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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 전쟁, 아르헨티나를 독립시키다 !

by nasica-old 2010.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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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아르헨티나 전에서 우리나라 대표팀은 1998년 5대0 대패 이래 가장 흉한 꼴로 참패를 당했습니다.  패배의 원인이야 여러가지가 있었겠습니다만, 제가 보니까 그냥 '실력차'더군요.  특히 제가 응원하는 박주영 선수가 자살골 넣은 것은 무척 마음 아팠습니다.  나이지리아 전에서 만회할 기회가 있겠지요.




(누가 뭐래도 훃은 너를 믿는다.  난 FC서울 때부터 니 팬이었다.)



월드컵 기간 중에는 연재가 없다고 했습니다만, 그래도 제 블로그에도 뭔가 월드컵 특집을 하나 내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남 미 지역은 항상 전쟁이 끊이지 않던 말썽꾸러기 동네 유럽과 대서양으로 단절되어 있으므로, 주요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유지하며 대체로 평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제0차 세계대전이라 불리는 나폴레옹 전쟁(물론 7년 전쟁이 그렇게 불리기도 합니다만) 때에도 남미 지역은 조용했을까요 ?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나폴레옹 전쟁 당시 브라질은 포르투갈 땅이었고, 그를 제외한 중남미 전체는 모두 스페인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스페인의 경우 나폴레옹 전쟁 동안 편을 이리저리 바꾸는 바람에 식민지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스페인은 처음에는 프랑스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제1차 반프랑스 동맹에 참여하여 프랑스의 적국으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만, 1795년 바젤(Basel) 협정으로 프랑스와 평화를 이루게 되어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1796년 8월 제2차 산 일데폰소 (San Ildefonso) 협정에 의해, 이제 프랑스 공화국과 스페인 제국은 영국에 대항하는 동쟁 관계가 됩니다.  그러다가 1807년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공하면서 스페인은 다시 나폴레옹에게 저항하는 영국 편이 되버립니다.





(나폴레옹에게 소득은 없고 출혈만 컸던 반도 전쟁의 주요 전쟁터들...)



글쎄요, 제국을 지탱하는 식민지가 모두 먼 대서양 너머에 있는 나라에서, 당시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영국과 맞선다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판단일까요 ?  하긴 피레네 산맥 바로 건너편에 있는 나폴레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더 큰 일이긴 하겠네요.  아무튼 스페인은 영국과 맞섰다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릅니다.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4대1'이 아주 양호해보이는 점수차로 영국에게 대패를 당합니다.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 중 22척이 격침되거나 나포되었는데, 그 중 9척이 스페인 군함이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영국 군함은 격침되거나 나포된 것이 전혀 없었지요.)   일이 이렇게 되고나니, 당장 스페인의 남아메리카 식민지는 본국과의 연락이 좀 (사실은 몹시) 곤란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영국은 이 남미 대륙에 대해 마수를 뻗치게 됩니다.  원래부터 영국은 스페인의 부유한 남미 식민지에 대해 호시탐탐 야욕을 키우고 있었거든요.




(해외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은괴에 의존하는 경제를 가진 주제에 대영제국에게 저항하면 어떻게 된다 ?)



16~18세기의 스페인 남미 식민지의 양대 거점은 바로 오늘날 페루의 수도인 리마(Lima)와 오늘날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 영어로는 Fair Winds, 좋은 바람 정도의 뜻)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리마가 스페인의 남미 대륙 경영의 중심지였습니다.  왜냐고요 ?  바로 스페인 제국을 부귀영화로 이끌었던 원천인 남미의 은광이 리마 항구를 통해서 스페인으로 흘러들어왔거든요.  인근 지역, 즉 오늘날 볼리비아에 있는 포토시(Postosi) 광산은 16~17세기에 유럽 모든 나라의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부(富)의 대명사로 통하던 어마어마한 은광이었습니다.  게다가 태평양을 바라보고 있는 리마 항구의 위치는 필리핀과 중국 등 아시아 무역을 위한 중계 기지로서도 매우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스페인과 남미 대륙의 교역은 주로 리마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17세기 포토시 광산의 모습.  당시 저 산 전체가 은광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소문이 유럽에서는 진실로 받아들여졌었습니다.)



이미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포토시의 은광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따라서 영국도 굳이 이 볼리비아/페루 지역을 장악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영국이 노리고 있던 지역은 Rio de la Plata (영어로는 River Plate), 즉 '은의 강'이라고 불리우던 부에노스 아이레스 및 몬테비데오 지역이었습니다.  이 지역의 온화한 기후와 비옥한 평야지대가 영국의 새로운 농업 식민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지역은 당시 스페인 정부로부터 군사적인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었던 점도 영국으로 하여금 군침을 삼키게 만들었습니다.  스페인이 부에노스 아이레스 지역에 마지막으로 군 부대를 보냈던 것이 1784년이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 지도에 나온 부분이 흔히 영어로 리버 플레이트라고 번역되는, Rio de la Plata, 즉 은의 강이라는 곳입니다.)



하지만 탐이 난다고 무작정 쳐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요.  또 무시무시한 나폴레옹과 힘겨운 전쟁을 하고 있는 마당에 당장 급하지 않은 대서양 건너편에서 새로운 전쟁터를 만드는 것도 왠만한 각오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제 어느때나 '사고는 치고 보는 거다'라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팝험 (Sir Home Popham) 제독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뭐 그다지 화려한 전적을 세우신 분은 아닌데, 이 양반은 1805년 정부로부터 미란다(Francisco de Miranda)라는 베네주엘라 혁명가가 영국 정부에 제안한 남미에서의 군사적 반란 계획을 연구해보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은 연구만 해보라는 임무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영국이 남미에 개입하기만 하면, 불만이 많은 남미의 식민지 주민들이 당장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떨쳐나기 위해 일제히 봉기할 것이라고 (그다지 근거도 없이) 떠들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팝험 제독은 1806년,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 희망봉 지역을 점령하는 작전에 동원되었습니다.  팝험 제독은 여기서 더 나아가, 조금만 (?) 더 나아가 대서양을 건너 리오 데 라 플라타, 즉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들어치자고 주장을 합니다.  영국 정부의 아무런 명령이나 작전 허가도 없이 말이지요 !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희망봉 작전의 육군 책임자인 베어드(Sir David Baird) 장군도 이 꾀임에 넘어갔다는 것이지요. (베어드 장군은 Sharpe's Triumph, Sharpe's Prey 등에도 등장하는 성격파/행동파 군인입니다.)  결국 1806년 약 1500명의 소규모 병력이 베레스포드 (William Carr Beresford) 대령의 지휘하에 대서양을 건너 아르헨티나를 침공합니다.




(베어드 장군.  겉보기에는 아주 중후해보이는데, Sharpe 시리즈에 나온 성격은 무척이나 불같은 전형적인 용장입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Baird 장군이 여기에도 등장합니다.  나중에 Sharpe's Prey에서는 Sharpe와 함께 덴마크를 침공하지요.)




(베레스포드는 소위 시절에 머스켓 사고로 한쪽 눈을 실명했다는데... 초상화는 두눈이 멀쩡한 것으로 나오네요.)



이런 침공 움직임에 대해서 오고가는 상선들을 통해 미리 알고 있었던 스페인 총독 소브레몬테(Rafael de Sobremonte) 후작은 본국에 지원 요청을 여러차례 했습니다만, 제해권도 없고 별다른 병력도 없던 스페인 본국은 화물선 한척에 머스켓 소총 수천 자루를 보내주면서 '니들끼리 잘 지켜봐라'는 전갈만을 보내옵니다.  당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인구는 약 4만5천명이었기 때문에, 사실 민병대를 조직하면 1천5백명의 영국군 정도는 막아낼 수 있었겠습니다만, 스페인 총독은 이 크레올 (Creole, Criollo) 주민들을 무장시키기를 주저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이 크레올이라는 사람들은 뭐하는 사람들이었을까요 ?

간단히 말하면 부모가 모두 스페인 혈통이지만, 스페인이 아닌 현지 식민지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스페인은 16세기부터 시작된 남미 식민지를 소수의 병력으로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인종과 출신 지역에 따라 무척 정교한 카스타(Casta)라는 계급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초기 이민자들은 모두 남자였으므로, 이들은 당연히 현지의 인디오들이나 흑인 노예 여성과 섞이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다양한 혼혈종들이 있었고, 주로 그 차별은 스페인 혈통이 몇분의 몇으로 보존되느냐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가령 스페인 혈통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유색인종의 피가 1/8 이하여야 했습니다.  크리올로, 인디오, 메스티조, 뮬라토, 잠보, 콜로 등등 꽤 복잡한 혼혈종 이름이 다 여기서 나온 것이지요.




크리올로 - 양쪽 부모가 모두 백인이되 식민지에서 태어난 경우

메스티조 - 한쪽 부모는 백인, 다른 한쪽은 인디오인 경우

뮬라토 - 한쪽 부모는 백인, 다른 한쪽은 흑인인 경우

잠보 - 한쪽 부모는 인디오, 다른 한쪽은 흑인인 경우

(실제로는 이렇게 단순하지 않고, 무슨 피가 몇% 섞였느냐에 따라 저 위의 그림처럼 매우 복잡했다고 합니다.  원래 계급 제도라는 것이 복잡하면 복잡할 수록 상류층이 신경 안써도 중하류층끼리 서로 약간의 특권을 지키려고 그 계급 제도를 굳게 지키는 경향이 있지요.)




(뮬라토 엄마를 둔 가족이네요.)


그 계급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스페인 사람들로서, 이들은 반도인(Peninsulares, Europeos)라고 불리웠습니다.  즉, 스페인 본국인 이베리아 반도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었지요.  이들은 대개 스페인에서 정부 관리로서 파견되어 오거나, 부유한 상인으로서 왔기 때문에 이들의 지위는 독보적이었습니다.  그에 비해서 부모가 모두 스페인 혈통이더라도, 현지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반도인으로 불리지 못하고 크리올로(Criollo)라고 불리웠고, 차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즉, 스페인 정부의 관점에서는, 현지 태생의 백인들은 이미 그 이해관계가 식민지 현지에 밀착될 수 밖에 없었으므로, 100%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따라서 중앙정부의 관직에서는 물론, 남미 식민지에서조차 최고위직까지는 오를 수 없도록 차별을 했습니다.  당연히 남미 식민지 총독을 비롯한 지배층은 언제나 스페인에서 파견되어 나왔다가 임기를 마치면 스페인으로 되돌아가는 식으로 운영되었고, 진짜 식민지 주민들이라고 할 수 있는 크리올로들은 백인임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운영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저 위에 잠깐 언급되었던 베네주엘라 혁명가인 미란다도, 어려서부터 무척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사립학교를 다니는 등 상류층 사회를 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가 카나리 제도 출신의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베네주엘라 현지의 상류층에서조차 약간 차별을 받고 자랐고, 그것이 그가 혁명의 길을 걷는데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미란다.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 혁명에 모두 참전했고, 유럽 나라 중 안가본 나라가 없을 정도로 여행도 많이 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시에는 총재정부에 찍혀서 '그 페루 장군을 체포하라'는 명령서가 나왔다고 합니다.)



아무튼 스페인 총독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영국군은 1806년 6월에 부에노스 아이레스 인근에 상륙하였고, 총독은 볼썽사납게 금고를 끌어안고 코르도바 지방으로 도주했습니다.  그나마 그 금고도 결국 분실해버렸고요.  지도자를 잃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민들은 처음에는 영국군의 입성을 반겼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오만하던 스페인 지배자들이 쫓겨나는 꼴이 고소했겠지요.  그러나 영국군이 들어와서 처음으로 취한 조치가 자유 무역 및 항구세 폐지인 것을 보고 현지 상인들이 제일 먼저 반영주의자가 되어 버립니다.  즉, 여태까지 스페인과의 독점 무역으로 이익을 보았던 상인들이, 이제 자유 무역이 실시되면 훨씬 규모가 큰 영국 상인들에게 당해낼 수가 없다고 (제대로) 판단했던 것이지요.  

스페인 식민지 주민들은 결국 영국 점령군에 무장 봉기를 일으키기로 합니다.  지도에서 보시다시피 부에노스 아이레스 바로 인근에, 현재 우르과이의 수도인 몬테비데오가 있습니다.  여기서 반영국 저항군이 결집하는데, 원래 프랑스 해군 장교이다가 당시 현지 스페인 해군 장교로 임시 복무 중이던 산티아고 드 리니에르 (Santiago de Liniers y Bremond)의 지휘 아래, 크리올 주민들의 민병대가 속속 집결했습니다.  리니에르는 1806년 8월에 부에노스 아이레스 북쪽에 상륙하여, 부에노스 아이레스 및 몬테비데오 민병대들을 이끌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점령하고 있던 베리스포드의 영국군과 이틀간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영국군 정규병이라는 자부심 외에는 모든 면에서 중과부적이었던 베레스포드의 부대는 결국 항복할 수 밖에 없었고, 베레스포드는 포로가 되어 6개월 간 지내다가 탈출하여 간신히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 전투에서 영국군 제 71 보병 연대는 연대기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고, 다음해에 벌어지는 2차 영국 침공 때도 이 깃발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이 깃발은 지금도 아르헨티나에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리니에르에게 항복하는 영국군 지휘관 베레스포드 대령.  대머리인 사람이 물론 베레스포드입니다.)



영국군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침공은 결국 참담한 실패로 끝난 '무허가 원정'에 불과했습니다.  당연히 그 책임자였던 팝험 제독은 '근무지 무단 이탈'이라는 아리송한 죄목으로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으나, 그다지 큰 벌은 받지 않았고, 오히려 런던 시로부터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공로'를 인정받아 값비싼 검을 증정받기도 했습니다.  이 미온적인 조치에서 보다시피, 영국은 아르헨티나 를 비롯한 남미의 스페인 식민지에 대해 이젠 공공연한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 야욕은 그 다음해인 1807년 제2차 부에노스 아이레스 침공으로 드러납니다.  이번에는 1차 원정시 부에노스 아이레스 현지 주민들의 반격의 기지가 되었던 몬테비데오부터 공략했습니다.  1807년 2월, 약 5천명의 비정규 민병대가 지키던 몬테비데오 시를, 오크머티(Sir Samuel Auchmuty) 준장이 지휘하는 6천명의 영국군 정규병력이 공격했습니다.  공격군은 당시 공성전의 교과서를 그대로 따라, 며칠 동안 포격을 가해 성벽의 일부를 부수고, 그 속으로 새벽 2시에 결사대(Forlorn hope)를 선두로 공격 병력을 투입하고, 또 동시에 시 반대쪽에서도 야음을 틈타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는 전법을 써서 마침내 몬테비데오를 함락시켰습니다.  이 전투에서 약 600명의 영국군 사상자가 난 것에 비해, 식민지 수비군은 약 1500명의 사상자 외에도 2천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몬테비데오를 점령하는 영국군)



이어서 병력을 보강한 영국군은 1807년 7월, 화이트록 (John Whitelocke) 소장의 지휘하에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공격합니다.  1차 방어전의 영웅 리니에르를 필두로 방어 준비를 했던 식민지군은 초기의 야전에서는 어쩔 수 없이 밀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만, 진짜 전투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내에서 일어났습니다.  가능한한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를 온전한 상태로 점령하고 싶었던 화이트록 장군은 포병대의 '손질'없이 보병만으로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내로 진입합니다만, 여기서 영국군은 훗날 제2차 세계대전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받은 것과 비슷한 수준의 저항을 받아야 했습니다.  온 도시 주민들이 똘똘 뭉쳐 거리의 영국군에게 이틀간 결사적인 저항을 한 것입니다.  게다가, 정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처럼, 시 외곽에서도 식민지 민병대가 영국군 부대들을 격파하기 시작했습니다.  화이트록은 24시간 휴전을 요청했지만, 리니에르는 그를 거부했고, 결국 속개된 전투 결과 영국군 사상자는 거의 50%에 이를 정도가 되었습니다.   결국 화이트록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뿐만 아니라, 이미 점령했던 몬테비데오 등에서도 영국군이 완전 철수한다는 조건으로 휴전에 합의했고, 영국군은 초라한 모습으로 닻을 올려 되돌아 가야 했습니다.  




(적수를 잘못 골라 불명예 제대라는 봉변을 당했던 화이트록 장군)



영국군 지휘부의 분노는 대단했습니다.  화이트록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팝험 제독과는 달리) 불명예 제대라는 엄벌에 처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808년에는 위에서 언급되었던 베네주엘라 혁명가 미란다의 계획을 받아들여, 훗날 웰링턴 공작이 되는 웰슬리 (Arthur Wellesley) 장군의 지휘하에 베네주엘라를 침공하기 위한 수만명 규모의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킵니다.  그러나 남미로서는 다행히도, 그리고 스페인으로서는 불행히도 1808년 나폴레옹이 스페인 본국을 침공하면서 스페인이 졸지에 영국의 동맹국이 되는 바람에, 이 베네주엘라 침공군은 남미가 아닌 스페인 본토로 향하게 됩니다.




(풍운아 '페루 장군' 미란다도 결국은 스페인 정부에게 넘겨져 1816년 카디즈의 감옥에서 결국 병사합니다.)



이 1,2차 부에노스 아이레스 방어전의 공로로 리니에르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영국군의 침공 당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총독이 영국군이 항복한 뒤에야 돌아와 업무를 집행하려고 하자, 이미 무장 봉기를 경험한 크리올 주민들이 대대적으로 반발하고 나서 전 총독을 쫓아내고 리니에르를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군사적, 정치적 수장으로 선출합니다.  이는 전례가 없던 일이었지만, 그 총독처럼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던 스페인 중앙 정부도 이 반란에 가까운 인사조치를 사후 승인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1808년 리니에르는 합법적인 총독이 됩니다.  (훗날의 이야기지만, 리니에르는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 휘말려 은퇴한 뒤에, 1810년 5월 혁명이 일어나자 반혁명 측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하는 비운을 맞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방어전의 영웅 리니에르.  그 이후로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하고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세상은 동화가 아니더군요.)



이 영국군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침공 사건은 아르헨티나 역사에 중요한 계기를 남깁니다.  바로 무장한 민중의 '스스로의 힘에 대한 자각'입니다.  위에서 보셨듯이, 평상시 으시대며 폼을 재던 스페인 귀족층은 영국의 침공에 대해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고 쓰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귀족들이 멸시하며 경계했던 크리올들이 자신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하고 외국 침공군을 무찌르고나자, 이들은 자신의 힘에 대해 자각을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자신들의 지도자를 자신들 스스로 선출하는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리스 아테네의 빈민들이 페르시아 전쟁 때 수병으로 참전하고 나서야 정치적 발언권이 커지게 된 것과 똑같은 과정을 거쳤던 것이지요.  결국 차별받던 크리올들의 정치적 자각은 1810년 5월 혁명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이는 훗날 남미 독립 전쟁으로 이어져서 결국 아르헨티나와 우르과이 등 남미 각국의 독립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결국 영국 정부가 원했던 것, 스페인으로부터 남미 식민지를 빼앗는 것은 달성되었습니다.  단지 영국이 그것을 낼름 집어먹겠다는 야욕은 이루어지지 않았지요.  지금도 아르헨티나에는 백인 인구가 80~90% 정도로 백인 계통이 절대 다수를 차지합니다만, 이는 이런 독립 이후에 몰려온 유럽 이민들 때문입니다.  오히려 스페인보다는 이탈리아에서 제일 많은 이민이 몰려 왔습니다.  생각해보니 엄마 찾아 삼만리의 이탈리아 소년 마르코도 외국에 취업나간 엄마를 찾아 아르헨티나까지 오지요 ?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왕년의 아르헨티나 특급 골잡이 '바티골' 바티스투타도 바로 이탈리아계라고 합니다.




(원작은 '쿠오레'에 나오는 단편인데, 일본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서 사실상 일본이 거의 원작 취급을 받습니다.)

(그나저나 일본... 어제 네덜란드 전에서는 꽤 잘하더군요.  우리가 아르헨티나 전에서 그렇게 잘 싸웠어야 했는데... 아쉽습니다.)




(골을 넣고 표효하던 바티골의 모습이 그립군요.)




(축구 또는 바티스투타를 잘 모르시는 분들도 안경집 밖에 걸린 이 사진은 꽤들 알아보실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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