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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수렁의 시작 - 5월 2일의 봉기

by nasica-old 2015.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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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아랑후에스 (아랑훼즈 협주곡이 유명해서 아랑훼즈라고 썼는데, 댓글에서 스페인어로는 아랑후에스가 맞다고 하시길래, 찾아보니 맞는 말씀이라 그렇게 쓰기로 했습니다) 모반 사건을 계기로, 나폴레옹이 계획에도 없던 스페인 왕국 접수 프로젝트를 "겁도 없이" 시작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명석한 머리로 이것저것 계산해 보았을 때, 정치적으로나 무력으로나 스페인 정복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임 국왕들(?)로부터 순순히 양위도 받았고, 마드리드의 귀족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와 지리 등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했던 나폴레옹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혹은 애써 무시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스페인의 역사와 그에 따른 지역적, 국민적 정서의 특수성이었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만 스페인은 거의 프랑스나 독일만큼 넓은 땅입니다.  스페인은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이 오랫동안 점거했던 땅이고, 그 이후 중세 시대의 여러 카톨릭 왕국들이 조금씩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는 재정복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슬람 세력과의 오랜 투쟁의 결과, 국민들 정서는 매우 보수적인, 근본주의에 가까운 카톨릭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러 왕국이 결혼이나 정치적 연합 등을 거치며 점차 하나의 왕국으로 합해진 것이 스페인 왕국이었습니다.  게다가, 16세기 초반부터 역시 혼인을 통해 외국 왕족인 합스부르크 및 부르봉 가문 출신이 스페인 왕위를 차지하면서, 안달루시아니 카탈루냐니 발렌시아니 하는 자치구들의 독립성과 지방색이 강하다는 특색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현대 스페인의 각 자치구를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간의 라이벌 관계 덕분에,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젠 카탈루냐가 스페인으로부터 지금도 독립을 원한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지요.)


이런 정서는 프랑스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프랑스는 혁명 이전에 이미 계몽사상이 널리 퍼진 상태였고, 루이 14세 덕분에 강력한 중앙집권제도가 확립되어 파리가 전체 프랑스를 좌우하는 정치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을 외부에서는 문어 같은 '두족류'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파리가 머리 노릇을 하고, 나머지 지방은 모두 발에 해당한다는 것이었지요.  국가란 이래야 한다는 상식은 그가 정복했던 다른 나라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탈리아나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도 그 왕정의 항복만 받아내면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요.  특히, 나폴레옹이 기존 왕정을 폐하고 자신의 일족을 그 자리에 앉힌 것은 네덜란드나 중부 독일의 작은 나라들 뿐이었지, 스페인과 같은 거대 제국은 처음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나름 스스로를 똑똑하고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한계가 있었던 것이지요.

시작은 사소한 것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의 군대가 정복지에서 어떤 행실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마드리드에 주둔한 뮈라에게도 신신당부하기를, 절대 부대를 마드리드 시내에 묵게 하지 말고 시외에 캠프를 치고 주둔하도록 했습니다.  군대가 시내에 머물 경우 온갖 행패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을 것이 뻔했으니까요.  그러나 부하들을 아끼는 멋쟁이 대장 뮈라는 '스페인 시민들을 프랑스 시민들처럼 대하라'는 자상한 명령과 함께, 상당수 부대를 시내에 주둔하도록 허용했습니다.  이들이 뮈라의 훈령을 잘 지켰다면 어떘을지 모르겠으나, 이들은 군기가 잘 잡힌 1급 부대가 아니라, 훈련과 규율이 부족한 2진급 부대였습니다.  이들이 마드리드 시민들로부터 갈취와 도둑질을 시작하는데는 별로 오래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마드리드의 귀족들은 뮈라와 즐겁게 와인잔을 부딪히며 자신들의 부와 특권이 계속 유지될 것에 대해 희희낙낙하고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마드리드 시민들은 혐오스러운 프랑스군에 대한 감정이 점점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사건이 터진 것은 바욘에서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가 나폴레옹의 협박과 회유에 넘어가 왕위를 이양한지 얼마 안된 1808년 5월 2일이었습니다.  페르난도 7세의 퇴위에 대한 보상 조건에는 페르난도 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들에게도 같은 액수의 연금과 편히 지낼 영지가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스페인 내에 카를로스 4세의 다른 아들들이 남아 있을 경우, 그들을 옹립하려는 불순 세력의 움직임이 있을까를 염려한 나폴레옹의 주도면밀함 때문에, 페르난도의 더 어린 형제들도 프랑스 내로 옮기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래서, 아직 마드리드의 왕궁 (Palacio Real de Madrid)에 남아 있던 카를로스의 4세의 10대 초반의 왕자와 공주를 '부모와 형이 기다리고 있는' 프랑스 바욘으로 모셔가겠다는 요청을 뮈라가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건 곤란하다'라며 거절하던 마드리드 명사회에서도, 페르난도 7세가 편지를 보내 뮈라의 요청에 따를 것을 부탁하자, 그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이송 날짜는 5월 2일로 잡혔습니다.




(마드리드 시내의 왕궁인 Palacio Real de Madrid 입니다.)



이날 아침부터 마드리드 왕궁 앞뜰에는 많은 군중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등 소란스러웠습니다.  이들은 페르난도 7세의 열혈 지지파로서 이젠 머리 떨어진 지네 꼴이었지만, 부르봉 왕가의 모든 핏줄을 스페인에서 다 제거하려는 프랑스군의 의도에 크게 분개한 상태였습니다.  특히 천하태평 뮈라가 마드리드 시내에 풀어놓은 프랑스군의 오만함과 노략질로 인한 불만이 자자한 상태였으므로, 이날 아침 '어린 왕자님과 공주님을 지키자'라는 구호로 군중을 끌어모으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뮈라는 이 소란에 대해 정예인 근위 척탄병 1개 대대와 포병들을 파견하는 것으로 대응했습니다.  해산을 명하는데도 (아마 프랑스어로 했기 때문에 못 알아들었을까요 ?) 군중들이 흩어지지 않자, 이들은 망설이지 않고 발포했고, 사실상 비무장 상태였던 이 군중들은 거미새끼처럼 흩어져야 했습니다.  뮈라는 의기양양하게 상황 종료를 선언했습니다.




(1808년 5월 2일 격전이 벌어졌던 푸에르타 델 솔 광장입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군중들은 흩어졌지만 분노는 증폭되었습니다.  곧이어 마드리드 전역에서 봉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시민들은 아직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마드리드 시내를 2~3명이서 기웃거리던 프랑스 병사들을 둘러싸고 덮치거나, 순찰을 도는 소대에게 창문에서 저격하는 방식으로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이에 대해 뮈라는 마드리드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규모 병력을 풀어 놓았습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위험을 느끼고 집안으로 대피했으나, 페르난도 7세를 지지하는 파를 중심으로 2~3만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프랑스군과 맞섰습니다.  특히 푸에르타 델 솔 (Puerta del Sol, 태양의 문)과 푸에르타 델 톨레도 (Puerta de Toledo, 톨레도의 문) 주변에서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습니다.  마드리드 시민들은 용감했습니다.  10대 소녀였던 말라사냐 (Manuela Malasaña)까지도 가담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물론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곧 프랑스군은 오합지졸 시민군을 제압했고, '폭도들'은 수백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말라사냐와 그의 딸' Malasana y su hija 라는 그림입니다.  Eugenio Álvarez Dumont의 작품인데, 원래 이 말라사냐라는 10대 소녀는 프랑스군으로부터 겁탈당할 뻔 한 뒤 5월 2일 봉기에 참여했다고 전해집니다.  말라사냐는 결국 프랑스군에 체포된 뒤 처형되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스페인 정규군은 대체 뭘 하고 있었을까요 ?  입장이 굉장히 난처했을 것입니다.  분명히 저들은 폭도이고, 정부군으로서 진압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스페인의 혈맹으로서, 자신들은 프랑스군을 도와 폭도들을 진압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봐도 몽둥이와 사냥총 정도를 들고 외국군의 살육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자신들의 총검으로 진압하는 것은 좀 아니다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본분을 무시하고 저 가증스러운 프랑스놈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도 없었습니다.  이 날 마드리드 시내에 주둔하고 있던 스페인 정규군은 대부분 그냥 자기 막사에 쳐박혀 애써 아무 것도 못 본 척 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예외도 있었습니다.  딱 1개 부대, 즉 몬텔레온 (Monteleón) 병영에 주둔하고 있던 포병 부대가 다오이스 (Luis Daoíz de Torres)와 벨라르드 (Pedro Velarde y Santillán)라는 두 열혈 대위의 지휘 하에 시민군과 함께 프랑스군에 대항했습니다.  물론 이들은 압도적인 수의 프랑스군에게 곧 제압되었고, 두 대위는 전투 중 사살되고 말았습니다.




(질서를 유지하려는 프랑스군의 정당한 치안 활동에 반기를 들고 몬텔레온 병영에서 폭도들과 합류하여 반항한 폭도들의 괴수, 벨라르드 대위입니다.  물론 오늘날 스페인에 가서 그런 개소리를 늘어놓으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세비야에 있는 다오이스 대위의 동상입니다.)





(마드리드에 있는 5월 2일 봉기 기념 동상입니다.)



두 대위가 전사하지 않았다면 그 다음날 치욕스럽게 벽에 기대서서 사살될 팔자였습니다.  뮈라는 나폴레옹을 따라 이탈리아와 이집트에서 이런 민중 봉기를 여러차례 겪은 베테랑이었습니다.  그는 즉각 군법 위원회를 구성하고, 전투 현장에서 붙잡힌 시민들은 물론, 이후 이어진 수색과 검문에서 어떤 종류든지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소지한 모든 시민들을 다 체포하여 처형했습니다.  5월 2일 당일은 물론 그 다음날에도 이렇게 수백명의 시민들이 프랑스군에게 처형되었습니다.  폭도 처벌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아, 봉기에 가담했던 10대 소녀였던 말라사냐도 이 과정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이 5월 2일 마드리드의 봉기 사건은 Dos de Mayo (스페인어로 5월 2일)라고 불리며, 당대의 대화가였던 고야 (Francisco Goya)에 의해 "마멜룩 기병들의 돌격"과 "5월 3일"이라는 제목의 명작으로 승화됩니다.




(고야의 명작, '5월 2일 마멜룩의 돌격'입니다.  이집트에서 나폴레옹을 따라온 마멜룩 부대는 여기서 고야의 그림으로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마멜룩 부대는 나폴레옹의 근위대 소속이었는데, 이집트에서 나폴레옹이 귀환할 때 일부 따라오기도 했으나 이후 조금씩 프랑스군을 따라온 자들이 더 많았고, 나중에는 마멜룩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프랑스 청년들이 그 기묘한 복장과 후한 급여를 보고 마멜룩 부대에 입대하기도 했습니다.) 




(고야의 더 유명한 명작, '5월 3일'입니다.  고야는 당시 조제프 1세로부터 그림 의뢰를 받는 등 보나파르트 왕조에 대해 협조하는 편이었으나, 정치적으로는 중립을 지켰으므로 친불파 내지 매국노파로 욕을 먹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후 복위한 페르난도 7세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그림들은 물론 나폴레옹 몰락 이후 그려진 것들입니다.)



바욘에서 이 봉기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봉기 그 자체보다, 이 봉기를 신속히 진압하고 무자비한 탄압을 가한 뮈라의 일처리에 크게 만족했습니다.  그에게는 이런 정도의 폭동은 당연히 예상한 정도의 작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뮈라와 새로 스페인으로 병력을 몰고 들어간 베시에르 등에게 편지를 보내 더욱 무자비한 탄압과 강력한 진압 태세를 갖출 것을 지시했고,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는 스페인 각 지방 자치구들 대표들을 바욘으로 불러 모아 지지를 받아냄으로써, 형 조제프의 스페인 국왕 즉위를 공식화 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새로운 스페인 왕국은 과거와 같은 전제군주제가 아닌, 헌법에 기초한 민주적 입헌군주제임을 표방하며, 그가 마련한 스페인 헌법 초안을 마드리드의 뮈라에게 보내 마드리드 귀족들의 의견을 구했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은 스페인 국민들에게 보내는 포고문을 함께 보냅니다.  이 포고문에서 나폴레옹이 말하려는 바를 요약하면 이랬습니다.  

"스페인은 과거 위대한 제국이었으나, 오늘날 그대들의 몰락한 모습을 보라.  이는 그대들의 잘못이 아니라 잘못된 왕정 때문이었다.  나의 영도 하에, 스페인은 다시 위대한 국가가 될 것이다.  훗날 그대들은 내 이름을 들을 때마다, 우리나라를 되살린 사람이라고 일컫게 될 것이다."

이런 나폴레옹의 호소에 응하여, 바욘에 도착한 스페인 귀족 대표들은 프랑스의 통치를 환영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나폴레옹이 내놓은 헌법 초안에 적극 찬성하는 등 나폴레옹의 부푼 희망을 기정사실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이 가장 신경쓰던 스페인 정규군의 문제도 쉽게 해결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카스티야 (Castile) 지방의 총사령관인 쿠에스타 (Gregorio García de la Cuesta) 장군 및 안달루시아 (Andalucia) 지방 총사령관 카스타뇨스 (Don Francisco Javier Castaños Aragorri Urioste y Olavide) 장군 등이 프랑스군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쿠에스타 장군의 초상입니다.)



나폴레옹이 스스로 생각해봐도, 스페인 국민들이 자신의 계몽적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무지몽매한 합스부르크와 부르봉의 전제적 압제하에 쇠락해가던 스페인은 그의 영도하에 번영을 이룰 것이고, 이런 번영은 결국 스페인 국민들 한사람한사람에게 더 나은 생활과 더 밝은 미래를 약속할 것이었습니다.  그는 포르투갈에 주둔한 쥐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늦어도 11월까지는 스페인 상황이 모두 정리될 것'이라며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딴판이었습니다.  5월 2일 마드리드 봉기 이후, 스페인 전역은 반란의 기세로 들끓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에 대한 협력을 천명했던 바다호스 (Badajoz), 카르타헤나 (Cartagena), 카디즈 (Cadiz) 등 주요 지방 및 도시의 주지사와 시장들이 성난 '폭도들'에 의해 쫓겨나는 봉변을 당했고, 발렌시아 (Valencia)와 나바르 (Navarre) 지방은 공공연한 반란에 돌입했습니다.  한술 더 떠,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주도인 세비야 (Seville) 대표단은 아직까지도 전쟁 상태이던 적국 영국령인 지브랄타 요새에 나타나 무기와 군자금을 요청했고, 대서양에 면한 북부의 아스투리아스 (Asturias) 지방에서는 대표단을 런던에 보내 아예 이베리아 반도에 지상군 파병을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대체 이 답이 안 나오는 스페인 촌놈들은 왜 번영과 질서, 영광과 평화가 약속된 프랑스와의 협력을 거부하고 잔혹한 전쟁과 궁핍, 파괴와 살육의 길을 택했을까요 ?  정말 스페인 민중이 무식하고 미신에 사로잡힌데다 이단심판을 즐기는 카톨릭 광신도였기 때문이었을까요 ?




(세비야 전경입니다.  세비야는 남쪽 안달루시아에 위치한 도시로서, 지브랄타와는 매우 가깝습니다.  물론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직업은 이발사지요.)



스페인 국민들에 대한 나폴레옹의 포고문은 장미빛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 스페인 현지의 프랑스군이 보여준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스페인 국민들의 긍지와 자존심은 이미 5월 2일 봉기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으로 짓밟힌 상태였는데, 그에 더해 프랑스의 합리적인 통치라는 것이 어떤 것이지 곧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거든요.  만약 나폴레옹의 약속이 진정한 것이었다면 프랑스는 스페인의 산업과 통상을 장려하고 민주적인 법률을 제정하는 등의 활동에 주력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장 프랑스군이 총검을 들이대고 요구한 것은 이탈리아나 이집트, 스위스와 프로이센 등에서 갈구했던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즉 경화,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진 귀금속 화폐였던 것이지요.   

나폴레옹의 정복지 통치에는 항상 일정 패턴이 있었습니다.  먼저 프랑스군이 총검을 들이대고 씩씩하게 지나가고, 이어서 나폴레옹 민법전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계몽주의적 질서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반드시 병참 장교가 먼저 왔습니다.  즉, 경제적 수탈이 반드시 따랐습니다.  이베리아 반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먼저, 쥐노가 포르투갈에서 당장 6백만 프랑을 파리로 보내와야 했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징수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포르투갈 왕가가 남기고 간 동산 및 부동산, 그리고 교회 재산 등을 압류 처분하여 추가로 5천만 프랑을 보내야 했습니다.  뮈라도 나폴레옹에게서 스페인 왕가의 보석류 등을 저당잡히고 2천5백만 프랑을 모아 송금하라는 숙제를 받아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미 많은 도시와 마을들에는 무거운 세금이 부과된 상태였지요.  나폴레옹이 스페인의 번영을 바랬다면 그 이유는 딱 하나, 스페인으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걷으려는 목적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의 낙후된 산업을 일으키는 것은 긴 세월이 걸리는 일인데다, 당장은 영국에 대항하는 대륙 봉쇄령을 집행해야 했으므로, 스페인의 경제는 당분간 불황을 피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번영이라는 달콤한 약속을 내세웠을 뿐, 당장의 속셈은 당시 경제의 피와 살이라고 할 수 있는 금화와 은화를 빼앗아오는 것이 주목적이었습니다.  스페인 민중은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가뜩이나 프랑스가 강요한 영국과의 전쟁 탓에 해외 식민지와의 교역이 끊겨 경제 파탄이 난 상태였는데, 거기에 이런 노골적 경제적 수탈까지 더해지니 스페인 민중으로서도 참고 견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여러번 보신 이 그림은 1798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프랑스군을 끌어들여 혁명을 쟁취한 시민들이 자유의 나무 (Arbre de la liberte)를 중심으로 축하하며 춤을 추는 동안, 프랑스군 병참 부대가 각종 재물과 보물을 싹쓸이 해가는 장면을 그린 풍자화입니다.  프랑스군의 정복지에서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림이지요.)



하지만 민중이 분노한다고 문제가 극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페인 곳곳에서 무장 봉기가 일어났고, 많은 지역들의 자치 정부가 반프랑스 진영으로 돌아섰습니다.  특히 초기에 프랑스 지지 선언을 하여 나폴레옹을 흡족하게 했던 쿠에스타 장군과 카스타뇨스 장군도 휘하 정규군과 함께 반란군 측에 가담했습니다.  그러나 크게 바뀌는 것이 없었습니다.  곳곳에서 프랑스군은 손쉽게, 매우 손쉽게 스페인군을 격파했습니다.  가령 로그로뇨 (Logroño)를 점거하고 있던 2천명 규모의 반란군을 베르디에 (Verdier)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공격했는데, 반란군은 400명의 전사자를 내고 7문의 대포를 모두 빼앗기는 큰 피해를 입고 격퇴되었으나, 프랑스군의 피해는 불과 3~4명에 불과했습니다.  라살 (Lasalle) 장군의 프랑스 기병대는 바야돌리드 (Valladolid) 북쪽에서 강력한 반란군을 포착했는데, 그의 기병대가 군도를 뽑아들고 돌격해들어가자 이들은 수십명의 전사자를 뒤에 남기고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버렸습니다.  뒤엠므 장군은 바르셀로나 (Barcelona) 인근에서 반란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반란군은 1600명 정도의 사상자를 냈으나 프랑스군은 6명의 사망자와 12명의 부상자를 냈을 뿐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분노로 들고 일어났을 뿐 제대로 된 훈련도, 전술을 아는 지휘관도 제대로 없는 오합지졸들은 프랑스 정규군의 상대가 되지 못 했습니다.  프랑스군은 곳곳에서 수만 정씩의 머스켓 소총을 압류하며 빠르게 스페인 전역의 무장을 해제해 나갔습니다.




(탐욕으로는 나폴레옹 원수들 중 1~2위를 다투던 베시에르 원수입니다.  그러나 탐욕과 용기는 서로 다른 것이어서, 용기와 능력면에서는 매우 뛰어난 군인이었고, 결국 대포알에 직격되어 죽은 몇 안되는 나폴레옹의 원수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 장군들이 이끄는 스페인 정규군이 나선다면 어땠을까요 ?  사라고사 (Zaragoza) 인근에서, 르페브르 (Lefebvre) 원수는 1만2천의 오합지졸 뿐만 아니라 기병대까지 딸린 2개 스페인 정규 연대와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2천명의 스페인 사망자에 프랑스군 피해는 5명 사망과 8명 부상이었습니다.  그 전투에서 프랑스군 중 한번이라도 발포한 것은 3개 경보병 중대 뿐이었는데도 상황이 그랬습니다.  결정적인 타격은 7월 14일 왔습니다.  바야돌리드 북쪽 메디나 데 리오세코 (Medina de Rioseco)에서 쿠에스타 장군과 블레이크 (Joaquín Blake y Joyes) 장군이 직접 지휘하는 3만 정도의 스페인군, 소위 갈리시아 (Galicia) 군이 철통같은 수비 위치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를 베시에르 (Jean-Baptiste Bessières) 원수가 거느리는 약 1만5천 정도의 부대가 1대2라는 수적 불리함에 고지를 향해 올라가야 한다는 지리적 불리함까지 안고 공격했습니다.  결과는 역시, 프랑스군의 압승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이 30명 사망에 250명 부상을 내는 동안, 스페인군은 5천의 사상자에 수천명의 포로를 냈습니다.  이 전투로 갈리시아군은 완전히 궤멸되어 뿔뿔히 흩어져 버렸습니다.  바욘에 모인 스페인 자치구들의 대표단은 이런 압도적인 프랑스군의 무력에 질려 나폴레옹에 대한 지지를 거듭 천명해야 했지요.  나폴레옹은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스페인 전체가 반란으로 들끓고 있다는 소문에 겁을 집어먹은 형 조제프에게 "아무 걱정 말고 스페인 왕좌에 앉으라, 모든 것이 통제하에 있다"라며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은 그가 요리했던 이탈리아나 독일의 소국들과는 매우 다른 재료였습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스페인은 독특하고도 긴 역사 덕분에 지방 자치구들의 독립성이 매우 강한 나라였습니다.  그렇다고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나라도 아니어서,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처럼 그 국왕이 항복하면 온나라가 항복하는 고분고분한 자세도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을 황제의 자리에 올려준 그의 성공 전략은 속전속결로 적의 주력부대를 포위섬멸하고 적의 중추신경계를 마비시킨 뒤 적절한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놈의 스페인이라는 나라에는 애초에 중추신경계라는 것이 없었던 것이지요.  



(산지가 많은 스페인의 특성을 보여주는 지형도입니다.)




(스페인 그라나다 고원에 있는 반건조 사막, 타베르나스 Tabernas 사막입니다.)



그러다보니, 곳곳에서 승전보는 들려오는데도 상황이 좀처럼 좋아지지가 않았습니다.  스페인 정규군과 대규모 반란군들은 손쉽게 격파할 수 있었습니다만, 산골짜기 작은 마을마다 소규모로 들고 일어난 반란군들을 일일이 쳐부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놈의 산골짜기는 왜 그렇게 많은지... 평탄한 프랑스나 이탈리아, 독일과는 달리, 스페인은 산지도 많았고 심지어 사막까지 있었습니다.  또 스페인은 무척이나 넓은 땅이라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행군하려면 매우 긴 거리를 행군해야 했는데, 스페인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가난하고 황량한 땅이라서 현지에서 식량을 구하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곳곳에서 프랑스군의 소규모 정찰대는 계속 습격을 받았고, 바욘의 나폴레옹과 스페인 각지의 프랑스군을 연결해주는 파발마들은 계속 황량한 길가에서 쓰러져 기밀 문서를 빼앗겨야 했습니다.  이런 일은 이탈리아나 독일은 물론 이집트에서조차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이때까지만 해도 프랑스군의 장계는 암호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 피해가 쓰라리게 다가왔습니다.  여태까지는 점령지를 통과하는 전령들이 이렇게 빈번하게 습격받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암호화의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이지요.  (프랑스군의 암호에 대해서는 나폴레옹의 암호에 도전하라 http://blog.daum.net/nasica/6862427 참조) 




(좁은 마을 골목길에서 빨래방망이를 든 동네 아줌마와 싸우는데 흉갑 기병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




나폴레옹의 군사적 업적 중 하나는 근대적 군단 (corps) 체계를 처음으로 도입하고 체계화했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이처럼 정교하고도 유연성이 있는 나폴레옹의 군단 체계는 스페인의 소규모 반란군, 즉 게릴라 (guerilla)들을 상대하는데는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이 게릴라라는 단어 자체가 '작은 전쟁'을 뜻하는 스페인어가 변형되어 만들어진 것인데, 스페인에서는 카스티야 왕국에 반항하는 카탈루냐 지방 등에서 16세기부터 이미 이런 게릴라 전투가 활발히 수행된 바 있어, 스페인 민중들에게는 꽤 익숙한 형태의 전쟁이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군은 승전을 거듭하면서도 점점 악화되는 희한한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제프는 1808년 6월 6일, 마드리드에서 성대한 즉위식을 올리고 스페인 국왕 조제프 1세로 등극할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연이어 날아오는 승전보에 도취되어 스페인 상황이 머지 않아 해결될 것으로 낙관했습니다.  그 낙관을 깨뜨리는 보고가 올라온 것은 앞서 언급된 메디나 데 리오세코에서 베시에르가 대승을 거두었다는 기분 좋은 보고서가 올라온지 며칠 되지 않아서였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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