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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에필로그 - 아우스테를리츠의 후일담

by nasica-old 2013.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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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나폴레옹이 짜놓은 시나리오에 따라 성실히 전투를 수행하다 당연히 괴멸됨으로써, 나폴레옹에게 불후의 영광을 안겨주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어떤 역사적 사건에게나 그 원인이 있고 또 그 결과가 뒤따릅니다.  아우스테를리츠 전투가 시작부터 나폴레옹의 승리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지난 편에서 보셨고, 이번 편에서는 그 결과가 어떤 것이었는지 보시도록 하시지요.

 

나폴레옹은 물론 자신의 승리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도 인간인지라, 과연 이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지 패배에 무릎 꿇을지 100% 자신하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이번 전투는 자신이 황제에 즉위한 이후 치르는 첫번째 대규모 전투이고, 저쪽 진영은 러시아의 짜르와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직접 관전하고 있었는데다 무엇보다 자신의 병력이 더 적은 상태에서 치르게 되는 싸움이었으므로 특별히 더 초조하고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심정이 반영된 것은 나폴레옹이 탈레랑에게 보낸 11월 30일 경의 편지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무엇보다 조세핀에게 곧 큰 전투가 있을 것이라는 소식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이는 만에 하나라도 패배했을 경우 조세핀에게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전해집니다.  그는 조세핀을 정말 사랑했으므로, 무엇보다도 조세핀 앞에서 체면을 깎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그림 중 가장 유명한 것인, 파스칼의 작품입니다.)

 

 

아니나다를까, 전투가 대승으로 끝나자 그는 과도하게 멋있는 척 하는 짧은 편지를 조세핀에게 보냅니다.

 

"오늘 두 명의 황제가 지휘하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깨뜨렸소.  좀 피곤하구려.  포옹을 보내오."

 

그에 비해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는 다소 머뭇거리는 편지를 황후에게 보내야 했습니다.

 

"오늘 전투가 있었는데, 전황이 그다지 유리하지는 않았소..."

 

한편, 젊고 패기 넘치던 짜르 알렉상드르는 아무런 편지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다만 전투 직후, 러시아 군이 전면적인 퇴각에 나섰을 때, 러시아의 톨 (Toll) 장군이 지나가며 보니 알렉상드르가 부관 단 1명만을 대동하고 길가에 주저 앉아 울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알렉상드르가 편지를 썼다면 그 내용은 이랬겠지요.

 

"흑흑 크흐흑 흐컹흐컹 엉엉엉..."

 

하지만 알렉상드르는 오래 주저 앉아 울지는 않았습니다.  곧 프랑스 군 기병대가 추격을 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다음날 그는 다부 휘하의 기병대에게 사로 잡힐 뻔 하기도 했으나, 그가 친히 말 안장에서 연필과 수첩을 꺼내어 휘갈겨 쓴 전갈을 다부에게 보냄으로써 추격을 따돌리고 달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보낸 쪽지의 내용은 '나폴레옹과 프란츠 2세가 오늘 아침부터 종전을 위한 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며 당장은 휴전 상태'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프란츠 2세는 전투가 끝나자마자 그날 밤이 되기도 전에, 나폴레옹에게 (이제는 거의 항복 전문 사절이 된) 리히텐슈타인 대공을 사절로 보내 2일 간의 휴전을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존중하는 신사인 리히텐슈타인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휴전을 거부하고 맹렬한 추격전을 펼쳐 전과를 확대하는데 열중했습니다.  다만 지난번에 설명드린 대로, 기병대의 수가 충분치 않아 추격전에서는 굉장한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지요.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2세 혹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입니다.  알고보면 이 양반도 무척 젊어서, 나폴레옹보다 겨우 1살 더 많았습니다.  이 그림은 그가 25세 때 그려진 것입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그 다음날 프란츠 2세를 만나 화친 조건을 논의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초기 조건은 그가 거둔 대승에 비해서는 전혀 가혹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평화 조약을 맺고, 영국과의 무역을 중단한다면 러시아든 오스트리아든 아무런 영토도 잃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알렉상드르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나폴레옹의 허락 하에 그저 자신의 잔존 부대를 이끌고 러시아로 홀로 돌아가버렸습니다.  프란츠 2세는 만약 나폴레옹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면 오스트리아와 함께 다시 싸우자고 요구했으나, 알렉상드르는 그마저도 거절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굴복하기는 싫었으나, 그와 다시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알렉상드르는 '우리 모두는 나폴레옹이라는 거인의 손바닥에서 놀아난 아기들이었다' 라는 짧고 씁쓸한 평가를 남기고 갔습니다.  알렉상드르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오스트리아를 버리고 떠난 것은 제3차 대불 동맹 전쟁이 끝장났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원래 이 동맹의 주요 조항 중 하나가 "어느 한 국가도 단독으로 프랑스와 협정을 맺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이제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린 오스트리아를 버리고 떠난 알렉상드르의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나폴레옹의 동의 하에 12월 6일 이렇게 떠나가는 러시아 군을 보고 나폴레옹은 유명한 한마디를 남기지요.
 
"러시아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동화같은 전쟁을 치룰 수 있는 나라이다.  이기든 지든 전쟁이 끝나면 저 멀리 어디론가 그냥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프랑스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은 전쟁의 결과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야 한다."

 

나폴레옹은 나중에 자신의 어용 신문이나 다름없던 모니퇴르 (Moniteur) 지를 통해 "아우스테를리츠 현장에서 전투가 치열했던 곳은 모두 오스트리아 군의 시체가 가득했고, 나머지 지역은  러시아 군의 배낭만 잔뜩 널려있더라"는 기사를 내어, 러시아 군을 조롱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머리 속에 그려진 러시아의 모습)

 

 

나폴레옹의 말대로 알렉상드르야 이렇게 오크 군대를 이끌고 저 동쪽 멀리 모르도르의 땅으로 되돌아가면 되었으나, 중간계에 살고 있던 프란츠 2세는 매우 난처한 입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가 영국과의 무역을 끊지 않는다면 오스트리아는 티롤과 베네치아를 내놓아야 한다"라며 강하게 압박을 해왔던 것입니다.  이때 오스트리아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나라는 최근 알렉상드르와 함께 오스트리아의 뒤를 받쳐 주겠다고 약속했던 프러시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러시아도 이미 대세가 기운 마당에 분위기 파악 못하고 뒷북을 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최후 통첩에 가까운 협박장을 들고 찾아왔다가, "좀 있다 봅시다"라며 나폴레옹이 비엔나로 보내버렸던 프로이센의 사절 하우비츠(Haugwitz) 백작은 아직 전달하지 못한 협박장을 찢어버리고, 나폴레옹의 전선 사령부를 찾아와 협박장 대신 축하 편지를 전달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편지를 읽어보고는 하우비츠의 면전에서 "아무리 읽어봐도 받는 사람 주소만 바꿔쓴 편지 같구료 ?" 라며 비아냥거렸다고 합니다.

 

 

 

 

(제3차 동맹 전쟁에서 노획한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 군 청동 대포를 녹여 만든 방돔 Vendome 탑입니다.  아우스테를리츠 전장에서 노획한 대포가 150문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과다한 양이지요.  아마도 비엔나의 무기고를 턴 것이 아닐까 합니다.  원래 나폴레옹은 비엔나의 무기고를 건드리지 않았다고 했는데, 일설에는 여기서 수백문을 꺼내어 이렇게 녹여 대포도 만들고, 또 새로 얻은 아드리아 해의 영토 방위를 위해 보냈다고 합니다.  어느 쪽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뮈라는 이 전쟁에서 노획한 오스트리아의 군마들로 자신의 기병대에 배속된 군마의 수를 무려 2배로 늘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1805년 이후 오스트리아에서는 군마의 씨가 말랐을 것 같아요.)

 

 

일이 이렇게 되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오스트리아로서는 나폴레옹의 가혹한 요구 조건을 모두 들어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즉 4천만 프랑의 배상금과 함께, 프랑스가 그동안 1797년의 캄포 포르미오 (Campo Formio) 및 1801년의 루네빌 (Luneville) 조약을 통해 획득한 영토를 그대로 승인하고, 또 나폴레옹이 으름장을 놓은 대로 티롤 및 기타 영토를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에게 양도하고, 또 이탈리아 왕국에게 베네치아를 양도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탈리아 왕국의 왕은 바로 나폴레옹 본인이었으므로, 사실상 베네치아는 프랑스에게 빼앗긴 셈이 되는 것이었지요.

 

그나마 이런 조건도 오스트리아가 탈레랑(Talleyrand)에게 많은 뇌물을 줘가며 나폴레옹을 구워 삶도록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부하 원수들은 이번 기회에 합스부르크 왕가를 폐위시켜버리자고 건의했으나, 탈레랑은 나폴레옹에게 '언제까지 피투성이 전사로 살 것인가, 이제는 승리자를 넘어 정치가가 되어야 할 때'라며 오스트리아와의 화친을 주장했습니다.  사실 아직 카알 대공의 8만 대군이 그대로 온전히 남아 있고, 또 유서깊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공중 분해된다는 사실을 주변국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탈레랑의 주장이 옳은 것이긴 했습니다.  당장 티롤만 하더라도 바이에른의 통치, 즉 사실상 프랑스의 통치에 저항하는 민중의 무장 봉기가 심각한 수준으로 일어났다는 점을 보면, 더욱 그랬습니다.

 

 

 

(저 곳이 티롤 지방입니다.  아는 사람이 신혼 여행때 가봤다는데, 자기가 가본 곳 중 최고였다고 하더군요.  그 양반 최근에 런던 출장 갔다와서 하는 말이 '영국이 선진국인 줄 알았는데...' 라는 말 외에는 안 하더군요.)

 

 

하지만 패자에 대한 이런 배려는 모든 왕국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이라고 해서 다 같은 왕은 아니었으니까요.  나폴리 왕국으로 시선을 옮겨보면 매우 다른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남부와 시실리 섬을 차지하고 있던 나폴리 왕국 (Kingdom of Naples)의 페르디낭 4세 (Ferdinand IV)는 프랑스 부르봉 (Bourbon) 왕가의 후손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는 프랑스 혁명 및 그 후계자인 나폴레옹을 공공연하게 적대시했고, 또 덕분에 여러 차례 나폴레옹에게 크게 혼쭐이 났었습니다.  1799년에는 이탈리아 본토의 영토를 내버리고 영국 해군의 보호 하에 시실리 섬으로 피난을 떠나기도 했었지요.  (나폴리 스캔들 - 엠마 이야기 http://blog.daum.net/nasica/6862519 참조)  원래 나폴리 왕국과 시실리 왕국은 별도로 존재하는 2개의 왕국이었는데, 부르봉 왕가가 이 두 왕국의 왕을 겸임하여 '2개의 시실리 왕국'이라는 기묘한 왕국이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나폴리 왕국의 페르디낭 4세에게는 또 다른 칭호가 있었으니, 시실리 왕국의 페르디낭 1세가 바로 그것입니다.  낙후된 시실리 섬은 다소 초라한 곳이라서 그 전까지 시실리 왕이 실제로 시실리 섬을 찾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나폴레옹 덕분에 시실리 주민들은 자신들을 통치하는 왕을 비로소 직접 보게 된 것이지요.

 

 

 

(생-시르 장군의 초상입니다.  그는 원래 무두질장이 구비옹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성을 생-시르로 정한 것은 그가 어릴 때 그를 버리고 떠나버린 어머니로부터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1815년 백일 천하 이후 동료이자 친구인 네 원수의 사형을 막기 위해 애썼습니다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지요.)

 

 

제3차 동맹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의 잠재적 적국이던 나폴리 왕국에는 생 시르 (St. Cyr) 장군의 부대가 진주하여 주요 항구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힘없는 페르디낭 4세는 그저 눈을 내리깔고 있을 뿐이었지요.  그런데 오스트리아와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 1805년 9월에는 나폴레옹도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생 시르 장군의 병력을 마세나 원수의 이탈리아 방면군에 합류시킬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때 프랑스 군은 페르디낭 4세에게 '프랑스 군이 철수해도 나폴리 왕국은 중립을 지켜, 연합군 병력이나 군함이 왕국 내로 진주하는 것을 불허한다' 는 약속을 받고 병력을 철수시켰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군이 물러가자 페르디낭 4세...라기보다는 실은 그 와이프이자 프랑스 혁명 때 목이 잘린 앙또와네뜨 왕비의 여동생인 카롤리나 왕비의 주도 하에, 영국 함대와 러시아 육군을 즉각 나폴리 항구로 끌어 들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모든 조약 위반 행위를 차가운 눈으로 지켜 보고 있었지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되는데, 아무튼 약간 미련하게 생긴 이 양반이 페르디낭 1세이자 3세이자 4세인 사람입니다.  원래 나폴리 국왕 페르디낭 4세이자, 시실리 왕국의 페르디낭 3세였는데, 이것만으로는 너무 호칭이 쉽다고 생각했는지 1816년 이후로는 두개의 시실리 왕국의 페르디낭 1세로 불러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이후, 상황을 대충 정리한 나폴레옹은 1806년 2월 생 시르의 부대를 다시 나폴리로 진격시켰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알고 있던 페르디낭 4세는 이미 그 전에 자신이 가진 또 하나의 왕국인 시실리 섬으로 다시 도주한 뒤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유럽 전역을 향해, "국가 간의 조약을 지키지 않는 페르디낭 4세의 왕권을 박탈한다"라고 선언하고는 나폴리 왕국의 왕위에 자신의 형인 조제프를 앉혔습니다.  힘없고 보잘 것 없는 나폴리 왕국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같은 대접을 받지는 못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편을 잘못 골랐다가 2개의 왕국 중 하나의 왕국을 잃어버린 페르디낭 4세와 카롤리나 여왕은 그 이후에도 그다지 행복한 일생을 보내지는 못했습니다.  당연히 페르디낭 4세는 국가 방위를 영국 해군에게 100% 의존하고 있었는데,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영국을 사실상 상전으로 모시고 살아야 했습니다.  워낙에 중세적인 통치 체제를 가지고 있던 시실리 왕국의 정치 구조를 보다 못한 영국이 시실리 왕국의 헌정을 영국식의 입헌 군주국으로 뜯어 고치도록 강요했고, 그나마 카롤리나 왕비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평화 조약을 맺고 프랑스의 동맹국이 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에 의해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추방당해 거기서 1814년 사망하게 됩니다.  나중에 나폴리 왕위를 물려받은 뮈라가 끊임없이 시실리 섬 침공을 노렸기 때문에, 페르디낭은 그 후에도 계속 불안에 시달려야 했고, 이는 1815년 워털루 이후 페르디낭이 뮈라를 범죄자처럼 처형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덕분에 드디어 왕의 얼굴을 실컷 보게된 시실리 섬의 팔레르모 주민들은 그래서 기뻤을까요 ?  전혀 아니올시다 였습니다.  이들은 나폴레옹이 몰고 온 민주 혁명에 영향을 받아 결국 1820년 혁명을 일으키게 됩니다.  한번 찌질이는 영원한 찌질이라고, 페르디낭 4세는 이때도 오스트리아 군을 끌어들여 자신의 백성을 마구 학살한 뒤에야 겨우 왕권을 유지했습니다.) 

 

 

고민 끝에 나폴레옹 편을 들기로 했던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는 그야말로 잭팟을 터뜨린 셈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사실 별로 한 것도 없으면서 단번에 승전국이 되어 오스트리아로부터 티롤 및 브라이스가우(Breisgau) 등 큼지막한 영토를 양도받고 이제 한낱 선제후(elector)국이 아니라 당당한 왕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역시 공짜는 없다고, 이들은 프랑스의 위성국 역할을 충실히 해야 했지요.  특히 이번 전쟁의 최대 수혜자인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 (Maximilian I Joseph)는 장녀인 아우구스타 (Amelia Augusta) 공주를 나폴레옹의 의붓 아들이자 조세핀의 아들인 외젠 보아르네 (Eugène de Beauharnais)에게 시집보내야 했습니다.  당시 외젠은 나폴레옹의 정식 입양아로서 (비록 왕위 계승권은 없었지만) 프랑스 제국의 공식 왕자였고, 또 개인적인 직함으로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 (Viceroy)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이 따로 후계자를 남기지 않을 경우 이탈리아 국왕직을 계승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매우 높은 신분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이건 누가 뭐래도 정략 결혼에 불과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비록 프랑스의 황제라는 어마어마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항상 자신의 출신이 미천하여 유럽의 정통 왕족 가문에 비해 뭔가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는 진짜 왕족들과의 혼인을 통해 나폴레옹 가문의 위치를 높이 끌어올리려고 했던 것이지요.  외젠의 결혼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알사스 지방의 시청 수위의 아들이었던 라프는 알사스 출신답게 평생 독일어 억양이 들어간 불어를 썼습니다.  원래 드제의 휘하에 있다가 마렝고 전투에서 드제가 쓰러진 이후 나폴레옹의 참모진에 들어갔지요.  이 그림에서 나폴레옹 앞에서 백마를 탄 채 팔을 뻗고 있는 사람이 바로 라프입니다.  그는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근위 기병대 중 마멜룩 부대를 이끌고 돌격을 감행하여, 머리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러시아의 볼콘스키 백작을 포로로 잡고 돌아와 나폴레옹에게 승리를 알렸습니다.  그의 왼쪽에 모자없이 흰 제복을 입은 사람이 볼콘스키 백작입니다.)

 

 

나폴레옹의 측근이었던 라프 (Jean Rapp) 장군에 따르면, 이 결혼은 외젠과는 일절 상의 없이 나폴레옹 독단으로 결정된 것이었고, 외젠은 당연히 이런 정략 결혼에 자신이 사용되는 것을 무척 불쾌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막상 아우구스타 공주를 만나보고는 이 공주에게 홀딱 반하여 이 결혼을 무척 만족스러워 했습니다.  그렇게 정략 결혼을 당하는 것은 아우구스타 공주도 기쁘지는 않았을텐데, 천생연분이었는지, 공주도 외젠을 정말 사랑하게 되어 이 부부는 나폴레옹 몰락 이후에도 매우 행복하고 금슬 좋게 지냈다고 합니다.

 

 

 

 

 

(외젠과 아우구스타 부부입니다.  금슬 좋은 부부는 항상 보기 좋은 것이지요.  두분이서 예쁜 사랑 하세요~~!)

 

 

일개 선제후 국가였던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 등이 감히 황제국인 오스트리아으로부터 영토를 빼앗고 왕국으로 독립할 정도가 되자, 이미 권위가 땅에 떨어졌던 신성 로마 제국은 더 이상의 유지가 곤란해졌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이 1806년 6월, 프랑스의 권위에 복종하는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릌, 바덴 등 독일 소국들을 모아 라인 연방 (Confederation of the Rhine)을 만들자, 이미 오래전 볼테르가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와 상관도 없고, 제국도 아니다'라며 비웃을 정도로 허명만 남았던 신성 로마 제국은 결국 해체를 선언하게 됩니다.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이전부터 프란츠 2세는 '뭔 씨알도 안 먹히는 신성 로마 제국이냐' 라며 그 호칭에 대해 스스로 부담스러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라인 연방까지 만들어지자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고 신성 로마 제국 해체를 선언한 뒤,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1세라는 호칭만을 유지하게 된 것입니다.  이 고만고만한 독일 소국들로 만들어진 라인 연방은 나폴레옹의 보호를 받으며 사실상 프랑스의 위성국가 노릇을 하게 됩니다.  가령 라인 연방은 그 보호자인 나폴레옹에게 6만의 병력을 맡겨두어야 했습니다.  이런 조치는, 이미 패배한 오스트리아야 그렇다치고, 아직 프리드리히 대왕의 직계라는 자부심으로 가득찬 프로이센으로 하여금 '남의 집 앞마당에서 뭐하는 짓인가' 라고 분노하는 계기를 만들게 됩니다. 

 

 

 

 

(라인 연방에는 점차 가입국이 늘어나서, 결국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전체 독일 국가들이 다 소속되었습니다.)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와 손잡고 나폴레옹을 굴복시킬 절호의 기회를 내버렸던 것은 전에도 설명했듯이 영국 영토인 하노버를 미끼로 삼은 나폴레옹의 외교술 덕택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는 동안, 러시아와 영국, 그리고 스웨덴 연합군 총 3만5천이 하노버에 상륙하여 프랑스 령 네덜란드를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영국은 하노버의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대영 제국 육군에 입대하라'는 모병 활동을 열심히 하여 훗날 스페인에서 맹활약하게 될 King's Germal Legion의 뼈대를 만들게 됩니다.   (KGL에 대해서는 고향을 잃은 병사들 - King's German Legion http://blog.daum.net/nasica/6862517 참조)  나폴레옹이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제3차 대불 동맹 자체를 박살낸 이후, 이 러시아-영국-스웨덴 연합군은 슬그머니 짐을 싸들고 프랑스 군의 진격을 피해 도주를 하고 말았는데, 정작 하노버를 차지한 것은 프로이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약속대로 프로이센에게 하노버를 양보한 것이었습니다.  프로이센의 빌헬름 3세는 염치도 없이 사촌인 영국 왕의 개인 영지인 하노버를 낼름 집어 삼킨 것도 모자라, 나폴레옹의 요구대로 영국에 대해 항구를 열지 않는 봉쇄 정책에 들어갑니다.  하긴, 프로이센이 하노버를 집어 삼킨 직후 영국이 프로이센에게 선전포고를 했으니 굳이 나폴레옹이 시키지 않아도 당연히 그래야 했겠지요.  하지만 이 하노버를 둘러싼 오해와 갈등,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라인 연방에 대한 불만 등이 쌓이고 곪아서 결국 1807년의 제4차 동맹 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프로이센 왕비 루이제입니다.  제4차 동맹 전쟁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희생된 것이 과연 모두 이 여자 탓일까요 ?)

 

 

아우스테를리츠의 결과 중 나폴레옹을 가장 통쾌하게 만들어준 것은 바로 영국 수상 피트 (William Pitt the Younger)의 죽음이었습니다.  원래 "앉은 자리에서 3병"라는 별명으로 알려질 만큼 포트 와인 (Port wine에 대해서는 머나먼 항해를 위한 물과 술 이야기 http://blog.daum.net/nasica/6862419 참조) 을 과음하던 피트는 당연한 결과로 건강이 몹시 나빴고, 특히 1805년에는 통풍 발작으로 인해 온천 지역인 배쓰 (Bath)에서 휴양을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날아온 아우스테를리츠의 소식은 74세의 피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인 소식이었나 봅니다.  그는 이 소식을 들은지 24시간 동안 안색이 파랗게 변하여, 소위 "아우스테를리츠 안색 (Austerlitz look)"이라는 유행어까지 만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는 아우스테를리츠 전투가 끝난지 2달이 지나기도 전인 1806년 1월 23일 죽었는데, 죽기 전에 자신을 돌보던 조카딸에게 벽에 걸린 유럽 지도를 치우도록 지시했다고 합니다.  이런 말과 함께요.  "저 지도를 말아서 치워두거라... 한 10년 동안은 쓸모가 없을 게다".  이것이 영국의 떡갈나무 전함과 황금으로 나폴레옹과 프랑스를 파멸시키려고 무던히 애를 쓰던 영국 수상의 최후였습니다.

 

 

 

 

(피트가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나폴레옹이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에 뒷목을 잡고 쓰러져 죽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원래 피트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또 고령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맞다고 합니다.)

 

 

트라팔가 해전의 주인공이 넬슨인지 테메레르 호의 함장 하비 (Harvey)인지, 혹은 땀을 뻘뻘 흘리며 익숙한 솜씨로 장약을 밀어넣고 대포를 장전하던 이름없는 영국 수병들 전체인지는 다소 헷갈립니다.  하지만 마렝고 전투의 주인공이 드제(Desaix)이고, 아부르키 전투의 주인공이 뮈라였던 것이 분명한 것처럼,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의 주인공이 나폴레옹인 것은 확실합니다.  정말 뛰어난 지휘관이라면 아슬아슬한 모험을 수반한 승리보다는, 정말 이길 수 밖에 없는 전투로 적을 끌어들일 줄 알아야 하는 것이거든요.  나폴레옹도 그렇게 생각한 것이 틀림없나 봅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주변을 공작이나 백작 등 귀족으로 가득 채우길 원했기 때문에 어지간한 전투의 승리에 대해서도 귀족 작위를 만들어내곤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를 기리며 만들어진 작위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건 오로지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승리였으므로, 그 공로를 자기가 독차지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코르시카 아직시오의 아우스테를리츠 광장에 있는 나폴레옹의 동상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오만한 나폴레옹조차도, 자신의 병사들이 정말 잘 싸워주었기 때문에 이 대승이 가능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Soldats! Je suis content de vous!" (병사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만족한다 !) 라는 연설로 그들의 노고와 성취를 극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병사당 200 프랑씩의 특별 보너스를 지급하여 병사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당시 병사들의 하루 일당이 약 0.7 프랑 정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거의 10개월 치 봉급에 해당하는 금액으로서, 현재 가치로 따지면 약 320만원 정도 되는 금액이었습니다.  (당시 병사들의 급료에 대해서는 영국군과 프랑스군, 누가 더 봉급이 많았을까 ? http://blog.daum.net/nasica/6862363  참조)  목숨을 걸고 싸운 병사들 개인당 200 프랑씩 뿌린 것이 좀 짠 보수 같다고요 ?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 참전한 병사들을 대략 7만이라고 잡으면, 병사들에게 지급된 보너스만도 1400만 프랑에 달합니다.  이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받아낸 전쟁 보상금 4천만 프랑의 30%가 넘는 금액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전투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부인에게는 후한 연금을 주었고, 고아가 된 아이들은 모두 (형식적이나마) 나폴레옹 자신이 입양하여 세례명에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쓰도록 허락했습니다.  당시 전투에서 죽거나 부상한 병사들의 처우가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이는 확실히 획기적인 조치였습니다.   원수들을 포함한 장교단들에게는 200만 프랑을 뿌려서 기분을 냈습니다. 

 

 

 

 

 

(위의 것은 금화이고 아래 것은 은화입니다.  은화는 반 프랑 짜리입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끝내는 프레스부르크 (Pressburg) 조약을 성공적으로 맺고, 오스트리아에 주둔한 각 군단들을 단계적으로 철수시켰습니다.  이때 주민들에게 서둘러 물러난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부상병과 병자들을 먼저 실어 보낸 뒤, 아주 천천히 만반의 준비를 다 한 뒤에 느릿느릿 철수했습니다.   특히 비엔나 시민들에게는 '협조에 감사한다'는 우아한 포고문을 남기고 기분 좋게 헤어졌습니다.  아마 비엔나 시민들도 나폴레옹을 떠나 보내게 되어 무척이나 기뻤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철수한 지 며칠 뒤에 입성한 프란츠 1세를 비엔나 시민들이 개선 장군 못지 않게 환영했던 것을 보면, 확실히 프랑스 군의 비엔나 주둔은 비엔나 시민들에게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언제나 그랬지만 나폴레옹은 바빴습니다.  그가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를 승리로 이끈지 2일 후, 그에게 파리의 프랑스 중앙 은행이 파산 일보 직전이라는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재무부 장관 바베-마르부아(François Barbé-Marbois)의 어리석음과 우브라르 (Gabriel Julien Ouvrard)를 필두로 한 거대 재벌들의 탐욕으로 인해 이미 심각한 금융 위기가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나폴레옹은 아마 그렇게까지 놀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단 아우스테를리츠의 승전보가 파리에 전달되자, 대번에 파리 전체가 이 완벽한 승리에 흥분하여 당장의 금융 공황이 진정될 수 있었습니다.  이미 프랑스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왕국으로부터 약 4천만 프랑의 지원금을 받고 있었는데, 이제 오스트리아를 아주 박살을 내놓았으니 더 많은 나라들이 프랑스에 지원금이라는 이름의 조공을 바칠 것이라는 기대가 살아났던 것입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프레스부르크 조약에서, 처음에는 오스트리아에게 배상금으로 무려 1억 프랑을 요구했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그 액수가 4천만 프랑으로 줄어들었지요. 

 

 

 

 

(부리엔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우브라르는 정말 당대의 재벌로서, 이미 브뤼메르 쿠데타 당시에 부채를 제외한 순자산만 6천만 프랑에 달했다고 합니다.  우브라르는 나폴레옹 정권에도 든든한 줄을 잡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줄을 조세핀의 불륜 상대였던 젊은 미남 장교였다는 것은 에러...) 

 

 

나폴레옹의 권력은 영광에서 나온다고,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불멸의 명예를 얻은 그에게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해결 가능했습니다.  그는 1806년 1월 말 어느날 밤 행사도 없이 조용히 파리로 돌아와 비밀리에 재무 담당 관료들을 소집했습니다.  그는 2월달에 우브라르를 비롯한 재벌들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재무성 금고에서 빌려간 8천7백만 프랑을 당장 되돌려 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엄격히 따지자면 그건 빌려준 돈, 즉 채권이 아니라 투자한 돈, 즉 주식 투자를 한 것에 가까왔고, 투자가 잘못되어 손실이 발생한 것이었므로, 우브라르 등의 재벌들은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를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요구서에는 짧은 후렴이 딸려 있었습니다.  "불응 시에는 재판없이 총살에 처하겠다".  우브라르와 그 일당은 정말 8천7백만 프랑을 토해냈습니다.  그야 말로 '서민 증세 없이 재정 안정'을 이룩한 셈이지요.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비슷한 점이 많다고 하는데, 그 중 하나가 귀족이나 대재벌들에게는 다소 냉담했고, 중산층을 중시했다는 점입니다.  가령 이 재정 위기 때 레카미에 (Recamier) 은행이 파산 위기에 놓여 나폴레옹에게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레카미에 은행을 도와달라'는 호소를 받자, 이렇게 답변했다고 합니다. 

 

"저택 유지비로 일년에 60만 프랑을 쓰는 사람들을 왜 내가 도와줘야 하는가 ?"

 

 

 

 

(당대 파리 최고의 미인이라고 일컬어졌던 레카미에 부인입니다.  제라르 다비드의 작품인데, 더 유명한 소파 그림은 지난 편에 보여드렸지요.)

 

 

제 블로그 글을 보시면 느끼시겠습니다만, 저는 물론 나폴레옹을 당대의 대영웅이라고 인정하지만, 대체적으로 나폴레옹에 대해서 좋지 않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래도 이 인물에 대해 매력을 느낄 수 밖에 없는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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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을 끝으로, 당분간 저는 블로그질을 접습니다.  벼르고 별렀던 가족들과의 여행 준비를 하느라 당분간 프랑스 어 공부를 하려고요.  나폴레옹이 학생으로 있던 파리 왕립 사관학교도 보고, 나폴레옹과 조세핀이 기거했던 말메종 저택도 보고, 나폴레옹이 제2차 이탈리아 침공 때 걸었던 그 생 베르나르 고개도 넘고, 마렝고 들판에서 드제가 쓰러졌을 장소도 둘러보고....는 개뿔, 그냥 가족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다 올 거에요.  아무튼 지하철 길이라도 묻고 음식 주문이라도 하려면 한두마디 생활 불어 정도는 배워둬야 할 것 같아서요.  제4차 동맹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것은 10월부터 다시 연재할 예정입니다.  다들 건강한 여름 보내시고, 10월에 다시 뵈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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