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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 교육을 논하다 (상편)

by nasica-old 2010.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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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보고 다시 젊어지게 해주겠다면 물론 좋다고 하겠습니다만, 가능하면 수능 다음날로 되돌아갔으면 좋겠군요.)



적어도 고3까지는, 대학 입학 자격 시험은 모든 한국인의, 심지어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학생들에게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저도 그랬고, 여러분도 그랬을 것이며, 여러분들이 이민을 가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상당 기간 그럴 것 같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나라 대입 시험처럼 소모적이면서도 인생에 도움이 안되는 시험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로 암기 위주의 학습법 때문이겠지요.


우리나라 대입 시험에 비해서 꼭 비교가 되는 대입 시험이 있습니다.  바로 프랑스의 바깔로레아 (Baccalauréat)입니다.  가령 2009년도의 문과 학생들을 위한 철학 시험 문제는 이런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깔로레아 합격증입니다.  인문계(General) 합격증이네요.)



"사르트르의 '도덕을 위한 노트'의 한 발췌문에 주석을 달거나, 혹은 다음 두 질문에 논술하시오 : 지각은 교육이 될 수 있습니까? 생물의 과학적 인식은 가능합니까?"


저로서는 문제 자체를 잘 이해 못하겠는데요 ?  이런 것을 보면 제가 프랑스 고딩만도 못한 철학적 사고를 지녔다는 것인데, 약간 부끄럽기도 합니다.




(프랑스 바깔로레아 시험도 역시 분위기는... 시험이라는 것은 보기만 해도 답답하군요.)



프랑스 바깔로레아는 애초에 대입 시험은 아니었고, 고등학교, 즉 lycee(리세)의 졸업 시험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lycee라는 것이나 바깔로레아라는 것은 모두 나폴레옹이 만든 것이라고 하네요.  나폴레옹은 참 바쁜 인생을 산 것 같지요 ?   전쟁도 벌이고 법전도 만들고 바람 피우는 것도 모잘라 교육에까지 신경을 쓰다니 말이지요.  하지만 교육 문제는 전쟁만큼이나 중요한 사안이고, 나폴레옹이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나폴레옹은 위대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렴 위인전에 올라가는 것이 쉬운 줄 아는가 ?)



전에 히틀러와 나폴레옹의 유사성에 대해 나폴레옹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그 놀라운 유사성  ( http://blog.daum.net/nasica/6862358 참조) 편에서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만, 누가 뭐래도 나폴레옹의 위대함은 히틀러같은 미친 독재자와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그 단적인 면을 보면, 히틀러가 패망한 뒤 독일에 남은 것이라고는 폐허 뿐이지만, 나폴레옹이 패망한 뒤에도 프랑스 및 전세계에는 '나폴레옹 법전'과 'lycee' (고등학교) 등 위대한 유산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혹자는 나폴레옹에게서 아우스테를리츠나 예나 전투같은 군사적 업적을 뺀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나폴레옹은 세계적인 위인으로 남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나폴레옹은 근대 프랑스, 더 나아가 근대의 유럽의 기초를 닦았다는 이야기지요.


여기서 이야기를 약간 삼천포로 빼 보도록 하겠습니다.  재작년이었나요 ?  요즘 비리 문제로 구속이 되어 이제는 전(前) 서울시 교육감이 된 공정택 교육감 선거가 있던 때였습니다.  그때 제 회사 매니저분은 50대 여성분이셨는데, 따님이 이화외고에 막 합격하여 매우 좋아라 하고 계실 때였습니다.  그때 한창 광우병 파동으로 인해 우리나라 보수 및 개혁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는데, 그 열기가 교육감 선거에도 이어지고 있었지요.  당시 강남 대형 아파트에 살고 계셨기 때문에 종부세를 내고 있었고, 따라서 그를 없애기 위해 이명박에게 투표를 하셨던 제 매니저께서는, 기존 교육 체계를 유지하자는 공정택에게 투표를 하셨습니다.  아울러 저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도, 당시 공정택과 표 대결을 벌이던 전교조스러웠던 타후보를 뽑으면 우리나라 교육이 무너진다며 공정택에게 투표를 하라고 권했었습니다. 





(기억들 하시나요 ?  2008년 여름 서울시 교육감 선거.  부끄럽게도 저도 투표 안했습니다.)



우리나라 학부모 대부분은 제 매너저처럼 많은 돈을 자녀 교육에 쓸 여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공정택 후보가 옹호하던 현재와 같은 교육 체제는 사실 중산층 이상의 자녀들에게 매우 유리하지요.  사실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서민층 자녀들에게는, 비록 그것이 하향성 평준화라고 하더라도, 특목고 폐지, 사교육 억제 등을 주장하는 타 후보가 당선되는 것이 더 유리했습니다.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사회라서, 누구나 1표씩 가지고 있었는데,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서민층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공정택이 교육감이 되었습니다.  당시 투표율은 15.5% 정도로, 매우 낮았습니다.  왜 이렇게 투표율이 낮았을까요 ?  아시겠지만 교육감 선거라고 하루 노는 거 아니거든요.  대부분의 서민들은 그런 선거가 진행된다는 사실도 몰랐고, 알아도 별로 신경을 안 썼던 것 같습니다.  애들 교육감 선거 따위가 뭐 중요하냐 하는 것이지요.  서민들은 당장 자기 애들 점수가 좀더 오르는 것이 중요하지, 교육 정책이 뭐가 어떻게 되는지는 별로 안 중요하게 생각하나봐요.  그에 비해, 부유층이라고 할 수 있던 제 매니저는 새벽에 일어나 투표를 하고 난 뒤 출근했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선거의 승패가 갈라졌던 것이지요.   그때 제가 당시의 제 매니저에게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아마 부자들이 정치적 이익에 민감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정치적 이익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 모양이에요."




(어찌 생각하면 저때 촛불 들었던 사람들이 투표에만 제대로 참여했더라도... 저는 저 시위에도 참여를 안 했습니다 !  가만 보면 저는 입만 살았고 행동은 전혀 하지 않는 듯...)



사실 제 매니저하고 저는 사이가 매우 좋았어요.  광우병 때도 스스럼없이 서로 의견 교환했었고요.  제 매니저나 그 바깥분도, 뭐 부모님때부터 부자가 아니었고 그냥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데 취직해서 열심히 돈모으고 재테크해서 강남에 대형 아파트 살고 계시는 분들이거든요.  저는 전에도 썼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각 시민이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당이나 이념을 지지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제 매니저는 제 신념에 꼭 맞게 사시는 분이지요.  (지금은 다른 분이 제 매니저입니다.  제 매니저에게 아부하느라고 이렇게 쓰는 거 아닙니다.)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냐고요 ?  프랑스 대혁명 때 상황도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혁명의 씨앗이 되었던 삼부회에서도, 교육 이야기가 다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삼부회에서 교육에 대한 염려와 개선을 요구했던 계급은 모두 제1계급 (성직자) 또는 제2계급 (귀족)이었고, 제3계급은 교육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경제적 이익이 중요할 뿐, 10~20년 후에나 효과가 나타날 교육 문제는 관심 밖이었던 모양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기폭제가 된 삼부회)



혼돈의 연속이었던 혁명 초기에는 교육 이야기가 거의 없었다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가 끝나고 총재 정부가 들어서면서 비로소 교육에 대해서도 정책이 발표되고 개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주된 방향은 종교와 교육의 분리, 그리고 중앙 집중화였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초등학교 교육이라고 할 만한 것은 대개 수도원같은 카톨릭 기관에서 종교 교육과 함께 읽고 쓰기, 산수 등을 가르치는 것이었는데, 당시 혁명은 철저하게 반 카톨릭 주의 색채를 띠고 있었으므로, 교회로부터 교육을 분리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 외에도 교육의 중앙 집중화를 꾀하여, 모든 교과서, 즉 교과 내용의 표준화 뿐만 아니라, 모든 교사들의 훈련 및 급료를 중앙 정부에서 통제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각지에서 강력한 반발에 부딪힙니다.  당연하지요.  여태까지 존경받던 마을 신부님이 하루 아침에 반혁명분자로 찍혀 미사도 진행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는 것도 모잘라 ( 나폴레옹은 왜 교황과 화해했을까 ?  http://blog.daum.net/nasica/6862386 참조), 여태까지 마을 애들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던 것도 중단하게 하다니요 !  만약 그런 신부님들을 대체할 더 똑똑하고 훌륭한 선생님들이 중앙 정부에서 내려오면 이야기가 또 달라질지 모르겠습니다만, 총재 정부의 의지와는 달리, 그런 교육 중앙 집중화는 애초에 제대로 돌아갈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카톨릭 신부들을 빼고는 자질을 갖춘 교사가 충분히 많지도 않았고, 또 무엇보다도 언제나 문제가 되는 돈, 즉 재원 문제가 교육 개혁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당시 재정난에 시달리던 총재 정부는 그런 교사들의 급료를 제대로 지불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무능과 부패로 대표되는 총재 정부의 인물 중, 나폴레옹을 출세길로 이끈 장본인인 바라스(Barras))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이 프랑스 혁명 이전의 교육은 대개 어떻게 운영되었을까요 ?   프랑스나 영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은 교육 문제에 있어서는 아직 미개한 수준이었습니다.  일단 대부분의 국민들은 읽고 쓸 줄을 몰랐습니다.  자신있게 대부분의 국민이 문맹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특히 여성들에 대한 교육이 무척 경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계몽 사상가인 루소(Rousseau)조차도, 사회 생활은 남자들이 하는 거고, 여자는 살림이나 잘 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여성의 교육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아무튼 제가 좋아하는 나폴레옹 전쟁 소설 시리즈의 주인공인 Sharpe는 런던 밑바닥 출신인데, 이 친구도 20세가 넘도록 문맹이었고,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습니다.  애초에 초등학교라든가 의무 교육이라던가 하는 개념 자체가 없었으니까요.  그나마 좀 먹고 살만한 서민들이 교회나 성당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읽고 쓰기와 덧셈 뺄셈 정도를 배울 수 있었지요. 




(주인공 샤프는 "Sharpe's Tiger"편에서, 인도 셰링가파탐의 감옥에 맥캔들리스 대령과 함께 갇혀 있다가, 그 대령으로부터 감옥 안에서 글자를 배웁니다.  그나저나 이 오디오 북은  Sean Bean이 직접 나레이션하는군요.)



부르조아 또는 귀족들은 대개 어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을 맡아줄 마땅한 학교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대개는 가정 교사를 붙여서 기본적인 교육과 외국어, 수학 등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런 가정 교사는 매우 낮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의 집안의 하인보다는 약간 나은 수준이었다고 하네요.  사실 생각해보면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도, 종종 노예가 가정 교사로서 주인집 아이들을 가르치곤 했으니까, 이 역시 동양과는 매우 다른 서양의 전통인가 봅니다.  이런 가정 교사 자리는 필연적으로 단기 계약직이었는데 (왜냐하면 그 집 애들이 쑥쑥 자라니까요 !), 한 집안에서 다른 집안으로 옮기려면 그 전 주인집의 소개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주인집에 거의 예속되다시피 한 생활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Vasily Perov가 그린 이 그림의 제목은 '상인의 집에 도착하는 가정교사'입니다. 푹 숙인 고개와 상인의 표정에서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확실하게 드러나 보이지요 ?)



그러다가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대략 10살 전후에 (대개 기숙사가 딸린) 사립학교에 보내어 단체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웰링턴 공작 같은 경우는 이튼(Eton) 학교에 입학했고, 나폴레옹 역시 그 정도 나이에 정든 코르시카 섬을 떠나 당시 '적국'이었던 프랑스의 브리엔 사관학교 (라고 쓰고 중학교라고 읽습니다)에 입학했지요. 




(브리엔 사관 학교에서 생도들을 이끌고 눈싸움 중이신 미래의 보나파르트 장군)



이런 사립학교들은 어디까지나 사립학교였기 때문에, 뭔가 공식적인 자격이 주어진다던가 여기를 졸업하면 학력을 인정받는다던가 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어차피 당시 유럽 세계는 특권층이 지배하는 시대였으므로, 굳이 공식적인 학력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지요.  가령 웰링턴도 이튼 학교에서 그다지 성적이 신통치는 않았지만, 그가 군에서 매관매직을 통해 초고속 승진을 하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졸업을 한 웰링턴은 양반 축에 속했고, 많은 귀족 및 부르조아 소년들은 답답하고 엄격한, 무엇보다도 골치 아프게 공부를 시키는 학교 생활을 못 견디고 과감히 탈출, 군대에 입대하거나 상선에 선원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던 모양입니다.  나폴레옹 시대의 공성전http://blog.daum.net/nasica/5344649 참조)에서 언급한 아메드누거 전투의 영웅 콜린 캠벨 대위도 16세에 가출하여 상선 선원으로 서인도 제도로 갔다가, 자메이카의 과일 시장에서 당시 육군 장교로 근무하던 형과 딱 마주치는 바람에 질질 끌려 집으로 되돌아갔던 전과가 있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용감히 학교를 탈출하여 적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는 학생들이 종종 있지요 ?  하지만 대개는 군대보다는 연예계로 진출한다는 점이 좀 다르군요...ㅎㅎ)


나폴레옹의 경우는 사정이 약간 달랐지요.  나폴레옹은 기본적으로 학업 성적이 우수했지만, 그가 졸업한 브리엔 사관학교는 그리 명망있는 특권층들이 다니는 학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벌어서 쓰러진 집안을 일으켜야지'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여, 15세의 나이에 동료 몇명과 함께 파리 왕립 사관학교 (Ecole Militaire, 여기는 졸업하면 군 장교가 될 수 있는 진짜 사관학교입니다) 시험에 합격하는 영광을 누립니다.  이 시험도 요즘 하는 식으로 전국에서 일제 고사를 본다던가 하는 식은 아니었고, 몇몇 '믿을 만한' 사립학교로부터 추천을 받고, 그 학교로 중앙에서 학사관이 파견나와 해당 추천 학생을 면접하는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파리 왕립 사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졸업 시험 공부에 몰두하여, 불과 10개월 만에 졸업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폴레옹은 어떤 공부를 했길래 군사적 천재가 되었을까 ? http://blog.daum.net/nasica/6862360  참조)


이렇게 웰링턴이나 나폴레옹은 당대의 최고 교육을 받은 엘리트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모두 2차 교육만을 받은 고졸 학력자에 불과합니다.  이때는 대학이 없었을까요 ?  당연히 있었습니다.  영국에는 옥스포드, 프랑스에는 소르본느 대학 등 이미 몇백년의 전통을 쌓은 대학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대학에 진학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대개 부르조아 계급에서 전문직으로 나갈 사람들, 즉 법관이나 의사, 학자 등을 할 사람들이 대학에 진학했을 뿐이었습니다.  부르조아 계급 중에서도 사업을 할 사람들은 (당시에는 경영학과 같은 것이 없었으니까) 그냥 아버지 사업체에서 일을 배우는 것이 차라리 더 나았고, 귀족들은 골치아프게 공부같은 거 안해도 출세할 길이 널려 있으니까 갈 필요가 없었고, 서민들은 공부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 너무 길어 한 2주쯤 뒤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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