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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어이없는 결말 - 프리틀란트 (Friedland) 전투

by nasica-old 2014.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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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베니히센을 추격하던 나폴레옹이 거의 아일라우 전투의 복사판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일스베르크 전투에서 다시 한번 쓴 맛을 보는 장면을 보셨습니다.  베니히센을 추격하다가 같은 방식으로 2번이나 당했으니, 크게 의기소침할 만도 했으나 나폴레옹은 그다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그가 대육군 소식지에 싣도록 한 하일스베르크 전투 기사는  사상자 수를 명시하지 않은 채, "부대의 사기가 너무 충천하여 철통같은 방어 진지를 구축한 러시아군에게 몇몇 보병 중대가 돌격했고, 일부 용감한 병사들이 적 보루의 해자와 목책 앞에서 전사했다" 라고만 적었습니다.




(프랑스 대육군의 소식지 Grande Armee Bulletin 입니다.  당시 유행하던 표현 중의 하나가 "대육군 소식지만큼 진실되다" 일 정도로, 당시 프랑스 국민들도 소식지가 얼마나 가공된 소식을 전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렇게 뻔뻔스러운 기사를 내보냈던 것은 이번에는 러시아군을 격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군단들이 내달리는 폴란드 북부 평원은 이제 푸른 밀과 귀리 밭으로 넘실거리고 있었으므로 군마들의 먹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길도 적당히 말라서 무거운 대포를 실은 포가들이 우렁찬 소리와 먼지를 일으키며 내달리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특유의 기동전이 잘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이었던 것입니다.  




(3보 이동시 승차라는 개념은 나폴레옹 시절부터 있던 것입니다.  8 파운드 이하의 포는 6마리가, 12 파운드 포 같은 경우 8마리가 끌었습니다.)



다만, 그는 아직 베니히센의 러시아 주력 부대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웅장한 그랑 다르메 (Grande Armee)는 크게 2줄기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는 프로이센의 잔당들이 웅크리고 있는 동 프로이센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 (Konigsberg)로 향했고, 나머지 하나는 알레 (Alle) 강을 따라 움직이며 베니히센의 주력 부대를 찾아 나섰습니다.   쾨니히스베르크 방면은 다부의 제3군단과  술트의 제4군단, 그리고 뮈라의 예비 기병대로 이루어져 있었고, 알레 강 방면은 네의 제6군단과 모르티에의 제8군단, 부상당한 베르나도트 대신 빅토르가 지휘를 맡은 제1군단, 그리고 란의 제5군단이 맡았습니다.

한편, 베니히센의 사정은 다소 복잡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나폴레옹의 병력이 러시아군보다 압도적으로 많았으므로 분명히 자신이 쫓기는 입장이었습니다만, 아일라우에서도 그렇고 하일스베르크에서도 그렇고, 분명히 전투에서 우세를 점한 것은 자신이었으므로, 어느 정도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던 것이, 두번 다 베니히센은 자신의 승리를 주장했지만 결국 전장에서 도주한 것은 변명의 여지 없이 자신이었으므로, 부하 장교들은 자신의 지휘에 대해 상당히 불만스러워했습니다.  일단 아일라우 전투나 하일스베르크 전투나, 베니히센이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공세를 취하다가 결국 못 버티고 후퇴하다 벌어진 조우전이었기 떄문에 그다지 빛이 나지 않았습니다.  베니히센의 작전이 뛰어나서라기 보다는, 러시아 병사들의 용기와 인내심 덕분에 이겼다는 평가였지요.  하긴 애초에 베니히센의 초반 공세는 누가 봐도 'bite more than one can chew', 즉 능력이 받쳐주지 못하는 작전이었던 것을 보면 그런 평가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베니히센이 결코 뛰어난 전술가가 아니라는 점이 결국 프리틀란트(Friedland)에서 폭죽처럼 터져나오게 됩니다.




(현재의 프리틀란트의 모습입니다.  당시에는 강 왼쪽, 만곡부의 북쪽에 위치한 구시가지만 있었습니다.  프리틀란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에 편입되면서 Pravdinsk로 이름을 바꿨는데, 지금도 인구가 5천명이 안되는 소도시입니다.)



그런 베니히센과 최초로 촉각을 마주 댄 것은 다행스럽게도 뮈라가 아니라 란이었습니다.  1807년 6월 13일, 란 휘하의 경기병 (husaar) 부대가 알레 강 서안에 있는 작은 도시인 프리틀란트 인근에 있던 러시아군 탄약 저장고를 발견하고 공격, 그를 지키던 러시아 부대들을 쫓아낸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 밤, 프리틀란트와 알레 강을 끼고 마주한 알레 강 동쪽 강변까지 베니히센의 주력 부대가 북진해왔고, 그 전위 부대였던 골리친 (Dmitriy Vladimirovich Golitsyn) 장군의 기병대가 강을 건너와 프랑스 경기병대를 급습했습니다.  프랑스 경기병 중 일부는 사로 잡혔으나 나머지는 란의 본대에 합류하여, 강력한 러시아군의 존재를 알렸지요.  물론 란은 즉각 나폴레옹에게 전령을 보내 그 사실을 알리고, 프리틀란트로 향했습니다.





(골리친 장군의 모습입니다.)




(경기병 hussar는 유럽 어느 나라 군대에서건 가장 정예 기병으로서 우대받았습니다만, 사실 이는 화려한 군복 때문에 주로 귀족층 자제들이 그 장교로 많이 지원했기 때문일 뿐, 실제로 전투력이 가장 뛰어난 부대는 아니었습니다. )



란의 보고를 받은 나폴레옹은 막강한 위력을 여러차례 보여준 천라지망을 동원했습니다.  그날 밤 안으로, 그루시 (Emmanuel de Grouchy) 장군의 용기병과 낭수티 (Étienne Marie Antoine Champion de Nansouty) 장군의 흉갑기병, 그리고 네의 군단과 모르티에의 군단이 불빛을 본 나방떼처럼 프리틀란트를 향해 움직였습니다.  란의 휘하 중에서는 우디노 (Nicolas Oudinot) 장군의 사단이 6월 14일 새벽 3시에 프리트란트 앞 평원에 가장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루시 장군입니다.  누가 뭐래도 그루시 장군이 유명해진 것은 바로 워털루로서, 이 전투에서 그루시는 출연하지 않고도 불멸의 유명세를 타는 불운을 겪습니다.  Ou est Grouchy ? 그루시는 어디 있어 ? 라는 나폴레옹의 대사는 역사 속 유명 대사 중 하나지요.)




(낭수티 장군입니다.  그는 원래 귀족 출신으로서, 나폴레옹의 다른 장군들과는 달리 전장에서 약탈 등으로 개인주머니를 채우지 않은 몇 안되는 청렴한 장군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청렴했을 뿐 청빈하지는 않아서, 씀씀이는 계속 귀족처럼 살았기 때문에, 나폴레옹 패망 이후 루이 18세 치하에서 급료가 많이 깎이자, 말년에는 경제적으로 무척 쪼들렸다고 합니다.)




원래 베니히센은 쾨니히스베르크를 향해 후퇴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쾨니히스베르크는 나름대로 유서 깊은 요새 도시이므로, 쉽게 함락되지도 않을 것이고, 또 그곳으로 가봐야 나폴레옹의 우세한 병력 속에 러시아군이 포위될 뿐이기 때문이었지요.  그는 일단 쾨니히스베르크 동쪽의 벨라우 (Wehlau, 현재 러시아의 Znamensk)를 향해 퇴각 중이었고, 알레 강 서쪽으로 도강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것은 옳은 판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초심을 유지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베니히센은 그냥 가시던 길 계속 가시는 것이 좋을 뻔 했습니다.  괜히 알레 강을 건넜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넌 셈이 되었지요.)



알레 강 너머 프리틀란트가 보이는 지역까지 온 베니히센은 골리친 장군이 프랑스군 기병대와 충돌했다는 보고를 받고는, 강 건너편에 있다는 프랑스군은 비교적 소수인 1개 군단에 불과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것까지도 옳은 판단이었습니다.  베니히센은 아직 나폴레옹의 본대는 알레 강 서쪽 저 멀리 있을테니, 강을 건너 이 고립된 프랑스군 1개 군단을 재빨리 쳐부수고 자신의 이력서에 빛나는 전투 한줄을 더 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때는 6월 초였고, 프랑스군은 지난 2월 때와는 전혀 다른 기동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아무튼 베니히센은 그날 밤 안으로, 프리틀란트 바로 앞에 서둘러 3개의 부교를 놓습니다.  그리고 불과 3일전 치열했던 하일스베르크 전투를 치루고 48시간 동안 무려 55km를 초여름의 뙤약볕 밑에서 헉헉거리며 걸어온 러시아 병사들을 강 건너 프리틀란트로 대거 투입했습니다.  여기서 나폴레옹에게 사실상의 패배를 안겨준 남자 베니히센의 진짜 실력이 드러납니다.  원래 프리틀란트는 알레 강이 크게 굽이쳐 흐르는 만곡부에 위치한 곳이어서, 사실상 서쪽면을 빼면 거의 3면이 알레 강줄기로 고립된 지역이었습니다.  그런 좁고 고립된 지역에 허접한 부교 3개를 놓고 5만이 넘는 대군을 투입했으니, 만약 서쪽에서 강력한 적이 나타날 경우 몰살의 우려가 있는 상황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프리틀란트 전투의 상황도입니다.  잘펠트 전투 ( http://blog.daum.net/nasica/6862560 참조) 에서 보셨듯이, 배수의 진은 영~ 피해야 할 것 중 하나지요.)



하지만 그건 뒤의 일이고, 6월 14일 새벽에 위기에 빠진 남자는 베니히센이 아니라 용장 란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원래부터 9천의 보병과 3천의 기병 밖에 없었는데, 당장 눈 앞에 나타난 러시아군이 무려 5만이나 되었던 것입니다.  전투는 새벽 3시 30분 경부터, 조금씩 강을 건너오기 시작하던 러시아군을 저지하면서 소규모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강을 건너오는 러시아군이 늘어나면서, 란은 그야말로 고군분투하며 조금씩 밀리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곧 그루시의 용기병들과 낭수티의 흉갑기병들 총 5천이 도착하면서 약간 숨통이 트였습니다.  특히 그루시와 낭수티는 프리틀란트 북서쪽의 하인리히스도르프 (Heinrichsdorf) 마을을 점거하여 중과부적이던 란의 좌익을 포위하려던 러시아군 기병들을 막아내어, 기선을 제압했습니다.




(러시아 화가가 그린 프리틀란트 전투입니다.  왼쪽이 프랑스군, 오른쪽의 흰 군복이 러시아군입니다.)




이제 아침 해가 완전히 뜬 상황에서도, 여전히 란의 병력은 총 1만7천에 불과했습니다.  러시아군이 새벽 내내 다리를 건너고 좁은 지역의 혼란 속에서 병력을 전개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면 더욱 큰일날 뻔 했었지요.  이제 베니히센이 프리틀란트를 완전히 점령하고 그 앞 평원에 란을 상대하기 위해 5만 병력을 좍 늘어놓고 전진을 하려던 그때, 모르티에의 사단이 현장에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군은 베니히센이 지난 겨울 보아왔던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놀라운 기동력을 발휘하여 보는 눈 앞에서 순식간에 프랑스군의 숫자가 4만으로 껑충 뛰어오른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베니히센은 뭔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그렇다고 여기서 발을 뺄 수도 없었습니다.  후퇴하기에는 적과 너무 가까왔고, 또 퇴로도 부실하게 놓은 부교 3개 뿐이었으므로, 여기서 잘못 후퇴하다가는 적의 추격으로 인해 전군이 궤멸되기 딱 좋은 상황이 된 것입니다. 

베니히센이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일까 당황해하고 있던 정오 경, 나폴레옹이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나폴레옹대로 양군의 전개된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이런 행운이 나에게 굴러들어오다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아마 한편으로는 '내가 이런 멍청이에게 2번씩이나 당했더란 말이냐'라는 자책감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 입이 귀까지 벌어진 나폴레옹은 때마침 그날 6월 14일이 마렝고 전투가 일어난 날이라는 것을 기억하고는 주변 참모들에게 '프리틀란트 전투도 마렝고 전투 못지 않은 대승으로 끝날 것'임을 장담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언덕에서 내려다본 전장은 대략 삼각형 모양으로 생겼는데, 프랑스군이 그 넓은 밑변을 차지하고 있었고, 러시아군은 반대편의 좁은 꼭지점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형국이었는데, 탈출구라고는 그 꼭지점에 놓인 부교 3개 뿐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베니히센이 우물쭈물거리는 사이에, 네와 빅토르의 군단까지 속속 현장에 도착하여 프랑스군의 전력이 러시아군을 압도하는 상황까지 이르렀습니다.  나중 일입니다만, 나폴레옹이 치른 주요 전투 중에서, 프랑스군 병력이 더 많은 상태에서 싸웠다고 나폴레옹이 인정한 유일한 전투가 바로 이 프리틀란트 전투였습니다.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앞을 지나 적진으로 돌격해들어가는 흉갑기병의 모습입니다.  이 그림은 사실 1875년에 Ernest Meissonier가 그린 것이므로, 당시의 모습을 제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전투 자체는 매우 전형적인, 교과서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나폴레옹의 긴 명령서에 따르면, 프랑스군의 우익을 맡은 네가 깔때기 속에 든 러시아군을 밀어 붙이는 피스톤 역할을 했고, 오전 내내 고전 속에서도 러시아군을 불독처럼 물고 늘어지느라 고생이 많았던 중앙의 란, 그리고 우익의 모르티에는 러시아군이 삐져나가지 못하도록 틀어막는 역할을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예비대로 사용하기 위해 기다리던 근위대와 빅토르의 제1군단이 현장에 도착한 오후 5시경, 나폴레옹은 마침내 진격을 명했습니다.

비록 그 지휘관이 멍청하다고 하더라도, 러시아 사내들은 결코 바지저고리가 아니었습니다.  네의 병력이 승리를 확신하며 보무도 당당히 진격해오자, 러시아군은 벼락같은 포격과 폭풍같은 기병 돌격으로 대응했고, 이미 러시아군을 구석에 몰아넣은 쥐새끼로 취급하던 네의 제1선 부대들은 이 거센 반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박살이 나서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뜻밖의 위기 상황에서 프랑스군을 구해낸 것이 바로 프랑스군 포병대였습니다.  




(1970년작 워털루는 로드 슈타이거가 나폴레옹으로, 크리스토퍼 플럼머가 웰링턴으로 나왔습니다.  이때 프랑스군과 영국군으로 동원된 1만5천의 보병과 2천의 기병은 모두 당시 소련군 현역 병사들로서, 당시 반농담 반진담으로 이 영화의 감독이 유럽에서 7번째로 큰 규모의 병력을 가지고 있다고들 했습니다.)




흔히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강한 것은 그 우수한 포병대 덕분이라고들 하지요.  하지만 정작 나폴레옹의 포병대가 어떤 활약을 펼쳤길래 그런 칭송을 듣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970년에 만들어진 영화 워털루 (Waterloo) 중에는 웰링턴 장군이 프랑스군의 포병들을 보며 '나폴레옹은 대포를 권총 다루듯 다룬다'라며 감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만, 정작 뭐가 특별한지에 대해서는 영화 속에서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권총 다루듯 대포를 다루는' 프랑스 포병대의 위엄이 이 전투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베르사이유 궁에 있는 세나르몽 장군의 흉상입니다.  세나르몽 장군은 1810년 스페인 카디즈 포위 공격 때 전사했고, 그의 시신은 파리 팡테옹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팡테옹에 대해서는 http://blog.daum.net/nasica/6862552 참조)



전투가 시작되기 전, 예비대로 돌려져 있던 빅토르 장군의 제1군단 휘하의 포병대 지휘관이던 세나르몽 (Alexandre-Antoine Hureau de Sénarmont) 장군은 제1군단 산하 총 38문의 포병대을 크게 3개 집단으로 재편했습니다.  즉, 12파운드 포 4문, 4파운드 포 4문, 6파운드 포 22문, 그리고 8문의 곡사포를 각각 10문의 6파운드 포, 2문의 4파운드 포, 3문의 곡사포를 가진 2개 포대로 편성하고, 나머지는 예비 포대로 편성하여 능선 뒤에 숨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두 포대는 각각 따로 떨어진 언덕 능선에 배치하여, 만약 그들의 사정거리 안에 적이 들어오면 이 두 포대로부터 십자포화를 뒤집어 쓰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로 기회를 기다리던 세나르몽의 눈 앞에, 제6군단을 밀어붙이고 몰려나오는 러시아군의 모습이 마침내 들어왔습니다.  




(이건 사실 나폴레옹 시대의 대포가 아니라 미국 남북 전쟁에 사용되던 12파운드 포입니다.  나폴레옹은 4파운드, 6파운드, 12파운드 등 너무 많은 구경으로 나누어져 있던 대포 규격을 단순화하여, 가볍고 기동력 있는 6파운드 포를 주력으로 사용했습니다.  6파운드 포의 구경은 대략 90mm 정도이고, 저 사진 속의 12파운드 포 구경은 대략 113mm 정도입니다.)



러시아군이 400m까지 들어오자 세나르몽 포병대들이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러시아군의 예상과는 달리, 대여섯 발의 포격을 퍼붓고는 뜻밖의 무브먼트를 보여주었습니다.  전체 포병대의 대포들 중 절반 정도가 포가에 말들을 결속시키고는 러시아군을 향해 돌격한 것입니다.  그 와중에 움직이지 않고 있는 나머지 절반의 포병대는 러시아군을 향해 게속 맹렬한 엄호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이 포병대들은 1개 보병 대대와 4개 용기병 연대의 엄호를 받고 있었으므로 러시아군은 이들을 향해 섣불리 돌격을 감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뭘 하려는 걸까 하고 러시아군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프랑스 포병대는 말을 풀고 러시아군으로부터 200m 떨어진 곳에 위치를 잡더니 다시 각각 20회 정도의 구형탄 (roundshot) 포격을 퍼부어 러시아군의 대오에 이빠진 참빗처럼 구멍을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뒤쳐져 있던 나머지 절반의 포병대가 또 달려나와 더 가까운 60m 지점에 위치를 잡고는 이제 무시무시한 캐니스터 탄 (canister shot) 포격을 퍼부어 댔습니다.  처음에는 이 2개 포대 사이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으나, 이들이 차례로 서로를 엄호하며 돌격하는 동안 서로간의 거리를 좁혀, 이제 러시아군 60m 앞에서는 이 2개 포대가 하나의 거대 포대가 되어 그 앞에 서 있는 모든 것을 캐니스터 탄으로 다 날려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캐니스터 샷은 대형 산탄총 같은 것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진 출처는 http://ckwarof1812.weebly.com/photo-gallery.html 인데, 다른 포탄 종류들도 전시되어 있으니 한번 가서 구경들 하세요.)




뼈와 살로 이루어진 병사들이 짠 대오는 이런 포격 앞에서는 서있을 수 없었습니다.  프랑스 포병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러시아군 포병대가 대응 포격을 하거나 기병대가 바람처럼 달려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눈 앞에서 러시아 보병대가 녹아내리자, 항상 보병 스크린과 함께 움직여야 했던 러시아군 포병대는 대포를 잃을까 두려워하여 포가에 말을 결속하고는 보병대와 함께 철수해버렸습니다.  남은 것은 러시아 기병대였는데, 이들도 무너져 후퇴하는 아군 보병들이 걸리적거려 바람같은 돌격이 애초에 불가능했고, 게다가 프랑스 기병대가 선제 공격을 퍼붓는 바람에 세나르몽 포병대를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기병과 포병의 합동 공격은 잘만 조합하면 정말 막아내기 어렵습니다.  그림은 프랑스 경기병들의 돌격입니다.)




세나르몽 포병대는 전투에서 약 3시간 동안 맹렬하게 포격을 퍼부었는데, 이 3시간 동안 각 대포는 각각 평균 72발의 구형탄과 12발의 캐니스터 탄을 발사했습니다.  이는 약 2분마다 1발씩 포격을 했다는 이야기인데, 해군과는 달리 다소 구경이 작은 포탄을 썼다고는 해도, 3시간 동안, 그것도 말을 포가에 묶었다 풀었다를 이동했다를 반복하며 이런 기록을 냈다는 것은 정말 경이적인 속도의 포격입니다.  이 전투에서 세나르몽의 포병대는 66명의 포병들이 죽거나 다쳤고, 총 53마리의 말을 잃었습니다.  반면 세나르몽 본인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약 4천명의 시체와 부상병을 전장에 버려두고 도망쳤다고 합니다만, 이 중 상당수는 아마도 보병대간의 충돌 및 이후 이어진 기병들의 소탕전에서 쓰러진 시체들까지 포함된 것일 것입니다.  아무튼 세나르몽 포병대의 이런 획기적인 무브먼트는 나폴레옹마저도 놀라게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듣도보도 못한 '포병 돌격'을 보고 처음에는 아군 포병들 중 일부가 러시아군 쪽으로 투항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전해집니다.  


세나르몽의 분전에 힘입어, 예비대로 있던 뒤퐁 장군의 보병 사단과 기병대들이 달려나가 러시아군을 밀어붙였고, 거기에 대오를 재정비한 네의 사단들도 합류하여, 러시아군은 이제 완전히 좁은 지역에 갇혀 버렸습니다.  특히 지근거리에서 퍼붓는 세나르몽 포병대의 캐니스터는 모든 것을 쓸어버렸습니다.  곧 러시아군은 포격을 피해 프리트란트 시내로 쏟아져 들어갔고, 그 뒤를 네의 병사들이 바짝 뒤쫓았습니다.  러시아군은 완전히 혼란에 빠져, 이제는 조직적인 저항이 불가능해질 정도였습니다.  많은 병사들이 부교와 용케 찾은 여울목을 통해 알레 강을 건너 도주했으나, 수천명의 병사들이 등 뒤에서 날아오는 프랑스군의 포탄과 총탄에 쓰러졌고, 또 그를 피해 강에 무작정 뛰어들었다가 익사해야 했습니다.  베니히센은 용케 말을 타고 여울목을 건너 목숨을 구할 수 있었으나, 적지 않은 러시아군 장군들도 이날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날 프랑스군의 피해는 약 8천명의 사상자인 것에 비해, 러시아군은 약 3만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베니히센의 야전군이 마침내 완전히 궤멸된 것입니다.




(프리틀란트 전투의 나폴레옹입니다.  나폴레옹이 지시를 내리고 있는 대상은 오른 쪽의 우디노 장군이고, 그 사이에 있는 사람이 낭수티 장군입니다.  낭수티와 나폴레옹 사이에 얼굴이 살짝 보이는 사람은 네 원수입니다.  베르네 Horace Vernet 의 작품입니다.)



젖은 바지를 입은 채로 패잔병들을 수습한 베니히센은 완전히 의욕을 상실하고 그대로 말을 동쪽으로 돌려 후퇴했습니다.  러시아 본국으로 향한 것이지요.  지난 반년 동안 나폴레옹을 집요하게 괴롭히던 베니히센은 이렇게 어이없는 전투 한번으로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그는 부하들의 맹비난을 한몸에 받으며 본국으로 향해야 했고, 알렉상드르 1세의 신임을 모두 잃습니다.  이후 알렉상드르는 아우스테를리츠 이후 소원한 사이였던 쿠투조프를 다시 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니히센은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때나 다시 지휘권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프리틀란트 전투에서의 수훈갑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  물론 베니히센의 아마추어적인 작전이 가장 큰 공로(?)를 세웠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당시 나폴레옹은 빅토르 장군의 공로를 가장 높이 평가했습니다.  네의 공격이 무너져 내릴 때, 세나르몽의 포병 돌격을 비롯하여 빅토르 휘하의 예비대가 러시아군을 막아서서 전황을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었지요.  덕분에 빅토르는 여기서 원수의 직위까지 올라갑니다.   하지만 저는 절대적인 열세에서도 침착하게 전선을 유지하면서도 베니히센을 물고 늘어져 나폴레옹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기까지 거의 12시간 동안을 버티어 준 란의 공로가 가장 크다고 생각됩니다.  겉보기에는 화려한 공적이 없지만, 란이 없었다면 아마 베니히센은 재빨리 란의 제5군단에게 타격을 준 뒤 다시 잽싸게 후퇴를 했겠지요.  바로 전의 하일스베르크 전투 http://blog.daum.net/nasica/6862581 에서 같은 상황에 있었던 뮈라가 보여준 형편없는 전황 통제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중세 이후의 쾨니히스베르크의 전경 그림입니다.)



프리틀란트에서 나폴레옹이 거둔 이 일방적인 승리의 소식은 빠르게 쾨니히스베르크까지 전해졌습니다.  여기서 농성을 준비하던 프로이센 지휘관들, 즉 레스토크와 카멘스키는 러시아군이 외곽에서 지원해주지 않는 이상 농성은 무의미하다고 보고 프로이센 왕실 가족들을 이끌고 베니히센의 뒤를 따라 네만 (Nieman) 강을 건너 러시아로 도주했습니다.  약 반년전 베를린에서 도주할 때와 비슷한 모양새였습니다.  곧 이어 쾨니히스베르크에 도착한 술트의 군단은 덕분에 쾨니히스베르크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고, 여기서 항구에 정박한 러시아 화물선 200척을 노획했습니다.  여기에는 나폴레옹의 야전군 전체가 4개월 동안 먹을 수 있는 분량의 식량이 적재되어 있어, 나폴레옹의 마음을 흐믓하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대포와 영국제 머스켓 소총 6만정도 함께 노획했습니다.  다만 단치히 항구를 점령했을 때처럼 많은 포도주와 와인이 발견되지는 않아, 프랑스 병사들은 약간 실망해야 했습니다.  단치히에서는 800문의 대포와 프랑스군 전체의 2년치에 해당하는 막대한 양의 밀 외에도 많은 양의 주류가 발견되어, 포위전에 참여했던 2만명의 병사들이 1인당 1병씩의 와인을 지급받고도 50만병의 와인, 거기에 2만 파인트의 브랜디, 또 같은 분량의 럼주까지 엘빙 (Elbing)의 군수품 창고로 보내졌던 것입니다.




(운명의 네만 강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여기를 건너는 자, 결코 무사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프리틀란트 전투 이후 5일째 되는 날, 뮈라의 기병대가 드디어 틸지트 (Tilsit)에 당도합니다.  틸지트는 네만 (Nieman) 강 남쪽 강변에 위치한 소도시로서, 네만 강을 넘어서면 바로 러시아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네만 강가에 도착한 프랑스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러시아 군대가 아니라 로바노프 (Yakov Lobanov-Rostovsky)라는 이름의 러시아 왕자였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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