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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아일라우 (Eylau) 에필로그 - 핑켄슈타인 (Finkenstein)의 봄

by nasica-old 2014.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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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아일라우 전투에서, 여러분은 가난하고 얼어붙은 폴란드 땅에서 나폴레옹이 평소의 장기를 발휘하지 못하고 베니히센의 러시아군과 혈투를 벌이며 고전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역사에서는 아일라우 전투를 그저 '나폴레옹이 처음으로 완승을 거두지 못한 무승부 전투' 정도로 평가합니다만, 사실 아일라우 전투는 나폴레옹에게 있어 이미 그의 정점이 지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약 4개월 뒤 프리틀란트 전투를 통해 결국 베니히센을 굴복시키고 러시아와 틸지트 조약을 맺는데 성공합니다.  흔히 틸지트 조약이 나폴레옹 제국의 정점이었다라고 하지만, 사실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의 정점은 이미 아일라우 전투에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1814년 나폴레옹의 1차 퇴위를 조롱하는 그림입니다.  이때의 조짐은 이미 1807년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아일라우 전투에서 쓰러진 수많은 프랑스 및 러시아 병사들의 피가 채 굳기도 전인 2월 9일 새벽, 나폴레옹은 사실상 패배를 인정하고 야음을 틈타 러시아군 몰래 철수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새벽, 러시아군 진영에서 뭔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고, 그날 프랑스 군 우익에서 격전을 치루느라 기진맥진했던 다부 원수가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최대한 러시아 진영 가까이 가서 직접 귀를 땅에 대 봤다고 전해집니다.  다부의 귀에 들어온 것은 포가와 짐마차의 바퀴가 얼어붙은 땅을 구르는 소리였습니다.  러시아군이 철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뜻밖의 소식은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패배를 승리로 바꿀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는 후퇴를 위해 짐을 싸던 병사들에게 '그 자리에 정지'를 명했습니다.

다음날, 그는 승리자로서 '러시아군이 꼴사납게 버리고 도망친' 격전의 현장을 둘러 보았습니다.  드넓은 평원과 능선에 수많은 시체들이 하도 많이 널브러져 있어서, 그는 말이 시체를 밟지 않도록 해야 했고, 하얗게 얼어붙은 대지 곳곳에 검붉은 핏자국이 선명했습니다.  한마디로 끔찍한 광경이었지요.  특히 러시아군 중앙으로 진격해들어갔다가 거기서 포위되어 몰살당한 오쥬로 휘하의 제7군단 14 전열 연대의 병사들이 전열을 지킨 채 줄지어 쓰러진 모습은 뻔뻔스러운 나폴레옹조차도 눈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감정이 격해진 나폴레옹을 더욱 격분시킨 것은 도처에 널린 부상병들의 비참한 모습들이었습니다.  피투성이의 부상병들이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이곳저곳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는데, 그들 중 일부는 나폴레옹을 알아보고 떨리는 목소리로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기도 했고, 일부는 짐승처럼 살려달라고 애원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참혹한 전장 속에서, 쓰러진 전사자들과 부상자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는 사람들이 꽤 많이 눈에 띄였는데, 그들은 부상자들을 수습하는 의무병들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적병, 그리고 심지어 쓰러진 아군 병사들의 소지품을 약탈하는 프랑스 병사들이었지요.




(이 그림은 사실 전투 중의 상황을 그린 것입니다만, 전투 이후의 모습도 대략 상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 그림에서 왼쪽에 크림색 군복을 입고 폴란드 특유의 모자를 쓴 채 나폴레옹을 향해 팔을 뻗고 있는 리투아니아 군인을 부축하고 있는 사람이 육군 수석 군의관 페르시 남작입니다.  의사들이 흔히 들고 다니는 소위 '왕진 가방'을 발명한 사람이 이 분이라고 하네요.)



이런 무질서한 모습에 나폴레옹은 대놓고 화를 냈습니다.  그는 그렇쟎아도 일손이 바빴던 육군 수석 군의관인 페르시 (Pierre-François Percy) 남작을 소환하여 '야만인 집단도 아니고 대체 이게 무슨 수치란 말인가'라며 군 의무병 조직의 미비함에 대해 화를 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적반하장이었습니다.  필요한 인력과 예산, 그리고 수송 수단을 제공하지 않은 것은 바로 나폴레옹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당장 필요한 식량조차도 수송할 방법이 없어 전군이 쫄쫄 굶는 판에, 몇 명이 생길지도 모르는 부상병들을 위한 들것과 붕대, 의약품을 실은 마차가 그 강행군을 끝까지 따라올 수 있었을 리가 없었지요.  더더욱 비교가 되었던 것은 라리(Dominique Jean Larrey)가 수석 군의관으로 있던 황실 근위대에는 그런 의무병과 의료 보급품이 나름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일반 군단과 근위대 간의 그런 차별 대우는 원래 나폴레옹 본인이 만든 것이었지요.  

병사들은 당장이라도 이 지긋지긋한 아일라우에서 벗어나 보급품과 따뜻한 숙소가 있을 후방으로 떠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승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라도 아일라우에 남아야 했습니다.  문제는 이 얼어붙은 시체더미 사이에 병사들을 붙잡아 두려면 하다 못해 건빵 한조각씩이라도 나눠주어야 하는데, 프랑스 병참부에는 건빵은 커녕 감자 한알도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사들은 거의 2일째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원래 부상병들은 피를 많이 흘린 뒤였으므로 무엇보다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빨리 뭔가 음식을 먹여 체온을 높일 에너지를 얻어야 했는데, 얼어붙은 허허벌판에서는 그것이 전혀 불가능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군을 구원한 것은 놀랍게도 바르샤바 출신의 어떤 유태인 장사꾼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유태인답게, 돈을 벌려면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를 해야 하며, 또 프랑스 군처럼 식량을 현지에서 조달하는 군대를 상대로 돈을 벌려면 술 장사를 해야 한다고 정확하게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전투 바로 다음날인 2월 9일 정오 즈음, 나폴레옹 휘하 프랑스 장군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를 때, 기적처럼 이 유태인 상인이 4통(tun)의 브랜디를 실은 마차들을 몰고 아일라우에 나타났습니다.  Tun이라는 큰 발효통은 대략 252 갤론을 담는다고 하니까, 리터로 환산하면 이날 아일라우에 배달된 브랜디는 무려 3800 리터가 넘었고, 살아남은 병사들이 약 5만5천명이라고 하면 일인당 70ml씩 돌아갈 정도로 충분한 양이었습니다.  이때 이 브랜디가 없었다면 엄동설한에 수천명의 부상병들이 그대로 얼어죽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외에도, 나폴레옹이 '폴란드에 충분한 빵과 브랜디만 있다면 러시아 정복도 문제없다'라며 포도주가 아닌 브랜디를 찾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왜 전장에서, 특히 굶주린 병사들에게 포도주 대신 브랜디가 지급되었는지는 전에 썼던 앙졸라와 함께 바리케이드로 http://blog.daum.net/nasica/6862535 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브랜디가 당장 얼어붙은 몸에 불을 붙여 원기를 회복하게 하는데는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인간은 술 말고 뭔가 든든한 것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이 얼어붙은 아일라우에서 며칠 더 버텨야 하는데, 브랜디 마차 이외에는 추가로 더 오는 마차가 없다는 것을 눈치챈 병사들은 곧 대대적인 약탈질에 나섭니다.  그 척박한 지역의 농민들은 그렇쟎아도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 배가 등에 딱 붙은 프랑스 병사들은 그런 농민들의 누추한 집과 창고를 닥치는 대로 약탈하여 먹을 것을 구해야 했습니다.  이런 난장판을 며칠 겪고 난 뒤인 2월 17일, 전투가 끝난지 무려 9일 뒤에야 나폴레옹은 파사르주 (Passarge) 강 너머의 고지대인 오스테로더 (Osterode, 폴란드어로는 Ostróda)로 후퇴했습니다.  하지만 여기도 누추한 농촌 마을에 불과했으므로, 나폴레옹은 정말 초가집으로 된 농가에 사령부를 꾸려야 했습니다.  2월 27일 나폴레옹이 탈레랑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나는 여기서 매우 잘 지내고 있소.  단, 식량이 없어서 최상이라고는 말 못하겠소" 라고 씌여 있습니다.  세상에, 집이 아무리 아늑하더라도 식량이 없다면 그게 어떻게 '잘 지내는'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  결국 나폴레옹은 더 후퇴하여 단치히 남동쪽에 위치한 동부 프로이센의 핑켄슈타인 성 (Schloss Finckenstein)으로 사령부를 옮겨야 했습니다.  이곳은 원래 프리드리히 대왕의 스승 격인 프로이센의 원수 핑켄슈타인 백작 (Albrecht Konrad Reinhold Finck von Finckenstein)에 의해 지어졌고, 당시는 도나-슐로비텐 (Dohna-Schlobitten) 가문의 소유로 있던 곳이었습니다.  여기에 와서야 비로소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는 다소간의 안락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핑켄슈타인 성은 1720년에 설계된, 비교적 새로 지어진 성이었습니다.  이 성이 유명해진 것은 바로 나폴레옹이 1807년에 발레프스카와 함께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인지, 1937년 나폴레옹과 발레프스카의 로맨스를 그린 미국 영화 '정복' (Conquest)의 촬영도 바로 이 성에서 촬영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곳은 사진처럼 지금은 폐허만 남아 있습니다.  1945년 독일군이 후퇴하면서 패기 넘치는 소련군이 여기에 불을 질러 버렸거든요.  이 곳이 만약 독일 땅으로 남아 있었다면 아마 독일인들이 다시 건물을 지었겠지만, 이 곳은 현재 폴란드 땅이라서 그냥 폐허로 남아 있습니다.) 




(이 '정복' (Conquest)라는 영화에서 발레프스카 역은 그 유명한 그레타 가르보가 맡았습니다.  세계적으로 당시로서는 엄청 큰 돈인 210만 달러를 벌어들였으나, 제작비는 훨씬 더 많이 들었기 때문에 손실액이 무려 140만 달러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한마디로 망했다고 봐야지요.)


나폴레옹은 프로이센 풍으로 무척 검소하게 지어진 이 핑켄슈타인 성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4월이 되어 약간 상황이 좋아지자 곧장 마리 발레프스카를 이 성으로 불러 들여 아주 좋은 시간을 보냈던 것입니다.  자신들을 이렇게 폴란드의 척박한 땅에 풀어 놓고 자기만 발레프스카와 함께 희희낙락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보고 병사들은 기분이 과히 좋지는 않았을 듯 합니다.  확실히, 이때 즈음 해서는 나폴레옹은 더 이상 과거 병사들과 함께 알프스를 넘던 그 나폴레옹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그렇쟎아도 이미 살이 많이 쪘던 나폴레옹이, 폴란드 전장에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기간 중 오히려 더 눈에 띄게 살이 붙었습니다.  이건 제가 비만 체질이라서 잘 압니다만, 분명히 움직이는 것에 비해 많이 먹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던 나폴레옹은 이미 없어졌다는 것이지요.  핑켄슈타인 성에서 나폴레옹이 발레프스카와 깨를 볶는다는 소식은 당연히 조세핀 황후의 귀에도 들어갔습니다.  당시 마인즈 (Mainz)까지 와 있던 조세핀은 질투심에 눈이 멀어 당장 그 곳으로 가겠다,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가 있느냐, 그냥 죽어버리겠다 라며 나폴레옹에게 떼를 쓰는 편지들을 기관총처럼 쏘아댔는데, 나폴레옹은 뻔뻔스럽게도 '일반인의 잣대를 나에게 들이대지 말라'며 그런 불평을 단칼에 잘라 버렸습니다.  나폴레옹의 '일반인의 잣대를 나에게 들이대지 말라'는 태도는 그의 자만과 허영심이 극에 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이 태도는 그의 국정 운영과 군사 작전 업무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파리하고 창백한 안색의 나폴레옹이 어쩌다 이렇게 살찐 아저씨가 되었는지는 나폴레옹과 저의 공통점 - 비만 http://blog.daum.net/nasica/6862425 편을 참조하세요.)


그렇다고 나폴레옹이 과거의 영민함을 모두 잃고 쾌락만을 좇는 바보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마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이 정점에 달했다는 듯이 엄청난 분량의 업무를 해냈습니다.  먼저, 그는 충원된 프랑스 사단에 그동안 정비해둔 폴란드인들과 이탈리아인들로 구성된 사단들을 더해 제10 군단을 편성했습니다.   이 제10 군단을 르페브르 (François Joseph Lefebvre) 원수에게 맡겨 발트해에 접한 단치히 (Danzig, 현재의 Gdansk) 항구를 점령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아일라우 전투에서 고전을 했던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보급 불량이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프랑스군 전선 후방에 있으나 아직 프로이센군이 점거하고 있는 단치히 항구를 점령해야 한다고 정확히 판단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당장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잔뜩 쌓여 있는 곡물 등의 보급품이 필요했습니다.  1807년 3월 20일부터 프랑스군의 포위 하에 들어간 이 단치히 항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러시아는 물론 영국과 스웨덴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영국 및 스웨덴 해군의 엄호 하에 5월 초 러시아군 8천명을 단치히에 상륙시키려 했으나, 르페브르 원수의 기민한 대응 작전 덕분에 약 3천명의 전상자와 18문짜리 영국 해군 소함정 돈틀리스 (Dauntless) 호를 잃어야 했습니다.  결국 단치히 항구는 5월 24일 조건부 항복을 선언했고, 르페브르 원수는 5월 28일 단치히 공작 (Duc de Dantzig)에 봉해집니다.





(위 그림은 1807년 5월 단치히에 입성하는 프랑스군의 모습을, 아래 사진은 단치히에 입성한 나폴레옹의 모습을 리인액트한 모습입니다.  덕중의 덕은 양덕이라...)



또한 나폴레옹은 이 핑켄슈타인 성에서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습니다.  그는 바로 이곳에서 5월 4일 페르시아의 카자르 왕조의 파트-알리 샤 (Fath-Ali Shah Qajar)의 사절인 레자-카즈비니(Mirza Mohammed Reza-Qazvini)를 만나 프랑스-페르시아 동맹 협정을 맺습니다.  무척 긴 배경을 가진 이 핑켄슈타인 조약의 내용을 간략하게 이야기하자면, 러시아와 전쟁 중이던 페르시아를 프랑스가 지원하는 대신, 페르시아는 영국과 단교하고, 더 나아가 아프가니스탄과도 협력하여 프랑스와 함께 영국령 인도를 침공한다는 다소 비현실적인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러시아와 조지아 (Georgia, 예전 이름 그루지아, 즉 바그라티온 왕자의 고향)를 둘러싸고 전쟁 중이었습니다.  원래 조지아는 페르시아의 세력권 밑에 있는 나라였는데, 이들이 페르시아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에게 손을 벌리자, 이를 응징하기 위해 페르시아가 대대적으로 조지아를 침공, 그 수도인 트빌리시(Tbilisi)까지 함락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홀라브룬 (Hollabrunn) 전투 http://blog.daum.net/nasica/6862545 참조)  러시아는 이에 개입하여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였는데, 페르시아도 초반에는 수적 우세를 앞세워 나름 선전했으나, 러시아가 현대적인 포병대를 앞세워 전투에 나서자 속절없이 밀려나고 맙니다.  자기들도 유럽식 대포를 도입해야겠다고 생각한 페르시아는 이미 1801년 협정을 맺었던 영국에게 포병 장비 지원을 요청했으나, 당시 영국은 러시아와 함께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동맹 관계였으므로 그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페르시아의 샤는 어쩔 수 없이 러시아와 영국의 공통된 적인 프랑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과 협정을 맺은 페르시아의 샤, 파트-알리 카자르입니다.)



나폴레옹은 1797년의 이집트 원정 때 가졌던 동방 원정에 대한 꿈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찌기 세바스티아니(Horace François Bastien Sébastiani)를 오스만 제국에 파견하여 동방에서의 프랑스의 입지를 다지고 영국과 러시아에게 골치거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결과가 페르시아의 협정 요청으로 마침내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반갑게 페르시아와 협정을 맺었고, 그 실행을 위해 가르단 (Antoine Gardanne) 장군 하에 약 70여명의 군사 고문단을 페르시아에 파견합니다.  이들은 1807년 12월 4일 페르시아에 도착하여 페르시아 군 현대화에 나섰는데, 이들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여, 당장 1808년 11월 29일, 프랑스식 훈련을 받은 신식 페르시아 군대가 러시아와의 분쟁 지역 내 전략적 요충지였던 에레반 (Erevan)에서 러시아군의 공격을 훌륭하게 막아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르단 휘하의 포병 중위들이 이스파한 (Ispahan)에 설치한 공장에서 드디어 1808년 12월, 20문의 유럽식 대포를 생산해내는 쾌거를 이룹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은 곧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핑켄슈타인 협정 불과 몇 달 뒤인 1807년 7월, 나폴레옹은 러시아와 틸지트 조약을 맺고 페르시아가 러시아에게 당하건 말건 상관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지요.  아마 페르시아의 샤로서는 영국이나 프랑스나 유럽놈들은 하나 같이 거짓말장이에 못 믿을 인간들이라고 노발대발 했을 것입니다.  결국 페르시아는 러시아에게 일방적으로 밀린 끝에, 1813년 굴욕적인 굴리스탄 (Gulistan) 협정을 맺음으로써, 그렇게 외세에 의존해서는 나라를 지킬 수가 없었음을 역사 앞에 증명해 보이고 말았습니다.




(1808년, 테헤란의 파트 알리 샤의 궁정에 나와 왕중왕인 페르시아의 샤에게 경의를 표하는 프랑스 장군 가르단(Gardanne), 조베르(Jaubert), 그리고 조아냉(Joanin)의 모습입니다.  페르시아 측 그림입니다.)


이런 거창한 지정학적 외교 활동 외에도, 나폴레옹은 무척이나 바빴습니다.  가장 먼저, 아일라우 전투 이후 파리에서 돌기 시작한 소문, 즉 아일라우 전투가 실제로는 베니히센의 승리였다는 거짓 아닌 유언비어에 대해 강력하게 대처해야 했지요.  그는 파리의 신문 및 살롱에서의 잡담을 더욱 강력하게 통제하기 시작했고, 폴란드 주둔 병사들로부터 고향으로, 또 고향으로부터 병사들로 오가는 편지들에 대해서도 검열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필 이때 즈음해서, 스위스로 망명을 떠났던 스탈 (Staal) 부인이 다시 파리로 돌아와 살롱 활동을 시작하면서 나폴레옹의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원래 스위스 사람이었던 부르봉 왕조의 재무장관 네케르의 딸이었으므로 스위스로 망명을 떠났던 스탈 부인이 신변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파리로 되돌아온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스탈 부인 본인의 말에 따르면 '스위스의 맑은 계곡물보다 파리의 시궁창 물이 더 그립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녀가 돌아왔다는 소문은 곧장 푸셰의 비밀 경찰에 의해 저 멀리 핑켄슈타인 성에 있는 나폴레옹에게까지 알려졌습니다.  나폴레옹은 당장 그녀를 잡아다 스위스로 다시 내동댕이칠 것을 명했고, 실제로 그녀는 대번에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스위스로 쫓겨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당장 프랑스 정부 국채 가격이 폭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영국 해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발트해 연안에 대규모로 상륙한다는 소문에, 이러다가 나폴레옹의 제정이 무너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면서 국채 가격은 더욱 떨어졌고, 이는 곧 전반적인 경기 침체로 이어졌습니다.  여론이야 검열과 통제로 (적어도 겉으로는) 어떻게든 막아본다고 쳐도, 국가 위기로 인한 신용 하락에 따른 재정난은 나폴레옹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당장 파탄나기 일보 직전인 경제를 억지로 활성화하기 위해, 국고에서 매달 50만 프랑을 대형 제조업자들에게 대출해주고, 그렇게 생산된 상품들을 그런 대출에 대한 담보로 정부 창고에 쌓아놓도록 했습니다.  내친 김에 군용 물자 생산 공장도 더 만들고, 아울러 내수 경제 활성화를 위해 튈르리 (Tuileries) 궁전도 개장하도록 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그가 부자로 만들어 놓은 보나파르트 가문의 여자들에게 아낌없이 돈을 쓰도록 강요했습니다.  일종의 전시 경제를 운영했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특기할 만한 점은, 나폴레옹은 이렇게 집안 돈을 내다 쓰면 썼지, 세금을 올리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 기반이 안정을 바라는 중산층의 지지와, 당장 찬장에 먹을 빵이 있기를 원하는 서민층의 잠잠함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거든요.  공장이 돌아가서 중산층이 망하지 않고, 또 그럼으로써 그런 공장에 고용된 서민층에게 급료가 주어진다면 일단은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조치였을 뿐이었습니다.




(작년 가을 제가 직접 찍은 튈르리 공원에서의 사진입니다.  사진 속에 보이는 건물은 루브르 박물관의 일부입니다.  튈르리 궁전은 지금은 없어요.  1871년 파리 코뮌 때 불타 없어졌거든요.  나폴레옹 가문의 여자들이 쏟아 부었던 돈도 이때 다 날아간 셈이지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러시아에 대한 완전하고도 철저한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싸워보니, 그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러시아군과 동유럽에서 싸운다는 것은 여태까지 그가 겪어온 전쟁과는 확연히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고작 폴란드에서조차도 러시아군 격파가 이렇게 어려운데, 당장 러시아군과 다시 싸워 설령 그들을 깨뜨린다고 하더라도, 만약 러시아군이 또다시 후퇴하여 광활한 러시아로 끝없이 후퇴한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할 지 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또한 폴란드 땅에서는 과거 그가 사용했던 전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통감했습니다.  그는 여태까지 모든 전장에서, 항상 적의 병력이 프랑스군보다 우세했다고 주장했고, 일부 사실이었습니다.  실제로 전투 현장에서는 항상 프랑스군의 숫자가 더 많았으나, 그것은 나폴레옹이 징집된 혁명 프랑스군 특유의 기동력을 살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그는 폴란드 현지 상황에서는 이런 것이 다 통하지 않으니, 남은 방법은 오로지 정말로 우세한 병력을 총동원하여 적을 힘으로 누르는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실레지아의 요새를 지키던 병력들이나, 아직 항복하지 않은 일부 극소수 프로이센 요새들을 포휘하고 있던 후방 병력들을 다 소환하여 폴란드 최전선에서의 프랑스군 병력을 무려 16만명까지 늘렸습니다.  이제 봄이 되어 도로 사정도 좋아졌으므로, 이들에 대한 보급이 용이해졌으므로 가능한 일이었지요.  또한 이렇게 소집된 병력들이 지키던 독일 지역을 텅 비워둘 수는 없었으므로, 이미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이전에 내렸던 조치를 또 다시 써먹었습니다.  즉 아직 입대할 나이가 되기 전인 소년병들을 1년 더 일찍 징집하는 법안을 상원을 협박하여 통과시켜, 수만명의 아직 나이가 차지 않은 소년병들을 징집한 것입니다.  특히 이 조치는 그렇잖아도 끝없는 전쟁에 지친 프랑스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2년 연속으로 아직 나이도 차지 않은 소년들을 징집해가다니 !  황제는 온 나라의 소년들을 다 끌고 갈 작정인가 ?  아직 어린 아들들을 빼앗긴 프랑스 사회의 이런 웅성거림에 대해서는 나폴레옹조차도 변명거리가 필요할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런 소년병들은 고향을 지키는 '국민 방위군'으로서만 활용될 것임을 약속해야 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스페인 전쟁까지 벌어지자 이런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지요.  이렇게 프랑스 국내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는 물론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에서도 병력을 요구하여 그들로 후방 부대를 꾸몄습니다.  이렇게 병력을 충원하여, 프랑스 및 독일 후방 지역에는 무려 40만명의 예비 병력을 갖추어 놓았습니다. 




(당시 국민방위군의 모습입니다.  일반병과 국민방위병의 차이에 대해서는 앙졸라와 함께 바리케이드로 http://blog.daum.net/nasica/6862535 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당시 러시아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두개의 다뉴브 제후국,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공국의 모습입니다.  오늘날의 루마니아와 몰도바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부카레스트는 지금의 루마니아 수도인데, 현대 유럽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빼면 눈에 띄는 큰 나라들이 프랑스-독일-폴란드-루마니아 정도로서, 루마니아도 영토가 상당히 큰 나라입니다.)



한편, 아일라우의 실질적인 승리자라고 파리에서 칭송받던 베니히센의 사정은 파리 시민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일단 뭐니뭐니해도 아일라우 전투 현장에서 후퇴한 것에 대해 국내외, 특히 동맹국이랍시고 있던 프로이센에서의 여론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프로이센 측으로부터 그 후퇴는 죄악에 가까운 행동이었다며 맹비난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혁혁한 전과를 세운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짜르 알렉상드르로부터의 추가 지원은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이는 그냥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나폴레옹이 오스만 투르크에 세바스티아니를 파견하여 이스탄불을 부지런히 휘저어 놓았던 것이 열매를 거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러시아의 제1의 관심은 다뉴브 강 하류 지역의 오스만 투르크의 제후국, 즉  몰다비아 (Moldavia) 및 왈라키아 (Wallachia)의 소요 사태였습니다.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와 세바스티아니의 외교에 영향을 받은 오스만 제국이 그 두 제후국의 친러시아파 제후들을 파면함으로써 발발한 러시아-투르크 전쟁 (1806 ~ 1812)에 알렉상드르의 관심과 러시아의 국력이 분산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상황은 결국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 3세 (Selim III)의 개혁에 반대하는 수구꼴통 예니체리(Janissary) 부대의 반란과 그에 따른 셀림 3세의 퇴위 때까지 계속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덧 폴란드에도 혹독한 겨울과 질척질척한 봄이 가고, 드디어 여름이 다가옵니다.  봄 동안 굴 속에 쳐박혀 상처를 핥던 나폴레옹이 다시 들판으로 나올 때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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