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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모범생, 한방을 보여주다 - 아우어슈테트 전투

by nasica-old 2013.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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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0년 어느 봄날, 욘 (Yonnes) 지방의 아눅스 (Annoux) 마을의 어느 농가에서 가난한 귀족이 아이를 낳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귀족 제도는 웰링턴 공작의 이름이 웰링턴이 아니라고 ? http://blog.daum.net/nasica/6751480 편에서 보셨다시피 영국과는 달리 귀족의 자녀들은 모두 귀족으로 인정받았고 재산도 분할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가난한 귀족들이 꽤 많았습니다.  전체 프랑스 인구 100명 중 1명이 귀족일 정도였으니, 이렇게 가난한 귀족이 없다면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었겠지요.  이 귀족이 아이를 낳은 농가조차도, 이 귀족 소유가 아니라 빌린 셋집에 불과했습니다.  그나마 이 양반은 이렇게 낳은 아이가 8살 되던 해, 사냥을 나갔다가 사고로 비명횡사하고 맙니다. 

 

 

 

 

(마세나와 함께 나폴레옹의 부하들 중 최고의 지휘관으로 뽑히는 다부 원수입니다.  여기서도 그의 이름이 Davoust로 표기된 것을 눈여겨 보십시요.)

 

 

짐작들 하시겠지만 그 불운한 가난뱅이 귀족의 성은 d'Avout 였고, 그 아이의 이름은 루이 니콜라 다부 (Louis-Nicolas d'Avout) 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살벌한 혁명 시절을 거치면서 d'Avout라는 de가 들어가는 귀족스러운 이름 대신 그냥 Davout라는 이름으로 스펠링 되었는데, 그의 살아 생전에는 주로 Davoust라고 S 자까지 첨가되어 사용되곤 했습니다.  사실 프랑스 이름을 보다 보면 어차피 발음도 안 할 거면서 웬 스펠링이 그렇게 복잡한지 의아한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프랑스 인들, 심지어 그 이름의 장본인조차도 소리나는 대로 제멋대로 스펠링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레미제라블 제1권에서 미리엘 신부의 여동생이 어느 노르망디 귀족 가문인 Faux (포) 집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on ecrit Faux, Fauq et Faoucq' 즉 그 스펠링은 Faux라고도 하고, Fauq라고도 하고, 그리고 Faoucq라고 하기도 한다 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지요.  덕분에 나폴레옹이 만든 개선문에도 다부의 이름은 요즘처럼 Davout가 아니라 Davoust라고 당당히 적혀 있습니다.

 

 

 

(개선문에 새겨진 다부의 이름 표기도 S가 들어간 Davoust로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썩어도 준치라고 그래도 귀족 가문이었던 덕분에, 다부는 처음에는 옥세르 (Auxerre), 이어서 파리의 사관 학교를 나와 롸얄-상파뉴 (Royal-Champagne)에 예비 소위로 임관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가난뱅이 귀족 출신이었던 나폴레옹과 같은 코스였지요.  다부는 나폴레옹보다 1살 어렸는데, 나폴레옹이 사관학교를 워낙 쾌속으로 조기 졸업하는 바람에 그 둘은 사관 학교 시절 서로 사귈 기회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어서 프랑스 혁명이 터집니다.

 

다부는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구호에 적극 호응했습니다.  하지만 젊은 이상주의자였던 다부는 혁명 과정의 여러가지 부조리에 격렬하게 항의하다 체포되어 6주간 감옥 신세를 지기도 했지요.  하지만 제대로 된 장교가 부족했던 혼란 시기인지라, 결국 그는 고향인 욘 지방의 제3 자원병 대대의 지휘관으로서 중령 계급으로 승진합니다. 

 

 

 

(두무리에 장군입니다.  사실 발미 전투의 승리 뒤에는 이 양반의 업적이 큽니다만, 그는 네어윈든 전투 이후 오스트리아 군과 내통한 것 때문에 모든 명예를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영국 정부의 얼마되지 않는 연금으로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의 원칙주의적인 엄격하고도 공정한 처신은 일찍부터 발휘되었습니다.  카톨릭 사제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극에 달했던 1792년 초, 다부는 그가 주둔한 마을에서 일단의 카톨릭 사제들이 변장을 하고 숨어있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잡혀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하자, 부대를 이끌고 현장에 개입하여 '이들을 죽이려거든 우리를 밟고 지나가라'고 선언하며 그들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제들을 풀어준 것도 아니고, 그대로 감옥에 투옥했지요.  그는 1793년 네덜란드 네어윈든 (Neerwinden) 전투에서 두무리에 (Charles Francois Dumouriez) 장군 밑에서 싸웠는데, 비록 이 전투는 패배로 끝났지만 그의 부대는 잘 싸워 상부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히, 무기력한 혁명 정부에 환멸을 느낀 두무리에 장군이 오스트리아 군과 내통하는 기미를 보이자, 정부가 그의 직속 부하였던 다부에게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하달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때, 그는 평소 친했던 두무리에가 진심으로 설득하는데도 불구하고 망설이지 않고 그에게 발포 명령과 함께 추격 명령을 내리는 엄정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때 두무리에는 나중에 레미제라블 시대의 왕이 되는 루이 필립 (왜 마리우스는 감옥에 가지 않았을까 ? http://blog.daum.net/nasica/6862532 참조)과 함께 다부의 가열찬 추격에 거의 체포될 뻔 하다가 간신히 도망치는 위기를 넘겼습니다. 

 

 

 

(1793년 네어윈든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군은 심각한 문제를 보이며 오스트리아 군에게 완패했지요.)

 

 

 

이 사건으로 인해, 다부는 공화국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 받았고 그는 이후 대령으로, 장군(여단장)으로 쾌속 승진을 거듭했습니다.  그것도 부족하여 그는 사단장으로의 승진까지 제안 받았으나, 그는 자신이 너무 젊다는 이유로 사양했습니다.  이렇게 겸손함까지 갖춘 다부였건만, 그도 자코뱅의 공포 정치를 무사히 빠져나오지는 못했습니다.  장군으로 승진한지 얼마 안되어, 그는 귀족이라는 출신 성분이 문제가 되어 군에서 예편해야 했습니다.  사실 이는 '출신에 상관없이 오직 재능과 덕성으로'라는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에 정면으로 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그의 홀어머니도 해외로 도주한 망명 귀족들과 서신을 주고 받으며 내통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이런 위기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어머니의 재판정을 향해 가던 다부는 한밤중에 몰래 여관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가서 어머니의 편지들을 태워버리고 태연하게 돌아오는 활약을 펼쳐 어머니를 증거 부족으로 인한 무죄 판결을 끌어냈습니다. 

 

다부의 야인 시대는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로베스피에르가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제거되자, 다시 군문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모젤 (Moselle) 방면군, 즉 독일 방면군 기병 여단장으로 취임한 것이지요.  그는 여기서 드제 (Desaix)와 우디노 (Oudinot) 등 쟁쟁한 인물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만하임 (Mannheim) 전투 등에서 공을 세우기도 했으나, 오스트리아 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봉변을 당하기도 하지요.  포로 교환으로 풀려난 다부는 1796년부터 다시 오스트리아 전선에서 주로 활약했습니다.

 

 

 

(우디노입니다.  그는 평범한 농부이자 양조업자 아들로 태어나 군에 졸병으로 입대했다가, 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장교 승진이 안되자 그냥 하사관 계급으로 제대해버렸지요.  나중에 그는 친구 다부와는 달리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때도 나폴레옹 편에 서지 않는 명확한 판단력을 보여주었고, 덕분에 81세로 천수를 누리며 잘 살다 갔습니다.)

 

 

 

1798년은 다부의 인생에 있어서 무척 중요한 한 해였습니다.  다부는 영국 방면군에 배속되었는데, 이때 드제가 그를 보나파르트 장군이라는 코르시카 출신 장군에게 소개를 해준 것입니다.  드제를 높이 평가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드제가 강추하는 다부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를 이집트 원정군으로 전출시켜 이집트에 데려갔습니다.   이집트에서 다부는 주로 드제의 밑에서 활약했습니다.  가령 1798년의 피라미드 전투에서는 드제 사단 소속의 기병대를 지휘했지요.  하지만 주로 드제 휘하에 있다 보니, 나중에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야반도주할 때는 나폴레옹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오는 일행에 낄 수가 없었습니다.  (뮈롱, 나폴레옹을 2번 살리다 http://blog.daum.net/nasica/6862498 참조) 이집트에 남은 드제와 다부는 나폴레옹의 지시를 어기고 이집트에서 철수하고자 하는 클레베르에게 반대했으나, 동료 장군들이 모두 철수에 한표를 던지자, 다부도 어쩔 수 없이 클레베르의 철수 계획에 동의하게 됩니다.  클레베르는 다부를 사단장으로 승진시켜주었으나, 다부는 그를 거절했습니다.  동의의 대가로 승진을 얻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싫었던 것이지요.  참 대단히 꼬장꼬장한 성격이었습니다.

 

이렇게 골수 보나파르트파인데다 성격도 대쪽같은 다부가 클레베르에게는 무척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클레베르는 1800년 3월, 드제와 다부를 세트로 묶어 프랑스로 귀환하는 프리깃 함 편에 귀국시켰는데, 영국 해군과는 이미 안전 통행을 위한 협정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배가 그만 영국 해군에게 나포되는 바람에 드제와 다부는 약 1달 정도 영국 해군에게 억류되는 신세가 되어야 했습니다.  다행히 뒤늦게 통행 협정이 효력을 발휘하여, 그는 드제와 함께 1800년 5월 말에야 툴롱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원래 이렇게 해외에서 돌아오면 해외에서 묻혀왔을 수 있는 전염병 확인을 위해 몇 주간 격리 수용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런데 드제는 급히 이집트에서 클레베르가 영국과 단독 강화를 맺었다는 소식을 전한다고 이 검역 기간도 거치지 않고 곧장 나폴레옹이 출정한 마렝고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의 이름을 대면 모든 것이 무사 통과였거든요.  다부는 이때 검역 기간을 준수하느라고 결국 마렝고에는 참전하지 못했지요.  정말 준법 정신이 투철한 다부였습니다.  다부는 이렇게 해서 검역 격리 수용소에서 친구 드제의 전사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후 다부도 이탈리아 전선에 참전하여 사단장으로 승진했으나, 이미 대부분의 전투는 종결된 이후라서 큰 활약은 없었습니다.

 

 

 

(루브르에 모셔진 드제의 석상입니다.  여기서는 다소 추남으로 묘사되었는데, 실제 얼굴은 더 미남이었던 모양입니다.)

 

 

나폴레옹은 원래 드제를 정말 아끼고 높이 평가했었습니다.  이제 드제가 그렇게 간 후, 그의 애정은 마치 드제의 친구이던 다부에게 옮겨간 듯 했습니다.  제2차 대불동맹전쟁이 종결된 이후, 나폴레옹은 다부를 자신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통령 근위대의 척탄병 부대 지휘관 및 기병대 검열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은 그를 자신의 매제 르클레르 (Leclerc)의 여동생인 에메 르클레르 (Aimee Leclerc)와 결혼시킴으로써, 그와 혈연 관계까지 맺었지요.  실은 이 1801년의 결혼은 다부의 두번째 결혼이었는데, 나폴레옹의 입장에서는 이 결혼이 정략 결혼이었을지 몰라도, 다부에게는 정말 천생연분 운명의 사랑을 만난 행복한 결혼이었습니다.  그는 이후 작전에 나갈 때마다 에메의 작은 초상화를 끼워 넣은 회중 시계를 소중히 간직하고 다녔으며, 군인의 숙명상 어쩔 수 없이 이 부부는 결혼 생활의 상당 기간을 떨어져 지낼 수 밖에 없었는데도 이 둘의 금슬은 정말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킬 정도로 애틋했다고 합니다. 

 

 

(다부의 부인이자 나폴레옹의 매제 르클레르의 여동생인 루이즈 에메 (Louise Aimée Julie Leclerc) 입니다.  1782년 생이니, 다부보다는 12살 연하네요.  나중에 다부가 에크뮐 대공 (Prince d'Eckmuhl) 이 되었으므로 저 그림에도 에크뮐 대공비라고 타이틀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런 나폴레옹의 총애 덕분에,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면서 그는 초대 제국 원수 중 한명으로, 그것도 최연소 원수로 임명되는 영광을 누립니다.  하지만 이런 승진은 다부에게 주변의 질투도 함께 가져 왔습니다.  이때 함께 제국 원수로 임명된 마세나, 술트, 오쥬로 등등의 인물들에 비하면 확실히 다부는 나폴레옹의 총애를 빼면 여태까지의 전공 등에서 크게 밀리는 것이 사실이었거든요.  게다가 여태까지의 일화에서 잘 드러나듯이, 다부는 고고한 원칙론자 모범생이어서, 전장에서 약탈을 엄금하고 자신도 청렴한 삶을 사는 등, 주변의 별로 청렴하지 못한 동료들로부터 '재수없다'라는 반응을 끌어내기에 충분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폴레옹과 함께 악전고투를 겪으며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여관이나 과일가게 아들 및 농부 출신의 원수들은 귀족 출신의 선비인 척 하는 다부를 상당히 싫어했습니다.  특히 마르몽 (Marmont) 같은 경우는 다부 같은 애송이가 자신과 함께 원수 계급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대놓고 빈정거릴 정도였습니다.  이런 주변의 질시에도 불구하고, 다부는 계속 고고한 삶을 살았습니다.  아름다운 일화도 하나 있는데, 이 평화 시기에 그는 소년 시절을 보냈던 옥세르의 사관학교를 찾아가서 그를 가르친 은사를 뵙고, 혁명 탓에 문을 닫은 그 사관학교를 다시 열어 그 은사가 교장직을 맡도록 해줬다고 합니다.

 

 

 

(마르몽 Auguste de Marmont 의 모습입니다.  그는 하급 귀족 출신으로, 장교 집안의 아들이었으므로, 나름 교육 받은 엘리트 출신이었고 나폴레옹과는 툴롱 포위전 때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라구사 공작 (Duc de Raguse) 의 작위를 내려준 나폴레옹을 나중에 배신하여 부르봉 왕가에게 붙어, 프랑스 사람들로부터 배신자의 대명사로 찍혔습니다.  오죽했으면 당시 프랑스 어에 새로 raguser, 즉 배신하다 라는 동사가 추가될 정도였습니다.  최근에 프랑스 어에 추가된 동사로는 파리 생제르맹 (PSG)의 축구선수 즐라탄 이브라모비치의 이름을 따서 zlataner 라는 동사가 있습니다.  뜻은 '끝내주다' 라고 합니다.  이번 브라질 월드컵에서 즐라탄의 활약을 볼 수 없게 되어 무척 아쉽습니다.)

 

 

 

하지만 군인은 어디까지나 미담이 아닌 전공으로 말하는 법이지요.  그는 나폴레옹이 편성한 그랑 다르메 (Grande Armee)에서 제3 군단장을 맡았고, 아우스테를리츠에서 그는 비엔나에 주둔하고 있던 제3 군단을 48시간 만에 110km 떨어진 아우스테를리츠까지 쾌속 강행군 시켜, 조콜니츠와 텔니츠 마을에서 압도적으로 다수였던 오스트리아 군을 완강하게 물고 늘어지는 역할을 100% 완벽하게 수행해 냈습니다.  이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겉보기에 가장 빛나는 전공을 세운 것은 뭐니뭐니해도 생틸레르 사단을 보유했던 술트였습니다만, 사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은 축지법과 금강불괴의 무공을 시전했던 다부였습니다.  어찌 보면 나폴레옹 작전의 요체를 가장 잘 파악했던 것은 다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작전에서는 무엇보다 기동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때문에 48시간 안에 110km를 주파하기 위해 과감히 절반 이상의 병력을 포기하고 프리앙의 제2 사단과 제4 용기병 사단만 끌고 왔던 것이지요.  반면에 술트는 나폴레옹의 작전과 의중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직전에 동료 장군들을 꼬드겨 '이런 압도적인 병력 차이 앞에서는 후퇴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나폴레옹에게 진언을 올렸으니, 상당히 비교가 될 만 했습니다. 

 

 

 

(술트 Jean-de-Dieu Soult 원수입니다.  이 양반은 그야말로 박쥐 같은 인생을 살았고, 죽을 때까지 권세와 명예를 모두 누렸습니다.  나폴레옹이 무너지자 부르봉 왕가에 붙었고, 나폴레옹이 백일천하로 돌아오자 다시 보나파르트 파가 되었으며, 1815년 부르봉 왕가가 다시 돌아오자 잠깐 추방을 당했으나 4년만에 다시 돌아와 정부 요직을 지냈습니다.  1830년 7월 혁명으로 오를레앙 왕가가 들어서자 그는 재빨리 새로운 왕 루이 필립에게 붙어서 다시 프랑스의 원수직을 맡았고, 1848년 2월 혁명으로 공화국이 들어서자 그는 재빨리 공화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양반이고,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면에서 다부는 특히 술트와 비교되는 인물이었습니다.  가령 술트는 항상 진두 지휘를 하는 용감한 장군이었으나, 1800년 제노바 포위전에서 큰 부상을 입은 이후로는 적의 머스켓 소총탄이 날아오는 곳에는 절대 나서지 않는, 몸을 사리는 지휘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다부는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타고 있던 말이 적탄에 맞아 쓰러지는 위태로운 상황이 무려 4번나 될 정도로, 전방에서 적극적으로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또한 술트는 자기 자신이 앞장서서 점령지 주민들의 재산을 약탈하는데 앞장 섰고, 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고 그의 제4 군단도 그야말로 메뚜기떼 또는 산적떼를 연상시킬 정도로 약탈의 귀재들이었습니다.  술트는 이베리아 전쟁에서의 어느 영국군 장교의 활약상을 그린 버나드 콘월 (Bernard Cornwell)의 Sharpe 시리즈에서도 매우 사악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사실 이유가 있긴 했던 것이지요.   반면에 다부는 공적인 징발 이외에는 병사 개개인의 약탈 행위는 적발시 즉결 총살로 다스릴 정도로 엄격히 금했습니다.  다부의 이런 엄정한 규율은 의외로 병사들과 부하 장교들의 존경심을 끌어내어 다부는 부하들로부터는 매우 인기가 좋았으나, 다들 구린 구석이 많았던 동료 원수들은 다부를 내심 매우 못 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오랜만에 등장하는 샤프 시리즈네요.  샤프 소위의 활약 덕분에 술트 원수의 저녁 식사를 웰링턴 공작이 먹게 되는 이야기가 이 Sharpe's Havoc 편에 나와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영국 요리가 악명 높다는데, 영국 해군 주방장이 만든 요리라면 ?  http://blog.daum.net/nasica/6862318  참조)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이후에도, 다부를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 하나로 벼락 출세한 놈' 정도로 보는 시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사람들이 다부를, 더 나아가 나폴레옹의 위대함을 몰라본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단지 자신에게 충성한다는 이유만으로 승진을 시켜주는 얼빠진 군주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다부를 아끼고 높여주었던 것은, 다부에게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굉장한 리더로서의 소양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양은 1807년 아우어슈테트에서 폭발합니다.

 

이제 1807년이 되어, 다부는 나폴레옹의 명에 따라 제3 군단을 이끌고 프로이센, 정확하게는 작센을 향해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전편에서 보셨듯이, 베르나도트의 제1 군단과 함께 중앙군을 맡아서 진격했었는데, 그와 베르나도트는 따지고 보면 혼인 관계에 의한 먼 인척 간이었습니다.  다부는 나폴레옹의 매제의 여동생과 결혼한 몸이었고, 베르나도트도 나폴레옹의 형수의 여동생과 결혼한 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둘 사이는 결코 그렇게 돈독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베르나도트는 뷔르메르 쿠데타 때부터 나폴레옹과는 미묘한 관계였던 것에 비해, 다부는 자타가 공인하는 골수 보나파르트 파로서, 애초에 이 둘은 사이가 좋을 수 없는 관계였지요.  어쩌면 나폴레옹은 그런 관계까지도 고려하여, 베르나도트를 감시하고 견제할 목적으로 자신의 심복인 다부를 베르나도트와 함께 붙여 놓은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스웨덴의 왕세자가 된 베르나도트의 모습입니다.  그는 이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의 그의 행동에 대해 할 말이 많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 보시지요.)

 

 

아무튼 10월 12일, 다부와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나움베르크까지 진격한 상태였습니다.  정확하게는 다부가 나움베르크를 점령했었고, 베르나도트는 그 인근의 켐부르크 (Camburg)에 주둔하고 있었지요.  나폴레옹은 프로이센 군을 발견했다는 란의 기별을 받고 게라(Ghera)에서 예나로 달려가기 전에 이미 이들에게 명령서를 보내 프로이센 군이 북쪽으로 탈출하는 것을 봉쇄하도록 북쪽을 틀어막는 위치로의 이동을 요구했었습니다.  그 명령서에서,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에게 더 남쪽인 도른부르크 (Dornburg)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었습니다.  그런데 예나에서 상황을 살펴본 나폴레옹이 13일 새로 명령서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때 새로 내려진 명령서는 다부에게 예나의 북서쪽인 아폴다 (Apolda)로 내려와 프로이센 군이 북쪽으로 탈출하지 못하도록 포위망을 틀어막으라고 명했습니다.  아울러, 만약 베르나도트가 아직 다부와 함께 있다면, 베르나도트도 다부와 함께 행군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다시 첨언을 하여, "내가 선호하는 것은 베르나도트가 이미 도른부르크에 있어서, 예나에서 곧 벌어질 란의 전투를 지원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이런 명령은 잘못된 판단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즉, 나폴레옹은 예나에 호헨로헤건 브라운슈바이크건 전체 프로이센 군이 다 모여 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나에서 나움부르크 일대는 적이 없을테니까, 다부와 베르나도트가 각각 따로 움직여 예나 인근까지 내려와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는 예나에서 란이 포착한 프로이센 군은 호헨로헤의 후위대에 불과했고,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지휘하는 약 6만의 프로이센 군 본대는 잘레 강을 따라 북쪽으로 후퇴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아우어슈테트 (Auerstadt)를 지나 잘레 강을 건널 작정이었습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물론 전혀 모르고 있었으나, 10월 14일 아침 저 남쪽 예나에서 나폴레옹이 란드그라펜베르크에서 자욱한 안개 속에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며 호헨로헤의 프로이센 군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 순간, 다부의 제3 군단 약 2만7천은 아폴다로 남하하기 위해 브라운슈바이크가 건너려고 계획했던 그 여울목을 건너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현대의 아우어슈테트 모습입니다.  Auerstadt는 옛 이름이고, 현재 이름은 Auerstedt라고 한다네요.)

 

 

 

전체 군단의 약 2/3가 잘레 강을 건넜을 무렵인 아침 7시 경, 프랑스 군의 선두였던 엽기병 (chasseurs) 부대는 자욱한 안개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프로이센 기병대를 발견하고 크게 놀랐습니다.  놀랄 틈도 없이 이들은 프로이센 기병대와 거친 육탄전을 벌여야 했지요.  놀라기는 프로이센 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양측은 서로 '전방에 적군이 나타났다'라는 소식을 가지고 서둘러 후방으로 각각 물러났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부는 서둘러 인근의 작은 마을인 하센하우젠 (Hassenhausen)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준비했습니다.  전방에 프랑스 군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자 이들을 가볍게 밀어내겠다고 강력한 프로이센 기병대가 달려 나왔습니다.  이 기병대의 지휘관은 프로이센의 용장 블뤼허 (Gebhard Leberecht von Blucher) 였습니다.  블뤼허는 '왜 프랑스 군이 이 앞에 나타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프랑스 군은 눈에 보이는 대로 죽인다' 라는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지침을 정해 가지고 있었으므로, 보병이나 포병의 지원도 없이 다짜고짜 그의 기병대를 프랑스 보병대에 돌격시켰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군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을 입구에서 견고한 방어진을 짜고 명성이 자자한 프로이센 기병대를 아주 잘 막아냈습니다.  탄탄하게 짜여진 보병 대열은 원래 기병대가 뚫기는 어려운 것이었는데, 잘 훈련된 다부의 제3 군단 병사들이 쏘아대는 머스켓 사격에 프로이센 기병대는 의미없는 희생자만 낼 뿐이었습니다.  블뤼허는 몇번 돌격을 해보다가 소용이 없자, 일단 꼬리를 말아쥐고 후퇴해야 했습니다.  이러는 사이 다부는 계속 병력을 전방으로 전개하여 적과의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블뤼허는 이날의 치욕을 8년 후 벨기에의 어느 마을에서 갚을 수 있었습니다.)

 

 

블뤼허가 앞에 나타난 프랑스 군에 대한 소식을 전해오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도 다소 어리둥절했습니다만, 보고에 따르면 프랑스 군의 규모가 큰 편은 아니었으므로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안개가 자욱했으므로 프랑스 군의 병력 규모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공작은 어서 빨리 프랑스 군을 밀어내고 잘레 강을 건너야겠다는 생각이었지요.  공작은 블뤼허의 기병대에 이번에는 보병대와 포병대까지 딸려서 다시 프랑스 군을 치도록 했습니다.  그래도 프랑스 군은 버티어 냈습니다.  블뤼허는 방법을 바꾸어 프랑스 군의 우측에 공격을 집중시켜 마침내 프랑스 군을 하센하우젠 마을 안쪽으로 몰아 넣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군은 놀랍도록 끈질겨, 무질서하게 패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건물들 속에 숨어 다시 반격을 해왔습니다.  프로이센 군은 무엇보다 규율을 중시하는 구시대 군대였던지라, 장교들은 병사들이 대오를 유지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하지만 마을 건물들에 숨어서 총격을 해대는 프랑스 군에 비해, 아무 엄호물이 없는 허허벌판에 주욱 늘어선 프로이센 군의 피해는 갈 수록 커졌습니다. 

 

 

 

(아우어슈테트의 격렬한 포성을 뒤로 한 채 나폴레옹의 명령서만 믿고 남쪽으로 달려가는 베르나도트...)

 

 

 

하지만 상황은 누가 뭐래도 프랑스 군에게 절대 불리했습니다.  당시 전투에서 2대1이라는 수적 불리함은 나폴레옹이 아니라 나폴레옹 할아버지가 온다고 해도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지금 다부의 제3 군단이 딱 그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인근에 다부를 구원할 프랑스 군 약 2만명이 행군 중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제1 군단이었지요.  아침부터 들려온 총성과 포성은 베르나도트의 귀에도 똑똑히 들려왔습니다.  후방에 고립된 동료 군단이 적과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다면, 당연히 그 쪽으로 달려가 적을 협공하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전날 받은 나폴레옹의 명령서에 집착했습니다.  사실 그는 작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이후 나폴레옹과의 사이가 더욱 틀어진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자신에게 별다른 활약 기회를 주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투가 끝난 후 기병대도 별로 없는 자신의 제1 군단에게 러시아 군에 대한 추격전을 명하고는, 추격전의 성과가 시원치 않다고 타박을 주었던 것입니다.  베르나도트는 그에 대해 앙금이 남아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이 '베르나도트가 이미 도른부르크에 도착한 상태라서 예나 전투에서 란을 지원해줄 위치였으면 좋겠다' 라고 명기한 명령서를 무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특히 나폴레옹의 기대와는 달리 아직 도른부르크에 도달하지 못했던 베르나도트는 뒤쪽의 다부보다는 앞쪽의 나폴레옹의 작전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그에 따라 뒤쪽의 좀더 가까운 포성은 애써 무시한 채, 저 앞쪽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예나 전투를 향해 행군했습니다.

 

 

 

 

(보시다시피 구댕의 사단이 중앙, 프리앙의 사단이 우측에 자리를 잡고 프로이센 군을 막아냈습니다.  그러나 좌측의 모랑 사단은 그 도착이 늦었으므로, 11시까지는 겨우 1~2개 연대로 프로이센 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느라 매우 힘겨운 상황이었지요.)

 

 

 

이렇게 베르나도트의 제1 군단이 점점 더 멀어져 가던 9시 30분 즈음, 다부와 동서지간이자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의 영웅이었던 프리앙 (Louis Friant)의 사단이 포병대의 지원까지 갖춘 완벽한 보병 방진을 짜고 기존 프랑스 군 방어선의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로써, 이제 다부의 제3 군단 병력은 모랑 (Maurand) 장군의 사단을 빼고는 모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아직 상황이 얼마나 긴박한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프로이센 군은 조금씩 축차투입되어 계속 각개격파를 당할 뿐이었는데, 비로소 상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아챈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이때서야 전면적인 총공격을 명령했습니다.  전투는 치열했습니다.  약 4km 정도 밖에 안되는 전선에 약 양측의 7~8만 병력이 뒤엉켜 있었으니 정말 대단히 맹렬한 전투였을 것입니다.  다부는 이 전투의 열기 속에서 날아온 대포알에 쓰고 있던 모자를 날려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더 중요한 것을 날려 먹었습니다.  전투 초기에 말을 달려 최전선으로 달려온 것까지는 좋았으나, 옆을 돌아보는 사이 날아온 프랑스 군의 머스켓 탄환 한발이 두 눈을 모두 날려버린 것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최전방을 지휘하던 슈메타우 (Friedrich Wilhelm Carl von Schmettau) 장군도 프랑스 군의 총격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쓰러지면서, 경직된 프로이센 군의 지휘 체계는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두 눈에 총상을 입고 전장에서 물러나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모습입니다.  그는 이 부상으로 인해 결국 3주 후 숨을 거두게 됩니다.)

 

 

 

아무래도 병력이 적었던 프랑스 측은 특히 배치된 병력이 적었던 좌익에서 잔뜩 밀리고 있었는데, 만약 프로이센 측에 전체 전세를 살피고 지휘할 사람이 있었다면 당연히 프랑스 군의 좌익을 집중 공격했을 것입니다.  이때 만약 국왕인 빌헬름 3세가 지휘권을 인수하여 작전을 통제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에게는 그럴 정신도, 의지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냥 아빠를 잘 만나 왕이 된 남자일 뿐이었으니까요.  빌헬름 3세가 이렇게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11시 쯤 프랑스 군 측에서는 뒤쳐졌던 모랑 장군의 사단 병력 8천이 마침내 도착하여 무너져 가던 프랑스 군의 좌익을 틀어막았습니다.  이때서야 빌헬름 3세기 비로소 정신줄을 잡고 전체 프로이센 군의 지휘권을 승계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지요.  빌헬름 3세가 이때 내린 결정은 때마침 도착한 오렌지 공 (Willem Frederik Prins van Oranje-Nassau) 의 병력 1개 사단을 어디에 투입할 지에 대한 것이었는데, 어이없게도 그는 오렌지 공의 사단을 그냥 반으로 나눠 좌익과 우익에 각각 투입하도록 했습니다.  결정을 내린다는 것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못난이가 내릴 만한 결정이었지요.  이러는 사이에도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제3 군단 병사들의 풍부한 실전 경험과 다부의 엄격한 훈련이 위력을 발휘하여, 전투는 점점 프랑스 군의 승리로 굳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프로이센 군도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부터 내려오는 강철 같은 규율로 유명한 군대였으나, 강철같은 규율로는 납탄을 막아낼 수는 없었고, 프로이센 병사들은 픽픽 쓰러져 갔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듯 날아오는 허허벌판에서 당당하게 대오를 유지하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강철 대오를 갖추고 있다고 해서 총알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사실 아직 프로이센 군에게는 재기의 기회가 남아 있었습니다.  후방에 아직 전투에 투입되지 않은 1만5천의 예비 병력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지휘관인 빌헬름 3세는 이들을 불러들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예상 외로 강력한 프랑스 군의 저항을 접하고는 '지금 저 프랑스 군은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하는 프랑스 군 본대가 틀림없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나폴레옹의 위엄인 모양이다' 라고 질려 버렸던 것입니다.  원래 약한 남자는 위기 상황에 빠지면 누군가 진짜 책임을 져 줄 믿음직한 사람을 찾게 됩니다.  빌헬름 3세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쓰러진 지금, 믿을 사람은 저 후위를 맡아 주고 있을 호헨로헤 대공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빨리 예비 병력을 투입해달라는 부하 장교들의 열띤 요청을 거부하고 예나에 있을 호헨로헤 대공의 부대와 합류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필 이때 즈음, 즉 낮 12시 경 승리의 냄새를 맡은 다부는 전체 프랑스 군에게 전진을 명했습니다.  프랑스 군의 전진에 프로이센 군이 맥없이 무너지자, 빌헬름 3세는 마침 울고 싶은데 뺨 때려주네 라는 식으로 미련 없이 예나를 향해 정식 후퇴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그가 내린 이날의 마지막 명령이었습니다.  이런 패주의 물결 속에 후방에 있던 1만5천의 예비대도 함께 휘말리고 말았습니다. 

 

 

 

(이때 전투에 프로이센 편으로 참가했던 오렌지 공이 1815년 비엔나 체제에서 새로 왕국으로 거듭난 네덜란드의 빌렘 1세가 됩니다.  원래 오렌지 공이라는 칭호는 남부 프랑스의 지명에서 유래했다가 훗날 복잡한 결혼 관계 상속 관계 속에서 이리저리 넘어다녔습니다.  그러다 그 칭호는 결국 독일 나사우 지방의 선거후에게 돌아가게 되었는데, 당시 이 칭호를 가지고 있던 이 빌렘 프레데릭이 네덜란드 왕국의 왕관을 얻게 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부의 제3 군단은 아무래도 혼자의 힘으로 거의 2배가 넘는 프로이센 본대를 상대하느라고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황이었으므로 끝까지 맹렬한 추격을 할 여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부는 전과 확대를 위해 지친 병사들을 이끌고 추격을 하다가, 오후 5시에는 정식으로 추격 중단을 명령했습니다.  따라서 빌헬름 3세의 생각대로, 남쪽으로 조금만 더 내려가서 호헨로헤의 후위대와 합류한다면, 다시 군세를 정돈하여 다시 밀고 올라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날 저녁 무렵, 예나 북쪽 아폴다까지 도망쳐 온 프로이센 군과 빌헬름 3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역시 자신들과 같은 신세로 몰골 사납게 도망치고 있던 예나의 프로이센 부대였습니다.  놀랍게도 예나에서도 프로이센 군이 대패를 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프로이센 군은 완전히 무너져 내립니다.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프로이센의 상하가 한꺼번에 패닉을 일으켜 전체 군이 뿔뿔히 흩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날 예나-아우어슈타트의 2개 전투에서 부대 단위로 형체를 이룬 채 전장을 빠져 나간 것은 호헨로헤가 직접 지휘하는 1만명의 부대와, 블뤼허의 지휘 하에 있던 기병대 뿐이었으며, 나머지는 군대로서의 형체를 잃고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날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의 피해는 전사와 부상 1만, 거기에 추가로 포로가 약 3천 정도 발생했습니다.  대포도 115문이나 노획 당해서, 사실상 프로이센 포병대는 모든 장비를 상실했습니다.  프로이센의 사상자 비율은 약 16%였지요.  이에 비해 다부의 피해는 전사와 부상 약 7천이 발생했는데, 이는 전체 병력 2만7천 중 무려 26%에 해당하는 비율로서, 당시 웬만한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한 패자 측이 겪는 사상자 비율이었습니다.  예나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은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의 프랑스 측 사상율보다 훨씬 더 작았는데도 무너졌습니다만, 다부의 제3 군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버티어 냈던 것입니다.  이날의 승리는 정말 처절하고도 대단한 것으로서, 다부는 사상자 수습으로 인해 이날 밤에는 도저히 장계를 올리지 못하고, 그 다음날 새벽에야 연락 장교를 보내 나폴레옹에게 이 사실을 보고 했습니다.  그 다음날 이 보고서를 읽은 나폴레옹이 '자네 원수께서 헛것을 보신 듯'이라고 비웃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언급한 바 있지요.  하지만 곧 나폴레옹도 사실을 파악한 뒤, 그 다음날 아침 다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내 사촌이여, 자네의 빛나는 무훈에 대해 진심어린 찬사를 보내네.  자네가 잃은 용감한 병사들을 애도하지만, 그들이 영광의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자네 군단의 병사들과 장교들에게 내가 크게 흡족해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게.  그들은 나의 존경을 받을 만 하네.  자네의 소식을 더 보내주고, 자네 군단을 나움부르크에서 휴식 시키게." 

 

이렇게 빛나는 승리를 거둔 다부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그의 제3 군단은 10월 23일 베를린에 입성하는 최초의 프랑스 부대로 선정되었고, 훗날 다부에게는 아우어슈테트 공작이라는 작위까지 주어지게 됩니다.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나 예나 전투 등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내심 '너희들이 한 것이 뭐가 있냐 이건 사실상 나의 독무대였다' 라는 생각으로 아무런 작위를 만들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이런 작위가 주어진 것은 다부에 대한 정말 최고의 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훈훈한 이야기 뒤에는 뭔가 찜찜한 구석이 남아 있었습니다.  다부의 제3 군단이 왜 홀로 전체 프로이센 본대와 위험천만한 악전고투를 겪어야 했는가에 대한 책임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는 두 사내 사이에 깊은 감정의 골을 만들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제국의 운명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베르나도트의 후손이 현재 스웨덴 왕좌에 앉아 있는 것도, 결국 따지다보면 이 날의 갈등 때문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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