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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반격의 서막 - 어느 프랑스 해군 대위의 회고록 (하편)

by nasica-old 2015.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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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두리뭉실 애매모호한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안두하르에서 쫄쫄 굶으며 무의미한 버티기를 시전하다, 결국 스페인군의 압박에 후퇴를 결정하는 뒤퐁 군단의 사정을 보셨습니다.  그렇게 후퇴를 하는 군대의 진형이 위풍당당할 수야 없었겠습니다만, 확실히 뭔가 문제는 있었습니다.  즉, 7월 18일 저녁 8시 안두하르를 출발하는 프랑스군의 진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맨 앞장을 선 것은 제4 연대의 2개 대대 약 2천명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는데, 코르도바 약탈물을 실은 500대의 짐마차가 엄청난 길이의 도로를 점거하며 따라갔습니다.  나머지 부대들은 그 뒤를 따랐고요.  즉, 이 후퇴 진형은 후퇴하는 앞길에 강력한 적군이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고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무렵에 바일렌 근처 작은 지류인 룸블라르 (Rumblar) 강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여기서 프랑스군 대신 스페인군이 기다리고 있다가 사격을 퍼부어 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스페인군은 쿠피뉴이의 사단과 합류하여 다시 과달퀴비르 강을 건너온 레딩의 부대 중 일부였습니다.  이들은 전날인 7월 18일 아침에 고베르 장군의 프랑스군을 습격하기 위해 온 것이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고베르 장군은 물론 그 뒤를 따라 왔던 베델 장군의 사단까지도 이미 모두 라 카롤리나로 후퇴한 뒤였기 때문에 텅 빈 마을을 총 한 방 쏘지 않고 접수할 수 있었습니다.  바스트 대위는 전날 프랑스군이 짐마차를 정리하고 캠프를 철수하느라 하루 종일 꾸물거리지만 않았어도 뒤퐁 사단의 비극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수기에서 한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은 이미 벌어진 뒤였지요.  뒤퐁 군단과 그의 약탈물 짐마차 500대는 전방의 레딩과 후방에서 따라오는 카스타뇨스 사이에 딱 걸리고 만 것입니다.  길은 하나인데, 길 북쪽 측면은 스페인 게릴라들이 득실거리는 산지였고, 남쪽 측면은 과달키비르 강이었고 그 강 건너에는 적대적인 스페인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뒤퐁 장군이 살 길은 딱 하나였습니다.  라 카롤리나로, 더 나아가서는 시에라 모레나 산맥을 넘어 후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면의 레딩과 쿠피뉴이의 스페인군을 뚫어야 했습니다.  




(바일렌 전투의 전개도입니다.  왼쪽의 검은색이 프랑스군이고, 오른쪽의 녹색이 레딩의 스페인군입니다.  실제 전투는 그렇게까지 치열하거나 거창하지는 않았습니다.   바르부 Barbou 장군의 프랑스군 1개 사단과 레딩의 사단만 참전했거든요. )




맨 처음에 뒤퐁은 정면의 스페인군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샤베르 (Charbert) 장군이 이끈 프랑스군 선봉은 이들을 쉽게 쫓아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돌격했으나, 이들은 예상 외의 강력한 반격에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 했습니다.  뒤퐁은 비로소 정면의 적이 멩히바르에서 강을 건너 온 레딩의 사단 전체라는 것을 깨닫고 더 많은 병력을 정면에 투입하여 활로를 뚫으려 했습니다.  1만명 규모의 레딩 사단에 비해 1만7천 정도인 뒤퐁의 주력 부대가 숫적 우위를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번 뒤퐁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는 언제 자신의 후방에 카스타뇨스 장군의 스페인군 본대가 나타나 협공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후방의 병력을 한꺼번에 전방으로 투입하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축차 투입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재빨리 병력을 투입하지도 못 했습니다.  선봉대와 주력 부대 사이에는 500대의 짐마차가 엄청난 길이의 도로를 점거하고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그 짐마차들은 병사들의 약탈에 대비해서, 1500명 규모의 최정예 부대의 경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즉, 가뜩이나 병력도 부족한데 가장 뛰어난 병력 1500이 쓸데없는 장물아비 노릇이나 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바스트 대위는 그의 수기에서, 이때 짐마차 따위는 후위대에 붙어오게 하고, 전방에 병력이 집중되어 있었다면, 그래서 프랑스군이 한꺼번에 병력을 전개시켜 레딩의 사단을 공격했더라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라며 아쉬워 했습니다.  병력의 집중은 전술의 기본 중 기본인데, 확실히 이때 뒤퐁 장군은 뭔가에 홀려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조금씩 투입된 프랑스군은 그동안 굶고 지내느라 쇠약해진데다 밤샘 행군으로 무척 지친 상태였고, 우세한 포병 전력을 앞세운 스페인 군에게 조각조각 썰려 버렸습니다.  이렇게 3차례에 걸쳐 거듭된 공격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프랑스군은 크게 낙담하고 맙니다.




(레딩 장군의 명패입니다.  La victoria de Bailen 어쩌고 하고 씌여 있는 것은 다들 알아보실 겁니다.  레딩 장군이 주지사로 있던 말라가에 있는 기념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군은 수적 열세가 분명했기 때문에, 만약 4번째 돌격이 이루어졌다면 레딩의 스페인군 방어선은 무너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치고 부상당한 프랑스군에게는 더 이상 예비대가 없었습니다.  울고 싶은데 뺨을 때린다고, 전부터 작은 규모로 스페인 쪽으로 탈영을 일삼던 스위스 용병 연대가 이 전투에서 대대적으로 스페인군에 투항해버리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3번째 돌격이 무위로 돌아갈 무렵, 북쪽 산 속에서 약 2천명의 스페인군이 추가로 몰려나와 바위 틈에 자리를 잡고 프랑스군을 위협했습니다.  인근 산 속에 있던 들라 크루스 (de la Cruz) 대령의 부대가 격렬한 총포성에 이끌려 나온 것입니다.  전투 소리가 끌고 온 것은 이들 뿐만 아니었습니다.  뒤퐁이 두려워 하던 대로, 후방에서 따라오던 카스타뇨스 장군의 스페인군도 바일렌에서 들려오는 포성을 듣고 더욱 걸음을 빨리 하여 달려온 것입니다.  이제 뒤퐁은 3면에서 포위되어 버렸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뒤퐁은 일단 휴전을 제의했습니다.

다행인 것은 그 포성은 저 멀리 라 카롤리나로 후퇴했던 베델 사단에게까지 닿았다는 것입니다.  베델은 바일렌에서 포성이 들려온다는 보고를 듣고는 곧 전 부대를 이끌고 구원을 위해 달려왔습니다.  이제 까딱하면 레딩의 스페인군이 뒤퐁과 베델 사이에서 협격을 당할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두 명의 스페인군 장교들이 백기를 들고 베델에게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뒤퐁이 이미 패배했고, 휴전 협상을 하자고 제의했으니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델은 "난 그딴거 모르겠고 지금 곧 공격할거다" 라는 퉁명스러운 답변을 돌려보내고는 정말로 맹공을 시작했습니다.  이 공격에서 베델의 프랑스군은 레딩 휘하의 아일랜드 대대 (스페인 왕에게는 스위스나 아일랜드 등에서 모집한 용병대가 몇개 있었습니다) 1천5백명과 2문의 대포를 포획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결국 레딩의 부대를 무너뜨리지는 못하고 일단 전열을 가다듬어야 했습니다.  만약 뒤퐁이 휴전 협상을 하겠다는 결정을 몇 시간만이라도 늦게 했었다면, 레딩의 스페인군은 앞 뒤의 뒤퐁과 베델에게 박살이 났을 것입니다.  그만큼 그날 프랑스군에게는 모든 것이 조금씩 어긋나게 돌아갔습니다.  그러는 사이 스페인군이 통과시켜준 진짜 뒤퐁의 연락 장교들이 베델에게 "정말로 휴전 협상 중이니 일단 전투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게다가 레딩이 '휴전하자더니 뒤통수를 쳐서 내 부하 1500명과 2문의 대포가 방심하는 틈에 포로로 잡혀갔다, 즉각 그들을 반환하라' 라고 요구하자, 그마저도 들어주라는 명령도 베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베델은 다소 황당했으나, 일이 좋지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후방으로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스페인군은 프랑스군을 일망타진할 기회를 놓칠까 우려하여 뒤퐁에게 압박을 가하여 '당장 베델이 후퇴를 멈추지 않는다면 이 휴전 협상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 라며 협박했습니다.  놀랍게도 뒤퐁은 그 협박에 휘둘려 후퇴 중지 명령서를 베델에게 보냈고, 상관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었던 베델은 후퇴를 멈추고 스페인군의 감시를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뒤퐁의 휴전 협상 자체도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페인군은 뒤퐁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고, 뒤퐁은 자신의 부대가 아무 전투없이 시에라 모레나 산맥을 넘어 안달루시아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이 부대는 일정 기간 스페인군과의 전투에는 투입되지 않는 조건 정도로 협상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협상이라는 것은 양쪽의 무력이 비슷하거나, 하다못해 협상이 제대로 안될 경우 더 유리한 쪽도 큰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한 경우에나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당장 7월의 뜨거운 태양이 사정없이 쏟아지는데, 허허벌판에 늘어진 프랑스군은 당장 끼니를 때울 식량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근 지역의 스페인군들이 잔뜩 몰려들어 사방을 에워쌌으므로, 협상이 좋게 진행되기가 어려웠습니다.  처음에 뒤퐁은 자신의 2개 사단 중 7월 19일 전투에 직접 참여했던 바르부 (Barbou) 장군의 사단만 조건부 항복을 하고, 베델 사단과 자신의 나머지 1개 사단은 대포까지 포함한 모든 무장을 유지한 채 마드리드로 평화롭게 후퇴하는 것으로 하려 했으나, 스페인 측은 그를 완강히 거부했고, 뒤퐁 군단 전체는 물론 베델 사단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당장 전투를 재개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이렇게 사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7월 22일에 마침내 양측이 협의한 프랑스군의 항복 조건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당장은 무기를 내려놓아야 했으나, 무기 이외의 모든 짐, 즉 코르도바의 약탈물을 실은 짐마차를 포함하여 개인의 물품은 그대로 가지고 일단 카디즈로 가서 거기서 배편으로 프랑스로 귀국하는 조건이었습니다.  소총과 대포 등의 무기도 그때 함께 배편에 실어 보내는 것이었으므로 최악의 무조건 항복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안전 통행 보장 (Safe conduct) 문서를 들고 무기를 소지한 채 프랑스로 철수하는 것이 가장 모양새가 좋았으나, 지금 모양새를 따질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그 정도 조건이면 나쁜 편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화가 모리스 오랑쥬 Maurice Orange가 그린 바일렌의 조건부 항복 capitulation 그림입니다.  오른쪽의 병사는 아마도 항복하려는 장군들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실제로도 저랬을지는 의문이네요.)




이때 항복을 위해 마침내 얼굴을 마주댄 뒤퐁 장군과 카스타뇨스 장군의 대화 내용이 눈길을 끕니다.  뒤퐁 장군은 먼저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체면을 살리려 애썼습니다.

"오늘의 이 일을 자랑스러워 하셔도 좋습니다, 장군.  본관은 20여 차례 이상의 전투를 겪었지만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거든요."

그러자 카스타뇨스는 다음과 같은 짧은 말로 뒤퐁의 체면을 무자비하게 짓밟았습니다.

"참으로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저는 이번이 난생 처음 겪는 전투였거든요."




(바일렌에서의 항복... 어느쪽이 프랑스군인지는 굳이 설명 안드려도 아실 겁니다.  특히 스페인 측에는 군복을 입지 않은 민병대원도 포함된 것이 눈에 띄네요.)




이렇게 항복을 한 뒤에야, 거의 4일 동안 쫄쫄 굶은 프랑스군 병사들은 스페인 측이 제공하는 식량으로 겨우 끼니를 때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뭔가를 먹을 수 있었다는 기쁨도 잠시, 이들은 이틀 뒤인 7월 24일, 적군 앞에서 군례를 갖추어 행진을 한 뒤 무기를 내려놓는 항복 의식을 거행해야 했습니다.  이건 자랑스러운 프랑스 그랑 다르메의 일원으로서, 지독한 굴욕이었지요. 

이 의식 직후 프랑스군은 비무장 상태로 스페인군 1개 연대의 호위 하에 카디즈를 향해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프랑스군 장교들은 스페인군과의 호의에 의해 군도는 여전히 패용할 수 있었습니다만, 스페인 측의 호의는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인근 마을인 보우갈레우레 (Bougaleure)에 도착해보니, 약 1200명의 스페인 민병대가 험악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을 주민 중 동정적인 사람 몇몇을 통해 얻은 정보에 따르면, 이들은 마을 주민들과 합세하여 프랑스군이 밤에 자는 사이 프랑스군을 습격하여 비무장 상태인 병사들을 학살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대경실색한 프랑스군 장교들은 스페인 측 인솔 장교에게 사정사정하여, 프랑스군 병사들이 숙소로 할당받은 창고나 마굿간 등에 흩어져 자지 않고 마을 밖 벌판에서 야영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냈고, 그렇게 해서야 민병대의 무자비한 보복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또 에시하 (Ecija)에서 다리를 건널 때는 온 동네 주민들이 다 몰려나와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는 프랑스군의 얼굴에 침을 뱉고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마음껏 조롱을 해댔습니다.  역시 여기서도 프랑스군은 마을 내에서 자지 않고 벌판에 모여 밤을 지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병사들은 밤 사이에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쥐도새도 모르게 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8월 2일 레브리가 (Lebriga)에 도착한 뒤 10여일을 여기서 지내면서, 이들은 결국 최악의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자신들을 프랑스로 실어나를 배편 소식을 문의하자, 처음에는 스페인 측은 '영국 해군성의 허가를 기다리고 있는 중' 이라고 답을 하더니, 8월 10일에는 카디즈의 주지사 모를라트 (Morlat) 장군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가 날아온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너희들이 프랑스로 편히 돌아가는 것을 영국이 허락할 것 같은가 ?  스페인 측에는 수송선이고 뭐고 너희들을 실어나를 배편이 전혀 없다.  있다고 해도 너희들이 프랑스로 돌아가면 다시 전투에 투입될 것이 뻔한데, 우리가 그런 일을 허락하리라고 보느냐 ?  사실 너희들을 프랑스로 실어날라 주겠다라고 한 것은 당장 항복해야 하는 너희들의 체면을 살려주려는 우리 측의 배려였을 뿐, 진짜 그렇게 해주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예의를 차려 주었으니, 이제는 당장 실질적인 필요에 따라 일을 처리하겠다.  장군들과 그 참모 장교들, 그리고 그 개인들의 소지품들은 배편으로 프랑스로 보내주겠으나, 나머지 프랑스군은 모두 포로로서 스페인에 남아야 한다."

이런 일방적인 통보에 프랑스군은 어이가 없었으나,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제 병사들과 떨어져 바스트 대위를 포함한 장군 및 그 참모 장교들만 카디즈를 향해 계속 이동했는데, 이때도 장군 및 장교들의 짐마차는 여전히 그들과 함께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8월 14일, 산타 마리아 (Santa Maria) 항구에 이르자, 일부 관원들이 시민들 보는 앞에서 짐마차의 화물을 검색했습니다.  그 첫번째 마차는 바로 뒤퐁 장군의 짐마차였는데, 하필 짐을 뒤지자마자 튀어나온 것이 교회용 은제 그릇들이었습니다.  이걸 본 시민들은 눈이 뒤집혔습니다.  "여기 코르도바에서 약탈한 교회 물건들이 있다 !!!"  스페인 측에서 무장 병력을 출동시키지 않았다면 장군이고 뭐고 프랑스인들은 여기서 시민들에게 다 맞아 죽을 뻔 했습니다.  어쨌거나 이런 소동을 겪으며, 결국 뒤퐁 이하 프랑스 장교단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약탈물 마차와는 영영 이별을 고해야 했습니다.  뒤퐁 장군은 카디즈 주지사인 모를라트 장군에게 빼앗긴 그의 짐마차를 즉각 반환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돌아온 답변은 조롱섞인 거절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약탈물을 회수하려는 스페인측의 음모였을 수도 있지요.

여기서 짐을 빼앗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뒤퐁은 결국 그렇게 가져간 약탈물로 부자가 될 운명은 아니었습니다.  카디즈에서 출항하여 마르세이유 (Marseilles)를 통해 프랑스로 귀국한 것을 기다리던 것은 나폴레옹의 분노였으니까요.  뒤퐁과 베델은 즉각 체포되어 군사재판에 넘겨졌고, 그들은 계급을 몰수당하고 쥐라(Jurat) 산맥의 포르 드 주 (Fort de Joux), 그러니까 투쌩 루베르튀르가 폐결핵으로 비참하게 병사했던 그 군 교도소로 보내졌습니다.  이들은 나폴레옹이 패망하여 부르봉 왕정이 복원되던 1814년까지도 계속 수감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분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뒤퐁과 함께 돌아왔던 모든 장군 및 장교들도 다 이런저런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가령 몇개월 후인 1809년 1월, 스페인 바야돌리드 (Valladolid)에서 부대를 사열하던 나폴레옹이 뒤퐁의 참모진 중 하나가 지휘관들 중에 서있는 것을 보고는 즉각 사열을 중단시키고 그를 끌어내 전부대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를 꾸짖고 즉각 이 자리에서 꺼지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바일렌 전투에서의 항복에 대한 나폴레옹의 분노는 그만큼 대단했습니다.  




(쥐라 산맥의 주 요새입니다.  요새라기보다는 군 교도소로 사용된 으시으시한 곳입니다.)



이 수기의 주인공인 바스트 대위는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요 ?  기적적으로 그는 처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본인의 수기에 따르면, 자기도 강등이나 투옥 등의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고, 또 귀국 이후 처음 대하는 나폴레옹의 얼굴은 찬바람이 쌩쌩 부는 얼굴이었으나, 며칠 뒤 자신을 따로 불러 정규 함장(capitaine de vaisseau)으로 승진시켜 주며 안달루시아에서의 고생에 대해 치하했다고 합니다.  이 장면에서의 바스트 대위의 수기에 나폴레옹의 속마음이 일부 기록되어있습니다.  나폴레옹은 바스트에게 안달루시아 작전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하다가, 뒤퐁의 항복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반란군놈들과 협상을 벌였다는 점이야.  차라리 영국군 하사관과 협상을 벌였다면 용서해줄 수도 있었어."

즉, 나폴레옹은 스페인이라는 나라와 그 국민을 열등한 존재로 보고 철저히 자신의 속국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자, 혹시 벌써 잊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여전히 스페인에 남아있어야 했던 불운한 2만 병사들의 운명은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끔찍함 그 자체였습니다.  이들은 카디즈 항구의 낡은 선박들에 수용되어 긴 수감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런 감옥선 (prison hulk)들은 비좁은데다 습기차고 지저분했고, 게다가 식량 배급도 형편없었습니다.  이러다 1년 정도 뒤인 1810년부터는 카디즈 외곽을 프랑스군이 포위하게 되었는데, 이때 3월초에 불어닥친 폭풍의 혼란 속에서 일부 감옥선의 프랑스 포로들이 스페인 간수들을 제압하고 탈출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또 많은 프랑스 포로들이 익사하거나 사살되거나, 더 끔찍한 경우는 불이 난 감옥선에서 타 죽었지요.  이런 난리를 겪은 뒤, 프랑스 포로 중 장교들은 영국으로 보내졌고 남은 병사 중 7천명은 지중해 내의 무인도인 카브레 (Cabrera) 섬에 수용되었습니다.  사실 이건 수용이 아니라 그냥 무인도에 버리고 간 셈이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은 거의 전국토를 프랑스군에게 유린당한 상태라서 포로들에 대한 배급은 커녕 자기 군대조차도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에 대한 보급은 잊을 만 하면 가끔씩 가서 밀가루 몇 통을 바닷가에 투척하고 가는 정도였고, 이 섬의 프랑스 포로들은 자기들끼리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결국 이 섬에서는 식인 사건까지도 벌어졌다고 하는데, 이들이 구조된 것은 반 이상의 포로들이 죽은 뒤인 1814년 7월 6일이 되어서였습니다.  무려 4년이 넘는 무인도의 기아 생활을 한 뒤였습니다.  이들의 비참함에 대해서는 C. S. Forester의 걸작 소설 시리즈인 '혼블로워' 중 짧은 단편인 'HORNBLOWER'S CHARITABLE OFFERING'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다음 번에는 이 매우 짧은 단편을 번역해서 올려볼까 봐요...)





(HORNBLOWER'S CHARITABLE OFFERING은 정말 짧은 단편인데, 원래 혼블로워가 처음 함장을 맡은 전열함인 서덜랜드 호에서의 모험을 다룬 Ship of the line 내에서의 한 에피소드로 쓰려고 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한편, 뒤퐁 군단의 항복 소식은 마치 들불처럼 스페인 전역, 더 나아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이미 결사 항전을 맹세하던 스페인 사람들은 더욱 용기를 가지게 되었고, 무적이라고 불리던 프랑스군을 무찌르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은 물론, 러시아에서도 이 소식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반 나폴레옹파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특히 오스트리아에서는 호전파가 득세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렇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안달루시아 한쪽 구석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전투 결과가, 제5차 대불동맹전쟁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발렌시아와 사라고사 공략에 실패한 프랑스군은, 2만명의 군단이 통째로 포로가 되는 참패를 접하고는 전체 전략에 큰 차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바일렌에서의 항복 소식을 접한 마드리드 시민들은 거의 공공연하게 프랑스군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고, 총사령관 사바리는 결국 '스페인 국왕' 조제프와 전체 프랑스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군은 마드리드에서 물러나 에브로 (Ebro) 강 동쪽으로 후퇴한 뒤, 여기서 다시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임시 행궁을 비토리아 (Vitoria)에 꾸민 조제프는 여기서 위대한 동생에서 '스페인 중에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라며 징징거리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현대의 비토리아 시내입니다.  이번 여름이든 겨울이든 올해는 스페인에 가보고 싶네요...)




이렇게 해서 스페인의 굴욕은 끝나고, 이제부터 빛나는 반격이 시작되는 것이었을까요 ?  그럴리가 없지요.  스페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안달루시아 촌구석에서 무찌른 프랑스 군단이 제대로 된 그랑 다르메가 아니었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됩니다.  분노한 나폴레옹이 진짜 그랑 다르메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고 있었거든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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