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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장군님들의 전사

by nasica-old 2010.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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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의 장병들이 한분이라도 더 무사히 구출되기를 기원합니다. 

인터넷을 보니, 왜 장교들은 다 살고 사병들만 죽었느냐는 이야기가 나오던데, 그런 반응은 좀 아니올시다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구색을 맞추기 위해, 살 수 있는 장교들 중 일부가 일부러 죽기라도 해야 한다는 말은 설마 아니겠지요.  천안함에서 성실히 국방의 의무를 다하다가 다행히 살아남은 장교들보다는, 아예 군대에 가지 않는 사회 지도층이 진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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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원수들(foe가 아니라 marshal입니다)은 모두 26명입니다.  프랑스 제국의 최고 계급의 군인들이지요.  이 중 상당수가 결국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부르봉 왕가 쪽에 붙었습니다만, 여기서 따지자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 중 몇명이 전쟁터에서 죽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Source는 http://www.napoleonguide.com/marshind.htm )


결론적으로 모두 3명이 전사했습니다.  란(Jean Lannes, 1809년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전사), 베시에르 (Jean Baptiste Bessieres, 1813년 뤼첸 전투에서 전사), 그리고 포니아토프스키(Josef Anton Prince Poniatowski, 1813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전사)입니다.  사실 제 명에 죽지 못하고 험악한 말로를 맞이한 사람들은 4명 더 있습니다.  베르티에(Louis-Alexandre Berthier, 1815년 암살 또는 자살), 뮈라(Joachim Murat, 1815년 총살), 그리고 네이(Michel Ney, 1815년 총살), 그리고 브륀(Guillaume Marie Anne Brune, 1815년 왕당파 폭도들에게 피살) 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엄연히 전투 중 사망은 아니므로, 제외해야겠지요.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최후까지 나폴레옹에게 충성했던 포니아토프스키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프랑스인이 아니고 폴란드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폴란드의 독립을 이루어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포니아토프스키는, 라이프치히 전투 직후 후퇴할 때, 겁에 질린 프랑스 공병들이 다리를 너무 일찍 폭파하는 바람에 고립되었다가, 항복을 거부하고 강에 뛰어들었습니다.  일부에 따르면 익사했다고도 하고, 일부에서는 강 건너 편의 프랑스군이 무차별로 쏘아대는 유탄에 맞았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총 26명 중 3명이 전사했으니, 11.5%의 사망율입니다.  이 정도면 높다고 보십니까 ?  글쎄요, 장군들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높다고 할 것 같고, 일반 병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적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어떤 장군이 자신의 용기를 과시하며, 자기는 적의 창에 부상을 당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고 자랑하자, 그를 듣던 다른 장군은 오히려 '내 방패에 적의 화살이 닿는 것을 보고, 난 장군으로서의 본분을 잊고 일개 병사처럼 행동한 것을 후회했다'고 대꾸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즉, 장군의 역할은 전투의 위험에 몸을 노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안전한 후방에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도록 지휘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글쎄요, 이 말이 맞는 말처럼 들리기는 합니다만, 실제로는 부하들의 선두에 서서 전투의 위험에 몸을 사리지 않는 장군들이 더 인기가 있는 것은 사실 같습니다.  고대 아테네의 장군이자 역사가였던 투키디데스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스파르타의 지휘관인 브라시다스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브라시다스는 젊은 시절부터 스파르타의 용사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가령 필로스 전투 때는 아테네 해군의 삼단 노선을 맨몸으로 나포하겠다고 바닷물에 뛰어들었다가 적에게 얻어맞고 기절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오늘날 터키 지역인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클레온이 이끄는 아테네군과 전투를 벌여 완승을 거둔 뒤, 멋있게 전사함으로써 그 아름다운 군인의 일생을 완성했습니다.  아테네군은 겁장이 클레온이 도망치다 등에 창을 맞고 뻗은 것을 포함하여 약 600명의 전사자를 낸 것에 반해, 스파르타측 동맹군은 고작 8명이 쓰러졌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최고 지휘관이었던 브라시다스였습니다.  이렇게 전투를 완승으로 끝내고 전사하는 것은 모든 '진짜 군인'들의 꿈이라고들 합니다.  먼 곳의 예를 들 필요없이, 우리 민족 최고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이순신 장군께서도 바로 그렇게 더 이상 빛날 수 없는, 그런 장렬한 전사를 하셨지요.  영국의 이순신이라고 할 수 있는 넬슨 제독도, 참 희한하게도, 비슷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넬슨의 죽음... 상당히 미화된 그림입니다.)



병사들에게 인기가 최악인 지휘관은, 그 반대인 경우겠지요.  그러니까 거의 죽을 것이 뻔한 전투에 무모하게 부하 병사들을 밀어넣고, 자신은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에서 와인과 함께 우아한 식사를 하고 정해진 시간에 편안한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경우말입니다.  '설마 그런 잡놈이 있겠느냐' 싶겠습니다만, 바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이나 프랑스군 최고 지휘관들은 바로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초대 영국 원정군 사령관이었던 존 프렌치 (John French) 경은 제1차 세계대전 초반의 기동전이 끝나고, 전투가 참혹한 참호전으로 들어가자, 심각하게 우울해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당시 기술로는 철조망과 기관총으로 무장된 적의 방어선을 뚫을 수가 없었는데도, 계속 공세를 취해야 한다는 점이 괴로왔고, 특히 영국군의 사상자 숫자가 애초에 자기가 데려온 영국 원정군의 숫자인 15만 명 이상을 초과하자, 더더욱 그 괴로움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프랑스 측과의 불화에 공세 실패가 겹쳐서, 결국 프렌치는 더글라스 헤이그 장군으로 교체됩니다. 




(이름과는 반대로, 프렌치 장군은 프랑스어를 거의 못했고, 프랑스인들과 사이도 안좋았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 영매술사와의 회합에서, 나폴레옹의 영혼을 만났다고 주장하던 괴짜 더글라스 헤이그 장군)



이 헤이그 장군은 그야말로 무자비한 사람으로서, 전투의 참혹함이나 한번 공세에 발생하는 수많은 사상자 숫자에는 눈도 깜짝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가령 영국군이 10만명 죽거나 다쳤고, 독일군이 8만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해도, 그렇다면 독일군의 예비 병력이 더 적으니까 우리가 이긴거라면서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더 나쁜 것은, 전방의 영국군 장병들이 물이 잔뜩 고인 참호에서 추위에 벌벌 떨며 차가운 머카너키(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 배급 식량  http://blog.daum.net/nasica/6862357 참조) 통조림과 건빵으로 주린 배를 채우는 와중에도, 헤이그 장군은 안전한 후방에서 번쩍이는 은제 접시로 식사를 하고, 번쩍번쩍 거리는 롤이로이스를 타고 웅장한 프랑스의 고성에서 사령부로 출퇴근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을 하는 장군이, 저런 생활을 하는 병사들에게 '죽을 것이 뻔하지만 그래도 돌격 앞으로'를 명령하는 것이 옳다고 보십니까 ? 


물론 헤이그에게는 헤이그 나름대로의 그런 생활을 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가령 후방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은, 헤이그가 책임져야 할 전선이 너무 넓어서, 너무 전방으로 가면 오히려 통신 및 교통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는 독일군이나 프랑스군도 마찬가지 상황이었습니다.  또, 군 최고 사령관이 으리으리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특히 1917년 유럽 사회 분위기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그리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었지요.  하지만 역시 사람들의 눈초리를 싸늘했고, 그 결과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장군들에게는 '사자들을 지휘한 당나귀'라는 오명이 남게 되었습니다.




(헤이그가 주도했던 1917년 이프르 공세는 수많은 무의미한 개죽음만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장군들이 과연 그렇게 제 몸 편안한 것만 생각하는 비겁자였을까요 ?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가령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전사한 장군들의 숫자보다 더 많은 장군들이 제1차 세계대전 때 전사했습니다.  영국 원정군의 경우, 총 1,257명의 장군들이 있었는데, 이중 죽거나 부상당한 사람의 숫자는 무려 232명으로서, 약 18.5%의 사상률을 냈습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것으로 유명한 베르덩 전투에서도, 프랑스군의 경우 참전자들의 사상률이 약 24% 정도였던 것을 고려하면 ( 서바이벌 시리즈 - 나폴레옹 전쟁에서 살아남기  http://blog.daum.net/nasica/6862382 참조), 적어도 영국 육군의 장군들도 상당한 위험을 몸으로 받아내며 싸웠다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이 장군님들의 사상자들 중 약 43%는 포격에 의한 것이었고, 28%는 소화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설마 장군님이 적 참호를 향해 선두에서 돌격하셨을 것 같지는 않고, 아마도 참호 시찰 나오셨다가 독일군 저격병에게 당하신 모양입니다.


그런데도 제1차 세계대전 때의 장군들이 욕을 많이 먹은 이유는, 바로 전의 기억에 남는 큰 전쟁, 즉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장군들의 행동과 무척 비교가 많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기와 교리, 병력의 규모가 모두 크게 바뀐 시대에, 100년 전 장군들과 비교를 당하는 것은 무척 억울한 일이겠습니다만,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장군들은 적어도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장군들보다 훨씬 더 위험에 많이 노출되었던 것은 사실처럼 보입니다.  적어도, 이 시대의 장군들은 이쪽으로 돌진해오는 적병들의 모습이 훤히 보이는 곳에서 지휘를 했으니까요.




(수많은 병사들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장군들도 목숨을 잃은 보로디노 전투)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육상전에서는 인편에 의한 메시지 전달 외에는 사실 뾰족한 통신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장군들은 어쩔 수 없이 (제1열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전장에서 직접 자신의 눈으로 전황을 파악하고 병력의 전개를 통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주력 소화기였던 머스켓 소총의 유효 사거리가 고작 60~70m 였던 것을 생각하면, 보기보다는 그다지 위험한 것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대포는 저 뒤쪽에 위치한 장군들의 목숨도 충분히 위협할 수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당시 주력이었던 8파운드 포의 경우는 유효 사거리가 약 700m 정도, 최대사거리는 1km가 넘었습니다.  이런 긴 사정거리 때문에, 나폴레옹 시대의 고위급 장군들은 총탄보다는 포탄에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가령 나폴레옹의 부하 원수인 란, 베시에르, 뒤로크 (뒤로크는 원수는 아니었음...) 등은 모두 포탄에 맞아 전사했고, (모두 직사탄이 아닌, 땅이나 벽에 맞고 튀어나온 ricochetting shot에 맞았습니다) 나폴레옹의 정적이었다가 나중에 러시아군 편에서 싸운 모로 장군도 나폴레옹군의 포탄에 두동강이 났습니다.  전에  나폴레옹 시대, 전사자들의 장례식 ( http://blog.daum.net/nasica/6862392 )편에서 다룬 영국의 포르투갈 원정군 최고 사령관 무어 경도 프랑스군의 대포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의외로 정작 나폴레옹 본인은 대포에 의한 부상은 입은 적이 없고, 오히려 적의 소총탄에 엄지발가락을 맞아 부상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적진에 근접해서 지휘했었다는 이야기지요.  실제로 나폴레옹은 전장에서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자신을 지켜주는 자신의 운명을 믿었다고 합니다.




(부하이자 친구였던 란의 죽음은 나폴레옹에게 정말 큰 손실이었습니다.)



여관집 아들이 하사관을 거쳐 왕까지 할 수 있었던 혁명 군대였던 프랑스군은 그렇다치고, 귀족들이 매관매직으로 장교단을 가득 채웠던 영국군은 어땠을까요 ?  귀족들이니까 역시 귀하신 도련님이 다치면 안되므로 멀찍이 후방에서 지휘를 했을까요 ?




(인도를 침략하는 영국 제국주의라는 것만 빼면 이 소설 꽤 재미있습니다.)



Sharpe's Triumph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03년 인도) -------------


그 대포가 불을 뿜었다.  그 포구로부터 몰아쳐닥친 포연이 장군 일행을 삼켜버렸다. 한순간 샤프는 희미한 연기 속에서 웰슬리 장군의 키 큰 윤곽을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다음 순간 보이는 것은 피바다 속에 쓰러지는 장군의 모습이었다.  산탄 조각들이 샤프 주변을 휩쓸고 나서 한박자 뒤에 그 포격의 열기와 폭풍이 그의 몸을 휘감고 지나갔지만, 그는 웰슬리 장군의 바로 뒤에 있었으므로 포격을 정통으로 맞은 것은 바로 웰슬리였다.

실은 장군이 아니고 그의 말이었다.  그 종마는 십여발의 산탄을 맞았지만 웰슬리는 기적적으로 상처 하나 없었다.  그 큰 말은 땅에 쓰러지기도 전에 이미 숨이 끊어졌다. 말이 쓰러지기 전에 웰슬리가 발을 등자에서 빼고 안장에 손을 대고 몸을 빼내는 것이 샤프의 눈에 들어왔다.  웰슬리는 오른발이 먼저 땅에 닿자, 종마의 몸무게가 그의 다리 위를 덮치기 전에 비틀거리며 펄쩍 뛰어 몸을 피했다.  캠벨 대위가 장군 쪽을 돌아다 보았지만, 장군은 그에게 그대로 전진하라고 손짓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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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프 시리즈는 BBC에서 미니시리즈로 제작되었고, 주인공은 반지의 제왕에서의 보로미르, 션 빈이 맡았습니다.)



위는 제가 전에 번역했던 19세기초 영국군과 인도군은 어떻게 싸웠나 ? ( http://blog.daum.net/nasica/6862373 참조) 편의 일부입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웰슬리(훗날의 웰링턴 공작) 장군의 말이 포탄에 쓰러지는 장면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 아사예 전투에서, 웰링턴 공작은 자기가 타고 있던 말 두마리를 잃는데, 한마리는 윗 장면처럼 웰링턴을 태운 상태에서 포탄에 맞아 쓰러졌고, 다른 한마리는 웰링턴이 몸소 마라타 연합군의 대포들을 다시 탈환하려고 돌격할 때 적 기병의 창에 찔려 쓰러집니다.  (소설 속에서는 그때 웰슬리의 목숨을 구한 것이 바로 소설 속의 주인공 리처드 샤프로 나오지요.)  이 전투에서 웰링턴만 이렇게 목숨을 걸고 용감히 싸웠던 것은 아닙니다.  웰링턴의 직속 참모진에는 총 10명의 장교들이 있었는데, 그 중 8명의 장교들이 웰링턴처럼 타고 있던 말을 잃거나 직접 부상을 당합니다. 




(웰링턴 공작은 개인적으로 워털루보다 아사예 전투를 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웰링턴과 그의 부하 장교들은 워털루에서도 몹시 위험한 상황에서 싸웠습니다.  연기파 배우들인 로드 슈타이거와 크리스토퍼 플럼머가 주연한 대작 전쟁 영화인 "워털루"(Waterloo, 1970년)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  이 영화를 보면, 어울리지 않게 중절모를 쓰고 신사복을 입은 중년 남자 하나가 영국군 보병들을 이끌고 프랑스군을 향해 똑바로 말을 몰아가면서 '천하에 개X넘들, 엄마가 X녀인 술주정뱅이들...' 이런 식으로 자기 부하들에게 쌍욕을 해대며 전진하다가 머리에 총을 맞고 말에서 미끄러지며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바로 웰링턴의 부하 장군으로서 무지막지하기로 소문났던 맹장 픽튼 경(Sir Thomas Picton)입니다.  사실 이 남자는 식민지 점령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토지와 노예에 투기를 하여 떼돈을 벌기도 하고, 식민지에서 14살 짜리 혼혈 여자 아이를 고문한 혐의로 나폴레옹 전쟁 중간에도 재판을 받을 정도로 평판이 좋지 않은 사내였습니다만, 아무튼 용감무쌍한 것으로는 정평이 나있었습니다.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옹의 전광석화같은 움직임 때문에 급작스레 일어난 전투로서, 픽튼의 경우 미처 자신의 짐짝이 현장에 도착하지 않았던 관계로, 실제로 부득이 중절모와 신사복 차림으로 지휘를 해야 했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그런 차림이었던 것도 이유가 있었던 것이지요. 




(픽튼의 초상화입니다.  그 영화 Waterloo 속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그 사진은 도통 못 구하겠네요.)


이 영화에는 또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더 있지요.  전투 막판에, 웰링턴(크리스토퍼 플럼머)과 그 기병대장인 억스브리지 경(Henry Paget, Lord Uxbridge)이 나란히 말을 타고 서있는데, 갑자기 포탄이 바로 앞에 떨어지면서, 둘이서 움찔합니다.  이어서 웰링턴은 이런 거 한두번 겪냐,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냥 앞쪽을 다시 주시하는데, 억스브리지가 이렇게 말하지요.  (이건 실제로 전투 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이런, 장군, 제 다리가 잘려나갔군요 !"  (By God, sir, I've lost my leg!)


이에 대해 영화 속에서 웰링턴은 아무 말도 못하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억스브리지를 부축하는 것으로 나옵니다만, 실제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런, 장군, 정말 그렇군요 !"  (By God, sir, so you have!)


이 억스브리지 경은 당장 근처 저택으로 옮겨져 마취도 없이 다리 절단 수술을 받았는데, 그때도 마치 어깨 수술 받는 관운장처럼 한마디 했다고 합니다.  "칼이 좀 무딘 것 같군!"  후에 이렇게 다리를 잃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영국 정부는 억스브리지 경에게 연간 1,200 파운드 (약 2억9천만원 정도)의 연금을 제시했습니다만, 억스브리지는 거절했습니다.  사실 이미 부자에 귀족인데, 연금을 받을 이유는 없었겠지요.




(두 다리가 멀쩡했던 모습의 억스브리지 경의 모습입니다.)



이 다리는 그 저택 주인의 청에 따라 그 집 마당에 묻게 되었는데, 이 다리 무덤은 훗날 유명한 워털루의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영국이든 프랑스든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장군들은 확실히 위험에 몸을 노출시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노출시켰으며, 또 그렇게 했다는 점을 마구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내각 안에 군복무를 제대로 마친 장관이 거의 없을 정도인 요즘 우리나라 상류층들과 비교가 되면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이 많이 아쉽습니다.  제 생각에는 꼭 상류층들이 군대에 가서 죽고 다치고 할 이유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상류층이라고 군대를 이리저리 빼는 행동은 정말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기 아들은 소중하니까 병역을 회피하게 해놓고, 서민들 아들은 대수롭지 않으니까 '국가를 위해서는 전사자도 무릅써야 한다'며 아프가니스탄 같은 곳에 파병 보내자고 한다면, 설득력이 너무 떨어지쟎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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