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누구나 꿈꾸는 모험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무인도에 표류하여 부모님이나 선생님 간섭 받지 않고, 학교에도 안가고 공부도 안하고, 자기 마음대로 신나게 사는 것이지요. 그런 모험을 그린 가장 대표적인 소설은 로빈슨 크루소입니다만, 그건 혼자뿐이고 식량이나 자원도 부족하여 모험이라기보다는 사실 생존의 문제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쥘 베르느(Jules Verne)의 "15소년 표류기"가 훨~씬 더 재미있지요.
(이 소설에서 소년들은 배가 통째로 해안에 안착하는 바람에 식량과 총, 각종 도구 등의 온갖 보급품이 풍부했고, 또 왠놈의 무인도가 무인도답지 않게 사냥감과 식용 식물이 풍부했습니다.)
특히 이 "15소년 표류기"(원제는 Deux ans de vacances, 즉 2년간의 휴가입니다)의 흥미로운 점은, 15명의 소년들이 그런 외진 곳에서도 나름대로의 질서를 세우고 파벌을 만들고 지도자를 선거로 뽑는 등, 정치질을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서 그런가요 ? 아무튼 첫번째 해의 지도자는 듬직하고 공평한 미국 소년인 고든이 맡습니다만, 두번째 해가 되어 새로 지도자를 뽑는 선거가 있을 때,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오후에 투표가 실시되었다. 각자 지도자로 뽑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투표용지에 적어야 했다. 과반수 득표자가 있으면 새로운 지도자가 탄생하게 된다. 식민지의 유권자는 14명이니까, 8표만 얻으면 당선이다.
어라 ? 책 제목이 잘못되었나요 ? 15소년인줄 알았는데 왜 유권자가 14명이지요 ?
그 이유는 나머지 1명의 소년이 견습 선원인 모코이기 때문입니다. 체어먼 학교 학생이 아니기 때문에 투표권이 없었나요 ? 아닙니다. 책에는 친절한 이유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모코는 흑인이라서 선거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모코 자신도 선거권을 요구하지 않았다.
흠... 어린이 소설에서 참 좋은 것을 가르치는군요. 참고로 위 소설의 배경은 1860년대입니다.
생각해보면 Patrick O'Brian의 나폴레옹 전쟁 소설인 Aubrey-Maturin 시리즈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나옵니다. "The Reverse of the Medal" 편을 보면, 자메이카에 기항한 잭 오브리 함장에게 젊고 교양있는 흑인 청년 샘이 찾아오는데, 한눈에 딱 봐도, 이 흑인 청년은 잭의 아들임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실제로 이 친구는 잭 오브리 함장이 젊은 시절 흑인 여자와 놀아난 결과 생긴, 오브리 함장도 몰랐던 아들이었던 것이지요.
(이 소설에서 주인공 잭 오브리는 숨겨둔 아들이 나타나는 것 외에 진짜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게 됩니다.)
오브리는 당황하면서도 기뻐하며, 이 처음 만난 아들에게 해군 내에 뭔가 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어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함장의 서기직을 제안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잘하면 사무장(purser)이 될 수도 있고, 또 함장의 서기가 보트를 타고 나가는 원정에서 지휘를 맡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을 하지요. 하지만 나중에 친구인 스티븐과 이야기하면서, 이 아들이 백인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한탄하면서, 흑인이라서 싫다는 것이 아니라, 백인이었다면 해군에 들어와 장교가 되고 나중에 제독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라고 아쉬워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분명히 흑인도 영국 해군 내에서 어느 정도의 계급 정도는 올라갈 수 있었지만, 분명히 벽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아시다시피, 당시 영국 해군 수병들은 영국인이나 아일랜드인, 스코틀랜드인들 뿐만 아니라, 영국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레이인, 아프리카인, 스웨덴인, 독일인 등 온갖 국적의 인종들이 들끓었습니다. 그러나 영국 해군에서 그런 외국 국적의 수병이 최대로 올라갈 수 있는 위치는 Master's Mate, 즉 보조 항법사까지였습니다. 그러니까 백인이 아닌 경우 외국인 취급을 했던 것이지요.
(1810년 영국 해군의 장교 계급표... 밑줄이 그어진 것은 국왕의 warrant를 받아야 될 수 있는 Warrant Officer이고, 검은색 굵은 줄은 나포 포상금(prize money, 1804년, 스페인 보물선 함대를 둘러싼 모험 http://blog.daum.net/nasica/5311309 참조)을 분배하는 기준이 되는 지위를 표시합니다. 이 검은색 굵은 줄이 진짜 신분을 나누는 기준선이 되는 셈이지요. 이 표를 보면 Master's Mate나 Captain's Clerk이나 모두 장교 취급을 받지만 공식적인 warrant officer는 아니라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브리 함장이 자신의 흑인 아들 샘에게 함장 서기 일을 하다보면 사무장(purser)가 될 수도 있다고 한 말은 정확한 진실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Purser는 상당히 높은 지위거든요.)
그래도 이렇게 흑인들이 자유의 몸으로 다른 백인 하층민들과 함께 해군 생활도 하고, (실제로는 거의 그럴 일은 없었지만) 교육도 받고 하는 것은 상당히 운이 좋은 경우였습니다. 투표권이요 ? 어차피 영국은 어느 정도 재산이 있는 남성들만 투표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1867년 획기적인 투표권 개정법이 통과된 뒤에도, 1년에 10 파운드 이상의 소작료를 내거나 10 파운드 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들만 투표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숫자가 대략 전체 성인 남성의 60%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저 15소년 표류기에 나온 흑인 견습 선원 모코의 경우는 투표권이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법적으로 보면 흑인이라고 투표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런저런 교묘한 법과 사회적 장벽, 그러니까 재산이라든가 문맹이라든가 하는 점을 이용해서 유색인종들의 투표권을 박탈했던 것이지요.
(링컨이 죽고 난 뒤에도 이런 광경은 쉽게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이 보통 생각하는 흑형(黑兄, 요즘은 흑인들을 대접해서 이렇게 부르나봐요)들은 이 시대에 대개 노예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미국의 노예 해방이 1863년 남북전쟁 도중에 발표되었으니까,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도 약 50년 간 대서양은 노예선이 아프리카에서 북미 지방으로 노예들을 부지런히 실어날랐다는 이야기지요. 그러나 노예 해방은 17세기 초부터, 부지런히 이야기가 되어 왔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사실 지성적인 문명인이라는 인간들이, 노예를 부린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 하지만 세상이라는 것이 꼭 그렇게 이성과 지성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었답니다. 오히려, 문명이 있는 곳에는 거의 언제나 노예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민주주의의 발상지라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도 노예가 없으면 도시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흔히 노예제 찬성주의자들은 '하나님도 예수님도 노예제를 인정하셨다'라고 말하곤 했지요. 실제로 그랬을까요 ? 빅토르 위고의 작품을 한번 보시지요.
(저 엉뚱한 괴물 같은 것의 정체는 뭘까요 ? 이 책을 읽어보시면 짐작은 하실 수 있습니다.)
바다의 노동자 (Travailleurs de la Mer) (빅토르 위고 작, 배경: 1830년대 노르망디 군도) -----
(증기선 뒤랑드 Durande 호가 좌초 난파되어, 그 선주인 메스 르티에리는 실의에 빠집니다. 이때, 평소 교회와 거리가 있었던 메스 르티에리에게 영국 국교회의 에로드 신부가 찾아와 이런저런 위로의 말과 함께 설교를 합니다.)
메스 르티에리는 영국에서보다 미국에서 그의 재산을 만회할 수 있다. 그에게 남은 재산을 크게 증대시키고 싶다면, 20,000 명이 넘는 흑인을 고용하고 있는 텍사스의 농장을 경형하는 큰 회사에 합류하기만 하면 된다.
"노예제는 싫습니다." 르티에리가 말했다.
에로드 신부가 반박했다. "노예제는 성스러운 제도랍니다. 성서에도 '주인이 그의 노예를 때린다해도 그는 비난받지 않을 것이다. 노예는 그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라고 씌어 있지요."
----------------------------------------------------------------------------------
성경에 정말 저런 말이 씌여 있나요 ? 찾아보니 이렇게 씌여 있더군요.
출애급기 21:20~21
어떤 사람이 자기의 남종이나 여종을 몽둥이로 때렸는데, 그 종이 그 자리에서 죽으면, 그는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하루나 이틀을 더 살면, 주인은 형벌을 받지 않는다. 종은 주인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예, 정말 그렇게 씌여 있네요. 다만 현장에서 즉사할 정도로는 때리면 안되고, 때렸는데 1~2일 살다가 죽을 정도로만 때리면 괜찮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노예는 사유재산이니까요.
사실 이렇게만 표현해놓으면 기독교 분들께서는 심기가 불편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서에는 이 외에도 노예제를 꼭 옹호하는 방향의 글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령 디모데전서를 보면 노예 상인을 남색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와 동급에 놓고 율법을 어기는 자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흠... 이야기가 점점 복잡해지는군요. 게이나 레즈비언도 분명히 인권이 있고 사회의 정당한 일원으로 환영받는 세상에서, 성서가 그들을 비난하다니요... 그냥 이쯤에서 마치지요.)
아무튼 노예제가 그 비야만적인 본성에도 불구하고 쉽게 없어지지 않았던 것은, 그 경제적 가치가 짭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경제 환경의 변화에 따라 노예제보다는 봉건제, 더 나아가 산업 사회로 나가는 것이 더 유리해지면서 점차 노예제 폐지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특히 흑인들은 그 강인한 체력과, 남도 아닌 아프리카 본국이 노예 판매로 돈을 버는 것에 열을 올렸다는 사실 때문에, 노예의 대명사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심지어 남미 인디오들을 광산 노예로 부리는 것에 반대하며, 남미 인디오들은 인간이며 자유인이라는 주장을 한 카톨릭 신부님조차도, '그러니까 인디오 대신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쓰자고요'라고 주장할 정도였습니다.)
가령 18세기 들어, 노예제의 폐지가 가장 먼저 진행된 곳은 뜻밖에도 계몽사상의 근거지인 프랑스가 아니라 유럽의 낙후 지역이었던 러시아였습니다. 물론 14세기에 루이 10세가 '프랑스 땅에 발을 디딘 노예는 모두 자유인으로 해방된다'라는 상징적인 선언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프랑스는 서인도 제도에 설탕 플랜테이션 농장이 있었거든요. 따라서 프랑스에서의 노예제는 1794년이 되어서야 모든 것을 뒤집은 대혁명이 시작된지 5년 뒤에야 '마지 못해' 폐지됩니다. 그에 비해 러시아는 '사람으로 인정되지 않는' 노예들이 운영하는 농장보다는 세금을 바치는 봉건적 농노들에 의한 장원 경제가 더 유리했기 때문에 1723년에 일찌감치 노예제를 폐지하게 됩니다.
자유와 평등, 박애의 삼색기를 국기로 삼은 자랑스러운 국가 프랑스는, 1802년 당시 제1통령이었던 나폴레옹이 다시 노예제를 도입하면서 스타일을 구깁니다. 스타일은 구겼지만 당시 세계 제1의 설탕 생산지였던 생-도밍그(Saint Domingue, 오늘날의 아이티)에서 다시 설탕을 생산하게 되었으니 금전적으로는 짭짤했겠지요. 그러나 나폴레옹이 노예제 재확립을 위해 보낸 르클레르 장군의 원정대는 황열병에 초토화되고 프랑스는 결국 생-도밍그에서 손을 떼게 됩니다. (이때 이야기는 설탕과 카리브해 http://blog.daum.net/nasica/6862366 , 그리고 나폴레옹이 악질 전범이었다고 ? http://blog.daum.net/nasica/6862413 참조) 이어서 '어라 이제 무주공산이네'라며 집적거린 스페인과 영국군도 물리친 아이티의 노예들은 결국 최초의 흑인 독립국을 세우지요. 이 아이티 공화국은 서구 열강의 지배로부터 독립한 사상 2번째 국가가 되었습니다. (첫번째는 United States of America 였습니다.)
(아이티 독립의 아버지 투생 루베르튀르 Toussaint L'Ouverture. 나폴레옹 손에 죽습니다.)
아무튼 18세기말 이후, 특히 프랑스 대혁명 이후로 세계 각국에서 노예제 폐지에 대한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렇게 노예제 폐지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이 계몽사상의 전파와 프랑스 대혁명 때문이지, 아니면 영국에서 이때 즈음 시작된 산업 혁명 때문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둘 다겠지요.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산업 혁명으로 인해 노예제가 더 이상 그렇게 짭짤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더 강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비슷한 이유로, 미국 북부주민들은 사람들이 착해서 노예제를 반대했고, 미국 남부주민들은 못돼서 노예제를 주장했다고 믿어지지는 않거든요.
이유야 어쨌든 영국은 앞장 서서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시점에 1807년 노예 무역 금지법을 통과시킵니다. 이건 반쪽짜리 법안인데, 노예 무역은 금지시키면서도, 정작 노예제 자체는 합법적으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해에 미국도 노예 무역을 금지시킵니다만, 여전히 미국 국내의 노예 거래는 합법적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이때 스웨덴이나 네덜란드, 프러시아처럼 노예 무역 쪽으로는 뭐 별로 잃을 것이 없던 국가들도 냉큼 노예 무역을 금지시킵니다. 돈 안들이고 광 팔 수 있는 일인데 마다할 리가 없었지요.
하지만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처럼 노예 무역이 중남미 및 카리브해의 식민지 유지에 필수적이었던 국가들에서는 사정이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이들은 노예 무역을 계속했고, 영국과의 갈등은 심해져갔습니다. 영국은 당시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Royal Navy를 이용하여, 공해상에서 나포된 노예선은 해적선처럼 취급하겠다고 선언했거든요. 실제로 영국은 아예 서아프리카 소함대 (West Africa Squadron)을 조직하여 노예 무역의 근거지인 서아프리카 해안을 순찰하며 노예 무역선을 나포했습니다. 그것도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1808년부터 말이지요.
(이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아프리카 제1의 상품입니다.)
노예선들은 이런 영국 함대를 만나게 되면, 노예들을 산 채로 바다에 던져버리곤 했습니다. 이는 이유가 두가지였는데, 일단 영국 해군 지침상, 그 내부 시설로 보아 노예선이 분명한 배라고 할 지라도, 노예가 실려 있지 않다면 나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또 노예들을 다 바다에 던져 버리기 전에 나포되더라도, 원래 그런 노예 무역선은 노예 1두당 120 파운드의 벌금을 내야 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벌금 액수를 줄이기 위한 것도 있었습니다. 원래 노예제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만, 정말 사람 목숨은 돈 앞에서 전혀 가치가 없었던 것이지요.
나중에는 노예선들도 진화하여, 쾌속선으로 배를 교체하여 영국 해군과 레이싱을 벌이는 방법을 썼습니다. 안잡히면 그만이니까요. 범선의 결정체라는 쾌속선인 클리퍼(clipper)는 원래 차 무역으로 유명했지만, 사실 노예선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영국 해군은 이런 클리퍼 노예선에게 몇번 물을 먹다가, 어떻게 운이 좋아 나포한 클리퍼 노예선을 서아프리카 소함대에 편입시키면서, 다시 검거율을 높였습니다. 이런 배들, 즉 전직 클리퍼 노예선이었다가 Royal Navy에 편입된 배들 중 하나인 블랙 조크 호(HMS Black Joke)의 경우, 1년에 최고 11척의 노예선을 나포할 정도로 성과가 좋았다고 합니다. 이 서아프리카 소함대는 점점 규모가 커져서, 나중에는 전체 영국 해군의 1/6에 해당하는 함선과 수병들이 여기에 배속되었습니다.
(전직 노예선에서 영국 해군 군함으로 인생 역전한 HMS Black Joke와 그가 잡은 노예선들의 모습입니다.)
영국 해군 장교 및 수병들 개인들도 노예선 나포에 정말 열을 올렸습니다. 이유는 역시 돈 때문이었습니다. 영국 의회에서, 이런 식으로 구조된 노예 1명 당 5파운드의 구조 보상금을 그 영국 군함에게 지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막대한 나포 포상금( 1804년, 스페인 보물선 함대를 둘러싼 모험 http://blog.daum.net/nasica/5311309 참조)에 비하면야 새발에 피였습니다만, 이런 구조 보상금은 나포 포상금도 없는 시절의 영국 해군 장병에게는 정말 짭짤한 보너스였거든요. 이에 대해서는 C.S. Forester의 Hornblower 시리즈 중 마지막 편인 'Hornblower in the West Indies' 편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C.S. Forester의 작가적 위대함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전투신이 하나도 없어도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그런데 영국은 정말 정의로운 국가였기 때문에 이렇게 노예 해방에 열을 올렸을까요 ? 글쎄요. 먼저 이렇게 나포된 노예선에 실려 있던 노예 후보들이 어찌 되었을지를 알아보실까요 ? 이들 중 대부분은 영국 서아프리카 소함대의 모항인 Free Town이 있던 시에라리온(Sierra Leone)에 정착하여 영국 정부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고, 이 곳이 영국 최초의 아프리카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결국 대영제국의 식민지 경영에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지요. 특히 대서양에서의 노예 무역을 영국 해군이 금지시킨 것은 스페인의 중남미 식민지 경영에 큰 영향을 주어, 스페인이 다시 영국의 경쟁자로 떠오르는 것을 완전히 봉쇄한 효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어딘가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이렇게 고상한 척하던 영국도, 정작 자기 식민지에서는 수많은 노예들을 부려먹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역시 대부분은 서인도 제도에서의 설탕 플랜테이션 농장의 노예들이었지요. 아직 설탕 무역에서의 이윤이 몹시 짭짤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산업 혁명이 계속 진행되면서, 대영제국의 체면과 실질적인 경제적 이익 사이에서 저울질이 계속 되었고, 결국 1833년 영국에서도 노예제 폐지법이 공표되기에 이릅니다.
(물론 당시 여론을 이끌었던 이런 위원회나 모임 등은 순수한 인도주의적 의도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이 법도 여러가지 유예 조치를 두어야 했습니다. 노예 해방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 노예들의 실직 ? 노예들의 작업장 이탈로 인한 생산력 감소 ? 다름아닌 사유 재산 침탈에 대한 보상이었습니다. 가령 노예들의 작업장 이탈은 하루 아침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단 노예들은 평생 배운 일이라고는 현재 하고 있던 작업 뿐이었던 관계로, 자유로 풀어준다고 해도 당장 다른 곳에서 다른 생업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영국의 노예 해방은 노예 소유주의 대다수인 대형 플랜테이션 농장주의 이익을 충분히 고려하여, 특히 농업 부문 노예들은 다른 노예들에 비해 좀더 늦은 시기에 점진적으로 해방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설탕은 달고, 노예 노동은 쓰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개인 소유의 자산, 그 중에서도 가축 같은 동산(動産)이었던 노예를 해방시킨다는 것은 노예 소유주의 신성한 사유 재산을 국가가 침탈하는 불법 행위였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특히 그 노예 소유주들 대부분이 상당한 거부에다 상당한 권력을 가진 귀족 내지 정치가들이었다면 더욱 큰 사회 문제가 되었겠지요. 실제로 해외 식민지의 대형 플랜테이션을 운영할 정도의 자산가는 대개가 귀족 내지는 귀족 부럽지 않은 부르조아들이었고, 영국에서는 그런 정도의 거부라면 상당한 정치적 세력이 되는 것이 상식이었지요. 약간 당혹스럽습니다만, 빅토르 위고의 작품에 나오는 것처럼 정말 영국 국교회의 주교까지도 당당한 노예 소유주였습니다. 따라서 노예 해방 법안은 기존의 노예 소유주들에게 보상을 해주는 조치를 함께 취해야 했습니다.
(1840년 영국 반노예제 컨벤션. 과연 흑인들의 구원은 백인들로부터만 오는 것일까요 ?)
이 보상 조치로 혜택을 입은 영국인들은 약 수천 명에 정도였습니다. 생각보다는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 당시 영국의 노예 소유는 중산층에서는 거의 드문 일이고, 최상류층이 해외 식민지 농장 운영을 위해 주로 노예를 소유했었다는 것을 아실 수 있는 부분입니다. 문제는 보상 액수인데, 노예 1인당 평균 약 19 파운드 정도가 지불되었습니다. 19파운드라고 하면 얼마 정도일까요 ? 제가 좋아하는 금 기준으로 계산을 해보지요. 원래 아이작 뉴튼 (예, 그 만유 인력의 그 뉴튼 맞습니다) 경이 대영제국 조폐창의 수장으로서 1717년 금 1 트로이 온스(troy ounce) 당 가격을 3파운드 17실링 10펜스로 정한 이래 그 가격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거의 동일하게 유지가 되었습니다. (Source : http://www.nma.org/pdf/gold/his_gold_prices.pdf )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만 좀 인플레가 있었지요. 아무튼 영국에서 노예가 해방되던 1833년에도 그 가격대로 계산을 해보면, 노예 1인당 보상 금액인 19파운드는 약 152g의 금에 해당합니다. 2010년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금 1g에 약 4만1천원 정도니까, 노예 1인당 보상 금액은 요즘 우리나라 물가로는 약 623만원 정도가 됩니다. 대략 요즘 한우 수컷 1마리 가격과 비슷합니다. (암소보다는 훨씬 쌉니다 !)
이렇게 인간 가축을 해방시켜주고 정부가 지불해야 했던 보상금은 총 2천만 파운드 정도로서, 당시 영국 정부 1년 예산의 40%에 해당하는 엄청안 금액이었습니다. 아마 경우마다 보상금은 달랐겠습니다만, 노예 1인당 평균 보상금이 19파운드 정도였다고 하면, 당시 해방된 노예들은 약 1백만 약간 넘는 정도가 되겠습니다. 실제로 이 제도로 해방된 노예들의 숫자는 서인도 제도에서 약 70만명으로 대다수였고, 그외 아프리카 모리타니아와 남아프리카에서 각각 2만, 4만명 정도였습니다. 결국 영국의 노예제도는 서인도 제도에서의 설탕 산업이 그 주요 원인이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노예에 의한 설탕 생산은 돈이 되걸랑요 !)
하지만 이 1833년 노예제 폐지법에도 불구하고, 대영제국 내에는 아직도 상당수의 노예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 폐지법에는 단서 조항이 붙어 있었는데, 바로 동인도회사(EIC, East India Company)가 지배하는 영역과 실론섬은 이 법에서 제외된다고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영국은 그쪽으로부터는 단물을 빨아먹을 것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나 봅니다. 결국 동인도회사에서의 노예제는 1843년에 가서야 폐지됩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노예제는 자취를 감춘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자유라는 것은 얇팍한 가식에 가려진 굴종인 경우가 아직도 많습니다. 가령 불쌍한 흑인 노예를 해방시켜준 고마운 Royal Navy의 수병들은 과연 미국 미시시피 주의 목화밭에서 일하던 흑인 노예들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요 ? 에밀 졸라의 소설 제르미날에 나오는 프랑스 탄광 노동자들의 경우는 어땠을까요 ? 노동 강도나 삶의 질을 따져 보면, 과연 산업 사회에서의 노동자들의 삶이 노예들의 삶보다 훨씬 더 낫다고만 꼭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현재 노예가 아닌 소위 자유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과연 우리가 신성한 인권을 타고난 인격체이기 때문인지, 또는 현대 산업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급료 노동자의 노동 체계가 더 생산성이 높기 때문일까요 ? 분명히 저는 자유인인데도 실제로는 별로 자유롭지 않다는 느낌이 계속 드는 것과 크게 무관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나폴레옹의 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폴레옹 전쟁, 아르헨티나를 독립시키다 ! (0) | 2010.06.20 |
---|---|
발미(Valmy)에서 생긴 일 (0) | 2010.05.23 |
나폴레옹, 교육을 논하다 (하편) (0) | 2010.04.30 |
나폴레옹, 교육을 논하다 (상편) (0) | 2010.04.21 |
나폴레옹, 공성전을 논하다 (0) | 2010.04.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