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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 시절 젊은이들이 앞니를 뽑아야 했던 이유

by nasica-old 2009.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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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징집제는 고대 그리스에 이미 있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도, 어느 정도 재산이 있어서 자신의 갑주와 무기를 자기가 준비할 수 있어야 군대에 갈 수 있었으므로, 모두가 군대에 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때의 병역은 시민의 의무이자, 일종의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도 모든 시민들이 열정을 가지고 국가의 소집령에 응하는 것도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가령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 아테네의 장군인 포키온은 전쟁에 반대를 했는데, 많은 시민들은 싸워야 한다고 아우성을 쳐서 결국 전쟁이 결정되고 소집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소집 현장에 포키온이 가보니, 바로 전날 전쟁을 해야 한다고 외치던 시민 하나가 목발을 짚고 소집장에 나타나자 군적표를 기록하던 서기에게 이렇게 적도록 시킵니다. 

 

"저자를 군역에서 면제시켜 주게. 이유로는 다리 병신에다 마음 병신이라고 적게."

 

 

 

(친 마케도니아 파라는 욕을 먹었으나, 삶은 누구보다도 청빈했던 포키온.  알렉산더의 선물을 거절하다.)

 

 

아마 이런 마음 병신들이 많았는지, 시민군이라는 아름다운 전통은 불과 3백~4백년만 존속했을 뿐, 그리스의 전장도 곧 직업 군인과 용병이 장악하게 됩니다.  주된 이유는 지나치게 많은 전쟁으로 인한 중산층의 몰락과, 급변하는 전술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는, 적어도 유럽에서는, 군대란 국가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 개인이나, 귀족 개인들이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국민 모두가 군대에 가는 것도 아니었고, 아무나 군대에 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을 생각해보십시요. 프랑스나 독일의 힘깨나 쓴다는 귀족들이 자신의 식솔들과 부하들을 이끌고 참전했습니다.  프랑스의 왕이나 영국 왕이 참전한다고 해도, 그것이 영국 전체나 프랑스 전체가 참전하는 것이 아니고, 플랜태지니트 가문의 리처드, 또는 앙주 가문의 앙리로서 참전했던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도 일종의 징집 같은 것이 있기는 했습니다.  보통 장원에서 일하는 농노 가족 당 1명의 청년을 보병으로 내놓아야 했는데, 그 복무 기간은 불과 1~3개월 정도였으니까, 요즘의 징집제와는 성격이 많이 다르지요.

 

 

 

(세바스찬, 이번에 영주님이 또 전쟁터에 나가신다.  우리집에서는 이번엔 니가 따라가라.) 

 

 

또, 한 국가의 군대가 그 나라의 국민들로 이루어졌던 것도 아닙니다.  합스부르크가의 스페인 전성기 때, 네덜란드의 반란을 진압하던 스페인군은 독일인, 이탈리아인, 플랑드르인, 프랑스인 등 외국인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외국인 용병들을 많이 썼던 이유는, 당시 이들을 고용했던 왕가는 외국과의 전쟁도 중요했지만, 그 못지않게 국내 귀족들의 반란이나 민중 폭동을 진압하는 경우도 많았으므로, 그럴 경우 국내 정치에 연줄이 없는 외국인들을 고용하는 것이 더 '안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위그노 내란 때, 위그노 쪽에 관대했던 왕 앙리는, 당시 카톨릭의 강성파인 또 다른 앙리 공작(왜 이리 앙리가 많아?)과 그를 지지하던 파리의 부르조아들을 제압하기 위해 국왕의 근위대를 파리로 난입시키는데, 그들 대부분은 프랑스인이 아니라 스위스인이었습니다.

 

 

 

('세 앙리의 전쟁'을 벌이던 프랑스 왕 앙리 3세.  앙리 3세가 앙리 기즈 공작을 암살한 뒤, 훗날 자신도 암살당하고, 그 뒤를 나바르 왕 앙리 부르봉이 물려받아 앙리 4세가 됩니다... 요약하면 앙리가 앙리를 죽이고 앙리가 앙리의 뒤를 이었습니다...어 ?)

 

 

이런 경우는 근동 지방, 즉 이집트의 마멜루크와, 오스만 투르크의 예니체리 등 노예 군단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독특하게도, 기독교도들의 어린 남자아이들을 사들여 이슬람교로 개종시킨 뒤, 철저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엘리트 전사로 키워진, 일종의 노예 용병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슬람 왕조의 엘리트 부대를 기독교 노예 출신 소년들로 채운 것은, 왕에게 반기를 들지도 모르는 유력한 이슬람 가문의 세력 성장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 하게도 결국 마멜루크나 예니체리나 나중에는 모두 자신들이 어느 정도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19세기 후반 터키 근대화 과정의 혼란 속에서 결국 학살되며 해체되는 예니체리 군단병들...) 

 

 

그러다가 프랑스 대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유럽의 왕족들이 단결하여 프랑스를 침공하기 시작했을 때, 이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워낙 압도적인 수의 외국 침략군을 막기 위해서, 프랑스가 1798년, 예수 탄생 이후 최초로 징집제를 부활시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의 대군단, 즉 Grande Armee의 탄생이었습니다.  모든 국민은 병역의 의무가 있다는 간단한 선언이 위기의 프랑스를 구원하고 나아가 유럽 정복을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아울러, 수많은 한국 젊은이들에게 군대라는 고민거리를 가져다 주었고, 미국 원정 출산이라는 기현상도 낳았지요. 

 

 

 

(모든 대한민국 병역 미필자의 원수, 실제로도 당대 프랑스의 원수(Marshall), Jourdan) 

 

 

당시 법안을 만든 프랑스의 장군 주르당의 이름을 따서 loi Jourdan (주르당 법)이라고 불린 이 징집법을 살펴보면, 요즘 한국의 병역 미필자들에게 매혹적인 내용이 많습니다.  일단 병역의 의무는 20세에서 25세 사이의 미혼에 자식이 없는 남자들에게만 있었습니다.  게다가 성직자나 군수품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 그리고 몇몇 대학(Grandes Ecoles)의 학생들 및 공무원들에게는 병역 면제를 인정했습니다.  거기에다, 젊은 나이에 한 여자에게 발목잡히기 싫은 부자 청년을 위해서는 특별 조항이 또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의 군포제 비슷한 것인데, 다른 남자를 사서 대신 입대시키는 것을 인정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집 도련님은 군대를 안가도 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유복한 병역 미필 청년들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요.  "국내 도입이 시급합니다 !"

 

 

 

위기의 조국 (La patrie en danger), Guillaume GUILLON dit LETHIERE 작 

 

 

 

(날 원한다고 ?  니네집 아들부터 데려가라 !) 

 

 

일반적으로, 징집제는, 그 전의 용병제나 모병제에 비해, 군대의 질적 향상을 불러왔다는 것이 일반론입니다.  전문적인 용병들이 귀신같은 사격 솜씨나 투철한 프로페셔널리즘으로 어려운 임무를 해결하는 장면들은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나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오죽 먹고살 길이 없었으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직업을 택했을까 싶지 않습니까 ?  장교야 그렇다치고, 병졸로서 군에 제발로 입대하는 경우는, 예나 지금이나 중산층에서는 보기 힘든 경우인 것 같습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도, 처음에는 주로 자기 영지의 농촌 청년들을 군인으로 활용했으나, 그로 인한 세금 감소 문제로 인해, 후기에는 상대적으로 TCO(Total Cost of Ownership, 총소유비용)가 낮은 용병들을 주로 활용했고, 그 결과 프로이센군의 질적 저하라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런 건 주로 게임에서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용병 집단 중의 하나가, 소위 '키루스의 1만명'입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피폐해진 그리이스 각지에서 모인 1만명의 중장보병들이, 페르시아의 대왕인 자기 형 아르타크세륵세스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키루스 왕자에게 고용되어 페르시아 내륙으로 향합니다.  결국 키루스가 패전하여 죽자,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페르시아 내륙을 가로질러 소아시아의 그리이스 도시 비잔티움으로 퇴각해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정작 비잔티움에 도착하고 나서는, 그토록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트라키아에서 또 용병 생활을 합니다.  빈손으로 가난한 고향에 돌아가기 싫었던 것입니다.  즉, 대부분은 몸에 가진 무기 외에는 무일푼이었던 것이지요.  이렇듯, 용병이란 대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합니다.  용병만큼 월급 체불되고 떼먹히기 좋은 직업도 드물지 않습니까 ?

 

 

 

 

아무튼 Sharpe 시리즈 중에서, 프랑스의 징집제에 대해 언급된 부분을 보지요.

 

Sharpe's Tiger by Bernard Cornwell (배경 1799년, 인도 셰링가파탐) ---------------------

 

(샤프 일병과 로포드 중위는 탈영병으로 위장하여 인도 마이소르 군에 투항한 뒤,  마이소르 군의 군사 고문인 프랑스군의 구댕 대령의 취조를 받습니다.)

 

구댕 대령은 도망병으로 변장한 로포드 중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중략.... 샤프가 보기에, 구댕 대령은 로포드 중위처럼 신사였고, 제대로 된 장교였다.  아마 그게 문제인 모양이었다.  어쩌면 구댕은 로포드의 변장을 이미 뚫어봤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로포드 일병, 자넨 내가 보기엔 전형적인 영국군 병사같지는 않군." 구댕이 이렇게 말하자, 샤프는 바짝 긴장했다.  "프랑스에서야 자네같은 병사가 이상할 것이 없어. 프랑스에서는 모든 젊은이가 국가를 위해 복무해야 하거든.  하지만 영국에서는 사회의 찌꺼기, 시궁창에서 굴러다니던 사내들만 군대에 가지 않던가 ?  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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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영국군은 왜 사회의 찌꺼기들로만 이루어졌는지는, 나폴레옹 시대의 영국군 모병 광경 - from Sharpe's Regimenthttp://blog.daum.net/nasica/6862349 ) 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 위에 예로 든 포키온 장군의 '마음 병신'은 징집제가 있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존재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징집 면제 대상이 되기 위한 많은 방법이 존재했습니다.  뭐 간장을 마시면 된다는 소리도 있고, 괄약근(X꼬) 조이기 등도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어땠을까요 ?

 

 

 

(이 그림 제목과 화가 아시는 분은 댓글 좀... 제가 기억하기로는 '마르세이유 자원병들의 출정' 뭐 그런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암튼 혁명 초기에는 이렇게 열정적인 자원병들이 많았습니다.)

 

 

대혁명 초기, 아직 징집법이 발포되기 전에는 전국에서 혁명의 뜨거운 열정으로 수많은 지원병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곧 혁명의 정신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 벌어지면서 그 열기는 조금씩 식어갔기 때문에 결국 징집법까지 나왔습니다.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프랑스군이 연전연승하면서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높아진 것은 사실입니다만, 좋은 짓거리도 한두번이라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으로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고, 결과적으로 많은 탈영병 및 병역 기피자들이 생겨났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15년 동안 프랑스군의 사상자 숫자는 40만에서 230만명까지 다양한 추정치가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100만명은 넘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가령 불과 며칠동안 계속된 에슬링-아스펜 전투에서만도 약 2만명의 전사자가 났고, '나폴레옹의 종기'로 알려진 스페인 전쟁에서는 6~7년 동안 총 25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1810년 무렵 Grande Armee의 병력 수가 약 45만명 정도였고, 프랑스 인구가 약 3천3백만명 정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또 당시 화기의 조잡함을 생각하면 상당한 숫자지요.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에서는 전쟁이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 -- Grande Armee, 스페인 빨치산 전쟁에 녹아내리다) 

 

 

사정이 이랬으므로, 나폴레옹은 끊임없이 새로운 병력의 충원을 요구했고, 원래 다음해의 입대 예정자들을 미리 입대시키는 조치들을 남발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짜르에게, 자신의 제국에서는 매년 25만명씩의 신규 병력을 새로 충원할 수 있다고 뻥을 치기도 했습니다만, 사실 그건 이탈리아와 라인 연방까지 포함한 숫자였고, 그나마 실제로 그런 대규모 병력을 상시 징집하지도 못했습니다. 

 

원래 러시아나 오스트리아, 독일에 비하면 프랑스는 인구가 작은 나라였으므로, 나폴레옹은 항상 병력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나폴레옹은 전성기에도 특유의 '발로 뛰는 전투', 즉 기동력을 중시하는 전술로 숫적 열세를 극복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 반도 전쟁에서, 특히 러시아 원정에서 대규모로 병력을 말아먹은 뒤에는 병력 부족을 감출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1814년 프랑스 국내까지 후퇴한 뒤에는, 어쩔 수 없이 원래 징집 연령 이하였던 소년들까지 대거 징집해야 했습니다.  그 때문에, 정전 협상을 하러 나폴레옹을 찾은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에게서 '저런 솜털도 안난 병사들로 뭘 하시려고 하느냐'는 조롱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이때의 어린 소년병들의 당시 별명은 '마리 루이즈', 즉 나폴레옹의 오스트리아 출신 황비의 이름이었습니다.   전장에 나간 나폴레옹을 대신하여, 이런 소년병들의 징집 법안에 서명한 것이 당시 섭정이었던 마리 루이즈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나폴레옹조차도 이런 소년병들을 독려할 때 천연덕스럽게 '전진하라 마리 루이즈들이여 !'라고 외칠 정도였다고 합니다.

 

 

 

 

 

(난 그냥 남편이 시키는 대로 서명을 했을 뿐이고 !)

 

 

나중에 엘바섬으로 쫓겨난 다음에, 나폴레옹은 방문객들에게 자신은 항상 프랑스의 인력을 아끼고자 주로 이탈리아와 라인 연방에서 징집을 실시했다고 떠벌렸는데, 이는 전혀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프랑스에서는 항상 징집 기피자가 많았거든요.  (그렇다고 이탈리아나 독일인들은 열정적으로 징집에 응했다는 건 물론 아닙니다.)

 

중국 유행어 중에, '정부에는 정책이 있고, 국민들에게는 대책이 있다'고 했습니다.  프랑스 국민들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병역을 기피했습니다.  가장 흔한 것이 '소집 영장을 뒤로 하고 그냥 튀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프랑스는 영국이나 독일에 비해 인구밀도가 높지 않은 나라라서, 숲이나 농촌에 숨을 곳이 꽤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병역 기피자들은 어차피 범법자 신세였고 또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당연히 산적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병력 자원 고갈에다 국내 치안 악화라는 이중고를 나폴레옹에게 안겨주었습니다. 

 

또 전쟁에 나가고 싶지도, 그렇다고 숲속으로 숨고 싶지도 않은 젊은이들은 신체 일부를 훼손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통하는 방법, 즉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자르는 것이지요.  방아쇠를 못당기는 병사는 쓸모가 없으니까요.  또, 요즘에는 통하지 않는 방법도 유행했습니다.  바로 앞니를 뽑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기름종이로 되어있던 탄약포(cartridge)를 물어뜯어 총에 장전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앞니가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머스켓 소총의 장전 절차에 대해서는 머스켓 소총을 둘러싼 이야기 http://blog.daum.net/nasica/4768750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어금니로 앞쪽의 탄환을 뜯어내기엔 좀...) 

 

 

전세계적으로, 징집제는 대세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처럼 특수한 안보 상황에서나 징집제가 필요한 것이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은 징집제가 국가 안보상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우리나라 남성들은 자기가 병역을 시작하기 전에는 대부분 모병론자지만, 병역을 마치고나면 반드시 징집론자로 변태를 일으킨다는 점입니다.  저도 육군병장 출신의 병역필자입니다만, ㅎㅎㅎ 저도 똑같은 변태과정을 거친 징집론자입니다.  (이유 ?  간단하지요. 나만 당할 수는 없뜸 ! ㅎㅎ)  다만 나중에 제 아이가 군대에 갈 나이가 되면 다시 모병론자로 바뀔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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