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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뜻하지 않은 대소동 - 아랑훼즈 (Aranjuez)의 불협 화음

by nasica-old 2014.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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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1807년 11월 30일, 쥐노가 포르투갈 리스본에 무혈 입성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이 모든 소동은 유럽 대륙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중립국인 포르투갈을 영국에 대한 대륙 봉쇄령에 포함시키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비록 포르투갈 왕정 전체가 영국 해군의 호위 하에 브라질로 피난을 가버렸으나, 일단 포르투갈을 점령하고 영국 선박들이 대륙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했으므로 목적은 완료한 셈이었습니다.

이제 나폴레옹에게는 남은 숙제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이 쌓아올린 제국의 영광을 즐기며 영국이 대륙 봉쇄령으로 인해 말라죽거나 그 전에 백기를 드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들 아시다시피, 나폴레옹은 스페인 침공이라는 최악의 수를 두고 맙니다.  스페인을 침공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영국이 감히 유럽 대륙에 상륙하여 지상전을 벌일 생각을 못 했을 수도 있고, 또 오스트리아가 제5차 동맹 전쟁에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가 스페인에서 그렇게 고전을 거듭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러시아도 감히 나폴레옹에게 저항할 생각을 못 했을 수도 있지요.  이렇듯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공한 대가는 크고도 쓴 것이었습니다.  대체 나폴레옹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최악의 선택을 했던 것일까요 ?




(러시아에서 개고생하는 프랑스군입니다.  스페인에서 그렇게 삽질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파국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




나폴레옹이 정확히 언제 부르봉 왕가의 잔당들을 스페인 국왕 자리에서 쫓아내고 보나파르트 가문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힐 생각을 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1808년 1월까지만 하더라도, 스페인 왕위 찬탈은 나폴레옹의 중요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스페인보다는 오히려 이탈리아 남부에 관심이 많았지요.  아직 사르데냐 섬과 시칠리아 섬이 영국 편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남부를 요새화하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위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노란색의 사르데냐 섬에는 사르디니아 왕국이, 그리고 연갈색의 시칠리아 섬에는 두개의 시실리 왕국이 웅크리고 있었고, 이들은 모두 영국 해군의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1794년 파리의 공안위원회에게 제출한 "피에드몽 및 스페인 방면 프랑스군의 정치군사학적 위치"라는 이름의 보고서에는, 당시 스페인에 대한 나폴레옹의 평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 보고서에서, 나폴레옹은 스페인이 "대국임에도 불구하고 그 왕정의 나태함과 국민들의 비속화로 인해 쇠퇴한 상태이므로, 스페인의 침공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라고 단정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스페인이 공세로 나올 때의 이야기이고, 만약 스페인이 공격받는 경우라면 "긍지 높고 인내력이 강하며 미신을 잘 믿는 민족성과, 그 넓은 영토가 주는 자원으로 인해 가공할 만한 상대가 될 수 있다" 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비록 편견이 가득한 내용이긴 하지만) 스페인을 매우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으로서는 그런 스페인을 무력 침공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의 국왕이던 카를로스 4세와 그의 대리인인 고도이 수상은 완전 무골충이라서 자신이 요구하는 바를 감히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거기에 한술 더 떠, 스페인을 카를로스의 선의가 아닌 자신의 무력에 의해 완전히 자신의 꼭두각시 국가로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포르투갈을 점령하고 있는 쥐노를 지원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뒤퐁 (Dupont)과 뒤엠므 (Duhesme)의 프랑스 예비 군단들을 속속 스페인 내부로 진주시켰습니다.  거기에 추가로 뮈라(Murat)가 스페인 주둔 프랑스군을 검열한 뒤 지브롤터 해협의 영국군 요새 지브랄타 (Gibraltar)를 공략한다는 핑계 하에 직접 5만군을 이끌고 1808년 3월 중순까지 부르고스 (Burgos)로 입성할 계획이었습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든 군사적으로든 이미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굳이 무력 충돌을 일으켜 피를 흘릴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딱 하나, 혹시 스페인 국왕도 나폴레옹에게 휘둘리는 것이 지긋지긋해지면 포르투갈 왕정처럼 남미 등으로 줄행랑을 칠 것이 염려되기는 했습니다.  이 때문에 프랑스 해군 소함대가 스페인 제1의 군항 카디즈 앞바다를 아무 이유없이 순찰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슈투카, 하인켈, 도르니에 등의 폭격기를 가진 히틀러도 함락시키지 못한 천혜의 요새 지브랄타입니다.  물론 당시 스페인의 협력이 있었다면 함락시켰겠지요.  하지만 항공기와 중포가 없던 나폴레옹 시대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실질적인 정복 과정에서 유일하게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으로, 스페인 국민들의 반감을 염려했습니다.  그는 독재자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국민들의 지지에 기반한 독재자였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특히 스페인 국내로 진주하는 프랑스군이 스페인 국민들을 자극할 것을 크게 우려했습니다.  원래 프랑스군은 행군시 식량을 현지 조달하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전쟁시 독일이나 이탈리아를 관통할 때야 적국이니까 마음놓고 약탈을 해도 괜찮았는데, 스페인은 동맹국이다보니 그것이 곤란했던 것입니다.  차라리 프랑스 내를 행군할 때가 더 편할 수 있었습니다.  일단 주민들도 우호적이고, 또 물자를 현지 징발하면서 징발 증서를 끊어주면 되니까요.  그러나 아무리 종속 관계에 있는 동맹국이라고 해도, 타국민을 다룰 때는 그것이 좀 곤란하고 조심스러웠습니다. 

당시 스페인 민중의 프랑스에 대한 감정은 좋은 편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최근의 경제 위기가 프랑스의 수탈과 대륙봉쇄령 탓이라는 원망도 있었고, 특히 최근 카톨릭과 정교협약(Concordat)을 통해 화해를 하기는 했지만, '프랑스는 카톨릭을 박해한 막돼먹은 빨갱이 혁명분자들의 나라' 라는 종교적 반감이 강했던 것입니다.  스페인 민중에 대해서는 당시 영국인들도 '무식한데다 광적인 카톨릭'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스페인 민중의 정서에서 카톨릭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습니다.  또 국정을 농단하는 고도이 수상에 대한 불만이 귀족들은 물론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도 고조되는 상황에서, 프랑스군이 스페인 국내로 진주하는 것은 '고도이가 프랑스 놈들에게 나라를 팔아먹었다! 프랑스놈들이 스페인을 점령하러 들어왔다!' 라는 선동이 터져나오기 딱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런 상황을 감안하여, 스페인으로 진주하는 군단 병사들의 급료를 위해 2백만 프랑의 현금을, 그것도 모두 금화로 지급했습니다.  당시 병사들의 봉급에는 원래 식대가 포함되어 있었거든요.  즉, 스페인 주민들에게 제대로 현금을 내고 사먹으라는 것이었지요.  




(전쟁하는데 있어 총과 탄약 못지 않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이 금화입니다.  이 사진은 20프랑짜리 나폴레옹 금화입니다.)



  
그러나 생각하지도 않은 사건이 스페인에서 벌어져, 이렇게 스페인에서 말썽을 피하고자 애를 썼던 나폴레옹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어떻게 보면 필연적인 일이라고 할 수도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바로 1808년 3월 중순에 일어난 아랑훼즈 (Aranjuez) 모반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부르봉 출신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는 국정을 왕비의 측근인 고도이 수상에게 맡겨놓고 흥청망청 향락에 젖어 살았고, 고도이도 사리사욕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국민들로부터 대단한 원성과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전통적으로 외국 세력을 혐오하던 스페인 국민들과 귀족들은, 가증스러운 프랑스군을 스페인 내부까지 끌어들인 것 때문에라도 고도이의 정치에 대해 극도의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이 꿈꾸던 것은 프랑스처럼 대혁명을 일으켜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도 어느 정도 계몽사상이 일반 국민들과 시민 계급에 퍼진 뒤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이거든요.  프랑스에 비해 당시 스페인은 그런 사상적 토양과 시민 계급의 성장이 무척 뒤진 편이었습니다.  스페인 민중은 그런 과격하고 진보적인 혁명 대신, 더 똘똘한 왕족을 내세우는 것을 택합니다.  바로 카를로스 4세의 아들인 아스투리아스 왕자 (Prince of Asturias, 스페인어로는 Príncipe de Asturias) 페르난도 (Fernando, 영어로는 Ferdinand)였습니다.  국민들은 고도이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페르난도 왕자에게 큰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 국민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아 "The Desired" (국민이 원하는 왕)으로 불렸던 페르난도 7세입니다.)




(아스투리아스 왕자라는 호칭은 영국의 왕세자를 그냥 Prince of Wales 라고 부르는 것처럼 스페인 왕세자가 자동으로 갖게 되는 호칭입니다.  위는 아스투리아스 왕자를 상징하는 휘장 Coat of arms인데, 맨 아래에 매달린 양의 모습이 인상적이네요.)



여기서 잠깐, 페르난도 왕자는 정식 왕세자였으므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면 국왕에 오를 몸이었는데 왜 굳이 아버지에 대해서 모반을 일으키려 했을까요 ?  간단합니다.  당시 카를로스 4세 부부는 친아들인 페르난도 왕자보다 고도이 수상을 더 신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도이의 권력은 페르난도 왕자를 능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페르난도 왕자는 고도이를 미워할 이유가 충분했는데, 페르난도 왕자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던 고도이 수상의 국정 농단이 결국 자신의 왕세자 자리를 위협할지도 모르는다는 두려움까지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두려움은 공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도이 또한 페르난도가 자신을 미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영조 시대 노론 중신들이 세손이던 정조의 제거를 위해 무던히 애쓰던 것처럼 페르난도의 폐세자를 공작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갈등으로 인해, 이미 1807년에 페르난도를 왕위에 앉히려는 역적모의가 한차례 있었습니다.  이를 마드리드 교외 스페인 왕궁의 이름을 따서 에스코리알 모의 사건 (Conspiración-proceso de El Escorial)이라고 부릅니다.  사전 적발된 이 음모에 대해 추궁을 받자, 페르난도는 의리없이 공모자들의 이름을 술술 다 불고 카를로스 4세의 용서를 구하는 저자세를 취했습니다.  모든 것이 흐리멍텅했던 카를로스 4세는 페르난도 왕자 뿐만 아니라, 페르난도가 다 까발렸던 공모자들까지 모두 다 용서하는 아량을 베풀어 이 사건은 큰 피바람없이 그냥 흘러가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원인이 그대로 있는데 그냥 흘러갈 리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문제에 신경을 쓰고 있던 1808년 3월 중순, 페르난도 일파는 고도이 수상의 일당이 페르난도 왕자를 납치하려고 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아예 선수를 쳐 고도이 수상을 납치하기로 합니다.  당시 카를로스 국왕 부부와 고도이는 마드리드 남쪽 약 40km 지점에 있는 아랑훼즈 (Aranjuez)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표면적인 이유가 무엇이든, 사실 이들도 마드리드를 향해 진군해오고 있는 뮈라와 그의 프랑스군의 의도가 무척 의심스러웠기 때문에 일종의 피난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의 배경이 된 아랑훼즈 궁전입니다.)




이렇게 아랑훼즈에서 마음을 놓고 있던 고도이와 카를로스 국왕 부부에게 3월 17일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집니다.  갑자기 일단의 폭도들이 이들이 머물고 있던 저택을 습격한 것입니다.  이들의 목표는 카를로스 4세 부부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희대의 간신 고도이였지요.  물론 이들은 페르난도 왕자와 그의 일당들의 조종을 받는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이들은 무려 3일 동안 저택을 샅샅이 뒤졌으나 고도이를 사로잡는데 실패했습니다.  분명히 저택 주변을 완전 봉쇄하고 완벽한 기습을 했는데도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고도이가 사라진 것입니다.  알고보니, 놀랍게도 고도이는 다락방의 돌돌 말린 카펫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3일 동안이나요.  그러나 언제까지나 거기 숨어 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야밤에 다락에서 기어나와 탈출하려던 고도이는 아직도 저택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폭도들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이 아랑훼즈 폭동 사건은 당시 스페인을 말아먹던 카를로스 4세, 그리고 특히 고도이에 대한 민중의 봉기로 받아들여져 지금도 이렇게 리앤액트를 통해 기념되고 있습니다.  다만 이때 대안으로 추대되었던 페르난도 왕자는 훗날 답이 없는 수구꼴통으로 뒤늦게 밝혀져 스페인의 혼란스러운 역사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고도이는 이때 폭도들에게 거의 죽다 살아날 정도로 흠씬 두들겨 맞았습니다.  장시간에 걸쳐 그야말로 스페인 민중들의 분노가 제대로 실린 구타를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고도이 체포 소식을 듣고 달려온 페르난도가 '이건 너무 한 것 아니냐' 라며 직접 말리지 않았다면 아마 거기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비참하게 얻어터진 몰골 그대로 지하 감방에 수주간 쳐박혀 있게 됩니다.  수주 후, 프랑스군에게 구출되어 지하 감방에서 기어 나왔을 때, 이때 얻어터지며 피투성이가 된 속옷 차림 그대로였고, 수염도 덮수룩한 상태여서, 도저히 스페인을 주름잡던 권세가의 모습이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프랑스군에 의해 프랑스로 압송되어 한동안 귀양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한편, 자신의 총신 고도이가 이렇게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구타를 당하는 것을 힘없이 지켜봐야만 했던 카를로스 4세도 공포에 질리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카를로스는 이 폭도들이 이틀 뒤 '왕세자인 페르난도 왕자에게 양위하시지요' 라고 요구하자, 군말 없이 따르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뒤에서 조종하던 페르난도 왕자는 굳이 사양하지 않고 페르난도 7세로서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명에 따라 마드리드에 입성한 뮈라를 기다리던 것은 바로 이 난장판이었습니다.  일단 뮈라는 폐위된 카를로스 4세의 신병을 인도받아 스페인 국왕의 정식 궁전인 에스코리알 (El Escorial) 궁전 내에 보호했습니다.  뮈라는 '스페인 내부 세력간의 정쟁에서 어느 특정 한편을 들지 말라'는 나폴레옹의 사전 지시대로, 페르난도 2세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제3자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물론 구세주를 만난 카를로스 4세는 뮈라를 통해 나폴레옹에게 자기 아들의 반역에 대해 신랄한 비난을 늘어놓으며 공격했습니다.  나폴레옹의 굳건한 동맹자인 카를로스 4세가 자기 아들에게 쫓겨나다니, 이런 상황은 정말 계산 밖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나폴레옹도 고도이와 페르난도 사이의 불화에 대해서는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런 뜻하지 않은 소동이 벌어질 줄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지요.  나폴레옹은 당황했습니다.  




(역대 스페인 국왕의 장엄한 궁전이었던 엘 에스코리알 궁전입니다.)



나폴레옹이 당황한 이유는 결코 동맹국의 꼴사나운 집안 싸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결정을 내리는데 주저함이 없는 쾌남아였는데, 이번에 내려야 하는 결정은 정말 난감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앞에는 두 명의 왕자가 서 있었습니다.  '평화의 왕자' 고도이와 '아스투리아스 왕자' 페르난도였지요.  그러나 두 왕자 어느 쪽을 택하든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 뻔했습니다.  먼저, 고도이와 카를로스 4세 일당은 내부로부터의 원성이 너무 자자하여 도저히 선택할 만한 카드가 아니었습니다.  이번 모반 사건에서 그토록 야만스럽게 쫓겨났는데도 스페인 내부에서 어느 누구도 국왕 편에 서서 진압에 나서지 않았다는 것만 봐도 그 사실은 명확해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페르난도 왕자를 택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를 앞세운 모반 세력은 반프랑스 기세로 충만한 친영국파였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아예 이번 기회에 부르봉 왕가를 스페인에서 내쫓고 보나파르트 가문의 왕을 스페인 왕좌에 앉힐 것을 마음먹은 것은 아마 이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뮈라에게 "절대 스페인군과 무력 충돌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스페인과 전쟁을 벌일 경우 모든 것이 끝장이다"라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독립과 재건을 위해 적극 협조할 것이며 프랑스 제국이 그의 치하에서 어떤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있는지에 대해 스페인 귀족들과 시민 계급에게 잘 설명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때부터 뭔가 복선을 깔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는 표면적으로는 '스페인 왕가 내부의 분쟁을 화해시키기 위해' 마드리드로 직접 행차하겠다며 여정에 올랐으나, 스페인으로 향하던 도중 스페인과의 국경 인근 도시인 바욘 (Bayonne)에서 '그러지 말고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가 이리로 와서 나와 회담하자'라며 그들을 초청했습니다.  뮈라의 군사적 보호가 없으면 스페인 땅에서 하루도 견디지 못할 처지였던 카를로스 4세야 기쁜 마음으로 나폴레옹의 초대에 응했습니다.  문제는 페르난도 왕자, 아니 페르난도 7세였습니다.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왕위를 찬탈지만 아직 나폴레옹의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였던 페르난도가 잠재적으로 위험할 수도 있는 이 초대에 응할 가능성은 반반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페르난도에게 '자신의 조카딸, 정확하게는 루시엥의 딸을 배필로 줄 것이며, 카를로스 4세의 양위가 협박에 의한 강압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설명만 잘 되면 페르난도의 즉위를 인정하겠다'라는 달콤한 유혹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전달하러 간 사바리 (Savary) 장군에게, 나폴레옹은 '만약 이 초대에 응하지 않을 경우 페르난도를 체포하여 강제로 끌고 오라'는 비밀 지령을 내렸습니다.  나폴레옹에게는 다행히도  페르난도는 판단력이 그다지 좋지 못했는지 이 위험한 초대에 덥석 응해버렸습니다.  




(바욘은 스페인과의 접경 지대에 있는 대서양 연안 도시로서, 역사적으로는 프랑스라기보다는 바스크 지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총검을 프랑스어로 또 영어로도 바요넷이라고 하는데, 그 총검이 시작된 것이 바로 이곳으로서, 이 지방의 반란군이 탄약이 떨어지자 총구 끝에 단검을 끼워 싸운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바욘에서 나폴레옹은 먼저 페르난도를, 그 뒤에 도착한 카를로스 4세 부부를 영접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그의 외무장관인 탈레랑에게 보낸 편지에서, 카를로스 4세 부부에게는 무척 후한 평을, 그리고 페르난도에게는 다음과 같은, 이보다 더한 악평이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혹평을 남겼습니다.

"이 아스투리아스 왕자라는 페르난도는 매우 멍청하고 매우 혐오스러운 프랑스의 적이다.  (멍청이 왕으로 나폴레옹에게 노골적인 홀대를 받았던) 프로이센 왕도 이 친구에 비하면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친구는 모든 일에 대해 무심한 편인데, 무척이나 물질적이고, 하루에 4끼를 먹는데다, 무슨 일에서건 아무 생각이 없다"

그러나 어쨌거나 이 페르난도 왕자는 스페인 귀족들과 민중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 페르난도 7세가 스페인 국왕으로 복위한 뒤에야, 스페인 귀족들과 민중은 '나폴레옹의 판단이 옳았다'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이런 페르난도를 그냥 다짜고짜 폐위시킬 수는 없었으므로, 나폴레옹은 먼저 언론 플레이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페르난도를 압박하여 그의 부친인 카를로스 4세에게 사과하는 편지를 쓰게 하고, 또 카를로스 4세에게는 아들을 비난하는 편지를 쓰게 한 뒤, 이 편지를 프랑스와 스페인의 신문들을 통해 공개하여 페르난도는 멍청이 악당이고 카를로스는 무능력한 국왕임을 온 유럽에 알렸습니다.  이어서 페르난도에게 당근을 제시했습니다.  "부친에게 순순히 왕위를 돌려주면 연금 50만 프랑을 받으며 탈레랑의 영지인 발롱세 (Valencay)에서 편히 먹고 살 수 있게 해주겠다" 라고 제안한 것이지요.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던 페르난도는 순순히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당시 탈레랑이 차지하고 있던 발롱세 샤또입니다.  나라 팔아먹는 대가치고는 그리 나쁘지 않아 보이네요.)



이제 왕권을 되찾는 것인가 싶었던 카를로스 4세에게도 비슷한 제안이 주어졌습니다.  "프랑스 내에 다른 영지 2곳을 주고 또 연금으로 750만 프랑을 줄 테니 스페인 왕위를 포기하라"는 것이었지요.  이런 모욕적인 제의를 받았을 때 정상적인 국왕의 반응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겠으나, 카를로스의 반응은 간단했습니다.  "OK !"  또 궁금한 것은 자신들의 왕이 이런 식으로 폐위되는 것에 대해 스페인 귀족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 하는 것이겠습니다.  용의주도한 나폴레옹은 이 바욘 폐위 음모를 꾸미기 훨씬 전부터, 마드리드를 점령한 뮈라를 통해 스페인 귀족들에게 "프랑스 제국의 권위 하에서, 너희들이 누리던 특권과 면세 특권 등은 계속 누리게 될 것이다"라는 것을 강조하며 회유책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스페인 귀족들의 반응이 하도 호의적이어서, 뮈라는 '스페인 귀족들이 날 좋아하는 모양이다, 이러다가 내가 스페인 왕위에 오를 수도 있겠다'라고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프랑스 루이 14세가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희생해가며 얻어낸 부르봉 왕가의 스페인 왕좌가 보나파르트 가문으로 넘어가는 순간은 이렇게 허무했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공석이 된 스페인 왕위에 누가 앉는가에 대해 나폴레옹은 먼저 자기 자신이 앉을 생각도 했으나, 네덜란드 왕이던 동생 루이에게 그 왕위를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작년인 1806년에 차지한 네덜란드 왕좌의 매력에 흠뻑 빠져 스스로 자신의 이름인 루이 1세를 네덜란드 식으로 Lodewijk I (로더빅 1세)로 부르게 하고 자신은 물론 프랑스인 신하들에게도 공식석상에서는 네덜란드어로만 말하도록 할 정도였던 루이는 이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 스페인 왕위는 당시 나폴리 왕이던 형 조제프에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루이 보나파르트 또는 로더빅 1세입니다.  네덜란드인들로부터 '선량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지지를 받은 이 양반은 심지어 자기 와이프인 오르탕스에게까지 프랑스 시민권을 버리고 완전히 네덜란드인으로 다시 태어날 것을 강요했는데, 이것도 이 부부 사이를 틀어지게 만든 하나의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 양반의 아들이 바로 나폴레옹 3세입니다.)



나폴레옹은 조제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스페인은 나폴리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나라이다.  인구가 1,100만이나 되고 해외 식민지를 제외한 본토의 세수만도 1억5천만 프랑에 달한다" 라며 보나파르트 가문이 차지한 대제국에 감격해했습니다.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순순히 양위를 받고, 마드리드 귀족들의 지지도 확보한 상태였으므로 나폴레옹은 아랑훼즈에서 벌어진 뜻하지 않은 대소동이 보나파르트 왕가의 번영과 영광을 드높이는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착각일 뿐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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