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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쿠투조프, 나폴레옹의 콧잔등을 후려갈기다 - 뒤렌스타인 (Durenstein) 전투

by nasica-old 2013.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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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나폴레옹이 1805년 10월 20일 울름에서 마크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 군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까지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폴레옹은 아직 한번도 상대해보지 않은 대적, 러시아 군과 총검을 맞대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학습편으로 당시 러시아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잠깐 보셨습니다만, 여러분들이나 나폴레옹이나 아직 러시아 군의 실력에 대해서는 그다지 잘 모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울름 항복의 소식은 쿠투조프 (Mikhail Kutuzov) 장군이 이끌고 오던 러시아 군에게도 금방 전해졌습니다.  쿠투조프의 병력은 대략 7만으로서, 나폴레옹이 바이에른에 진주시킨 대략 15만이 넘는 그랑 다르메(Grande Armee)에 비하면 너무 미약한 수준이었습니다.  마크의 병력과 연합하여 나폴레옹에 맞설 생각으로 서진하고 있던 쿠투조프는, 혼자서 나폴레옹이 진을 치고 있는 바이에른으로 쳐들어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는, 주저없이 발걸음을 돌려 동쪽으로 퇴각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같은 생각으로 후퇴하던 키엔마이어 (Michael von Kienmaye)의 잔존 오스트리아 군 약 6천과 10월 22일 합류하여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오스트리아 군이 기대하던 러시아 군과의 합류가 드디어 이루어진 셈입니다만, 의도하던 영광스러운 모습은 아니었지요. 



(울름 작전 시의 상황입니다.  쿠투조프의 러시아군은 울름 항복 직전에는 바이에른-오스트리아 국경 근처까지 도달한 상태였습니다.  마크가 조금 더 버텼으면 어땠을까 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건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뮌헨 인근에 나폴레옹은 이미 방어 병력을 충분히 깔아둔 상태였거든요.  저 지도 맨 오른쪽에 보이는 도나우 강변 북쪽의 크렘스가 이번 편의 주무대가 되는 크렘스입니다.)



이렇게 비엔나를 향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줄행랑을 치던 러시아 및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그대로 내버려둘 나폴레옹이 아니었습니다.  무릇 가장 격파하기 좋은 적은 이미 도망치고 있는 적이라고, 러시아 군이 적절한 방어 진형을 갖추기 전에 퇴각 중인 상태 그대로를 덮치는 것이 가장 좋았거든요.  쿠투조프도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쿠투조프가 택할 길은 두가지였습니다.  더 빨리 도망가든가, 쫓아오는 프랑스 군에게 도중에 한방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쿠투조프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뛰어난 군 지휘관은 항상 주변 상황과 주변 지형을 활용합니다.  쿠투조프에게 주어진 것은 '프랑스 군이 앞뒤 안가리고 서둘러 자신들의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것과, '프랑스 군이 도나우 강에 의해 양분되어 있다'는 사실이었지요.  쿠투조프는 이 두가지 사실을 아주 잘 활용했습니다.  먼저 쿠투조프는 도나우 강을 따라 후퇴하면서, 강 위에 놓인 다리들을 파괴하면서 동진했습니다.  그러다가11월 7일 비엔나 동쪽 약 70km 지점에 있는 크렘스 (Krems) 라는 도나우 강변의 작은 마을에 이르자, 이 마을에 놓인 작은 다리는 파괴하지 않고 일단 남겨 둔 뒤, 작전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작전이었는지, 그리고 왜 이 지점을 택했는지 보시기 전에, 쿠투조프의 뒤를 사냥개처럼 쫓아 오던 프랑스 군의 사정을 먼저 보시지요.





(윗사진이 크렘스의 모습이고, 아래 지도는 크렘스가 비엔나에서 얼마나 가까운지를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오스트리아 제국도 알고 보면 뭐 그다지 큰 나라가 아니라서, 한번의 대전투에서 지고 나면 수도 비엔나가 직접 적의 위협권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지요.)



나폴레옹은 울름 항복 뒤, 여기저기 흩어져 도망치는 오스트리아 군의 잔당을 소탕하느라 바빴습니다.  뮈라의 기병대가 그 활동에서 핵심 역할을 맡고 있었지요.  나폴레옹은 저 멀리서 다가오다가 후퇴하는 러시아 군의 추격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 새로운 군단이 필요했습니다.  전편에도 언급했지만,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는 총 7개 군단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마지막 군단인 제7 군단은 사실상 훈련 중인 부대라서 초기에 동원되지 않았었고, 그동안 정치적 성향 때문에 나폴레옹으로부터 물을 먹고 있던 오쥬로가 총사령관으로 있었는데, 이때는 이미 이 제7 군단조차도 오스트리아 군의 잔당 소탕에 동원되어 전과를 올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번 편의 사실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막심 가잔 장군의 모습입니다.  나중에 부르봉 왕가가 복위하고 나서, 나폴레옹의 부하들 중 처형에까지 이른 사람은 오직 한명, 네 원수였는데, 가잔 장군이 그의 처형 결정에 본의 아니게 일조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가잔이 네의 죽음을 바랬던 것은 아니었고요, 스토리가 조금 복잡한데, 그건 나~~~중에 그때 가서 보시기로 하시지요.)



이런 병력 부족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아주 간단한 솔루션을 내놓습니다.  바로 십시일반, 즉 이 군단 저 군단에서 사단 1개씩을 갹출하여 새로운 군단을 하나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네 (Ney) 원수의 제6 군단에서 뒤퐁 (Pierre Dupont de l'Etang) 장군의 사단을, 그리고 란 (Lannes) 원수의 제5 군단에서 가잔 (Honoré Théodore Maxime Gazan de la Peyrière) 징군의 사단을, 그리고 마르몽 (Marmont) 원수의 제2 군단에서 뒤몽소(Jean-Baptiste Dumonceau) 장군의 네덜란드 사단을 차출하여 새로운 군단 하나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름하여 제8 군단이었지요.  하지만 프랑스 군은 이렇게 급조된 군단을 그 군단장 모르티에 (Édouard Adolphe Casimir Joseph Mortier)의 이름을 따서 그냥 모르티에 군단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새롭지 않은 새 군단은 위에서 언급한 3개 사단 외에도 3개 용기병 (dragoon) 전대 (squadron)와 3개 경기병 (hussar) 전대, 거기에 6문의 대포까지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갖출 것은 다 갖춘, 총 15개 대대 약 1만2천의 막강한 군단이었습니다.  사실 나폴레옹이 초기에 구상했던 군단 규모에는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의 병력만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전체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억지로 만들어낸 군단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모르티에 원수는 이 사건 이후로도 뭐 그다지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역사에서 이름을 알리게 되는데, 바로 루이 필립의 암살 시도 때 역시 본의 아닌 희생자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이미 보셨을 레미제라블 - 왜 마리우스는 감옥에 가지 않았을까 ? 편을 참조하세요.)



이 군단을 맡게 된 모르티에는 원래 직접적인 나폴레옹 라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라인 방면군에서 활약하던 장군이었고,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가있는 동안 벌어진 제2차 동맹 전쟁에서는 스위스 지역에서 싸우면서 그 지역 총사령관인 마세나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나폴레옹의 눈에 들게 되었던 장군이지요.  그는 란이나 마르몽 같은 오리지널 나폴레옹 파 장군들에 비해 자신의 입지가 불안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뭔가 큰 공을 세워야 한다는 초조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비슷한 처지였던 네 (Ney)는 엘힝겐 전투에서 어느 정도 뭔가를 보여주는데 이미 성공했으니, 이런 급조 군단을 맡은 모르티에는 더더욱 초조했을 것입니다.  이 초조감이 나중에 결국 사고를 치고 맙니다.

나폴레옹은 모르티에에게 이 제8 군단을 맡기면서, 도나우 강 북안을 따라 러시아 군을 추격하되, 북쪽으로부터 가해질지도 모르는 측면 공격에 유의하라는 명령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모르티에에겐 그런 경계를 위한 시간도 병력도 없었습니다.  그는 별로 믿음직스럽지 못한 네덜란드 인들로 구성된 뒤몽소 사단이나, 하슬라흐(Haslach) 전투에서 악전고투를 치르느라 병력이 크게 줄어든 뒤퐁 사단은 뒤로 돌리고, 믿음직한 가잔 장군의 사단을 앞장 세워 정신없이 쿠투조프를 추격했습니다.  이들은 린츠(Linz)에서 도나우 강 북쪽으로 강을 건넌 뒤, 강행군으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추격했는데, 이러다보니 그 뒤를 따라야 할 뒤퐁 사단이나, 또 역시 그 뒤를 따라야 할 뒤몽소 사단과의 거리가 크게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악전고투 전문가 뒤퐁 장군입니다.)



특히 안좋았던 것은 린츠에서 강을 건넌 이후, 가잔 장군의 용기병 3개 전대가 가잔 사단 본대를 떠나 단독 행동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아마도 이 지역은 도나우 강 바로 북쪽이 산악 지역이라서 강가의 평야 지대가 매우 좁기 때문에, 기병이 활동하기에는 불리한 지역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뒤렌스타인과 크렘스 사이의 강변은 강과 산자락이 거의 붙어있다시피한 지역이라서, 이 일대의 주민들의 생업은 산기슭에 계단식으로 조성된 포도밭 농사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보병 사단의 눈 역할을 해줄 기병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버린 것은 그다지 잘한 조치는 아니었습니다.  이로 인해, 11월 9일 경 가잔 사단이 도나우 강변의 작은 마을 마르바흐(Marbach an der Donau)에 도착했을 때, 모르티에 원수나 가잔 장군은 그들의 앞 불과 수 km 전방 상황이 어땠는지 전혀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지도 아래쪽의 A 표시가 마르바흐이고, 지도 위쪽의 알파벳 없는 표시가 뒤렌스타인입니다.  도나우 강을 따라 행군하면 못해도 50km는 넘게 나옵니다.)



이렇게 눈먼 장님 식으로 전진하는 것은 가잔에게도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해서 기병은 아니지만 보병으로 구성된 선발대를 뽑아 뒤렌스타인-크렘스 사이의 강변으로 정찰을 내보냈는데, 그만 이 40명의 프랑스 보병들은 강변을 정찰 중이던 러시아 군의 코작 기병들에게 모조리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기병이었다면 잽싸게 말을 달려 도망이라도 쳤을텐데, 소규모 보병으로서는 코작 기병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모르티에는 러시아 군이 어디에 있는지 정말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뒤렌스타인을 향해 행군하면서 만난 오스트리아 농민들을 심문해보니, '불과 하루이틀 전에 크렘스에서 러시아 군이 황급히 다리를 건너 동쪽으로 도주했고, 지금 크렘스에는 소수의 후위대만 남아 있다' 라는 소식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1812년에 나폴레옹 군의 공포에 질리게 했던 코작 기병대입니다.  나폴레옹 전쟁에 동원된 코작들은 주로 돈강과 우랄산맥 등에 거주하는 자유민, 즉 농노가 아닌 기마 민족들로부터 차출되었습니다.  이들은 이미 제2차 동맹 전쟁 때 이탈리아나 스위스의 주민들로부터 무자비한 약탈 행위를 저질러 위명을 떨친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우아한 프랑스 인들도 그에 전혀 뒤지지 않는 약탈의 경지를 보여주었지요.)



모르티에로서는 이 소문을 믿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우선 러시아 군이 후퇴하고 있고, 자신은 그 뒤를 맹추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멋진 승리에 대한 갈증이 모르티에의 조심성을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크렘스에 남아있다는 소수의 러시아 군이 거기에 언제까지 머물러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아주 오래 있을 것 같지는 않았거든요.  이런 소수의 후위대는 쫓아오는 적군에게 던져주는 미끼인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 모르티에는 그런 작은 미끼라도 잡아다 족을 치고 그 전과를 부풀려 나폴레옹에게 보고해야 할 처지였습니다.  모르티에는 일단 11월 9일부터 불과 하루 만에 무려 50km를 강행군하여 11월 10일 오후에  뒤렌스타인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이곳에 사령부를 꾸미고 작은 야전 병원을 설치하여 강행군으로 지친 병사들을 치료하게 한 뒤, 그 다음날 바로 불과 수 km 떨어진 크렘스의 러시아 군을 들이칠 계획이었습니다.




(뒤렌스타인 작전 당시 쿠투조프의 사령부가 있었던 장크트 텐의 모습입니다.  로마자 표기는 Sankt Pölten으로 되어 있는데, 구글 지도의 표기에는 장크트 텐으로 되어 있네요.  저 Pöl 부분은 묵음인가 봐요 ?)



한편, 도나우 강 남쪽인 장크트 텐 (Sankt Pölten)에 있던 쿠투조프는 이러한 프랑스 군의 움직임을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도나우 강변에서 포획한 프랑스 군 정찰병들을 모질게 심문한 결과였지요.  이제 뒤렌스타인의 프랑스 군과 크렘스의 러시아 군이 불과 수십 km 떨어진 거리까지 접근하게 되었는데, 쿠투조프는 프랑스 군의 움직임과 병력 규모를 자세히 알고 있었고, 반면에 모르티에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것만 해도 쿠투조프에게 크게 유리한 상황이었는데, 여기에 한 술 더떠서, 쿠투조프는 좀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러시아 군이 황급히 도주 중이고, 지금 크렘스에는 소수의 후위대만 남아 있다' 라는 소문을 내도록 했습니다.  이 인근 마을 주민들은 모두 오스트리아 인들이었으므로, 당연히 이 헛소문의 전파에 매우 협조적이었습니다.  모르티에가 입수한 소중한 군사 정보라는 것은 바로 이 헛소문이었던 것입니다.




(이 돼지같은 아저씨가 바로 꾀돌이 쿠투조프입니다.)



(꾀돌이 돼지하니까 재미있게 보고 있는 웹툰 덴마의 '돼갈량' 하즈가 생각나는군요.  제가 볼 때 양영순 작가는 거의 신필 김용 수준 같습니다.)



쿠투조프의 곁에는 소수의 오스트리아 장교들이 있었는데, 구체적인 작전 계획은 이 오스트리아 인들이 짰습니다.  그 중 핵심은 슈미트 (Johann Heinrich von Schmitt) 장군이었습니다.  이 양반은 당시 62세의 노장으로서, 7년 전쟁 및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 그리고 제1,2차 동맹 전쟁에서 주로 참모 역할을 수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특히 오스트리아의 명장 카알 대공의 수석 참모였는데, 카알이 신임을 잃고 물러나자, 그는 아예 군에서 은퇴해버렸다가, 조국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풍전 등화의 위기에 놓이자 다시 군에 복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얼마 안되는 오스트리아 군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2세가 직접 써준 소개장을 들고 쿠투조프의 사령부를 찾아갔고, 쿠투조프는 이 노장을 환대했습니다.  특히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이 지역 출신이었던 오스트리아 군의 스티바 (Christoph Freiherr von Stiebar) 대위였습니다.  이 지역의 지리를 손바닥처럼 꿰고 있던 그 대위가 알려준 지형을 바탕으로, 슈미트는 모르티에를 위한 멋진 함정 설계에 들어갔습니다.




(이 얌전하게 생긴 아저씨가 슈미트 중장입니다.  왜 참모장 역할만 하시던 양반이 굳이 험한 산길을 삥 도는 습격대의 지휘를 맡으셨는지, 그리고 왜 어둠 속 난전에서 아군인 러시아 군의 총격에 전사해버렸는지 의문 사항이 많습니다만, 뭐 알 방법이 없네요.)



슈미트의 작전 계획은 아주 흔하지만 아주 효과적인 것이었습니다.  즉 망치와 모루였지요.  프랑스 군이 뒤렌스타인과 크렘스 사이의 강변을 따라 깊숙이 들어오도록 유인한 뒤, 크렘스에 배치한 강력한 병력으로 그 앞길을 틀어막고, 좁은 강변에서 꼼짝 못하게 해놓은 뒤, 북쪽 산악 지대를 통해 강력한 공격 종대를 프랑스 군의 노출된 좌측면에 찔러 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정면의 적과 씨름을 하고 있는 프랑스 군의 옆구리에 비수를 찔러넣는다는 계획이었는데, 상대가 역전의 프랑스 군이다보니, 확실히 하기 위해 연장질을 1번도 아닌 3번 해주기로 했습니다.  즉, 산악 지역을 통해 1개 공격대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무려 3개의 공격대를 3군데에서 퍼붓기로 했습니다.  크렘스에서 프랑스 군을 막아설 모루의 역할은 바그라티온 (Petr Bagration)의 지원을 받는 밀로라도비치 (Mikhail Andreyevich Miloradovich)가 맡기로 했고, 측면을 공격할 3개 종대는 각각 독토로프 (Dmitry Dokhturov), 스트리크 (Strik), 그리고 슈미트 본인이 직접 맡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좁은 지역에서 길게 늘어져 있을 프랑스 군의 허리를 조각조각 끊어놓은 뒤, 앞뒤로 포위하고 섬멸전을 펼칠 수 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이런 무시무시한 계획 하에, 10일 밤 ~ 11일 새벽에 걸쳐 3개의 종격 종대들은 북쪽 산악 지대를 넘어 큰 반원을 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계산에 따르면 스트리크의 종대는 11일 낮 12시 쯤, 그리고 독토로프와 슈미트가 그 뒤를 이어 시간차를 두고 산기슭에서 우르르 내려와, 우왕좌왕하는 프랑스 군의 측면을 들이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노리는 것은 가잔 사단의 완전 섬멸이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이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일단 고작 6천 명 수준이었던 가잔 사단을 포위 하기 위해 이번 작전에 동원되는 러시아-오스트리아 군의 병력은 기병까지 포함하여 약 2만4천, 즉 4배였습니다.  게다가, 5문의 포병만을 갖추고 있던 가잔 사단에 비해,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은 무려 68문의 엄청난 포병 화력을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잔 사단에게는 아무런 지원 세력이 없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프랑스 군은 가잔 사단의 뒤를 따르던 뒤퐁 사단 뿐이었는데, 이 사단은 지난 '행군할 때는 손을, 전투에서는 발을 쓰라'
http://blog.daum.net/nasica/6862540 편에서 보셨다시피 하슬라흐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부대여서 유사시 그다지 큰 힘이 되지도 못했고, 결정적으로 가잔 사단으로부터 무려 50km 정도 떨어진 서쪽에 있었습니다.  가잔 사단의 궤멸은 이미 결정된 듯 했습니다.




(오늘날 뒤렌스타인의 모습입니다.  저 산등성이에 보이는 바위덩어리 같은 낡은 건물은 십자군에서 돌아오던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가 포로로 붙잡혀 있었다는 뒤렌스타인 성으로서, 이미 당시엔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뒤렌스타인 성의 좀더 큰 사진이에요.  저는 언제쯤 유럽에 가서 이런저런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저런 것을 볼 수 있을까요 ?)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던 가잔과 모르티에는 크렘스를 향해 이른 아침부터 보무도 당당히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은 가벼운 편이었습니다.  비록 11월 초의 쌀쌀하고 궂은 날씨는 불만스러웠지만, 오른쪽은 도나우 강, 왼쪽은 포도밭이 계단식으로 늘어선 산악 지형으로 보호된 강변을 따라 걷기 쉬운 강변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곧 빛나는 승리를 손쉽게 거둘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오전 9시 경에 크렘스 못 미쳐 스타인 (Stei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러시아 군과 조우했습니다.  이것이 아마도 소문에 들은 '러시아 군 후위대'라고 믿은 가잔은 맹렬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뜻 밖에도 이 러시아 부대는 후위 부대답게 슬금슬금 후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맹렬히 반격을 하며 오히려 프랑스 군을 밀어 붙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군의 숫자는 점점 더 불어났습니다.  그에 따라 전투는 뒤렌스타인-크렘스 사이의 강변에 늘어선 작은 마을들인 오베를로이벤(Oberloiben) 등지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습니다. 




(현대의 항공 사진으로 본 뒤렌스타인-크렘스 구간입니다.  이렇게 보니까 뭐 사실 그 사이의 구간이 그렇게 좁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뒤렌스타인 쪽은 정말 산기슭과 강변이 딱 붙어 있네요.)



오전 10시 경이 되자, 마침내 가잔과 모르티에도 이것이 소규모 후위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모르티에는 즉각 후방의 뒤퐁 사단을 급히 소환함과 동시에, 정면에서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이는 밀로라도비치의 공격을 격퇴하기 위해 과감하게 가진 병력 전부를 다 투입해버렸습니다.  그의 사령부에는 예비 대대가 고작 1개 대대, 그것도 완편에서 한참 모라자 고작 2개 중대도 채 안되는 300명 수준의 병력 밖에 없었습니다.  이 상태에서 만약 스트리크의 측면 공격대가 튀어 나왔다면 가잔 사단은 그야말로 끝장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맹렬한 프랑스 군의 공격을 예상하지 못했던 러시아 군은 계획과는 다르게 프랑스 군을 멈춰 세우는 모루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물론 가잔 사단도 더 이상의 진격은 돈좌되어 버렸고, 일단 오후 12시 경에는 전투가 소강 상태에 빠져 들었습니다.  그래도 이 12시에라도 계획했던 대로, 측면에서 스트리크의 병력이 튀어나왔다면 상황은 또 달라졌을 것입니다.




(전투의 무대인 뒤렌스타인-크렘스 사이의 협곡입니다.  저 왼쪽 강굽이에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뒤렌스타인, 반대로 저 오른쪽 강굽이에 역시 보일락말락 하는 곳이 크렘스입니다.  전방에 보이는 두 마을은 오베를로이벤과 우테를로이벤입니다.)



계획보다는 2시간 늦은 오후 2시 경에, 비로소 스트리크의 3개 대대로 구성된 기습 부대가 저 멀리 후방 뒤렌스타인 방면에서 산 기슭을 타고 내려와 뒤렌스타인에 남아있던 소규모 프랑스 군 수비병들을 몰아냈습니다.  후방에서 날아온 이 소식을 들은 모르티에는 비로소 자신이 아주 단단히 짜인 덫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앞에는 만만치 않은 규모의 밀로라도비치의 부대가 버티고 있는데, 후방의 퇴로가 차단당한 것입니다.  북쪽은 산악지대, 남쪽은 도나우 강으로 둘러싸여 빠져 나갈 구멍이 없었습니다. 이 절대절명의 순간에, 가잔 장군의 머리에 자신이 구성했던 '수군'이 떠올랐습니다.  가잔은 러시아 군의 교량 파괴로 인해 도나우 강의 도하가 불편해지자, 강 기슭에서 긁어모은 대형 보트 50여 척으로 작은 소함대를 구성해서 자신의 사단 뒤를 졸졸 따라오도록 했던 것입니다.  가잔은 이 소함대를 이용하여 도나우 강의 남안으로 철수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보트에 타려면 이 소함대까지 어떻게든 길을 뚫어야 했습니다.  스트리크의 부대는 원래 계획과는 달리 밀로라도비치와의 협공이 아닌, 자신의 부대만으로 가잔 사단을 공격하게 된 것을 알고 다소 당황했고, 결국 가잔 사단은 일단 스트리크 부대를 밀어내고 길을 트는데 성공했습니다.  일단 돌파를 당하자, 좁은 협곡이라는 이 지역의 특성이 프랑스 군을 도왔습니다.  가잔 사단을 추격하는 러시아 군의 기동이 좁은 지형 때문에 방해를 받은 것입니다.  스트리크 부대는 파상적으로 가잔 사단을 공격하며 발목을 붙잡았으나, 모르티에와 가잔의 독려를 받은 프랑스 군은 이를 뿌리치며 탈출구를 찾아 훌륭하게 전투 후퇴를 계속 했습니다.




(도나우 강이 관통하는 뒤렌스타인 협곡을 그린 그림입니다.  저 위에 사진에 보여지는 것보다는 협곡의 험악함이 많이 과장되었네요.)



하지만 슈미트 장군이 짠 함정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가잔 사단이 막 함정을 빠져나가려던 순간, 난데없이 프랑스 군의 후방에서 또 한무리의 러시아 군이 나타나 프랑스 군의 후퇴를 막아섰습니다.  바로 독투로프의 부대였지요.  이제 전방에는 밀로라도비치, 중간은 스트리크, 후방은 독투로프의 공격을 받게 된 가잔 사단은 무려 3대1의 수적 열세에다 앞뒤가 포위된 최악의 상황에 빠져 들었습니다.  이때 모르티에의 머리 속에는 아마도 나폴레옹의 '측면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명령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이제 모르티에와 가잔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전에 전투가 발발하자 즉각 소환했던 뒤퐁 사단이 나타나는 것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었습니다.  이날 아침, 뒤퐁 사단은 무려 50km 정도 떨어진 마르바흐 (Marbach)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르티에가 직접 독려하며 강행군을 했던 가잔 사단도, 마르바흐에서 뒤렌스타인까지 행군하는데 하루가 넘게 걸렸습니다.  이제 늦은 오후로 접어드는 이때, 뒤퐁 사단이 짠 하고 나타난다면 그건 기적이었을 것입니다.




(이쯤에서 다시 보는 마르바흐와 뒤렌스타인 사이의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절망에 빠진 가잔 사단의 후방을 가로 막고 선 독투로프의 부대 뒤쪽에서 총성이 시작되더니 독투로프의 부대가 우왕좌왕 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뒤퐁 사단이 독투로프 부대의 후방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 가잔이 독투로프와 스트리크 사이에 포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투로프가 뒤퐁과 가잔 사이에 포위된 모양새가 되어 버렸습니다.  뒤퐁은 대체 어떻게 이렇게 절대절명의 순간에 영화처럼 나타나게 된 것이었을까요 ?

이날 아침 마르바흐에서 일찍 행군에 나선 뒤퐁 사단은 그를 소환하는 모르티에의 전령이 오기 훨씬 전에 이미 포성을 듣고 전방에서 뭔가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가잔과는 달리 아직 경기병 정찰대를 보유하고 있었던 뒤퐁 사단은 기병을 파견하여 전방의 상황을 살펴 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가잔 사단과 접촉하기 훨씬 전에, 저 멀리 산골짜기를 타고 우르르 내려오고 있는 러시아 군을 목격하고는 대경실색하여 곧장 뒤퐁에게 보고했습니다.  그 보고를 받고 가잔과 모르티에가 함정에 빠진 것을 대번에 파악한 뒤퐁은 즉각 강행군을 시작했습니다.  하슬라흐 전투에서 비슷한 상황에 빠져 큰 피해를 입었던 뒤퐁으로서는 가잔의 처지에 더욱 공감을 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뒤퐁이 도착하면서 독투로프는 오히려 앞뒤로 포위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뒤퐁의 강행군에는 댓가가 있었습니다.  뒤퐁이 너무 강행군을 하는 바람에, 병력의 상당수가 낙오되었고, 결국 뒤퐁과 함께 현장에 도착한 것은 고작 2천명 정도 뿐이었던 것입니다.  이미 가잔 사단은 하루 종일 악전고투에 시달리며 병력이 크게 줄어든 상태였으므로, 비록 앞뒤로 포위가 되긴 했지만, 수적 우세를 가진 것은 오히려 독투로프 측이었습니다.  하지만 독투로프의 수적 우세도 별로 쓸모는 없었습니다.  워낙 좁은 지역에 있다 보니, 수적 우세를 활용하기 위해 병력을 전개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독투로프의 부대는 산등성이를 넘어 오느라 대포를 끌고 올 수 없었으므로, 좁은 지역에 겹겹이 몰린 프랑스 군에 대해 강력한 타격을 가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의 혼란스러운 전투 상황을 보여주는 상황도입니다.  아마 강 위에 떠있는 작은 빨간 점들은 대형 보트들을 뜻하는 것인가 본데, 피아간의 구별을 전혀 해놓지 않아서 그렇쟎아도 혼란스러운 전투 상황이 정말 혼란스럽게 보이네요.)



이렇게 좁은 지역에서 프랑스 군과 러시아 군이 삼단 케익처럼 층층이 쌓여 뒤죽박죽된 상황에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오후 5시가 된 것입니다.  11월 초, 협곡에서는 해가 일찍 졌습니다.  이때 이미 협곡에 가득한 혼란에 결정타를 먹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른 부대들도 늦었지만, 특히 늦엇던 슈미트의 습격 부대가 어둠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협곡을 타고 내려온 것입니다.  이들은 마침 뒤퐁 사단의 측면으로 우르르 내려와 그렇쟎아도 뒤죽박죽이던 전장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군과 러시아 군이 뒤섞인 상황에 어둠까지 내려 앉으면서, 양측은 피아를 구분할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하루종일 밥도 못먹고 총질을 해대느라, 혹은 산을 타느라 기진맥진했던 양 군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전투 소강 상태에 들어 갔습니다.  어둠을 타고 간신히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와 뒤퐁 사단과 합류한 가잔 사단은 모르티에 원수의 지휘 하에 소함대를 이용하여 병력을 도나우 강 남안으로 도하시키시 시작했습니다.  이런 프랑스 군의 탈출을 막기 위해 오스트리아 군의 유격병 즉 야거(jagger)들이 분산 대형으로 접근하여 프랑스 군을 공격했으나, 프랑스 군에서도 유격병 (voltigeur)을 내보내 이들을 저지시켰습니다.  이렇게 양측이 전열 대대 대신 유격병들을 풀어 소극적인 견제 전투를 하는 사이, 가잔과 뒤퐁은 도나우 강 남안으로 탈출할 수 있었고, 아침이 되자 마침내 최후까지 후방을 지키던 유격병들도 오스트리아 야거들의 견제를 뿌리치고 마지막 철수 보트에 몸을 실을 수 있었습니다.  모르티에와 가잔에게는 정말 악몽같던 하루가 비로소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야반 도주...가 아닌 도나우 강 도하 작전을 지휘 중인 모르티에 원수입니다.  배경에 역시 뒤렌스타인의 폐허가 된 성을 그려놓았군요.)



이 전투에서 프랑스 군과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과의 차이점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병사 개개인의 용맹성 ?  지휘관 자질의 차이 ?  다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이 전투에서 눈에 두드러지는 차이는 바로 스피드입니다.  제가 평소에도 너무 강조해서 써놓는 바람에 식상한 감이 있습니다만, 이 전투에서처럼 극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드문 것 같습니다. 

만약 스트리크나 독투로프, 슈미트의 측면 공격 부대가 원래 예정했던 시간대로 제때 가잔 사단의 측면을 덮쳤다면 아마 가잔 사단은 정말 궤멸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3개 공격부대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예정보다 몇시간씩 늦고 말았지요.  그에 비해서 프랑스 군의 뒤퐁 사단은 오히려 예정 시간보다 훨씬 일찍, 하룻나절에 무려 50km를 주파하여 가잔 사단을 구조했습니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 것이었을까요 ?  프랑스 인이 천성적으로 성격이 급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불로뉴 캠프에서 1년 넘게 훈련하며 갈고 닦은 실력이 나온 것이지요.  제가 전에 모병제는 군대의 질을 떨어뜨릴 뿐, 징집제가 더 우수하다고 주장해서 몇몇 분이 반발하신 적도 있었습니다만, 사실 중요한 것은 모병군이냐 징집군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훈련을 쌓고 얼마나 강한 동기 부여가 있느냐가 하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초기 그랑 다르메는 충분한 훈련과 나폴레옹 황제의 영광이라는 두가지 요건을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랑 다르메의 초기 멤버들이 아일라우 전투까지 치르면서 많이 소모되고, 또 나폴레옹의 침략 전쟁에 대한 회의가 생겨나면서, 결국 나폴레옹의 무적 신화도 깨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뒤렌스타인 전투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가잔 사단은 사상자 비율이 무려 40%에 달했습니다.  5문의 포를 모두 상실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무려 2천5백명 정도의 사상자를 낸 것입니다.  게다가 약 9백명이 적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결국 가잔 사단에서 무사히 도나우 강 남단으로 후퇴할 수 있었던 것은 전체 병력의 40%에 불과했습니다.  그야 말로 전멸에 가까운 피해였습니다.  뒤퐁 사단의 사상자 수까지 합하면 프랑스 군의 피해는 약 4천에 달했습니다.  특히 가잔 본인으로서는 부하들의 사상보다 더 큰 피해가 있었습니다.  바로 나폴레옹이 친히 하사한 제4 보병 연대의 독수리 깃봉과, 제4 용기병 연대의 군기를 러시아 군에게 탈취당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명예를 소중히 하던 당시 군인 사회에서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습니다. 




(불로뉴에서 나폴레옹이 손수 하나씩 연대마다 나누어 주었다는 독수리 깃봉입니다.  이를 영국군이나 프랑스군이나 모두 독수리 대신 뻐꾸기 (cuckoo)로 불렀다고 합니다.  이것 외에도 국기와 연대기 등 깃발이 한두개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깃발 중 하나라도 빼앗기는 것은 크나큰 불명예로 간주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미 제2 사단의 경우도, 태평양 전투때 깃발을 적에게 빼앗기는 바람에, 두번 다시 미국 본토 내로는 재배치가 되지 못하고 항상 해외로만 떠돌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군대 있을 때 들은 카더라 통신입니다.)



나폴레옹의 뻐꾸기 (독수리 깃봉을 부르던 별칭)를 낚아올린 러시아 군도 사실 그다지 희희낙락할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일단 아군 병력의 불과 1/3 정도에 해당하는 적을 완벽한 함정에 빠뜨려 놓고 싸웠는데도, 적을 궤멸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아군이 큰 피해를 입은 것입니다.  러시아 군의 사상자 수는 프랑스 군과 비슷한 약 4천명 수준으로서, 전체 병력의 약 16% 수준이었습니다.  이건 마치 대학생이 중학생과 싸워서 똑같이 코피가 터진 것과 비슷한 전과였지요. 게다가, 나폴레옹의 뻐꾸기를 빼앗은 대신, 자신들도 연대 군기를 2개나 탈취당하는 봉변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진짜 피해는 그런 헝겊쪼가리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3번째 측면 기습 부대를 지휘하던 오스트리아 군의 슈미트 장군이 혼전 와중에 전사해버렸던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아마도 혼란 속에서 벌어진 러시아 군의 오인 사격 때문일 것이라고 합니다.  그의 죽음이 가져온 영향은 (당시에는 다들 잘 몰랐지만) 상당히 컸습니다.  오스트리아 군에서 최고의 작전 전문가였던 그가 전사하면서, 이어서 벌어질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의 작전 계획을 애송이 베이로더 (Franz von Weyrother) 대령이 짜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이로더 대령은 바로 제2차 동맹 전쟁을 끝장낸 호헨린덴 전투의 실질적인 장본인이었습니다.  (모로와 나폴레옹 - 호헨린덴 전투 참조)  이제 슈미트가 전사하면서, 베이로더가 또 제3차 동맹 전쟁을 끝장낼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 가장 큰 비극이었을 것입니다.

모르티에는 나폴레옹에게 큰 질책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측면 경계를 강화하라는 나폴레옹의 지시를 무시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요.  하지만 가잔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사단의 절반을 구해낸 공로를 인정받아, 레종 되뇌르 훈장을 받게 됩니다.  병력 수준이 삽시간에 절반 이하로 줄어들게 된 가잔 사단은 사실상 전열에서 이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잔 사단은 이후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고, 곧 뒤를 이어 점령된 비엔나에서 재활에 들어가게 됩니다.  러시아 측에서는 쿠투조프가 비슷한 영예를 누렸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번 뒤렌스타인 전투는 러시아 군으로서는 다잡은 물고기를 놓쳤을 뿐만 아니라, 손까지 물린 치욕스러운 낚시질이었습니다.  하지만 천하무적처럼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 군에게 기습적으로 어퍼컷을 크게 먹인 사건은 패전으로 착 가라앉아 있던 오스트리아 궁정을 크게 들뜨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이 전투로 인해 쿠투조프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로부터 마리아 테레사 (Maria Theresa) 훈장을 받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마리아 테레사 훈장입니다.  이런 거 받으면서 '부상은 뭡니까' 라고 물으면 속물 !)



하지만 쿠투조프는 매우 충격적인 결정을 내려 오스트리아 인들을 충격에 빠뜨리게 합니다.   그 결정에 대해서는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를 위한 서론에서 살펴보도록 하시겠습니다.




(다음 목표, 오스만 투르크 전성기에도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철옹성 비엔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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