기획력과 열정은 대단한 사람이어서, 병종과 그 특성에 따라 일부 부대는 오히려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이는 바이로터 머리 속에서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을지는 몰라도, 명령서를 받은 각 부대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위치를 찾아 새벽의 어둠 속에서 이동하느라 큰 혼란이 빚어졌습니다.  가령 리히텐슈타인 (Johann I Joseph, Prince of Liechtenstein) 대공의 기병대는 북쪽, 즉 연합군의 우익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동 중이었는데, 반대로 남쪽으로 이동해야 했던 랑제론 (Louis Alexandre Andrault de Langéron) 백작의 부대와 딱 마주치는 바람에, 결국 랑제론 휘하의 일부 부대는 주어진 위치로의 이동이 크게 늦어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 혼란은 연합군 지휘부를 아연실색케 했지만, 이 의도치 않았던 지연 덕분에 연합군 피해가 그나마 줄어들 수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됩니다.

 

 

 

(리히텐슈타인 대공입니다.  울름 포위전에서 마크 원수의 항복 문서를 들고다니는 치욕스러운 심부름을 해야만 했습니다만, 여기서는 나름 용감하게 싸울 수 있었습니다.)

 

 

새벽의 분주한 부대 이동 후, 오전 8시 경이 되자 드디어 연합군의 첫번째 대열이 나폴레옹의 의도대로, 프랑스 군의 우익인 텔니츠 마을을 공격하면서 아우스테를리츠 전투가 시작됩니다.  이 작은 마을의 건물 벽 뒤에서 프랑스 제 3연대가 치열한 저항전을 펼쳤습니다만, 연합군은 몇번의 시도 끝에 결국 숫자의 힘으로 프랑스 군을 밀어내고 이 마을을 접수합니다.   또한 텔니츠 약간 북쪽의 조콜니츠 마을에서도 연합군의 두번째 대열이 돌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곳은 제26 경보병 연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이들은 담장 뒤에서 맹렬한 사격으로 연합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분전한 프랑스 경보병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월등히 우세한 화력을 자랑하던 연합군의 맹포격이었습니다.  아무리 프랑스 경보병 연대가 정예 사단이고, 나폴레옹 버프를 받아 사기가 충천한 상태라고 해도, 살과 뼈로 된 인간인 이상 사정없이 프랑스 군 대오를 휩쓰는 대포알 세례를 버텨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세번째 연합군 대오가 나타나 기존의 두번째 연합군 대오와 힘을 합해 조콜니츠로 돌격해 들어왔습니다.  결국 프랑스 군은 조콜니츠에서도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텔니츠 마을의 현재의 모습입니다.)

 

 

 

(지금도 남아 있는 프랑스 군이 지키던 조콜니츠 마을의 벽입니다. 저기 십자가 표시를 해놓은 부분은 프랑스 군이 대포를 설치하느라 뚫어놓았던 구멍이라는데, 솔직히 말해서 못 믿겠습니다.)

 

 

이는 나폴레옹의 전략에 큰 구멍이 뚫린 것을 뜻했습니다.  나폴레옹의 계획대로라면, 프랑스 군은 이 두 마을을 거점으로 연합군의 주력부대를 막아내며 붙잡고 있어야 했습니다.  이 두 마을을 상실한다는 것은, 그것도 이렇게 오전 일찍 탈취당한다는 것은 나폴레옹의 연합군 중앙 돌파가 시도되기 전에 오히려 연합군의 프랑스 군 우측 돌파 작전이 성공해버린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과연 여기서 위기에 빠진 프랑스 군을 구원할 방법이 나폴레옹에게 남아 있었을까요 ?  나폴레옹의 작전 계획은 정말 뇌내망상에 그치는 것이었을까요 ?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실 겁니다.  이 전투는 너무나 유명해서 여기서는 낚시질도 안 통하겠군요.  2주 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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