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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반격의 서막 - 어느 프랑스 해군 대위의 회고록 (중편)

by nasica-old 2015.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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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기세 좋게 코르도바를 점령하고 약탈한 뒤퐁 장군의 프랑스군이 안달루시아 전체가 봉기를 일으키자 후퇴를 결정하는 장면까지를 보셨습니다.

이렇게 철수하는 프랑스군의 짐마차는 어마어마한 양이었습니다.  바스트 대위가 쓴 기록에는 정확한 수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다른 기록에 따르면 이때 후퇴하는 프랑스군은 코르도바에서 약탈한 물품을 실은 짐마차를 무려 500대나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 부대에 소속되어 있던 어느 군의관은 이 1만5천 정도 되는 부대가 끌고다니는 짐마차는 15만명 규모에나 어울리는 것이라고 한탄하며, 일개 대위 나부랭이조차도 4마리의 노새가 끄는 마차를 필요로 할 정도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약탈물을 잔뜩 실은 짐마차를 끌고 터덜터덜 후퇴하는 프랑스군은 이미 나폴레옹과 함께 하루 평균 25km를 주파하던 그 프랑스군이 아니었습니다.  하긴, 이미 언급했듯이 이들은 나폴레옹을 따라 이탈리아와 독일을 정복한 그 부대가 아니었습니다.  훈련과 장비, 경력과 기강 등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 2진급 부대들이었지요.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나폴레옹이 지휘하던 역전의 그랑 다르메 (Grande Armee)와 동일한 부분이 있기는 했습니다.  이들에게도 식량이 없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언제나 식량을 현지 조달했던 점도 있었으나, 이때는 부족한 짐마차에 초라한 밀가루 한자루를 싣느냐 교회에서 약탈한 값비싼 은식기를 싣느냐 하는 짧은 고민 끝에 은식기를 실었던 것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덕분에, 프랑스군은 끝이 보이지 않는 짐마차 행렬을 끌고 출발했으나, 정작 당장 먹을 저녁거리는 부족한 형편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의 어린 병사들은 그렇다고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통과해온 지역을 다시 되짚어 돌아가는 길이라 곳곳에 분견대를 남겨 두었고, 일부 지역에는 임시 제빵소까지 만들어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길바닥에 나서면 고생이라더니, 이들의 후퇴길은 시작부터 불길했습니다.  코르도바 인근의 작은 마을인 몬토로 (Montoro)에 바로 그 임시 제빵소가 있었는데, 이 제빵소가 스페인 폭도들에게 습격당하여 박살이 났다는 소문이 훨씬 전부터 있었습니다.  실제로 후퇴를 하며 보니, 거기에 남겨 두었던 분견대가 끔찍한 몰골로 여기저기 '널려' 있었습니다.  어떤 시체는 팔이, 어떤 시체는 다리가, 또 어떤 시체는 눈과 코, 손톱과 남성의 중심 부위가 잘려 있었습니다.  이런 시체들이 일부는 십자가에 매달 듯 나무에 매달려 있었으니, 프랑스 병사들이 받은 심리적 충격은 상당했습니다.  여기서 뿐만 아니라, 왔던 길을 되짚어 가는 곳곳에 남겨 두고 왔던 환자 및 부상병들이 모두 잔혹하게 살해된 것이 발견 되었습니다.  가령 목이 말랐던 병사들이 어느 농가에 마실 것을 구하러 들어가보니, 주민들은 모두 도망친 뒤였고 대신 프랑스군 용기병 10명의 시체가 겹겹이 쌓여 있었습니다.  이들의 시체에는 잔혹한 고문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바스트 대위가 직접 목격한 제4 연대의 부사관 한명의 시체도, 발부터 무릎까지를 잔혹하게 불에 태운 흔적이 있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프랑스군은 코르도바에 남기고 온 동료 부상병 및 환자들의 안위, 그리고 만약에 자신들도 부상을 입거나 하여 낙오병이 될 경우 같은 신세가 될 것임을 걱정하며 더욱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후퇴를 할 때 하더라도, 뭔가 명확한 목적지는 있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프랑스군 장병들은 안달루시아와를 빠져나가는 통로인 시에라 모레나 (Sierra Morena) 산맥 언저리의 라 카롤리나 (La Carolina) 마을, 혹은 아예 그 산맥의 고갯길인 '왕의 관문' (Puerto del Rey) 까지 후퇴할 것을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바스트 대위의 예상과는 달리, 총사령관 뒤퐁 장군은 과달퀴비르 (Guadalquivir) 강가에 위치한 안두하르 (Andujar) 마을에 도착하자 캠프를 치고 장기 주둔 태세에 들어갔습니다.  물론 안두하르 마을에 돌아와보니, 이 곳에 남겨둔 프랑스군도 잔혹하게 살해된 뒤였습니다.  다행히 여기에 남아 있던 샤베르 (Chabert) 장군의 부인과 참모는 무사했는데, 그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사제가 나서서 뜯어말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안두하르에 장기 주둔하는 것에 대해 바스트 대위는 그의 회고록에서 뒤퐁 장군이 오판을 한 것이라고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일단 안두하르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프랑스군의 보복을 피해 온갖 귀중품과 식량을 챙겨들고 도망친 뒤였기 때문에, 식량 조달이 용이치 않은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과달퀴비르 강은 곳곳에서 보병들이 쉽게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비교적 수심이 얕은 강이라서 방어적 측면에서 그다지 좋은 장애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 주변은 꽤 높은 고지들이 둘러싸고 있었으므로 적이 그 고지들을 점령할 경우 쉽게 제압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마드리드와 연결 통로인 '왕의 관문'으로 가는 길이 딱 하나라서, 유사시 적에게 쉽게 퇴로가 끊길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안두하르가 그다지 좋은 주둔지가 아니라는 것은 바스트 대위 뿐만 아니라 뒤퐁 장군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슬라흐 전투와 뒤렌슈타인 전투에서 보셨듯 뒤퐁 장군은 실력과 용기를 겸비한 매우 유능한 지휘관이었거든요.  하지만 이 안두하르 외에는 다른 주둔지를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바일렌이나 라 카롤리나는 안두하르보다 더 작은 마을이었고, 방어에 더 적절한 곳도 아니었습니다.  아예 시에라 모레나 산맥을 넘어 철수를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했지만, 뒤퐁 장군이 받은 명령은 안달루시아를 점령하라는 것이었으므로 별도 명령이 없는 이상 임의로 안달루시아에서 철수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마드리드의 사령부에게 현지 상황을 알리고 후퇴 허가를 받던가 아니면 지원 병력 및 보급품을 받아야 했는데, 그것도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전령을 수없이 보냈지만 모두 스페인 게릴라들에게 당해 쓰러지는 바람에 마드리드와의 통신이 완전히 두절되었던 것입니다.

바스트 대위나 뒤퐁 장군은 모르고 있었으나, 마드리드에서도 상황은 나름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뮈라는 병에 걸려 휴양차 프랑스로 귀환한 뒤였고, 그 후임으로는 나폴레옹의 심복인 사바리 (Savary) 장군이 부임해 왔습니다.  사바리 장군은 야전군 지휘관으로 명성을 떨친 사람은 아니었고, 나폴레옹의 참모이자 비밀 경찰 지휘관으로 출세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 잘 쓰기로는 도가 튼 나폴레옹이 이런 인물을 스페인 점령군 총사령관으로 보냈다는 것 자체가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초기 나폴레옹의 스페인 평정 계획은 주로 스페인 북부에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1급 부대들은 주로 그쪽에 포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6월 중순 경 북부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안달루시아로 보냈다가 근 한달째 소식이 완전히 두절된 뒤퐁 군단에게도 비로소 신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즉, 베델 (Dominique Honore Antoine Vedel) 장군의 사단을 보내 시에라 모레나 산맥의 스페인 게릴라들을 뚫고 뒤퐁과 합류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델 장군의 사단이라는 것도 병력 수는 고작 6천 보병에 7백 기병, 그리고 12문의 야포 뿐으로서, 사단치고는 매우 약한 부대였습니다.  이런 지원 병력만으로는 안달루시아 평정이 불가능했습니다.  사바리도 그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사바리는 총명한 심복이었을지 몰라도, 유럽 귀족 대부분에게 그는 앙기앵 공작 사법 살인 사건의 주범으로 소문난 음험한 사내였습니다.  그런 선입견이 어긋나야 뭔가 반전이 있을텐데, 반전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 사후 1830년이 되서야 복권이 된 그는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의 사령관을 지내면서 아랍인들을 비인간적으로 다루어 다시 한번 악명을 떨쳤거든요.  그러다 천벌을 받았는지 병에 걸려 1833년 파리로 돌아와 병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바리가 베델 사단을 지원 병력으로 보낸 것은 나름 다 원대한 계획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페인 북부가 대략 평정되었으므로, 이제 스페인 남동부만 정리하면 그 평정 작전에 동원되었던 병력들이 자유롭게 풀려날 수 있게 될 것이었습니다.  뒤퐁이 안달루시아의 입구에서 교두보를 확보한 채 버텨준다면 스페인 남동부에서 풀려나올 병력들을 그 교두보를 통해 쏟아부어 안달루시아도 간단히 제압할 수 있게된다는 것이 사바리의 계획이었습니다.  그 핵심에는 발렌시아 (Valencia)와 사라고사 (Zaragoza)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몽세 (Bon-Adrien Jeannot de Moncey) 장군은 6월 24일~26일 2차례에 걸친 강습에서 발렌시아 시를 점령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게다가 아라곤의 주도인 사라고사에서는 6월 15일부터 프랑스의 대군이 포위전을 시작했습니다만 이 포위전은 8월 14일 지쳐빠진 프랑스군이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날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다수의 민병대가 자원병으로 참전한 스페인군은 나폴레옹의 예상과는 달리 정말 용감하고도 끈질긴 저항을 펼쳤던 것입니다.  이렇게 발렌시아와 사라고사의 패전으로 인해, 뒤퐁 장군의 안달루시아 원정군은, 베델 장군의 보잘 것 없는 지원군 외에는 사실상 고립된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라고사는 압도적인 병력의 프랑스군이 2달간 맹렬한 포위 공격을 가하고도 결국 함락시키지 못한 불굴의 도시입니다.  이건 제1차 사라고사 포위전이고, 1년 뒤인 제2차 포위전에서는 결국 함락되고 맙니다.   임진왜란으로 치자면 진주성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요.)




(진주성에 논개가 있듯이 사라고사에는 아우구스티나 Agustina de Aragón 가 있습니다.  그녀는 몰려오는 프랑스군을 앞에 두고 포병대 소속이던 애인이 쓰러지자, 쓰러진 애인의 손에서 화승막대를 뽑아들고는 캐니스터탄을 쏘아 붙여 프랑스군을 무찔렀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이 여장부가 포탄까지 직접 장전하여 발포했다고도 하고, 미혼모였다고도 합니다.  확실한 것은 이 여자는 실존 인물로서, 이 때의 공로로 여자의 몸으로서 소위 계급까지 올랐으며, 나중에는 웰링턴 장군의 휘하에서 스페인군 장교로 비토리아 전투에도 참전했다는 점입니다.  스페인 같은 보수적인 나라에서 배운 것도 없는 하류층 여자가 장교가 된다니, 전쟁은 확실히 사회의 변동성을 높이나 봅니다.)





(Joaquín Sorolla y Bastida가 그린 발렌시아의 봉기에 대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서 뭔가를 외치는 사람은 빈센트 도메네치로서, '비록 난 가난한 제빵사이지만, 이 자리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다 !  페르디난도 7세 만세 !  배신자들에겐 죽음을 !' 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뒤퐁 군단은 과감히 철수시키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바리는 암울한 곳곳의 작전 상황을 현실대로 인정하지 않고 곧 전황이 개선되어 안달루시아로 병력을 쏟아부을 수 있을 것이라 희망을 품었고, 그에 따라 뒤퐁에게도 그저 상황을 주시하며 대기하라는 정도의 명령만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곳곳의 스페인 게릴라 활동으로 인한 통신 두절, 그리고 사바리 장군의 우유부단하고 모호한 작전 지휘로 인해 뒤퐁은 철수를 할 수도 없고 전진을 할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사실상 뒤퐁 군단의 운명은 반쯤 결정된 셈이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알 수 없었던 뒤퐁 장군에게 마침내 6월 말, 1달 동안의 통신 두절 끝에 도착한 마드리드의 전령은 그야말로 마른 가뭄에 단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때서야 뒤퐁은 총사령관이 뮈라에서 사바리로 바뀐 것을 알 수 있었으나, 그 전령이 전달해준 사바리의 명령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어정쩡한 것이라서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뒤퐁 장군으로서는 그 장계에 적혀 있는 베델 장군의 지원 병력 1개 사단이 온다는 소식보다는 그와 별도로 온다는 밀가루와 건빵 마차에 대한 소식이 훨씬 더 반가왔습니다. 

이미 안두하르의 프랑스군은 하루에 1인당 3~4온스 (1온스는 약 28g, 즉 3~4온스는 80~100g 정도)의 빵만을 배급받을 정도로 보급 사정이 안 좋았습니다.  이는 요즘 제과점에서 파는 소보로빵 1개 정도에 해당하는 무게입니다.  당연히 이것만 먹고는 어린 병사들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빵이라도 만들기 위해서 병사들은 스스로 설익은 밀을 거두고 빻아서 밀가루를 만들어야 했고, 그나마도 스페인 게릴라들이 자꾸 출몰하는 인근 방아간에서 전투를 치러가며 밀가루를 빻아야 했습니다.  바스트 대위의 기록에 따르면 보통 16명의 병사들이 1덩어리의 빵을 나눠 먹어야 했고, 다른 전쟁터에서는 흔히 구할 수 있던 채소조차도 구할 수 없어서 약간의 밀 낟알을 넣고 끓인 수프를 먹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와인이나 브랜디는 물론, 식초조차 구할 수가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아무 것이나 입에 넣을 수 있는 것은 다 먹어야 했는데, 이런 식자재 부족은 곧 병사들의 건강 악화로 이어졌고 특히 이질 설사가 온 병영을 휩쓸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뒤퐁 장군은 인근 마을들을 습격하여 식량을 확보하려 했고 부분적으로 약간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으나, 결국 그런 식으로 얻을 수 있는 식량의 양은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특히 큰 마을인 하엔 (Jaen) 습격전에서 보았듯이, 이미 대부분의 주민들은 프랑스군의 약탈을 예상하고 산으로 도망친 뒤였고, 흩어져 산 속을 뒤지자니 스페인 게릴라들의 손쉬운 먹이감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실제로 전령들은 계속 죽어 넘어지고 있었고, 앰뷸런스 마차에 실려가던 프랑스군 환자들 총 400여명의 게릴라들의 손에 목이 따였습니다.  이집트 원정 당시 참모부장이었던 르네 (Renee) 장군조차도 라 카롤리나 마을 인근에서 게릴라들에게 사로잡혀 산 채로 화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프랑스군의 전력은 계속 약화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베델 장군이 시에라 모레나 산맥의 고갯길을 지키던 스페인 정규군과 게릴라들을 밀어내고 안달루시아로 진입했습니다.  바스트 대위는 자신이 뒤퐁 장군의 명을 받고 1천명의 분견대 지휘관이 되어 3월 27일 마침내 베델 장군의 사단과 합류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도 일개 대위가 정말 1천명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을까 하고 의아스럽긴 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이 베델 사단은 끝내 뒤퐁의 군단과 합류하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두 장군 사이에 알력이 있었냐고요 ?  아닙니다.  뒤퐁이 주둔하고 있던 안두하르에 베델 사단까지 합류하여 수천명의 식구가 불어나면 가뜩이나 심각했던 식량난이 더 악화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뒤퐁은 베델에게 그냥 바일렌에 주둔해 있되, 그 주변에서 식량이나 긁어모아 적절한 호위대와 함께 보내라고 명령해야 했습니다.  바스트 대위는 이를 위해 구성된 식량 약탈대에도 참여하여 생생한 증언을 기록하고 있는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식량을 긁어모으기 위해 산개하는 족족 숲과 산에 숨어 있는 스페인 반란군의 밥이 되어야 했습니다.  결국 이 식량 약탈대의 지휘관이던 여단장 카사뉴 (Cassagne) 장군은 식량 확보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바일렌의 베델 사단 본대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이 이렇게 지독하게 저항했던 이유에 대해, 바스트 대위는 코르도바에서의 잔인한 약탈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나름 분석하고 있습니다.  바스트 대위는 아예 '점령군의 그런 폭력 남용은 그 피해자들보다 가해자에게 결국 더 나쁜 결과를 낳게 된다' 라고 그의 수기에서 단언했는데, 이는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같은 현대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인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안두하르에 주둔하고 있던 뒤퐁 군단의 사정은 계속 나빠졌습니다.  7월 6일 바일렌에서 안두하르로 되돌아온 바스트 대위는 그 사이 뒤퐁 장군이 추가적인 후퇴를 위한 준비를 아무것도 해놓지 않은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고 적었습니다.  물론 뒤퐁 장군은 자기 마음대로 후퇴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마드리드로부터 어렵게 받아볼 수 있던 총사령관 사바리의 명령서는 후퇴도 전진도 하지 말고 명백한 시간 약속도 없이 그저 조만간 지원군을 보내줄 테니 상황을 주시하고 있으라는 내용이었으므로, 뒤퐁으로서도 마음대로 후퇴를 하기가 곤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드리드로부터의 명령이 어찌 되었든 간에, 야전군 총사령관이었던 뒤퐁이 대책없이 넓은 지역에 분산되어 배치된 프랑스군의 취약한 방어 태세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스트 대위가 지적했듯이, 군 작전에 있어서는 아무리 나쁜 결정이라도 '아무 결정을 내리지 않는 것'보다는 더 나으니까요.  이 시기의 뒤퐁 장군은 바로 재작년에 오스트리아에서 보여준 그의 용맹함이 신기할 정도로 무기력한 모습을 많이 보였습니다.  이는 바스트 대위가 그의 수기에 적었듯이, 당시 뒤퐁 자신도 나쁜 식량 사정 때문에 이질로 고생 중이었다는 점이 그런 무기력함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는 사이에 세비야에서 출발한 스페인군은 과달키비르 강을 따라 안두하르로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7월 15일, 드디어 카스타뇨스 장군의 약 1만명 규모의 부대가 과달키비르 강 남안과 아르호니아 (Arjonilla) 마을 사이의 고지를 점령하면서 그 곳을 지키던 소규모의 프랑스군을 밀어냈습니다.  스페인군의 움직임은 크게 2방향이었는데, 카스타뇨스의 부대와 함께 레딩 (Theodor von Reding) 장군의 부대가 역시 과달키비르 강 남안의 멘지바르 (Mengibar) 마을을 공격하여 이 곳을 지키던 프랑스군을 몰아냈습니다.  이와 함께, 쿠피니 (Antonio Malet, Marqués de Coupigny) 장군의 소규모 부대도 아르호니아와 멘지바르 사이의 빌라누에바 (Vilanueva) 마을을 점령했습니다.  



(바일렌 전투의 개요도입니다.  한눈에 봐도, 넓게 분산된 프랑스군이 각개 격파 당하는 모양새입니다.)



이렇게 되자, 바스트 대위가 지적한 대로, 뒤퐁 장군이 선정했던 진지 위치의 취약점이 당장 드러났습니다.  프랑스군이 진을 친 평지를 제압하는 고지가 스페인군의 손에 넘어가자, 스페인군이 당장 대포를 그 위에 올려 놓고 저 아래 평지의 프랑스군에게 포격을 가해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약이 부족했던 프랑스군 포병대는 화약을 아끼느라 적극적인 대응 포격을 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거리도 멀고 또 프랑스군이 흙을 쌓아 만든 보루가 튼튼했던 관계로 스페인군의 포격에 의한 피해는 크지 않아 프랑스군 12명이 죽거나 다치는 것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뒤퐁에게도 위기감을 주었고, 그는 약 20km 떨어진 바일렌에 주둔하고 있던 베델에게 지원 병력을 요청했습니다.  베델이 다음날인 7월 16일 그에 응해 거의 전체 병력을 이끌고 이동하자, 바일렌 일대에 프랑스군의 공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강 남안의 멘지바르에서 상황을 엿보던 레딩의 스페인군이 여울목을 이용하여 손쉽게 강을 건너 베델이 남기고 간 프랑스군 2대 대대를 밀어내고 교두보를 확보했습니다.  잔존 프랑스군은 이 전투에서 고베르 (Gobert) 장군이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지자 퇴로가 끊길 것을 염려하여 뒤푸르 (Dufour) 장군의 지휘 하에 바일렌으로 후퇴했다가 아예 라 카롤리나까지 후퇴해버렸습니다.  




(당시 스페인 말라가의 주지사였던 레딩의 초상입니다.  그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원래 독일계 스위스 출신입니다.)



한편, 베델 사단은 뒤퐁 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부지런히 달려간 결과, 정오 즈음해서 안두하르가 보이는 곳까지 당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베델 사단이 나타나자, 카스타뇨스의 스페인군은 굳이 공격하지 않고 물러나 일부 병력을 동쪽, 즉 멘지바르 쪽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스페인군의 이런 움직임을 본 뒤퐁으로서는 두가지 선택 중 하나를 택할 수 있었습니다.  즉, 아예 베델 사단과 드디어 병력을 합쳐 스페인군 주력을 추격하여 격파하는 것이 상책이고, 이제 당장의 위협이 사라졌으니 다시 베델을 돌려보내고 현황을 유지하는 것이 하책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었다면 당연히 상책, 즉 적의 주력 격파를 노렸을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적군이 지리멸렬하고 나면 다 사라지게 되어 있었으니까요.  식량 부족 문제만 해도, 카스타뇨의 스페인군이 격멸되고 나면 당당하게 세비야로 쳐들어가서 적의 식량을 뺴앗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뒤퐁은 하책을 택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했던 것도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멘지바르 쪽으로 이동해가는 적의 모습을 보고, 또 베델이 바일렌을 텅 비워둔 채 거의 전병력을 이끌고 온 것을 보고는 안두하르-바일렌-라 카롤리나로 이어지는 마드리드와의 통신로가 끊길 것이 염려되었던 것입니다.  워낙 곤궁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던 뒤퐁에게 적의 주력을 무찌르고 나면 후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사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은 베델 장군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당일 오후 5시경 명령에 따라 바일렌으로 다시 되돌아가기 위해 출발한 그의 사단은 다음날인 7월 17일 아침에야 바일렌에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남기고 갔던 고베르 장군의 부대가 없었습니다.  이런 당혹스러운 상황에서 베델에게 도착한 것은 강력한 적군을 뒤에 달고 라 카롤리나로 퇴각하고 있다는 뒤푸르 장군의 전갈이었고, 베델은 뒤퐁처럼 '적이 유사시 후퇴로인 라 카롤리나를 노리고 있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황급히 라 카롤리나를 확보하기 위해 떠나버렸습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군은 안두하르의 뒤퐁 군단과 라 카롤리나의 베델 사단으로 크게, 그리고 멀리 양분되어 버렸습니다.  나폴레옹이라면 적과 근거리에서 대치 중인 상황에서 당연히 병력을 집중시켰을텐데, 뒤퐁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정 반대의 선택을 한 것입니다.  당시 뒤퐁과 베델의 병력을 합하면 거의 2만5천에 달했고, 스페인군은 다 합해봐야 3만 정도였으므로 양군의 병력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델이 라 카롤리나로 물러나면서 뒤퐁의 병력은 1만7천 정도로 줄어들었고, 스페인군은 순식간에 거의 2배의 전력차이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주변 일대의 게릴라들과 주민들에 의해 거의 실시간으로 카스타뇨스에게 전달되고 있었습니다.  베델이 바일렌에 도착할 즈음인 7월 17일 아침, 카스타뇨스는 작전 회의를 열고 빌라누에바를 점령하고 있던 쿠피뉴 장군이 멘지바르의 레딩 장군과 합류하여 바일렌을 점령하도록 결정했습니다.  즉, 뒤퐁을 앞뒤로 포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카스타뇨스는 뒤퐁을 혼란시키기 위해 안두하르에 견제 공격을 가했습니다.  이 견제 공격은 나름 대규모로 진행되어 카스타뇨스의 전체 병력 2만명이 거의 다 동원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전날 화약 부족으로 반격 시늉만 하던 프랑스 포병대가 화약통을 활짝 열고 맹렬한 포격을 가해 스페인군에게 꽤 큰 피해를 주어 결국 스페인군을 후퇴시켰습니다.  최소한 뒤퐁은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뒤퐁으로서야 스페인군의 이 공격은 어디까지나 견제 공격에 불과하다는 것을 몰랐으니까요.

이런 대규모 공격을 한차례 받은데다, 전령에 의해 베델이 바일렌을 버리고 라 카롤리나로 향했다는 소식까지 접한 뒤퐁은,  안두하르에 더 버티고 있을 입맛이 싹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는 베델의 뒤를 따라 일단 바일렌으로, 그리고 결국 라 카롤리나로 후퇴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굶주리고 지친데다 쓸데없이 금은보화만 잔뜩 싸들고 있던 프랑스군은 그 특유의 기동성을 보여주기는 커녕, 그 다음날인 7월 18일 저녁에야 비로소 느릿느릿 짐마차와 함께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레딩과 쿠피뉴의 스페인군은 텅빈 바일렌을 전투도 없이 이미 점령하고 난 뒤였습니다.  누더기 차림에 굶주림으로 지친 표정이 역력한데 코르도바에서 챙긴 약탈물 짐마차로 보기 흉하게 비틀거리던 뒤퐁의 후퇴 행렬은 앞뒤를 에워싼 스페인군의 함정으로 똑바로 걸어들어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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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업이 여전히 바쁘네요.  본의 아니게 상중하편의 3편으로 나눠지게 된 점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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