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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여기서는 네 수법이 통하지 않는다 - 아일라우 (Eylau) 전투

by nasica-old 2014.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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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풀투스크 전투에서는 폴란드의 거친 환경에서 러시아 군과 싸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맛을 본 나폴레옹이 동계 작전을 포기하고 병사들을 겨울 숙영지로 나눠 보내는 것까지를 보셨습니다.  나폴레옹 본인은 화려한 바르샤바에 입성하여 발레프스카 백작 부인과의 달콤한 사랑에 빠져 들었지요.  하지만 나폴레옹이 발레프스카의 품 안에 안겨 있는 동안 그의 그랑 다르메 (Grande Armee) 병사들은 움막처럼 초라한 폴란드 농가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연애담에 대해서는 지난편에서 보셨으니, 그가 그렇게 연애에 흠뻑 빠져 있을 때 그의 병사들이 어떤 고생을 하고 있었는지를 보시지요.  막스 갈로가 그의 대하 소설 '나폴레옹'을 집필할 때 조사했을 방대한 역사 자료를 믿는다면, 나폴레옹은 1806년 11월 말에 폴란드에 들어서면서부터,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진흙탕이 된 도로에서 그의 병사들이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 자신도 바르샤바를 향해 이동하면서, 그가 탄 마차가 시도 때도 없이 진흙탕에 차축까지 빠지는 바람에 자주 마차에서 내려야 했지요.  그는 곧 겨울이 올 것이고, 그럴 경우 병사들의 군화는 이런 환경에서 고작 10일 정도 밖에는 못 버틸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후방으로 보낸 무수히 많은 편지 속에서 '무엇보다 군화가 필요하다, 만약 군화를 보낼 수 없다면 현지에서 만들 수 있도록 가죽이라도 보내라'는 훈령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 사진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 플랑드르 지역의 진흙밭입니다.  무릎까지 빠지는 진흙 때문에, 부상자 한명 운반하는데 6명의 병사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아마 나폴레옹의 병사들이 폴란드에서 겪었던 것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나 봅니다.)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두가지입니다.  첫째, 폴란드가 정말 가난한 땅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 지난 편들에서 여러 병사들의 불만과 장교들의 기록을 통해 보실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전쟁을 스스로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원칙을 지켰던 나폴레옹이 본국에다 '가죽을 보내라'고 SOS를 친 것을 보면, 폴란드 땅에서는 가죽도, 그 가죽을 만들 가축도 별로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차피 나폴레옹이 요청한 물품은 군화든 가죽이든 결국 도착하지 않을, 최소한 제때 도착하지 않을 가능성이 무척 크다는 것입니다.   군화나 가죽은 나름 무거운 물건이고, 병사들이 야전에서 10일마다 갈아신어야 할 정도의 분량이라면 상당한 무게였을텐데, 그런 화물이 폴란드의 진흙길을 뚫고 제때 도착했을 것 같지가 않거든요.  이때 만약 북쪽의 단치히 (Danzig) 항구가 프랑스 손에 있었다면 그런 물자 수송이 좀더 쉬웠겠으나, 단치히 항구는 아직 프로이센군이 지키고 있었고, 게다가 바다는 영국 해군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보급 부족에 시달리던 나폴레옹은 이 항구에 축적된 식량과 물자를 탈취하기 위해서라도, 나중에 폴란드 사단과 이탈리아 사단으로 르페브르 (François Joseph Lefebvre) 원수 하에 제10군단을 편성하여 이 단치히를 포위 공략, 결국 함락시킵니다.  그건 몇달 뒤인 1807년 5월 이야기입니다.




(단치히 포위작전도입니다.  영국군과 러시아군이 단치히를 구원하기 위해 상륙 작전을 펼치기도 했는데, 결국 르페브르의 제10군단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1807년 5월, 단치히의 프로이센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냅니다.  이 성과에 매우 기뻤던 나폴레옹은 그를  단치히 공작 Duc de Dantzig 에 봉합니다.)




(원수복을 입은 르페브르 원수입니다.  기병대 졸병부터 군생활을 시작한 그는 무려 14명의 자식을 가진 것으로도 유명한데, 모든 자녀가 자신보다 먼저 죽은 비극을 겪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당시 어린 아이가 병으로 죽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으나, 마지막으로 남은 아들 하나가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사망한 것은 특히 비극적이었지요.)




이런 상태로는 수십일 씩 펼쳐질 겨울 작전이 도저히 불가능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어쩔 수 없이 풀투스크 전투 직후인 1806년 12월 28일, 병사들을 겨울 숙영지로 퇴거시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겨울 숙영지'라는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  춥고 배고픈 프랑스 병사들을 위해 안락한 막사나 샤워장과 수세식 화장실이 딸린 대형 캠핑촌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일까요 ?  물론 그렇지 않았습니다.  겨울 숙영지라는 것은 사실 별도의 숙박 시설 등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약간 후방 지역에 군단별로 일정 구역을 할당하고, 그 구역 안에서 각 군단 산하 사단/연대들이 재주껏 먹고 살라는 조치에 불과했습니다.  또, 비록 나폴레옹은 겨울 작전을 포기했다고 하지만, 러시아군도 꼭 그렇게 했다고 볼 수는 없었으므로, 각 군단의 겨울 숙영지 배치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러시아군의 침공에 대비해 느슨한 방어선을 형성하도록 이루어졌습니다.  베니히센의 러시아군 주력이 있는 곳이 바르샤바 북서쪽 방향이었으므로, 프랑스군의 각 군단도 바르샤바에서 북쪽으로 주욱 늘어서서 황량한 발트해 해변까지 이어지는 모양을 만들었지요.  풀투스크 전투에서 가장 고생을 많이 한 란의 제5군단은 바르샤바 바로 인근인 부크 (Bug) 강 근처에, 그리고 그 북쪽에 다부의 제3군단이, 그 다음은 술트의 제4군단, 그 다음엔 네의 제6군단, 맨 마지막으로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이 가장 북쪽의 발트해 인근 지역을 할당 받았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오쥬로의 제7군단은 다소 후방 지역인 제4군단 서쪽에 배치되었습니다. 




(이건 남북 전쟁 당시 미군의 야영 모습입니다만, 한 겨울에 저렇게 천막치고 사는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 배치를 보면 나폴레옹의 일 처리에도 사적인 감정이 다분히 들어가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남쪽일 수록 그래도 조금 더 따뜻하고 식량이나 숙소 사정도 더 좋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자신과 가장 가까운 란과 다부는 남쪽에, 자신과 가장 서먹서먹한 사이인 베르나도트는 가장 북쪽에 배치한 것이지요.  군대는 줄서기 나름이라더니, 아마도 상관을 잘 만난 란과 다부의 군단병들은 상대적으로 편하게 지냈을 것이고, 베르나도트의 부하 병사들은 좀더 혹독한 겨울을 보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람 일이라는 것은 알 수가 없는 것이라고, 덕분에 결과적으로 베르나도트의 병사들은 횡재수를 맞는, 전혀 뜻 밖의 전개가 펼쳐지게 됩니다.  이제부터 보시지요.

사건의 시초는 베르나도트가 아닌 그 이웃 군단 네의 제6군단에서 시작됩니다.  나폴레옹은 각 군단에게 겨울 숙영지를 할당해주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명령없이 지정 구역을 이탈하지 말 것을 지시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느슨한 방어선이 흩어질 것을 염려해서였지요.  그런데, 네가 할당받은 우크라 (Ukra) 강 상류 지역은 베르나도트의 할당 지역보다도 더 척박한 곳이었던 모양입니다.  제6군단 병사들은 그 지역을 샅샅이 뒤져가며 식량을 징발하려 했으나, 아무래도 충분치가 않았습니다.  이렇게 추위와 굶주림에 나날이 피폐해져 가는 병사들을 보다 못한 네 원수는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즉 먹을 것과 더 반듯한 숙소를 찾아 자신에게 할당된 구역을 이탈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더 후방이나 측면으로 물러섰다가는 주변의 감시망에 의해 당장 나폴레옹에게 보고가 들어갈 것이므로, 나아갈 곳은 오직 한 방향, 즉 북쪽의 쾨니히스베르크 (Konigsberg) 쪽이었습니다.  이 구역은 베르나도트가 대치하고 있던 전방 지역으로서, 동부 프로이센 지방이었습니다.  아무래도 폴란드보다는 좀더 풍족한 곳이라서 먹을 것도 좀더 넉넉하고, 또 방어선의 후방이 아니라 전방의 적진이었으므로 나중에 문제가 되더라도 나폴레옹의 문책이 좀더 가벼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부하 병사들의 고생을 참지 못했던 네의 이 조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생사가 뒤바뀌게 됩니다.




(프랑스 각 군단의 위치와, 크게 ㄷ자를 그리며 북쪽으로 우회하는 러시아군의 경로를 보십시요.)




이렇게 북쪽 동부 프로이센으로 진격하는 네를 뒤로 하고, 잠시 러시아군 상황을 보시지요.  베니히센의 러시아군은 나폴레옹이 생각했듯이 게으르고 나약하지 않았습니다.  풀투스크 전투가 끝난지 불과 1~2주 뒤인 1월 초, 베니히센은 프랑스군이 겨울 숙영 모드에 돌입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를 이용하여 전세를 뒤집을 기습 공격을 계획했습니다.  즉, 원레 나레프 (Narew) 강변에 있던 러시아군 주력을 프랑스군 몰래 요하네스부르크 (Johannesburg) 숲 뒤편을 통해 북쪽으로 이동시킨 뒤, 서쪽으로 진격하여 그곳을 외로이 지키고 있을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을 격파하고, 이어서 프랑스군의 후방으로 거침없이 남진한다는 계획이었지요.  이렇게 되면 퇴로가 위협받을 것을 염려한 나폴레옹은 허둥지둥 비스툴라 (Vistula) 강을 건너 퇴각할 것이라는 예상이었습니다.  이것이 성공하면, 나폴레옹 주력군의 격파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1807년 춘계 작전을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시작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1월 중순에 개시된 러시아군의 초기 작전은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었습니다.  러시아 주력부대가 북쪽으로 크게 우회한 뒤 서쪽으로 진격할 때까지도 프랑스군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1월 19일, 모든 것이 뒤틀리기 시작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이 점거하고 있다는 구역 훨씬 동쪽에서 산개된 프랑스군 부대들과 딱 마주친 것입니다.  이들은 먹을 것을 찾아 허락도 없이 북쪽으로 이동해온 네의 제6군단 휘하 부대였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모든 것은 러시아군에게 유리했습니다.  네의 군단은 전투를 예상하고 북진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부대 단위로 뿔뿔히 흩어져 있었고, 이들은 러시아군의 집결된 병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그 진격 앞에 무기력하게 튕겨져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했던 이들의 존재로 인해 러시아군의 이동이 베르나도트는 물론 저 멀리 바르샤바의 나폴레옹에게까지 속히 통보되었습니다.  네의 제6군단이 꼴사납게 흩어지는 동안, 베르나도트는 진격해 오는 러시아군을 맞을 준비를 할 수 있었고, 베르나도트는 1월 25일 모룽겐 (Mohrungen, 폴란드어로는 Morag)에서 마르코프 (Yevgeni Ivanovich Markov) 장군이 이끄는 강력한 러시아군 전위대를 격파한 뒤 무사히 후방 지역으로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마르코프 장군의 초상입니다.  초상화도 남기셨길래 뭔가 업적이 있는 분인 줄 알았는데... 별 업적이 없으시더군요.)




베르나도트가 버리고 간 모룽겐 시를 점령한 베니히센은 아직도 작전이 성공적으로 착착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나폴레옹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군사적 천재였습니다.  1월 26일까지도 러시아군과의 충돌이 네의 명령 불복종으로 인해 야기된 국지전이라고 여기고 있던 나폴레옹은 1월 27일 보고를 받고는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습니다.  그러나 베니히센의 기대처럼 충격과 공포에 빠져 후퇴하기는 커녕, 나폴레옹은 이를 러시아군 주력 부대를 격파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즉, 북쪽 프랑스군 좌익을 깊이 돌파해 들어온 러시아군의 주력의 퇴로를 끊고 역포위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는 즉각 전령들을 파견하여 휘하 군단들을 겨울잠에서 깨어나 북쪽으로 크게 선회하여 진격하도록 했습니다.  이 작전은 2월 1일 시작되도록 시간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일단 후퇴한 베르나도트에게도 전령을 보내 토른 (Thorn) 방향으로 일단 후퇴했다가 이제 북진할 다른 군단들의 좌익이 되어 러시아군에게 역공을 가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아니, 명령서를 보냈습니다.




(유쾌한 코작 아저씨들의 즐거운 한때입니다...)




여기서 또다시 지휘관들의 계획에 없던 일이 발생합니다.  나폴레옹이 베르나도트에게 보내는 명령서를 지닌 젊은 연락 장교가 눈보라 속을 뚫고 북쪽으로 베르나도트의 사령부를 찾아 말을 달리다가, 그만 러시아군 소속의 카자흐 기병 정찰대와 딱 마주친 것입니다.  전에 나폴레옹의 암호에 도전하라 (http://blog.daum.net/nasica/6862427) 편에서 언급했듯이, 이때 당시는 프랑스군이 아직 암호화된 문서를 사용하지 않을 때였습니다.  결국 베르나도트에게 전해져야 할 명령서는 2월 1일 베니히센의 야전 탁자 위에 올려졌고, 그 내용을 읽은 베니히센이야말로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큰일났다 ! 나폴레옹이 우리의 뒤를 노리고 있다 !'  베니히센은 모든 작전을 포기하고 걸음아 날 살려라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한편, 일단 스트라스부르크 (Strasburg, 폴란드 어로는 Brodnica)까지 후퇴한 베르나도트는 2월 3일까지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이제 곧 추격해올 러시아군을 상대로 방어전을 펼칠 준비만 하고 있었습니다.  뒤늦게 나폴레옹의 반격 작전 소식을 들은 그는 2월 4일에서야 진격에 나섰지만, 운명의 아일라우 전투가 벌어지던 2월 7일에는 그로부터 거의 50km나 떨어진 라이헤르츠발트 (Reichertswalde, 폴란드어로는 Markowo)까지만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은 피의 살육이 벌어진 아일라우 전투의 참극을 겪지 않아도 되었지요. 




(이 암호표를 읽는 방법을 아시고 싶은 분은 저 위의 나폴레옹의 암호 편을 읽어보시면 됩니다.  의외로 재미있을 겁니다.)



러시아 군이 남서쪽에서 밀고 올라오는 프랑스군을 피해 북서쪽으로 허겁지겁 도주하는 사이, 프랑스군은 네와 뮈라를 좌익에, 술트와 다부를 우익에 두고, 오쥬로의 제7군단과 나폴레옹의 황실 근위대가 중군을 이루어 열심히 그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 일대는 앞서 설명했듯이 동부 프로이센 지역이었고, 이곳으로 피해있던 레스토크 (Lestocq) 휘하 프로이센군 9천명 정도가 있었으므로, 나폴레옹은 레스토크를 견제하기 위해 네의 제6군단을 맨 좌측에 배치하여 그를 견제하며 진격하도록 했습니다. 

마침내 2월 6일, 드디어 뮈라의 기병대 및 술트 휘하의 일부 부대가 러시아군의 후위 역할을 하던 바클레이 드 톨리 (Barclay de Tolly)의 부대를 호프 (Hof, 폴란드어로는 Dworzno)에서 따라잡아 치열한 전투를 치루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이 인근 란즈베르크(Landsberg)에서 결전을 벌이려 한다고 판단하고 맨 좌측에 있던 네와 맨 우측에 있던 다부의 부대를 란즈베르크 방향으로 집결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나폴레옹 전술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여러번 반복된 패턴이었지요.  즉, 도로 사정과 현지에서 징발해야 하는 식량 사정을 감안하면 여러 군단이 한꺼번에 몰려 다닐 수가 없으므로, 기동전을 펼칠 때는 다소 넓게 산개하여 이동하다가, 적과 결전을 벌일 때는 신속하게 결전 장소에 집결하는 것이 나폴레옹 전술의 요체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위에서 언급한 대로 네의 제6군단의 임무는 레스토크의 프로이센군을 견제하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명령도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이 도착하면 그에게 레스토크 견제 임무를 넘기고 란즈베르크로 오라'는 것이었는데, 도통 베르나도트가 오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미 위에서 보신 바와 같이, 베르나도트에게 명령서가 전달되지 않은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믿었던 다부, 비엔나로부터 아우스테를리츠까지의 110km를 불과 48시간 안에 주파하는 축지법을 구사했던 다부도 이곳 폴란드에서는 그 축지법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날씨는 춥고 식량 부족으로 병사들은 굶주린데다 길은 엉망진창이고 군화조차 변변치 않으니, 천하의 다부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지요.




(길이 이 모양인데 뭘 어쩌라고요 ?)



게다가 러시아군은 란즈베르크가 아닌 아일라우 (Eylau)에서 결전을 치르기로 했습니다.  2월 7일 새벽 란즈베르크에서 프랑스군은 러시아군과 약 1시간 동안 교전했으나, 알고보니 그 러시아군은 후위대에 불과했고, 본진은 전날 밤 사이에 북서쪽의 아일라우로 철수한 뒤였습니다.  이제 술트까지 가세한 프랑스 본진은 그들의 뒤를 쫓았고, 마침내 2월 7일 오후 2시, 술트와 뮈라는 러시아군이 기다리는 아일라우 시 외곽에 도착합니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숙적 바그라티온 (Bagration) 왕자였습니다.  바그라티온의 후위대는 뮈라와 술트를 상대로 끈질긴 저항전을 펼쳤는데, 이는 그때 막 아일라우 시내를 통과하여 아일라우 동쪽의 능선 위로 올라가려던 포병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곧이어 오쥬로와 황실 근위대가 합류하자, 비로소 바그라티온은 슬금슬금 후퇴를 했지요.  이렇게 나폴레옹에게 당장 가용한 전 병력이 다 모였으나, 모아놓고 보니 병력이 너무 초라했습니다.  러시아군은 이제 아일라우 북동쪽 언덕을 점거하고 있었는데, 병력이 약 6만5천 정도에 대포가 무려 460문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고작 4만5천에 200문의 대포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네와 다부의 병력이 도착만 해준다면 단번에 프랑스군의 병력은 7만5천으로 보강될 수 있었습니다만, 네가 아일라우에 도착한다는 것은 그가 견제하던 레스토크의 프로이센군도 도착한다는 것이므로 그럴 경우 러시아군도 약 7만5천 정도의 병력으로 증강될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결전의 날이 밝았는데 당장 프랑스군의 수가 현저하게 적었습니다.  이는 나폴레옹의 전투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좌익의 네와 우익의 다부가 도착할 때까지는 본격적인 교전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아일라우는 동서 양편에 능선을 끼고 있는 계곡 바닥에 위치한 작은 도시였는데, 이제 러시아군은 북동쪽 능선을, 프랑스군은 남서쪽 능선을 점거한 상태였고, 정작 아일라우 시내는 무주공산인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은 네와 다부가 오기 전까지는 일단 그 상태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아일라우에서 대치한 프랑스-러시아 군의 초기 모습입니다.  남서쪽의 붉은색이 프랑스군입니다.)




그런데 뭔가 안되기 시작하면 다 잘 안된다고, 그런 나폴레옹의 의도마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저녁 무렵에, 아일라우 시내에서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의 교전이 시작되더니, 그것이 점점 확대되어 결국 전면적인 전투로 발전된 것입니다.  이렇게 의도치 않은 큰 전투가 일어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  나폴레옹 본인에 따르면 2가지 이유에 의해 본인이 직접 그 전투를 지시했다는 것입니다.  첫째 이유는 러시아 군이 밤사이 또 슬그머니 후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고, 둘째 이유는 날씨가 너무 추워, 병사들이 아일라우 시내에서 약간이라도 따뜻하게 밤을 보낼 수 있도록 시내를 점령하고자 했다는 것지요.  그러나 아마 나폴레옹은 '전장 통제도 못하는 무능함'에 대한 비난이 두려워 그렇게 둘러댄 것 같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나폴레옹의 전쟁사를 바로 측근에서 기록하여 나폴레옹 본인으로부터도 '훌륭한 기록'이라고 칭찬을 들은 마르보 (Jean Baptiste Antoine Marcellin de Marbot) 대위에 따르면, 이날 나폴레옹은 전투 시작 전에 '난 피아간에 구분이 안되고 혼란이 야기될 수 있는 야간 전투에 반대한다, 아침에 네와 다부가 도착하면 그때 전투를 시작하겠다' 라고 오쥬로에게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르보 대위는 훗날 마르보 장군에 이어 귀족의 지위에도 오릅니다.  아일라우 전투 당시 25세였던 마르보는 훗날 루이 필립 왕때까지도 현역으로 복무하다가 루이 필립의 퇴위 때 은퇴합니다.)




실제 전투 발생 이유에 대해서는 또 2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병사들이 도저히 추위를 참지 못해 조금이라도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시내로 무작정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는 나폴레옹이 둘러댄 이유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지요.  다른 하나의 설은 나폴레옹의 개인 화물 마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폴레옹 뒤를 쫓아 따라온 황제의 개인 화물 마차가, 이미 아일라우가 프랑스 군 수중에 들어간 줄 알고 시내에 들어가 취사 준비를 하다가 러시아 군의 습격을 받았는데, 대상이 나폴레옹의 개인 마차다보니 그것을 구해내기 위해 프랑스군이 투입되고, 그에 따라 러시아군이 증원되고, 다시 프랑스군이 그것에 대응하여 증강되고 하다보니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이지요.  이유야 어쨌건 이 전투는 밤 10시까지 계속 되었고, 양측에 각각 무려 4천명 정도의 사상자를 발생시킵니다.  결국 베니히센은 일단 양보하여 러시아군을 철수시켰고, 아일라우는 프랑스군의 손에 떨어집니다.  나중에 베니히센은 그 후퇴는 자신의 덫으로서, 프랑스군이 다음날 자신의 중앙을 공격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후퇴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결국 프랑스군은 아일라우를 점령했으나, 손바닥만한 동네에 병사들이 많이 들어갈 수도 없는데다, 또 설령 들어갈 수 있다고 해도 러시아군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춥다는 이유로 각자 맡은 위치를 버리고 시내로 들어가게 지휘관들이 허락할 리도 없었습니다.  프랑스군이나 러시아군이나, 대부분은 그날밤 추위에 벌벌 떨어야 했고, 게다가 배까지 곪아야 했습니다.  양측 모두 식량이 다 떨어졌던 것입니다.




(정말 저러고 자면 사람이 얼어죽지 않나요 ?  저는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겠군요...)




다음날인 2월 8일은 날씨가 무척이나 안 좋았습니다.  거센 눈보라가 휘날렸는데, 그나마 그 눈보라는 러시아군에서 프랑스군 방향으로 불어대어, 프랑스군의 시야를 크게 방해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좌익에 술트, 중앙에 오쥬로, 우익에 생틸레르 (St. Hilaire)의 사단을 배치했습니다.  뮈라의 기병대와 근위대는 예비대로 남겨 두었지요.  이에 대응하여 러시아군은 훨씬 우세한 병력을 바탕으로 여유있게 전개했습니다.  좌익에는 오스테르만-톨스토이 (Ostermann-Tolstoi)를, 자켄 (Sacken)을 중앙에, 그리고 투치코프 (Tutchkov)를 우익에 배치했습니다.  특히, 460문이라는 막강한 포병 전력을 십분 활용하여, 각각 60~70문을 가진 대형 포병대 2개 부대를 따로 편성하여 전면부에 배치했습니다.

이날 아침 나폴레옹이 머리 속에 그린 전략은 좌익의 술트로 하여금 맞은편의 러시아 우익을 상대하게 하여 러시아군이 퇴각하지 못하도록 붙잡아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있는 사이, 다부의 제3군단이 우측에서 나타나, 상대적으로 병력이 열세라서 공세를 펼칠 수 없었던 우익의 생틸레르의 사단과 함께 러시아군 좌익을 밀어붙이는 것이었지요.   그렇게 해서 러시아군 전열이 크게 흔들리면, 중앙에서 오쥬로와 뮈라를 투입하여 끝장을 본다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습니다.  이 전략이 성공하려면 다부의 제3군단이 한시라도 빨리 나타나 주어야 했습니다.  저 멀리 좌측에서 나타나야 하는 네의 제6군단에 대해서는 사실 큰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베르나도트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비로소 확인하고, 레스토크를 버려두고서라도 빨리 아일라우로 오라고 네에게 명령서를 보낸 것이 바로 그날 아침 8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전투는 오전 8시에 러시아군이 아일라우 시내에 포격을 가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 포병대도 응사하여 치열한 포격 대결이 벌어졌는데, 비록 러시아 포병대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프랑스 포병들의 솜씨가 훨씬 정확하여 양측은 대략 엇비슷한 전과와 피해를 냈습니다.  9시 경 한차례 포격전이 끝날 즈음 해서, 반가운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언제나 다부의 선봉에 서는 프리앙 (Friant) 장군의 사단이 나폴레옹의 우익에 나타난 것이었지요.  이제 되었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원래 전략대로 먼저 좌익의 술트를 전진시켰습니다.  하지만 하나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던 어제의 운이 그대로 이어졌는지, 이 공격도 나폴레옹의 의도대로 성공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실은 운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수가 눈에 띄게 적었으므로, 당연히 술트의 공격은 단번에 튕겨져 나왔고 오히려 러시아군이 후퇴하는 술트의 뒤를 쫓아 역습을 가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술트가 러시아군의 주목을 끄는 사이 우측에서 러시아군의 좌익을 들이치려 했던 프리앙 사단도, 러시아 기병대의 공격을 받고 방진을 짜느라 그 자리에 발이 묶이고 말았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프랑스 좌익이 무너져 전체 프랑스군 전선이 혼란에 빠질 판국이었지요.




(격전이 벌어진 아일라우 전투의 전개도입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나폴레옹은 원래의 전략을 수정하여, 10시 경 오쥬로의 제7군단과 생틸레르의 사단을 계획보다 일찍 투입했습니다.  수가 더 많은 러시아군을 흔들려면 병력을 집중해야 했으므로, 중앙의 오쥬로는 러시아군의 중앙이 아닌, 러시아군 좌측의 톨스토이를 공격하도록 하고, 생틸레르는 프리앙과 합류하여 러시아 기병대를 쫓아내고 러시아군 좌측을 우회하여 그 뒤를 위협하도록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상상하지 않았던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이날 눈보라가 프랑스군의 얼굴에 정면으로 들이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시야가 크게 제한되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중앙이 아닌 러시아군의 좌측, 즉 프랑스군으로서는 오른쪽으로 전진해야 했던 오쥬로의 제7군단이 그만 계획보다 왼쪽으로 전진을 한 것입니다.  이들은 러시아 포병대와 한창 뜨겁게 포격 대결을 벌이던 프랑스군 포병대의 사선 속으로 똑바로 걸어들어갔습니다.  이때 프랑스군 포병대 역시 눈보라 때문에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오쥬로의 사단들을 등 뒤에서 날아오는 아군의 포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큰 피해를 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정도의 낭패에 굴하지 않고 굳건히 전진을 계속 했는데, 그런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전날 베니히센이 편성해둔 70문의 대규모 포병대였습니다.  눈보라에 가려 자신들의 진로에 이 괴물들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오쥬로의 사단들에게 러시아군의 포도탄 (grapeshot)이 정면에서 쏟아졌습니다.  오쥬로의 사단들은 글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이 광경을 능선에서 내려다보던 베니히센은 탈영의 고수 오쥬로의 무덤을 여기라고 판단하고는 예비대를 동원하여 이미 갈갈이 찢어진 오쥬로의 군단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오쥬로의 군단은 정면과 측면에서 보병 및 기병의 합동 공격을 받고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습니다. 





(다양한 구경의 포도탄입니다.  원래 포도탄은 해군에서 주로 쓰는 것이고, 인마 살상을 위주로 하는 육군에서는 캐니스터탄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 본문 중의 포도탄이라는 것도 캐니스터탄을 포도탄으로 혼용해서 사용한 용어 같습니다.)



특히, 제14 전열연대 (the 14th Line)의 운명이 비극적이었습니다.  이 연대는 계곡 동쪽 사면에 고립되어 러시아군에게 포위되었는데, 이들은 방진(square)을 짜고 저항을 계속 했습니다.  오쥬로는 이들에게 후퇴를 지시하는 전령을 여러차례 보냈으나, 전령들이 대부분 전사하는 바람에 후퇴를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오쥬로의 부관이었던 마르보가 말을 달려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제14 연대에 도달했으나, 연대장은 '도저히 포위망을 뚫을 길이 없다.  황제께서 하사하신 이 독수리 깃봉이라도 자네가 가지고 포위를 뚫어, 적군에게 독수리를 빼앗기는 치욕만이라도 면하게 해달라'고 지시하고 마르보를 돌려 보냈습니다.  결국 이 연대장 이하 36명의 장교과 590명의 병사들이 모두 전사했고, 탈출하던 마르보 대위도 부상을 입고 쓰러졌고 결국 독수리 깃봉은 러시아군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나폴레옹이 연대 하나하나마다 직접 나누어 주었다는 독수리 모양의 장식이 달린 깃봉입니다.  영국군은 물론 프랑스군조차도 이를 cuckoo, 즉 뻐꾸기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원래 오쥬로는 이 당시 열병을 앓고 있어서, 이날 아침 말에 오를 때도 부하들의 부축을 받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쥬로는 부하들과 함께 최전선에서 위험을 함께 했는데, 그도 결국 전투 막판 날아온 포도탄 한발에 팔을 얻어맞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날 오쥬로의 제7군단은 9천명이 전진했다가 3천명이 도망쳐 돌아왔습니다.  죽거나 다친 사상자의 비율이 무려 70%에 가까울 정도로, 한마디로 군단 전체가 궤멸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쥬로는 부하들에 의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져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오쥬로가 외팔이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없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오쥬로의 팔에 명중한 것은 포도탄이 아니라 캐니스터탄이거나 그냥 머스켓 탄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렇게 오쥬로의 군단이 피떡이 되어 궤멸되던 10시 30분 경, 나폴레옹 개인에게도 위험천만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눈보라 속에서 벌어지던 혼전 틈에, 러시아군 1개 부대가 나폴레옹이 사령부를 설치한 아일라우 시내 교회탑 앞까지 불쑥 나타난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참모들은 기겁을 하여 나폴레옹에게 급히 후퇴할 것을 권고했지만,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을 바라보며 '참으로 용감한 자들이군'이라고 중얼거리며 후퇴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의 개인 경호대가 전멸에 가까운 희생을 내며 러시아군을 가까스로 막았고, 그 사이에 근위대 부대가 달려와 이 러시아 부대를 궤멸시켰습니다.  근위대가 조금만 늦었어도 나폴레옹이 포로가 될 뻔한 순간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포로가 될 뻔한 이 사건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오쥬로와 생틸레르의 사이에 크게 균열이 생기면서 그 사이가 뻥 뚫렸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상황은 좌측의 술트는 밀려나고, 중앙의 오쥬로는 박살이 났고, 우측의 생틸레르와 프리앙은 발이 묶인 상태였지요.  한마디로 전면적인 궤멸 상태였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은 후퇴보다는 도박에 가까운 승부수를 던집니다.  바로 뮈라를 투입한 것이지요.  당시 나폴레옹에게 남아있던 예비대는 딱 2개 부대, 즉 뮈라의 예비 기병대와 근위대 뿐이었습니다.  그는 이 상황에서 근위대를 던져봐야 패전의 혼란 속에 녹아없어질 것이라고 판단하고, 충격 효과를 낼 수 있는 뮈라의 예비 기병대를 집어 던지기로 했습니다.  당시 뮈라 휘하에는 약 1만1천명의 대규모 기병대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기마 보병대라고 할 수 있는 용기병(dragoon)이었고, 정예 기병이라고 할 수 있는 흉갑기병(cuirassier)이 약 1천9백에, 근위 기병대 1천5백도 함께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오전 11시 30분, 러시아군을 공격하라는 단순한 명령을 받은 뮈라는 칼을 뽑아들고 이들의 선두에 서서 눈보라 속으로 돌격을 시작합니다. 




(아일라우 전투에서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병집단의 돌격 모습입니다.  저 교회탑이 아마도 나폴레옹의 지휘부가 있던 곳인 모양입니다.)



이날 뮈라와 그의 기병대가 보여준 활약은 동화 속에 나오는 중세 기사단 같은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효과는 대단했습니다.  이들은 나폴레옹을 거의 생포할 뻔 했던 러시아 부대의 잔존세력들을 가볍게 밀어붙이고 눈보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이어 이들은 두갈래로 갈라져 각각 앞을 가로막는 러시아 기병대를 격파했습니다.  러시아 기병들은 이렇게 대규모 집단으로 운용되지 않았으므로 뮈라의 기병대를 막아낼 수가 없었지요.  그러고도 남은 힘으로 이 두갈래의 프랑스 기병대는 자켄이 지휘하는 정면의 러시아 본진 보병대를 그대로 돌파해버립니다.  이렇게 적의 본진을 유리한 두 기병대는 러시아군 후방에서 재집결하여 다시 한번 자켄의 러시아 본진을 돌파한 뒤, 여세를 몰아 오쥬로의 제7군단을 박살냈던 70문짜리 대형 포병대를 공격하며 러시아군 진영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이때 즈음에는 뮈라의 기병대도 힘이 빠져 더 이상의 공격이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사람이나 말이나 전속력으로 수 km를 달리면 지칠 수 밖에 없었고, 지쳐서 속력이 느려진 기병대는 보병들의 손쉬운 먹이감이 될 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지쳐 비틀거리는 기병대들이 후퇴하여 돌아올 때는 근위 기병대가 후위 역할을 하며 엄호를 해주어야 했습니다.




(왼쪽 중앙 부분에 큰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안장 밑에 곰인지 늑대인지 가죽을 덮은 사람이 바로 뮈라입니다.)




(지도 중앙에 마치 커다란 삼지창처럼 보이는 모습이 뮈라의 돌격 대형이 관통한 궤도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기병 돌격은 별 전과도 못 올렸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1만1천이나 되는 기병들을 몰고 나가서 정작 한 일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멀리서 누가 봤다면 그냥 말탄 사내들이 긴 종대를 이루어 우르르 몰려갔다가 별로 한 일도 없이 우르르 돌아온 것에 불과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 돌격에서 몇명의 러시아군이 프랑스 기병들의 군도에 맞아 쓰러졌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따로 없습니다.  상식적으로도 그리 많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워낙 급하게 달려갔다가 급하게 돌아왔으므로, 대포 포가 밑에 숨은 러시아 포병들을 몇명이나 베어넘겼는지도 불분명하고, 구리못과 망치로 러시아군 대포의 점화구를 막아 무용지물로 만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에 비해 이런 대규모 기병 돌격은 워낙 큰 타겟이었으므로, 포격과 머스켓 사격에 프랑스 기병들은 상당히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약 1천5백의 기병들이 돌아오지 못했는데, 이는 약 14%의 사상률로서, 한번 돌격에 이런 피해를 입은 것은 꽤 큰 피해였습니다.  전에 나폴레옹 전쟁에서 살아남기 (http://blog.daum.net/nasica/6862382) 편에서도 언급했지만, 프로이센군이 궤멸되었다는 예나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입은 사상률이 바로 14% 정도였습니다. 




(뮈라는 위험천만하게도 멀리서도 누가 뮈라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독특한 복장으로 선두에 서서 돌격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뮈라가 멍청이에 배신자일지는 몰라도 비겁자는 아닌 것이지요.)




하지만 이 돌격이 나폴레옹을 살려냅니다.  워낙 대규모의 기병들이 우르르 몰려와 전열을 관통하여 지나갔다가 다시 뒤에서 우르르 몰려와 관통해 간 것은 러시아 장군들에게나 사병들에게나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런 장엄한 광경은 그날까지 아무도 본 일이 없었거든요.  실제로도 이것이 당시 유사 이래 유럽 땅에서 벌어진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의 기병 돌격이었습니다.  이 기록은 나중에 1812년 보로디노 전투와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깨지게 되는데, 이 두 전투에서의 기병 돌격도 모두 뮈라가 선두에서 직접 지휘했습니다.  심지어 역대 4위 규모였던 드레스덴 전투에서의 기병 돌격조차도 뮈라가 지휘하는 등, 뮈라는 근대 기병 전투 규모 역대 1~4위를 싹쓸이 하는 위엄을 보여주었지요.  두두두 하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자신의 전열이 적의 기병대에 의해 자유자재로, 그것도 앞뒤로 2번이나 유린당하는데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면, 그 과정에서 칼을 맞고 쓰러진 병사들의 수가 많지 않다고 해도 당하는 입장에서는 패닉을 일으키기 충분했습니다.




(장비나 관우의 일당백의 용맹은 그냥 소설 속에 나오는 모습이지만, 이날 뮈라의 업적은 역사 속에 엄연히 실존했던 실제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실제로도 러시아군의 공세는 이 돌격을 계기로 눈에 띄게 주춤해졌습니다.  나폴레옹이 만약 뮈라의 기병 돌격에 이어 근위대를 전장에 투입했다면 러시아군 중앙을 격파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때의 우세가 심리적이고 순간적인 우세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아직 러시아군의 수적 우세가 명백한 상태이므로 예비대를 남겨놓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맞았습니다.  전세를 뒤집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부의 제1군단이 도착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1시, 마침내 다부가 도착합니다. 

다부는 생틸레르, 그리고 프리앙의 사단과 합류하여 드디어 나폴레옹의 작전대로 러시아군의 좌익을 밀어붙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도 거세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러시아 좌익이 크게 밀려, 러시아군의 전선이 기역자로 거의 90도 각도로 꺾일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이 날은 나폴레옹의 날이 아니었나 봅니다.  러시아군의 우측에 나폴레옹이 염려했던 레스토크가 프로이센군 6천과 함께 나타났던 것입니다.   (프로이센군 9천 중 3천은 네와의 추격/견제전에서 소모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러시아군의 후방을 그대로 통과하여, 측면에 대해 신경쓰지 않고 전면의 러시아군 좌익을 밀어붙이던 다부의 옆구리에 달려 들었습니다.  아마 이때 '아우어슈테트의 복수'를 외쳤는지도 모르지요.  전투는 다시 혼전 상태로 빠져 들었고, 전황은 프랑스군에게 불리한 채 살육전이 계속 되었습니다.




(네 원수의 등장입니다.  혹시 뮈라의 모습이 아닌가 싶으시겠습니다만, 가죽 깔개도 없고 모자도 평범한 것을 보면 뮈라는 아닌 것을 아실 수 있지요.)




이런 혈전 속에서 저녁 7시가 되자, 러시아군 우측에 드디어 네의 제6군단이 나타났습니다.  네를 소환하는 연락장교가 아일라우를 떠난 것이 아침 8시, 그 명령서를 네가 받아든 것이 오후 2시, 그리고 네가 마침내 현장에 나타난 것이 오후 7시였으니, 네의 행군 속도가 네를 찾아 헤매는라 조금 길을 돌아야 했던 연락장교의 질주 속도보다 빨랐다는 이야기지요.  네는 눈길로 5시간 정도 걸리는, 즉 아일라우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므로, 평상시 같았으면 명령서를 받기도 전에, 아일라우의 포성 소리를 듣고서라도 나폴레옹을 도우러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된 대로, 이날 몰아친 눈보라 때문에 대포 소리가 흡수되어 네는 전투가 벌어진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아무튼 네의 가세로 인해 다시 전투는 프랑스군에게 조금 더 유리하게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1808년 비방-드농이 당시 나폴레옹 박물관, 즉 지금의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될 아일라우 전투도를 경쟁 선발로 뽑은 그로 Gros의 '아일라우 전투'입니다.  당시 비방-드농은 그로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이 경쟁에 참가할 의사가 없었던 그로를 강요하다시피 하여 그림을 그리게 했고, 결국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물리치고 이 그림을 선정했습니다.  그림 중앙에 뮈라의 모습이 나폴레옹 못지 않게 중요하게 나왔고, 나폴레옹과 뮈라 사이에는 왼쪽부터 순서대로 베르티에, 베시에르, 콜랭쿠르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 맨 왼쪽에는 터번을 쓴 루스탐의 모습도 보입니다.  나폴레옹의 발을 붙잡고 있는 부상자는 어느 리투아니아-폴란드 병사로서, 나폴레옹의 인자함에 감복하여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모습입니다.  왼쪽에서 나폴레옹을 향해 팔을 뻗고 있는 또다른 리투아니아 병사를 부축하는 사람은 당시 그랑 다르메의 수석 외과의였던 Pierre-François Percy 남작입니다.   그로는 이 그림을 의뢰받으면서 나폴레옹이 아일라우 전투에서 실제로 입었던 모자와 외투를 전해 받았고, 그 물건들을 죽을 때까지 소중히 간직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지금도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습니다.)




마침내 밤 10시 경, 지쳐 빠진 양측은 어둠 속에서 슬그머니 전투를 중단했습니다.  이 날의 살육에 질릴 대로 질린 양측은 모두 퇴각을 준비했습니다만, 아무래도 하루 종일 좀더 유리한 전황을 누렸기 때문에 다소 덜 지친 러시아군의 움직임이 더 빨랐습니다.  러시아군이 이기고 있는데 왜 후퇴하냐는 일부 장군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베니히센의 주장대로 러시아군은 조용히 야음을 틈타 후퇴했습니다.  지쳐 빠진 프랑스군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다음날 아침 해가 뜨고 난 뒤에야 알게 됩니다.  프랑스군으로서는 러시아군보다 좀더 지친 관계로 거의 실신했던 덕택에, 다음날 텅빈 아일라우를 점령하고 승전을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나폴레옹으로서는 이것을 승전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겠지만, 그의 부하들은 아무도 이를 승전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상대적으로 늦게 도착하여 피해가 적었던 네의 제6군단이 피범벅이 된 전장을 수습하는 사역을 맡았는데, 네는 말을 타고 시체가 가득한 전장을 둘러보며 이렇게 내뱉었다고 합니다.

"Quel massacre! Et sans résultat !"   (끔찍한 학살이군.  게다가 아무런 결과도 없어 !)

양측의 피해는 당연히 정확하지 않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측의 피해가 1천9백명 전사에 부상자 5천7백명이고, 그에 비해 러시아군의 피해는 7천명 전사에 부상자 1만2천~1만5천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이렇게 구술할 때 옆에 서있던 부관이 의아한 얼굴로 나폴레옹을 쳐다보자, 나폴레옹이 '이것이 역사를 기록하는 방법' 이라고 뻔뻔스럽게 이야기 했듯이, 이는 매우 왜곡된 숫자라는 것이 중론입니다.  모두 추측일 뿐이지만, 프랑스군의 피해는 전사와 부상을 합해 2만 또는 2만5천에 달한다는 주장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입니다.  베니히센은 러시아군의 피해가 1만2천 전사에 부상자 8천, 즉 2만에 달한다고 주장했는데, 정작 당시 자료를 조사한 역사학자들은 오히려 러시아군의 피해는 1만5천 정도로 추측된다고 합니다.




(이 영국 풍자화는 1812년 만들어진 것으로서, 제목이 '보니(나폴레옹의 비칭)이 소식지 또는 아늑한 겨울 숙영지를 계획 중'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맨 왼쪽의 전령은 '와, 이 양반 거의 끝장났네' 라고 놀라고 있고, 가운데의 작은 프랑스 장교는 '소식지에다가는 뭐라고 할깝쇼?' 라고 묻고 있습니다.  눈 속에 파묻힌 나폴레옹은 '우리가 아늑한 겨울 숙영지로 들어갔고, 날씨가 좋고 앞으로 8일간은 더 그럴 거라고 적어라.  우리가 수프도 아주 많고 다진 고기도 많다고 써.  곰고기 구이도 있고, 크리스마스에는 집에서 만찬을 먹을거라고...' 등등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의 소식지는 적이고 아군이고 아무도 믿지 않아, '소식지 만큼 진실되다' 라는 우스개 이야기가 유행할 정도였습니다.)




이 전투는 프랑스 및 러시아 양측 모두를 질리게 만들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아일라우의 승자로서 체면을 세우려는지, 쾨니히스베르크를 향해 후퇴하는 러시아군을 추격하며 몇군데에서 소규모 전투를 벌였는데, 2월말 즈음해서는 정말로 동계 작전을 포기하고 겨울 숙영지로 후퇴했습니다.  이들이 아일라우의 악몽에서 벗어나 다시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한 것은 그해 여름이 거의 다 되어서였습니다.

이 전투는 나폴레옹이 결코 무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럽 전체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미 여러차례 언급했지만, 나폴레옹이 여태까지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전술 비결을 몇가지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빠른 행군을 위해 보급은 현지 조달로 대체
2) 그를 위해 행군시에는 분산 이동
3) 결전 시에는 신속한 집결로 전장에서의 수적 우위 확보


그런데 도로망이 열악하고 농민들의 살림이 가난한 폴란드에서는 이런 전법이 전혀 먹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훗날 스페인과 러시아에서 다시 벌어지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이날의 전투로 뭔가를 배웠다면 스페인이나 러시아에서는 싸우지 않고 어떻게든 화평을 했을텐데, 이미 나폴레옹도 뭔가 교훈을 배우기에는 너무 자아가 커져 버린 모양이었나 봅니다.  또한, 그의 그랑 다르메를 이루던 근간인 불로뉴 병영의 베테랑들이 이날 전투에서 대거 희생됨으로써, 그의 그랑 다르메가 별로 훈련도 받지 못한 신병들로 채워지면서 질적인 저하가 시작되었다는 점도 큰 문제였습니다.  무엇보다, 여태까지 나폴레옹을 믿고 따르고 사랑했던 장교들과 병사들이 폴란드 전역을 치르면서 그의 면전에서 투덜거릴 정도로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점이 그의 미래에 불길한 그림자를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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