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나폴레옹 시대의 공성전에 대해 썼던 적이 있었는데요, 요약하면 대포로 구멍 뚫고 그리로 쳐들어가든가, 아니면 사다리 놓고 쳐들어간다가 되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포격으로 '성벽에 구멍 뚫고 쳐들어가기(breach)'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합니다. 성벽의 일부를 대포로 부수어 놓으면, 적군들이 '이 녀석들이 이쪽으로 쳐들어 오려는 모양이군 !' 하고 그 무너진 성벽 뒤에 무지막지한 방어책을 만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Vauban식의 요새 공격은 저 지그재그 방식의 참호로 성벽에 접근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1812년 프랑스군의 점령 하에 있던 스페인의 요새 도시인 시우다드 로드리고(Ciudad Rodrigo)를 영국군이 포위 공격할 때도, 이처럼 먼저 포격으로 성벽에 구멍을 내고, 이어서 그 구멍으로 병력을 투입하는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때, 방어하는 프랑스군은 구멍이 난 성벽 뒤에 대포 2문을 장착해두고 영국군의 돌격을 기다리고 있었고, 이 대포들이 좁은 구멍으로 들어오는 영국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영국군은 이 돌파구에서의 전투에서 두 명의 육군 소장인 맥키넌(Henry MacKinnon)과 크로퍼드(Robert Craufurd)을 포함하여 195명의 전사자 뿐만 아니라 916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그에 비해 프랑스군은 2천명의 전체 병력 중 529명의 전사자 및 부상자를 냈으니, 영국군의 절반 정도의 피해를 입은 셈입니다.
(포격으로 무너진 시우다드 로드리고의 성벽 구멍으로 돌진하는 영국군)
역시 1812년 프랑스군이 점령하고 있던 스페인의 요새 도시 바다호스(Badajoz)를 공격할 때도 breach 공격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이때는 시우다드 로드리고 포위전 때보다 더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서, 영국군은 4,800명의 전상자를, 프랑스군은 1,500명의 전상자를 냈습니다. 이때 전투의 참혹함에 흥분한 영국군은 성이 함락되자 엉뚱하게도 동맹국인 성내 스페인 민간인들을 닥치는 대로 약탈, 살해, 강간하여 영국군의 역사에 오명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최악의 포위전인 바다호스 요새 공략전. 그 냉혈한이었던 웰링턴 공작도 부하들의 희생자 숫자에 질려서 마지막 순간에는 공격을 포기하려고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인 '사다리 놓고 올라가기'는 쉬우냐 하면 물론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게 쉽다면 애써 쌓은 성벽과 힘들여 판 해자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 위에서 언급한 바다호스 요새 공격은 breach 공격과 동시에 사다리 공격도 병행했는데, 여기서도 수많은 사상자가 났습니다. 전에 장군님들의 전사 ( http://blog.daum.net/nasica/6862432 ) 편에서 언급했던 영국군의 맹장 토마스 픽튼 (Thomas Picton) 장군은 여기서도 몸소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올라가다 적의 공격에 부상을 입고 굴러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막판이 되면 19세기초의 전투나 로마시대의 전투나 비슷비슷해집니다.)
자, 혹시 제3의 수단은 없을까요 ? 위에서 언급한 예는 모두 영국군이 공격을 하고 프랑스군이 수비를 하는 형태였는데, 나폴레옹이라면 적의 요새를 과연 어떻게 공격했을까요 ?
제가 읽은 것을 기억해보면, 나폴레옹이 직접 개입했던 공성전은 모두 세 번에 불과했습니다. 사실 나폴레옹의 전술은 어디까지나 발로 뛰는 기동전이었으므로, 포위 공성전은 적성에 맞지도 않았겠지요. 아무튼 그 세 전투는 각각 1793년의 툴롱(Toulon) 포위전, 1799년 아크레(Acre, 생 장 다르크 Saint-Jean-d'Arc) 포위전, 그리고 1805년의 울름(Ulm) 포위전이었습니다.
툴롱 포위전은 보잘 것 없던 나폴레옹에게 최초로 출세의 기회를 준, 사실상 나폴레옹의 첫번째 전투였던 만큼 의미가 큽니다.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영국 함대를 제압할 적절한 포대 위치를 선정하는 등 포술가로서의 전문성을 십분 발휘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툴롱은 항구 전체가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 싸인 요새는 아니었으므로 여기서는 그냥 지나가겠습니다.
(나폴레옹에 의해 툴롱 항구에서 축출된 영국 해군 제독 Hood)
또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직전에 벌어졌던 울름 포위전도 그냥 지나가겠습니다. 이 포위전은 정말 3일 동안 포위만 하고 나서 오스트리아 군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거든요. 오스트리아 군이 이렇게 맥없이 항복한 것은, 아예 처음부터 농성할 작정으로 울름에 들어갔던 것이 아니라, 나폴레옹의 기동전에 휘말리다보니 글자 그대로 포위당한 것에 불과했거든요. 따라서 이 전투는 진정한 공성전이라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UIm에서 나폴레옹에게 항복하는 오스트리아의 Mack 장군. 저 멀리 울름시와 그 성곽이 보입니다.)
하지만 1799년, 팔레스타인의 유서 깊은 도시 아크레 포위전은 글자 그대로 공성전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정복한 뒤, 어려서부터의 꿈이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시리아를 정복하기 위한 중간 단계로서 이 아크레 공략에 나섭니다. 나폴레옹 생각에는 자신의 프랑스군이 아크레 시 앞에 나타나기만 해도 투르크 군은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 튼튼한 바빌론 성도 알렉산드로스 대왕 앞에 싸우지 않고 성문을 열어 항복했었거든요.
하지만 바로 직전, 자파(Jaffa)에서 민간인을 약탈하고 투르크 군 포로들을 학살한 것이 역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잘 알고 있던 아크레의 시민들과 투르크 군은 결사 항전을 다짐하게 되었거든요.
일이 이렇게 재미없게 돌아갔지만, 나폴레옹은 굴하지 않고 보병 만으로 사다리를 통한 공격에 나섭니다. 사막을 통해 포병을 신속히 이동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포병의 지원을 포기해야 했었던 것이지요. 제 아무리 나폴레옹이라고 하더라도, 대포 없이는 난공불락의 요새 아크레를 점령할 수가 없었습니다.
별 수 없이 나폴레옹은 이집트의 본진에 연락하여, 배로 공성포를 실어오도록 합니다만, 바다는 영국 해군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해군은 프랑스군의 대포 수송선을 냉큼 나포했고, 이 프랑스제 대포들은 영국 해군에 의해 아크레로 옮겨져서 어이없게도 프랑스군을 공격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을 더 열받게 한 것은, 사관 학교 시절부터 원수지간이었던 드 펠리포(De Phelipoux)가 영국 해군과 함께 그 대포들을 운용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대포 없이는 병사들의 희생만 늘어날 뿐이었습니다.
(나의 카와이한 프랑스 보병은 성벽도 뚫을 수 있다 - 돌격 앞으로)
타보르(Tabor) 산 전투에서 투르크의 지원군을 무찌른 나폴레옹은 결국 오랜 기다림 끝에 이집트에서 육로를 통해 운송되어온 대포들을 손에 넣게 됩니다. 이를 이용해 결국 아크레의 성벽에 구멍을 뚫는데 성공합니다만, 이를 통해 돌격해들어간 프랑스군은 큰 실망만을 맛봅니다. 투르크 군이 구멍 너머에 훨씬 더 험난한 방어물을 구축해 놓았기 때문이었지요. 이렇게 성벽에 뚫린 구멍 속에 있는 제2 방어선은, 성벽 밖의 대포로는 직접 공격이 더 곤란했으므로, 정말 인간의 몸으로 뚫을 수 밖에 없었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병영 안에 페스트까지 도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나폴레옹은 철수를 결정하게 됩니다. 이 아크레 공방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결국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놀이의 환상에서 깨어나 프랑스로의 귀환을 결심하게 됩니다.
(자파에서 페스트 환자들을 방문하는 나폴레옹)
결국 요약하면, 천하의 나폴레옹도 공성전에 있어서는 그다지 남다른 재주를 보여주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역시 사람마다 전공 분야가 있기 마련인데, 나폴레옹의 전공은 기동전이지 포위전은 아니었다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모든 공성전이 이처럼 결국 병사들의 육탄 돌격으로 끝났던 것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화포가 발달했던 시기이니 만큼, 포병대의 집중 사격만으로도 적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제가 여러번 언급했던 1807년 영국군에 의한 덴마크 코펜하겐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 육해군은 박격포와 곡사포를 이용하여 온갖 폭발탄과 소이탄을 4일 밤 동안 코펜하겐 시내에 퍼붓는 만행 끝에, 항복을 받아냅니다. 이 이야기는 덴마크의 몰락과 미국 국가 작사에 관련된 군함 이야기 ( http://blog.daum.net/nasica/6862393 ) 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 외에도, 나폴레옹 전쟁으로 쳐주지는 않는 전투입니다만, 프랑스 혁명 초기 1793년 프랑스 혁명군이 점령했던 독일 도시 마인츠(Mainz)를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등의 연합군이 포위 공격했을 때도, 연합군은 포격 (사실 포격이라기보다는 폭격이 맞습니다) 만으로 마인츠 시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특히 이 마인츠 포위전은 괴테도 옵저버로 참전하여 그 전투 기록을 남긴 것으로 무척 유명합니다.
이렇게 포격만으로 항복을 받아낸 공성전 중에서, 가장 극적이고 가장 미스티리어스한 전투는 아마도 1810년 포르투갈의 요새인 알메이다 (Almeida) 포위전일 것입니다. 이 전투에서는 영국군 대령이자 포르투갈의 준장인 윌리엄 콕스(Willian Cox)가 지휘하는 약 5천명의 포르투갈군이 수비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네이 (Ney) 장군이 약 1만6천명의 병력으로 공격을 했습니다. 양쪽은 모두 대포를 100문 씩 가지고 있었으므로, 병사들이 육탄 돌격하기 전에 아주 화려한 화력전이 펼쳐질 예정이었습니다. 특히 이 알메이다 요새는 당시로서는 매우 현대적으로 만들어진 요새로서, 알메이다의 방탄 포곽(砲郭, casemate)은 전체 수비 병력을 다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크고, 프랑스군의 대포알을 튕겨낼 수 있을 정도로 튼튼했습니다.
(현재의 알메이다 항공 사진. Vauban식 요새의 특성인 별 모양이 선명히 보입니다.)
실제로 대단한 화력전이 펼쳐졌습니다. 8월 15일부터 공성포를 설치하기 시작한 프랑스군은, 오랜 준비를 끝마친 뒤 8월 26일 오전 6시부터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실제 포격전에서는 프랑스군이 압도적이었는데, 프랑스군은 약 50문의 화포를 한쪽에 집중하여 배치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거의 완전한 원형 모양을 하고 있던 알메이다 요새의 포곽은 전체 성벽에 걸쳐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프랑스군은 베테랑 포병들을 잔뜩 데려온 것에 비해, 포르투갈군의 병력 대부분은 정규군이 아닌 민병대였고, 포병대는 400명에 불과했었습니다.
아무튼 프랑스군은 이 첫날 새벽부터 저녁때까지 무려 9톤의 화약을 써서 6,177발의 포탄을 날려 보냈습니다만, 워낙에 튼튼했던 알메이다 요새의 성벽은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곡사포와 박격포에서 날려 보낸 폭발탄(shell)들이 알메이다 요새 내 이곳저곳에 화재를 일으키기는 했습니다.
(이것이 포곽(砲郭, casemate)입니다. 대포 및 포병들을 보호하는 방호벽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날 저녁,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알메이다 요새의 화약고는 요새 중앙부에 있는 내성 건물에 위치해 있었는데, 물론 평상시에는 그 입구는 육중한 출입문으로 막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군과 교전 중인 포대에 보급할 화약을 꺼내느라 화약고의 출입구가 잠시 열린 사이에, 프랑스군의 폭발탄 한 발이 그 열린 문 틈으로 튕겨져 들어간 것입니다. 일설에는 폭발탄이 화약고 안에 직접 튕겨들어간 것이 아니라, 밖에 꺼내어져 있던 화약통에 명중했는데, 하필 그렇게 꺼내어졌던 화약통에서 화약이 줄줄 새고 있어서, 그 흘려진 화약 가루가 화약고 안쪽까지 이어져 있었던 바람에 불이 화약고 안쪽까지 번졌다고 합니다. 다만 이 두 번째 설은 너무 만화같군요.
(전형적인 화약고의 모습입니다. 대개 반지하식으로 되어있지요.)
아무튼 확실한 것은, 대폭발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화약고 안에는 약 4천발의 폭발탄과 15만 파운드의 흑색 화약, 그리고 백만발이 넘는 소총 탄약포가 저장되어 있었으므로, 그 폭발의 위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이 폭발을 직접 목격했던 프랑스군 대령인 스프룅글랭(Sprünglin)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대지가 흔들리면서 우리는 알메이다 한 가운데서 엄청난 불기둥과 연기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건 마치 화산 폭발과도 같았는데, 26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엄청난 크기의 바위덩어리들이 우리 참호까지 날아와 우리 병사 몇몇이 죽고 다칠 정도였다. 알메이다 요새의 거포들이 성곽에서 날아올라 성 밖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연기가 걷히고 난 뒤에 보니, 알메이다의 대부분은 사라져 있었고, 남은 것은 파편 부스러기 뿐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 대폭발로 죽은 포르투갈 병사들의 수는 전체 병력의 약 1/10 정도인 500명 가량이었고, 이들은 진지가 폭파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프랑스군과 교전하기 위해 필요한 화약이 없어진 관계로, 부득이 그 다음날 항복을 해야 했습니다. 살아남은 총 4,100명이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 알메이다 요새의 대폭발 사건은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드라마틱하지요. 정말 그 정도로 불운하게 화약고가 폭발한 예가 있었을까 하는 의심도 들고요. 그래서, 아니나 다를까, 이 사건은 Bernard Cornwell이 지은 나폴레옹 전쟁 소설 시리즈인 Sharpe's Gold 편에서 주요 소재로 다루어집니다. 소설 내용을 미리 공개하면 스포일러가 되니까, 간단히만 말씀드리면, 그 화약고는 프랑스군의 럭키 샷에 의해 폭발한 것은 아닌 것으로 묘사됩니다.
(BBC 미니시리즈로 제작된 Sharpe's Gold 편은 원작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내용이더군요.)
아무튼 이렇게 럭키 샷으로 끝난 알메이다 공성전은 그 포로 문제로 뒷이야기를 남깁니다. 원래 알메이다의 포르투갈 지휘관이었던 윌리엄 콕스 준장은, 항복의 조건으로 2가지를 내걸어습니다. 즉, 전체 병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포르투갈 민병대는 가석방(parole, 이에 대해서는 나폴레옹 시대의 포로 생활 http://blog.daum.net/nasica/6068559 참조) 조건으로 집으로 돌려 보내주고, 정규군은 포로로서 프랑스로 압송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네이의 상관이자 포르투갈 침공군의 총사령관이었던 마세나(Massena) 원수는 병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그 약속을 어기고 포르투갈 포로들을 모조리 프랑스군에 편입시켜 버립니다.
사실 웰링턴 공작이 가장 놀라고 두려워 했던 것은 알메이다 요새의 함락 소식보다 포르투갈 포로들이 모조리 프랑스군에 편입되었다는 소식이었다고 합니다. 포르투갈인들이, 친 프랑스 성향을 나타낸다면, 포르투갈 방어전의 실패는 불보듯 뻔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다행히도, 포르투갈 포로들은 프랑스군 노릇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지, 얼마 안되어 모두들 탈영하여 결국 영국군 및 포르투갈군 쪽으로 합류했다고 합니다. 특히, 원래 가석방 조건이었으므로 다시 총을 들어서는 안되었던 민병대원들도, '프랑스군이 먼저 약속을 어겼으니까'라며 자연스럽게 다시 총을 들었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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