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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황제들은 웃고 왕비는 눈물 짓는다 - 틸지트 조약

by nasica-old 2014.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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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베니히센이 아일라우나 하일스베르크에서 그랬던 것처럼 후퇴하던 중의 뜻하지 않은 승리를 노렸다가 프리틀란트에서 밑천까지 탈탈 털리고 네만 강까지 후퇴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5만으로 시작했다가 두발로 서서 후퇴한 것은 2만 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전멸에 가까운 참패였습니다.  실제로 콧대 높은 베니히센은 차르의 친동생이자 근위대 사령관인 콘스탄틴 대공 (Grand Duke Constantine)에게 편지를 써서, "이건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었다...  폐하께 어떤 보고를 드려도 상관없으니 이 도살을 멈출 수 있게만 해달라" 는 참담한 메시지를 전해야 했습니다.  베니히센이 콘스탄틴 대공에게 편지를 쓴 이유는 콘스탄틴 대공이 대불 화친파의 수장 격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콘스탄틴 대공의 초상화입니다.  그림을 보면 정말 형인 알렉상드르와 많이 닮았네요.  콘스탄틴 대공은 전쟁 초기부터, 이 전쟁은 외국인들의 이익을 위해 러시아가 공연한 피를 흘리는 것이라며 전쟁에 회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러시아 전체가 굴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니히센이 하계 작전을 시작할 때 가지고 있던 10만의 러시아군 모두가 프리틀란트 전투에 참전했던 것도 아니었고, 네만 강변에는 로바노프 왕자가 끌고 온 예비 병력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또, 변변찮은 패잔병이라고는 해도, 레스토크 장군의 지휘 하에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도망쳐 온 프로이센군도 2만5천이나 되었으므로, 러시아는 당장에라도 다시 나폴레옹과 전면전을 벌일 능력이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뮈라의 기병대가 폴란드-러시아의 자연 국경인 네만 강에 이르자,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 로바노프 왕자가 건넨 것은 도전장이 아니라 화친 요청서였습니다.  왜 동구의 대제국 러시아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나폴레옹과의 화친을 택했을까요 ?

실은 질문이 잘못된 것입니다.  좀더 정확한 질문은 왜 러시아가 처음부터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뛰어들었는가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돌이켜 보면 러시아가 굳이 대불 동맹 전쟁에 뛰어들었던 이유는 프랑스가 1797년 오스트리아가 캄포 포르미아 조약을 맺으면서 베네치아 및 아드리아 해 (Adriatic Sea)의 베네치아 영토를 프랑스 세력 밑에 두면서 동부 지중해 및 발칸 반도에 한발을 걸쳤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은 러시아의 파벨 1세 (Pavel I)가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빼앗기 위해 침을 발라놨던 곳이었거든요.  보통 파벨 1세가 대불 동맹 전쟁에 뛰어든 이유가 앙시앵 레짐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왕정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어쩌고...라고들 하지만 그건 명목상의 이유일 뿐입니다.  알고보면 우아한 유럽 왕가나 동네 조폭들이나 그런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억울하게 칼침을 맞은 옆동네 점박이 형님과의 의리의리 어쩌고 하는 것에는 무관심하지만, 자신의 이익에 어긋나는 것에는 대뜸 칼을 뽑아들거든요.  특히 부단히 부동항을 구하기 위해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가던 러시아에게는, 오스트리아 뿐만 아니라 프랑스도 아드리아 해에 간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에 심기가 극히 불편해졌고, 특히 나폴레옹이 이집트로 가는 길에 지중해의 요충지 말타 섬을 정복한 것에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여기서 다시, 나폴레옹이 가장 신뢰했으나 정작 결정적인 배신의 주인공이 되었던 마르몽의 정식 호칭이 Duc de Raguse, 즉 라구사 공작이라는 점을 상기하십시요.  라구사는 현재의 두브로니크, 즉 아드리아 해에 면한 크로아티아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입니다.)


(아드리아해의 보석이라는 두브로니크입니다.  전에 TV에서 보니, 저 도시의 어떤 주민이 자기 집안은 대대로 여기 토박이인데, 할아버지는 오스트리아 사람이었고, 아버지는 유고 사람, 자기는 크로아티아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더군요. 아마 약간은 과장된 그 이야기가 이 도시의 역사를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도중에 제2차 무장 중립 동맹이 형성되고, 넬슨 제독의 함대가 그를 격파하기 위해 덴마크를 들이치고, 파벨 1세가 암살되는 등 많은 변화를 겪기는 했으나, 결국 알렉상드르 1세의 러시아는 파벨 1세 때보다도 나폴레옹과 더욱 격렬한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그 주된 이유는 2가지였습니다.  첫번째는 오스만 투르크, 두번째는 영국이었습니다.

애초에 나폴레옹은 괜한 이집트 원정 덕분에 투르크와 적대 관계로 시작했으나, 이집트를 포기한 이후로는 세바스티아니 장군을 이스탄불에 파견하여,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을 원하던 오스만 투르크의 셀림 3세를 적극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그랬던 이유도 크게 2가지, 러시아와 영국을 견제하기 위함이었지요.  그리고 영국은 온갖 감언이설과, 그리고 그보다 효과적인 금화를 공식적/비공식적으로 뿌려대며 러시아의 대불 동맹 전쟁이 지속되도록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무엇보다 러시아의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은 농노제에 기반한 농업으로서 영국에 곡물을 수출하고 또 영국제 공산품을 수입해야만 하는 입장이었으니, 귀족 사회였던 러시아가 영국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중해와 흑해는 두개의 좁은 해협으로 분단되어 있습니다.  이스탄불 바로 앞에 있는 흑해 쪽 해협이 보스포러스 해협이고, 에게해 쪽 해협이 다다넬즈 해협입니다.  다다넬즈 해협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헬레스폰트 해협이라고 불렸지요.  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고대 시절부터 수많은 민족과 왕조들의 투쟁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다다넬즈 해협 북안을 이루는 저 긴 반도가 갈리폴리 반도로서, 약 100년 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투르크와 영국은 다시 한번 저기서 피튀기는 대결을 벌입니다.  결론은 또 다시 오스만 투르크의 승리...  다시는 오스만 투르크를 무시하지 마라 !)


지만 프리틀란트 전투 즈음해서, 이런 대불 전쟁 이유들이 거의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먼저, 영국의 행동이 러시아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실망스러웠습니다.  이미 여러번 언급했듯이 당시 러시아는 나폴레옹과의 전쟁 말고도 발칸 반도 쪽에서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때 자칭 혈맹이라는 영국은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여 오스만 투르크를 압박해주기로 했지요.  그러나 1807년 2월~3월, 덕워쓰 (Sir John Duckworth) 제독이 이끈 영국 지중해 함대는 이스탄불 항구 내에 돌입하여 투르크 함대를 공격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거의 형식적인 무력 시위만 보여주고는 그냥 스르르 물러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영국 해군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 러시아가 격분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 해군상인 그렌빌 경 (Thomas Grenville)까지도 맹비난했으나, 덕워쓰 제독도 할 말은 있었습니다.  해안포가 무려 500문 넘게 빽빽히 들어선 항구로 진입하여, 12척의 군함이 만반의 준비를 갖춘 오스만 투르크 해군과 교전하라니, 그건 아무리 영국 해군이라고 해도 자살 행위에 가까왔거든요.  덕워쓰 제독은 지상군과의 협동 작전 없이는 무모한 작전에 자신의 함대를 밀어 넣을 수 없다며 무의미한 희생을 거부했습니다.  이때의 작전에서 영국 해군은 유명한 650mm짜리 구경의 '다다넬즈의 거포'가 쏘는 300~800 파운드짜리 대리석 포탄에 얻어맞아 28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발트 해에서 상륙 작전을 펼쳐 나폴레옹의 후방을 끊겠다고 큰소리 치던 영국은 단치히 함락조차 저지하지 못하는 등, 막상 전투 현장에 나서면 지나치게 몸을 사리며 '저게 진짜 혈맹인가 아니면 입으로만 혈맹인가'를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영국 해군은 확실히, 러시아나 프로이센이 원했던 적극적인 연안 작전을 매우 꺼렸는데, 이는 자국 해군에게 '큰' 희생이 요구된다는 이유였지요.  그러나 수만명의 병사들을 나폴레옹의 대포밥으로 만들어야 했던 러시아 등의 동맹국이 보기에, 이런 태도는 정말 정 떨어지는 얌체짓이었습니다.




(덕워쓰 제독입니다.  당시 상황은 부산포로 진격하라고 선조에게 재촉받던 원균의 처지와 매우 비슷했습니다.  덕워쓰 제독은 원균과 달랐던 점은 '자신은 할 수 있다'라며 허풍을 치지도, 남을 모함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당당히 그런 부당한 요구를 거절했다는 점이었지요.)




(다다넬즈 해협을 강행 돌파하는 덕워쓰 제독 휘하 영국 지중해 함대의 모습입니다.)




(이 거포가 바로 1807년 덕워쓰 제독의 지중해 함대에 대리석 포탄을 쏘아 28명의 사상자를 낸 다다넬즈의 거포 실물입니다.  이 거포들은 1464년에 주조된 것인데, 거의 350년이 흐른 뒤에도 실전에 투입된 것이지요.  이 거포들은 1866년 오스만 투르크가 국빈 방문 때 빅토리아 여왕에게 선물한 것으로서, 지금은 영국 넬슨 요새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영국의 태도가 준 실망은 그 뿐만 아니었습니다.  영국의 당시 최대 관심은 사실 군사적인 것보다는 상업적인 것이었습니다.  즉, 프랑스의 해양 무역을 철저히 봉쇄하여 영국제 상품이 전세계를 지배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는데, 그 도가 좀 지나쳤습니다.  프랑스 항구에서 출항하는 러시아 화물선까지도 프랑스에 대한 봉쇄조치를 어겼다는 이유로 닥치는 대로 나포했던 것입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당시 무역 전쟁에 대해서는 황금과의 전쟁 - 대륙 봉쇄령 http://blog.daum.net/nasica/6862566 참조)  또, 러시아가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뛰어들 때 영국은 전쟁 자금이라면 아낌없이 대출해주기로 약속했었으나, 러시아가 요구한 500만 파운드 (현재 가치로 대략 1조7천억원)의 차관을 '신용 불량'을 이유로 거부하여 러시아에게 모욕감을 주었습니다.  하긴, 당시 러시아가 원했던 500만 파운드라는 거금은 당시 나폴레옹 전쟁으로 금태환 정지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쓸 정도로 재정 파탄 위험에 시달리던 영국 정부가 들어줄 수 있는 요구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러시아가 나폴레옹과 싸워야 했던 두번째 이유, 오스만 투르크의 상황도 많이 변했습니다.  당시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셀림 3세가 추진했던 부국 강병을 위한 개혁의 핵심은 니잠므 제디드 (Nizam-ı Cedid)라는 유럽식 신식 군대의 양성이었는데, 이에 대해 반발하던 기득권 세력인 전통적 노예 군대인 예니체리 (Janissary) 부대가 외세 척결의 기치를 앞세워 마침내 1807년 5월 29일, 프리틀란트 전투 약 10일 전에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결국 셀림 3세는 강제 퇴위되었고, 뒤이어 암살되었습니다.  또한 셀림 3세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여 오스만 투르크의 친프랑스 정책을 이끌어낸 세바스티아니 장군은 새로 등극한 무스타파 3세 (Mustafa III)에 의해 프랑스로 추방되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개혁을 하려면 기득권 세력과의 목숨을 건 대결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 세력도 기득권을 지키려고 목숨을 걸고 저항하거든요.  그림은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비명에 가신 셀림 3세의 초상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러시아는 굳이 프랑스와 혈투를 계속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준다더니, 때마침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베니히센의 러시아군이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버려, 알렉상드르 1세로 하여금 That's enough ! 를 외치게 한 계기가 된 것이지요.  물론 계속 싸워야 할 이유도 있었습니다.  가령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이전부터, 그리고 불과 몇달 전인 1807년 4월 바르텐슈타인 (Bartenstein) 에서 다시 동맹 조약을 맺고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맹세를 주고 받은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3세 (Friedrich Wilhelm III)와의 의리가 그 대표적인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런 의리의리는 유럽 왕실이나 동네 조폭들이나 이익 앞에서는 한낱 종이쪼가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편, 나폴레옹은 애초부터 러시아와 싸울 의사가 전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위대함은 한낱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천재성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유럽의 질서와 평화를 위한 파트너로서 러시아가 꼭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이번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가령 프로이센의 빌헬름 3세에 대해서는 전쟁 발발 이전부터 무시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고,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는 계속 공공연한 조롱과 비웃음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알렉상드르 1세에 대해서는 전혀 그런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알렉상드르에게는 '지 애비를 죽인 후레자식'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점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발레프스카를 앞세운 폴란드인들이 나폴레옹에게 독립을 바라며 무제한 충성을 맹세하는데도, 폴란드의 독립에 대해서는 끝까지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는 모두 러시아의 짜르 알렉상드르에 대한 노골적인 구애였던 것입니다.   훗날 1812년 비극의 러시아 원정을 하는 중에도 나폴레옹은 러시아 농노제 폐지를 선언하지 않았는데, 이는 끝까지 알렉상드르와의 화친을 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는 싸워서 무릎꿇릴 상대가 아니라 동맹을 맺을 상대라고 정확하게 판단했던 것이지요.

이런 배경 하에 6월 21일 러시아가 휴전을 제의하자, 나폴레옹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보통 이런 휴전 회담은 방금 전까지 총칼을 맞대던 사이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 승자와 패자간의 조롱과 원한 등 복잡한 감정이 섞일 수 밖에 없으므로 팽팽한 긴장감이 도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틸지트 회담은 분위기가 매우 달랐습니다.  승자인 나폴레옹 측이 워낙 살갑게 나왔고 또 당시 나폴레옹이 워낙 유명한 거물이다보니, 패자인 알렉상드르 본인부터가 이 위대한 프랑스 황제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서 어린 아이처럼 안달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두 황제 사이의 회담을 준비하던 프랑스-러시아 양군 장교들 사이도 매우 화기애애했다고 합니다.




(저 그림 속에는 천막에 알렉상드르를 뜻하는 A자만 보입니다만, 당시 기록에 따르면 N자와 A자가 교묘히 결합된 모노그램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 두 황제의 역사적인 만남은 6월 25일 아침, 네만 강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틸지트는 네만 강 남안에 위치한 도시로서 나폴레옹이 정복한 프로이센 영토에 있었습니다.  즉, 틸지트는 프랑스군의 홈 그라운드였기 때문에, 알렉상드르에 대한 예우로서 중립 지대인 네만 상 한복판에 보트와 판재를 이용해서 급조한 뗏목 위에서 두 황제가 동등한 자격으로 만나도록 나폴레옹이 배려한 것입니다.  뗏목이라고는 해도, 프랑스군 내의 전직 목수와 재단사 등 숨은 재주꾼들이 총동원되어 온갖 휘장과 꽃다발로 화려하게 장식된 것이었습니다.  눈에 띄는 장식물은 뗏목 전면을 덮은 휘장에 수놓은 N자와 A자가 서로 엉킨, 나폴레옹과 알렉상드르의 화합을 뜻하는 결합 문자 (monogram) 였습니다.  또 이 뗏목을 치장하는 프랑스군 병사들도 이 회담만 잘 끝나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고 드디어 아름다운 프랑스로 돌아간다며 기쁜 마음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먼저 뗏목에 도착하여 이어서 도착한 알렉상드르를 맞았는데,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했다고 합니다.  알렉상드르는 지위에 맞는 화려한 러시아 군복 차림이었고, 나폴레옹은 트레이드 마크가 된 수수한 회색 코트와 삼각모 차림이었지요.  뗏목 위에는 큰 천막으로 만든 방이 2개 있었는데, 하나는 두 황제들의 단독 회담을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양측 수행원들을 위한 자리였습니다.  이 독방에 들어가 한참 동안을 이야기한 두 황제들이 무슨 말을 주고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두 황제 모두가 매우 만족했다는 것입니다.




(두 황제가 서로 포옹하는 모습이 그려진 이 메달은 당시 틸지트 조약을 환영하며 만들어진 것입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부적절"해 보이네요.)




나폴레옹 자신의 이야기에 따르면, 알렉상드르는 "폐하, 저도 영국을 폐하만큼이나 증오합니다.  영국과의 전쟁에 있어서 저는 폐하의 편을 들겠습니다." 라고 말했고, 자신은 "그렇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 셈이고 이제 평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 대화가 틸지트 회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러시아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영국에 대한 대륙 봉쇄령에 참여하고, 대신 프랑스는 러시아에게 이런저런 혜택을 베풀어주는 것이 틸지트 조약의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그 혜택이라는 것도 사실 프랑스가 자기 주머니를 털어서 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별 활약은 없었지만, 대불 동맹 전쟁에 참전 중이던 스웨덴을 러시아가 침공하여 스웨덴의 영토이던 핀란드를 꿀꺽해도 좋다는 양해와, 장차 오스만 투르크를 러시아가 두들겨 팰 때 프랑스는 별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으로서는 어차피 자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오스만 투르크가 어떤 꼴을 당하든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렇다고 러시아가 드넓은 투르크 땅을 다 차지하고 더욱 강력해지는 것은 원치 않았으므로, 오스만 투르크와는 적정한 선에서 전쟁을 끝내도록 알렉상드르를 설득했습니다.  대신 프로이센이 두 차례에 걸친 폴란드 분할에서 차지한 폴란드 영토 중 상당 부분을 러시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알렉상드르로서는 이보다 더 신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전쟁에 진 것은 자기인데, 영토가 훨씬 넓어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를 대하는 나폴레옹의 태도는 승자의 거만함은 커녕, 소탈하고 친절하면서도 정말 나중에 위인전에 나올 것 같은 대영웅의 기상이 뿜어져 나오고 있어서 알렉상드르는 나폴레옹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틸지트에서 알렉상드르와 만나는 나폴레옹의 모습입니다.  틸지트 회담이라고 해서 하루 이틀에 끝난 것이 아닙니다.  두 황제는 10여일을 같이 보내며 서로 식사 초대를 하고, 산책을 하고, 부대 사열을 하거나 들판에서 말을 달리기도 하면서 우정을 쌓았습니다.)




여러분은 수백년의 전통을 가진 정통 왕족 집안의 아들과,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자수성가한 사람이 동등한 자격으로 회담에 임하면 어느 쪽이 꿇릴 것 같습니까 ?  아마 상황에 따라 또 개인 성격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틸지트 회담에서는 나폴레옹의 카리스마와 능수능란함에 알렉상드르가 압도당하다 못해 완전히 빠져들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알렉상드르는 고작 30세의 젊은이였고 궁정에서 곱게 자랐기 때문에, 거친 경험이라고는 자기 아버지가 신하들에게 암살당하는 것에 협조 또는 방조한 정도였습니다.  그에 비해 나폴레옹은 38세의 한창 나이로서, 정말 산전수전을 다 겪고 자기 힘으로 마르세유의 초라한 월세방에서 파리 튈르리 궁전으로 이사한 실력파였습니다.  더군다나 알렉상드르는 불과 몇년 전에 자기 아버지를 죽이는데 협조했다는 주홍글씨가 새겨진 인물로서, 그에 대한 컴플렉스가 좀 있는 소심한 젊은이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첫 만남에서 알렉상드르가 늑대같은 신하들에게 둘러싸인, 총명하지만 순진하고 유약한 성격의 군주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그는 회담 내내 아버지 혹은 맏형같은 인자한 태도를 보이며, 교육을 잘 받아 프랑스 원어민 같은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이 러시아의 젊은 짜르를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알렉상드르로서도 자신을 때려눕힌 전설적 영웅이 자신에게 너무나도 친절히 대해주며 이런저런 선물을 안겨주는데 아마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 회담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증언이 하나 있습니다.  회담을 거의 마치고 텐트에서 나오는 두 황제가 나누는 대담 중, 프랑스측 수행원인 사바리 (Savary) 장군이 듣고 남긴 부분이 그것입니다.  그때 사바리 장군이 들은 부분은 나폴레옹이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난 한 침대에서 둘이서 밤을 보낸 경우가 많소.  하지만 셋이서 그런 적은 한번도 없다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는 향후 프랑스와 러시아의 동맹에 있어서 오스트리아의 입장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묻는 알렉상드르의 질문에 대한 나폴레옹의 답변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황제들이 공식 회담에서 나누기에는 다소 상스러운 농담일 수도 있겠으나, 사바리의 증언에 따르면 그 말을 듣고 알렉상드르는 활짝 웃으며 매우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하긴, 유럽을 정복한 영웅이 오스트리아는 젖혀 두고 자신과 공동 통치하겠다고 하는 판국이니 입이 귀에 걸리는 것이 당연했겠지요.

알렉상드르는 회담 이후 "나는 나폴레옹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회담을 시작한지 1시간도 안되어, 그 모든 것이 꿈결처럼 사라져 버렸다." 라고 말하며 새로 얻은 강력한 동맹에 대해 대만족을 표시했습니다.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조세핀에게 편지를 쓰며 "알렉상드르와의 회담이 매우 즐거웠고, 알렉상드르는 흔히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똑똑한 젊은이" 라며 만족감을 표했습니다.  이 첫 회담이 아니라 10여일 간 틸지트에 머물며 알렉상드르와 더 대화를 나눈 뒤의 이야기지만, 조세핀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런 말까지 써놓은 것을 보면 확실히 회담 내내 알렉상드르는 나폴레옹이라는 거물에게 휘둘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향후 오스트리아와 내가 다시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면, 알렉상드르가 내 밑에서 군단 하나를 직접 지휘해보도록 권했소.  내 밑에서 병법을 배울 수 있도록 말이오."

이렇게 두 황제가 희희낙낙하며 영원할 것 같은 우정을 쌓는 동안, 그런 분위기에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게 전전긍긍하는 남자도 있었습니다.  바로 프로이센의 빌헬름 3세였습니다.  알렉상드르에게서 버림받은 빌헬름 2세는 그야말로 좌불안석, 사이버 수사대에 불려 나온 악플러 심정이었습니다.  그래도 의리가 살아있던 알렉상드르의 주선으로 프랑스와 별도의 휴전 협정을 맺고 나폴레옹 앞에 나온 빌헬름 3세는 나폴레옹으로부터 준엄하면서도 조롱에 가득찬 비난과 문책을 듣는 굴욕을 당해야 했습니다.  애시당초, 나폴레옹이 그리는 유럽의 미래에 3류국가 프로이센이 차지할 자리는 없었거든요.  그래도 명색이 주권국가의 국가원수 3명이 모인 자리인데, 회의가 끝나고 일어설 때 나폴레옹은 살가운 표정으로 알렉상드르에게 저녁 식사에 초대를 하면서도 빌헬름 3세는 완전히 투명인간 취급을 하며 무시하는 노골적인 모욕을 주기도 했습니다.

틸지트 회담은 초기 회담만 뗏목 위에서 이루어졌고, 이어진 후속 회담과 실무진들 간의 긴 협상 등은 모두 틸지트 시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나폴레옹은 알렉상드르에 대한 예우 중 하나로서, 프랑스군이 점령한 틸지트의 절반을 중립 지대로 비워주고, 그를 다시 삼등분하여 자신과 알렉상드르, 그리고 빌헬름 3세가 각각 한구역씩을 차지하고 거기에 거주하며 십여일에 걸친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빌헬름 3세는 어느 제분업자의 저택을 처소로 정했으나, 두 황제의 당당하고 즐거운 모습이 보기 싫어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굴욕 속에서도 빛난 루이즈 왕비의 모습입니다.  이 왕비는 젊어서 죽었으므로 독일 국민들의 기억에 영원히 젊고 기품있는 모습으로 기억되었습니다.   그녀의 검소하면서도 용기있고 지성적인 언행은 훗날 나찌에 의해 참된 게르만 여성의 표상으로 우상화되어 나찌 선전에도 활용되는 '봉변'을 당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이센의 구겨진 자존심을 살려준 것은 루이즈 (Luise Auguste Wilhelmine Amalie) 왕비였습니다.  빌헬름 3세의 젊고 아름다운 왕비인 루이즈는 원래부터 그 미모 뿐만 아니라 검소한 생활과 애국심, 그리고 지성미로서 고리타분한 프로이센 왕궁의 빛과 같은 존재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루이즈는 당시 임신 중이었는데, 나폴레옹의 침공으로부터 베를린을 떠나 쾨니히스베르크로 피난올 때도 고생을 했지만, 특히 프리틀란트 전투이후 쾨니히스베르크를 버리고 지금의 리투아니아 지역인 메멜란트(Memelland)로 피난을 갈 때는 정말 음식도 물도 없이 헛간에서 웅크리고 자야 하는 등 많은 육체적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임신 중에 그런 시련을 겪은 때문인지 루이즈는 당시 몸이 안 좋은 상태였는데, 두 황제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며 프로이센의 영토를 반토막 내려는 것에 경악한 빌헬름 3세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루이즈를 틸지트로 불러 들입니다.  젊고 아름답고 기품있는 루이즈 왕비가 회담에 참석하면,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워져서 프로이센에게 좀더 유리한 조건의 조약을 맺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마리 발레프스카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나폴레옹이 기품있는 유부녀 전문 킬러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루이즈 왕비를 부른 빌헬름 3세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궁금합니다.  




(틸지트에서 자리를 함께 한 나폴레옹, 알렉상드르 1세, 루이즈 왕비, 그리고 빌헬름 3세입니다.)




아무튼 루이즈 왕비는 그런 남편에게 "프로이센은 멸망하더라도 명예롭게 멸망해야 한다" 라는 마치 무협지에 나오는 여걸 같은 답변을 했지만, 결국 틸지트까지 나와 나폴레옹을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전쟁 전부터 나폴레옹을 괴물이라 부르며 반프랑스 정서 형성에 앞장을 섰었고, 그 사실을 잘 아는 나폴레옹 역시 마치 루이즈 왕비와 알렉상드르 사이에 부적절한 관계라도 있었다는 듯한 소문을 퍼뜨리며 그녀의 명예에 흠집을 내려 노력한 바 있었습니다.  그런 두 사람이 한명은 정복자로서, 한명은 청원자로서 마주 하게 되었는데, 루이즈는 비록 애걸하는 입장이었으나 기품을 잃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남편의 임시 행궁을 방문한 나폴레옹을 맞아, 눈물을 글썽이며 나폴레옹에게 자비를 호소했는데, 나폴레옹조차 이 아름다운 왕비의 호소에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해야 했습니다.  마치 자신이 악당이라도 된 듯한 상황에 난처해진 나폴레옹이 왕비의 옷차림에 대해 화제를 돌리며 드레스의 소재가 인도산 면직물인지 크레이프 견직물인지 물었는데, 루이즈는 단호하게 "이런 엄숙한 순간에 넝마조각에 대해서 논해야 하겠습니까 ?" 라며 다시 화제를 프로이센의 영토로 돌리는 용기를 보여 나폴레옹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여자에게 휘둘리는 바지저고리가 아니였습니다.  그건 이미 사랑하는 마리 발레프스카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의 독립을 불허한 것에서 증명이 되었지요.  루이즈 왕비의 모든 청원은 단호하게 거절되었습니다.  나중에 나폴레옹은 조세핀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로이센의 왕비는 정말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녀의 청원을 들어주는 신사 노릇을 하기에는 그 비용이 너무 크다" 라고 써서, 내심 루이즈 왕비에게 흔들렸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프로이센은 영토 중 가장 비옥하고 부유한 지역을 빼앗기고 반토막이 나고 말았습니다.  알렉상드르가 옹호해줘 실레지아의 대부분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대신 비스툴라 강 동쪽은 러시아에게, 그리고 엘베 강 서쪽은 프랑스의 위성국가들, 즉 작센과 새로 만들어진 베스트팔렌 (Westphalen) 왕국에 빼앗겨 영토와 국민의 숫자가 절반으로 줄어든 약소국이 되어 버렸지요.  틸지트는 누군가에게는 화목한 사교장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강자들이 약자의 몸뚱이를 산채로 뜯어내는 약육강식의 살벌한 정글이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베를린에 있는 루이즈 왕비의 석관 조각물입니다.)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루이즈 왕비는 용기를 잃지 않고 프로이센의 국가 개혁을 위해 애썼습니다.  가령 남편이 해임했던 개혁 성향의 관료인 슈타인 (Heinrich Friedrich Karl vom und zum Stein)을 다시 불러들이도록 남편을 설득하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군부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샤른호스트 (Gerhard von Scharnhorst) 와 그나이제나우 (August Neidhardt von Gneisenau)의 군 개혁에도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1년 후 쯤 베를린 왕궁으로 돌아왔을 때, 금품은 물론 가구나 그림, 조각품 등을 나폴레옹에게 탈탈 털려 폭삭 망한 왕궁 살림에도 불구하고 친정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겨, 경제적으로 몰락한 남편들이 가졌으면 하는 와이프 1순위에 등극했습니다.

"우리 왕국을 덮친 재앙도 우리 가족의 결속까지는 건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나 기뻐요.  우리 가족 간의 애정은 더 강해졌고 더 소중해졌어요."

루이즈 왕비는 불과 3년 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병에 걸려 사망했는데, 프로이센 국민들은 그녀의 이른 죽음이 나폴레옹에게 쫓겨다니느라 고생한 결과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나폴레옹 또한 그녀의 죽음에 대해 듣고는 "빌헬름 3세는 자신이 가진 최고의 장관을 잃었군" 이라고 말하며 그녀의 결단력을 겸비한 총명함을 애석해 했다고 합니다.




(루이즈 왕비의 묘가 있는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 궁전 Schloss Charlottenburg 입니다.)



이야기가 프로이센의 루이즈 왕비 쪽으로 조금 샜습니다만, 틸지트 조약의 의미는 분명하고도 매우 위력적이었습니다.  프랑스와 러시아라는 두 강대국을 두 축으로 한 유럽 질서의 재편이었습니다.  흔히 틸지트 평화 조약이라고 합니다만, 이는 필연적으로 또 다른 전쟁을 부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전쟁의 대상은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나폴레옹과 알렉상드르가 맺은 협약의 비밀 조항의 핵심은 두가지로서, 프랑스와 러시아는 양국 중 하나가 다른 유럽 국가와 전쟁을 벌일 경우, 필요시 전병력을 동원해서라도 서로를 지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으로, 만약 영국이 짜르의 중재에 응하여 그해 12월 1일까지 바다에서의 자유 항행권을 인정하고 1805년 이후 프랑스 및 그 동맹국으로부터 빼앗은 식민지를 반환하지 않을 경우, 러시아는 영국과 전쟁 상태에 돌입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럴 경우, 프랑스와 러시아는 공동으로 덴마크와 스웨덴, 그리고 포르투갈에 대해 영국에 대한 대륙 봉쇄령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응하지 않을 경우 프랑스와 러시아가 공동으로 그 국가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다는 조항도 딸려 있었습니다.  실제로 러시아는 영국과 전쟁에 돌입했고, 뒤이어 스웨덴령 핀란드를 침공하여 핀란드를 스웨덴으로부터 빼앗게 됩니다.  



(1808년 핀란드 전쟁 발발 당시의 지도입니다.  당시 북구에는 두개의 왕국만 있엇습니다.  바로 덴마크와 스웨덴이었지요.  노르웨이는 덴마크 소유, 핀란드는 스웨덴 소유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거느리고 마침내 유럽 대륙 거의 전부를 호령하게 됩니다.  이렇게 재편된 유럽의 새질서 속에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가 모든 역사가들이 동의하는, 나폴레옹 제국의 최절정기였습니다.  그러나 달이 차면 기우는 법입니다.  최절정기라는 것은 이제 곧 몰락이 시작된다는 이야기와 동격이었지요.  게다가, 나폴레옹은 아직 모르고 있었으나, 그 몰락은 이미 시작된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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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서는 틸지트 조약 후기를 간단히 다루겠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간혹 다른 잡글은 올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한두 달간 자료 조사를 빙자한 휴재에 들어가겠습니다.  이제 나폴레옹의 본격적인 몰락이 시작되는 이베리아 전쟁에 돌입하기 전에 좀 이것저것 많이 읽어서 먼저 지식을 좀 채워야 제대로 글이 써질 것 같아서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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