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폴레옹의 시대

쌍방의 착각 - 예나 (Jena) 전투

by nasica-old 2013. 12. 20.
반응형

지난 편에서는 최후통첩을 보낸 프로이센에 대해 나폴레옹이 오히려 선제 공격을 감행하여, 잘펠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의 주요 매파 인물이었던 페르디난트 왕자를 전사시키는 모습까지를 보셨습니다.  프로이센 군의 시작은 이렇게 우울했습니다만, 이건 단지 서막에 불과할 뿐이었고, 프로이센은 불과 나흘 뒤,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에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참패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을 침공할 때 세운 1차적인 목표는 프로이센 군과 작센의 사이로 침투해 들어가, 작센 군이 전선에서 이탈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위해 나폴레옹은 크게 3개 집단군으로 프랑스 군을 나누어, 좌익을 란의 제5군단과 오쥬로의 제7군단, 중앙을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과 다부의 제3군단, 그리고 우익을 술트의 제4군단과 네의 제6군단에게 맡도록 했지요.  이 3개 집단군은 나폴레옹의 전략대로 착실하고 확실하게 프로이센 주력군과 작센 사이를 파고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프로이센 군은, 아직도 나폴레옹에 대해 어떻게 저항해야 할지를 못 정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3세의 우유부단함도 큰 몫을 했으나, 프로이센이 자랑하는 참모제도가 너무 방만하고 또 전통적인 귀족들로 구성된 군 수뇌부 간에 지휘권이 분할되어 있던 것이 근본 원인이었습니다. 

 

 

 

 

 

(1860년대 프로이센의 중흥기를 이끈 세명의 주역, 비스마르크, 룬, 그리고 몰트케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프로이센의 전통적 토지 귀족 융커 출신이라는 것이지요.  참고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서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질박하고 강인한 일반 독일 병사들에 대해서는 진정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도 독일군 수뇌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융커 출신들을 매우 불신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잘펠트 전투 이후에도 나폴레옹 군은 아무런 저항을 만나지 않고 북쪽을 향해 쾌속 전진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쾌속 전진은 사실 나폴레옹으로서 반가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원래 이렇게 프로이센에 침공한 목적은 유람이 아니라 적군의 격파였는데, 정작 적군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은 문제였으니까요.  사실 나폴레옹도 이때까지는 프로이센 군의 주력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나폴레옹은 아직도 프로이센 군의 주력은 잘레 (Saale) 강의 서쪽의 에르푸르트 (Erfurt) 일대에 남아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서쪽을 향해 방향을 휙 틀었습니다.  이것이 잘펠트 전투 이후 2일째인 10월 12일의 일이었습니다.

 

 


 

 

 

(뷔르츠부르크, 밤베르크, 바이로이트 일대에서 출발한 나폴레옹 군은 코부르크, 츠비카우, 켐니츠 등을 거쳐 나움부르크까지 이르는 큰 반원형 기동을 하했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의 각 군단의 움직임을 보면, 마치 현대전에서 데이터 링크로 연결된 각 유닛들이 유기적으로 정찰하며 정보를 공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각 군단들은 약 1일 정도의 행군거리를 유지하면서 넒게 산개하여 움직이되, 각자 탐지한 바를 최소한 1일 단위로 공유하면서 긴밀한 협조 하에 작전을 펼쳤습니다.  무전기도, 자동차도 없던 시절에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나폴레옹이 그 네트워크의 중심에서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처리한 뒤, 다시 적절한 작전 명령서를 보내주는 방법으로 핵심 서버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의 이런 군단 운용은 특히 이번 예나 전투에서처럼 적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적을 찾아나서는 경우에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프랑스 군은 프로이센 군을 찾아서, 마치 문어가 촉수를 활짝 펼치고 성큼성큼 움직이듯 캠니츠(Chemnitz)에서 나움부르크(Naumburg)까지 이르는 거의 60km에 이르는 거리를 작전권 내에 두고 느슨한 대형을 이루면서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넓게 펼쳐진 여러 촉수들 중 어느 하나에라도 목표물이 감지되면, 다른 촉수들이 벼락같이 그 목표물을 향해 달려들게 되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이때 작전은 문어의 촉수들을 보는 듯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역할은 물론 저 머리 역할이었지요.)



아무튼 이렇게 프로이센 군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 서쪽으로 뻗쳐진 선봉 촉수는 역시 란이었는데, 그는 당장 12일 당일에 예나 (Jena) 인근에서 상당 규모의 프로이센 군을 발견하고 일단 진격을 멈췄습니다.  드디어 프로이센 군 주력을 발견한 것입니다.  동시에 뮈라가 자이츠 (Zeits)에서, 그리고 오쥬로가 칼라 (Kahla)에서 각각 전령을 보내와 프로이센 군이 서쪽의 에르푸르트 방향으로 퇴각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이렇게 여러 촉수들로부터 속속 정보를 업데이트 받은 나폴레옹은 이날 파리의 탈레랑 (Talleyrand)에게 편지를 쓰면서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같은 노련한 장군이 이렇게 어처구니 없이 군 작전을 펼치다니 참 놀라운 일이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습니다.  다음 날인 13일, 프로이센 군과 대치한 란의 제5군단은 여태까지의 과격한 행군으로 인한 피로를 풀고자 진격을 멈추고 전면적인 휴식을 취했습니다.  나폴레옹 본인에게는 물론 휴식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게라 (Gera, Ghera)에 있다가, 예나에서 프로이센 군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단숨에 달려와 프로이센 군을 관찰했습니다.

 

 

 

(란드그라펜베르크 고지에 세워진 나폴레온슈타인 (Napoleonstein, 나폴레옹 석이라는 뜻)입니다.  이 자리에서, 란은 오쥬로와 술트가 모두 도착할 때까지 10월 14일 오전 동안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습니다.)



특히 인근 주민들의 협조로 란드그라펜베르크 (Landgrafenberg, '방백 산'이라는 뜻, Landgraf는 후작은 아니지만 공작과 백작 사이에 있는, 독일 고유의 지방 귀족) 라는 작은 고원 지대로 올라가는 오솔길을 발견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나는 작센의 한 지방으로서, 사실 작센 주민들은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의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는데, 프로이센이 거의 강압적으로 작센을 참전시킨 것에 대해 무척 반감이 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에게 적극 협조했던 것이지요.  나폴레옹은 즉각 병력을 풀어 이 란트그라펜베르크 산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을 넓히는 작업을 시작했고, 적의 대포 사정거리 안에 있는 지점까지 올라가 망원경으로 직접 적군을 관찰했습니다.  그는 이것이 그토록 찾아헤매던 프로이센 군의 주력부대라고 확신하고, 당장 그 다음날 아침부터 결전에 들어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는 즉각 전령을 띄워 술트, 네, 오쥬로 등의 군단들을 소집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그 다음날 아침까지 전투 현장 또는 인근으로 집결할 수 있었습니다. 


 

 

(란드그라펜베르크를 오르는 프랑스 군의 모습) 

 


다만 원래 중군을 맡았던 다부와 베르나도트에게는 당장 예나로 달려오라는 명령이 내려지지는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이 아직 프로이센 군의 위치를 명확히 모르고 있을 때, 아마도 북쪽을 향해 후퇴 중일 것으로 예상되는 프로이센 군을 요격하기 위해 이들은 이때 상당히 북쪽인 나움부르크 (Naumburg) 일대까지 진격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대신, 나움부르크에서 프로이센 군의 탄약 보급창을 점령했던 다부에게는 예나의 북서쪽이자 바이마르의 바로 동쪽인 아폴다 (Apolda)로 내려와 포위망을 틀어막으라는 명령서가 전달되었습니다.  한편 베르나도트에게는 매우 애매모호한 명령서가 전달되었습니다.  원래 베르나도트에게는 예나와 나움부르크 사이에 있는 도른부르크 (Dornburg)로 진격하라고 명령을 했었는데, 이제 명령을 새로 고쳐, "만약 다부와 함께 나움부르크에 있다면 다부와 함께 아폴다로 가되, 만약 도른부르크에 있다면 뮈라와 합류하여 예나 방향으로 내려오라"는 명령서가 전달되었습니다.  이 명령서에서 나폴레옹은 "내가 선호하는 것은 베르나도트가 이미 도른부르크에 있어서, 예나에서 곧 벌어질 란의 전투를 지원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곁들인 '내가 선호하는 것은...'이라는 문구로 인해,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에게 잘 보이려면 어떻게든 예나로 달려가는 것이 장땡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는 다음날 아우어슈타트의 영광과 비극을 동시에 일으키는 작은 화근이 됩니다.

 

 

 

(저 지도 중간에 위기에 빠진 다부를 외면한 채 도른부르크를 향해 열심히 남하하는 베르나도트의 모습이 보이실 겁니다.  사실 그에게도 그럴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이때 실제 프로이센 군의 사령부와 그 주력 부대는 예나 바로 서쪽인 바이마르 (Weimar)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예나에 있던 것은 호헨로헤 대공의 부대였는데, 사실 호헨로헤 대공이 이끄는 부대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프로이센 주력 부대와 규모면에서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동쪽과 북쪽을 점거하고 있던 프랑스 군단들이 예나 방향을 향해 속속 좁혀오고 있었으므로, 프로이센 군은 재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포위될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만약 이들에게 항공 정찰이 가능했다면, 이들이 취할 올바른 행동은 즉각 서쪽의 에르푸르트 (Erfurt)로 물러났다가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저 북쪽의 요새 도시인 마그데부르크 (Magdeburg) 방향으로 후퇴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싸울 생각이 아니었다면 말이지요.  그러나 프로이센 수뇌부의 갑론을박은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도 계속되어, 무려 9시간을 이러쿵저러쿵 토론 속에서 보내버린 뒤야 간신히 결론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 결론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주력 부대 6만5천은 잘레 강변을 따라 북쪽의 마그데부르크 방면으로 퇴각하여 보급로가 끊기지 않도록 하고, 호헨로헤 대공의 부대 4만5천은 그 후퇴를 엄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서쪽에 있던 뤼헬 장군의 1만5천은 주력부대가 자리를 비우는 바이마르 지역으로 이동하여 호헨로헤를 지원하는 것으로 정해졌습니다.

 

 

 

(이 아름다운 도시는 마그데부르크 공국의 일부로서 1680년 프로이센에게 합병되었는데, 예나 전투 이후 틸지트 회담에서 나폴레옹이 꿀꺽하여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이 왕으로 등극한 신생 왕국 베스트팔렌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루이즈 왕비는 마그데부르크를 프로이센에게서 빼앗지 말아달라고 나폴레옹에게 굴욕을 참고 사정하지만 나폴레옹은 매몰차게 거부하지요.) 



나폴레옹은 13일에 포착된 적군이, 전체 프로이센 군 전체로서 여기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과 호헨로헤는 물론이고 국왕 빌헬름 3세도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는 그와 달리 그가 상대할 적군은 호헨로헤 대공의 후위대에 불과했습니다.  이 사실을 몰랐던 나폴레옹은 이 4만5천의 적군을 잡기 위해 무려 8만이 넘는 프랑스 군을 집결시킵니다.  전체 프로이센 군의 수는 훨씬 많다고 착각하고 있었으므로, 이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저 북쪽의 다부와 베르나도트도 합류하도록 명령을 날린 것이었지요.  전투가 시작되면 달려올 뤼헬의 1만5천 병력을 생각한다고 해도, 이미 이 예나 전투는 사실상 프랑스 군의 압승으로 끝날 운명이었습니다.

 

 

 

(먹이감을 발견하고 달려드는 나폴레옹의 하이에나들, 오쥬로, 네, 뮈라, 술트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이미 잡은 적군의 숨통을 완벽하게 끊기 위해서 노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13일 밤, 예나의 적군이 포진한 코스페다 (Cospeda) 마을을 내려다보는 고지인 란드그라펜베르크 (Landgrafenberg)에 포병대를 포함한 상당수의 병력을 올려보내는 작업을 진두지휘했습니다.  적이 보지 못하는 고지의 가파른 반대 경사면에서, 그는 횃불을 들고 직접 험한 산을 기어오르며 병사들을 독려했고, 대포를 실은 포가가 산길 중간에 바퀴가 빠져 오갈 수 없게 된 광경을 보고는 훌륭한 병사들에게 제대로 길을 제시 못하여 이렇게 병사들을 고생하게 만든 장교들을 나무라며 그 대포를 빼내는 작업을 직접 감독했습니다.  또한, 병사들에게 바로 작년에 있었던 울름 포위전에서 대승리를 상기시키며, '지금 다리를 조금 더 고생시키면 내일 훨씬 더 적은 피를 흘리고도 대승을 거둘 수 있다'라고 병사들의 기운을 돋아주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확실히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심리학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황제가 깊은 밤까지 직접 이런 거친 산길을 두 발로 직접 기어 올라 병사들을 독려하는 모습은, 잠도 못 자고 산길을 오르느라 고생하는 병사들에게 훈훈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대포가 올라갈 길을 내기 위해 여러분이 곡괭이질을 하는데 위를 올려다보니 등불을 들고 있는 사람이 나폴레옹이라고 생각해보세요.  곡괭이질에 버프가 막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  그것이야 말로 본격 '나폴레옹 버프' !)

 


'지금 다리가 고생하면...' 운운한 나폴레옹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고, 또 결과적으로도 사실로 증명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나폴레옹이 병사들과 똑같이 잠도 안자고 고생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장에 나가면 나폴레옹은 보통 저녁 7시가 되면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 1시가 되면 일어나 참모들에게 상황 설명을 듣고 그 다음날 작전을 위한 명령서를 구술하는 것이 보통이었거든요.  그러니 일반 병사들은 잠을 못잤을지 모르지만, 나폴레옹은 푹 잠을 잔 상태였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저런 기묘한 취침 시간은 물론 병사들에게 생색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필요에 의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즉, 이곳저곳에 흩어진 부대들이 행군을 마치는 것은 보통 해가 지는 시점이었으니, 부대 이동을 마치고 그 지휘관들이 쓴 보고서는 대략 밤 12시 쯤 나폴레옹의 사령부에 도착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것을 한밤 중에 읽고, 그 다음날의 작전에 대한 명령서를 새벽 2~3시 즈음에는 발행해야 각 부대들이 새벽에 그것을 받아 볼 수 있었으므로, 비로소 각 부대는 제대로 된 작전을 가지고 새벽부터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나폴레옹이 하루 2시간을 잤네 3시간을 잤네 하는 이야기는 이런 그의 수면 시간대 때문에 나온 이야기 같습니다.

 

 

 

(저...저... 저걸 어째 !!  나폴레옹과 보초라는 제목의 사진입니다.  나폴레옹이 깜빡 잠이 든 보초를 대신하여 그 보초가 깰 때까지 대신 보초를 서줬다는 이야기는 동화로 들려오는 유명한 신화지요.  실제로 저런 일이 있었다는 기록은 보지 못했습니다.  나폴레옹 성격에 저 보초를 살려뒀을 것 같지 않을데요 ?)



한편, 이렇게 나폴레옹이 내려다보고 있던 호헨로헤는 나폴레옹의 대병력이 자신을 점점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전체 지역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란드그라펜베르크에 초병 몇명만 배치했어도 이런 상황을 금방 알 수 있었으나, 자신의 임무가 어디까지나 방어적인 것이라고 생각한 호헨로헤는 이런 조치들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프랑스 군의 주력은 북쪽으로 퇴각 중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주력 부대를 따라 가고 있고, 지금 자기 앞에 나타난 란의 부대는 추격하는 프랑스 군의 좌익 측면 부대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애초에 12일날 오후 란의 제5군단이 나타난 것을 알았을 때, 호헨로헤가 즉각 병력을 움직여 란을 밀어붙였다면 강행군에 지치고 또 아직 증원군도 근처에 없던 란의 제5군단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저 정면에 나타난 란의 제5군단을 적절히 견제하다가 후퇴한다는 수세적 전략에만 집중하고 있었고, 인근 바이마르에 주둔하고 있던 뤼헬의 병력에게 지원 요청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또 이날 저녁, 프로이센 군은 지휘의 용이성 보다는 좀더 아늑한 밤을 보내기 위해 예나 일대의 여러 마을에 분산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런 분산 배치로 인해 그 다음날 전투에서 병력 운용에 큰 애를 먹어야 했습니다. 

다음날인 10월 14일 아침, 예나 일대는 자욱한 안개로 뒤덮힌 채 시작되었습니다.  아직 술트나 오쥬로의 군단들이 다 도착하지 않았으나, 전갈을 통해 이들이 거의 인근 지역까지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나폴레옹은 먼저 란의 군단만을 가지고 프로이센 군의 좌우 양익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란은 우익에 수셰 (Louis-Gabriel Suchet), 그리고 좌익에 뒤렌스타인 전투 (쿠투조프, 나폴레옹의 콧잔등을 후려갈기다 http://blog.daum.net/nasica/6862543 참조) 의 영웅인 가잔 (Honore Theodore Maxime Gazan de la Peyriere)의 사단을 펼쳤습니다.  프로이센 군은 이들의 진형이 나타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포격을 퍼부으며 대응했습니다.  프로이센 군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후예답게 용감하게 저항했고, 프랑스 군의 공격은 곧 튕겨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프로이센 측 호헨로헤 대공의 지휘는 매우 엉성하고 서툴렀습니다.  그는 병사들의 대오를 아무 엄호물이 없는 벌판에 얇은 횡대로 주욱 늘어놓았는데, 이는 프로이센 병사들의 머스켓 사격의 화력을 극대화하는데는 좋았겠습니다만, 영리한 프랑스 군은 곧 근처 마을들을 점거하고는 엄폐물에 숨어서 이들에게 조준 사격을 퍼부었고, 벌거숭이로 노출된 프로이센 병사들은 하나둘씩 픽픽 넘어져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거의 2시간이나 이어지자, 완강한 프로이센 군도 차츰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호헨로헤는 이번 전쟁 직전에 나폴레옹도 인정하듯 유럽 최강이라고 일컬어지던 프로이센의 기병대를 란의 제5군단 앞에 집어던져 이 상황을 타파하려고 했습니다만, 프랑스 군은 포격과 머스켓 사격으로 이를 효과적으로 저지했고, 프랑스 군의 용기병들이 혼란에 빠진 프로이센 기병대에게 반격을 가했습니다.  이러는 사이 나폴레옹에게는 오쥬로와 술트의 병력이 당도하여 병력의 우위를 착실하게 쌓아 나갔습니다. 

 

 

 

(예나 전투에서 벌어진 프로이센 기병대와 프랑스 기병대 간의 혈투입니다.)

 

이때의 상황은 나폴레옹이 프로이센 군과 끈기있게 대치하면서 마치 '게이지를 채우는' 듯한 상황이었습니다.  즉, 네와 오쥬로, 그리고 술트의 군단들이 차례로 도착하여 위치를 잡을 때까지 란의 제5군단은 홀로 프로이센 군과 싸우느라 사실 상당히 애를 먹고 있었고, 나폴레옹 곁에서 대기하던 황실 근위대는 그 광경을 구경만 하고 있기가 괴로울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던 중, 나폴레옹 뒤에 서 있던 근위병들의 대오 중에서 누군가 '전진 앞으로 !'를 외쳤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외침을 듣고 옆의 참모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건 아직 턱수염도 안 난 애송이 병사일걸세.  저 친구가 내게 작전 방향에 대해 조언을 하려면 적어도 전투를 20번 정도는 경험해 봐야 할텐데 말이야."

 

 

 

(예나 전투에 앞서 근위대를 사열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보시듯이, 나폴레옹의 옷차림은 지위가 높아질 수록 점점 검소해졌습니다. 원래 옷을 허름하게 입어도 되는 것이야 말로 진짜 상류층의 자신감에서 나오는 특권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말단 근위병도 나폴레옹의 지휘를 존중하여 전진하지 않고 참고 있었는데, 정작 군단장이었던 네는 당장 눈 앞의 프로이센 군이 다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전공을 세우고 싶은 유혹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는 작년의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도 그다지 빛나는 전공을 세운 편은 아니었습니다.  원래 정통 나폴레옹 라인이 아니었던 그는 가뜩이나 나폴레옹의 눈에 들고자 무리수를 두는 경향이 있었고, 또 원래 성격도 불같은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명령이 없는데도 자신의 부대를 단독으로 전진시켰고, 처음에는 작은 승리를 거두며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듯 싶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군이라고 뭐 병사 개개인이 프로이센 군을 압도하는 무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는지라, 이 단독 공격은 곧 프로이센 군의 반격에 봉착하여 오히려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네가 보병 방진을 구성하고 버티는 동안 나폴레옹은 란의 사단을 투입하고 대신 란의 자리에 근위대를 투입하면서 간신히 이를 구해냈습니다.  네의 이런 '앞 뒤 안 가리고 일단 돌격 앞으로' 행태는 8년 뒤 워털루에서도 재현되어, 결국 나폴레옹의 발목을 잡는 결과는 낳고 말았지요.  

 

 

(잠깐, 저기 저거... 혼자 달려나가는 부대가 네의 부대냐 ?  쟤들 왜 저러냐 ?)


아무튼 호헨로헤가 자신이 상대하는 것이 나폴레옹의 주력부대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오전 10시 경이 되어 안개가 걷힌 이후였습니다.  호헨로헤는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뤼헬 장군에게 지원을 요청했습니다만, 뤼헬이 도착한 것은 오후 늦게 예나 전투가 이미 사실상 종료된 이후였습니다.  이들은 이미 승세를 잡은 프랑스 군에게 각개격파 당하는 역할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오후 1시가 되자 전투의 치열함은 절정에 달했고, 마침내 좌 오쥬로 우 술트의 진형을 갖춘 나폴레옹이 전면적인 전진을 명하자, 결국 프로이센 군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기세를 탄다는 것의 의미를 잘 알던 나폴레옹은 이런 상황에 불을 지르기 위해 예비대인 황실 근위대와 함께, 뮈라의 예비 기병대까지 쏟아 부었습니다.  이미 대형이 무너져 내린 프로이센 군은 완전히 박살이 나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이 동원한 8만 대군의 절반 정도는 아직 단 한 발의 사격도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 예나-아우어슈타트 전투를 가리켜, "나폴레옹은 질래야 질 수 없는 전투를 이겼고, 다부는 이길래야 이길 수 없는 전투를 이겼다" 라고 하지요.)

 


뤼헬의 지원 병력 1만5천이 나타난 것은 이때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전설 중 하나가 된 마렝고 전투의 경우, 이런 상황에서 불쑥 나타난 드제의 구원 병력이 완패 후 도주하던 나폴레옹을 순식간에 승리자로 만들어주기도 했었지요.  (나폴레옹 운명의 날 - 마렝고 전투 http://blog.daum.net/nasica/6862504 참조)  하지만 뤼헬은 드제가 아니었고, 호헨로헤는 나폴레옹과는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었습니다.  뤼헬은 이미 완전히 무너져 도주 중인 호헨로헤의 부대를 돌려세우지 못 했고, 추격하는 프랑스 군을 잠깐 동안 막아세우기도 했지만, 그냥 그것 뿐이었습니다.  결국 뤼헬의 부대도 호헨로헤의 패잔병 물결 속에서 함께 휩쓸려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걸음아 날 살려라 도주하던 프로이센 군 패잔병들은 약 20km 서쪽에 떨어진 바이마르에서야 겨우 한숨을 돌리고, 재정비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들에게 재정비를 허락할 만큼 자비롭거나 여유롭지 않았습니다.  겨우 숨을 돌리던 이들을 덮친 것은 뮈라의 예비 기병대의 지원을 받은 네의 군단이었습니다.  이들은 다시 목숨을 구하기 위해 달려야 했고, 많은 수가 프랑스 군에 항복했습니다.

 

 

 

 

 

(승리의 주역은 뮈라가 아닐지 몰라도, 대부분의 포로는 뮈라가 추격 과정 중에 잡아들이는 것이 보통이지요.  뮈라 온 더 무브 !!)



이날 전투에서 프랑스 군의 사상자는 약 7~8천이었던 것에 비해, 프로이센 군은 사상자만 1만이 넘었고, 약 1만5천이 추가로 포로가 되었습니다.  전투 현장에서의 사상자 수는 양쪽의 차이가 크지 않았던 것을 보면, 결코 프로이센 군의 기강이 형편없다거나 전술적으로 뒤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나 전투에서 싸웠다가 탈출에 성공했던 프로이센 군은 구심점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 이곳저곳의 도시나 요새에 기어들어가게 되는데, 이들은 재집결의 기회를 끝내 갖지 못하고 나폴레옹의 집요하고 신속한 추격에 결국 대부분 항복하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패주하는 프로이센 군의 추격을 지휘하며 승리자로서의 기쁨을 만끽한 뒤, 그날 밤 통쾌한 마음으로 예나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는 아직까지도 자신이 프로이센 군 전체를 격파했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착각은 그가 그날 밤 푹 자고 일어난 10월 15일 아침 9시까지도 계속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막사로 황급히 달려온 연락 장교가 있었습니다.  다부의 제3 군단 소속이었습니다.  그가 가져온 다부의 장계에는 믿기 어려운 소식이 적혀 있었습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지휘하는 프로이센 군 본진을 아우어슈타트에서 조우하여 격파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피식 웃고는 그 연락 장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서 자네 원수에게, 아마 헛것을 보신 모양이라고 전하게나."  이는 다부가 눈이 나빠 안경을 쓰고 있었던 것을 비웃는 표현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원래 전쟁을 하는 이유가 대국민 홍보에 승전보를 써먹기 위해서라고 할 정도로 승전을 거둘 경우 신속히 그 승전보를 발행하는 편이었습니다.  예나 바로 다음 날인 10월 15일에 발행된 프랑스 대육군 회보지에도 '이날 황제 폐하께서 예나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을 깨뜨리셨다'라는 소식만 나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아마도 자신이 놓친 일부 패잔병 부대가 다부의 제3군단과 마주쳐 전투를 벌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사실 다부가 거느린 병력은 고작 1개 군단 2만7천 정도의 병력이었기 때문에, 다부 혼자서 프로이센 군 주력을 깨뜨렸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또 보시기로 하시지요.

 

 

 

(나폴레옹이 기가 막힌 선전 도구로 사용하던 "대육군 회보" 입니다.  레미제라블 속에서, 마리우스도 도서관에 가서 이 대육군 회보를 일일이 뒤져 보고 자기 아버지 퐁메르시 중령의 활약상을 알게 되지요.)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