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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 미개한 국민을 두려워하다

by nasica-old 2014.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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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1815년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된 뒤 그의 열정과 분노, 아쉬움 등을 삭일 겸 회고록을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대인물이 직접 구술한 회고록이니 정말 소중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사료이겠습니다만, 사실 그 회고록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당대는 물론 현대에도 그닥 높은 점수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나폴레옹은 소싯적부터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거짓말을 하도 많이 했기 때문에, 인생 노년기에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쓴 회고록의 모든 부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사이트 등에서 공짜로 다운로드 받아볼 수 있는 '나폴레옹 회고록'은 사실 그의 친구이자 비서였다가 개인 비리가 적발되어 쫓겨난 부리엔의 회고록입니다.  이 회고록도, 부리엔 개인의 이해 관계에 따라 매우 왜곡된 부분이 많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그의 회고록 부분 중에는 이런 주장도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집권 기간 중 프랑스의 문맹률이 무려 96%에 달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 역시 많은 역사가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부분입니다.  이미 1680년 대에, 프랑스 인구 중 20% 정도는 자신의 이름을 쓰고 읽을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1780년 정도가 되면 그 비율은 37% 정도에 달했지요.  특히 프랑스는 워낙 큰 나라이다 보니, 나폴레옹 시대에 프랑스 전체의 정치 판도는 비교적 부유한 프랑스 북부 지방의 인구가 좌우하다시피 했는데, 그 프랑스 북부 지방에서는 전체 성인 남자의 2/3 정도가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고 합니다. 

왜 나폴레옹은 이렇게 자기가 다스린 위대한 나라 프랑스의 국민들을 글도 못 읽는 미개한 국민으로 깎아내렸던 것일까요 ?  한마디로 '이런 미개인들을 이끌고 위대한 업적을 남기려면 나 정도의 독재 행위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라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랬을까요 ?






일단 프랑스 국민의 96%가 문맹이었다는 것은 나폴레옹 본인도 믿지 않는 수치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가 1797년 7월 15일 북부 이탈리아에서 작전 중에 파리의 총재 정부에 보낸 편지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밀라노를 점령한 그의 부대 병사들 사이에 회람되던 프랑스 신문 내용이 나폴레옹 자신에 대한 중상모략으로 가득한 것을 보면 그 프랑스 신문사는 영국에게서 뒷돈을 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니 그 신문사의 윤전기를 끌어내어 박살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참모장 베르티에 (Berthier)에게 병사들 사이에서 회람되는 신문이나 책자들에 대해 엄격한 검열을 실시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애초에 전국민의 96%가 문맹이라면, 당연히 그의 부대원들 대부분도 문맹이었을테니, 그런 신문이 돌아다닌다고 그가 신경쓸 필요가 없었겠지요.


뿐만 아닙니다.  그는 1797년 캄포 포르미오(Campo Formio) 조약으로 제2차 동맹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새로운 작전에 들어갔는데, 그건 바로 언론과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는 1797년~1798년 사이에  자비로 무려 6개의 신문사를 만들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는 신문을 찍어냈습니다.  물론 그 신문사들의 기사는 사실상 나폴레옹 자신이 구술한 것들이었지요.  역시 국민 전체의 96%가 글도 못 읽는 미개인이라면 구태여 그렇게 돈을 들여가며 어용 신문사를 만들지는 않았겠지요. 





(르 모니퇴르 지도 그런 나폴레옹의 어용 신문 중 하나였습니다.  사진은 워털루 전투 약 10일 후인 1815년 6월 27일자 신문입니다.  패전 직후에도 황제 폐하라고 지칭하더니, 이제 즈음 되서는 불경스럽게도 황제 폐하라고 하지 않고 나폴레옹이라고 부르네요.)



나폴레옹은 위대한 군사적 천재이자 황제이니까, 그가 지배한 국민들을 이렇게 '미개하다'며 경멸하는 것이 당연했을까요 ?  실은 나폴레옹은 그의 국민들을 경멸함과 동시에 무척 두려워하는 편이었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미개한 국민들이 우르르 몰려와 유서 깊은 부르봉 왕조의 루이 16세를 끌어내다 목을 치는 것을 목격했는데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는 국민들에 대한 두려움을 이런 말로 표현한 적이 있었습니다.

"리옹에서 성난 노동자들 2천명과 상대하는 것보다는 전장에서 외국군대 2만명과 싸우는 것이 더 쉽다."

그는 이렇게 두려운 미개 국민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총칼이 아닌 언론과 예술을 택했습니다.  그는 항상 언론을 검열하고 통제하며 자신에 대한 반대 여론이 퍼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애를 썼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언론 기사가 나가도록 어용 신문을 만드는데도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가령 1799년 나폴레옹의 쿠데타 직전에는 73개사였던 파리의 정치 신문사가 1800년에는 13개사로, 다시 1811년에는 고작 4개로 줄었는데, 이렇게 남은 신문사들은 물론 100% 어용 신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프랑스 내부에서는 나폴레옹의 끊임없는 전쟁과 여성 추문, 어려워지는 국민의 삶에 대해 비난하는 기사는 찾아볼 수가 없었지요.  이런 언론 통제에 대한 나폴레옹의 굳은 의지는 1805년 그가 비밀 경찰 책임자인 푸셰 (Joseph Fouche)에게 보낸 편지의 다음 구절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나는 내 이익에 반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인쇄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사진은 푸셰의 모습입니다.  나폴레옹의 권력은 사실 탈레랑, 푸셰, 그리고 캉바세레스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지요.)



그러나 이렇게 자신이 듣고 싶은 소리만 언론에서 나오는 것이 과연 나폴레옹 자신에게 유리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나폴레옹도 사람인지라 그가 내리는 모든 결단이 다 옳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의 정책에 대해 비판하고 견제를 할 세력이 필요했는데, 그럴 수 있는 세력을 나폴레옹이 다 없애 버렸으므로 나폴레옹의 정책은 한번 잘못 되면 걷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 사실 그렇게 좋은 판단이 아니었던 대륙 봉쇄령이나 스페인 전쟁, 그리고 결정타였던 러시아 침공 등이 그대로 이루어졌고, 결국 이는 나폴레옹 자신의 폐위와 프랑스의 굴욕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프랑스에 건전한 언론이 살아 있어서 나폴레옹에 대한 견제가 있었다면 오히려 나폴레옹의 왕조가 더 이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이런 비판 세력에 대한 필요성은 나폴레옹의 밀수 품목을 봐도 알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대륙 봉쇄령을 내려 영국과의 교역을 금지시켜 놓고도, 일부는 영란은행의 황금을 유출시키기 위해, 일부는 자기 자신의 필요성에 의해 영국과의 밀수 거래를 용인하거나 적극적으로 조장하기도 했습니다.  대개는 영국에 비단이나 고급 와인 같은 프랑스 제품을 팔고 그 댓가로 황금을 받아오는 형태였으나, 일부 품목은 영국제 상품을 받아왔는데,  그 품목 중 하나가 바로 영국 신문들이었습니다.  나폴레옹 자신도 자신과 그의 현황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궁금했던 것이지요.

나폴레옹은 신문 뿐만 아니라 책이나 팜플렛 등 모든 인쇄물에 대해서도 가혹한 검열 조치를 시행했습니다.  1810년, 이미 탄탄하던 '비공식 검열'을 공식화한데 이어서, 1811년 10월 14일에는 아예 배포해도 좋은 모든 서적의 목록을 공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종의 서적 출판 허가제를 도입한 셈이었지요.  이렇게 그의 광활한 제국 내에서 문필가들은 나폴레옹의 비밀 경찰들의 감시에 위축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나폴레옹의 비밀 경찰들도 바다 건너 영국의 풍자 만화가들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주로 영국에서 나오는 그에 대한 만평을 매우 혐오했고, 그것들이 주로 프랑스 망명 귀족의 재정 지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며 평가 절하하면서도 분노했습니다.  심지어 영국과의 평화 협정이었던 1802년 아미엥 조약에서, 나폴레옹은 영국 언론과 만화가들이 만들어내는 자신이나 자신의 정책에 대한 조롱을 살인이나 사기와 동일한 범죄로 다루어 추방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조항을 평화의 전제 조건으로 삽입하려고 했을 정도였지요.




(당시 영국의 만화입니다.  저렇게 방구 세례를 받는 초상화는 당시 영국 국왕이던 조지 3세입니다.  당시의 영국 언론의 자유분방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딴 이야기를 해보지요.  예전에 제가 고등학교 때인가... 일요일 밤에 라디오에서 세계 명작 소설 등을 50분 정도로 각색하여 성우들이 라디오 드라마 형태로 연기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작품 중에 '바다의 침묵'이라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지금 찾아보니 그 소설의 원제는 'Le Silence de la mer', 즉 글자 그대로 바다의 침묵으로서,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한 1941년에 레지스탕스로 활약한 장 브륄러 ( Jean Bruller)가 쓴 소설입니다.  줄거리를 한줄로 요약하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어떤 마을에 주둔한 독일군 장교과, 그 장교가 숙사 할당을 받은 어느 프랑스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평소 프랑스를 동경하고 사랑할 뿐만 아니라 인품도 훌륭한 신사였던 그 독일군 장교가 그 집의 노인 및 그 조카딸과 대화를 하려고 노력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거기서 그 독일군 장교가 이런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문학하면 프랑스지요.  독일에 대단한 문필가가 누가 있던가요 ?  괴테 ? 쉴러 ?  하지만 프랑스는 라신느, 모파상, 발자크, 뒤마, 위고 등등 너무나 대단한 문학가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도 음악하면 반대로 독일이 최고지요."




('바다의 침묵'은 1949년 프랑스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유럽 대륙의 문학을 주도하던 프랑스에서, 유독 암흑기가 있었으니 바로 나폴레옹 집권기였습니다.  나폴레옹의 문학 탄압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나폴레옹 시대에는 뛰어난 작가가 전혀 배출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영국에서는 이 시기에 제인 오스틴, 키츠, 셸리, 바이런 등 유명 작가들이 많이 배출되었지요.

원래 나폴레옹은 나름 문학에 대해 취미가 있는 사람이어서, 책도 많이 읽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연애 소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과 거의 결혼할 뻔 했으나 결국 베르나도트의 와이프가 된 데지레 클라리 (Desiree Clary)와의 연애 이후인 1795년 펜을 잡은 그는 일필휘지로 9페이지짜리 클리송과 유제니 (Clisson et Eugenie)라는 연애 소설을 썼는데, 사실 그 내용은 다소 손발이 오그라드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글 솜씨는 이런 연애 소설보다는 그의 전과 보고서에서 훨씬 더 빛났습니다.   전에 머나먼 다리 (http://blog.daum.net/nasica/6862462) 편에서 언급했듯이, 나폴레옹의 로디 (Lodi) 전투는 사실상 전술적 목표 달성에 실패한 초라한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먼저 전투 보고서를 통해, 그리고 나중에는 르죈 (Lejeune)의 멋진 그림을 통해 이 전투를 대단한 의미를 가진 역사적 전투로 승화시켰지요.  이렇게 과장된 전투 보고서와 거장들을 동원해 그린 미화된 전투 묘사화 등을 통해, 나폴레옹은 국민들에게 프랑스의 영광이라는 환상을 불어 넣었습니다.




(아르콜레 다리에서의 전설적인 돌격을 선두 지휘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입니다.  이 그림의 실제 사연에 대해서는 아르콜레의 용자 http://blog.daum.net/nasica/6862468 편을 참조하세요.)



여기서 잠깐, 나폴레옹의 주장과는 달리 국민들의 절반 정도가 읽고 쓸 줄 알았다고 해도, 그렇다는 것은 국민들의 절반 정도는 정말 문맹이라는 뜻이 됩니다.  사실 그런 문맹 국민들에게는 인쇄물과 서적에 대한 검열은 별반 효과가 없었겠지요.  이런 '정말 미개한' 국민들에게도 나폴레옹의 여론 통제는 마수를 뻗쳤습니다.  바로 극장을 통해서였습니다.  사실 프랑스는 루이 14세 이후 몰리에르와 라신 등 대문호들 덕택에 연극에 대한 애호가 대단한 나라였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한창이던 시기에도 이런 연극 열풍은 계속 이어져 단두대를 피해 지하실에 숨어있던 귀족들까지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극장 관람석을 몰래 찾을 정도였으니까요.  나폴레옹 자신도 연극 공연의 광팬으로서, 1800년 당시 제1통령이던 나폴레옹에 대한 폭탄 암살 시도 때도, 사실 나폴레옹은 극장에 가던 중이었지요. 




(이 그림은 1800년 나폴레옹에 대한 암살 기도가 아니라, 1858년 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에 대한 암살 시도였던 Orsini 사건을 그린 것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때도 나폴레옹 3세는 극장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링컨 대통령도 극장에서 암살 당했네요.)



이런 연극 공연은 책에 비해 이해하기 쉽고 대중의 감성에 직접 호소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나폴레옹은 연극 내용의 통제에 직접 펜을 들 정도로 세심하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가령 1805년 나폴레옹은 밀라노에서 푸셰에게 편지를 써서 프랑스의 성군인 앙리 4세를 주제로 한 새로운 연극을 취소하라고 지시했는데,   이유는 너무 근대의 일이라서 관객들에게 '필요없는 열정'을 불러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을 격파하고 바르샤바 입성 직전이던 1806년 말, 당시 매우 바쁘고 긴박한 상황이었음에도 푸셰에게 또 편지를 써서 레이니에르 (Reynier)의 연극 '성전 기사단'에 대해 비평하며 '성전 기사단'을 화형에 처한 프랑스 왕 필립이 독재자가 아닌 '국가의 구원자'로 그려져야 한다고 타박하는 세심함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연극 공연을 세밀하게 통제하기 위해서는 배우들 개인에 대한 통제가 필수적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당시의 대배우 탈마 (François-Joseph Talma)의 개인적인 친구로서, 공연 불과 12시간 전에 편지를 써보내며 '그 연극 말고 이 연극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소'라고 요구할 정도였고, 푸셰의 비밀 경찰들은 각 배우며 여배우들의 일거수일수족을 감시하며 그들의 사생활까지 모두 파악하여 개인적인 약점을 확보해두기도 했습니다.   가령 어떤 여배우에 대한 사찰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가 있었지요.

'마담 슈비니는 자신의 전원 주택에 24세의 젊은 남자와 함께 있었는데 그 남자는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당대의 대배우 탈마입니다.  이 그림은 라신느의 희곡 부르투스에 출연하던 모습인데, 이렇게 정말 토가 같은 제대로 된 로마 의상을 입고 나온 것은 탈마가 거의 최초라고 합니다.  그 이전에는 연극 배우들이, 로마 시대 사람을 연기하는데도 비교적 현대적인 옷차림을 하고 나왔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런 연극 공연은 사실 관람료가 꽤 비싼 것으로서, 중산층 이상에게나 주어지는 문화 혜택이었습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나폴레옹은 정작 연극 공연이 가장 큰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대상이던 문맹의 서민들에게도 이 연극 공연이라는 도구를 활용하고자, 집권 초기이던 1802년 8월 15일 그의 생일 축하일 때부터 시작하여, 특별한 기념일이나 행사에서 자주 공짜 극장 공연을 베풀었습니다.  이런 특별 무료 극장 공연은 그가 1814년 권좌에서 내려올 때까지 12년 간 무려 28번이나 펼쳐졌습니다. 






(막간을 이용한 자랑질...  작년 파리 여행 때 제가 직접 찍은 오페라 가르니에 내외부의 모습입니다.  이 아름다운 극장은 나폴레옹 3세가 지은 것으로서, 나폴레옹 가문과 극장의 인연은 참 질긴 것 같습니다.   당시 이 극장의 설계가 자신이 지원하던 건축가에게 맡겨지지 않은 것에 대해 삐져 있던 황후 유제니가 개관식에서 '이건 뭐 루이 14세 스타일도 아니고 루이 15세 스타일도 아니고...' 라며 투덜거리자, 건축가인 샤를 가르니에가 '황후 마마, 이건 나폴레옹 3세 스타일입니다.  그런데도 불평을 하십니까 ?' 라고 맞받아친 것이 유명한 일화입니다.)



사실 나폴레옹이 국민들은 미개인이라고 비웃고 깔보았다면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의 권력이 근본을 따지고 들면 총칼이 아닌 프랑스 국민들의 지지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눈을 가리고 존경을 쥐어 짜내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던 것입니다.  가령, 저 위에서 언급한 '앙리 4세' 연극의 취소를 지시하는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푸셰에서 '정부가 간섭한다는 티를 내지 않으면서 막아야 한다' 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국민이 두렵지 않았다면 그냥 '미개한 국민들은 황제의 칙령을 받으라~ 연극 취소하랍신다~' 라고 일방적으로 선포를 했겠지요.

미개하든 미개하지 않든, 국가의 주권과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국민 여론이 방송이나 일부 신문사의 선동질이나 여론 조작에 휘말리는 것도 문제이지만, 특히 공영 방송이 정권의 의향에 좌우되지 않고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대로 된 민주국가의 핵심 요건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보수나 진보 양쪽 모두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뉴스 보도에 있어 중립과 공정이라는 것의 정의 자체가 매우 모호하므로, 이에 대해서는 양측 모두에게 할 말이 많은 것이 사실이겠지요.  하지만 공영 방송이 정권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와야 한다는 사실 자체는 양측 다 동의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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