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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폐허, 그리고 새로운 시작 - 틸지트 조약 에필로그

by nasica-old 2014.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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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틸지트 조약으로 프랑스와 러시아를 두 축으로 하는 유럽 대륙의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셨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왜 그때 나폴레옹이 폴란드를 독립시키고 러시아를 완전히 밀어 붙이지 않았는지에 아쉬워 (?) 하시는 모양입니다만, 러시아를 유럽 지배의 파트너로 삼은 나폴레옹의 판단이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인도에서 포루스 왕과 싸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나폴레옹은 1807년 2월의 아일라우 전투를 겪은 뒤, 이곳은 자신이 주로 싸웠던 이탈리아나 중부 독일과는 무척이나 다른 환경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특히, 그는 자신이 아끼던 그랑 다르메 (Grande Armee) 병사들의 태도가 아일라우 전투 이후 크게 변한 것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병사들은 아름다운 프랑스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이 초라한 폴란드를 지긋지긋해 했습니다.  아일라우 이후부터는 자신이 병사들을 지나갈 때, "황제 폐하 만세" 대신 "평화 만세"를 외치는 병사들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지요.  나폴레옹 자신이 존경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인도의 북부 경계선까지 진격하여 포루스 왕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은 뒤,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회군한 바 있습니다.  이유는 더 먼 원정도 불사하는 대왕의 계획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의 항명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네만 강을 넘지도 않았는데 병사들의 분위기가 이런 식이라면, 네만 강을 넘어 폴란드보다 더 광활하고 더 황량한 러시아로 진격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나폴레옹도 이제는 돌아서야 할 때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네만 강을 건너면 저꼴 납니다.  나폴레옹도 1807년 이미 그렇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러시아를 완전히 굴복시킬 수 없다면, 러시아와는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어야 했습니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도, 원교근공이라고 해서 가까운 나라는 치고 먼 나라와는 사귄다고 했으니, 먼 러시아와는 우방 관계를 맺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폴란드였습니다. 

프로이센이 차지했던 폴란드 땅이라도 독립을 시키고 그를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완충지대로 삼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건 러시아 및 오스트리아와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신생 독립국 폴란드는 당연히 잃어버렸던 옛 땅을 마저 수복하기 위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차지한 옛 폴란드 땅을 집적거릴 가능성이 컸습니다.  설령 신생 폴란드가 가만 있는다고 해도 폴란드 독립에 자극받은 옛 폴란드 국민들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내에서 끊임없이 소요를 일으킬 것이므로, 러시아나 오스트리아는 폴란드의 독립을 두손 놓고 지켜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특히 러시아에게 폴란드 땅은 매우 소중했습니다.  러시아가 유럽 동쪽 끝에 정말 어렵게 마련한 유럽으로 열린 창문이자 발판이었거든요.  폴란드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10만 이상의 프랑스군이 폴란드에 상주하며 많은 병력과 군비를 소모해야 했는데, 그건 나폴레옹에게는 매우 무의미한 희생이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사실 옹색한 동부 유럽에서 특별히 바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딱 하나, 저주스러운 영국놈들의 상품이 동부 유럽의 항구를 통해 유럽 내부로 들어오는 길을 막아달라는 것이었지요.  이를 위해서라도 러시아와는 원수가 아니라 친구를 맺어야 했습니다.




(지도의 크림색 부분이 신생 바르샤바 공국입니다.  폴란드의 옛수도인 크라코프 Krakow는 처음에는 여전히 오스트리아 소속이었으나, 1809년 벌어진 제5차 동맹전쟁에서 포니아토프스키의 분전에 힘입어 바르샤바 공국이 오스트리아군을 무찌르고 크라코프를 포함한 더 넓은 영토를 수복합니다.   물론 불과 4년만에 다시 털렸지만요.)



이런 어려운 외교적 문제에 대한 나폴레옹의 천재성은 여기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마리 발레프스카에게 (침대에서) 개인적으로 사과를 하고 양해를 구하면서, 프로이센이 차지했던 폴란드 중 일부를 바르샤바 공국 (Duchy of Warsaw)으로 포장하여 반쯤만 독립시킵니다.  그러면서 바르샤바 공작으로는 폴란드인도 아니고 프랑스인도 아니고, 전혀 엉뚱하게도 과거 프로이센의 동맹국이었던 작센 왕 프레드릭 아우구스투스 1세 (Frederick Augustus I )를 선정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마치 프랑스와 바르샤바 공국이 별 관계가 없는 것처럼 된 것이지요.  물론 작센 왕의 폴란드 지배는 형식적인 것 뿐이었고, 바르샤바 공국에서의 권력 서열 제 1위는 파리에서 온 프랑스 대사였습니다.  그러면서 너무 동쪽이라 지키기 어려웠던 동쪽 끝의 비알리스톡 (Bialystok) 지방은 아예 러시아에게 뚝 떼어주기까지 했습니다.  러시아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적절한 뇌물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폴레옹은 지긋지긋한 동부 유럽에 프랑스군을 주둔시키지 않고도, 폴란드를 사실상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병력과 자금을 은행 ATM에서 현금 뽑듯이 뽑아 썼습니다. 

나폴레옹의 이러한 조치들은 러시아와 든든한 동맹을 맺음으로써, 중부 유럽의 관록의 제왕이던 오스트리아를 상병신으로 만들어 놓은 효과도 함께 가져 왔습니다.  제4차 동맹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오스트리아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  제3차 동맹전쟁의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비록 박살이 나기는 했지만, 오스트리아의 웅후한 무장력이 멸절된 것은 아니었고, 오스트리아는 여전히 제국다운 인구와 영토를 가진 잠재적 위협이었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도 프로이센 및 러시아와 싸우면서도 끊임없이 오스트리아에게 이런저런 메시지를 던지며 오스트리아의 중립이 유지되도록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이때 오스트리아가 총동원령을 내리고 반 나폴레옹 전쟁에 뛰어들었다면 나폴레옹도 크게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고, 어쩌면 패배했을 수도 있습니다.  




(불과 2년 뒤인 1809년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실질적으로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오스트리아군을 무시하지 마십시요.)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끝내 중립을 지켰습니다.  이유는 두가지였습니다.  첫번째는 현실적인 것으로서, 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는 달리 상비적인 징집군을 유지하지 않았습니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거든요.  이때문에 카를 대공을 비롯한 군부에서는 '본격적인 무장 동원을 위해서는 좀더 시간이 필요하다' 라며 즉각적인 참전을 반대했습니다.  두번째는 감정적인 것이었는데,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당시 오스트리아를 돕지 않고 이쪽에 붙을까 저쪽에 붙을까를 재며 얌체짓을 했던 프로이센에게, 그때의 앙심을 그대로 되갚아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면 국가간의 외교에도 개인적인 유치한 감정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제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동맹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굳이 오스트리아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러시아 사이의 공세적 군사 동맹 덕분에, 오스트리아는 동서남북 사방에서 프랑스와 러시아에게 포위당한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스트리아 남쪽 방면에는 프랑스 땅이나 다름없는 이탈리아 왕국과 프랑스령 라구사가 있지요.)  




(이건 1812년의 지도입니다만, 사방이 포위된 오스트리아 제국의 신세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사정은 프로이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지난 편에서 다룬 것과 같이, 영토와 인구가 완전히 반토막이 난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그래도 영토가 반이나 남았으니 괜찮지 않을까 라고 하시겠으나, 실제 사정은 그보다 훨씬 참혹했습니다.

일단 이번에 빼앗긴 영토는 프로이센이 개발에 많은 자본을 투자했던 알토란 같은 곳들로서, 이제 그 개발의 수확을 걷어들이려는 상황에서 빼앗긴 것이었습니다.  특히 베스트팔렌 왕국(Königreich Westphalen)이라는 괴뢰국가를 만들어 나폴레옹의 막내 동생인 제롬 (Jérôme Bonaparte)을 왕으로 앉힌 엘베강 서쪽 지대는, 낙후된 프로이센 왕국 내에서도 그나마 가장 산업화가 진전된 선진 지역으로서, 나폴레옹은 그야말로 알짜배기 땅을 빼앗아다 자기 동생에게 준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소싯적 마르세유의 월세방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막내 동생 제롬은 정말 코흘리개였는데, 이제는 왕이네요.)




(라인 연방 내에서의 베스트팔렌 왕국의 영토가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는 현지 보급을 위주로 하는 군대답게 베를린과 포츠담의 왕궁을 포함하여 프로이센 영토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 현금과 귀중품들을 싹쓸이 해가는 위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공식적으로 프랑스군이 징발 및 약탈해간 현금, 예술품, 귀중품, 식량, 군사장비류, 직물 등의 상품류도 막대했고, 프랑스 병사들 개개인도 현지를 철저히 약탈했습니다.  나폴레옹도 포츠담의 프리드리히 대왕 묘소에서 프리드리히의 은제 자명종 시계를 개인적으로 슬쩍 해간 바 있지요.  




(이 그림은 프로이센이 아니라, 1798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프랑스군을 끌어들여 혁명을 쟁취한 시민들이 자유의 나무 (Arbre de la liberte)를 중심으로 축하하며 춤을 추는 동안, 프랑스군 병참 부대가 각종 재물과 보물을 싹쓸이 해가는 장면을 그린 풍자화입니다.  프랑스군을 초대한 취리히 시민들에 대해서도 이럴 정도였으니, 프로이센처럼 거듭된 화친 제의를 거부하고 싸우다 패전한 나라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프로이센은 엄연한 패전국이었으므로, 전쟁 배상금을 물어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사실 프로이센에서 엄청난 양의 현금과 현물을 이미 탈탈 털어간 후였으나, 뻔뻔스럽게도 1억4천만 프랑의 배상금을 추가로 요구했습니다.  이는 현재가치로 대략 2조원에 해당하는 금액으로서, 당시 프로이센의 1.8년치 GDP에 해당하는 거액이었습니다.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이후 오스트리아에게서 받아낸 전쟁 배상금이 4천만 프랑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엄청난 금액이었지요.  프랑스군이 이미 약탈해간 현금과 상품 등을 합하면 프로이센이 빼앗긴 총액은 무려 10억 프랑에 달했는데, 이는 현재 가치로 약 15조원에 해당하는 거액으로서, 프로이센의 13년치 GDP에 해당하는 거액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프로이센은 완전히 망한 셈이었지요. 

거기서 끝나면 다행인게,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 배상금을 다 지불 완료할 때까지, 프로이센 내의 주요 요새와 도시에는 프랑스군이 무려 15만명이나 주둔하게 되어 있었고, 이들의 주둔 비용도 모두 프로이센이 부담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프로이센이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고 전체 GDP의 10%씩을 매년 프랑스에게 무이자 할부로 지불한다고 해도, 전쟁 배상금을 다 갚으려면 무려 18년 간이나 프랑스군이 주둔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국방비 총액이 GDP의 3% 정도입니다.  10%를 매년 배상금 상환에 쓴다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이건 프로이센이 사실상 독립국의 지위를 잃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가혹한 조치였습니다.  




(그림은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이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정리하는 베르사이유 조약을 맺는 독일 사절 요하네스 벨의 모습입니다.  독일에게 가혹한 전쟁 배상금을 지운 것은 이미 나폴레옹 때 있었던 것이지요.  그 이후 1870년 보불 전쟁의 앙갚음을 당하는데....  불과 몇십년 전의 일인데 그 사실을 잊고 다시 독일에게 더 가혹한 배상금을 지운 것은....  인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법이지요.) 




그런데 이런 가혹한 조치가 의외의 결과를 낳습니다.  알거지 신세가 된 프로이센 왕 빌헬름 3세는 반토막 난 나라를 추스리고 배상금을 갚기 위해 국가 재건에 나섭니다.  왕가에 태어났고 예쁘고 똑똑한 와이프를 두었다는 것 외에는 별 재주가 없었던 빌헬름 3세는 이런 재건 사업을 추진할 인재로 (예쁘고 똑똑한 루이즈 왕비의 조언을 받아들여) 전에 해임했던 슈타인 (Karl Heinrich vom Stein)을 다시 등용합니다.   당장 가혹한 빚쟁이 나폴레옹에게 줄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여태까지 했던 방식으로는 불가능했으니까요.  이때 슈타인과 하르덴베르크 (Karl August von Hardenberg)에 의해 시작된 프로이센의 개혁을 슈타인-하르덴베르크 (Stein-Hardenberg) 개혁이라고 부르는데, 이 개혁은 아직 농노제와 신성로마제국의 흔적 등 중세의 잔재에 젖어 살던 프로이센이 본격적인 근대 국가로 탈바꿈하게 된 효시가 되었습니다.  슈타인과 하르덴베르크는 자신들의 특권을 제한하고 깎으려는 개혁에 반대하는 일부 귀족들을 투옥하기까지 하면서, 전제주의에 묶여있던 프로이센의 행정, 교육, 군사, 경제 등의 부문을 개혁했습니다.  가령 농노제의 폐지, 그리고 공직 자리를 출생이 아니라 능력을 기준으로 삼아 임명하여, 능력만 된다면 일반 농민 출신도 공직에 오를 수 있도록 하는 등, 많은 혁신을 이루었습니다.  이들의 개혁은 아래로부터 과격하게 시작된 프랑스의 경우와는 달리, 위로부터 시작된 국가 권력 중심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군인이자 외교관인 포조 디 보르고 (Carlo Andrea Pozzo di Borgo)는 제4차 동맹 전쟁에서의 프로이센의 몰락을 '파멸에 대한 걸작'이라고 부른 바 있었는데, 창조는 파괴에서 시작된다더니, 이 위로부터의 혁명은 결국 프로이센에 의한 독일 통일이라는 위업을 낳는 계기가 됩니다. 





(베를린에 있는, 슈타인의 개혁안을 기념하는 부조입니다.)



하르덴베르크와 그의 개혁파는 리가 각서 (Rigaer Denkschrift, 영어로는 Riga Memorandum, 하르덴베르크는 나폴레옹에 의해 공직에서 쫓겨난 뒤 현재 라트비아 수도인 리가에서 잠시 지냈습니다)에서, 다음과 같이 명기하여 나폴레옹의 예를 들며 '위로부터의 혁명'이 꼭 필요함을 역설했습니다.  저는 나폴레옹과 프랑스 대혁명의 관계를 매우 정확하게 관찰 요약한 뛰어난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나폴레옹과 그의 총신들조차도 그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더라도 혁명의 원칙이라는 권력에는 복종한다. 나폴레옹이 휘두르는 무쇠같은 압제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그 원칙의 본질에는 대체적으로 따르고 있다.  최소한 그는 억지로라도 그런 원칙들을 지키는 것처럼 보여지도록 꾸미고 있다."

이런 개혁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은 매우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때가 19세기 초였던 만큼, 이들의 개혁은 일정 수준을 넘지 못했습니다.  또한 결국 개혁의 목적은 세수 확보였는데, 워낙 귀족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는 바람에 귀족들에게 불리한 토지세 (foncier tax)는 도입하지 못하고 소비세를 강화하고 소득세를 도입하여 국민들을 쥐어 짰습니다.  특히 소비세는 귀족들보다는 서민들에게 크게 불리한 제도였으므로, 프로이센의 서민들은 나폴레옹 덕분에 매우 암울한 시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은 기세등등한 부자들보다는 힘없는 서민들에게서 뜯어내는 것이 훨씬 쉽거든요.  서민들은 저항하지 않으니까요.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입니다.  그는 틸지트 이후에도 여전히 개혁에 소극적이었고 우물쭈물하는 태도여서, 슈타인과 하르덴베르크는 이 소심한 왕을 설득하느라 많은 에너지를 낭비해야 했습니다.)



프로이센의 서민들만 고생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프로이센 왕 빌헬름 3세는 평생 이 치욕스러운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렇쟎아도 소심하고 자신감 없는 태도가 더욱 수그러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동료 같은 아내였던 루이즈 왕비마저, 나폴레옹에게 쫓기며 피난다니느라 고생을 해서인지 불과 3년 후인 1810년 병사하고 말아, 그를 더욱 낙담하게 만들었습니다.  루이즈 왕비가 전쟁 당시 가장 고생을 했던 때는 1807년 프리틀란트 전투 직후 다부의 추격을 피해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리투아니아의 메멜란트로 허겁지겁 피난을 떠날 때였습니다.  이때 임신 중이던 연약한 루이즈 왕비조차 제대로 된 집도 아닌 헛간 같은 곳에서 자야 했고, 음식은 커녕 진흙투성이 물로 목을 축여야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훗날 비스마르크와 함께 독일을 통일하고 초대 독일 제국 황제가 되는 빌헬름 1세 (Wilhelm Friedrich Ludwig)는 1797년 생으로서 당시 10살의 나이였는데, 이 피난길에 아마 어머니와 동행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때 고생하던 기억이 훗날 나폴레옹 3세를 포로로 잡고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선포식을 할 때의 짜릿함으로 다가왔을 것 같네요.  빌헬름 1세는 이미 1815년에 (명목상이겠습니다만) 소령의 계급으로 블뤼허 장군 밑에서 워털루 전투에도 참전한 바 있습니다.





(진짜 원조 카이저 빌헬름 1세이십니다.  어릴 때 나폴레옹과 싸웠던 양반이 노년에는 이렇게 기차를 타고 전보를 보내고 사진을 찍고 하다니, 19세기 유럽의 기술 발전상을 다시 한번 실감나게 해주네요.)






(거울의 방에서 통일 독일 제국이 선포됩니다.  중앙에 흰 군복을 입은 양반이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입니다.  이들은 불과 50년도 안되어 독일 제국이 바로 이 방에서 전혀 다른 성격의 서류에 서명을 하고 해체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어마어마한 빚더미에 오른 프로이센은 결국 저 배상금을 다 갚을 수 있었을까요 ?  당연히 못 갚았습니다.  나폴레옹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요.  자신이 참빗으로 빗질하듯 싹싹 닦아먹은 프로이센에 뭐가 남았다고 그런 큰 돈을 마련하겠습니까 ?  그래서 나폴레옹은 그 프로이센에 대한 채권 중 못 받아낼 것이 뻔한 4천3백만 프랑 어치를 신생 바르샤바 공국에 2천1백만 프랑, 즉 50%가 넘는 할인률로 강제로 떠넘겨 버렸습니다.  일석이조라고, 프로이센을 재기불능 상태로 밀어넣고 실제 돈은 폴란드에서 갈취하는 일타쌍피의 신공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로 인해 신생 바르샤바 공국을 재정 공황 상태에 빠져 뜨렸고, 폴란드 인들은 심각한 인플레와 과중한 세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미녀를 팔아 세운 나라 - 발레프스카와 바르샤바 공국 http://blog.daum.net/nasica/6862573 참조)  결국 그 채권은 1813년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전하면서 휴지조각이 되어버렸지요.

속물인 제가 좋아하는 돈 이야기를 더 해보지요.  나폴레옹은 빛나는 승리를 거둔 후에는 병사들과 장교들에게 두둑한 포상금을 뿌리곤 했습니다만, 이번의 폴란드 작전은 빛나는 승리라고 하기엔 다소 검연쩍었는지 병사들에 대한 포상은 다소 빈약했습니다.  아일라우 전투 직전에 벌어졌던 오스트롤렌코 (Ostrolenko) 전투에서 부상당한 병사들 모두에게 20프랑짜리 나폴레옹 금화 1개씩을, 역시 부상당한 장교들에게는 5개씩을 선물한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틸지트 조약을 맺은 후에는 기분이 매우 좋아졌는지 수천명의 병사와 장교들에게 연금이 따라오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뿌렸고, 폴란드 장군들과 장교들에게 많은 금전적 포상을 내렸습니다.  가령 북부 이탈리아에서 최초로 폴란드 연대를 편성하여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작전을 도왔던 다브로프스키 (Jan Henryk Dabrowski) 장군은 100만 프랑에 상당하는 자산을 하사받았습니다.  또 파리로 돌아온 뒤에는 그의 원수들과 장군들에게도 1,100만 프랑의 하사금을 내려 치하했습니다.




(다브로프스키 장군입니다.  폴란드 국가는 Mazurek Dąbrowskiego 인데, 이는 다브로프스키 마주르카 라는 뜻입니다.  이 노래는 원래 다브로프스키가 조직한 이탈리아 방면 폴란드 연대원들이 부른 노래로서, 가사 안에 이 다브로프스키 장군의 이름을 거명하며 '우리가 있는 한 폴란드는 아직 망한 것이 아니다'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약간 검연쩍게도, 보나파르트의 이름도 가사에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랑 다르메 병사들은 예전처럼 진정으로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지 않았습니다.  아일라우와 하일스베르크의 끔찍한 기억들도 있었지만, 가장 큰 당면 이유는 바로 귀국이었습니다.  저 위에 언급한 것처럼, 프로이센이 최소한 20년간 갚을 방법이 없는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무려 15만명의 병력이 프로이센에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이는 그랑 다르메 전체의 70% 정도 되는 엄청난 숫자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유지비가 많이 드는 그랑 다르메를 이런 방식으로 프로이센의 비용으로 유지하면서 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다른 마음 먹지 못하게 견제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었습니다.  그 방법은 천재적이었으나, 정작 1년 넘게 아름다운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리운 가족을 만나지 못하는 병사들의 심정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조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앞에 놓인 것은 머지 않아 '독일 땅은 천국이었다' 라고 추억할 정도의 지옥인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었습니다.  




(스페인에서 프랑스 병사들은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전쟁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태까지 보신 전쟁화와는 다르게, 저 오합지졸 스페인군 속에서는 민간인들은 물론이고 여자까지 있다는 것 보셨습니까 ?   이거슨 본격 헬 게이트 오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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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드린 대로, 당분간 나폴레옹 이야기는 휴재합니다.  이것저것 많이 읽고 충전해서 좀더 충실한 내용을 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 사이에는 가끔씩 소소한 음식 이야기나 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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