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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발미(Valmy)에서 생긴 일

by nasica-old 2010.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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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이 불러온 수많은 전투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와 1815년의 워털루 전투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나폴레옹의 가장 빛나는 승리와 가장 아쉬운 패배였던 이 두 전투에 대해서는 워낙 잘 알려져 있어서, 역사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졸지만 않았다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쓴 회고록에서, 아우스테를리츠 전날 밤, 자신이 야간 시찰을 돌 때, 수많은 병사들이 자신을 보려고 잠자리로 쓰던 짚단에 불을 붙여들고 모여든 그 순간이 인생 최고의 밤이었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그 두 전투의 의미가 과연 그 명성만큼이나 대단했을까요 ?  아우스테를리츠는 이제 막 황위에 오른 나폴레옹의 위치를 굳건히 하고, 또 군사적 천재로서의 그의 전설을 낳았다는 점에서 대단한 전투였기는 했습니다.  또 워털루 전투는 다시 일어서려는 나폴레옹 제국의 싹을 초반에 싹둑 잘라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나폴레옹이 만약 졌다면, 또,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만약 이겼다면, 세계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  글쎄요, 그렇게 크게 바뀌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정치 지도나 국력으로 보았을 때,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했다더라도, 나폴레옹은 곧 그 패배를 수습하고 다시 승리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워털루에서 그로시(Grouchy) 장군이 딴 곳을 헤매지 않고 제때 나타나 나폴레옹이 웰링턴의 영국군과 블뤼허의 프러시아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이미 인재들이 다 떠나간 나폴레옹이 피폐된 프랑스에서 얼마나 더 병력을 긁어모을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역사에는 아주 극적인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종종 발생하곤 합니다.  그런 사건은 수십만의 군대가 피바다를 이루며 싸우는 대전투에서 이루어지기도 하고, 어떤 왕궁의 한가로운 집무실에서 이루어지기도 하고, 초라한 농가의 앞마당에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제국으로 이어지는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전투는 1792년 9월 20일, 프랑스 동부의 발미(Valmy)라는 작은 마을에서 벌어졌다고 평가됩니다.

이건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전투에 참전했던 프랑스측 지휘관 중 한명인 켈레르만(Kellermann) 장군은, 왕정 복고 이후인 1820년에 사망하는데, 그때 유언으로 자신의 심장을 따로 떼어내 발미 전투 현장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괴테가 이 전투에 옵저버 자격으로 (간단히 말해 구경꾼으로서) 프러시아군에 종군했다가 전투에 패배한 뒤 풀이 죽은 프러시아 장교들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은 매우 유명한 일화입니다.

"오늘 이 곳, 이 날부터 세계 역사의 새시대가 열린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가 자신이 그 탄생의 순간에 있었다고 말하실 수 있습니다."




(괴테는 이미 당시 명사였기 때문에, 이 말을 하고 나서 두들겨 맞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과연 이날 발미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  긴 이야기를 싫어하시는 분들을 위해 요약합니다.

발미 전투 한줄 요약 :
1792년 9월 20일, 프랑스 북부 발비(Valmy)라는 곳에서 두무리에(Charles Francois Dumouriez) 장군의 프랑스 북부군과, 켈레르만(Francois Christophe Kellermann)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 중부군이, 신생 프랑스 공화국을 전복시키기 위해 침공하는 오스트리아-프러시아 연합군을 저지했습니다.  

발미 전투 5줄 서술 :
독일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롱위(Longwy) 요새와 베르덩(Verdun) 요새가 함락된 상황에서, 브룬스윅(Brunswick) 공작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프러시아 동맹군은 프랑스 국민 공회를 때려엎고 당시 가택 연금 중이던 루이 16세를 복위시키기 위해 파리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들을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은 두무리에 장군의 북부군(Armee du Nord)과 켈레르만 장군의 중부군(Armee de Centre) 뿐이었는데, 이 두 군단은 그나마 연락이 두절되어 제대로 된 합동 작전을 펼치지 못하고 우왕좌왕 했습니다.  그 결과 켈레르만의 중부군 2만명 정도가 홀로 허겁지겁 발미에 도착하여, 브룬스윅의 동맹군 3만5천명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예상은 조직된지 얼마 되지 않은 프랑스 징집군은, 오랜 전통이 있던 프러시아 정예군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다들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포병대의 활약과 브룬스윅 공작의 머뭇거림으로 인해서, 양측은 총 사상자 400여명 정도의 경미한 사싱자만을 낸 뒤, 본격적인 전투 없이 그대로 연합군이 후퇴하여 일단 프랑스 공화국은 위기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시시하지요 ?  9월 20일 딱 하루 벌어진 전투에서, 양측은 수천명이 나란히 늘어서서 머스켓 총탄을 퍼붓는 본격적인 라인 배틀을 벌이지도 않았고, 하물며 대지를 피로 적시는 총검 돌격전을 벌이지도 않았습니다.  뛰어난 전술적 변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특출난 영웅이 탄생하지도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두무리에의 북부군까지 합하면 4만7천명이나 되는 프랑스군이, 병력면에서 열세이던 오스트리아-프러시아 연합군을 저지(패배시킨 것도 아니었습니다)한 것이 뭐 그리 대단하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저 발미 전투는 괴테가 남긴 저 말 때문에 덩달아 유명세를 탔는지도 모르지요.  당시 프랑스 국민들에게도 발미 전투는 그다지 유명한 전투는 아니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이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자존심은 그런 듣보잡 전투가 자신의 아르콜레 다리 전투와 같은, 역시 역사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전투보다 더 높이 평가받는 것을 허락치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나폴레옹 제국이 몰락한 뒤, 역사학자들이 프랑스 혁명기에 벌어진 주요 전투들에 대해 집필할 때도 이 발미 전투는 그 목록에 들어있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발미 전투로 시작된 제1차 동맹 전쟁은 결국 나폴레옹이 북부 이탈리아를 휩쓸고 나서 캄포 포르미오 조약으로 끝이 납니다.)



하지만 발미 전투가 그 시시한 전개 과정과 클라이맥스 없는 결말에도 불구하고, 18세기 말 ~ 19세기 초 유럽의 역사를 뒤바꾼 사건이 된 것은 확실합니다.  그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바로 "징집군 vs. 직업군"의 테마입니다.

직업적인 전문 군인 또는 용병의 허상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차례 언급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또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 아테네인들이 아테네 여신의 옷을 벗겨야 했던 까닭은 ?  http://blog.daum.net/nasica/6862412 참조)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징집병은 확실히 다년간 복무하는 직업 군인들에 비해 훈련 정도가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특히 군대 전체가 징집되지 얼마되지도 않은 상태일 때는 더욱 그렇겠지요.  

원래부터 프랑스는 서유럽의 강국이었고, 특히 루이 14세가 부지런히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며 전쟁을 벌인 덕택에 그 실력과 명성은 매우 드높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전쟁에 따른 재정 악화로 인해 ( 재정 적자, 아시냐 지폐, 그리고 나폴레옹  http://blog.daum.net/nasica/6862340 참조) 프랑스의 국력과 함께 군대도 점차 약해졌었지요.  프랑스 대혁명은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군대에 결정타를 먹였습니다.  많은 연대들은 '귀족적'이라는 이유로 해체되었는데, 사실 그런 연대들을 구성하고 있는 병사들은 프랑스인들이 아닌 외국 용병인 경우가 많았으니, 혁명에 적대적일 것이라는 국민 공회의 의심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그런 외국 용병들은 성난 시위대에게 학살당하기도 했습니다.  루이 16세를 끌어내기 위해 파리 군중들이 튈르리 궁으로 쳐들어갔을 때, 그곳을 지키던 스위스 용병들이 떼죽음을 당했던 것입니다.

특히 장교들의 상태는 심각했습니다.  원래부터 장교는 거의 귀족들이 독차지하고 있던 특권 계급이었습니다.  가령 나폴레옹만 하더라도, 비록 몰락한 피점령국 가문 출신이었지만 어쨌든 귀족이었기 때문에 장학금 받고 사관학교를 거쳐 포병대 소위가 될 수 있었고, 나폴레옹도 프랑스 포병대 장교복을 입고는 '출세했다'며 몹시 좋아했었지요.  이런 장교들 중 상당수가 (국민 공회로부터의 노골적인 핍박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방데 지방의 왕당파 반란군에 가담하거나, 귀족으로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그 빈 자리를 매꾸었던 장교들은 타고난 위엄과 지도력도 없었고, 무엇보다 군사전문가로서의 자질과 경험이 부족했지요.  

자리를 지켰던 기존 장교들조차도 지휘에 애를 먹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혁명으로 인한 사회질서 붕괴에 신이 난 선동분자들이 '귀족 출신 장교들을 몰아내자'라며 병사들을 선동했기 때문입니다.  국민공회도, 이런 시류에 편승하여, 병사들이 내뱉는 장교들에 대한 부당한 모함질에도 일일이 진지하게 인터뷰를 하는 등 장교들의 입지를 더욱 좁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 열강들이 연합군을 편성하여 프랑스 혁명을 초기에 진화할 움직임을 보이자, 프랑스에서는 열성적인 자원병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유럽인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상당히 호전적인 것 같긴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과연 몇명이나 전투에 자원할까요 ?)  그러나 이들은 모두 열성적이긴 했지만, 훈련은 커녕 기본적으로 장교들의 명령에 복종할 의사조차 별로 없었습니다.  지휘에 따르지 않는 군대가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  발미 전투에 투입된 두무리에 장군도, 그런 선동분자들로 가득찬 연대를 시찰할 때는 포병대와 기병대로 그들을 포위해놓고 연설을 해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런 군대가 의외로 전투에서는 용맹무쌍할 수도... 있을까요 ?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혁명 초기 프랑스군이 보여준 작전 능력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보였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비록 자유 평등 박애를 기치로 내걸었습니다만, 초기부터 분명한 폭력성과 제국주의적인 성격을 내비쳤습니다.  (안 그랬다면 나폴레옹 같은 인물이 발 붙일 곳이 없었겠지요.) 1792년 프랑스 국민공회는 오스트리아에 먼저 선전포고를 하고, 당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소유이던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을 침공합니다.  당시 프랑스 징집병들은 오스트리아 수비군에 비해 압도적인 수적 우세를 가졌음에도, 오스트리아군과 접전이 벌어지자마자 어이없이 공포에 질려 무질서하게 패주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프랑스 사나이들이 용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들의 패주가 지휘관의 '배신' 때문이라며 제멋대로 지휘관들을 살해하기에 이릅니다.  장군들이 무능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플랑드르 작전 당시 이들을 이끌었던 장군들은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이었던 로샹보 (Rochambeau), 라파예트(Lafayette), 뤼크너(Lucker) 등 당대의 이름있는 인물들이었음에도, 이 징집병들의 한심한 작태를 막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라파예트는 유능한 장군으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군대는 '군대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한눈에 파악하고 '이 군대는 전투에 투입되면 자멸할 것'이므로 평화 협상을 진행할 것을 호소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나마 로샹보나 라파예트, 뤼크너 등은 모두 국민공회의 과격한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가 지휘권을 잃고 탈출하거나 감금되었습니다.




(멜깁슨 주연의 영화 '패트리어트' 막판에 나왔던 요크타운 전투에서, 워싱턴과 함께 작전 상의 중인 로샹보 장군)




(입헌 군주국을 꿈꿨던 온건 개혁파 라파예트.  그는 프랑스보다는 미국에 열렬한 팬들이 많았고, 미국 도시나 군함 등에 라파예트라는 이름을 가진 것들이 꽤 많습니다.)



프랑스군이 이렇게 볼썽 사나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동안,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 등 제1차 동맹국들은 착실하게 프랑스 침공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기본 작전은 당시의 전격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딱 알맞은 크기의 병력을 재빨리 모아, 적의 심장부인 파리로 똑바로 뚫고 들어가 국민공회를 해체하고 루이 16세를 복위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 침공군을 막을 프랑스군은 세당(Sedan) 요새에 주둖산 북부군 2만3천명, 메츠(Metz) 요새에 주둔한 중부군 2만명이 있었을 뿐이었고, 모두 보급 물자나 사기가 엉망으로서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상태였기 때문에, 동맹국들은 이 작전의 손쉬운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 동맹 침공군은 6만명의 프러시아군과, 4만5천명의 오스트리아군, 그리고 프랑스 망명 귀족들이 편성한 1만5천명의 병력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지휘관은 7년 전쟁에서 활약했던 브룬스윅 (Brunswick) 공작이었습니다.




(Charles-Guillaume-Ferdinand, 브른스윅 공작은 이때 발미 전투에서의 뜨뜨미지근한 지휘 때문에 의심의 눈초리를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그의 사후 그의 유품에서 난데 없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보석들이 많이 발견되어, '역시 프랑스 국민공회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라는 의심이 더욱 짙어졌었습니다.  진실은 알 수 없지요.)



이 침공군은 침공 경로에 있던 롱위(Longwy) 요새와 베르덩(Verdun) 요새를 거의 전투를 치루지도 않고 프랑스 수비군의 항복을 받아내며 점령했습니다.  그 정도로 프랑스군의 상태는 좋지 않았습니다.


이제 침공군은 메츠와 세당 사이를 파고 들었는데, 파리까지 남은 장애물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왼쪽에는 메츠의 프랑스 중부군이 있었습니다만, 이들은 극히 최근에 뤼크너 장군이 반혁명파로 숙청되면서 켈레르만 장군이 지휘권을 막 넘겨 받은 상태였고, 세당의 북부군은 라파예트가 역시 반혁명파로 몰려 도주한 이후, 그 후임인 두무리에 장군이 도착하지도 않은 상태였습니다.




(두무리에 원수께서는 발미 전투 바로 다음해, 국민공회에 대한 쿠데타를 계획하다 실패한 뒤, 훗날 프랑스 왕 루이 필립이 되는 샤르트르 공작과 함께 오스트리아 진영으로 도망쳤고, 결국 영국에서 영국 정부가 주는 연금을 받으며 영국의 반(反) 나폴레옹 전략에 조언을 해주며 보냅니다.  나폴레옹 몰락 후, 두무리에는 프랑스 원수직을 다시 찾고자 노력했으나 루이 18세의 호응을 받지 못했고, 결국 1823년 영국에서 죽습니다.)



두무리에는 세당에 도착하자마자 상황을 파악하고, 당시 빽빽한 숲이 우거졌던 아르곤(Argonne) 삼림지대에서 최후 방어선을 치기로 합니다.  그는 메츠의 켈레르만에게 연락을 보내 동맹군의 후미로 돌아 적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하고, 자신은 아르곤 삼림지대의 유일한 통로에 방어진지를 구축합니다.  그러나 동맹군도 바보는 아니라서, 아르곤 삼림지대의 통로 중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졌던 곳을 강행 통과하여, 두무리에군을 역포위할 태세를 보여주었습니다.  두무리에는 간신히 탈출합니다.  이 과정에서 (별 다른 전투가 없었으므로) 전사자는 거의 없었습니다만 적군의 모습, 또는 소문만 듣고도 두무리에의 북부군은 천명 단위로 탈영하는 추태를 다시 보여줍니다.

그러나 두무리에는 여기서 매우 정확한 군사적 판단을 내립니다.  사실 이 판단이 며칠 뒤 발미 전투에서 동맹국을 막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아르곤 삼림지대가 뚫린 마당에 파리까지 정말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상태에서, 두무리에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2가지 중 하나였습니다.  하나는 포위에서 빠져나온 잔존 병력 2만명을 이끌고 파리로 돌아가서, 침공군을 막아서려는 노력을 준비하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현 위치를 고수하며 켈레르만의 중부군 2만명과 연결을 꾀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자를 택한다면 분산되어 부족한 병력으로 강력한 침공군을 홀로 상대해야 하므로 매우 불리한 위치가 되는 것이었고, 후자를 택한다면 적과 맞설 수 있는 수준으로 병력을 합칠 수 있겠습니다만, 대신 적이 파리로 진격한다면 아무도 그를 저지할 병력이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두무리에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전술 교리가 이미 적 도시의 점령보다는 적 병력의 파괴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동맹군의 브룬스윅 공작도 4만명이나 되는 적군을 배후에 두고 감히 파리로 진격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옳았습니다.


메츠에서 출발한 켈레르만의 중부군은 아르곤 삼림지대에서 두무리에의 북부군이 괴멸당했다는 반쯤 진실인 소식을 듣고, 자신의 적은 병력으로는 적군을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회군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다행히 두무리에의 전령이 제때 켈레르만에게 도달하여, 양군은 드디어 생-므누(Sainte-Menehould) 인근에서 합류하게 됩니다.  두무리에는 켈레르만이 자신이 점령한 능선 맞은 편 능선을 점령하고 진을 치기를 원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켈레르만은 그곳에서 멈추기를 거부하고 더 적진 쪽으로 접근하여 발미 평원으로 나아갑니다.




(켈레르만 장군께서는 발미 전투 이후 뚜렷한 공적이 별로 없으셔서 그런지 초상화도 마땅한 것이 별로 없네요.)



이 장면을 본 프러시아군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당시 진영 안에는 프러시아의 젊은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Friedrich Wilhelm)도 있었고, 프랑스 망명 귀족들도 다수가 있었는데, 이들은 전략이고 나발이고 당연히 적군과 한시라도 빨리 교전하여 영광을 누리기를 원했습니다.  사실, 베테랑인 브룬스윅 공작이 보기에도, 저렇게 프랑스 중부군과 북부군이 잠시 분리된 상태에서 중부군을 손쉽게 격파하고 나면, 남은 북부군은 쌈을 싸먹든 쪄먹든 나중에 고민하면 될 일이었지요.

드디어 9월 20일, 운명의 날 아침 안개를 뚫고 프러시아 기병대가 움직이기 시작하여 켈레르만의 중부군 측면을 우회하며 소규모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두무리에도 현 상황을 파악하고는 켈레르만을 지원하기 위해 부대를 진격시킵니다만 그 진격은 너무 느렸습니다.  아무래도 켈레르만은 고립된 상황에서 혼자 싸워야할 입장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켈레르만은 자신의 부대가 전투 직전에, 예전에 다른 프랑스 부대들이 다들 그랬던 것처럼, 첫번째 총성이 울리자마자 우르르 무너져 패주하지 않을런지 걱정했을 것입니다.   




(파란 것이 프랑스군, 빨간 것이 프러시아-오스트리아 동맹군입니다.)



하지만 이날 프랑스 병사들은 달랐습니다.  프러시아군의 포병대가 그들의 대열에 포탄을 퍼부어대면서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이들은 전처러 쉽게 물러나지 않고 대오와 위치를 지켰습니다.  이는 아마도 두가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먼저, 당시 프랑스군은 왕정 시대의 직업 군인들만을 따로 모아서 부대를 편성하지 않고, 대부분 신병인 징집병들과 섞어서 부대를 편성했습니다.  즉, 고참병들이 신병들 사이에서 중심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이었는데, 이날 비로소 그 효과를 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바로 나폴레옹 자신도 자랑스러워했던 프랑스군의 핵심이었던 포병대의 활약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포병대를 낳은 것이 아니라 프랑스 포병대가 나폴레옹을 낳은 것이죠)



나폴레옹은 일찌기 발랑스 포병 연대에 소위로 근무하면서 이렇게 쓴 바 있습니다. "프랑스 포병대는 유럽 최고의 집단이며 가장 잘 조직된 군대이다.  병영 분위기는 가족적이며 책임자들은 부모와 같다.  책임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용감하고 위엄있는 인간들이며 황금처럼 순수하다."  나폴레옹의 말과 글은 소싯적부터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 않습니다만, 나폴레옹이 이토록 찬양했던 프랑스 포병대는 이날 자신들이 그야말로 프랑스군의 핵심 부대라는 것을 그 실력과 용기로 증명해보였습니다.  프러시아 포병대에 맞서서 훨씬 더 열정적이고, 훨씬 더 정확하게 적의 보병대를 강타했던 것입니다.  




(아마 저기 죽어넘어진 말이 켈레르만의 말인 모양입니다.)


켈레르만은 적의 보병대가 프랑스군 포병대의 활약으로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또 자신의 부대가 대오를 굳게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오히려 적을 공격하기 위해 보병대를 끌고 진격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곧 프러시아 포병대의 집중 사격을 받고 프랑스군은 어지러이 패퇴했고, 켈레르만 자신도 자신이 탄 말이 산탄에 쓰러지는 바람에 전장에 쓰려져 부하들이 간신히 구출해내는 봉변을 당했습니다.  이 광격에 적 보병대가 다시 용기를 내어 전진을 계속하자, 이번에는 프랑스 포병대마저 용기를 잃고 몇몇 포병들이 위치를 이탈하여 후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만, 나폴레옹이 그토록 찬양했던 포병 장교들의 헌신으로 간신히 패주의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이어서, 말을 잃은 켈레르만이 보병들과 함께 전열에 서서, 프러시아군이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총검으로 무찌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때 그는 (말을 잃었으므로) 자신이 최전방에 선 모습을 병사들에게 보여주고자 모자를 벗어 칼 끝에 씌워 높이 쳐들고 병사들을 독려했고, 이 모습에 감동한 병사들은 대대별로 일제히 "Vive la nation (조국 만세)!"의 구호를 외쳤습니다.  이 모습에 프러시아군은 확실히 예전과는 다른 프랑스군을 발견하고는, 슬금슬금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러시아의 왕 빌헬름이 아군의 후퇴에 화가 나서 이리저리 말을 달리며 진격을 독려했지만, 프랑스군의 포병대가 퍼붓는 정확한 사격에 자신의 곁에 선 참모 장교들까지 쓰러지는 모습과, 두무리에의 지원 병력이 현장에 속속 도착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도 어쩔 수 없이 후퇴하게 됩니다.  이날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누가 뭐래도 역시 프랑스 포병대였습니다.  사실 프랑스 보병들은 '(도망치지 않고) 가만히 서있었다'는 것 빼고는 별로 한 것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흔히 이 전투를 '발미 전투'가 아니라 '발미 포격전(cannonade)'라고도 부릅니다.

이날 역사적인 발미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도 모른채, 파리에서는 국민공회가 마침내 프랑스를 공화국으로 선포했습니다.  만약 이날 발미 전투가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다면, 동맹군은 그대로 파리에 입성하여 국민공회를 해산시키고 루이 16세를 다시 왕위에 올렸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오늘날 역사가 많이 뒤바뀌었겠지요.  실제로, 프랑스는 그 순간까지도 라파예트처럼 프랑스를 입헌 군주국으로 만드려는 온건파들과, 역도들을 몰아내고 적법한 왕인 부르봉가의 루이 16세를 복위시키려는 보수파들 등 정치적으로 무척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으므로, 이날 전투 결과에 따라 역사의 무게추는 프랑스 혁명의 조기 진화로 끝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발미 전투에 괴테가 참전했었다는 이야기는 다들 알아도, 루이 필립도 진짜 지휘관으로서 참전했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당시 샤르트르 공작(Duc de Chartres)이자 훗날 프랑스의 왕이 되는 젊은 루이 필립(Louis Philippe)도 이날 발미에서 켈레르만의 중부군의 우익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또 젊은 시절의 괴테(Goethe)도 프러시아군 측에서 구경꾼으로서 현장에 있었습니다.  이날 괴테는 순수한 호기심에서, 포격 한가운데에 서있으면 어떤 느낌이 들지 알고자 몸소 프랑스군의 포격 한 복판을 말을 타고 가로질러 가보았다고 합니다.  괴테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포탄이 날아다니는 소리는 나무 꼭대기의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물 소리 같기도 하며, 또 새의 휘파람 소리같았다고 합니다.  또 괴테는 자신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땅이 젖어 있어서, 포탄이 땅에 떨어지면 퉁퉁 튕기는 대신 땅에 푹 처박혔기 때문이라고도 적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양측 사상자 숫자가 겨우 400여명 (일설에는 800여명) 정도 밖에 안되었던 모양입니다.




(대체 저 풍차는...?)


발미 전투를 그린 그림에는 항상 등장하는 것이 풍차입니다.  전투 당일, 켈레르만 장군은 자신의 포병대를 이 풍차에 집중 시켰거든요.  이 풍차는 100년 동안의 풍파를 겪다가 알게 모르게 무너진 뒤, 다시 세워졌다가 결국 1999년 겨울에 폭풍으로 다시 무너져 버렸습니다.  전투가 있었던 생-므누 지방 주민들의 (관광객 유치를 위한) 노력으로, 2005년에 이 풍차가 다시 세워졌습니다.  사진에 나오는 이 14m 짜리 풍차를 세우는데 돈이 어느 정도 들었을 것 같으십니까 ?  무려 53만 유로, 우리 돈으로 약 8억원 정도가 들었습니다.  과연 생-므누 주민들은 본전을 뽑았는지 잘 모르겠네요.  솔직히 제가 나중에 유럽 여행을 한다고 해도, 굳이 저 풍차 하나 보겠다고 발미 평원까지 갈 것 같지는 않은데요 ?  (유럽 여행은 역시 파리스위스-로마-베니스 코스라고 들었는데, 발미 따위는 듣보잡 아닌가요 ?)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8억원 들여서 풍차 하나 지어놓고 관광객보고 와서 돈을 쓰라고요 ???  생-므누 주민들이 대포를 포함해서 군복과 소총 등의 소품을 갖춰서 당시 전투를 리인액트라도 주기적으로 하면 모를까...)




(이 글의 내용은 에드워드 크레시 경의 '세계사를 바꾼 15대 전투' 중 발미 전투 편을 많이 차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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