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폴레옹의 시대

황금과의 전쟁 - 대륙 봉쇄령 (하편)

by nasica-old 2014. 3. 30.
반응형

지난 편에서는 대포로는 어찌해 볼 수 없었던 강적 영국에 대해, 나폴레옹이 경제적인 공격을 위해 1806년 11월 대륙 봉쇄령을 선포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당사자인 영국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  적국이 '나 너하고 교역 안 해 !' 라는 선언을 할 경우, 이쪽에서 취할 방향은 두가지 중 하나입니다.  적이 막는 것을 하는 것, 즉 어떻게든 그 대륙 봉쇄를 뚫고 교역을 하는 것이 한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정반대로 '나도 너하고 교역 안 해 !'를 선언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일단 영국이 대외적으로 취한 방법은 두번째 방법, 즉 맞불작전이었습니다.  영국은 당장 2개월 뒤인 1807년 1월 7일, 추밀원령 (Order in Council)을 통해 프랑스와 독일 해안을 모두 봉쇄한다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조치는 1807년 내내 여러번의 추가 추밀원령에 의해 강화 및 확대  되었습니다.  나중에 영국 의회 발언 중 이런 표현이 나왔는데, 이 상황을 아주 잘 묘사한 것이었지요.  "프랑스는 우리의 상업 활동에 대해 문을 닫았고, 우리는 그 문에 빗장을 걸었다." 




('존 불 (영국의 의인화 캐릭터) vs. 나폴레옹' 또는 '봉쇄 대 봉쇄'라는 제목의 풍자화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디스했던 이 양방향 봉쇄에서,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해군력이 없던 나폴레옹이었지요.  존 불의 식탁에는 거대한 스테이크가 놓여 있는데 나폴레옹의 식탁에는 수프 한 그릇만 달랑 놓여 있는 것을 보십시요.) 



어떻게 보면 영국의 조치는 불필요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저쪽이 문을 닫고 열지 않겠다는데, 이쪽에서 억지로 그 문을 열기 위해 때려부수는 것이라면 몰라도, 굳이 이쪽에서도 문을 잠글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요 ?  실은 차이가 있습니다.  영국의 추밀원령이 나오기 전까지, 프랑스 화물선들이 감히 항구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동안 프랑스의 연안 무역을 대행하며 짭짤한 수익을 올리던 중립국들이 많았습니다.  가령 프랑스의 지중해를 통한 무역은 거의 덴마크 상선들이 수행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1807년의 추밀원령에 의해, 프랑스와 교역하는 선박들은 영국 해군의 적법한 나포 대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조치는 여태까지 프랑스와 거래하던 모든 중립국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이 처음으로 구체화되었던 1806년 11월의 베를린 칙령은 그래도 좀 이성적이고 부드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가령, 비록 영국의 공산품을 싣고 어디론가 항해를 하던 중립국 선박이 재수없게도 프랑스 해군 전함과 딱 마주쳤다고 하더라도, 공해상에서는 영국의 상품을 싣고 간다는 것 만으로는 나포 대상이 아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또 그 배가 감히 프랑스 국내 항구나 프랑스가 점령한 이탈리아나 프로이센 등의 항구에 입항을 했다가, 세관 검사에서 그 적재 화물 중 영국제 모슬린 직물 30톤이 발견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영국제 상품만 압류가 될 뿐 그 화물선 전체가 압류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항구에는 상선들이 와글와글 해야 돈과 물자가 돌고 사람들도 활기를 띠게 되는데, 세관 활동이 강화될 수록 그 활기는 떨어질 수 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영국의 추밀원령은 훨씬 난폭하고 위압적이어서, 프랑스 및 그 위성국가에서 출항했거나 반대로 그쪽을 목적지로 삼고 항해 중인 중립국 선박이 공해상에서 영국 해군에게 걸리게 되면, 선박 전체를 나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어디서 출발했는지, 또 어디로 가는 것인지는 어떻게 파악하느냐고요 ?  먼저 중립국 선박을 정선하도록 명령한 뒤, 선적 서류 검사를 통해서 적발했습니다.   물론 이런 서류야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었으므로, 중립국 선박들이 빠져 나갈 구멍은 많았습니다.  가령 당시 프랑스령 생 도밍그에서 생산되는 설탕과 커피는 (비록 이때는 반란 흑인 노예들이 전체 섬을 점거한 상태였습니다만) 프랑스 및 독일에서 매우 인기 있는 상품이었는데, 이들을 실어나른 것은 대부분 중립국인 미국 화물선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먼저 생 도밍그에 가서 럼주와 총기, 식량과 공산품 등을 하역하고, 그 댓가로 받은 설탕과 커피를 싣고 곧장 유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일단 보스톤이나 뉴욕 등의 미국 항구로 입항한 뒤, 설탕과 커피를 실제로 하역했다가, 다시 그것을 선적한 뒤 유럽으로 출항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예 선원들과 선장을 다른 인원으로 교체하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이는 모두 영국 해군이 적용하는 추밀원령을 피하기 위한 꼼수였지요. 




(19세기 초 미국 보스톤 항구의 모습입니다.)




그러다보니, 영국 추밀원령은 이런 맹점을 보완하고자 훨씬 더 강력한 추밀원령을 추가로 발표했습니다.  즉, 영국 해군이 중립국 선박들은 모두 영국 또는 영국 식민지 항구에 무조건 기항을 하도록 강제한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국 항구에서 받은 기항 증명서가 없을 경우 근처의 영국 항구로 가도록 경고를 하고, 어정쩡한 곳에서 그런 기항 증명서도 없이 항해하고 있는 선박은 프랑스와 교역하는 선박으로 보고 나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영국 항구에 기항하도록 강제했다는 것은, 바꾸어 생각하면 그렇게 하기만 한다면 프랑스와 교역을 해도 나포하지 않겠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영국 항구에 기항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보셔야 합니다.  일단 영국 항구에 기항을 하게 되면, 영국 세관원들이 승선하여 선적화물을 꼼꼼히 조사한 뒤, 프랑스나 그 식민지, 또는 프랑스의 동맹국산 물품이라고 판단되는 것에는 무거운 관세를 부과했습니다.  그 물건이 영국으로 반입되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지요.  가령 커피에는 100파운드에 해당하는 무게 당 28실링, 흑설탕에는 10실링, 백설탕에는 14실링을 부과했습니다.  이는 제품 가격의 20~30%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했을까요 ?




(당시 카리브 해의 설탕 생산은 잔혹한 흑인 노예 노동을 필수적으로 동반했으므로, 설탕 무역에 대해서는 많은 지식인들이 비난을 하곤 했습니다.)




(현대에 참치 어획 때문에 돌고래가 죽는다고 참치 통조림 불매 운동이 일어나는 것과 유사하게, 차에 설탕을 넣는 것은 노예 학대를 허락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설탕을 먹지 말자는 운동이 있기는 했답니다.  이 풍자화에서 영국 왕과 여왕이 공주들에게 '설탕 없이 차를 마시니 아주 맛이 좋구나' 라고 이야기하는데, 공주님들의 표정은 과히 좋지 못하네요.)



짐작하시는 바와 같습니다.  바로 프랑스 및 그 식민지산 상품의 가격을 관세만큼 높여버림으로써, 유럽 시장에서 영국 상품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려는 조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생 도밍그는 영국의 자메이카보다 훨씬 더 경쟁력 있는 설탕 및 커피 생산지였습니다.  자메이카 산 설탕이나 커피는 생산 단가가 생 도밍그보다 너무 높아서, 유럽 시장에서 경쟁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 도밍그 산 설탕과 커피에 강제로 관세를 매기면, 필연적으로 유럽 시장에 도착했을 때의 상품 원가가 20~30%나 올라 버리므로, 이제 자메이카 산 상품이 경쟁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었지요.  그 속셈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것이 그런 관세가 부과되지 않는 상품 목록이었습니다.  그런 면세 대상 품목은 주로 곡물류로서, 영국산 상품과 시장에서 경쟁할 일이 없는 상품들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당시 영국 해군이 프랑스 해안을 봉쇄했던 것은 프랑스의 전쟁 수행 능력을 떨어뜨리기 위해 전략 물자를 수입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서, 프랑스 산 물품이 해외로 수출되는 것을 막는 것이 주목적이었습니다.  즉, 유럽, 미국이나 중남미 등의 식민지 시장에서 영국산 상품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었지요.  반대로 영국산 제품이 프랑스 국내로 반입되는 것은 영국으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일이었습니다.





(영국이 스페인으로부터 빼앗은 식민지인 자메이카는 바로 인근의 생 도밍그, 즉 아이티와 비슷한 기후에 있었는데도 커피 및 사탕수수 농사에 있어서 생 도밍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커피는 유명한 브랜드이긴 합니다.) 






(정부가 'e-Commerce를 이용해 세계와 통상하라'라고 부추긴 것은 기업들에게 수출을 하라는 이야기였지 소비자들에게 해외로부터 수입을 하라는 이야기는 아니었지요.  최근 정부가 급격히 커진  해외직구에 대해 조치를 하겠다고 나선 것은 다분히 국내 대기업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맞긴 한 것으로 보입니다.  출처 :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153615&s_no=153615&kind=search&search_table_name=bestofbest&page=1&keyfield=subject&keyword=%C1%F7%B1%B8  )



사실 영국이 자국의 제품이 프랑스 측에 넘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면 해상 봉쇄 같은 으리으리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조치보다 훨씬 더 간단한 방법이 있었습니다.  바로 수출 금지라는 행정 명령이지요.  하지만 정작 영국이 수출 금지 조치를 취했던 품목은 단 2가지였습니다.  바로 목화솜과 기나수 껍질 (cinchona bark)이었지요.  이 기나수 껍질이라는 나무껍질은 당시 흔히 예수회 나무껍질 (Jesuit's bark)로 불렸는데, 이는 남미에서만 나는 특산물이자 획기적인 말라리아 치료제로 쓰이던 의약품이었습니다.  당시 전쟁에서는 적탄에 맞아 죽는 병사들보다는 열병으로 죽는 병사들의 숫자가 훨씬 많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기나수 껍질은 군수품 바로 그 자체였으니까 그럴 만도 했습니다.  그러나 목화솜을 금수품으로 지정한 것은 프랑스의 면직물 산업을 고사시키겠다는 노골적인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품목을 금수품으로 지정한 것은 이렇게 함으로써 '영국과 교역하지 않으면 너희는 망한다'라는 의사를 분명히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나수 껍질입니다.  사람의 목숨을 좌우하는 귀중한 약재였기 때문에 무척이나 비쌌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러한 영국의 추밀원령에 대해 격노하여, 1807년 12월 밀라노 (Milan) 칙령을 발표합니다.  이 조치는 베를린 칙령에서 그래도 합리적이었던 부분을 없앤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즉, 화물 중에서 영국제 상품이 발견되더라도 해당 상품만 압류 조치하던 것을 아예 선박 통째로 압류하도록 하고, 또 공해상에서라도 영국제 상품을 싣고 가던 선박은 나포 대상임을 선언했던 것입니다.  어차피 프랑스 해군은 바다에 나가지도 못하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요 ?  프랑스 해군은 영국 해군이 무서워 바다로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긴 했지만, 정말 전혀 못 나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해군보다는, 노르망디 일대를 근거지로 하는 프랑스 사략선(privateer)들이 무척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무장이 변변치 않은 작은 쾌속선에 무장 선원들을 가득 싣고 영국 해협 일대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인도 등지에서 값진 화물을 싣고 돌아오는 화물선들을 나포하여, 영국의 통상로에 심각한 위협을 주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그 나포 대상이 훨씬 더 많아진 것입니다.




(동인도 회사 소속 켄트 Kent 호를 공격 중인 프랑스 사략선 콩피앙스 Confiance 호의 모습입니다.  이 사건은 1800년에 있었는데, 저 그림 속에서 작은 배가 콩피앙스입니다.  저 켄트 호는 무려 40문의 대포를 장착한 무장 상선이었고, 특히 화재가 발생한 다른 배의 승객들을 구출해서 태우고 있었기 때문에 무려 300명의 군인을 포함한 437명의 인원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서 콩피앙스 호는 15문의 대포에 고작 150명의 선원을 태우고 있을 뿐이었지요.  그런데도 1시간 반의 전투 끝에 콩피앙스 호는 켄트 호를 나포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때 나포 이후 1시간의 약탈이 허락되었는데 여성 승객들은 엄격하게 보호될 정도로, 프랑스 민간 사략선들은 해적과는 달리 신사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영국 해군성은 이 콩피앙스 호의 선장 로베르 쉬르쿠 Robert Surcouf 에게 현상금을 걸기도 했습니다.   쉬르쿠는 1809년 현역에서 은퇴하기 전까지 무려 40 척을 나포하는 활약을 했는데, 이후에는 다른 사략선을 무장시켜 내보내는 선주로서 또 많은 돈을 벌어들였습니다.  영국 해군성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는 등 명예롭게 살다가 1827년 노르망디에서 평온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양측의 이런 비이성적인 해양통상 정책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중립국 선박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영국 측의 요구에 응하자니 프랑스 측에게 나포될 판이고, 그렇다고 프랑스 측의 명령에 따르자니 영국 해군에게 나포될 판이라서 어느 장단에 놀아야 할지 난감해졌습니다.  중립국 선박들은 영국 해군에 보여줄 선적 서류와 프랑스 세관에게 보여줄 서류를 각각 따로 준비함으로써 이런 상황을 회피했으나, 영국이 추밀원령을 내세워 무조건 영국 항구에 기항하여 관세를 낼 것을 강요하자 그것도 어려워졌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이 프랑스 중심적인 보호주의 정책을 펴기 시작하면서 중립국들에게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습니다.  이렇게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피해를 보던 중립국들 중 가장 큰 피해를 보던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영국에 이어 세계 제2위의 상선단을 보유한 삼각 무역 대국이었는데, 영국 해군이 공해상에서라도 프랑스 및 그 동맹국과 교역하는 선박들을 나포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큰 피해를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 예로, 미국 매릴랜드 주의 한 거상은 무려 15척의 상선단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1807년 9월 이후 출항한 선박 중 겨우 3척만 무사히 귀환했을 뿐, 2척은 프랑스 및 스페인 측에 나포되었고, 1척은 함부르크에 기항했다가 프랑스에게 억류되었으며, 9척은 영국 측에 나포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미국-영국 간의 1812년 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만, 그건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저 위에서, 영국이 프랑스를 해양 봉쇄했던 이유가 프랑스를 말려죽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프랑스 산 제품과의 경쟁을 없애기 위함이라고 했었지요.  이렇게 적국에게 자국의 제품을 팔아 돈을 벌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프랑스 측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직접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중단한다' 라고 선언했지만, 그건 주로 영국에게서 수입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을 뿐, 수출은 계속 하고 싶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나폴레옹도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 싶어서였을까요 ?  물론 그것도 있었지요.  하지만 그가 영국 시장에 프랑스 제품을 팔려고 노력했던 주된 이유는 바로 영란은행에 저장된 금과 은, 즉 정금(specie) 때문이었습니다. 




(돈의 노예가 되지 말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역사를 보면 인간의 목숨보다는 돈이 훨씬 더 소중하다고 모두들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현재의 미국이야 달러 화가 전세계에서 통용되는 기축 통화이므로, 글자 그대로 돈이 나무에서 열린다고 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즉, 미국이 돈이 필요하면 조폐창에서 달러를 찍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물론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 미국 FRB가 그런 것을 허용하지도 않습니다.)  그에 비해서, 당시 영국 파운드 화는 그런 기축 통화의 지위를 가지지 못했고, 당시 전세계는 금 또는 은만을 진정한 화폐로 인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영국이 부자라는 것은 금광과 은광이 풍부했기 때문이 아니라 식민지 무역을 통해 들여오는 목화솜, 커피, 설탕, 염료, 향신료, 비단 등의 산물을 비싼 값에 유럽에 팔아 금과 은을 긁어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아무리 영국이 부자라고 해도,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맞서 돈 먹는 하마인 그 엄청난 해군 전력을 유지하고 그것도 모자라 대불 동맹국들에게 막대한 군자금을 대주는 것은 힘에 부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당시 영국의 부채 총액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르고 있었습니다.  물론 영국은 영란은행의 존재로 인해 이런 국채 발행과 매각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고 있긴 했습니다만, 분명 전쟁은 영국 경제에 큰 부담을 주고 있었습니다.   '무분별한 국채 발행은 결국 그 국가를 파멸시킨다'라고 경고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처음 출간된 1775년, 영국의 국채는 1억2천4백만 파운드에 달했습니다만, 그 책의 3번째 에디션이 인쇄될 때는 1783년 종료된 미국 독립전쟁 비용 때문에 거의 두배로 폭증한 상태였습니다.  영국이 제1차 대불동맹전쟁에 뛰어들던 1793년, 그렇게 영국 국채 누적액은 2억3천만 파운드였는데, 1802년 아매앵 조약으로 제2차 대불동맹전쟁을 끝낼 무렵에는 그 총액이 무려 5억7백만 파운드에 달했습니다.  이 금액이 어느 정도의 액수인지 느껴보시려면, 무려 100년도 지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직전 영국의 국채 총액이 5억8천7백만 파운드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시면 됩니다.  이렇게 당시 영국의 재정 상태는 파탄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1797년 2월에는 금태환 정지 (suspension of convertibility), 즉 파운드 지폐를 은행에 들고 가도 그 액수에 해당하는 금으로 바꿔주지 않는 비상 조치를 취합니다.  이 조치는 향후 22년 간이나 지속되는데, 이는 파운드 화 지폐의 가치를 폭락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그렇쟎아도 어려운 영국 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즉각 깨닫지는 못했지만, 역설적으로 파운드 화 폭락으로 인해 영국산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올라가고 해외로부터의 자금 유입이 활발해져서 결과적으로 영국의 경상수지가 급격히 좋아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17세기 말부터 현재까지 영국 GDP 대비 국채 비율입니다.  보시다시피 나폴레옹 전쟁 때가 역사상 최고 비율을 차지했었습니다.  그 다음은 제2차 세계대전 때였군요.)



아무튼 나폴레옹이 노리던 것은 바로 이것, 영국의 금과 은을 말려버림으로써 영국 경제를 파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영국으로부터 금화와 은화를 더 반출해낼 수 있다면, 영란은행에 예치된 금화와 은화에 근거한 파운드 화의 가치는 폭락할 것이고 그렇게 영란은행이 무너지면 영국 재정과 함께 영국 해군도 무너질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애초에 대륙 봉쇄령을 내린 것도, 영국으로 반입되는 금은의 꾸준한 흐름을 차단하여 영국을 경제적으로 몰락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유럽 대륙으로부터의 원재료나 공산품 공급을 차단함으로써 영국을 말려죽이겠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었지요.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오히려 유럽 대륙의 원재료든 공업제품이든 영국에 적극적으로 수출하여 영국으로부터 금은을 탈탈 털어내야 했습니다.  그런 나폴레옹의 의도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것이 그가 1810년 5월 그의 재무장관 고댕 (Gaudin)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편지에서, 그는 "내 의도는 프랑스로부터의 식량 수출과 외국 금화의 수입을 장려하는 것이다" 라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또 1808년 5월, 그의 동생이자 네덜란드의 왕이던 루이 (Louis)에게 보낸 편지는 더 노골적이었습니다.  그는 이 편지에서 네덜란드의 진 (gin)을 영국에 밀수를 통해 수출하는 방법에 대해 지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형님다운 어조로 강조했습니다.  "거래 대금은 반드시 다른 상품이 아닌 금화나 은화로 받아야 한다.  절대 다른 상품으로 받으면 안된다.  알겠느냐 ?"




(지금은 진 하면 영국산을 떠올리지만, 원래 진은 네덜란드가 원산지입니다.)




(나폴레옹에 의해 네덜란드 왕이 되었다가 이젠 진 술장수 노릇까지 하게 된 루이 보나파르트입니다.  그는 누구 덕분에 네덜란드 왕이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정말 진심으로 네덜란드 인들을 위한 네덜란드 왕 노릇을 열심히 했습니다.  덕분에 네덜란드 인들로부터는 크게 칭송을 받았으나 나폴레옹에게 찍혀 폐위되고 말았지요.  이 양반의 아들이 바로 나폴레옹 3세입니다.)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은 영국을 몰락시키기 위한 경제적 투쟁이 주된 것이었습니다만, 사실 나폴레옹은 거기에 다른 불순한 의도도 슬쩍 끼워 넣었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유럽 전체가 하나의 체제 안에서 평화롭게 다 같이 번영하는 세상을 꿈꾼다고 했으나, 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프랑스의 이익만을 지키는 보호장벽으로서 대륙 봉쇄령을 이용했습니다.  확실히 유럽 대륙 시장에서 영국 상품이 크게 줄어듬으로써, 프랑스 국내 상공업은 다소 활기를 띠게 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런 보호무역주의적인 속셈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 1807년 12월 밀라노 칙령 발표 직후 나폴레옹이 당시 해군상이던 드크레 (Decree)에게 지시한 조치들입니다.  그는 프랑스 항구에 입항한 러시아, 네덜란드 등 동맹국의 상선들을 억류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정말 가관인데, '영국 해군이 장악한 바다를 무사히 건너온 선박들은 동맹국 선박으로 서류를 세탁했을 뿐 사실상 영국 선박이거나, 그게 아니라 정말 동맹국 선박이라면 어차피 바다에 나가자마자 곧 영국 해군에게 나포될 것이 뻔하니 프랑스가 억류해야 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부당한 억류의 근거라는 것이 어처구니 없는 것이긴 해도, 또 따지고 보면 말이 전혀 안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지요.  정말 당시의 바다는 영국 해군의 것이었으니까요.  이 조치는 프랑스 국적 이외의 상선은 아예 프랑스에 출입하지 말라는 극단적인 보호무역주의 정책이었습니다. 




(목화밭에 열린 목화의 모습입니다.  당시 목화는 주로 인도와 아메리카 대륙에서 재배되었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영국 해군의 손이 닿지 않는 유럽 대륙 내부에서의 산업과 통상에서조차, 이런 노골적인 보호무역주의를 드러냈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령 나폴레옹은 자신이 국왕으로 있는 이탈리아 왕국 (롬바르디아 등 북부 이탈리아)에 모든 면직물의 수입을 금지시켰습니다.  이유는 면직물은 사실상 모두 영국산이거나, 또는 영국으로부터 수입된 목화를 가공한 제품이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우습게도, 프랑스 산 면직물은 제외라는 단서 조항을 슬그머니 끼워넣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목화솜이 단 한줌도 나지 않았으므로, 결국 그것도 영국 식민지 또는 미국으로부터 수입한 것이 뻔했는데도 그런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조항을 넣은 것이지요.  사실 나폴레옹은 비록 자신이 국왕으로 있었는데도 이탈리아 왕국의 번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면직물 외에도 프랑스 산 상품들은 거의 무관세로 이탈리아 왕국으로 수입되도록 했고, 반대로 이탈리아 왕국에서 생산된 상품은 상당한 관세를 내야만 프랑스로 수출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정책은, 전통적으로 스위스 및 남부 독일 지방과 깊은 관계를 가지던 북부 이탈리아를 강제로 프랑스 경제권에 철저히 예속시키려는 계획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리옹에서의 실크 직조장의 모습입니다.  한마디로 가내 수공업 수준이었지요.)




(산업 혁명에 들어서 증기기관을 이용한 직조기를 돌리던 영국 섬유 산업의 모습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예 더 나아가 십자군 전쟁 이후 이탈리아에 발달했던 비단 산업을 완전히 몰락시키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해외 시장에서 프랑스 산 비단과 경쟁하던 이탈리아의 비단 수출을 완전히 금지시킨 것입니다.  수출이 허락된 것은 프랑스의 견직물 (비단) 생산의 본산인 리옹 (Lyons)으로의 비단 원사 뿐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마치 생색이라도 내듯이 원래 프랑스에 수출할 때 다른 종류의 상품들에게 부과되던 무거운 관세를 면제시켜 주었습니다.  비단 원사는 리옹에서 가공하여 다시 수출할 수 있는 원재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왕국은 정식 국왕인 나폴레옹을 대신하여 그의 의붓아들 외젠 보아르네 (Eugene Beauharnais)가 부왕 (viceroy) 자격으로 다스리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친히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La France avant tout" (프랑스가 모든 것에서 우선)이라고 강조하며 이탈리아의 경제를 훼손하여 프랑스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을 망설이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또 중부 독일의 작지만 부유한 공업 강국 베르크 (Berg) 공작령은 전통적으로 이탈리아에 공산품을 수출하여 부를 쌓았는데, 나폴레옹의 이런 조치로 인해 당장 이탈리아 시장을 잃고 몰락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마침 이 공작령의 주인이 나폴레옹의 매제인 뮈라 (Joachim Murat)였으므로 자신의 영지가 망하는 것을 자신의 재산이 줄어드는 것으로 받아들인 뮈라의 부탁으로 베르크 만큼은 이탈리아에 수출을 할 때 관세가 면제되는 특혜를 누리다가, 곧 제 정신을 차린 나폴레옹에 의해 그 특혜가 철폐되면서 프랑스 산 무관세 제품에게 가격 경쟁력을 잃고 결국 몰락하는 처지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베르크 공작령의 수도는 지금의 뒤셀도르프입니다.  이 그림은 17세기 후반 뒤셀도르프의 St. Andreas 대성당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전쟁 외에도 정치와 경제,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 항상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여러번 이야기된 바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의 승리가 곧 프랑스의 경제적 이익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항상 신경을 썼습니다.  단순히 패전국에게 전쟁 보상금을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령 나폴레옹은 1809년 9월, 바그람 (Wagram)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오스트리아 쇤브룬 (Schonbrunn) 궁전에서 당시 프랑스 내무부 장관이던 푸셰 (Fouche)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며 투덜거렸습니다.  "해당 부서에서 일을 제대로 했다면 짐이 비엔나로 밀고 들어온 전과를 활용하여 프랑스의 상인들과 제조업자들이 더 많은 직물과 도자기 등의 상품을 오스트리아에 판매하도록 독려했을 걸세.  이전에 그런 상품들은 오스트리아에게 엄청난 관세를, 가령 직물만 하더라도 무려 60%의 관세를 내고 있었네.  당연히 나의 승리를 이용하여 거의 무관세로 비엔나의 창고들이 터질 정도로 프랑스 상품을 판매해야 하네.  그런데 관련 부서에서는 생각도 없고 행동도 없군."




(바그람 전투에서의 나폴레옹입니다.)



나폴레옹의 경제 부문에 대한 이런 열정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나폴레옹의 대등한 라이벌이 되고자 노력했던 베르나도트와 연관된 일화입니다.  그는 나중에 스웨덴의 왕세자가 된 이후, 스웨덴 궁정에서 통치에 대한 실무 학습을 시작하는데, 그때의 일화를 그와 함께 일했던 스웨덴 귀족인 트롤-바흐트마이스터 (Trolle-Wachtmeister)가 전해주는 바에 따르면, 베르나도트는 다른 것은 몰라도 경제 부분에 대해서만은 자신을 가르칠 사람이 없다며 대단한 자신감과 긍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장군 출신임에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스웨덴에 나보다 더 휼륭한 군인이 300명이 있다고 해도 뭐라고 반박하지 않겠네.  하지만 난 경제 부문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 특별한 수업을 거쳤으므로, 그 부문에 대해서만은 내가 스웨덴 내에서 최고 전문가라고 자신하네."  베르나도트가 항상 나폴레옹을 질투하고 그의 모든 것을 따라했던 것을 생각하면, 나폴레옹이 경제 쪽에 대해 얼마나 많은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습니다.




(스웨덴 내 최고 경제 전문가인 '경제왕' 베르나도트, 아니 칼 14세의 동상입니다.)




하지만 그런 '경제 황제'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 정책은 결국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요 ?  다들 아시다시피, 별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단 나폴레옹이 착각하는 것이 있었는데, 영국이 부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은 나폴레옹이 이해하는 것처럼 그냥 식민지의 상품을 유럽에 판매하는 단순 삼각 무역을 통한 것만이 아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랬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나폴레옹의 낡은 경제학이 이해하는 바는 거기까지였겟지요.  나폴레옹이 브리소 (Brissot) 등 프랑스 지식인들의 저술을 읽고 형성한 견해에 따르면, 영국이 자랑하는 부라는 것은 결국 아무 실체가 없는 서류상의 신용 창출 구조, 즉 영란은행의 국채 제도에 의존하는 것으로서, 외부에서 충격을 줘서 금은 등 귀금속 공급을 끊기만 하면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광대하고 기름진 농토를 가진 농업과 역사 깊은 명품 장인 제도에 근거한 탄탄한 상공업에 기반을 둔 프랑스와는 전혀 달리, 영국의 경제 구조는 허약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되던 무렵, 이미 영국은 산업 혁명에 본격 진입한 상태였습니다.  즉 영국 산업은 막대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이는 유럽 대륙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었습니다.  외제가 값싸고 질이 좋은데 그걸 무시하고 더 비싸고 품질이 떨어지는 국산품을 쓰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결국 통하지 않는 정책이었습니다.  가령 카리브 해의 사탕수수 공급이 끊기면서 나폴레옹은 원래 프로이센에서 시작된 사탕무 (sugar beet)의 생산과 정제를 장려하여 유럽 대륙 내에서의 설탕 생산에 힘을 쓰기도 했지만, 그런 경쟁력 없는 산업은 결과적으로 도태될 수 밖에 없었고, 실제로 도태되었지요.



(사탕무에서 설탕을 뽑아보자는 시도는 예나-아우어슈테트 패전의 주범인 프로이센 빌헬름 3세의 지시로 본격화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그 뒤를 이어 대량 생산을 시작했고, 이에 힘입어 1813년에는 아예 카리브 산의 설탕 수입을 금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그리고 나폴레옹이 간과, 혹은 일부러 무시했던 것들도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을 갉아 먹었습니다.  바로 영국과 거래를 해야만 하는 다른 나라들의 형편이었지요.  가령 러시아 같은 경우, 귀족들의 주된 돈벌이는 '자신의 장원에서 생산된 곡물을 영국에 수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807년 틸지트 (Tilsit) 조약 이후 러시아도 대륙 봉쇄령에 강제로 참여하게 되면서 러시아 귀족들이 당장 빈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 쌍두 독수리의 영광이 프랑스의 젊은 독수리에게 짓밟히는 것은 뭐 아무래도 좋았으나, 당장 자기 주머니가 가벼워지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또 위에서 언급했 듯이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은 '영국에서 금은을 빼내오자'라는 목적 외에도 '동맹국들의 손해는 곧 프랑스의 이익'이라는 이기적인 프랑스의 경제적 욕심이 듬뿍 가미된 것이었기 때문에, 동맹국들의 성심어린 참여는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결과적으로 유럽 각국은 프랑스의 감시망을 피해 영국과 활발한 밀무역에 탐닉했지요. 




(대륙 봉쇄령 당시 영국산 제품이 대륙 내로 밀반입되던 루트를 표시한 지도입니다.)



심지어 프랑스 군의 군수품 중 일부도 영국산으로 채워질 정도였습니다.  가령 1812년 영국 의회에서 "프랑스 육군 병사들의 군복은 요크셔(Yorkshire) 산이며, 술트(Soult) 원수를 포함하여 그의 군단 병사들의 군복 장식품은 버밍엄(Birmingham) 산이다" 라는 발언이 나왔을 때 영국 의원들은 무척이나 득의양양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영국산 공산품은 물론 프랑스 정부가 영국 공장에 주문을 해서 도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국이 중립국에 수출한 상품이 몇 번의 생산지 세탁을 거쳐 결국 프랑스 국내로 반입된 것이지요.  프랑스 육군의 구매부에서는 이런 상품이 사실상 영국제라는 것을 과연 몰랐을까요 ?  그럴 리가 없지요.  그러나 구매부에서야 구매해야 할 물품은 있는데 예산은 제한되어 있으니, 그 중 가장 질 좋고도 저렴한 제품을 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주력 산업이었던 섬유산업에 있어 가장 앞선 경쟁력을 갖춘 것은 바로 영국이었으니, 그런 기준으로 선택되는 물품은 다 영국산일 수 밖에 없던 것입니다.




(잔뜩 폼을 재며 포즈를 취한 술트 원수입니다.  저 군복이며 장식품이 영국산이었다는군요 ?)



사정이 그러했기 때문에, 비록 영국의 국채는 나폴레옹의 기대처럼 계속 불어나 1815년 워털루 전투 즈음에는 영국 전체 GDP의 2배에 달하기도 했습니다만, 영국 국채에 대한 신용은 끝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비록 영국에게는 프랑스처럼 광대한 기름진 농토와 명품 장인 제도는 없었을지라도, 산업 혁명 덕택에 웅장한 공업 능력을 보유하게 된 것이 영국 경제의 근간이 되어 준 덕분이었지요.  이렇게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난 괴물이었던 영국 산업계에게 전쟁을 선포한 나폴레옹은 확실히 이길 수 없는 적수에게 덤벼든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댓가는 1812년 러시아의 진흙구덩이 속에서 처절하게 치르게 됩니다.  그 이야기는 먼 훗날로 미루시고, 다음 편에서는 나폴레옹이 폴란드로 진격했을 때 어떤 모험을 겪게 되는지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 지난 번에도 밝혔지만, 이번 편 내용의 상당 부분은 Eli Heckscher의 "대륙 봉쇄령의 경제적 해석"이라는 책의 내용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