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라이프치히의 전경입니다. 세상은 넓고, 가볼 곳은 참 많군요.)
라이프치히는 작센 (Saxony)의 수도로서, 중부 독일의 대도시였고, 당연히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의 물류 창고에서, 프랑스 군은 면직물 등 다량의 영국제 상품을 발견하고 이를 압류합니다. 이렇게 압류한 상품은 현장에서 현지 상인들에게 경매에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군사 작전에도 바빠 죽겠는데 그런 상품의 수송 및 판매처 확보 등을 할 수는 없었고, 현장에서 처분한 뒤 그 댓가로 받은 금화/은화를 가져가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상품의 양이 어찌나 많았는지, 헐값에 경매에 붙였는데도 그 수익이 무려 6천만 프랑 (현재 가치로 대략 8천4백억 원 가량)이나 되었습니다. 아우스테를리츠에서 격파한 오스트리아에게 부과된 전쟁 배상금의 금액이 4천만 프랑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엄청난 거액이었습니다. 영국제 면직물의 양이 너무나 많았으므로, 나폴레옹은 이를 다 팔지 않고 그 중 일부로 자신의 그랑 다르메 (La Grande Armee) 전체의 군복을 새로 만들게 할 정도였습니다. 굳이 라이프치히에서의 이 사건이 아니었어도, 나폴레옹은 이미 영국 상공업의 위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영국은 가게 주인들 (shopkeeper)의 나라' 라고 부르며 하찮다는 듯이 표현했지만, 사실은 그 위력에 대해 전율하고 있었고 또 부러워 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근위 척탄병의 군복 모습입니다. 다음 편에 보시겠습니다만, 정말 나폴레옹의 병사들 상당수가 영국제 천으로 만들어진 군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상당히 아이러니컬한 일이지요.)
우리나라를 포함한 현대 국가들의 정치판도 그렇고, 제1차 및 제2차 세계대전도 그렇습니다만, 모든 싸움판의 원인은 무슨 고귀한 정의감이나 감정적인 자존심이 아니라 바로 돈입니다. 가령 미국이 대량 살상무기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라크에는 쳐들어가도, 보란 듯이 핵 실험을 빵빵 터뜨리며 시끄럽게 울어대는 북한은 애써 무시하는 일이나, 리비아의 내란에는 즉각 개입하면서도 시리아의 내전에는 벌써 몇년 째 손을 놓고 있는 것도 다 돈 냄새가 나느냐 안 나느냐에 따른 것이지요. 나폴레옹 전쟁 자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프랑스 대혁명 자체가 누가 세금을 더 내야 하느냐라는 문제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영원한 숙적 영국이 프랑스와 그 전부터 백년 가까이 전쟁 상태에 있었던 것도 바로 돈 때문이었습니다. 두 나라가 전쟁을 할 때는 단지 상대방이 마음에 안든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일본과 한국은 이미 전쟁을 해도 수십번은 했을 것이고, 북한과 한국도 결딴이 날 때까지 죽어라 전쟁을 했겠지요. 우리나라가 개념상실 망언왕국 일본이나 세습독재 지상낙원 북한과 전쟁을 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돈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그렇다치고, 시리아 내전처럼 당장 무고한 사람들이 마구 죽어나가는 상황을 국제 사회가 그저 구경만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도덕성이니 기독교 정신이니 알라신이니 정의니 하는 것들은 정말 립 서비스에 불과한 것이 확실합니다.)
흔히 프랑스 대혁명 이후 부르봉 왕가를 복위시키기 위해 영국이 즉각 대불 동맹전쟁에 뛰어 들었다고들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대혁명 초기 영국은 팔짱을 끼고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영국은 1792년 초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연합하여 프랑스와 전쟁을 벌일 때도 그야말로 강건너 불구경하는 입장이었고, 1792년 9월 루이 14세가 폐위되었을 때도 잠자코 있었으며, 심지어 왕정국가로서 참기 어려운 사태였던 1793년 1월의 루이 16세의 처형 때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선포된 것은 1793년 2월 들어서였는데, 그것도 영국이 선포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가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이 분이 루이 16세입니다. 1775년에 그려진 그림이니, 21세 때의 모습이네요. 참고로 아래 나오는 베르겐 백작은 이 루이 16세가 가장 신임하는 장관이었습니다.)
이야기는 1786년에 맺어진 에덴 조약 (Eden Treaty)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이전까지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모든 유럽 국가들의 경제 개념은 상당히 원시적이라서, 무조건 수출은 좋은 것이고 수입은 해로운 것이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영국이나 프랑스나 서로 상대국가의 수입 물품에 대해서는 높은 관세를 매겨 사실상 수입을 봉쇄하고 있었습니다. 1678년에, 영국에서는 아예 법으로 모든 프랑스 산 물품, 즉 와인, 식초, 브랜디, 아마포, 비단, 소금, 종이 뿐만 아니라, 프랑스 산 비단이나 실, 가죽 등의 재료가 들어간 모든 공산품까지도 수입을 금지시켰습니다. 프랑스 상품과의 경쟁으로 손해를 보고 있던 영국 상인 및 제조업자들의 입김이 강했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전쟁 중 정당하게 노획된 물품이라고 할 지라도, 절대 영국 내로 들여오거나 재판매를 할 수 없도록 하고 현장에서 즉각 불태워버리거나, 와인이나 브랜디의 경우 바다나 강에 쏟아버리도록 명령이 내려질 정도였습니다. (물론 병사들이나 수병들은 와인과 브랜디를 자기 입 속에 쏟아버렸겠지요.) 이런 수입 억제 정책은 프랑스 측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계 경제사에 우뚝 서는 고전 중의 고전,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입니다. 저도 이거 읽어봐야 하는데... 가만 보면 은퇴 뒤에도 정말 할 일은 많은 것 같아요. 돈이 안되어서 문제지요.)
(물론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 반기를 드는 경제학 서적도 있습니다. 이거 집에 사놓기만 하고 아직 몇 페이지 못 읽어보았습니다. 제가 보니까... 경제학자들은 문장을 일부러 어렵게 써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는 모양이에요. 제가 이해력이 딸리는 건가요 ?)
그러다 1783년 끝난 미국 독립 전쟁에서 영국을 물먹이느라 재정을 탕진한 프랑스가 당장 농산물을 수출해야 하는 필요성과, 북미 식민지를 상실하는 바람에 자국산 공산품을 위한 새 수출 시장을 급히 찾아야 하는 영국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서 1786년 이 두 국가 사이에 관세를 대폭 낮추자는 에덴 조약 (Eden Treaty)이 맺어지게 됩니다. 이때 프랑스 측의 책임자는 중농주의자였던 베르겐 백작 (Charles Gravier, comte de Vergennes)이었고, 영국측 책임자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Wealth of Nations, 1776년 출간)에 잔뜩 영향을 받은 오클랜드 남작 에덴 (William Eden, 1st Baron Auckland)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영국산 공산품의 프랑스 시장에 대한 진입 장벽이 크게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역사가들은 이 에덴 조약으로 인해 손해를 보게 된 프랑스의 대형 제조업자 및 상인들, 즉 부르조아 시민계급의 불만이 프랑스 대혁명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도 보고 있습니다.
(에덴 조약의 주연인 프랑스 베르겐 백작입니다. 루이 16세의 충신이었던 그는 자신이 프랑스 대혁명의 씨앗을 심었다는 것을 이해했을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혁명 발발 2년 전인 1787년, 70세의 나이에 과로가 원인이 되어 병사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영국은 혁명이 벌어진 이후에도 프랑스 시장에 자국산 공산품을 신나게 팔아대고 있었으므로, 프랑스 왕의 목이 잘리건 말건 프랑스와 굳이 전쟁을 해서 이 커다란 시장을 잃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의 주역이었던 중산층 시민 계급은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이익을 갉아먹는 값싼 영국 제품이 눈엣가시였습니다. 결국 이들은 영국과의 전쟁을 통해 영국 제품의 수입 금지를 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프랑스 대혁명에 영국이 참전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프랑스 측으로서는 영국 공산품을 막아내야 했고, 영국 측으로서는 거대한 프랑스 시장을 뚫어야 했던 것이지요. 부르봉 왕가의 복위 따위 같은 것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습니다.
(이 그림은 1783년에 그려진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의 초상입니다. 이 그림이 특히 유명한 것은 앙투와네트가 입고 있는 저 드레스 때문입니다. 저건 영국제 모슬린 (mulsin) 천으로 만들어진 것이거든요. 당시 프랑스는 비단 산업이 발달했지만, 목화솜으로 만든 모슬린 옷감이 유럽 상류층에 대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전에 쓴 글에서도 나폴레옹이 1803년 6월 영국 타도를 위해 조성된 불로뉴 캠프에 시찰을 가는데 동행하는 조세핀이 개념도 없이 모슬린 드레스를 입고 가겠다고 부득부득 우기는 바람에 대판 부부 싸움이 벌어진 에피소드를 적은 적이 있었지요.)
자,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당연히 영국과 프랑스의 화물선들이 서로의 항구로 자국 상품을 실어나르는 상업 활동은 당연히 중단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영국산 물품은 프랑스로 전혀 못 들어오고, 또 프랑스 산 물품은 영국에서 구경할 수 없게 된 것일까요 ? 물론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적은 물량이나마 인도산 목화솜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고, 영국에서도 프랑스 산 브랜디를 (매우 높아진 가격으로) 어렵게나마 계속 구할 수 있었습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 바로 중립국 덕분이지요. 가령 프랑스는 포르투갈을 통해 영국 화물선이 실어오는 목화솜을 조금씩 (훨씬 더 비싼 가격에) 수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산 브랜디도, 중립국인 독일 북부 한자 (Hansa) 동맹 자유 도시들, 가령 브레멘 (Bremen)이나 함부르크 (Hamburg)로 먼저 수출되었다가 거기서 많은 이윤을 붙여 다시 영국으로 수출되었습니다. 이래서야 양국 사이의 전쟁은 중립국들만 신나는 일이 되어 버리게 됩니다.
(한자 동맹의 전성기를 표시하는 지도입니다. 한자 동맹은 13세기부터 시작되어 14세기 말에 절정에 달했지만, 그 잔재는 18세기 후반까지도 남아 있었습니다.)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원래 유럽으로 반입되는 설탕이나 커피의 40%는 프랑스령 생 도밍그 (Saint Domingue)에서 오는 것일 정도로, 프랑스는 생 도밍그로부터 엄청난 부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혁명이 나고, 노예 반란이 일어나고 (검은 나폴레옹 vs. 하얀 나폴레옹 http://blog.daum.net/nasica/6862510 참고), 제1차 동맹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영국 해군이 프랑스 선박의 씨를 말려 버렸지만, 생 도밍그의 설탕과 커피는 계속 한자 항구들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바로 미국 화물선들 덕분이었지요. 미국 선박들이 때를 만난 메뚜기처럼 미국과 생 도밍그, 발트 해를 오가면서 설탕과 커피, 유럽의 공산품을 실어날랐습니다. 아미앵 조약에 의해 1802년~1803년의 짧은 기간 동안 프랑스 선박들이 다시 생 도밍그에 나타나게 되자, 미국의 설탕 무역액은 재앙을 만난 듯 주저 앉았습니다만, 제3차 동맹 전쟁이 벌어지자 미국 해운업은 다시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영국 해군으로서는 봉쇄 활동을 펴느라 죽도록 고생만 하고, 그 달콤한 결실을 미국이 다 가져가는 모양을 지켜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결국 미국과 영국의 전쟁이었지요. 흔히 1812년 영미 전쟁의 원인이 영국 해군에게 체포되는 영국 해군 탈주병 출신 미국 선원들에 대한 납치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인권과 국가 위신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돈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미국이 생 도밍그의 설탕과 커피 수출을 도맡으며 희희낙낙할 수 있었던 것은 생 도밍그의 반란 노예들이 계속 사탕수수 농장에서 고생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전쟁이 난 마당에 중립국이고 나발이고 영국 해군은 모든 선박이 적국인 프랑스 항구로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요 ? 여기서 국제 상식 퀴즈 하나 내드리겠습니다. 가령 우리나라와 일본이 전쟁에 돌입했다고 치지요. 그런 상황에서 프랑스 유조선 한척이 원유를 가득 싣고 인천항에 입항하려 합니다. 이때 일본 해자대의 구축함이 이 유조선에게 뭘 어쩔 수 있을까요 ? 일본이 프랑스와의 관계를 생각하여 감히 그 유조선을 건드리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요 ? 원유는 확실히 군수 물자와 상관있으니 그렇다치고, 더 어려운 문제 하나 내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입항이 아니라 출항입니다. 중국 화물선 한 척이 한국산 스마트폰을 잔뜩 싣고 부산항을 출발하여 상해로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스마트폰 대금은 이미 HSBC 은행 싱가폴 지점을 통해 한국 기업에 송금한 상태라서, 그 화물 소유권이 이미 중국 기업에 있다고 해보십시요. 일본이 그 화물선을 막아설 권리가 있는 것일까요 ? 이야기는 더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가령 한국 해군 잠수함이, 오사카 항에 입항하려는 일본 민간 유조선을 격침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 만약 이렇게 민간인 화물선을 격침시키는 것이 옳은 일이라면, 인천 공항에서 이륙하는 대한항공 여객기를 일본 공자대 전투기가 격추하는 것도 옳은 일인가요 ? 저 여객기 안에 미국으로 피난가는 여자와 아이들이 타고 있는지, 일본에 침투하려는 완전무장한 특수부대 1개 중대가 타고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나요 ?
(그런 해상 봉쇄 문제에 있어서 가장 좋은 예는 케네디 대통령 시절 쿠바의 미사일 위기 때의 미소 대치 상황이었습니다.)
그냥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때그때 달라요' 입니다. 사실은 '정답은 없다'가 더 정확한 답이 되겠습니다. 놀랍게도, 이런 전시 해상 봉쇄에 대해 규정된 국제법 같은 것이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것이, 법이라는 것은 위반할 경우 처벌을 가할 수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인데, 국가를 처벌할 기관이 없으니까 국제법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실 잘못된 것입니다. 국제 협약 정도가 맞는 이야기지요. 이런 해상 봉쇄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논의된 국가간의 협약 같은 것조차 없습니다. 그것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전쟁이 발발할 경우 적국을 해상 봉쇄할 정도로 해군력에 대해 자신 있는 나라가 1~2개국 정도 밖에 없고, 나머지는 모두 '해상 봉쇄는 모두 불법'이라고 주장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합의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지요.
18세기 말 19세기 초의 유럽 해상의 상황이 딱 저랬습니다. 당시 제해권은 영국 해군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각국의 주장은 간단 명료했습니다. "Free ships make free goods." 즉, 중립국 선박이 실어나르는 물자에 대해서는 전쟁 당사국 어느 쪽도 훼방을 놓아서는 안된다 라는 것이 당시 중립국들의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입장은 당연히 달랐습니다. 영국 해군은 중립국 선박이라 할지라도 영국 해군이 검색을 해서 금수 물품 (contraband)을 싣고 있을 경우 그 선박을 나포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이렇게 나포된 선박은 정당한 나포물 (prize)가 되어 그 나포 주체인 영국 해군 함정 또는 사략선 (privateer)이 매각 처분할 권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파고 들면 들 수록 더더욱 복잡해졌습니다. 가령 엄연한 금수 물자인 흑색화약 100톤을 싣고 가는 스웨덴 선박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만난 곳이 프랑스 해안에서 30 해리 이상 떨어진 공해상이라면, 이 선박을 나포하는 것이 정당한지가 문제가 됩니다. 당시 영해라는 개념은 해안선에서 3해리 (5.6km) 까지를 인정해 주었는데, 이 3해리 영해까지 들어오기 전에는 나포를 할 수 없다면, 사실상 나포할 확률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대부분의 항구는 거대한 해안포가 지키고 있었으므로, 특히 1해리 안에 들어가게 되면 더 이상 추격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므로 영국 해군은 공해상에서라도 중립국 선박을 얼마든지 검색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고, 또 실제로 그렇게 실력 행사를 했습니다. 당연히 중립국들은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이건 아무런 법적, 도덕적 근거가 없는 해적 행위가 다름없다는 것이었지요.
(산 레모 매뉴얼입니다. 아마존에서 이것도 판매하네요 ??)
자, 다시 여기서 한일 간의 가상 전쟁 상태로 되돌아가 보지요. 아까 정답이 '그때그때 달라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일본이 부산항에 입항하려는 프랑스 유조선을 나포하거나, 최소한 되돌려보낼 권리를 가지기 위해서는 일정 조건이 갖추어져야 했습니다. 바로 '봉쇄 선언'이었지요. 이 봉쇄 선언의 조건이라는 것도 무슨 법적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수백 년간 이어져 내려온 관습법 같은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조건을 그나마 서류상에 적어 놓은 것이 산 레모 매뉴얼 (San Remo Manual)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냥 국제 인권 기구 (International Institute of Humanitarian Law)에서 주관한 몇 차례의 회의 (1988년~1994년)에 국제 법률 및 해군 관계자들이 모여 그동안의 해상 관습법을 정리한 권고안에 불과합니다. 아무런 법적 강제성이 없습니다. 아무튼 이에 따르면, 정당한 해상 봉쇄가 되려면 몇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가령 어떤 항구가 봉쇄 구역인지, 또 어떤 물자가 금수품 (contraband)인지 명확히 선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한가지 조건이 덧붙여집니다. 바로 봉쇄 구역을 실질적으로 봉쇄할 능력이 있어야만 그 봉쇄 선언이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해상 봉쇄 (blockade)라는 것은 육상에서의 포위 (siege)의 연장 개념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제1차 세계 대전 때 해군력이 미약했던 독일이 미국 뉴욕 항구를 '봉쇄 지역'으로 선포하고 중립국들의 입출항을 금지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합법적이라면, 모든 전쟁 당사국이 적국이나 중립국의 모든 항구를 다 봉쇄 지역으로 선포할테니, 합법적인 봉쇄와 비합법적 봉쇄의 구분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될테니까요. 그러니, 만약 일본이 한국의 주요 항구를 모조리 봉쇄한다고 선언하려면 그 주요 항구 앞바다마다 최소한 1척 이상씩의 군함을 항상 배치해 놓아야 합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수많은 작은 포구까지 다 봉쇄 지역이 될 수는 없고, 인천항이나 부산항, 울산항 등과 같이 상당한 규모의 항구만을 봉쇄 지역으로 선포할 수 있는 것이 상식입니다. 요즘처럼 수상 함정이 공중 공격에 취약한 상태에서는 그렇게 24시간 적국 앞바다에서 봉쇄 활동을 펼칠 수는 없으므로, 해상 봉쇄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더욱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이건 1810~1814년 기간 중 프랑스 지중해의 툴롱 항구를 봉쇄 중인 영국 해군의 모습입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실제로 봉쇄 선언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이 선언한 독일에 대한 해상 봉쇄 구역입니다. 의외로 그리 넓지도 않고, 또 발트 해의 좁은 입구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사실 넓을 필요도 없었지요.)
다시 18세기 말, 제1차 대불 동맹전쟁 시절로 되돌아가보지요. 당시도 합법적인 봉쇄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이 국제 해상 관습상의 상식이었습니다. 영국도 중립국 선박들이 프랑스와 해상 무역을 계속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봉쇄 선언을 해야만 했는데, 대범한 영국 정부는 '모든 프랑스 해안선을 봉쇄한다'라는 막무가내 선언을 해버렸습니다. 모든 해안선이 봉쇄 상태이므로, 어느 항구이건 프랑스로 가는 모든 중립국 선박들을 얼마든지 검색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지요. 이런 '전 해안 봉쇄'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아무리 영국 해군이 제해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봉쇄였습니다. 영국이라고 군함이 수만 척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따라서 중립국들은 이건 실질적이 아닌 '서류상의 봉쇄' (paper blockade)에 불과한 것이며 이 봉쇄 선언 자체가 비합법적인 것이라며 또 다시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영국이 선언한 '서류상의 봉쇄' 조치는 영국 해군 함장들에게 크게 환영되었습니다. 저 위의 툴롱 항구 경우처럼 정말 실질적인 봉쇄를 펼칠 경우 뭔가 나포물을 건질 확률이 0에 수렴하는 것에 비해, 서류상의 봉쇄는 많은 적국 선박 또는 중립국 선박들로 하여금 '봉쇄를 뚫고 갈 수도 있겠다'라는 희망을 주었으므로 나포물을 건질 확률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저 그림은 1797년, 프랑스 해안가에서 프랑스 전함 Droits de l'Homme (인권) 호를 추격 끝에 좌초시키는 영국 프리깃 함 HMS Amazon과 HMS Indefatigable의 모습입니다. C.S. Forester의 소설 시리즈 Hornblower의 주인공인 혼블로워는 저때 펠류 함장 밑에서 저 인디퍼티거블 호에 타고 있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영국은 분명히 프랑스에 물건을 수출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요. 따라서 영국제 상품을 싣고 프랑스로 들어가는 중립국 선박을 막아야 하는 것은 영국 해군의 역할이 아니라 프랑스 해군이 해야 하는 것 아니었나요 ? 맞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경제 관념으로는 원료를 수입 가공한 뒤 되팔면 국제 무역 수지가 흑자여서 좋은 것이었으므로, 영국 식민지에서 프랑스로 들여오는 목화솜 같은 원자재에 대한 수입은, 프랑스 측의 승리이자 영국 해군의 패배로 받아 들여졌습니다. 따라서, 프랑스로서는 비록 제해권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저 육지 및 연안의 세관원들을 동원하여 영국제 물품에 대한 단속만 수행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프랑스 혁명 초기에, 모든 영국제 상품들은 금지 품목으로 정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프랑스를 출입하는 모든 중립국 선박들은 프랑스에 영해에 들어오면 프랑스 세관선에게 철저한 검색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때의 조건이 얼마나 까다로왔냐 하면, 그 큰 배 안에서 약간이라도 영국제 상품이 발견되기만 하면 화물 뿐만 아니라 선박 전체를 몰수해버리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당시 영국은 산업 혁명을 시작한 공업 대국이어서, 선박 내에 잡기류나 선원들의 옷가지 중에라도 영국제 물건이 100%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될 정도였습니다. 프랑스 혁명 초기의 광기와 부정부패로 인해, 이런 조항들이 악용되어 부당하게 선박과 화물을 몰수당한 중립국 선장들이 많았습니다. 가령 어떤 선장은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의 금속제 단추가 영국제라는 이유로 배를 빼앗겼고, 심지어 어떤 배의 선장은 프랑스 세관원에게 매수당한 선원 하나가 '방금 프랑스 세관원들이 오기 전에 선장이 영국제 장화 한켤레를 몰래 바다에 버렸다'라고 거짓 증언하는 바람에 배를 빼앗겼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중립국 선박들은 아무도 프랑스 근해로 올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고, 이런 상황은 프랑스 총재까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가 대외 무역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것은 영국 해군보다는, 오히려 해적떼에 가까운 프랑스 세관원의 역할이 더 컸다고 합니다.
(미국 독립 전쟁의 시발점이 된 1770년 보스턴 학살 사건을 묘사한 판화 중 한 장면입니다. 북미 식민지 주민들에게 조준 사격을 하고 있는 영국 레드코트들의 등 뒤로 'Custom House' 즉 세관 사무소라고 씌인 간판이 보입니다. 얼마나 세관이 미웠으면 꼭 저기에 저 간판을 그려 넣었을까요 ?)
덕분에 프랑스 국내에서 영국산 공산품은 씨가 말랐느냐고요 ? 이 또한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총칼보다 강력한 것이 돈이라고, 당시 영국이나 프랑스 양국 모두에서 밀수가 대유행이었습니다. 이들은 자국 및 적국 해군 감시를 뚫고 영국산 면직물이나 프랑스산 비단, 설탕과 커피, 와인과 브랜디를 부지런히 실어날랐습니다. 게다가, 국가가 인정하는 밀수까지도 있었습니다. 이른바 면허장 제도 (License System)이라고 해서, 법령으로는 적국인 프랑스 또는 영국과는 무역하지 말라고 해놓고, 몇몇 대상인들에게는 두둑한 세금을 바치는 조건으로 적국과의 무역을 허락하는 제도였습니다. 이런 제도는 아무리 적국이라고 해도 쌍방이 서로 상대방으로부터 필요한 물품들이 있기 마련이고, (가령 술고래 영국인들에게서 고급 프랑스 산 브랜디를 정말로 빼앗을 수는 없었지요) 또 어차피 밀수로 왔다갔다 하는 것을 뻔히 아는 처지에 이왕이면 세금이라도 받자는 의도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더욱 많은 양의 상품이 독일 등을 통해서 프랑스와 영국 쌍방으로 부지런히 오갔습니다. 그 결과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기간 중 북부 독일의 한자 동맹 도시들은 때아닌 무역 호황으로 번영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 기간 중에는 아예 대놓고 상품과 선박의 국적만 세탁해주는 선박 거래소가 상업적으로 호황을 누리고 있을 정도였으니, 한자 동맹 도시들은 서류 몇 장만 떼어 주고 떼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이지요.
(뭐 영국 귀족 나으리들께서도 적국인 프랑스를 미워할 뿐, 프랑스 산 브랜디를 미워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에도 썼습니다만, 나폴레옹이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은 유럽 정복 같은 것이 아니라, 유럽의 국가들이 하나의 연방체가 되어 같은 화폐와 같은 도량형을 쓰면서 평화로운 번영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즉, 현재의 EU 같은 것을 벌써 200년 전에 구상했던 것이지요. 나폴레옹의 정치행정적인 영민함은 실로 대단하여, 그가 만든 제도 중 나폴레옹 법전이나 프랑스 중앙 은행, 리세 (lycee)라는 고등학교 제도 등 지금까지 그대로 살아남은 것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복잡한 역사와 사회 구조로 엉망진창이던 스위스의 정치 제도를 나폴레옹이 (비록 미국의 제도를 많이 본뜨기는 했지만) 산뜻하게 고쳐 놓은 것이 지금까지 거의 그대로 이어질 정도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스위스 편을 읽어보세요.) 아마 아우스테를리츠나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따위가 없다고 하더라도, 정치가 나폴레옹만으로도 나폴레옹이 위인으로 인정될 정도라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그런 그의 구상을 적극적으로 막는 것이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영국 입장에서는 분열된 유럽 대륙이 자국의 안보와 경제적 이익에 유리했으니까요. 지금도 영국은 유럽 대륙의 유로화 체제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있지요. 그런 영국을 꺾기 위해 나폴레옹이 구상했던 원대한 작전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산산조각이 난 뒤, 그는 영국 해군은 물론이고 그 근거지인 영국 본토를 친다는 계획도 영구히 접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해군이 없으면 정말 영국을 손봐줄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것일까요 ?
(나폴레옹의 신묘함은 전장보다 오히려 책상머리 위에서 더 빛이 났..을까요 ? 이 그림은 더 유명한 그림인 '튈르리 궁 서재에서의 나폴레옹'이라는 그림의 두번째 버전입니다. 더 유명한 첫번째 버전이나 이 버전이나 모두 다비드가 그린 것이지요. 확실히 첫번째 버전의 나폴레옹이 더 젊어 보이네요.)
보셨다시피, 나폴레옹의 등장 이전부터도 영국은 유럽 대륙과의 교역만 막아버리면 스스로 무너질 빚쟁이 나라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프랑스 혁명 초기부터 이미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1794년에 이미 켈라르 (Cailard)라는 프랑스 외교관이 대륙 국가들이 연합하여 '스페인의 타구스 (Tagus) 강부터 독일 엘베 (Elbe) 강까지' 영국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창한 바 있었습니다. 또 나폴레옹이 좋아했던 영국에 대한 경멸적 지칭인 '가게 주인들의 나라' (the isle of shopkeepers)라는 표현도 사실 1796년 국민 공회에서 바레르 (Bertrand Barère)라는 정치가가 썼던 표현이었고, 바로 이 바레르가 국민공회의 공안위원회에서 '외국 선박은 오직 그 자국의 상품만을 프랑스로 실어올 수 있다'는 법령인 항해 조례 (Navigation Act)를 제정하자고 주창하면서 이 조치로 영국을 망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썼던 표현이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보신 것처럼, 중립국의 존재들 때문에라도 프랑스 국민의회나 총재 정부 시절에는 영국과의 경제 전쟁이 그다지 신통한 결과를 내놓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폴레옹이 경제 전쟁으로 눈을 돌리면서 이야기는 달라졌습니다. 나폴레옹의 천재성이 기존의 경제 전쟁에 새로운 전략을 가미했던 것일까요 ?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로 이제 북부 한자 동맹 도시들까지 모조로 프랑스의 세력권 안에 들어가면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스케일의 경제 전쟁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이거슨 본격 '영국 왕따 전략' ! 오토만 제국도 프랑스의 동맹으로서 사실상 저 봉쇄령에 동참한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 프로이센 군을 격멸시키고 베를린에 입성한 뒤인 1806년 11월 21일, 이른바 대륙 봉쇄령 (Continental System, Continental Blockade)를 발표합니다. 이 칙령에서 나폴레옹이 정한 것은 크게 4가지였습니다.
1. 영국 본토 (British Isles) 전체가 이제 봉쇄 상태에 들어가므로, 영국 본토와의 모든 거래나 통신은 금지된다.
2. 프랑스가 점거한 유럽 대륙에서 발견되는 모든 영국인과 그 재산은 정당한 나포의 대상이 된다.
3. 모든 영국산 제품, 즉 영국의 공장이나 그 식민지로부터 오는 모든 상품은 정당한 나포의 대상이 되고, 그 매각 대금의 절반은 영국 해군이 해상에서 나포한 선박에 대한 보상금으로 사용된다.
4. 영국 또는 그 식민지 항구로부터 직접 오거나 또는 그런 항구에 잠깐이라도 기항했던 모든 선박은 대륙 내의 모든 항구에 입항을 금지한다.
이 조치들은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었고, 나폴레옹이 주도적으로 시작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영국이 먼저, 1806년 5월 16일, 프랑스 브레스트 (Brest) 항구부터 엘베 (Elbe) 강 사이의 전체 구간에 대해 봉쇄 조치에 들어간다고 선언했었지요. 제4차 동맹전쟁에 프로이센이 뛰어들면서부터 프로이센을 위해 엠스 (Ems, 네덜란드와 독일 사이의 강) 강부터 엘베 (Elbe) 강 사이의 해안은 같은 해 9월부터는 봉쇄에서 해지해 주기는 했지만요. 나폴레옹은 그렇게 실효성이 부족한 '서류상의 봉쇄' (paper blockade)의 부당성을 비난하며 역으로 영국 본토를 봉쇄한다고 '서류상 봉쇄'를 선언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영국의 불법 행위에 따른 정당한 보복 조치라는 뜻이지요. 저 4번째 조항도 영국의 강압적 조치에 대한 직접적인 보복 조항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 전체를 '서류 상으로 봉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모든 중립국 선박들은 행선지가 어디건 간에, 무조건 영국의 항구에 들러 '항구세'를 지불해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었거든요. 이 조치는 프랑스는 물론 중립국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는데, 나폴레옹은 그 조치에 대해 정면으로 대응되는 법령을 발동하여, '영국의 명령에 복종한다면 곧 프랑스의 적이다' 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지요.
(엠스 Ems 강의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실제로, 이제 나폴레옹은 엘베 강을 넘어 폴란드의 비스툴라 (Vistula) 강 하구까지 석권한 상태였으므로, 아드리아 해의 달마시아 (Dalmatia, 지금의 크로아티아) 해안부터 시작하여 발트 해의 거의 전부를 봉쇄할 실력을 갖춘 셈이었습니다. 과거 국민공회나 총재정부가 아무런 실력도 없이 공허하게 말로만 '영국놈들을 말려죽이겠다'라고 떠들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실력을 갖춘 상태에서 이 대륙 봉쇄령을 내린 것이었지요. 과연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은 실효를 거둘 수 있었을까요 ? 영국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이로 인한 결과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 그건 다음 기회에 보시도록 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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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오랜만에 글을 올리네요... 이번 대륙 봉쇄령은 저 개인적으로도 관심이 많아서 Eli Heckscher라는 스웨덴 경제학자의 책을 구해서 읽으면서 쓰고 있습니다. 아직 반도 못 읽었어요. 문장을 어찌나 어렵게 써놓았는지, 영어가 아니라 한글로 되어 있어도 이해가 잘 안될 것 같아요. 그래도 어떻게든 다 읽어보겠습니다. 일단은 절반만이라도 먼저 올려요.
(이 책의 본문 내용 전체가 인터넷에도 그대로 올라와 있습니다. http://www.econlib.org/library/YPDBooks/Heckscher/hksrCS.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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