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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2류 국가 프로이센 - 잘펠트 (Saalfeld) 전투

by nasica-old 2013.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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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대체 왜 프로이센이 그토록 불리한 상황에서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결심했는지에 대한 배경을 보셨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영광과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프로이센 사람들의 긍지는 대단한 것이었지만, 과연 실력이 그 긍지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지 여부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습니다.  프로이센 사람들이 스스로를 뭐라고 생각했건 간에, 나폴레옹은 애초에 프로이센을 완전히 2류 국가 취급했고, 사실 어떻게 보면 나폴레옹의 그런 오만함이 제4차 동맹전쟁을 불러일으켰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주민들이 프랑스 어를 영어처럼 쓰는 꿈의 도시, 엘리시움입니다.)


 

 

최근 개봉된 영화 중 맷 데이먼이 주연을 맡은 엘리시움이라는 영화가 있었지요.  전 인류의 상위 1%들만 모여 산다는 우주정거장 도시 엘리시움과, 황폐화된 지구에 사는 99%의 갈등을 그린 그저그런 졸작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인상 깊은 장면이 하나 나옵니다.   지구의 빈민촌에 살면서 공장에서 일하는 맷 데이먼의 이웃들은 주로 라틴계라서 스페인 어가 자주 나오는 반면, 엘리시움의 국방장관인 조디 포스터가 그곳 상류 사회의 주민들과 이야기할 때는 프랑스 어가 사용되는 장면입니다.  요즘이야 하도 영어 잘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길거리나 사무실에서 누가 영어로 쏼라쏼라 해도 뭐 쳐다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누가 유창한 프랑스 어로 이야기를 한다면 다들 한번씩 돌아볼 것 같습니다. 

 

 


 

 

(나름 베르사이유 궁전을 벤치마킹하여 만든 상수시 궁전입니다.  물론 그 규모나 화려함은 한참 뒤떨어지지요.)

 

 

 

프랑스의 영광이 많이 퇴색된 지금도 이렇게 프랑스 어와 프랑스 문화가 대우받습니다만, 나폴레옹 당시는 훨씬 더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본인이 프랑스 인도 아닌 주제에 프랑스의 위대함에 대한 자부심이 아주 강했고, 프리드리히 대왕 자신조차도 프랑스 문화에 대한 동경이 아주 대단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자신을 위해 포츠담에 지은 궁전인 상수시 (Sanssouci) 궁의 이름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건 프랑스 어입니다.  Sans (without) souci (care), 즉 '근심없는'이라는 뜻이지요.  프리드리히 대왕은 굳이 프랑스 사람들과 대화할 때 뿐만 아니라, 평상시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도 프랑스 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더 좋아했고, 나름 시도 몇 편 지었는데 모두 프랑스 어로 지은 것들이었습니다.   이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별종이라서 그랬던 것도 아니고, 당시 독일 귀족 사회의 분위기는 '독일어는 평민들이 사용하는 B급 언어'라는 분위기가 좀 있었습니다.  당시 러시아 귀족들도 모두 가정에서는 프랑스 어로 이야기했고, 아이들에게도 프랑스 가정교사를 붙여서 프랑스 어를 일찍부터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이 집에서 러시아 어로 이야기를 하면 벌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남의 나라 이야기 같습니까 ? 요즘 우리나라도 뭐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독일 귀족들이나 러시아 귀족들이 모두 원어민스러운 프랑스 어를 구사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래도 유아 시절에 처음으로 배웠던 언어는 각각 독일어와 러시아 어였기 때문에, 그 억양이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령 나중에 나폴레옹에게 시집온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 루이즈 같은 경우도 독일 억양이 강하게 남아 있는 프랑스 어를 썼다고 하고, 심지어 나폴레옹 3세도 평생 독일 억양이 드러나는 프랑스 어를 썼다고 합니다.  나폴레옹 3세는 정치적 기피 인물로서 소년 시절을 스위스에서 보냈거든요. 

 

 

 


(나폴레옹의 두번째 정실 부인인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즈입니다.  만화책 베르사이유의 궁전 여주인공 생각하셨다면 많이 실망하실 겁니다.)



아무튼 상황이 이랬고, 또 나폴레옹은 자신이 건설한 프랑스 제국의 무력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했으므로, 프로이센이 감히 동맹국도 없이 프랑스와 맞짱을 뜰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하물며 자잘한 소공국들로 분열된 독일 민족의 민족적 자존심 같은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라인 연방의 창설 직후, 프로이센의 감정이 악화되고 있을 무렵, 과거 프로이센 영토였다가 이제 나폴레옹의 보호국인 바이에른 왕국의 영토가 된 안스바흐 (Ansbach)에서 색다른 움직임이 하나 포착되었습니다.  옐린 (Philipp Christian Yelin)이라는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사람이 '최악의 굴욕에 빠진 독일' (Deutschland in seiner tiefen Erniedrigung) 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썼는데, 이걸 뉴렘베르크 (Nuremberg)의 팔름 (Johann Philipp Palm)이라는 출판업자가 배포한 것입니다.  그 내용은 나폴레옹에 대한 공격과 바이에른에 주둔한 프랑스 군의 오만한 행태를 고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건 정식 출판도 아니고 그냥 인쇄물 형태의 배포였으므로 어떻게 보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것이었으나, 나폴레옹은 자신의 권력은 검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는 독재자였으므로, 이런 출판물에 대해 무척 관심이 많은 편이었던 점이 문제였습니다.  나폴레옹 본인이 그것을 대략 보고는, 저작자를 체포하여 24시간 안에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어차피 프랑스 인도 아니고 한낱 독일 위성국가의 평민이었으니까요.  이 인쇄물에는 작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으므로 프랑스 당국은 옐린의 존재는 찾지 못했으나, 인쇄물을 만든 팔름은 체포할 수 있었고, 작자를 대라는 추궁에 입을 다문 팔름을 변호인도 없이 약식 재판에 올린 뒤 그 다음날 새벽에 총살해버렸습니다. 

 

 

 

(팔름의 동상입니다.  물론 훨씬 후대에, 독일 민족주의가 성장할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사소한 저항도 이렇게 강경하게 탄압하여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했던 모양인데, 이는 완전한 오판이었습니다.  팔름의 처형 소식은 그의 인쇄물보다도 더 빠르고 힘차게 독일 전역에 전해졌고, 그렇쟎아도 험악했던 프로이센의 감정을 더욱 자극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이센 왕실 근위대원들이 베를린의 프랑스 대사관 앞에 몰려가 대사관 계단에 대고 자신들의 칼을 가는 장면까지 공공연하게 연출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이센의 우유부단한 왕 빌헬름 3세는 전쟁을 결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원래 국가간의 일이건 개인적인 일이건 싸움질의 본질은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니 저렇게 감정적으로 나가면 좋을 것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국민적 분노야 정신적인 것이고,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런 상황에서 프로이센이 전쟁을 걸어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판단했던 것은 상황이 프랑스에게 너무 유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대육군 (Grande Armee)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해 라인 강 동쪽 라인 연방 동맹국 내의 강력한 요새 안에 전진 배치되어 있었으므로, 나폴레옹의 명령만 있으면 언제든지 20만 대군이 프로이센이든 오스트리아든 원하는 곳을 들이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고, 거기에 양념으로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 등 라인 연방의 독일군 2만6천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는 바로 작년에 처참한 피해를 입고 간신히 회복 중인 상태였으므로, 프로이센의 동맹이 되어줄 만한 곳으로는 러시아와 영국 정도 밖에 없었는데, 러시아는 너무 멀었고, 정작 영국은 바로 하노버 때문에라도 아직 프로이센과 형식적인 전쟁 중인 상태였습니다.  결과적으로 프로이센의 유일한 동맹군은 9월 12일, 프로이센 군이 국경을 넘어 들어가 협박하다시피 하여 간신히 동맹을 맺은 작센 (Saxony) 뿐이었습니다. 

 

 

 

(이건 1815년 이후 제1차 세계대전까지의 작센 지도이긴 합니다만, 에르푸르, 셈니츠, 바이마르 등 주요 도시들의 위치는 한번 기억해두실 만 합니다.  이번 제4차 동맹전쟁은 나폴레옹이 저 튀링겐 삼림지대를 돌파하여 작센과 프로이센 사이를 파고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의 움직임이 진짜 전쟁을 뜻한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9월 3일에 러시아가 프랑스의 평화 조약 제안을 거부하고 전쟁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것이 최초였다고 합니다.   이미 프로이센이 8월 9일에 동원령을 내린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작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전에도 그런 동원령은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진짜 전쟁 의도라기보다는 협박용 정도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나폴레옹은 깜짝 놀랐습니다만 그건 '아뿔사, 큰일났다'라는 것이 아니라,  '프로이센의 빌헬름 3세가 병신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상황 판단 못하는 병신인 줄은 몰랐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빌헬름 3세와 그의 측근들은 그런 비웃음을 살만 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일단 영국은 당연하게도, 프로이센이 '하노버를 영국으로 반환해준다'는 약속을 하기 전에는 직접적인 지원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혀 왔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이번 4차 동맹전쟁에서 동맹군이 나폴레옹에게 일단 대승을 거둔다면 모를까...' 하는 입장이었지요.  빌헬름 3세와 긴밀한 서신을 주고 받으며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던 알렉상드르 1세의 러시아가 사실상 프로이센의 유일한 동맹국이었는데, 러시아와의 협조도 그다지 원활하지가 못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협의하기 위해 프로이센에서 온다는 군사 사절단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렸으나, 정작 나타난 프로이센 장교단은 아무런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러시아 남쪽에서는 오스만 투르크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사주를 받은 오스만 투르크가 러시아의 남쪽 변경을 건드린 것이었습니다.  과거 나폴레옹의 적국이었던 오스만 투르크가 왜 나폴레옹의 연합군이 되었냐고요 ?  국제 사회에 영원한 적이란 없는 법입니다.  오스만은 지리적 위치상 남쪽으로 팽창하려는 러시아와 과거부터 전쟁을 계속했던 불구대천의 원수였는데, 러시아의 적국이라면 당연히 오스만의 친구가 될 수 있었지요.  어쨌거나, 프로이센에 대한 러시아의 조기 지원은 물건너 가버린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용의주도함은 정말 치밀하여, 향후 있을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9월 초 5만명의 신병을 징집하도록 명령도 내렸습니다.

 

 

 

(에게 해의 아토스 인근에서 투르크 해군을 상대로 벌어진 해전에서의 러시아 함대의 모습입니다.  1806년에 시작된 이 러시아-투르크 전쟁은 1812년까지 이어지는데, 전쟁의 시초는 아우스테를리츠에서 개박살이 난 러시아의 모습을 보고 투르크가 용기를 얻는데서 시작됩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이스탄불 앞의 다다넬즈 해협을 봉쇄하고 러시아 해군이 지중해로 진입하는 것을 막으려 했지요.  물론 전쟁의 결말은 오스만 투르크에게 좋지는 않았습니다.)



프로이센의 자체적인 전쟁 준비도 그다지 신통치 않았습니다.  원래 프로이센은 약 19만에 가까운 상비군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고, 실제로 1806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앞두고 17만5천에 달하는 병력에 대해 동원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나라 전체를 홀랑 비워두고 병력을 집결시킬 수는 없었으므로, 나폴레옹에 맞설 야전군으로 동원 가능한 것은 약 12만5천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20만이라고 일컬어지는 나폴레옹의 대육군, 그러니까 사실상 라인 방면군에 비하면 절반 정도 밖에 안되는 숫자였습니다.  게다가 지휘 체계도 암울했습니다.  인사가 만사라고 했거늘, 빌헬름 3세는 작년에 우물쭈물하다가 나폴레옹이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대승을 거두게 내버려 둔 비둘기파 하우그비츠 (Haugwitz)를 경질하지 않고 계속 국무 대신으로 유임시켰습니다.  이미 전쟁을 하기로 한 마당에 국무 대신이 누구냐 하는 것이 뭐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프로이센의 장교들과 매파 인사들은 이 조치에 크게 실망했고, 영국이나 러시아 등에게도 '빌헬름 3세가 혹시 작년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프랑스와 화친을 맺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했습니다.  이는 영국이나 러시아가 이번 전쟁에서 프로이센에 대해 즉각적이고 현실적인 지원을 하는 것을 막는 결과를 낳았지요.   또, 군 총사령관으로는 1792년 발미 (Valmy) 전투로 유명(?)해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Karl Wilhelm Ferdinand, Fürst und Herzog von Braunschweig-Wolfenbüttel, Duke of Brunswick-Wolfenbüttel, 영어로는 브룬스윅 공작)이 임명되었습니다.  (발미에서 생긴 일 http://blog.daum.net/nasica/6862441 참조) 이 조치도 많은 이들의 맥을 빼놓았습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당시 71세의 노인이었는데, 비교적 젊은 시절이었던 1792년에조차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후퇴 결정을 내리는 바람에 프랑스 혁명군이 발미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내버려 둔 장본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놀랍게도 '1806년의 임박한 전쟁의 발발을 막기 위해' 총사령관직을 수락했다는 말을 측근들에게 할 정도로 소극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이 양반이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입니다.  이 양반이 발미에서 보여준 어정쩡한 지휘에 대해서는 많은 구설수가 있었는데, 그가 전사한 이후 그의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프랑스 왕가의 보석류들이 그가 당시 뇌물을 받았다는 의심을 낳게 했습니다.)

 

 

게다가 병력의 집결도 제대로 안 되어 있었습니다.  9월 30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과 빌헬름 3세는 5만의 병력을 가진 주력 부대와 함께 나움부르크 (Naumburg)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곳을 향하여 조금씩 집결하고 있는 증권군 1만2천명을 막연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호헨로헤 대공 (Friedrich Ludwig Fürst zu Hohenlohe-Ingelfingen)은 1만9천의 병력과 함께 나움부르크에서 며칠 거리에 있는 셈니츠 (Chemnitz)에 있었는데, 그도 작센 군 2만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작센 군 2만은 아직 동원조차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뤼헬 (Ernst von Rüchel) 장군은 1만이 좀 넘는 병력을 끌고 아이제나흐 (Eisenach)와 에르푸르트 (Erfurt) 사이에서 역시 보충병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프로이센 군은 크게 3개 집단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인근 지역에 대한 정확한 지도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의 곁에 마복시 (Grand Ecuyer, Master of Horses, 원래 왕의 마굿간지기 계급이지요)인 콜랭쿠르 (Armand Augustin Louis de Caulaincourt) 장군이 항상 인근의 지도를 소지하고 있었던 것과 크게 대조되는 일이었습니다.

 

 

 

(아르망 콜랭쿠르입니다.  이 양반은 후작 가문의 귀족 출신으로서, 독일어는 물론 러시아 어도 유창하게 구사하는 진짜 엘리트였습니다.  덕분에 그는 틸지트 조약 이후 러시아 대사로 임명되어 러시아와 프랑스의 관계 유지 임무를 맡게 되지요.  하지만 원래 나폴레옹을 숭상하던 그는, 앙기앵 공작의 사법 살인 사건 이후 나폴레옹에 대한 콩깍지가 벗겨졌고, 나폴레옹과의 사이가 예전 같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의 동생 오귀스트 콜랭쿠르 장군이 1812년 러시아 원정 중에 전사하는 가족적인 비극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때 나폴레옹의 편에 섰고, 덕분에 그는 워털루 이후 체포 대상 명단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를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러시아의 짜르 알렉상드르 1세의 주장으로 그 살생부에서 삭제되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의 빌헬름 3세는 당당하게 나폴레옹에게 최후 통첩을 보냈습니다.  10월 8일까지 라인 강 동쪽에 있는 모든 프랑스 군을 철수시키라는 것이었지요.  이 최후 통첩장은 베를린에서 파리까지 도착하는데 다소 시간이 오래 걸려, 10월 1일에야 탈레랑의 손에 전달 되었습니다.   하지만 뭐 상관없었습니다.  그 통첩장을 읽을 나폴레옹은 이미 9월 20일에 라인 연방군과 거기 주둔한 프랑스 군에게 동원령을 내렸고, 9월 25일에는 직접 파리를 떠나 불과 3일 뒤인 28일에는 라인 강변의 마인츠 (Mainz)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탈레랑이 프로이센의 최후 통첩장을 다시 동쪽의 나폴레옹에게 보내던 10월 2일, 이미 나폴레옹은 뷔르츠부르크에서 라인 연방 소속의 독일 소왕국들의 국왕 및 대공들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정작 나폴레옹 본인이 그 최후 통첩장을 읽은 것은 10월 7일이었는데,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의 최후 통첩일이 만료되기 전에 프로이센을 침공하기로 합니다.  그 결정에 따라 바로 다음날인 10월 8일부터, 프랑스 군은 바이에른 왕국 북부 국경인 프랑코니아 숲, 즉 프랑켄발트 (Frankenwald)를 통해 베를린으로 진격을 시작합니다.  나폴레옹의 1차 목표는 프로이센과 작센의 사이로 재빠르게 파고들어 진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키지 않은 전쟁에 반강제로 참전하게 된 작센은 쉽게 전쟁에서 이탈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러고난 뒤 완전히 고립된 프로이센을 요리할 생각이었지요.  그는 이미 10월 5일에 작센 침공을 위한 구체적인 명령서를 각 군단에게 전달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이 중앙에서 앞장을 서고, 다부의 제3군단과 뮈라의 예비 기병대, 그리고 르페브르 (François Joseph Lefebvre) 원수의 황실 근위대가 그 뒤를 따르도록 했습니다.  우익은 술트의 제4군단과 네의 제6군단, 그리고 바이에른 군이 담당했고, 좌익은 란의 제5군단, 그리고 오쥬로의 제7군단이 맡도록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우익에게 호프 (Hof)를, 중군에게는 크로나크 (Kronach)로부터 슐라이츠 (Schleiz)로의 길을, 좌익에게는 코부르크 (Coburg)로부터 잘펠트 (Saalfeld)로 가는 길을 따르도록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비록 프로이센을 2류 국가 취급했지만, 그래도 프리드리히 대왕의 위엄은 몇십년이 흐른 당시에도 여전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조세핀 황후의 친구였던 레뮈자 부인 (Madame de Rémusat)에 말하기를 "프로이센의 기병대는 명성이 자자하오.  그에 비하면 우리 기병대는 별로 호평을 못 받고 있지,  우리 장교들은 이번 전쟁에서는 오스트리아 군으로부터 보다는 더 억센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소" 라며 프로이센 군 자체에 대해서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의 대육군 병력의 상당수가 바이에른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나폴레옹의 주공격은 이 프랑코니아 숲, 즉 프랑켄발트를 통과할 것임이 확실했습니다.)

 

 

 

(이 지도에 초록색으로 표시된 곳이 프랑켄발트 자연공원입니다.  바이에른과 작센, 프로이센 (브란덴부르크) 등의 위치를 눈여겨 보십시오.)



이렇게 나폴레옹이 명확한 목표와 치밀한 작전 계획을 가지고 움직이는 동안, 프로이센 군은 아직도 당장 1차적인 목표도 정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즉, 당장 전쟁이 시작되면, 프로이센 군의 목표가 무엇인지, 즉 파리로의 진격인지 아니면 국경을 사수하는 것인지, 또는 러시아 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적절한 방어선까지 후퇴하는 것인지도 불분명했습니다.  총 지휘관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일단 후퇴하여 러시아 군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페르디난트 대공이나 호헨로헤 대공 같은 매파는 즉각 프랑스 군을 찾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지휘관들이 각자 대부대를 이끌고 있는데 합의된 전술적 목표조차 없다 보니, 병력의 집결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프로이센에 인물이 없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전략가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샤른호스트(Gerhard von Scharnhorst)가 참모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 참모장 자리는 샤른호스트 뿐만 아니라 풀 (Karl Ludwig von Phull) 장군 및 마센바흐 (Rudolf Massenbach) 대령과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가문과 신분 위주로 돌아가는 프로이센의 참모본부에서 샤른호스트 대령의 영향력은 보잘 것 없어서, 병력 집중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그의 목소리는 방향성도 없고 지루한 토론 속에 묻혀 아무 반향을 얻지 못했습니다.  예나 전투가 벌어지기 바로 1주일 전인 10월 7일, 이런 참모 회의에 회의를 느낀 샤른호스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할런지는 오직 신만이 아신다."

 

 

(1806년 10월 9일의 슐라이츠 전투의 지도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당장 프로이센 군과 프랑스 군의 충돌이 시작됩니다.  프랑스 군이 국경을 넘은 바로 다음 날인 10월 9일, 작센을 향해 진격하던 베르나도트와 뮈라가 이끈 2만의 프랑스 군은 그를 막기 위해 나선 타우엔치엔 (Bogislav Tauentzien)이 이끄는 9천의 프로이센 및 작센 연합군과 슐라이츠 (Scheiz)에서 조우했습니다.  결과는 당연히 프랑스 군의 압승이었습니다.  타우엔치엔은 약 5백의 사상자와 포로를 내고 후퇴했는데, 이 작은 전투로 인해 그 다음날의 좀더 큰 비극이 빚어집니다.  프랑스 군이 작센으로 몰려가고 있다는 것이 프로이센 군에게 알려지자, 프로이센 군의 혼란이 더 심해진 것입니다.  작센 방면에 펼쳐져 있던 프로이센 군의 지휘관인 호헨로헤 대공은 좀더 서쪽에 있었는데, 이 슐라이츠 전투 소식을 접하고는 그의 좌익을 루돌슈타트 (Rudolstadt)와 예나 (Jena) 사이에 집결하여 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총사령관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이 이동을 제지했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 젊은 페르디난트 왕자 (Louis Ferdinand, 본명은 Friedrich Ludwig Christian)는 호헨로헤 대공의 명령을 잘못 해석하여 잘펠트 (Saalfeld)를 사수하라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당대 프로이센의 희망이라고 일컬어지던 엄친아 페르디난트 왕자의 모습입니다.)



당시 34세였던 페르디난트 왕자는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3세의 사촌으로서, 이번 전쟁에서 루이즈 왕비와 함께 대표적인 매파 인사였고, 우유부단한 빌헬름 3세나 노쇠하고 소극적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등을 대신하여 프로이센 장교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던 중요 인물이었습니다.  이 젊고 용감한 왕자는 엄친아답게 작곡에도 소질이 있던 상당한 수준의 피아니스트이기도 했습니다.  베토벤이 1803년 초연된 3번 피아노 콘체르토를 이 왕자에게 헌정할 정도였거든요.

 

 

 

(베토벤의 피아노 콘체르토 제3번입니다.  저 중간 아래에 프로이센의 루이 페르디난트에게 헌정한다는 글자 보이십니까 ?)



바로 그 다음날인 10월 10일, 란의 제5군단 전체인 1만3천이 페르디난트 왕자가 약 8천의 병력으로 지키고 있는 잘펠트로 진격해 들어왔습니다.  란은 이 곳을 지키고 있던 프로이센 군이 당연히 후퇴하여 예나 방면의 프로이센 군 본대에 합류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제 받은 명령도 있고, 또 당장 눈 앞에 들어온 프랑스 군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시 외곽에 나가 잘레 (Saale) 강가에 진을 치고 프랑스 군과 한판 야전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상대도 잘못 골랐고, 강을 등지는 위치를 고른 것도 잘못 되었습니다.  란이 현장에 와서 보니 자신의 제5군단의 2/3 정도되는 병력이 저지대인 강가에 배수의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는 넓직한 언덕이 있었고요.  란은 뭐 이런 바보들이 있나 싶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언덕을 차지한 뒤, 먼저 포병대를 앞세워 피할 데도 없는 저 아래 강변에 늘어선 프로이센 군을 상대로 포격 연습을 신나게 했습니다.  프로이센 군에는 프랑스 군의 14문을 압도하는 규모인 44문의 대포를 갖춘 포병대가 있었으나, 프랑스 군은 높은 언덕 위에 숨어 있었으므로 적절한 반격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대포알 세례를 받고 프로이센 군의 전열이 흐트러지자, 그는 언덕 아래로 보병들을 진격시켰습니다.  동시에 프로이센 군의 측면으로 기병대를 돌격시켰습니다.  도망칠 곳도 없이 한참 동안 일방적인 포격에 시달리다, 눈 앞에 압도적인 병력의 프랑스 군이 밀려오자 프로이센 군의 본진은 그대로 무너져 버렸습니다. 

 

 


(란 원수의 잘펠트 전투에서의 승리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데물랭 Auguste-François Desmoulins 의 작품입니다.)

 


보병들이 무너져 잘펠트 시쪽을 향해 도주하는 것을 본 페르디난트 왕자는 이미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실수로 인해 부대가 무너져 내리자, 그를 조금이라도 만회하여 보병들이 도주할 길을 터주려 했습니다.  그는 기병대의 선두에 서서, 프랑스 보병대의 측면으로 돌격해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그 돌격은 능숙한 프랑스 보병들의 방어를 뚫지 못했고, 곧 그와 그의 기병대는 프랑스 기병대에게 둘러쌓여 혼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때, 페르디난트 왕자 앞을 쥔데 (Guindet)라는 이름의 프랑스 제10 경기병대 부사관이 가로 막으며 항복할 것을 외쳤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페르디난트 왕자는 아무 대꾸 없이 들고 있던 검을 휘둘러 쥔데의 얼굴을 후려 갈겼고, 동시 쥔데는 왕자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그것이 프로이센 군부의 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던 페르디난트 왕자의 최후였습니다.  쥔데는 얼굴에 큰 상처를 입었으나, 프린스 슬레이어가 되는 영광을 누렸지요.  프로이센 군은 약 400명의 사상자와 함께 1천이 넘는 포로를 냈습니다.  이 소식은 당연히 프로이센 군에게 큰 동요를 안겨 주었습니다.  잘펠트의 상실은 별 것 아닐 수 있었으나, 페르디난트의 죽음은 매우 큰 심리적 충격을 주었습니다.

 

 

 

 

(페르디난트 왕자의 전사 장면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다만 이 그림에서는 34세의 왕자를 너무 늙은 모습으로 그린 것 같습니다...)



이런 좋지 않은 시작과 함께, 프로이센 군은 예나-아우어슈타트에서의 비극적 종말을 향해 치닫게 됩니다. 그렇다고, 프랑스 군에게는 모든 사정이 다 좋았는가 라고 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에게는 나름대로의 문제점이 있었고, 결국 그 문제점은 아우어슈타트에서 많은 프랑스 병사들의 목숨을 빼앗는 참극을 낳게 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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