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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 교육을 논하다 (하편)

by nasica-old 2010.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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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다시 프랑스 혁명 이후, 총재 정부 시기로 되돌리지요.  총재 정부는 일종의 초등학교라고 할 수 있는 학교 제도를 일반화 시킨다는 야심찬 (그러나 실현되지 않은) 계획과 동시에, 인구 30만명마다 2차 교육기관을 하나씩 설립한다는 더욱 더 야심찬 계획을 발표합니다.   이러한 공립 2차 교육기관, 즉 요즘으로 따지면 고등학교는 ecole centrale, 즉 중앙 학교라고 불리웠습니다.  초등학교에서는 11~12살 이하의 아이들에게 주로 공중 도덕과 함께 읽고 쓰기, 산수, 기초 기하학과 역사, 문법을 가르쳤던 것에 비해, 이 2차 교육기관에서는 12살 이상의 소년들에게 다양한 교양 과목들, 즉 수학, 실험 물리학 및 화학, 자연사, 과학적 방법론과 심리학, 정치 경제학, 입법학, 인류학, 위생학, 문법, 문학, 고어 및 외국어 등을 가르쳤습니다.  이 정도의 과목들은 일반적인 교사 한명이 다 가르칠 수가 없었으므로, 각 과목마다 전문 교사가 배정되었습니다.  거의 요즘 고등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였지요. 




(기하학은 이 시대 학생들도 꼭 배우는 과목이었지요.  짤방 제목은 '금발머리의 기하학 답안')



특기할 만한 점으로, 이 ecole centrale에서의 모든 수업은 프랑스어로 진행할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럼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로 수업을 하지 설마 영어로 하란 말입니까 ?  혹시 기존의 귀족 교육이 라틴어나 헬라어로 진행되던 것을 이제 서민적으로 수정한 것일까요 ?  아닙니다.  당시 프랑스 인구의 상당수 (약 1/8 정도)는 프랑스어가 아닌 말을 쓰고 있었습니다.  알사스-로렌 지방은 독일어를 쓰는 인구가 많았고, 브르타뉴 지방은 브르타뉴어를 썼습니다.  총재 정부는 혁명의 프랑스를 하나로 응집하기 위해서는 그 언어를 통일해야 한다고 (정확히) 생각했고, 그 일환으로 모든 고등 교육을 프랑스어로 진행할 것을 강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언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어서, 19세기 후반에 씌여진 모파상의 소설 '아들'의 내용 중에, 브르타뉴 지방을 여행하는 청년이 그 지방의 아름다운 여관집 하녀를 만나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하녀는 프랑스어를 전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아직도 프랑스어와 브르타뉴어가 병기되어 있는 브레통(Breton)의 도로 표지판)



이런 총재 정부의 교육 개혁은 요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안 좋은 점을 하나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즉, 학벌이라는 것이 생긴 것이지요.  총재 정부의 ecole centrale은 기존의 명망있는 사립 학교들 및 종교 기관들과 경쟁해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빨리 자리를 잡도록 뭔가 특혜를 주어야 했습니다.  총재 정부는 그 특혜로서, 공직에 나서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런 공립 2차 교육 기관을 수료해야 한다는 규정을 정한 것입니다.  거의 유럽 역사상 최초의 학력 제한이었던 셈이지요.


여기서 또 잠깐 삼천포로 빠지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 이래로 항상 신분제 사회를 유지해 왔지요.  저는 현대 사회도 일종의 신분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가장 크게 벌어지는 신분 차이이고, 대졸자 사이에도 일류대냐 아니냐, 대학원도 나왔냐 못나왔냐, 해외 유학파냐 아니냐 분류가 나누어지지요.  이건 매우 좋지 않은 일입니다.  신분제라는 것의 가장 나쁜 점이, 사람을 그 실력으로 평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한 계급으로 평가하게 된다는 점이지요.  그건 사람들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족쇄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안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다니는 회사도 엄연히 대졸자만 뽑지만, 사실 제가 지금 하는 일 중에서 대학에서 배운 것은 거의 없거든요.  제 생각에는 고등학교만 제대로 나오고 영어 좀 하고 성실하기만 하면 누구든 제가 지금 하는 일을 배워서 잘 해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왜 대졸자라는 제한을 두는지 참 아쉽습니다.





(인도인들이 그렇게 머리가 좋은데도 국가 발전이 별로 기대에 못미치는 이유가 바로 카스트 제도 때문이라고 들었어요.)



그런데 총재 정부는 왜 이런 나쁜 제도를 도입했을까요 ?  이유는 있었습니다.  사실 그 이전까지는 무슨 일을 하던 간에, 꼭 특정 학교 졸업장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주요 공직 선발 등은 주로 귀족이냐 아니냐 하는 '진짜 사회적 신분' 또는 인맥 등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즉, 학력에 의한 차별보다 더 상태가 안 좋았던 것이지요.  그런 사정을 생각하면 총재 정부의 조치는 당시로서는 좋은 조치였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총재 정부의 교육 개혁 조치는, 그 제도의 의도나 의의를 따지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한마디로 제대로 실현이 되지 못했습니다.  일단 총재 정부가 불과 몇년 밖에 존속되지 못했으니, 장기적인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은 당연하겠지요.  게다가 여러가지 문제가 많았습니다.  가령 교사들의 월급은 국고가 아닌 학부모 부담으로 신속하게 전가되었습니다.  그나마 교사가 충분히 많았다면 좋았겠으나, 제대로 자격을 갖춘 교사의 수가 크게 부족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 교사도 애초에 뭘 배워야 교사가 될 터인데, 애초에 학교의 숫자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의 숫자도 많지가 않았던 것이지요.




(아마도 프랑스 선생님들 중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선생님...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의 프랑스어 선생님이겠지요.  칠판의 글자는 '프랑스 만세'.)



아이러니컬하게도, 총재 정부의 교육 개혁 조치를 완성한 사람은 바로 총재 정부를 쿠데타로 뒤엎은 인물이었습니다.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 사람이었지요.




(나폴레옹도 알고 보면 학부모... 단, 아빠는 황제, 아들은 왕.  보통 학부모는 아니지요.)



나폴레옹은 단순한 전쟁광이나 권력에 미친 독재자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말 프랑스를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로 만들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 그 산물들에는 파리의 개선문을 포함한 아름다운 공공 건물, 도로, 항구, 운하 등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 즉 나폴레옹 법전과 함께 프랑스의 고등학교인 lycee (리세)도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things to do' 목록에는 교육이 꽤 높은 위치에 올라 있었습니다.   영웅은 통하는 바가 있다고,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페르시아를 점령한 뒤 페르시아 귀족층의 젊은이들에게 그리스식 교육을 시켰다고 하지요.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헬레니즘 문화이고요.  그런 것처럼 나폴레옹도 프랑스가 위대한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소년들에 대한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소녀들에 대한 교육은 여전히 살림 잘하는 법 정도였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철저히 지중해성 마초맨이었던데다, 때가 19세기 초였거든요. 이해들 하십시요.) 


나폴레옹이 생각하는 주된 교육 개혁은 두가지 방향이었습니다.  첫째, 종교와 교육의 재연결, 둘째, 엘리트 교육이었습니다.


먼저, 나폴레옹이 추진한 것은 카톨릭을 다시 초등교육에 끌어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1801년의 정교협약 (Concordat) 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국민이 제대로 된 윤리관을 갖추려면 종교 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가 1804년~1805년 의회에서 행한 연설을 보면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나는 자신의 도덕성에 기반이 없고 고정된 생각이 없는 얼치기 학자보다는 뻔한 교리문답 밖에 모르는 교육자들에게 마을 아이들을 보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중략) 사람들에게서 신앙을 빼앗는다면 결국 노상강도만 양산하게 될 것이다."


(글쎄요, 저는 교회를 매주 나갑니다만 진짜 믿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 나폴레옹의 말에는 저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점이 없지 않아 있네요.) 


나폴레옹은 이렇게 초등 교육(ecole populaire)은 주로 카톨릭에게 맡겨 놓고, 주로 2차 교육, 그것도 엘리트 위주의 교육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유능한 관료와 장교들이 필요하며, 그를 위해서는 엘리트 위주의 교육을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를 위해 만든 것이 바로 lycee(리세)로 불리우는, 12~18세 정도의 학생들을 책임지는 2차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지금도 lycee는 프랑스어로 고등학교를 뜻합니다.




(Lycee Lakanal의 모습.  고등학교 치고는 간지가 좔좔... 퀴리 부인의 사위도 이 lycee를 나왔고, 역시 노벨상을 받았다는군요.)



나폴레옹은 이 lycee에 모든 교육의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가령 위에서 언급한 초등 교육기관(ecole populaire)을 위한 재원은 각 지방 단체가 자체 부담을 해야 했습니다만, lycee는 철저하게 국가가 모든 재원을 책임졌습니다.   문과와 이과의 구별도 이때 여기서 생겨났습니다.  Lycee 학생들은 공직을 지향할 것인지, 군 장교가 되기를

원하는지에 따라 나뉘어졌고, 공직을 얻으려는 학생들은 주로 어학, 수사학, 철학 등을 배웠고, 군 장교를 바라는 학생들은 수학, 화학, 물리학 등에 중점을 둔 교육을 받았습니다. 




(가령 1794년에 혁명 정부에 의해 세워진 기술 학교인 Ecole Polytechnique는 1804년 나폴레옹에 의해 군 장교를 키워내는 일종의 사관 학교로 재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위의 그림에서 묘사된 1812년 당시 에콜 폴리테크니크 학생은 학생인데도 저렇게 군복을 입고 군대식 생활을 하게 되어 있었지요.)




(Ecole Polytechnique를 방문 중인 나폴레옹 황제.  환호하는 저들은 군인이 아니라 그 학교 학생들입니다.)




(Ecole Polytechnique는 1970년에야 군사 학교가 아닌, 그냥 국립 기술 대학으로 바뀝니디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프랑스 국방부에서 그 감독을 맡고 있고, 학교장도 프랑스군 장성이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와 같이, 학생들은 바스티유 기념일과 같은 특별한 날에는 군복을 입고 행진에도 참여한답니다.)



이 lycee를 졸업한다는 것은 총재 정부 시절 ecole centrale을 졸업하는 것보다도 더 한 특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lycee 졸업생들에게 공직 또는 군에서의 자리를 보장했던 것입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그야말로 행시 패스와도 같은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Lycee의 수는 1802년 이 제도가 발표될 때 약 30개였고, 1814년 프랑스 제국 말기에도 36개교에 약 9천명의 학생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히도) 그 대부분의 학생들은 중상류층 학생들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총재 정부의 중앙 집중식 교육 정책은 그대로, 오히려 더 강화하여 추진했습니다.   그가 1807년 국무 회의에서 선언한 내용을 보면 그에 대한 의지가 드러납니다.


"우리의 모든 기관 중에 공공 교육 기관이 가장 중요하다.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것이 거기에 달려 있다.  ...중략... 무엇보다도 우리는 통일성을 확보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의 틀에서 한 세대 전체를 찍어낼 수 있어야 한다."


총재 정부나 나폴레옹이나 중앙 집중식 교육을 강조한 것은 국가 사상의 통일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때부터 공립 학교에서는 국가 (또는 황제)에 대한 애국심과 충성심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의 독재를 위해서는 더욱 그런 점이 강조되어야 했지요.  가령 1814년 연합군이 프랑스를 침공할 때, 나폴레옹은 아직 징병 나이에도 이르지 않은 어린 아이들을 징집하여 전투를 치렀습니다.  이때 이 소년들을 징집하는 법안에 서명한 것이,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대신한 나폴레옹의 황후 마리 루이즈였기 때문에, 이 소년병들을 마리 루이즈(Marie Louise)라고 불렀는데, 이 마리 루이즈들은 나폴레옹조차도 만족해할 정도로 의외로 용감하게 잘 싸워주었습니다.  이 소년병들은 학교에서 배운 위대한 영웅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차 있었거든요.  그 모든 것이 지난 10년간 나폴레옹이 교육에 쏟아부은 정성의 결과였지요.




(이 후덕하게 생긴 오스트리아 공주님이 바로 마리 루이즈입니다.)



나폴레옹이 오늘날 프랑스, 아니 전세계에 남긴 유산 중 대표적인 것 두가지를 꼽으라면, 주로 나폴레옹 법전과 lycee, 즉 고등학교를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lycee 제도는 워낙 평판이 좋아서, 나폴레옹 제국이 무너진 뒤에도 계속 유지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고등학교 대부분이 중앙 정부의 직접 통제 하에 있다는 점이나, 엘리트 위주의 교육 (대입, 그것도 주로 서울대에 몇명 입학시켰느냐가 중요하지요)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나폴레옹의 교육관을 상당히 많이 수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원래 나폴레옹이 만든 lycee 제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고등 교육이었던 것에 비해, 우리나라의 고등학교 제도는 그저 대학에 가기 위한 암기 위주의 통과 의례가 되어 버렸다는 점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을 보면 내용이 대단합니다.  삼각함수를 뛰어넘어, 로그함수까지 배우는 것이나, 칸트와 헤겔 같은 철학, 열역학 법칙, 그리고 천체 물리학까지 배우는 것은 정말 상당한 고등 교육이거든요. 그러나 데카르트의 철학이나 지구의 세차 운동이 한줄 암기 항목으로 요약되는 점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지요. 




(글쎄요... 저는 이해찬 세대가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수학 실력이 얼마나 좋으냐 보다는 창의력이 더 중요한 것 아닌가요 ?  스티브 잡스가 수학을 잘했기 때문에 저렇게 성공한 것 같지는 않던데.)



원래 나폴레옹이 만든 lycee 제도가 충실히 구현되었다면, 우리나라 고등학생도 지난번 상편 머리 부분에 인용했던 프랑스 바깔로레아 시험 문제에도 술술 답안을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서 나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서울대는 아니지만) 소위 명문대 나왔다는 제가 그 시험 문제를 보고 막막함을 느끼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만약 한국의 고등학교를 보았다면, 나폴레옹은 자신의 교육 제도가 한국에서 약간 이상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느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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