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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명령에 따르는자 망하고 거역하는자 흥한다 - 풀투스크 Pultusk 전투

by nasica-old 2014.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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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 우리는 이제 나폴레옹이 진격해 들어갈 폴란드의 슬픈 역사와 그를 대하는 나폴레옹의 태도에 대해 짧게 살펴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싸우게 될 대상은 폴란드가 아니라 바로 러시아였지요.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진격에 대해 어떤 태도였을까요 ?

 

예나 전투 이후 프로이센이 지리멸렬 상태가 되자, 러시아의 짜르 알렉상드르에게는 2가지 옵션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그냥 프로이센을 본 척 만 척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비록 나폴레옹과 1대1로 붙는다 하더라도 프로이센을 구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패기넘치고 의리으리한 젊은이였던 알렉상드르는 2번째 옵션을 택합니다.  그는 저 남쪽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 투르크와의 분쟁이 벌어져 그쪽으로 8만의 병력을 보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소 무리하여 이미 폴란드에 배치된 병력 외에 약 3만7천의 제2 야전군을 별도로 편성, 이를 프로이센을 향해 보냅니다.

 

 

 

(의리으리한 상남자 알렉상드르는 실제로 무척이나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틸지트 회담의 내용을 보면 의리는 이익 앞에 한낱 구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프로이센의 국경선을 넘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다소 망설였습니다.  이 선을 넘는다면 과거 폴란드 영토로서, 러시아의 충돌이 불가피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편에도 언급했지만, 나폴레옹은 러시아와는 구태여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의 그랑 다르메 (Grande Armee)는 사실상 1805년 울름 Ulm 작전을 위해 프랑스를 떠난 이후, 한번도 프랑스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계속 해외 주둔하고 있어서 병사들의 피로도가 심각한 편이었습니다.  게다가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나폴레옹의 황제 정권도 그리 뿌리가 깊은 편이 아니어서, 그렇게 오래 파리를 비워두는 것이 과연 옳은 판단인지 의심될 정도였습니다.  가령 당시 파리와 프로이센 사이를 잇는 도로 위에는 파리와 나폴레옹 사이를 오가는 서신을 소지한 전령이 거의 항상 말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모든 결정을 나폴레옹 개인에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였지요.  어느 정도로 심했는가 하면 파리에서 공연되는 연극의 주제 선택까지도 나폴레옹의 의견을 물을 정도였습니다.  이는 나폴레옹의 정권이 오로지 나폴레옹 개인에게 의존하는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는 점과 함께, 나폴레옹은 계몽 군주가 아니라 독재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는 일화이지요.

 

 

 

(연극 희곡 선택까지 나폴레옹이 직접 했다니까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나폴레옹은 대단한 연극 애호가였습니다.  이 그림은 당시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던 대배우 탈마 Francois-Joseph Talma 가 당시 연극에서 로마인 킨나로 분장한 모습입니다.  나폴레옹은 탈마의 연극 공연을 일반 대중들과 함께 극장에서 즐겨 보았는데, 당시 인기 희곡 중에는 어쩔 수 없이 간혹 가다 독재자를 비난하는 내용의 대사가 나올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탈마 본인을 비롯하여 나폴레옹의 측근들은 식은 땀을 흘리며 귀빈석에 앉은 나폴레옹의 눈치를 보아야 했는데, 나폴레옹 본인은 그런 장면에서는 깜빡 조느라 아무것도 못들었다는 듯한 연기를 그럴싸하게 해내는 재치를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러시아 군이 폴란드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는 첩보를 접하고는, 과감하게 폴란드로 진군을 시작합니다.  러시아와의 충돌은 더 이상 피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는 먼저 심리적, 자연적으로 서구와 동구를 나누던 경계선이던 비스툴라 (Vistula) 강을 건너, 과거 훈족과 마쟈르, 몽골의 기병들이 내달렸던 광활한 폴란드의 평원을 가로질러 내달렸습니다.  그러나 과거 훈족과 몽골은 어땠는지 몰라도,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는 '내달렸다'라는 표현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기동성을 보여주었습니다. 

 

1806년 11월 28일, 러시아 군이 버리고 간 바르샤바(Warsaw)를 폴란드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다부의 제3군단이 무혈 점령하고, 토른 (Thorn)을 포위하고, 비스툴라, 부크 (Bug), 우크라 (Wkra, Ukra), 나레프 (Narew) 등의 여러 강에 다리를 놓는 등 많은 성과를 이루기는 했지만, 그 진격 속도는 몽골 기병은 커녕, 여태까지 나폴레옹의 보병들이 보여주었던 기동성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이 지도에서 신 동부 프로이센 Neuostpreussen을 찾아보십시요.  이 신 동부 프로이센은 제3차 폴란드 분할 이후 프로이센에 합병된 폴란드 영토로서, 약 90만명의 인구를 가진 곳이었습니다.  크게 플로스크 Plozk 와 비알리스토크 Bialystok 의 2지방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1807년 나폴레옹과 알렉상드르가 맺은 틸지트 조약에서, 플투스크가 속한 플로스크는 프랑스의 위성 국가인 바르샤바 공국으로, 비알리스토크는 러시아로 귀속되게 됩니다.  결국 프로이센이 빼앗은 폴란드 땅을 프랑스와 러시아가 나눠가진 셈이 됩니다.  빌헬름 3세와 맹약을 맺은 알렉상드르로서는 의리으리한 일이지요.)

 


일단 도로 사정이 매우 열악했습니다.  프랑스나 독일의 지방 도로들도 당시에는 진흙투성이 비포장 도로에 불과했지만, 부유한 서구에 비해 경제적 문화적으로 열악했던 폴란드의 도로망은 그야말로 늪과 같은 진흙탕이었습니다.  특히 폴란드는 11월이 우기로서, 그렇쟎아도 열악한 도로 사정을 더욱 열악하게 만들었습니다.  병사들의 무릎까지, 그리고 수레의 바퀴축까지 진창 속에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프랑스 군을 괴롭힌 가장 큰 장애물은 식량 부족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과거 이탈리아나 오스트리아, 독일 등지를 누비고 다닐 때 진지하게 식량 걱정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군대가 당연히 'live off the country', 즉 알아서 현지 조달로 먹고 살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작전을 짰습니다.  물론 덕분에 병사들은 전투 현장에서는 거의 언제나 배를 곯아야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굶어 죽을 지경은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든 오스트리아든 독일이든 모두 어느 정도 부유하고 넉넉한 동네로서, 잘 정돈된 농가들의 창고 문짝을 걷어차면 하다 못해 감자 몇 자루나 밀가루, 포도주 항아리를 얻을 수 있었고, 찬장을 열었을 때 버터와 치즈가 나오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감자는 이때 즈음해서는 동구권에 널리 재배되는 인기 구황작물로서, 나폴레옹 본인을 포함한 프랑스 군이 즐겨먹는 음식물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과 예카테리나 대제 등이 앞장 서서 감자 재배를 장려한 덕분이지요.)

 

 

그러나 가난한 폴란드에 와보니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일단 황량하고 광활한 대지에 비해 사람 사는 마을이 그리 많지도 않았고, 마을이 나온다 해도 다른 동네처럼 많은 집이 몰려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집도 초라했고, 창고와 찬장은 더더욱 초라했습니다.  프랑스 군은 자신들이 해방군이라고 생각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책이 뭔지 신문이 뭔지 몰랐던 폴란드 농민들은 프랑스 군을 그저 또다른 외국군, 그것도 배고픈 외국군이라고 생각할 뿐이었고, 얼마 안되는 비축 식량마저 폴란드 농민들이 이 외국 귀신들에게 빼앗길까봐 귀신처럼 숨겨 놓았습니다.  심지어 이집트 사막에서조차 물 걱정은 몰라도 식량 걱정을 하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난생 처음으로 병참선 걱정을 해야만 했고, 이런 식량 보급은 열악한 도로와 곳곳에 즐비한 습지와 강, 지류로 인해 더욱 지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안 좋았던 것은, 이렇게 인적이 드물고 황량한 지역에서는 나폴레옹의 눈과 귀 역할을 하던 정찰병과 첩자들의 발도 묶일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중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된 나폴레옹의 극찬을 받은 회고록을 쓴 마르보 (Jean Baptiste Antoine Marcellin de Marbot)에 따르면 당시 상황은 이랬습니다.

 

"날씨는 끔찍하고, 식량은 희귀하고, 와인은 아예 없고, 맥주는 형편없고, 식수는 진흙이 섞여 탁하고, 빵도 없고, 숙소라는 것은 소나 돼지와 함께 쓰는 움막이다.  이것이 폴란드다."

 

 


(마르보는 당시 24살의 젊은 장교로서, 제7군단을 지휘하는 오쥬로 원수의 부관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스페인 전쟁과 러시아 원정에서도 활약했고, 워털루 전투에서 부상을 입기도 했는데, 그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것은 주로 그가 남긴 회고록 덕분입니다.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그의 회고록을 읽고 '최근 4년간 읽은 책 중 최고'라며 극찬했으며, 유서에도 '마르보가 저작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10만 프랑을 그에게 유산으로 남긴다'라는 항목을 넣을 정도였습니다.)

 


한편, 나폴레옹이 폴란드의 진흙 속에서 고생할 때 러시아 군도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알렉상드르가 임명한 제1, 제2 야전군의 총지휘관은 카멘스키 (Mikhail Kamensky) 장군이었는데, 이 양반은 이 풀투스크 전투 당시 이 분 연세가 무려 68세로서, 사실 상당한 고령이셨지요.  게다가 원래 이분은 1788년 몰다비아에서 투르크 군과 싸울 때 지휘권에 대한 반발 문제로 강제 보직해임 당한 뒤 한번도 현역을 맡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런 분에게 지휘권을 맡겼다는 것이 당시 러시아 군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지요.  아무튼 카멘스키 장군은 지휘를 맡자, 일단 부크 (Bug) 강을 지키던 베니히센 (Levin August Theophil, Count Bennigsen) 백작의 제1 야전군을 우크라 강까지 후퇴하도록 명령합니다.  짜르 알렉상드르가 보내준다는 제2 야전군과 합류하겠다는 이유에서였는데, 사실은 맹수같은 나폴레옹과 혼자 싸우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라고 의심이 들긴 합니다.  알고 보면 제2 야전군 지휘관도 그리 믿음직스럽지는 못했습니다.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주정뱅이 짓으로 악명을 떨친 북스게브덴 (Friedrich Wilhelm von Buxhoeveden) 장군이 지휘관이었거든요.  아무튼 약 6만5천에 달하는 제1 야전군과 3만7천 정도의 제2 야전군이 합류하면 글자 그대로 10만 대군이 되므로, 어느 정도 파괴력 있는 병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카멘스키 백작님이십니다.  카멘스키 백작님은 자신의 영지에서도 농노들을 잔혹하게 다루었던 것으로 악명 높았는데, 아니나다를까 풀투스크 전투에서 이탈하신지 3년 후인 1809년 그렇게 학대받던 농노에게 그만 살해되고 맙니다.  꼴통 노친네가 천벌 받았다고 해야 하나요...)



하지만 일단 후퇴 뒤에 상황을 지켜보니, 의외로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은 소문대로 전광석화처럼 치고 들어오지를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위에서처럼 도로망과 보급품 문제 때문이었지요.  이러자 카멘스키 장군은 '내가 공연히 겁을 먹고 광활한 영토를 내버린 꼴이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는 12월 초, 다시 베니히센 장군에게 나레프 강을 향해 진격을 명했습니다.  하지만 12월 10일, 모들린 (Modlin)에서 프랑스 군이 나레프 강을 도하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다시 덜컥 겁이 났던 카멘스키 장군은 다시 우크라 강까지 후퇴를 명했습니다.  이때 공연히 험한 날씨 속에 우크라 강과 나레프 강 사이를 왔다갔다 해야 했던 러시아 군과 베니히센 장군의 좌절감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지도에는 우크라 강의 모습이 나오지 않습니다만, 우크라 강은 나레프 강으로 흘러드는 여러 지류 중 하나입니다.)

 

 

 

(우크라 강은 보시다시피 작은 지류입니다.)

 

 

카멘스키 장군이 나타나기 전까지 제1 야전군 사령관으로서 최고 지휘관이던 베니히센 장군은 원래 나폴레옹과 한번 제대로 붙어 보기를 벼르고 있었습니다.  이 양반의 본명은 레빈 아우구스트 Levin August Gottlieb Theophil 로서, 당시 61세의 노장이었습니다.  원래 이분은 러시아 인이 아니라 브라운슈바이크 (Braunschweig) 태생의 독일인이었습니다.  그래서 7년 전쟁 때도 10대 후반에 하노버 군에서 싸웠지요.  7년 전쟁이 끝나자 아버지의 타계와 자신의 결혼 등 가정 문제로 인해, 그는 19세의 어린 나이에 1764년 하노버 군에서 제대했고, 무려 9년 뒤인 1773년에야 러시아 군에 입대를 하여 투르크 군과 싸웠습니다.  그는 이후 러시아 군에서 승승장구하여 오스만 투르크나 페르시아와의 전쟁 뿐만 아니라 폴란드 봉기 진압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소장까지 승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파벨 1세에 의해 군에서 쫓겨나는 봉변을 당했지요.  그런 연유로 그는 확실히 파벨 1세의 암살 사건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뒤를 이은 알렉상드르 1세가 그를 다시 군에 복직시켜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이후 맡은 직책에서 첫번째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임무가 바로 이 1806년 폴란드 방면 야전군 사령관이었습니다.  이렇게 피끓던 베니히센은 아무 전략도 없이 우왕좌왕하는 상관인 카멘스키 장군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특히 베니히센은 제2 야전군 사령관 북스게브덴과 합류한다는 사실 자체가 싫었습니다.  그는 원래부터 북스게브덴과 무척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베니히센 장군입니다.  이후 다음 해에 벌어진 아일라우 전투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를 패배시키기도 했던 그는 원래 하급 귀족 출신의 독일인이었습니다.  나중에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비로소 알렉상드르 1세에 의해 백작에 봉작되었고, 전쟁이 끝난 이후 고향 하노버의 영지에 은퇴하여 81세까지 천수를 누리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실은 러시아 군에서 1817년 완전히 은퇴하게 된 것은 워낙 행정 업무 처리가 미숙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한편, 나폴레옹은 늘 하던 대로 러시아 군을 한 방에 일망타진 하기 위해 큰 그물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러시아 군이 처음에는 포젠 (Posen)을 중심으로 집결하고 있다고 보았으나, 곧 이어 풀투스크 주변이 러시아 군의 중심지라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뮈라의 총 지휘 하에, 다부의 제3 군단, 오쥬로의 제7 군단, 란의 제5 군단과 뮈라 직속의 제1 기병 예비대를 동원하여 풀투스크로 진격하게 했습니다.  한편, 네와 베르나도트, 베시에르 등은 러시아 군의 우익을 북쪽으로 우회하여, 레스토크의 지휘 하에 있는 잔존 프로이센 군을 상대하도록 했습니다. 

 

 

 

(12월 초의 모습입니다.  프랑스 군의 좌익은 레스토크의 프로이센 군을 밀어내고 우익은 러시아 군을 포위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술트의 제4 군단이 레스토크와 베니히센 사이로 신속하게 밀고 들어가는 것인데, 폴란드의 열악한 도로망은 그를 허락하지 않았지요.)

 

 

12월 23일, 다부의 제3 군단은은 끈덕지게 진격하여 작은 전투를 치르고 마침내 우크라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카멘스키는 불과 며칠 전 전진 명령을 내렸을 때의 패기를 전부 잃고 훨씬 북동쪽인 오스트로웽카 (Ostrolenka)로 후퇴를 명령했습니다.  이때 카멘스키는 아예 신경쇠약에 걸렸는지, 병을 이유로 지휘권을 아직 현장에 도착하지도 않은 북스게브덴에게 넘기고 제1 러시아 야전군에서 이탈하여 자기 영지로 되돌아가 버리는 기행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베니히센은 아마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러시아 군의 움직임이 전해지자, 나폴레옹은 이것이 전쟁을 끝낼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도주하는 러시아 군의 퇴로를 막고 결정타를 먹이기 위해, 란의 제5 군단을 풀투스크로, 다부와 오쥬로를 그 좌측으로 각각 급파했습니다.  동시에 술트도 우크라 강을 건너 오쥬로를 지원하도록 했지요.  하지만 여기서 나폴레옹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베니히센이었습니다.  베니히센은 카멘스키의 명령을 혼자서 거부하기로 결심하고, 풀투스크에 남았던 것입니다.  베니히센에게는 4개 사단, 총 4만이 훨씬 넘는 병력이 있었고, 무엇보다 128문의 대포라는 막강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카멘스키의 명령에 따라 후퇴한 것은 제1 야전군의 일부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이런 사정을 모르고 이 대군을 향해 단독으로 뛰어들던 란에게는 총 2만의 병력과 38문의 대포 뿐이었습니다.  사실상 승패는 결정된 셈이었지요.

 

 

 

(풀투스크는 나레프 강가에 면해 있는 작고 예쁜 도시로서, 폴란드의 작은 베니스라고 불린다는군요.) 

 

풀투스크는 나레프 강 서안에 있는 작은 마을로서, 언듯 보면 왜 베니히센이 하필 여기서 프랑스 군과 싸우려 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까딱하면 동쪽으로 후퇴해야 하는 베니히센으로서는 배수의 진이 될 수도 있는 환경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차피 이미 남쪽에서 나레프 강을 건넌 프랑스 군은 서쪽이 아니라 강을 끼고 남쪽에서 치고 올라올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대군으로 알려진 프랑스 군에게 포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한쪽 측면이 강으로 보호되는 것이 유리했지요.  하지만 베니히센이 풀투스크를 결전지로 고른 것은 마을 서남쪽에 있는 언덕 때문이었습니다.  숨을 곳이 없이 평탄한 폴란드의 대평원에서 이런 나지막한 언덕은 대단히 중요한 군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역전의 맹장 란도 이 언덕으로 인해 큰 곤욕을 치르게 됩니다.  베니히센은 이 언덕 뒤에 중앙군을 숨겨 두었고, 우익은 톨리 (Michael Andreas Barclay de Tolly ) 장군 지휘 하에 인근 모진 (Mosin) 숲에, 좌익은 바고부트 (Karl Gustav von Baggovut) 지휘 하에 풀투스크 마을 자체에 진을 치도록 했습니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프랑스 군이 보기에는 러시아 군의 좌익과 우익 정도만 눈에 보였고, 정면의 언덕 위에는 약간의 코작 기병대 외에는 관측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언덕과 마을과 숲에 가려 그 뒤에 얼마나 되는 병력이 있는지 알아볼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것이지요.

 

 

 

(12월 26일 정오 무렵의 풀투스크 상황입니다.)

 

 

크리스마스 밤을 남서쪽 즈브로스키 (Zbroski) 마을에서 보낸 란의 제5 군단은, 1806년 12월 26일 아침 7시 풀투스크를 향해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거리는 고작 8km였으므로 걸어서 2시간도 안되는 거리였지만 실제로는 3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이날 겨율 치고는 유난히 날씨가 따뜻하여, 폴란드의 악명 높은 진창길이 다 녹아 있었던 것입니다.  말을 탄 란이 먼저 현장에 도착하여 풀투스크의 러시아 군 진형을 살폈지만, 그는 언덕이라는 장애물 때문에 베니히센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명령서에 따르면, 러시아 군은 총퇴각을 시작했고,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러시아 군의 후위대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게다가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진눈깨비로 인해 시야가 더욱 제한되었습니다.

 

무릎까지 빠진다는 폴란드 진흙길을 헤엄쳐 오느라 기진맥진한 프랑스 제5 군단이 공격을 시작한 것은 도착한지 1시간 정도가 지난 오전 11시부터였습니다.  란은 정석대로, 눈에 보이는 러시아 군 좌우 양익을 향해 수셰 (Louis-Gabriel Suchet)의 전열 보병과 용기병대를 왼쪽으로, 클레파레드 (Claparède)의 경보병과 트레이아르 (Treilhard)의 경기병대를 오른쪽으로 보내 교전을 시작했습니다.  중앙으로는 베델 (Wedell, Vedell)의 지휘 하에 2개 대대의 전열 보병을 진격시켰습니다. 

 

 

 

(수셰는 원래 리옹의 비단 방직업자의 아들로서,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전형적인 시민 계급 출신이었습니다.  유능한 군인으로서 스페인 전선에도 활약한 그는 그 공으로 나중에 공작의 지위에도 오르지요.  루이 18세의 복위 때도 프랑스 귀족 작위를 받았으나, 백일천하 때 나폴레옹 편에 섬으로써 모든 것을 잃어야 했지요.)

 

 

모든 전투가 다 그렇습니다만, 전투 자체는 상당히 격렬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베니히센도 프랑스 군의 공격에 대응하여 예비대를 투입한데다, 특히 중앙으로 진격했던 베델의 보병대가 우익의 클레파레드의 경보병을 돕기 위해 오른쪽으로 선회하다가 언덕 뒤에서 뛰어나온 러시아 기병대에게 측면을 노출시키면서 프랑스 군에게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트레이아르의 경기병들이 우익으로 돌격해들어가자, 예상치 못한 강력한 포병대가 산탄 포격을 퍼부어 경기병들은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후퇴해야 했습니다.  좌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수셰와 함께 란 본인이 좌익의 공격을 지휘했는데, 란이 직접 이끄는 공격답게 처음에는 러시아 군을 숲 속으로 밀어 붙이고 러시아 군의 대포들까지 노획했으나, 숲 속에서 예상보다 엄청난 규모의 러시아 예비대가 반격을 해오자 노획했던 대포를 버리고 다시 숲 밖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가장 황당한 경험을 했던 것은 베델의 뒤를 이어 중앙으로 진격했던 가잔 (Gazan) 장군의 제2 공격대열이었습니다.  언덕의 능선을 넘어서자마자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은 웅장한 규모의 러시아 군 본대와, 그 앞에 주욱 늘어선 포병대였습니다.  곧 그 대포들로부터 무시무시한 대포알들이 날아와 프랑스 보병들을 픽픽 쓰러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오후 2시가 될 즈음에 프랑스 군은 거의 무너지기 일보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진흙길에서 3시간 행군하느라 지친 몸으로 공격에 나선 2만 병력이, 128문의 대포를 앞세운 4만에게 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더 큰 문제는 여기서 후퇴를 결정한다고 하더라도, 돌아갈 길도 올 때와 마찬가지로 진흙 늪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지요.  특히 러시아 군은 포병과 기병에서도 프랑스 군을 압도했으므로, 이대로 퇴각할 경우 추격하는 러시아 군에 의해 피해가 엄청날 것이 뻔했습니다.

 

 

 

(오후 3시 경의 상황입니다.  서쪽에 푸르니에 돌탄느의 부대가 나타나 톨리의 부대가 그를 상대하고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하지 못한 구원 병력이 나타납니다.  다부의 제3 군단 휘하 제3 사단 약 6천 병력이 뜬금없이 북서쪽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이들을 지휘하던 푸르니에 (Fournier d'Aultanne) 장군은 원래 다른 러시아 군을 추격하도록 명령을 받고 인근까지 진격했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을 듣고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베니히센의 병력은 란의 병력과 푸르니에의 병력을 다 합한 것보다 월등히 많았으므로 이들이 전체 전황을 뒤집어 놓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특히 푸르니에의 제3 사단은 역시 진흙구덩이를 급히 헤쳐 오느라, 가지고 온 대포는 단 1문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푸르니에의 병력은 란의 숨통을 터주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일단 베니히센은 이 새로운 부대의 출현에 대해 바싹 긴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병력 규모는 작았지만, 그 위치는 강을 등지고 있는 베니히센을 포위하기 딱 좋은 위치였던 것입니다.   그는 우익의 톨리 장군을 중앙 쪽으로 후퇴시키고 중앙의 예비군을 더 우익으로 투입하여 이 새로운 부대에 대해 응전했습니다.  이에 따라 란에게 퍼부어지던 공격이 반감되었지요.  또 러시아 군 중앙의 강력한 포병대가 서쪽, 그러니까 러시아 군의 우익으로 푸르니에를 상대하기 위해 대거 이동하자, 중앙에 있던 가잔 (Gazan) 장군이 러시아 군의 좌익을 공격할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한때 바고부트 장군의 러시아 군을 밀어내고 러시아 군 대포들을 탈취하기도 했으나, 예비대로 있던 톨스토이 (Alexander Ivanovich Ostermann-Tolstoy) 장군의 기병대가 달려들면서 곧 쫓겨나 다시 대포들을 버리고 후퇴해야 했습니다. 

 

 

 

(톨스토이 장군입니다.  이 분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문호 톨스토이와 같은 가문 맞습니다.  이 분의 초상화에서 옷깃을 움켜잡은 오른손의 포즈가 좀 오묘한데, 이분은 1813년 프랑스의 방담 장군이 포로로 잡힌 쿨름 전투에서 왼손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와는 무관하게 전후 유럽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인기남으로서 곳곳에 정부와 사생아를 남기셨습니다.  정작 정실부인과는 소생이 없었지요.)

 

 

심한 진눈깨비 속의 이런 악전고투 중 어느 덧 밤 8시 정도가 되자, 어둠을 틈타 프랑스 군의 후퇴가 시작되었습니다.  우선 푸르니에 장군의 제3 사단은 왔던 길을 다시 밟아 다부 원수의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후퇴를 시작했고, 란도 오전 10시에 공격을 시작하기 위해 병력을 집결시켰던 위치로 일단 후퇴하여 만신창이가 된 제5 군단을 재정비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더 후퇴하지 않고 밤을 지새웁니다.  왜 란은 더 후퇴하지 않았을까요 ?  프랑스 제1의 맹장이라는 자존심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어둠 속에 그 진창길을 통해 후퇴하려니 병사들이 너무 지쳐 있어서였을까요 ?  하긴 란 본인을 포함하여, 클레파레드와 베델 등 전투에서 선두에 섰던 지휘관들은 모두 부상을 입을 정도로 전투가 치열했으니 지치기는 정말 지쳤을 것입니다.

 

 

 

 

(열혈남아 란은 항상 전투를 선두에서 지휘했기 때문에, 많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결국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군의 대포알에 생명을 빼앗기지요.  용기있게 앞장서고, 나폴레옹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던 결과가 그랬습니다.  왠지 씁쓸하군요.)

 

 

란이 후퇴하지 않은 이유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예상과는 달리 러시아 군의 추격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건 사실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프랑스 군은 공식적으로는 이날 전투에서 700명이 전사하고 1200명이 부상당하는 등, 총 2200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믿는 사람은 당시에도, 또 지금도 많지 않습니다.  아마도 7천, 최소 5천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입니다.  러시아 군의 피해는 러시아 측에 따르면 포로 1500을 포함하여 3500이었는데, 프랑스 군에 따르면 1800명의 포로를 포함하여 6800에 달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프랑스 군은 사실상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베니히센은 추격하지 않았을까요 ?

 

실은 추격은 커녕, 이날 밤 베니히센은 짐을 싸들고 나레프 강을 건너 동쪽으로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 풀투스크 전투가 러시아 군의 대승이라고 보고하면서, "나폴레옹 본인이 이끄는 6만 대군을 맞아 우세를 점하며 풀투스크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뒤, 고립을 피하기 위해 명예롭게 후퇴했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즉, 러시아 군의 규모를 과소 평가했던 프랑스 군과 달리, 그는 프랑스 군의 병력을 과대 평가했고 또 그 정도 병력이라면 나폴레옹 본인이 지휘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성공적으로 한판 떴으니, 이젠 됐다라고 판단하고 부리나케 후퇴한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용장 란은 이름 값을 제대로 했습니다.  그와 그의 제5 군단이 너무나 뚜렷한 수적 열세와 지형적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기 때문에, 베니히센은 프랑스 군의 규모를 실제보다 훨씬 크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란은 현장에 남았지만 베니히센은 후퇴했으므로, 프랑스 군은 승리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전투의 승패는 양측의 피해 규모를 비교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누가 후퇴를 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으니까요. 

 

 

 

(여기서 어떻게 러시아 군이 700여명의 사상자만 내고 빠져나갈 수 있었는지 지도만 보면 이해가 안되네요.  골리민 전투의 상황입니다.)

 

 

한편, 바로 인근 골리민 (Golymin)에서는 같은 날 다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뮈라가 지휘하는 3만8천의 프랑스 군이 정반대로 1만7천의 러시아 군에 대해 2대1로 수적 우세를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뮈라가 러시아 군의 규모를 과대 평가하는 바람에 이 전투도 흐지부지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즉, 소규모 전투 후에 러시아 군이 철수하면서 별다른 전과 없이 끝나 버린 것입니다.   나중에 뮈라는 '난 러시아 군이 5만 정도라고 생각했다' 라고 초라한 변명을 해야 했지요.  

 

나폴레옹은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번 작전의 목표였던 베니히센의 러시아 제1 야전군의 포착 및 섬멸에 완전히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아끼는 부하를 거의 사지로 몰아 넣은 셈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비록 다부의 활약 덕분에 대성공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자신의 중대한 판단 착오가 아우어슈테트 전투에 이어 2연타로 발생했으므로, 연전연승을 거듭해오던 나폴레옹으로서는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풀이 죽은 나폴레옹은 폴란드가 자신이 겪어 왔던 그 어떤 전장보다 열악한 환경이라는 것과, 이런 폴란드의 한겨울 속에서 전투를 계속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는 봄이 올 때까지 작전을 멈추기로 결심하고, 각 군단이 겨울 숙영지를 찾아 휴식을 취할 것을 명한 뒤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여기서 그는 뜻밖의 운명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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