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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반격의 서막 - 어느 프랑스 해군 대위의 회고록 (상편)

by nasica-old 2015.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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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스페인 왕정이 아랑후에즈 모반 사건으로 난장판이 되자, 나폴레옹이 아예 부르봉 왕가를 스페인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의 형 조제프를 스페인 국왕으로 앉히는 모습과 함께, 스페인이 그 조치에 격렬한 저항으로 맞서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스페인 정규군과 봉기한 민병대의 실력은 보잘 것 없어서, 곳곳에서 프랑스군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1808년 7월, 저 남쪽 안달루시아에서 극적인 전환점이 일어납니다.

스페인 뿐만 아니라 전 유럽 대륙을 무릎 꿇린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 (Grande Armee)가 왜 여기 유럽 대륙의 남서쪽 외진 안달루시아 산골에서 완패를 당했는지를 보시려면, 당시 현장에서 그 상황을 몸으로 겪은 사람의 생생한 증언을 듣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모든 회고록이 그렇듯이, 여기에 소개되는 회고록도 자신의 역할을 과장하고 합리화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100% 믿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 역사가들은 이 회고록의 저자가 기록한 사건의 흐름은 당시 다른 목격자들의 기억과는 여기저기서 많은 차이를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이 회고록은 아래 URL에 영어로 번역된 것이 올라온 것인데, 저는 일일이 문구 하나하나를 번역하지 않고 7월 19일 바일렌 (Bailen) 전투 직전까지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간추려 보여드리겠습니다.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battles/baste/c_baste1.htm





(피에르 바스트가 못 들어본 이름이라고 무시하지 마십시요.  이 양반도 파리 개선문에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밑에 밑줄이 그어진 것에서 짐작하실 수 있듯이, 이 양반은 1814년 브리엔 Brienne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이 경험담의 저자인 피에르 바스트 (Pierre Baste)는 유복한 군수품 상인의 아들로서, 일찍부터 뱃사람으로서의 교육을 받은, 나폴레옹보다 1살 더 많은 해군 장교였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1796년 북부 이탈리아 침공 때 가르다 호수 및 만토바 인근 호수의 프랑스 소함대에서 활약하여 나폴레옹의 눈에 들었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나폴레옹이 그런 작은 호수 속 해군 소함정의 하급 장교를 기억이나 할런지 의심스럽긴 합니다.  




(피에르 바스트 대위는 해군 장교로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도 따라 갔으며, 말타 섬 작전에서도 활약했습니다.)



해군 장교였던 바스트가 순수 지상전이었던 나폴레옹의 스페인 원정에 참전하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1807년 11월에 '포르투갈을 점령한 쥐노(Junot) 장군을 지원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스페인에 평화롭게 진입한 뒤퐁 (Pierre Dupont) 장군의 부대의 최종 목적지는 애초에 스페인 서쪽 끝이자 스페인 최대의 군항인 카디즈 (Cadiz)였습니다.  거기에서 미리 입항한 로질리 (Rosily) 제독의 프랑스 소함대와 함께 합류하여 카디즈에 정박해 있는 스페인 해군 함대를 확보하는 것이었지요.  그러자면 아무래도 해군 장교와 병력,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평상시 군함에 승선하여 거친 선원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던 해병대원들도 함께 가야 했습니다.  바스트 대위는 약 1천명 규모였던 근위 해병 대대 (Marins de la Garde) 소속이었습니다. 

이 스페인 내륙 관통 여행길은 처음에는 무척 평화로왔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때까지만 해도 상당히 우호적이었고, 프랑스군도 금화로 지급된 급료로 식량을 구매해서 먹으며 신사답게 굴었습니다.  그러나 몽세 (Moncey) 원수와 베르티에 (Berthier) 원수의 군단이 속속 추가로 진입하면서, 스페인 사람들은 프랑스군을 의심의 눈초리로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이런 부대들에게 이때까지만 해도 우방국이었던 스페인의 내륙 도로망과 부대 배치 상황들을 면밀히 염탐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바스트 대위에 따르면 비록 스페인 민중들의 태도는 눈에 띄게 적대적으로 변해갔지만, 여전히 스페인 귀족들과 사제들은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을 믿었다고 합니다.

뒤퐁 장군이 이끌던 부대는 원래 지롱드 제2 대기 군단 (II corps d'observation de la Gironde)으로서, 간단히 말해 제2선급 부대였습니다.  뒤퐁 휘하에는 바스트 대위가 소속된 근위 해병 대대와 파리 근위대 (Garde de Paris), 그리고 스위스 용병 연대 하나가 딸려 있었으나, 정작 주력 부대인 2개 보병 사단은 고참 병사들이 전혀 없는, 1807년 겨울에 징집된, 즉 바로 몇주전에 징집된 신병들로만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원래 이 신병 사단들은 무장과 훈련, 그리고 군복 등의 보급품에 있어서 무척이나 열악한 상태라서, 프랑스 국내에 주둔하는 수비대 역할이나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항상 병력이 부족하여 아직 입대 연령에 도달하지도 않은 소년들을 미리 징집하는 무리수를 두고 있는 지경이었습니다.  게다가 장교들도 상당수가 퇴역한지 오래 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현역으로 불려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군에 대해서는 매우 경멸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으므로, '가뜩이나 병력도 부족한데 스페인 촌놈들은 이런 신병 부대로도 충분히 제압 가능'이라고 판단을 내렸던 모양입니다.

이 신병 군단의 실력과 기강에 대해서 보여주는 일화 하나가 있습니다.  1808년 3월이 되어 날씨가 좋아지자, 뒤퐁 장군은 바야돌리드 (Valladolid)에 주둔하고 있던 이 신병 부대를 동원하여 대규모 야전 훈련에 나섰습니다.  이 신병들은 생각보다는 잘 움직여 주었으나, 3월 13일 사격 훈련에서 말러 (Maller) 장군이 사망하는 사고를 일으키고 맙니다.  이날 말러 장군은 훈련병들에게 공포탄으로 사격 훈련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즉, 화약만 장전하고 총알은 넣지 않은 공포탄을 쏘게 되어 있었지요.  그러나 '총알을 제거한 탄약포를 나눠주었다'라는 사실에 안심하고 훈련병들의 총구 앞에서 사격 훈련을 지휘하던 말러 장군이 'Tirez' (사격)을 외치자, 총알은 없었지만 당시 머스켓 소총을 장전할 때 총알과 화약을 밀어넣는데 사용되던 강철 장전봉 (ramrod)이 무려 18개나 화살처럼 날아들었습니다.  그 중 1개가 말러 장군의 머리를 정통으로 꿰뚫어 말러 장군을 즉사시켰습니다.  원래 장전봉은 탄약 장전을 마치면 다시 뽑아 내어 총열 밑의 홈에 끼워넣게 되어 있었는데, 아직 머스켓 소총 장전 동작에 익숙하지 않은 신병들은 긴장하여 장전봉을 뽑아내지 않고 그냥 쏘아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입니다.    




(머스켓 소총의 총열과 그 밑의 홈에 끼우게 되어 있는 장전봉의 모습입니다.)



이런 불안한 병사들을 데리고 명령에 따라 마드리드 인근에 도착하여 캠프를 친 뒤퐁은 3월 하순 경 아랑후에즈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스페인 사람들의 태도가 급격하게 적대적으로 변하게 된 것을 프랑스 병사들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몇 명 단위로 병영 밖으로 나갔던 병사들이 스페인 민중들에게 학살당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스트 대위는 아래와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4월 27일 아침 10시, 마드리드의 산 프란세스코 (San Francesco de Madrid) 성당을 나서던 한 농부는 성모 마리아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 길을 나서면서 최초로 만나는 프랑스인들 3명을 죽이고 시내에 폭동을 일으키라는 것이었지요.  (성모 마리아께서 살인을 하라고 지시하셨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 농부는 그렇게 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채소 가게에 있던 프랑스인 두명을 보고 큼직한 칼로 공격하여, 드러머였던 한명의 배를 찔러 부상을 입히고 다른 하나는 죽인 뒤, 제16 전열 보병 연대의 중위 하나를 만나 역시 치명상을 입혔습니다.  이 농부는 체포되어 총살당했지만, 5월 2일 마드리드 대폭동의 전조로는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지도 속 지중해에 면한 붉은색 부분이 정열의 땅 안달루시아 입니다.)



바스트 대위는 5월 2일 폭동 시에는 마드리드 시내에 있지 않아 멀리서 들려오는 머스켓 소총과 대포 소리를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그가 소속된 뒤퐁 장군의 제2군단은 5월 22일 마드리드 외곽을 떠나 스페인의 남쪽 지중해 지역인 안달루시아 (Andalusia)로 향했습니다.  이 행군길에서 프랑스군은 분노한 스페인 민중들의 매복과 암살을 피하기 위해 밀집 대형으로 움직여야 했고, 낙오병들이나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본대에서 떨어져 나왔던 자들은 결국 스페인 사람들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시에라 모레나 산맥의 위치입니다.)



이들은 결국 시에라 모레나 (Sierra Morena) 산맥의 전략적 통로인 '왕의 관문' (Puerto del Rey)를 통과하여 5월 29일 라 카롤리나 (La Carolina)라는 독일인들이 만든 아름다운 마을에 도착해 휴식했습니다.  이곳과 그 다음날 들린 바일렌 (Bailen)에 각각 100여 명씩의 환자들을 남기고 떠난 프랑스군은 5월 31일 과달퀴비르 (Guadalquivir) 강가에 위치한 안두하르 (Andujar) 마을에 도착하여 캠프를 쳤습니다.   (이 지명들은 나중에 다시 나오니 눈여겨 봐두십시요.)  그러나 이 커다란 마을의 주민들은 거의 대부분 도망치고 난 뒤였습니다.  이는 이탈리아나 독일 등지에서는 보기 힘든 현상이었습니다. 점령군이 식량과 돈을 징발해가는 경우가 많았으나, 주민들 대다수가 삶의 터전을 버리기는 힘들었거든요.  더구나 아직 전쟁이 선포된 것도 아니었는데 이랬으니 스페인 주민들이 프랑스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상황이었습니다.   




(저 오른쪽 위부터 시작하여 점차 왼쪽 아래로 내려온 프랑스군의 주요 경유지입니다.  뒤퐁 군단은 그 최후를 발리엔에서 맞게 됩니다.)



여기서 프랑스군은 강건너 코르도바 (Cordoba) 근처인 알콜레아 (Alcolea)에 약 3만의 스페인군이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안달루시아 전체가 프랑스에 저항하는 봉기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뒤퐁 장군이 6월 6일 알콜레아의 다리에 도착하여 보니, 스페인군은 약 3천의 보병과 6백의 농민병들을 동원하여 강력한 보루를 다리 건너편에 쌓고 10여문의 대포로 그 일대를 제압할 준비를 해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6월 7일 새벽부터 시작된 공격을 통해 이 다리를 비교적 쉽게 점령했습니다.  이 공격에는 비교적 고참병들로 이루어진 파리 근위병들과 해병 대대를 동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스페인군의 일제 사격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적은 수인 100명의 사상자만을 내고 적의 보루에 들러 붙을 수 있었고, 참호 속에 남아 있던 스페인 정규군과 농민군들을 총검으로 해치웠습니다.  다리와 그 너머 진지를 탈취하는데는 불과 15분 정도만이 걸렸고, 이들은 도주하는 스페인군을 30분간 추격하다 돌아섰습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총 140명 정도의 사망자를 냈는데, 정작 패배한 스페인군 사망자는 더 적었습니다.  대부분 그대로 도망쳤기 떄문이었지요. 

뒤퐁 장군은 그들의 뒤를 쫓아 코르도바 (Cordoba) 시 앞에 도달했습니다.  오후 2시반 쯤 프랑스군 본대가 도착하자, 코르도바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스페인 수비군은 곧 무너져 내렸습니다.  일부는 코르도바 시를 빙 우회하여 그 너머로 도주했고, 일부는 시내로 들어가 관문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코르도바 시는 요새화된 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벽이나 방어 시설 등이 쓸만 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뒤퐁 장군은 시장 (corregidor)에게 시민들의 재산과 안전을 보장할 테니 성문을 열고 순순히 항복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코르도바는 이슬람의 통치를 오래 받은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코르도바의 모스크-성당 Mezquita–catedral de Córdoba 의 내부입니다.  이 독특한 건물은 교회로 시작했다가 무어인들의 침공 때 모스크로 변경된 뒤, 스페인이 레콩키스타를 통해 수복한 뒤 다시 성당이 되는 복잡한 역사를 거치면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특징을 모두 갖춘 명물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렇게 무방비 상태인 도시들은 그렇게 시장이 순순히 시의 상징인 열쇠를 들고 나와 적장에게 평화적으로 넘겨주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항복한 도시에서는 점령군은 실제로 약탈이나 살인 강간 등을 하지 않고 비교적 점잖게 굴어야 했습니다.  물론 시민들은 점령군 병사들을 자기들 집에 십여명씩 할당받아 자기 비용으로 먹이고 재워야 했고 (이를 billeting이라고 하지요)  또 점령군의 식량과 현금 징발에 순순히 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당시 전쟁의 상식적인 관례였기 때문에 그렇게 점령군에게 협조했다고 해서 나중에 그 도시가 수복되었을 때 시장이나 시민들이 처벌받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도시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해야 했던 것이 왕과 정부였지요.  빈이나 베를린 등 나폴레옹에게 무릎 꿇은 도시들이 모두 같은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단이 벌어집니다.  미숙하고 기강이 약한 오합지졸 병사들은 전투에서는 약하지만 약탈에는 매우 유능한 경향을 보이는데, 이 상황에서 뒤퐁이 거느리고 있던 제2 대기 군단의 어린 병사들이 딱 그랬습니다.  이들은 아직 코르도바 시가 항복 협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변변치 않은 방어물로 보호된 시의 관문을 보자, 아침에 거둔 손쉬운 승리에 도취된 상태에서 더욱 흥분해버렸습니다.  이들은 웅성거리며 소요 상태에 들어갔다가 곧 코르도바 시의 관문을 때려부수고 시내로 쏟아져 들어갔습니다.  이를 지키던 스페인군은 저항하지 않고 혹은 강을 건너, 혹은 산 속으로, 혹은 에시하 (Ecija)로 향하는 길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 병사들은 총검을 장착한 머스켓 소총을 겨눠들고 아무 집에나 마구 대문을 박차고 들어가 약탈을 시작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아직 시내에 남아 있던 일부 스페인 시민들이 창문을 통해 머스켓 사격을 하며 저항했고, 이에 프랑스 병사들은 더욱 흥분하여 살인과 강간까지 시작해버렸습니다.  처녀들은 물론 수녀들까지 강간의 대상에서 예외가 되지 않았고, 교회의 성물들도 약탈당했습니다.  이때 장교들이 나서서 병사들을 제지하고 통제해야 했는데,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해서 일부 장군들까지 이 혼란 속에서 사리사욕을 위한 약탈에 나설 정도였습니다. 

이 수기를 쓴 바스트 대위는 일부 장교들이 신사도를 발휘해 이런 광분한 병사들로부터 스페인 민간인들을 구했으며, 자신도 그 중 하나라고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신빙성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지요.  아무튼 바스트 대위에 따르면 그는 어느 아름다운 젊은 처녀에게 달라 붙으려는 3명의 광분한 병사들을 제지하다 결국 한명을 군도로 베어버렸습니다.  이미 눈이 뒤집힌 나머지 두 병사가 바스트 대위에게 달려들려 하자, 그는 권총을 뽑아들고서야 겨우 그 상황에서 아가씨를 구출할 수 있었습니다.

병사들의 약탈에서 빠질 수가 없는 것이 술입니다.  병사들은 곧 지하 포도주 창고들을 찾아내어 머스켓 소총 개머리판으로 포도주 통을 부수어 아예 포도주 수영장을 만들어 놓고 정말 미친놈들처럼 포도주를 들이켜고 만취상태로 빠져 들었습니다.  바스트 대위에 따르면 이때 적군이 1천명만 나타났다면 프랑스 제2 대기 군단은 그날 끝장이 났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저녁 무렵 고주망태가 된 병사들이 마침내 살인과 약탈, 강간을 멈추고 쓰러져 잠이 들어버린 것입니다.  이날 유서 깊은 코르도바 시가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것은 이 넘치는 포도주 덕분이었습니다. 

이미 많은 문제를 일으킨 제2 대기 군단은 다음날 더 큰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이는 바스트 대위도 '뒤퐁 장군의 매우 놀라운 뜻 밖의 결정'이라고 적을 정도의 일이었습니다.  원래 최종 목적지인 카디즈로의 행군을 계속 하는 것이 아니라, 코르도바 앞 뒤 및 시내에 병력을 분산 배치하고 장기 주둔 태세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작은 문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결국 매우 심각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먼저 카디즈로 행군하는 목적, 즉 그 거기 정박한 로질리 제독의 프랑스 함대와 스페인 함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카디즈에 재빨리 무혈입성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는 아직 카디즈가 친프랑스파 스페인 인물들에게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말 열심히 행군을 했다면 정말 무혈입성이 가능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뒤퐁이 코르도바에서 주저앉은 동안 카디즈에서는 결국 반프랑스 민중 봉기가 일어나 친프랑스파들이 쫓겨나버렸습니다.  게다가 다음번에 보시겠습니다만, 결국 제2 대기 군단 자체도 파국을 맞게 되지요.

그런데 왜 뒤퐁 같은 역전의 명장이 그런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게 되었던 것일까요 ?  코르도바에 주저앉아 뒤퐁이 무엇을 했는지를 보시면 아실 수 있습니다.  그는 돈을 긁어모으고 있었습니다.  코르도바는 유서 깊을 뿐만 아니라 꽤 부유한 도시여서, 병사들이 사적으로 약탈하고, 또 뒤퐁이 공식적으로 징발한 재물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하룻동안 닥치는 대로 걷어들인 것이 그 정도였으니, 샅샅이 뒤지면 더 많이 나올 것이 분명했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바스트 대위는 이런저런 상황에서 우연치 않게 병사들이 발견한 금화 및 은화가 대략 150만 프랑 (현재 가치로 대략 240억원)에 달한다고 써놓았습니다. 

프랑스군의 전통대로 짐을 최소한으로 가볍게 하고 빠른 행군을 하자면 이 모든 약탈품을 놔두고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온 나라가 반프랑스 봉기에 빠져든 스페인에서 일부 병력을 남겨 이런 재물을 지키게 하거나 수송하게 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상당수 병력을 그 호위에 할당한다면 그렇쟎아도 제한된 병력으로 전체 안달루시아를 정복해야 할 판국에 병력 부족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프랑스군이, 좀더 정확하게는 뒤퐁 장군이 프랑스 혁명 초기의 초심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이런 금전적인 손익은 다 버려두고 카드즈로 신속하게 진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나폴레옹의 장군들은 재물욕에 오염된 상태였습니다.  다부나 란 정도 외에 모든 원수들은 점령지에서 사적인 노략질과 뇌물 수수 등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나폴레옹이 돈을 밝혔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온 나라가 자기 것이었으니) 개인적인 욕심에서라기 보다는 정복지에서 약탈한 재물로 프랑스의 번영, 좀더 솔직하게는 자신의 정권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습니다만, 어쨌거나 나폴레옹은 휘하 장군들에게 승전보 못지 않게 송금을 하라고 끊임없이 닥달을 했습니다.  장군들도 그 과정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이 매우 뿌듯했으므로 반항할 이유가 없었지요. 

그러는 사이 제2 대기 군단과 마드리드의 프랑스군 총사령관 뮈라와의 통신은 완전히 두절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양측에서는 끊임없이 전령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1~2명이서 움직여야 했던 이런 전령들은 스페인 민병대에게 딱 좋은 먹이감에 불과했습니다.  더군다나 마드리드와 안달루시아를 오가기 위해서 넘어야 하는 시에라 모레나 산맥의 몇 안되는 길목은 이런 전령들의 무덤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렇게 고립된 상황에서 약 2만3천 정도의 제2 대기 군단만으로 안달루시아 전체를 정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애초에 이런 C급 부대를 지원 부대도 없이 적이 득실거리는 사지로 밀어넣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원래부터 스페인을 깔보던 나폴레옹의 성향에, 초반에 부딪혀 본 스페인군의 실력이 너무나 형편없었으므로 적을 과소평가한 것이 문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뒤퐁과 그의 군단이 코르도바에 주저앉아 금화와 은화를 세고 있는 동안, 안달루시아 전체는 바삐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안달루시아의 주도는 세비야 (Seville)였는데, 이 곳의 지방 정부라고 할 수 있는 훈타 (junta, 주로 사제와 군 장교, 정부 관리들로 이루어지는 지방 명사회 정도에 해당)는 알콜레아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다시 병력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이 새로운 부대의 부대장은 초기에 친프랑스파였다가 프랑스의 만행을 보고 곧 반프랑스로 돌아선 카스타뇨스 (Castanos) 장군이 맡았습니다.  여기에 영국의 해군 요새인 지브랄타 (Gibraltar) 인근 지역인 산 로케 (San Roque)의 정규군까지 합류했습니다.  당시 아직 프랑스와 스페인은 공식적으로는 동맹국이었고, 스페인과 영국은 공식적으로는 적국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지브랄타 요새를 견제하던 부대가 지브랄타를 내버려두고 세비야로 달려왔다는 것은 이제 완전히 프랑스와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스페인 남쪽 끝, 영국의 지브랄타 요새와 그 북쪽에 있는 산 로케입니다.)



세비야 훈타에서는 지원병들을 구하는데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다.  코르도바의 잔혹한 약탈 소식이 들불처럼 안달루시아 전역에 퍼져 나간 것입니다.  세비야의 신문들은 열을 올리며 코르도바에서 일어난 프랑스군의 잔학 행위들을 과장하여 보도했습니다.  그런 신문들에 따르면 프랑스군은 코르도바를 3일간 약탈했으며 교회 건물들은 성물과 장식품을 빼앗긴 후 마굿간으로 사용되고 있다며 독실한 카톨릭이 대부분인 민중을 선동했습니다.  또 많은 주민들이 와이프와 딸들을 프랑스군의 난폭함으로부터 지키려다 목숨을 잃었다고도 했습니다.  가장 슬픈 부분은 그런 선동 행위에 대해 바스트 대위가 덧붙인 평가였습니다.  그는 '불행히도 그런 주장은 모두 사실이었다' 라고 쓴 것입니다.

프랑스군이 코르도바에서 며칠 동안 돈을 세는 사이 이런 선동으로 인해 안달루시아의 주요 도시인 하엔 (Jaen), 그레나다 (Grenada) 등이 모두 반프랑스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제2 대기 군단 단독으로 안달루시아의 수도 세비야로 진격하는 것은 역부족이라고 뒤퐁은 판단했습니다.  거기에다 코르도바를 겨냥한 군대가 세비야에 속속 모여들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마침내 원래의 최종 목적지인 카디즈마저도 반프랑스 진영으로 돌아섰다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게다가 제2 대기 군단에 딸려 있던 수백명의 스위스 용병부대가 전방으로 정찰을 나갔다가 통째로 스페인군에 투항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원래 이들은 스페인 국왕의 근위대 소속이었다가 당시 동맹군이던 프랑스군에 파견되었던 것인데,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지자 스페인 측으로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6월 15일 밤 포병대의 지원까지 거느린 2만1천명의 스페인 정규군과 2천5백의 기병대, 그리고 수천명 규모의 민병대가 카스타뇨스 장군의 지휘 하에 코르도바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있던 뒤퐁 장군은 이들을 기다리지 않고 시에라 모레나 산맥 언저리로 후퇴하기로 했습니다.  이건 잘한 결정이었습니다.  코르도바는 방어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나 추격하는 적을 뒤에 달고 도망가는 주제에, 여태까지 약탈했던 재물들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바리바리 싸들고 가기로 한 것은 잘못된 결정이었습니다.  6월 16일 아침에 후퇴 명령을 내렸는데, 정작 후퇴가 시작된 것은 무려 오후 7시였습니다.  바스트 대위에 따르면 뒤퐁 장군은 북 위에 앉아 병사들과 짐마차들이 캠프를 무려 5시간에 걸쳐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는데, 병사들의 개인적인 약탈물을 과도하게 실은 짐마차들이 워낙 많아 후퇴가 지연되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마 그 자신도 약탈물을 한몫 단단히 챙겨가고 있는 처지에, 병사들에게 각자의 약탈물을 버리도록 강요하기가 몹시 껄끄러웠나 봅니다.  바스트 대위는 만약 스페인군이 이날 프랑스군을 습격했다면 프랑스군은 1달 뒤 발리엔에서가 아니라 이날 코르도바에서 끝장 났을 것이라고 써놓았습니다.




(훗날 이야기입니다만,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서 철수할 때 병사들의 개인 짐과 짐마차 등을 철저히 수색하여 불필요한 약탈물들은 모두 버리고 가도록 했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프랑스군의 철수는 훨씬 더 참혹하게 훨씬 더 일찍 끝장 났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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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요즘 회사 일이 바빠서... 오늘 분량이 평소보다는 많이 적고 또 앞으로 최소한 2~3주간은 포스팅이 없을 것 같습니다.  너그러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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