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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데자 뷔 (Déjà vu) - 하일스베르크 (Heilsberg) 전투

by nasica-old 2014.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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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아일라우 전투에서의 낭패를 극복하기 위해 나폴레옹이 온갖 병력을 다 긁어모으는 모습과, 그에 비해 베니히센의 전쟁 준비는 매우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셨습니다.  이는 결코 베니히센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당시 러시아가 오늘날 루마니아 지역에서 벌어진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 때문에 힘이 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오스만 투르크와 러시아의 전쟁은 나폴레옹이 파견했던 특사 세바스티아니 장군의 획책이 일부 작용하여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나폴레옹의 큰 그림에 베니히센은 물론 짜르 알렉상드르까지 놀아난 셈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동방 정책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세바스티아니 장군은 나중에 루이 필립 왕정에서도 원수직을 맡으며 잘 나갔습니다.  다만, 말년인 1847년, 그의 딸인 화니 Fanny, duchess of Choiseul-Praslin 공작 부인이 남편에게 잔인하게 살해된 일이, 어쩌다보니 1848년 2월 혁명의 중요한 시발점이 되는 악연을 겪게 됩니다.)




1807년 6월초까지, 동부 프로이센 지역에서의 양측의 전쟁 준비 상태는 프랑스군 약 19만, 러시아군 약 10만에 프로이센군 1만5천 정도였으므로, 사실 싸우기도 전에 이미 승패가 결정지어진 상태였습니다.  특히 북부 폴란드도 이제 초여름에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도로 상태도 좋았고, 덕분에 프랑스군 병사들도 잘 먹고 잘 쉬어 지난 2월의 아일라우 전투 때에 비해 컨디션이 매우 좋았지요.  물론 이는 러시아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도 나폴레옹보다는 베니히센이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습니다.  나폴레옹은 6월 10일 경에 공세를 시작하려고 했던 것에 비해, 베니히센은 한발 먼저인 6월 5일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5월 27일, 단치히에서 항복한 프로이센군이 단치히에서 철수한 이후에도 나폴레옹이 그렇게 꾸물거렸던 이유는 다소 불분명한데, 확실한 것은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코작 (카자흐) 기병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타타르의 목을 베어 창에 꽂고 있는 코삭 기병의 모습입니다.  1786년 판화입니다.)



농민들과 상인들의 내왕이 활발하지 않아 그런 루트를 통한 정보 확보가 쉽지 않은, 광활하고 황량한 북부 폴란드 평원에서 상대방의 위치와 움직임을 파악하려면 경기병들로 이루어진 정찰대의 활동이 필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정찰기 역할을 하던 프랑스 경기병대의 활동은 코작 기병들에 의해 완전히 억눌려 있었습니다.  소규모로 몰려 다니며 적이 강하다 싶으면 숨고, 적이 약하다 싶으면 바람처럼 들이치는 코작 기병들에 대해 프랑스 경기병대는 속수무책이었지요.   다만, 이런 산발적인 소규모 전투에서는 그토록 우수했던 코작 기병들도, 본격적인 대규모 기병 회전에 대해서는 취미가 없어서, 정작 중요한 결전에서는 그 유효성이 떨어졌다는 것이 프랑스 장군들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해주었습니다.  그런 본격적인 전투에서는, 수많은 총검이 빽빽히 밀집한 보병 방진에 대해서도 몸을 아끼지 않고 돌격해 들어가는 과감성이 필요했는데, 코작 기병들은 '우리가 미쳤냐'라며 그런 전투에서는 꽁무니를 빼기 일쑤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일찌기 기병에 대해 '전투 전에, 전투 중에, 그리고 전투 후에 매우 유용하다' 라고 했습니다만, 코작 기병들은 '전투 전과 전투 후에만' 유용했고, 정작 전투 중에는 별로 쓸 모가 없었던 것이지요.  아무튼 코작 기병들 덕택에, 나폴레옹은 베니히센의 위치와 병력 규모 등에 대해 상대적으로 정보가 부족했던 것에 비해, 베니히센은 나폴레옹 휘하 군단의 각각의 위치 등에 대해 꽤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유목민 특성이 많이 남아있던 코작 기병들은 노략질에는 능하지만 전투에는 약하다 라는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 베니히센이 타겟으로 고른 것은 또다시 네의 제6군단이었습니다.  당시 네의 6군단은 구트슈타트 (Guttstadt, 폴란드어로는 도브레 미아스트로 Dobre Miasto)라는 작은 도시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 위치는 프랑스군 중에서 최전방에 돌출된 위치였으므로, 공격하기 딱 좋은 먹이감이었던 것입니다.  몇 달에 걸쳐 수집한 정보를 기반으로, 6월 5일, 베니히센은 17,000에 불과한 네의 제6군단을 무려 63,000의 병력, 그러니까 사실상 공세에 가용한 병력을 총동원하여 기습으로 들이쳤습니다.  기습이 가능했던 이유도 코작 기병 덕택이었습니다.  코작 기병들이 마치 정찰기를 요격하는 대공 미사일처럼 프랑스 군의 경기병 정찰대의 활동을 철저하게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에 네는 대규모의 러시아군이 코 앞에 집결 중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지요.  이 공격과 동시에, 베니히센은 네를 고립시키기 위해 그 좌우에 있던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에게는 레스토크(Anton Wilhelm von L'Estocq)의 프로이센군을 보냈고, 술트의 제4군단에게는 독투로프 (Dmitry Dokhturov)의 러시아군을 보내 견제하도록 했습니다.




(독투로프 장군입니다.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에서 굴욕을 맛보기도 했지만, 최후에 웃는 사람이 승자라고, 1815년 프랑스 영토로 진격하는 대오에 이 양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네는 자신이 왜 나폴레옹 직계 라인이 아니면서도 초대 원수 중 하나로 선발되었으며, 또 여러 차례 과욕에 의한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나폴레옹에게 잘리지 않고 군단장직을 유지했는지를 여기서 입증해 보였습니다.  일단 아무리 코작 기병들이 극성이라고 해도, 프랑스 기병들도 완전히 허수아비는 아니었으므로, 네는 미리 러시아군의 공격 태세를 파악할 수 있었고, 그는 술트 및 다부의 군단들과 연락을 취하며 거의 교과서적인 완벽한 전투 후퇴를 수행해 냈습니다.  그는 유격병 (Voltigeur)들을 적극 활용하여 후퇴하는 제6군단의 뒤를 쫓는 러시아군을 견제하며, 작전 중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적의 사소한 실수들을 이용하여 데펜 (Deppen)에서 다리를 건너 파사르쥬 (Passarge, 폴란드어로는 Pasleka) 강 서쪽으로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400명의 사상자, 2천명의 포로와 2문의 대포를 잃기는 했으나, 압도적인 병력을 가졌던 러시아군도 2,000에서 2,500명의 사상자를 냈으므로 네의 제6군단을 포위하여 궤멸시킨다는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셈이었습니다.  




(머스켓 소총이 주력 화기이던 시절, 밀집 대오를 이룬 전열 보병 (line infantry) 앞에 산개하여 적의 밀집 보병들을 저격하는 역할을 유격병이 수행했습니다.  프랑스 군에서 유격병 역할을 하던 것이 바로 voltigeur였지요.)




(이 그림이 voltigeur의 모습입니다.  이 이름은 원래 팔딱팔딱 뛰다 라는 의미의 voltiger 라는 프랑스어에서 나온 것인데, 초기 voltigeur는 말에 올라타서 신속히 이동한 뒤 내려서 몇 발 총을 쏘고, 다시 말에 올라타 다른 위치로 이동하곤 했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합니다.  비슷하게, 영국군의 유격병인 riflemen은 grasshopper, 즉 메뚜기라고 불렸습니다.)



한편, 네를 고립시키기 위해 베르나도트를 견제하려고 벌어진 스판덴 (Spanden) 전투에서, 베르나도트는 성공적으로 러시아군을 격퇴했으나, 이 과정에서 베르나도트는 머리에 적의 머스켓 탄환을 맞아 부상을 입는 바람에, 후방으로 이송되어야 했습니다.  결국 이후로 제1군단장은 빅토르 (Claude Victor-Perrin) 장군이 맡게 되었고, 빅토르는 뒤에 벌어지는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원수의 직위까지 올라가는 행운을 누리게 됩니다.




(주전 선수의 부상으로 후보 선수가 빛을 보는 경우가 바로 이 경우지요.  베르나도트의 부상으로 임시 군단장이 된 빅토르 장군은 다음에 이어질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원수가 되면서 군단장 정규직을 얻게 됩니다.)




(이 교회가 구트슈타텐, 즉 도브레 미아스트로 Dobre Miasto에 있는 유서 깊은 협동 교회 (Collegiate church) 입니다.  나폴레옹이 6월 8일 밤을 여기서 보냈다고 합니다.)



당시 북부 폴란드 전체에서는 러시아군이 열세였으나, 공격자로서 누리는 장점을 활용하여 구트슈타트에서 3대1의 숫적 우위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베니히센이 나폴레옹 못지 않은 전략가임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아무런 전과를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은, 지휘관들과 병사들의 역량에 있어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의 차이가 심각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베니히센의 이번 작전 계획은 너무 복잡하여 러시아군 일선 지휘관들이 체계적으로 수행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니히센은 휘하 지휘관인 오스텐-자켄 (Fabian Gottlieb von Osten-Sacken) 장군의 소극적인 지휘를 이번 실패의 주원인으로 지목하고 면전에서 강력하게 비난했습니다.  오스텐-자켄 장군은 이런 부당한 모욕을 받고는 그 자리에서 지휘권을 내놓고 퇴역해버리는 불상사가 벌어기도 했습니다.  부하 장군들을 무시하고 실패를 부하들 탓으로 돌리는 베니히센의 이런 유아독존식 지휘는 그 뒤 벌어지는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결국 그 댓가를 치르게 됩니다.




(오스텐-자켄 장군입니다.  이름을 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만 이 양반도 독일계 귀족으로서, 원래 에스토니아 출신입니다.  베니히센과 오스텐-자켄처럼, 당시 러시아에서 복무하는 독일계 귀족들이 꽤 많았습니다.)



이렇게 네가 어이없이 러시아군을 뿌리치고 탈출해버린 것에 대해 대노하고 있던 베니히센에게 코작 기병들이 빼앗아온 명령서가 전달되었습니다.  원래 네 원수에게 전해지던 그 명령서 내용은 '다부의 제3군단이 베니히센의 퇴로를 끊을 예정이니 그에 대응하여 역습하라' 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화들짝 놀란 베니히센은 즉각 쾨니히스베르크 쪽을 향해, 그러니까 일단은 하일스베르크 (Heilsberg, 폴란드어로는 Lidzbark Warminski)를 향해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나폴레옹의 속임수에 불과했습니다.  다부의 군단은 아직 파르사쥬 강 서쪽에 있었습니다.  이는 당장 위기에 처한 네의 제6군단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계략에 불과했습니다.





(파르사쥬 강의 모습입니다.  큰 강은 아니지요.)



비록 이 서신은 가짜였으나, 나폴레옹이 베니히센의 서툰 선제 공격을 역으로 이용하여 그를 포위하기 위해 자신의 군단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뮈라와 술트 등의 군단들을 동원하여 후퇴하는 베니히센을 포착하여 결전을 강요하기 위해 서둘렀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황은 지난 2월의 아일라우 전투 때와 비슷했습니다.  그때도 베니히센이 선공을 했고, 나폴레옹이 그를 역포위하려 했었지요.  그러나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랐습니다.  일단, 폴란드에도 여름은 오는지라, 도로 상태도 병사들의 컨디션도 매우 좋았습니다.  지난 아일라우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고전했던 것은 그 두가지가 좋지 않아, 프랑스군의 기동력이 예전만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그 제약 조건이 없어졌던 것입니다. 

반면에, 후퇴하는 베니히센도 믿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가 후퇴하는 하일스베르크 주변에는 지난 4월 5월 사이에 그가 준비해놓은 것들이 잔뜩 있었던 것입니다.  알레 (Alle, 폴란드어로는 Lyna) 강에 면한 하일스베르크 인근은 굴곡이 심한 낮은 구릉지대가 펼쳐져 있었는데, 그 중 방어하기에 위치가 좋은 능선들에 여러개의 보루를 쌓아놓았던 것입니다.  대략 7개 정도의 흙으로 쌓은 보루들이 있었는데, 높이가 10 피트 (3m), 두께는 12 피트 (3.6m) 정도 되는 튼튼한 것들이었습니다.  또한 알레 강을 끼고 방어와 공격을 원활히 하고자 보루로 보호되는 위치에 다리를 4개나 새로 놓아 러시아군이 양쪽 강안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일스베르크에 있는 바르민스키 Warminski 주교관입니다.  나폴레옹이 하일스베르크 전투 이후 하일스베르크 시내에 들어가 발레프스카 공작 부인에게 짧은 편지를 썼다고 하는데, 아마 여기서 쓰지 않았을까 합니다.)



지난 2월에는 아무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후퇴하다 벌인 아일라우 전투에서 그런 승리에 가까운 전과를 냈었는데, 이번에는 이런 든든한 요새들까지 미리 준비해 두었으므로, 베니히센으로서는 하일스베르크에서 싸우지 않고 계속 후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싸우기로 합니다.

구트슈타트-데펜 전투가 벌어진지 4일 후인 6월 10일 오전 8시, 베니히센을 추격하여 하일베르크 인근 알레 강 북쪽 강변에 도착한 뮈라 앞에 러시아군의 전위대가 포착되었습니다.  뮈라는 기병대와 포병만으로 기세 좋게 러시아군을 공격했고, 전위대를 몰아내는데는 성공했으나, 역전의 호구남 바그라티온 (Bagration) 왕자가 이끈 강력한 반격에 부딪혀 결국 오후 2시에는 공격을 멈추었고, 술트의 제4군단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술트가 도착하자 다시 상황은 역전되었습니다.  술트는 우세한 포병대를 앞세워 러시아군을 압박했고, 러시아군은 조금씩 후퇴했으나, 이알레 강 남쪽에 있던 병력들이 미리 확보해둔 다리를 건너 강 북쪽으로 쏟아져 나오자 상황이 또 역전되었습니다.  뮈라는 언제나처럼 기병대의 선두에 서서 여러 차례 돌격을 이끌었으나, 러시아 흉갑 기병들도 만만치 않은 전력을 보여주며 프랑스 기병들을 밀어 붙였습니다.  혼전 중에 뮈라는 대포에서 발사된 산탄을 맞은 그의 말이 고꾸라지는 바람에 낙마하기도 했으나, 서둘러 그 옆을 지나가던 주인 잃은 군마를 잡아 타고 다시 공격을 이끌었습니다.  이때 장화 한짝을 잃은 뮈라는 그날 한쪽 발에만 장화를 신은 채로 싸웠다고 합니다.  또 한번은 러시아 기병들 5~6기에게 포위되어 목숨을 잃을 뻔 하기도 하였으나, 뮈라 못지 않은 광기병이었던 라살 (Antoine-Charles-Louis Lasalle) 장군 본인이 직접 칼춤을 추며 적병들을 물리치는 바람에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안톤 라살입니다.  이 아저씨가 광기병으로 불린 이유는 '나폴레옹의 교과서 - 리볼리 전투' http://blog.daum.net/nasica/6862470 편을 참조하세요.)



먼거리에서 뮈라가 고전한다는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이 참모이던 사바리 (Jean-Marie Rene Savary) 장군에게 12문의 대포와 함께 근위대 4개 대대를 주어 뮈라를 돕게 했는데, 이렇게 도착한 사바리에게 뮈라는 '사격 대신 남자답게 총검 돌격을 실시하라'고 주장하여 사바리로 하여금 어이를 상실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사바리는 나중에 '뮈라 원수가 조금 덜 용맹하고 대신 그만큼 더 상식을 가졌으면 좋겠다' 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사바리의 부대는 사격과 포격을 개시하며 전진했고, 뮈라의 앞을 막던 러시아 기병대를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전투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러시아 기병대를 몰아낸 뒤, 프랑스 보병들이 언덕 위에 늘어선 러시아군의 보루를 향해 진격을 시작했는데, 이 보루들에는 보병들 뿐만 아니라 방벽 뒤에서 포구만 내밀고 있는 많은 대포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쏟아지는 포탄들이 프랑스 보병 대오를 무자비하게 휩쓸었습니다.  프랑스 보병들은 이 무시무시한 포격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기 위해 더 서둘러 진격할 정도였습니다.  제2번 보루의 경우 프랑스 제26 보병여단과 사바리의 근위 보병들의 공격을 받고 결국 함락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프랑스군이 산탄과 머스켓 사격에 쓰러졌습니다.  게다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러시아 보병들도 재반격에 나서, 다시 제2번 보루를 탈환해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이 목숨처럼 아끼는, 나폴레옹이 직접 하사한 독수리 군기를 러시아군에게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사바리 장군도 그의 근위 보병대가 방진을 구축하고 프로이센 기병대에게 저항하며 조금씩 숲 쪽으로 후퇴함으로써 간산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프로이센 기병대가 프랑스군 진영 깊숙히 침투하여, 프랑스 포병대를 유린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근위대 지휘관인 우디노 장군은 나폴레옹에게 안전한 후방으로 후퇴를 강권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푸셰의 뒤를 이어 나폴레옹의 비밀 경찰 책임자가 되기도 했던 사바리 공작입니다.  그는 나중에 루이 필립 왕정에서 알제리 식민지에서 활동했는데, 아랍 부족 하나를 전멸시키기도 하고 아랍 지도자들을 거짓말로 꾀어내어 살해하기도 하는 등, 별로 아름답지 못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군이 고전했던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병력 수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거의 전체 야전 병력인 9만명이 다 모여 있었던 것에 비해, 프랑스군은 밤 늦게 도착한 란의 제5군단을 합해도 고작 5만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하일스베르크는 사실 나폴레옹이 예상했던 결전 장소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프랑스군 대부분은 아직 집결하지 않은 채 행군 대형으로 이동 중이었고, 하일스베르크로 병력을 집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아침에 하일스베르크에 도착한 것이 단순 무식한 뮈라가 아니라 제5군단장 란이었다면, 아마도 란은 러시아군이 후퇴하지 않을 정도로만 러시아군과 툭탁거리며 다른 프랑스 군단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뮈라는 그저 '닥치고 돌격'을 외치는 바람에 전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던 것이고, 오후에 차례차례 도착한 술트와 사바리의 증원 병력을 도착하는 즉시즉시 그대로 러시아군의 산탄 세례 속으로 축차 투입하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뒤늦게 도착한 나폴레옹이 이런 상황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뮈라가 벌여놓은 난장판을 그대로 방치했다는 것은 사실 뜻 밖인데, 어쩌면 나폴레옹은 그때까지도 하일스베르크에 러시아군 전체가 모여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  뭐 ?  날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건데 ?)



러시아군의 보루들을 둘러싸고 이렇게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이 엎치락뒤치락 혼전을 벌이며 쌍방에 많은 희생자를 내는 가운데, 밤 9시 가 넘자 란의 제5군단도 현장에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날이 어두워 전투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고, 특히 나폴레옹은 병력 통제는 커녕 피아구별도 제대로 안되는 야간 전투를 무척 싫어하는 편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일단 그날의 전투는 거기서 마무리하고, 병력을 더 모아 다음날 다시 전투를 벌이는 것이 정상적인 작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뜻 밖에도, 나폴레옹은 란의 제5군단이 숨을 고르기도 전에 당장 러시아군의 보루를 향해 진격을 개시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아마도 그날 오후 전투에서 독수리 군기 몇개를 상실할 정도로 패색이 짙었다는 점이 나폴레옹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것일까요 ?  아무튼 어둠 속에서 란의 보병 사단들은 묵묵히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열혈 맹장 란이라고 해도 뾰족한 수는 없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제1 보루를 향해 진격하던 란의 보병 사단을 기다리는 것은 보루 안에서 쏟아지는 러시아군의 산탄 포격과 머스켓 사격이었습니다.  러시아군의 포격이 워낙 거세어, 하루 종일 강행군에 지쳤던 란의 보병들도 속절없이 무너져 후퇴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밤 11시가 되자 전투는 일단락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때 상황에 대해 사바리는 '프랑스 보병들에게는 너무나 다행히도, 날이 너무 어두워 전투가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라고 일지에 적어 그날 보병들이 겪어야 했던 전투의 끔찍함을 간접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산탄, 즉 canister shot 입니다.  주석 깡통 속에 머스켓 탄환이나 돌조각 등을 담았기 때문에 canister 라고 불렀습니다.  당시의 밀집 보병 전열에게는 정말 끔찍한 물건이었지요.)



이 날 밤, 나폴레옹과 베니히센 두 지휘관은 모두 번뇌에 싸여 밤을 지내야 했습니다.  양군이 대치한 전장에는 부상병들의 신음소리와 비명소리가 가득했는데, 이는 마치 지난 2월의 아일라우 전투를 연상시켰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혹시 날이 밝으면 지난번처럼 러시아군이 철수하여 사라지지 않을까를 기대했고, 베니히센은 담석증을 앓고 있었으므로 정신적 고통에 더해 육체적 고통까지 겪으며 밤을 보내야 했지요. 

다음날 아침, 나폴레옹의 기대와는 달리, 러시아군은 여전히 언덕 위 보루들에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나폴레옹도 차마 저 보루들을 향해 또 돌격하라는 명령은 내리지 못했습니다.  일단 프랑스군은 아일라우 때처럼 아무 것도 먹지를 못했습니다.  게다가 해가 떠오르면서 전날 쓰러진 시체들로부터 풍겨오는 역한 냄새가 코를 찔러, 그 냄새를 피하기 위해 프랑스군은 약간 후퇴를 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자, 나폴레옹은 총검보다는 발을 써서 적을 몰아낸다는 작전으로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즉, 다부 원수의 제3군단을 우회시켜 쾨니히스베르크 방면으로 이동시킨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베니히센도 후방과 단절되어 포위될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애써 쌓은 보루들로부터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보루에서 그날 낮 하루를 더 버틴 베니히센은 그날 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조용히 철수하여 다리를 건넌 뒤 다리를 태우고 철수했습니다.  이때의 위험한 후위 부대 노릇은, 어느덧 이쪽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버린 바그라티온 왕자가 맡아야 했습니다.






(하일스베르크 전투가 끝나고 하일스베르크로 프랑스군이 입성하는 모습입니다.)



나폴레옹으로서는 상당히 씁쓸한 전투 결과였습니다.  이 하일스베르크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1만2천의 사상자를 냈고, 러시아군은 약 9천의 사상자를 냈는데, 비록 러시아군이 후퇴하기는 했지만 이는 나폴레옹의 승리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결과였습니다.  마치 지난 2월의 아일라우 전투의 재현을 보는 듯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좌절하지 않고 진격을 계속합니다.  이 하일스베르크 전투는 나폴레옹으로서는 뜻하지 않은 조우전에 불과했으며, 그가 노리는 사냥감인 베니히센의 러시아 야전군은 아직 그의 손아귀에서 머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집념은 프리틀란트에서 마침내 결실을 맺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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