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폴레옹의 시대

막장 드라마의 시작 - 스페인, 측근 정치에 병들다

by nasica-old 2014. 12. 7.
반응형

이제 여러분은 한국 일일 드라마를 뺨치는 막장 스토리의 끝판왕 이베리아 전쟁으로 들어가시게 됩니다.  왜 제가 시작부터 이 전쟁을 막장 드라마라고 부르는지는 차차 보시게 되겠습니다만, 제가 이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역사 소설인 Sharpe 시리즈 중 Sharpe's Havoc의 한 장면부터 엿보시지요.






Sharpe's Havoc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09년 포르투갈) ------------------

(뷔야르 준장이 지휘하는 일단의 프랑스군 용기병들이 어느 포르투갈 마을에 무저항으로 진입했습니다.)

그리고 뷔야르(Vuillard)의 게임이 시작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프랑스군을 증오했고 프랑스군도 마을 사람들을 증오했다.  프랑스 용기병들은 몇몇 집안에서 빨치산(partisans)들을 발견했는데, 이런 버러지들을 어떻게 박멸해야 하는지 방법은 이미들 알고 있었다.  마누엘 로페스와 그의 생포된 빨치산 대원들은 교회로 끌려가 강제로 제단과 난간, 성화들을 때려부수고, 교회 한복판에 그 부서진 목재들을 쌓아올리는 사역에 동원되었다.  조세파 신부는 이런 파괴 행위에 항의를 해봤지만, 프랑스 용기병들은 이 신부를 벌거벗기고는 그의 신부복을 갈기갈기 찢어 원래 교회 제단에 걸려 있던 큰 십자가에 신부를 꽁꽁 묶어버렸다.  

"사제들이 제일 악랄하거든."  뷔야르 준장은 크리스토퍼 중령에게 설명했다.  "저것들이 주민들보고 우리와 싸우라고 부추긴다니까.  내 맹세컨대 우리가 이번 일 끝내기 전에 포르투갈에 있는 사제란 사제는 모조리 죽여버리겠어."

다른 포로들도 교회로 끌려왔다.  집에서 총기가 발견되었거나 용기병들에게 조금이라도 반항한 마을 주민들은 모두 거기에 끌려왔다.  어떤 마을 남자는 13살짜리 딸아이를 용기병들로부터 지키려고 하다가 교회로 끌려왔는데, 일단 교회 문 안에 들어서자, 용기병 하사관 하나가 대장간에서 가져온 큰 망치로 끌려온 주민들의 팔과 다리를 부러뜨려 버렸다.  

"저게 저 놈들 묶는 것보다 훨씬 쉽거든."  뷔야르가 설명했다.  크리스토퍼 중령은 큰 망치가 뼈를 부러뜨리는 소리에 움찔했다.

어떤 남자들은 신음소리를 냈고 어떤 사람들은 비명을 질러댔으나, 대부분은 고집스럽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조세파 신부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올렸으나, 용기병 하나가 그의 턱을 군도로 박살내버리자 조용해졌다.

이젠 날이 어두워졌다.  아직도 빗방울이 교회 지붕을 두들기고 있었으나 아주 거센 것은 아니었다.  밖에서는 벼락이 쳐서 이따금 창문이 밝게 빛났다.  뷔야르는 측면 제단의 잔해물 쪽으로 걸어가 바닥에서 타고 있던 촛불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는 그것을 박살이 난 가구더미에 가져갔는데, 거기에는 그의 부하들의 기병총 (carbine) 탄약에서 뜯어낸 화약을 뿌려둔 상태였다.  그는 촛불을 가구더미 깊숙히 놓고는 뒤로 물러섰다.  처음에는 불꽃이 작게 일렁이더니 쉭쉭하는 소리와 함께 밝은 화염이 가구더미 한가운데서 솟구치기 시작했다.  연기가 대들보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하자 팔다리가 부러진 마을 사람들이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고, 뷔야르와 용기병들은 교회 문으로 물러섰다.  

"마치 물고기처럼 펄떡거리는구먼." 뷔야르 준장은 불을 끄려는 헛된 노력을 하느라 불 쪽으로 몸을 질질 끌고 가려는 남자들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비 때문에 일이 좀 천천히 진행될 거야."  그는 크리스토퍼에게 설명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늦진 않을 걸."  이제 불꽃이 틱틱 소리와 함께 솟구치면서 자욱한 연기를 내뱉고 있었다.  "보통 지붕에 불이 붙을 때 즈음 해서 죽더라구.  시간이 꽤 걸려.  하지만 끝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지."

-----------------------------


전에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또는 프로이센의 베를린으로 입성할 때와는 무척 다른 그림이지요 ?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 그리고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프랑스군이 현지 주민들을 저렇게 잔인하게 살해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프랑스군은 가는 곳곳마다 약탈을 했고, 그에 저항하는 주민들에 대해서는 가혹한 무력 진압을 서슴치 않았습니다만, 저런 식은 아니었지요.   여기에 인용된 내용은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입니다만,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서 흔히 벌어졌던 현지 주민들과 프랑스 점령군과의 수많은 유혈극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점잖던 프랑스군이 어쩌다 저런 악랄한 일본 헌병처럼 되어 버렸던 것일까요 ?



(이 음울하게 생기신 분이 카를로스 2세이십니다.)



다소 뜬금없게 들리시겠습니다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1700년 11월 1일, 합스부르크 (Habsburg) 가문 출신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 (Carlos II)가 마드리드에서 죽으면서 시작됩니다.  남아 있는 그의 초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징인 전형적인 주걱턱을 가진 이 젊은 왕은 39세에 요절하기 전에도 이미 정상이 아닌 신체와 건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을 위한 최고의 배우자는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이다" 라는 말로 상징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 혼인 정책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원래 11세기에 지금의 스위스 땅에 지어진 합스부르크 성채를 기반으로 미미하게 시작된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의 주인이 되면서 크게 융성해졌고, 다른 왕가들이 끊임없는 전쟁으로 땅을 넓히는 동안 정략 결혼을 통해서 유럽을 정복해나갔습니다.  당시 유럽은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개념이 약했고, 오로지 어느 가문에 충성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시대라서, 귀족 가문들 간의 대결이 곧 국제 관계였거든요.  그런 식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결혼을 통해 유럽 정반대편에 있는 대해양제국 스페인까지도 손에 넣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16세기 무렵에는 전체 유럽의 1/3 정도를 통치하는 대왕족 가문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초라한 성채가 합스부르크 가문이 시작된 스위스의 합스부르크 성채입니다.)





(미천한 시작, 큰 결과.  16세기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던 영토입니다.  해외 식민지는 제외하고도 이렇습니다.)




그러나, 결혼으로 얻은 땅은 결혼으로 잃게 마련이라고, 혹시나 다른 왕가와 결혼했다가 그 복잡한 상속 구조 속에서 그렇게 친척이 된 다른 귀족 가문에게 영토를 내줄 수도 있겠다는 근심걱정이 합스부르크 가문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가능하면 근친간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 결과, 가문이 좀더 빨리 망하게 되었지요.  아무래도 근친 결혼은 그 후손들의 유전자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하니까요.  합스부르크 가문은 1521년에 스페인계와 오스트리아계로 분할되었는데, 그 중 형님뻘 가문이었던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은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가 후손 없이 사망하면서 씨가 말라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럽 왕족들은 조선시대 뺨치게 족보를 따지는 사람들이다 보니, 아무리 자식도, 가까운 친척도 없이 죽었다 하더라도 사돈의 팔촌까지 미주알고주알 따져서 결국 왕위 계승 제1순위 후보를 반드시 찾아냈습니다.  이 경우는 이야기가 좀더 쉬웠습니다.  카를로스 2세 자신이 유언으로 그의 종손 (grand-nephew, 형제자매의 손자)이었던 프랑스의 앙주 공작 (Duc d'Angou) 필립 (Philip)을 후계자로 지명했던 것입니다.  이 필립이라는 16살짜리 소년은 루이 14세의 첫부인인 마리아 테레사 (Maria Theresa)의 손자였는데, 이 마리아 테레사가 카를로스의 배다른 누나였던 것입니다.  학자들이 따져보니, 이 소년이 서열상으로도 적법한 후계자가 맞았습니다.


그러면 이야기는 해피 엔딩 아닌가요 ?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필립은 마리아 테레사의 손자일 뿐만 아니라, (당연히)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의 손자이기도 했던 것이지요.  즉 합스부르크의 라이벌 가문인 프랑스 부르봉 (Bourbon) 가문 사람이었습니다.  일이 까딱 잘못 되면 이 필립이 프랑스와 스페인의 통합 왕이 될 수도 있었고, 이는 거대한 스페인 제국이 통째로 라이벌 가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1521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동서 분할 이후, 아우뻘 가계였던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는 발끈했습니다.  그들은 오스트리아의 카알 대공(Archduke Karl)의 상속 서열이 더 높다면서 반기를 들었습니다.  




(1712년 드넹 Denain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이끌고 돌격하는 빌라르 Claude de Villars 장군.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확고한 발판을 마련합니다.)



이런 집안 싸움은 변호사들을 동원해서 해결을 보면 좋을텐데, 이 소송에 걸린 것이 너무 크다 보니,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다 끼어들게 되었습니다.  당시 스페인계 합스부르크는 스페인 본토는 물론이고 중남미의 광활한 식민지, 그리고 벨기에와 북부 이탈리아 등등 엄청난 영토를 직접 지배하고 있던 대가문이었습니다.  그에 맞설 만한 세력은 프랑스 부르봉 왕가와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정도였는데, 당시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은 태양왕 루이 14세의 초절정기를 자랑하던 시절이라서, 스페인이 통째로 부르봉 쪽으로 넘어갈 경우 유럽 전체의 판도가 흔들릴 지경이었습니다.  유럽이 오늘날 전세계를 지배하게 된 이유가 중국처럼 대통일 왕조가 나오지 않고 고만고만한 국가들끼리 피튀기는 경쟁을 했기 때문이라고들 하는데, 그런 유럽 세계가 부르봉의 독식을 허용할 리가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신성로마제국으로 표현되는 독일 제후국들에, 영국, 프로이센, 피에드몽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공화국까지 한편이 되어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이 지나치게 강대해지는 것을 막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1701년부터 1714년까지 벌어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었습니다.




(위트레흐트 조약서 초판입니다.  영어와 스페인어... 저건 라틴어인가요 ?)

 

이 긴 전쟁 동안 많은 피와 눈물 그리고 무용담이 있었습니다만, 결국 긴 전쟁에 지친 참전국들은 1713년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 (Utrecht)에서 맺어진 조약으로 상황을 정리했습니다.  즉, 루이 14세의 손자인 부르봉 가문의 앙주 공작 필립이 펠리페 5세 (Felipe V)로서 스페인 국왕에 즉위하되, 대신 그는 향후 프랑스 국왕 계승권을 포기함으로써 프랑스가 스페인과 하나로 합쳐지는 것은 막는 선에서 합의를 본 것이지요.  이를 보면 이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이 외에 많은 영토와 이권 교환도 이루어졌거든요.  가령 벨기에와 나폴리, 사르디니아, 밀라노 공국 등은 전통적으로 스페인의 영토였는데,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받는 땅이 된 것이 그 일부였습니다.  또 프랑스는 북미 지역의 많은 식민지를 영국에게 빼앗겼습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뒤 1714년 유럽 지도입니다.  전통적으로 스페인 땅이었던 벨기에 지역과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왕국이 오스트리아 색깔로 칠해진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스페인에 왕이 바뀌는데 북미 지역 지도도 바뀌네요.  국제 정치란 참 오묘합니다.)



아무튼 지겨운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모두들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요 ?  천만에 콩떡이지요.  루이 14세가 태왕왕이네 뭐네 하며 프랑스에게 꼭 필요하지도 않았던 겉멋을 위한 전쟁을 치르고 온갖 사치를 부릴 때 그를 위한 비용은 차곡차곡로 쌓여 결국 그의 손자 뻘인 루이 16세가 프랑스 혁명으로 목이 잘리는 참변을 낳게 됩니다.  필립 5세, 아니 펠리페 5세의 통치를 받게 된 스페인도 사정이 좋지는 못했습니다.  당장 스페인 말도 못하는 외국 왕족이, 그저 좋은 집안에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스페인을 통치하러 왔으니 시작이 좋을 수가 없었지요.  그는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폴란드 왕의 계승 전쟁 및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프랑스 부르봉 가문을 돕기 위해 참전했습니다.  이런 친 프랑스 정책은 그렇잖아도 저물어가던 스페인 제국의 몰락을 더욱 재촉했습니다.  펠리페 5세는 스페인이라는 국가의 발전보다는 아무래도 자신의 왕족 식솔들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는데 훨씬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당시 스페인은 군대와 공무원들에게 몇달씩 봉급을 주지 못하다가 남미에서 은괴를 실은 보물선이 스페인에 도착하면 비로소 그 은괴로 은화를 찍어내 밀린 봉급을 지불할 정도로 재정과 조세 제도가 대항해시대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렇게 스페인에는 시급한 개혁과 산업 발전이 필요했으나, 필립 5세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그저 스페인의 허물어져가는 부와 권력을 뽑아먹는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이런 성향은 펠리페 5세의 증손자인 카를로스 4세 (Carlos IV) 때까지 별로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내려 왔습니다.  




(이 분이 프랑스의 필립 왕자, 동시에 스페인의 펠리페 5세 국왕 전하이십니다.)




이러면서 스페인 왕가와 스페인 귀족, 그리고 스페인 민중들의 사이는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스페인 혈통의 왕이 아닌, 프랑스 혈통의 왕이 스페인을 지배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약간 무리일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이 이전에 스페인을 지배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왕들도 원래 스페인 출신은 아니었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부르봉 가문 출신의 왕들보다는 남미 볼리비아의 전설적인 은광 포토시 (Potosi) 광산이 스페인을 망쳤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포토시 광산으로 대표되는 신대륙의 풍부한 은이 스페인의 정상적인 경제를 망쳐 놓았던 것입니다.  일찌기 어떤 스페인 관리는 스페인 사람들이 남미에서 들여온 은화로 프랑스로부터 비싼 가격에 프랑스산 와인과 비단 등의 상품을 사들이는 실태에 대해 "다른 유럽인들이 스페인 사람들을 인디오 취급한다" 라며 경고를 울린 바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외에서 인디오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들여오는 은괴에 국가 재정을 의존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하고 미래가 없는 정책이었는데도, 그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점점 심해져가는 스페인 제국의 몰락이 부르봉 가문의 책임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국의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 그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 부르봉 왕가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스페인이라는 자랑스러운 역사와 오랜 전통, 그리고 긍지 높은 국민들을 가진 왕국의 지배자로 외국의 왕족이 이렇게 성공적으로(?) 즉위할 수 있다는 사실은 훗날 나폴레옹이라는 대영웅까지도 엉뚱한 오판을 내리도록 유혹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지금의 볼리비아에 있는 포토시 Potosi 광산의 상상도입니다.  포토시에 있는 저 산은 산 전체가 은덩어리로 되어 있다는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유명한 광산으로서, 저 광산에서 스페인의 영광이 이루어졌지요.  그러나 제국의 영광이라는 것이 땅속에서 나오는 금속 하나에 의지한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쇠퇴하는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는 어느덧 펠리페 5세의 손자인 카를로스 4세 (Carlos IV)까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1748년 생으로서, 40세가 되던 1788년에 국왕으로 즉위한 카를로스 4세는 기본적으로 함량 미달의 국왕이었습니다.  그저 선대부터 이어온 정책을 지루하게 고수할 뿐이었고, 그나마 국가 통치 자체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열중했던 것은 귀족적인 스포츠인 사냥 정도로서, 국가 인사권 같은 귀찮은 문제는 북부 이탈리아 파르마 공작 집안 출신인 왕비 마리아 루이자 (Maria Luisa)에게 일임할 정도였습니다.  국정이 이 모양이니 자연스럽게 간신배가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계관 시인 바이런 경에 의하면 당대의 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몰락은 다 그 인간 때문"이라고 원망할 정도의 유명한 간신배이자 부당한 측근 정치의 주역의 이름은 바로 고도이 (Manuel Godoy)였습니다.




(이 분이 고도이 왕자이십니다.  이건 아마 좀 나이가 들고나서 그려진 초상인 모양입니다.  잘 생기지는 않았는데요 ?)



고도이는 1767년 생으로 나폴레옹보다 2살 많았는데, 출생의 배경은 나폴레옹과 비슷했습니다.  즉, 몰락한 귀족 출신이었지요.  그는 17살 때 마드리드로 상경하여 국왕의 근위대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그를 돋보이게 한 것은 다름아닌 그의 기타 연주 실력과 아름다운 가창력이었습니다.  젊고 똑똑한데다 꾀꼬리처럼 노래도 잘 부르는 이 젊고 가난한 귀족 청년은 먼저 루이사 왕비의 총애를, 이어서 왕비의 지원 사격에 힘입어 국왕 카를로스 4세의 신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중국이나 유럽이나, 절대 왕정의 문제가 바로 이런 것이지요.  노래와 기타든 헬스와 요가 또는 승마든 절대 권력자의 신임만 얻으면 소위 측근 정치가 가능해지고, 국정 농단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도이는 왕과 왕비의 개인적인 총애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며 권력의 실세로 떠올랐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도이와 왕비의 부적절한 관계가 도마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고도이는 수상이라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까지 올라갑니다.  어찌 보면 국왕 카를로스 4세로서도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습니다.  답 안 나오는 국정 운영은 고도이에게 맡겨두고, 자신은 신나는 사냥 놀이 같은 것에 탐닉할 수 있었으니까요.  바람직한 국정 운영이든 아니든, 어쩌면 시대만 잘 만났다면 그렇게 카를로스 4세와 고도이는 나라 살림을 까먹으며 행복한 일생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도이와 부적절한 관계라고 이야기가 나온 마리아 루이사 왕비입니다.  이 분은 1751년 생으로 고도이보다 무려 16살 연상이었습니다.  ...출세하는 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때를 잘못 만났습니다.  바로 이웃한 대국이자 카를로스 4세의 본국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나고, 종가집 종손인 루이 16세의 목이 잘린 것입니다.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가 그에 대해 항의하자, 적반하장이라고 저 빨갱이 프랑스 선동가들은 영국과 오스트리아에 이어 스페인에도 먼저 선전포고를 해왔습니다.  처음에는 스페인 군이 절대 유리했습니다.  막강한 영국 및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이 모두 스페인과 동맹을 맺은 든든한 전우였으니까요.  1793년 시작된 스페인-프랑스 간의 전쟁을 피레네 전쟁 (War of the Pyrenees)이라고 하는데, 초반에는 스페인 군이 프랑스 땅으로 진격해들어가는 등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그러나 영국 해군, 그리고 프랑스의 애국보수 귀족들과 손을 잡고 점령했던 프랑스 제1의 군항 툴롱(Toulon)에서부터 뭔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어설프기 짝이 없던 프랑스 혁명군의 작전이 어느날부터인가 뭔가 달라지더니, 묘하게 스페인-영국군의 손발을 불편하게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는 전략적인 요충지를 족집게처럼 집어내어 공략하고는 거기에 대규모 포대를 설치하여 영국 함대에게 포격을 해오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나폴리오네 부오나파르떼라는 코르시카 출신의 촌뜨기가 이 툴롱 포위전을 계기로 보잘 것 없는 가난뱅이 위관급 장교에서 일약 장군으로 승진했다고 했습니다.




(1793년, 프랑스 툴롱, 나폴리오네 부오나빠르떼.)



이후 스페인은 1.5군도 아니고 누가 봐도 완전히 2군 출신들로 구성된 프랑스군을 상대로 악전고투를 벌이다가, 결국 프랑스와 굴욕적인 평화 협정을 맺게 되었습니다.  1795년 바젤 협정에서, 스페인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카리브 해의 히스파니올라 섬 (지금의 도미니카)을 프랑스에게 완전히 양도해야 했고, 게다가 바로 어제까지의 동맹이었던 영국에 대해 내키지 않는 선전포고를 해야 했습니다.  특히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는 남미에서 들어오는 은괴에 국가 재정을 의존하던 스페인에게는 치명타나 다름없었습니다.  나포 포상금에 굶주린 영국 해군 함정들이 스페인 보물선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기 때문이지요.  당장 스페인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하지만 카를로스 4세는 평화를 일궈낸 영웅이라며 평화의 왕자 (Prince of the Peace, Príncipe de la Paz)라는 타이틀을 고도이에게 내려 그의 공로를 치하했습니다.  


이후 고도이는 또 개인적인 사치와 향락을 누리며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대화가 고야 (Francisco Goya)가 그린 유명한 그림 중에 '누드의 마야' (La maja desnuda)와 '옷 입은 마야' (La maja vestida)라는 그림이 있지요.  이 그림도 1799~1800년 사이에 바로 고도이가 고야에게 자신의 정부를 그리게 한 것입니다.  고도이는 자신의 저택 내에 비밀의 방을 마련하고 이 그림과 함께 벨라스케즈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 (Rokeby Venus) 등 명작(?) 누드화를 많이 전시해놓고 감상했다고 합니다.   




(보니... 왜 화가들이 굳이 누드화를 그리는지 좀 이해가 가는데요 ?  제가 음탕해서 그런가요 심미안이 있어서 그런가요 ?)



세월이 꼭 고도이와 카를로스 4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1802년 아미앵 평화 조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 남미 식민지와의 통상도 자유로와졌고, 마침내 제대로 된 평화를 누리게 되었지요.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바로 이때 즈음 이제는 제1통령이라는 거물이 된 나폴레옹이 의리없게 대놓고  "고도이가 사실상 스페인 국왕 노릇을 하고 있는데다, 고도이는 루이사 왕비의 기둥서방 노릇까지 하고 있다" 라는 고자질 편지를 카를로스 4세에게 보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스페인 국정을 농단하고 있던 고도이는 이 편지를 중간에 낚아챌 수 있었지만, 까짓거 볼테면 보라지 뭐 하며 카를로스 4세에게 그대로 그 편지가 전달되도록 허락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일이 이 정도 되면 가히 병신 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스페인 카를로스 4세이십니다.)



이 짧은 평화는 제3차 대불 동맹전쟁이 벌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1804년 영국 해군의 프리깃함들이 페루에서 은괴를 싣고 오던 스페인 프리깃함들을 요격하여 나포한 것입니다.  (1804년, 스페인 보물선 함대를 둘러싼 모험 http://blog.daum.net/nasica/5311309 참조)  이젠 어쩔 수 없이 프랑스에게 질질 끌려 영국과의 전쟁에 들어가게 된 스페인으로서는 죽을 맛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직 생고생을 안 해봐서 나온 엄살에 불과했습니다.  자칭 천재 나폴레옹의 전략에 맞춰 영국 로열 네이비와의 승산없는 전쟁에 해군 전함들을 모두 쓸어넣었던 고도이에게 돌아온 것은 1805년 10월 트라팔가에서의 참패 소식이었습니다.  




(1805년 스페인 트라팔가 곶 앞바다에서의 영국 해군 HMS Victory의 늠름한 모습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스페인 내 귀족 사회에서나 평민들 사이에나 고도이에 대한 원성이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나마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나폴레옹의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덕분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무적 신화가 다시 입증되면서, 프랑스와 국경을 맞댄 스페인으로서는 딱히 방법이 없다는 공감대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제해권을 장악한 영국 해군과 대적하는 한, 스페인의 경제 위기는 벗어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1806년 다시 프로이센-러시아 동맹과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이때, 고도이에게 친영파 인사들이 영국에서 보내준 뇌물을 잔뜩  싸들고 찾아왔습니다.  스페인의 경제난 해소를 위해서라도, 괴물 나폴레옹과의 관계를 끊고 영국과 손을 잡자는 것이었지요.  고도이는 뇌물도 탐이 났습니다만, 자신을 버러지 취급하는 나폴레옹에 대한 개인적인 치졸한 원한에도 휘둘렸습니다.  게다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직계 후손들인 프로이센과 동구의 거인 러시아가 힘을 합한다면, 나폴레옹도 궁지에 몰릴 것이라는 오판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것만 봐도 고도이가 얼마나 빵점짜리 수상인가 하는 점을 알 수 있엇습니다.  당시 프로이센의 어설픈 도발에 대해서는 나폴레옹도 깜짝 놀랄 정도로 전황은 나폴레옹에게 유리했거든요.  (2류 국가 프로이센 - 잘펠트 (Saalfeld) 전투 http://blog.daum.net/nasica/6862560 참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고도이는 깜찍한 조치를 취해 저 멀리 독일에서 프로이센과 대치하고 있던 나폴레옹이 부들부들 분노에 떨게 만듭니다.  과연 고도이는 무슨 짓을 한 것일까요 ?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보시지요.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