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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제4차 동맹전쟁의 시작 - 프로이센의 결심

by nasica-old 2013.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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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나폴레옹이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둔 뒤 그 뒤처리를 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은 자신의 위성 국가나 다름없던 뷔르템베르크와 바이에른 등을 중심으로 한 서부 독일의 작은 왕국 및 공국들을 모아 라인 연방을 만들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이 조치는 3차 대불동맹전쟁에서 중립을 지켰던 프로이센을 무척 거북하게 만들었고, 나폴레옹은 그를 잘 알면서도 이 라인 연방의 창설을 강행했습니다.  프로이센은 왜 이를 거북하게 여겼고, 나폴레옹은 왜 굳이 이를 강행했을까요 ?




(라인 연방의 지도입니다.  이는 1806년 당시의 지도는 아니고, 1812년의 상황으로서, 이때는 베스트팔리아 및 작센이 이미 라인 연방에 포함된 상태입니다.  1806년 제4차 동맹전쟁 당시 작센은 프로이센 편이었고, 또 바르샤바 대공국도 아직 프로이센 땅이었지요.)



라인 연방이라는 정치 외교적 집합체의 핵심은 바로 서부 독일 소국들을 신성 로마 제국으로 대표되는 오스트리아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시키되, 그 군사력은 나폴레옹의 통제 하에 둔다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와 독일, 즉 오스트리아 및 프로이센 사이에 버퍼 공간을 확보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는 다분히 방어적인 조치였고, 또 나폴레옹은 이미 프랑스에 병합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제노바 공화국 및 북부 이탈리아 왕국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프랑스의 영토를 확장할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했으니, 다른 국가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노란색으로 칠해진 곳이 나폴레옹이 왕위를 겸직하고 있던 1807년 당시의 이탈리아 왕국입니다.  발칸 반도에 있는 달마시아나 이스트리아 반도에도 노란색이 칠해여있다고요 ?  예, 거기도 나폴레옹의 땅이었습니다.  제노바가 있던 오늘날 북서부 이탈리아는 프랑스 제국에 아예 병합되어 버렸지요.)



하지만 프로이센은 이에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이유는 라인 강 때문이었습니다.  17~18세기 이래로, 프랑스는 라인 강을 프랑스의 '천연적인 국경'으로 삼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왔고, 프랑스 혁명 전쟁 및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이제 그 염원은 현실화된 상태였습니다.  알고 보면 라인강은 프랑스-독일 사이의 천연적인 국경이라고 하기엔 약간 무리가 있었습니다.  라인 강 서쪽도 문화적, 민족적으로 보면 원래 독일 땅이 맞습니다.  지금도 프랑스 땅인 상-라인 강의 스트라스부르 (Strasbourg, Straßburg)는 그 이름부터가 독일 이름인데다, 주민 대부분이 원래 독일어를 쓰던 알사스 지방의 주도였습니다.  이 도시 앞에 놓인 라인 강을 건너는 다리의 중요성으로 인해, 루이 14세가 30년 전쟁 이후 병합한 알사스 지방의 점령을 공고히 하려 1681년 무력으로 점령하고 병합했지요.  




(1744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때, 신성로마제국의 로레인 공작이 알사스 침공을 위해 스트라스부르 앞에 놓인 라인 강의 다리를 건너는 그림입니다.)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주도권 싸움에 있어, 이 라인강이 뜻하는 상징성은 무척 중요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 위대한 케사르조차도 라인 강 동쪽으로는 끝내 세력을 확장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1806년 나폴레옹이 만든 라인 연방이 뜻하는 바는, 라인 강 동쪽에 프랑스 군이 영구적으로 주둔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프랑스에게 된통 당한 오스트리아는 그렇다치고, 항상 오스트리아와 독일권의 주도권을 다투던 프로이센으로서는 이것이 매우 불쾌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이는 전쟁으로 이어질 정도의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잘 나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프로이센은 이에 대항하여 "북부 독일 연방" (North German Confederation) 이라는 것을 만들려 했습니다.  그 소속국은 프로이센과 작센 (Saxony)을 비롯한 몇몇 라인 연방에 끼지 못한 북부 독일 소공국들로서, 별 영양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쿨하게 '뭐 마음대로 하세요'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프로이센도 이 라인 연방이라는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마음을 풀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시절에는 모젤 강변은 물론, 게르만 민족의 전설이 깃든 보름스 Worms까지도 모두 프랑스 땅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국경선은 저 지도에서 분홍색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프로이센을 격노시킨 사건이 결국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바로 하노버 (Hanover) 였습니다.  원래 프로이센의 군사 외교적인 위치가 정점에 올랐던 것은 바로 작년인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직전이었습니다.  이때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러시아 편을 든다면 나폴레옹은 십중팔구 패전의 쓴 맛을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잽싸게 '하노버를 줄테니 이거 먹고 가만히 있어' 라고 프로이센을 달랜 덕분에 아우스테를리츠의 승전이 있었던 것입니다.  기억들 하시겠습니다만, 덴마크 남쪽에 있는 하노버는 원래 영국 땅, 정확하게는 영국 왕 조지 3세의 개인 영지였습니다.  나폴레옹은 1805년 당시 영국에 대한 보복 조치로서 하노버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오스트리아 침공을 위해 베르나도토의 제1군단을 소환하면서 하노버는 완전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이 땅을 프로이센에게 던져준 것이니 사실 나폴레옹으로서는 비싼 승리를 제 돈 들이지 않고 구매한 셈이었습니다.  정작 프로이센은 이 조치로 인해 자동적으로 영국과 전쟁 상태에 돌입했고, 육지에서야 평온했으나 외해에 나가 있던 프로이센 선박이 무려 700척이나 영국 해군에게 나포되는 비싼 값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하노버의 헤렌하우젠 궁전 Schloss zu Herrenhausen의 모습입니다.)



공짜인 줄 알고 덥썩 물었으나, 알고 보면 그렇게 비싸게 주고 산 땅인 하노버는 결국 프로이센을 패망으로 몰고 가는 단초를 제공합니다.  1806년 7월 28일, 파리 주재 프로이센 대사인 루케시니 (Lucchesini)가 베를린의 프로이센 궁정으로 급전 한 통을 보냈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트라팔가 해전으로 인해 더더욱 정벌 가능성이 없어진 영국과의 평화 조약을 위해 영국의 야머스 백작 (Earl of Yarmouth)을 파리에 초대해 놓고 부단히 협상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루케시니가 보낸 급전의 내용은, 나폴레옹이 영국과의 평화를 위해서 하노버를 다시 영국에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에게 있어 나쁘지 않은 존재라고 굳게 믿고 있던 프로이센 왕 빌헬름 3세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였습니다.  바로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나폴레옹은 탈레랑을 통해 '하노버가 영국으로 반환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며 빌헬름 3세를 안심시켜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나폴레옹은 빌헬름 3세의 뒤통수를 친 것이었을까요 ?  반쯤은 사실이기도 하고, 사실이 아니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맘먹고 프로이센의 뒤통수를 쳤다기 보다는, 프로이센에게 별 관심이 없어서 자기 자신의 행동이 프로이센에게는 치명적인 배신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일단, 나폴레옹이 영국에게 평화 조약의 조건으로서, 하노버를 돌려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대신 나폴레옹은 당시 나폴리 왕국의 부르봉 왕가가 피난가 있던 시실리 섬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지요.  나폴레옹의 입장은 강경했습니다.  저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나폴리 왕국의 페르디낭 4세 ( 아우스테를리츠의 후일담 http://blog.daum.net/nasica/6862551 참조)의 나폴리 왕조는 이미 폐지되었으므로, 그들이 영국 해군의 보호 하에 웅크리고 있는 시실리 섬을 즉각 합법적인 나폴리 왕국에게 반환하라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이제 자신의 가족들을 여기저기의 왕족으로 내세우거나 다른 왕족들과 혼인시키면서 자신의 가문을 신흥 명문으로 내세우는데 급급해하고 있었으므로, 나폴리 왕국의 새로운 왕이자 자신의 형인 조제프의 정통성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라도 나폴리의 부르봉 왕가를 확실하게 쫓아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대신 그렇게 쫓겨난 부르봉 왕가에게는 스페인 땅인 지중해의 발레리 군도 (Balearic Isles)를 주고, 스페인으로부터 연금을 받도록 해주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나폴리 왕국의 페르디낭 4세를 위해 점찍어 둔 유배지 발레리 제도입니다.  저때만 해도, 나폴레옹은 나중에 자기 자신이 저렇게 초라한 지중해의 엘바 섬으로 유배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지요.)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은 약간 어안이 벙벙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나폴레옹이 영국과 화친을 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댓가성 양보를 해주는데, 그 양보라는 것이 프랑스도 아닌 제3국의 영토를 갈라주겠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  그런데 나폴레옹의 머리 속에서는 아주 평범한 상식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모든 왕국이 이미 자신의 영향력 안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네요), 남의 나라 땅을 마치 제 것인 것처럼 이리저리 떼어주고 돌려주는 제안을 밥먹듯이 했습니다.  가령 러시아와의 평화 조약에 대한 댓가로, 오스트리아 땅인 달마시아 지방의 몇개 섬을 러시아에게 주겠다고 (오스트리아와는 전혀 상의 없이) 제안하기도 했지요.  이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만, 다른 몇가지는 실제로 실천으로 옮기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안스바흐와 하노버입니다.  제3차 대불동맹전쟁에서 프랑스 편에서 싸워준 바이에른에게는 프로이센의 땅인 안스바흐 (Ansbach)를 주었습니다.  물론 프로이센에게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영국 땅인 하노버를 주었지요. 




(안스바흐의 위치입니다.  당시 독일은 저렇게 조각조각난 소공국들이 결혼이나 거래 등의 이유로 전혀 엉뚱한 왕국에 소속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프로이센 소유이던 안스바흐도 정작 프로이센과는 전혀 연결되지 않은 위치에 있었지요.  이 위치가 좀 오묘해서, 1805년 제3차 동맹전쟁 당시, 하노버에서 급히 바이에른으로 내려가던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이 이 안스바흐를 무단 통과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그 결과 프로이센이 하마터면 동맹군 측에 참전할 뻔 하기도 했지요.)



아무튼 프로이센이 그를 뒤통수 치기로 오해할 만한 소지는 충분히 있었습니다만,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의 뒤통수를 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영국과의 협상은 잘 진행되지 않고 있었으므로 실제로 하노버를 영국에게 되돌려 주는 일이 현실화 될 것 같지도 않았고,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위의 예에서처럼 대신 다른 영토를 프로이센에게 보상조로 내줄 생각이 있었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이 써보낸 편지의 양을 보면, 독일 관계로 1통을 보낼 때, 그의 형 조제프 및 그의 의붓아들 외젠에게 이탈리아 문제로 20통을 보낼 정도로 그는 독일이 아닌, 이탈리아 문제에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새로 취득한 영토인 남부 이탈리아, 즉 나폴리 왕국 남단에 있는 칼라브리아 (Calabria) 지방의 민중 반란을 진압하는데 골치를 앓고 있었고, 그의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냥 칼라브리아의 모든 마을에서 무조건 3명씩을 총살하라' 할 정도로 잔혹한 조치를 지시할 정도였습니다. 




(칼라브리아는 이탈리아 반도의 장화 코 끝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그랬으므로, 1806년 8월 중순, 그에게 '프로이센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라는 정보가 전달되었을 때, 그는 상당히 놀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말도 안되는 일로 전쟁이 벌어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작년 아우스테를리츠 직전처럼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등 강력한 동맹국과 손잡고 프랑스를 공격할 좋은 기회를 다 흘려 보낸 뒤, 하필 지금 이런 상황, 즉 이제 의지할 동맹국도 거의 없는 1806년에 홀로 프랑스와 싸운다는 것은 바보나 할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누구나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식적인 기대를 뒤엎고, 프로이센은 과감히 전쟁을 택했습니다.  빌헬름 3세는 8월 8일 러시아의 짜르 알렉상드르 1세에게 편지를 보내 '프로이센이 프랑스와 전쟁을 벌일 때 러시아의 군사적 지원을 기대해도 되는지'를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알렉상드르는 당연히 열광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답장을 보냈습니다.  이에 대해 빌헬름 3세가 9월 6일 보낸 답장에서, 빌헬름 3세는 이미 영국 선박들에 대한 통행 금지를 해지했고, 런던으로부터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으며, 프랑스에 대해 선제 공격에 나서겠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는 9월 초에 이미 전쟁을 결심했던 것입니다.  대체 프로이센은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




(루이즈 왕비입니다.  이 왕비가 프로이센 왕세자이던 빌헬름 3세와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녀의 미모와 총명함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그녀의 친정은 가난에 허덕이던 초라한 prince 가문이었습니다.  그녀가 결혼하여 처음 베를린에 도착했을 때, 그녀를 환영하기 위해 도열한 어린이들을 친히 안아줄 정도로 무척 소탈하고 상냥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흔히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초대 독일 제국 카이저가 되는 빌헬름 1세의 어머니가 바로 저 루이즈 왕비입니다.  알고 보면 대단한 여자를 나폴레옹이 몹시도 괴롭혔던 것이지요.  저렇게 프랑스 한복판 베르사이유의 거울의 방에서 대관식을 올릴 때, 빌헬름 1세는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가 프랑스 손에 겪으신 고초를 생각을 하면서 울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나폴레옹은 프로이센 왕실에서 루이즈 왕비가 차지하고 있던 비중을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빌헬름 3세의 부인인 루이즈(Luise Auguste Wilhelmine Amalie)는 독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Mecklenburg-Strelitz)의 가난한 대공 가문 출신으로서 당시 30세의 아름다운 왕비였습니다.  젊고 총명했던 그녀는 구시대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프로이센 궁정의 활력을 불어넣음과 동시에, 반 프랑스 정서의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프로이센 귀족층은 아직도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의 추억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프랑스 쯤은 한주먹거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작년에 빌헬름 3세가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중립을 지켰던 것에 대해 무척 불만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새로 베르크-클레베스 (Berg-Cleves) 공국의 주인이 된 나폴레옹의 매제 뮈라(Joachim Murat)가 그 곳을 인수인계를 받는 과정에서 보여준 오만함은 프로이센 사람들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습니다.  나폴레옹이 그런 행동에 대해 뮈라를 나무라기는 했습니다만, 콧대높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후손들의 감정은 악화일로를 걸었습니다.  루이즈 왕비는 이런 귀족층의 반 프랑스 감정을 대변하여, 우유부단한 빌헬름 3세에게 반 나폴레옹 기치를 높이 들도록 부추겼습니다.  또한 나폴레옹이 과소평가했던 것이 바로 위에서도 언급한, 프리드리히 대왕이 남겨준 프로이센 귀족층의 자부심과 자존심이었습니다.  왜 프로이센이 1806년 가을이라는, 군사 외교학적으로 자신들에게 최악의 시기에 굳이 프랑스에 대한 선전 포고에 들어갔는지를 이해하려면 프로이센의 역사에 대해 잠깐 살펴보셔야 합니다.  미리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프로이센은 혼자서도 프랑스와 맞짱을 뜰 자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16세기 후반의 프로이센 공국의 모습입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저곳은 독일 땅이었으나, 오늘날 저기는 모두 폴란드 및 러시아, 리투아니아 땅이지요.  히틀러가 다 말아 먹었습니다.  만약 현대 독일이 옛 영토를 되찾겠다고 나선다면... 정말 사단 나는 거에요.  사실 저 영토를 상실한 지도 얼마 안되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만주벌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과는 파급력이 다른 대형 사고가 터지는 겁니다.)



원래 프로이센은 유럽 북동부, 즉 현재의 폴란드 북동쪽에 자리잡았던 종교적 군사 단체인 튜톤 기사단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종교 개혁이 한창이던 1525년, 여태까지 카톨릭 교리에 따라 기사이자 사제 신분이던 기사단장 알베르트 (Albert)가 프로테스탄트로 개종을 하면서, 결혼을 하여 자식을 둘 수 있게 되면서 그를 시조로 프로이센 공국 (Duchy of Prussia, Herzogtum Preußen)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프로이센 공국은 당시 북방의 강국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왕국에 대해 신하의 예를 취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위대한 독일 제국은 히틀러가 대놓고 경멸하던 폴란드 왕국의 지배 하에 있던 일개 공국으로 시작했던 것이지요.  당시 수도는 왕의 도시라는 뜻인 쾨니히스베르크 (Königsberg)였고, 사실 뭐 별로 볼 품 없이 척박하고 가난한 작은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쾨니히스베르크의 모습입니다.  그 왼쪽에 그단스크라는 도시가 보이지요.  저곳의 독일명이 바로 단찌히로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영토를 잃고 난 뒤에도 독일계 주민들이 모여사는 단찌히 자유시가 됩니다.  나중에 히틀러는 동 프로이센으로 가는 길을 내놓으라고 폴란드를 압박하면서 저 단찌히 자유시를 독일 영토로 합병시키는데 성공하지요.)



그러다가 프로이센 공작의 남성 직계가 끊기면서, 혼인 관계로 맺어져 있던 중부 독일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Elector of Brandenburg)가 1618년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바로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독일 제국의 카이저를 배출한 바로 그 호헨촐레른(Hohenzollern) 가문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공국은 사실상 하나의 국가로 운영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그렇다보니,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공국은 동서로 크게 두 덩어리로 나누어진, 기묘한 모양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왕조를 따진다면 프로이센이 브란덴부르크를 먹었다기보다는 브란덴부르크가 프로이센을 먹은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은 프로이센이었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로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하 노릇은 당분간 더 해야 했기 때문에, 왕국이 될 때의 이름은 프로이센 왕국이 되었습니다.)




(프로이센의 팽창으로 인해 결국 하나로 합쳐졌던 브란덴부르크, 즉 중부 프로이센과 동부 프로이센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다시 17세기 때처럼 두동강이 나버립니다.  저 지도에서 독일 본토와 동부 프로이센을 연결하는 해안가에 위에서 언급했던 단치히 자유시가 나오지요.  사실 제1차 세계대전 때만 해도, 저 동부 프로이센 사람들이 많이 슬라브화 되어서, 힌덴부르크인가 루덴도르프인가 아무튼 높은 독일군 장성은 '동부 프로이센 사람들은 독일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러시아인 같다'라며 한탄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이 전장의 한 가운데에 위치했던 브란덴부르크 공국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고, 이 경험은 대선제후 (The Great Elector) 라고 불렸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Friedrich Wilhelm)로 하여금 '무조건 군사 제일주의'를 택하게 합니다.  즉, 1644년 5천5백명의 작은 규모이나마, 프로이센 최초의 상비군이 창설된 것이었습니다.  30년 전쟁 내내 대부분의 국가들이 필요할 때마다 돈으로 모집했던 용병 부대에 의존했던 것에 비하면 획기적인 일이었지요.  이렇게 시작된 '선군정치'는 나름대로 효과를 거두어, 제2차 북방 전쟁에서는 나름 혁혁한 전과를 올렸고, 형식적이나마 폴란드 왕의 신하 신분이던 프로이센 공국은 1657년 브롬베르크 (Bromberg) 조약으로 드디어 폴란드 왕의 신하 신분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공국은 전쟁을 통해 점점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유럽 전역으로부터 박해박던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을 받아들이면서 국력을 크게 확충시켰고, 이는 마침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3세가 1701년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1세로 승격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프로이센이 독립한다는 것을 뜻했고, 향후 독일권의 주도권을 놓고 벌이게 되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경쟁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산업이나 문화의 경쟁력 덕분이 아니라, 이제 4만명 수준으로 성장한 프로이센의 상비군 덕분이었습니다. 




(1701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거행된 프로이센 초대 국왕 프리드리히 1세의 대관식 모습입니다.)



이런 프로이센의 선군정치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버지이자, 프로이센 초대 국왕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Friedrich Wilhelm I) 시대에 더욱 강화됩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흔히 군인 왕으로 불릴 정도로 군대를 좋아하고 우선시했는데, 그 극단적인 모습은 바로 거인 부대, 즉 포츠담의 거인병들로 나타날 정도였습니다.  (포츠담의 거인병에 대해서는 나폴레옹 시대에는 네덜란드 사람들 키가 작았다고 ? http://blog.daum.net/nasica/6862383 참조)  흔히 19세기 유럽 왕가 인물들의 초상이나 사진을 보면 군복을 입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또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루이 14세가 화려한 궁정복을 입고 프랑스의 문화를 뽐낼 때, 그는 검소한 장교복을 입고 군인 왕임을 자랑했던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를 둔 덕분에, 1740년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로이센 왕위와 함께, 무려 6만 명에 달하는 상비군을 물려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프로이센의 인구는 약 250만으로서 유럽에서 12위에 불과했으나, 6만명이라는 군대는 유럽에서 4위에 해당하는 규모였습니다.  이를 위해 프로이센의 국가 재정은 거의 전부가 군대에 투입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프로이센의 재정 규모는 약 700만 탈러 (thaler) 정도였는데, 그 중 500만 탈러가 군 예산이었으니, 한마디로 군대에 미친 나라였지요.




(1745년 호헨프리데베르크 전투에서의 프로이센 척탄병들의 공격 장면입니다.)



프리드리히 2세, 즉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군대를 이끌고 그야말로 중부 유럽을 휩쓸었습니다.  그는 즉위를 하자마자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와 전쟁에 들어갑니다.  흔히 실레지아 (Silesia) 전쟁이라고 불리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그는 프로이센 군대의 신화를 만들어 냈지요.  특히 7년 전쟁 기간 중인 1757년의 로스바흐 (Rossbach) 전투와 로이텐 (Leuthen)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무려 2배가 넘는 병력의 오스트리아 및 그 연합군을 단독으로 격파하는 위엄을 보여주었고, 이 전투들은 프로이센 군에 대해 전 유럽에게 경외심을 새겨넣는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은 중부 유럽에서 오스트리아-프랑스-러시아라는 3대 강적에 맞서 사실상 홀로 싸웠는데도 결코 밀리지 않는 강인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윗 그림이 로스바흐 전투, 아래 그림이 로이텐 전투 모습입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에게도 위기는 있었습니다.  1759년 쿠네르스도르프 (Kunersdorf) 전투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에 참패를 당해 5만명의 병력 중 프리드리히 대왕과 함께 베를린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 불과 3천에 불과할 정도로 수세에 밀리기도 했습니다.  베를린으로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프랑스-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앞두고 프리드리히 대왕이 음독 자살까지 결심할 정도로 사태가 심각했는데, 이때 일어난 일이 소위 '브란덴부르크 가문의 기적' 사건이었습니다.  즉, 러시아의 여걸 엘리자베타 여황이 1762년 1월 사망해버린 것입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프리드리히 대왕의 친척이자 그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표트르 3세였으므로 러시아는 자연스럽게 전선에서 이탈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다시 한번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동구의 거인, 나폴레옹 앞에 서다 - 러시아의 짧은 역사 http://blog.daum.net/nasica/6862541 참조)  어쨌건 프로이센은 강국들의 연합체에 대항하여 혼자서라도 매우 잘 싸울 수 있다는 것은 입증된 셈이었습니다.  나중에 이 사건은 1945년 패망을 앞둔 히틀러에게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다시 한번 독일 제국에 기적이!' 라는 한줄기 최후의 희망을 안겨주는 해프닝을 낳기도 했지요. 




(밀덕들의 필독서, 굽시니스트의 제2차세계대전 만화입니다.  굽시니스트님, 혹시 요즘도 이 책 잘 팔립니까 ?  시사인 만화는 잘 보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바꾸면서 댁의 전화 번호를 잃어버려서 저는 연락을 못해요.  나중에 함 연락 주시면 고기 한판 쏠께요.)



이런 극적인 사건들을 겪으면서, 프로이센의 군사강국 이미지는 점점 더 강화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사망할 즈음인 18세기 후반, 프로이센의 상비군은 무려 19만이 넘는 규모로서, 유럽 4위의 규모였습니다.  이는 당시 프로이센의 인구가 1천만이 채 안되는데도, 무려 3천만의 인구를 가진 대국 프랑스의 군대와 비슷한 수준의 군대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당시 프로이센은 해외 무역이 활발한 것도 아니었고, 영국과 시작되던 산업 혁명은 그야말로 남의 나라 이야기였던, 아직 농노제가 시행되는 전근대적 농업 국가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프로이센의 모든 사회 구조는 군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귀족들은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중산층은 군대에게 급료와 보급품을 주기 위해, 농민들은 군대에 병사들을 공급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프로이센 장관이던 슈뢰터 (Friedrich von Schrötter)는 이렇게 말할 정도였지요. 

"프로이센은 군대를 소유한 국가가 아니라, 국가를 소유한 군대다."




(영국이 의외로 국토에 비해 인구가 많은 편입니다.  저 인구는 영국 본토 및 아일랜드의 인구만 합한 것인데도 그렇습니다.)



프로이센이 이런 나라이다 보니, 프로이센의 왕과 귀족들이 나폴레옹의 상식과는 벗어나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아마 나폴레옹의 지식과 경험이 주로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및 오스트리아 정도에 치우쳐 있었고, 프로이센 같은 2류 국가에 대해서는 별로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낳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나폴레옹이 보았을 때 1806년 9월 러시아를 빼고는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동맹국도 없는 상황에서, 그것도 러시아군이 제대로 동원되어 프로이센의 국경에 도달하기도 전에 먼저 프랑스에 최후 통첩을 보낸 행위는 그야말로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시작하기도 전에 프랑스의 승리가 확정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프로이센의 병력 수는 나폴레옹이 자랑하는 대육군 (Grande Armee)에 거의 육박하는 숫자였고, 현대 미군 조직의 모체가 되는 참모 본부 조직을 이미 갖추고 있을 정도로 편제도 잘 갖추어져 있었으며, 병사들의 제복도 절도가 있고 훌륭한 것을 입는 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1796년 처음 지휘하여 이탈리아를 침공했던 이탈리아 방면군이 군화는 커녕 바지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할 정도로 엉망이었던 것에 비하면 굉장한 군대였지요.  하지만 프로이센 군은 어디까지나 18세기 군대에 불과했습니다.  한마디로,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에서 전혀 발전한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68세 당시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모습입니다.)



먼저, 프로이센 군은 장기 복무를 하는 직업 군인들로 이루어진 군대였습니다.  원래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버지 시절에는 프로이센 출신의 농민들을 소집하여 병사로 훈련시키는 것을 선호하였으나, 프리드리히 대왕은 주로 외국 출신의 병사들을 모병하는 것을 더 선호했습니다.  이는 내국인들을 믿지 않는다던가 외국인들이 더 잘 싸운다든가 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세금 때문이었습니다.  워낙 국가 규모에 비해 상비군이 크다 보니, 군대를 먹이고 입히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믿을 수 있는 자국인들은 가급적 생업에 종사시켜 군대를 먹이고 입힐 세금을 내도록 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1776년 프로이센 군 18만7천 중에 중부 프로이센 및 동부 프로이센 출신은 불과 9만에 불과했습니다.  당연히 많은 부대원들은 프로이센에 대한 충성심이 전혀 없었고, 엄한 규율이 아니면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장교들의 자질이 매우 중요했고, 프로이센 장교들의 우수성은 유럽 전역에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한계가 있었습니다.  원래부터 프로이센 사회 구조상 토지 귀족이었던 융커 (junker)들이 장교단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승진 등은 능력과 성과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문과 연공 서열에 따라 이루어졌거든요.  딱 한번, 저 위에 언급한 1759년 쿠네르스도르프의 참패에서 프로이센 장교단이 거의 몰살을 당하다시피 할 정도의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대왕도 어쩔 수 없이 최초로 귀족이 아닌 중산층 계급 출신들을 장교로 임관시킨 적도 있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책은 곧 다시 귀족 계급에서만 장교를 뽑는 것으로 바뀌었지요.  그 결과, 샤른호스트 (Gerhard von Scharnhorst) 같은 대단한 인물조차도, 평범한 가문 출신이었다는 이유로 1806년 예나-아우어슈타트 전투 당시 나이가 51세였는데도 중령 계급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샤른호스트 장군입니다.  이 양반은 원래 프로이센 출신이 아니라, 하노버 출신으로서, 덕분에 영국군 편에 서서 미국 독립전쟁에도 참여한 바 있습니다.)




(샤른호스트는 저 본인보다도 오히려 2차세계대전 당시의 나찌 독일의 전함으로 더 유명하지요. 물론 저 전함은 윗 양반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입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7년 전쟁 당시에는 이런 점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적대국들도 다 마찬가지였거든요.  하지만 이제 무적의 프로이센 용사들은 전혀 새로운 형태의 적군을 상대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프랑스 혁명이 낳은 징집 국민군이었지요.  이들은 모두 프랑스 국적이었고, 애국심과 황제에 대한 경애심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장교들의 체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승진과 훈장에 대한 기대로 필요할 때는 놀라운 용기와 인내심을 보여주는 군대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장교들은 잘난 집안에 태어났다는 이유가 아니라, 전투 속에서 스스로의 능력을 입증해보였기 때문에 승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란느는 농부의 아들 출신으로서 졸병부터 시작하여 원수가 된 인물이었고, 뮈라는 여관집 아들 출신으로서 20살 때 지나가는 기병대의 멋진 모습에 반해서 학교에서 도망쳐 졸병으로 입대했다가 대공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프랑스 군의 장교들은 졸병이었다가 장교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뭐 개혁 ? 진보 ? 군대는 그저 무조건 명령과 복종 뿐이야 ~  돌격 앞으로 ~  프로이센의 모습입니다.) 



사회 전체도 문제였습니다.  군은 결국 군대를 낳은 사회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곳일 수 밖에 없는데, 프랑스가 계몽주의, 인권 선언과 초기 산업 혁명으로 활기를 띠는 사회였던 반면, 프로이센은 아직도 농도제도가 시행되던 경직된 전근대적 사회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는 곧 산업 생산력과도 직결되었습니다.  그 결과, 프로이센 군의 군복은 그럴싸 했으나, 정작 그들이 가지고 있던 머스켓 소총은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에 사용되던 것을 그대로 물려 받은 것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이런 낡은 소총은 격발시 가끔씩 폭발 사고를 일으켰으므로, 당시 프로이센 군에서는 '사격 훈련시에는 화약을 규정량대로 다 채우지 말고 조금 덜 넣을 것'을 지시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전술과 전략 등 장교단의 교육과 훈련도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에서 전혀 발전이 없었습니다.  훗날 독일 통일의 원동력을 제공한 정규 프로이센 사관 학교는 예나-아우어슈타트 전투 이후인 1810년에 가서야 샤른호스트의 군 개혁 때 만들어진 것일 정도로, 프로이센의 장교 교육은 초보 수준이었습니다.  예나-아우어슈타트 전투 이후 나폴레옹이 프로이센 군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프로이센 군에서 복무했던 폴란드 출신 장교와 대화하다가 프로이센 장교들은 사관 학교에서 응용 기하학 같은 고급 수학은 배우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랄 정도였지요.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에는 전투에 동원되는 병력 규모가 많아야 5~6만 정도로서, 부대 편제는 사단 정도가 고작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군은 10만이 훌쩍 넘는 군대가 하나의 유기체로서 작전을 펼쳤고, 이미 나폴레옹에 의해 군단 체제가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군단 (corps) 이라는 단어의 발음은 왜 콥스가 아니라 코어인지 ? http://blog.daum.net/nasica/6862538 참조) 




(예나-아우어슈타트 전투 이후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 프로이센의 개혁 위원회입니다.  여기서 샤른호스트와 그나이제나우 등이 활약했습니다.  이들은 특히, 베를린에 나폴레옹이 입성할 때 베를린 시민들이 마치 파리 시민들처럼 나폴레옹을 환영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결국 군대가 강해지려면 사회 자체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지요.  그래서 나폴레옹은 패망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이후로도 영원히 남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과거의 영광에 젖어 있던 전설 속의 군대가, 새롭게 등장한 자유스러운 분위기의 강적과 충돌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구체적인 전투 개시와 그 흐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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