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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가져간 두가지, 대포와 OOO ?

by nasica-old 2009.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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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지방에 대한 서양 세력의 침탈은 19세기 초반에서야 시작되었습니다.  18세기 이전에는 오히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서양을 압박했었지요.  그러다가 오스만이 침체되고, 특히 서양 세력이 동방과 무역하기 위해 중동을 통하지 않고 희망봉을 돌아서 항해하면서부터, 서양과 중동은 상호간에 별다른 교류가 없이 한동안을 조용히 지냈습니다.  그러다 근대화된 서양 세력이 중동을 침략하게 된 것은 1798년, 바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 그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 이후로 중동 세력들은 서구의 기술력과 경제력에 영향을 받게 되고, 점차 경제적, 군사적으로 예속의 길을 걷게 됩니다.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일어난 카이로의 반란... 윽 C발 프랑스놈들 꽤 세네...) 

 

 

결국 나폴레옹을 바라보는 이집트인들의 시각은 별로 좋을 수는 없는데요, 그래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 가져온 좋은 영향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집트 지식인들이 꽤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시대를 통해 근대화되었으므로 일본에 고마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부 친일파 인사들과는 그 시각이 어떻게 다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의 좋은 면을 바라보려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보나파르트는 대포와 OOO를 가지고 이집트에 왔다.  그러나 대포는 떠났고, OOO는 남았다."

 

 

 

(나중에 러시아 원정길에서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낙후된 시골을 보고 한마디 합니다. 

"러시아는 이집트만도 못하구나 !") 

 

 

여기서 OOO은 무엇일까요 ?  바로 인쇄기였습니다.  이건 단순히 수사학적인 비유가 아니고,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진짜 인쇄기를 몇대 싣고 갔습니다.  원래 이집트 원정의 대의 명분 중 하나가, 문명의 요람 이집트에 그 문명을 되돌려주러간다는 것이었는데, 그 주요 수단으로 인쇄기를 택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한 일입니다.  다만 아름답지 못한 부분은, 나폴레옹은 프랑스제 외에도, 당시 점령했던 로마 바티칸의 포교성에서 3대의 인쇄기 완제품을 뜯어다 해체하여 이집트로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문명의 전파 수단 자체를 약탈품으로 채웠다는 것이 그 원정의 결과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이것저것 많은 것을 약탈해오는데, 도둑놈이 도둑질을 당한다고, 영국해군에게 그중 다시 많은 것을 털립니다.

 

 

 

(난 아무튼 영국 해군 때문에 뭐 되는 일이 없어 !) 

 

 

이 인쇄기들로 실제로 많은 서적 및 신문이 출간됩니다.  '이집트에서의 10일간'(La Decade Egyptienne)이라는 정기 학술지도 간행되고, '이집트 통신'(Le Courrier de l'Egypte)라는 신문도 발행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 현지인들을 위한 많은 포고문은 물론, 특수 활자를 만든 후에는 아랍어 교본이나 '아랍어, 터키어, 페르시아어 알파벳'같은 언어학 서적까지도 출판됩니다. 

 

 

 

(이거 이래뵈도 카이로에서 인쇄한 거임... 프랑스어 하실 줄 아는 용자, 읽어 BoA요) 

 

 

전에 프랑스 대혁명은 결국 세금, 즉 돈 문제 때문에 일어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좀더 생각해보면, 그 전에도 세금이나 돈 문제가 심각했던 시절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는 폭동은 있었을지언정, 혁명은 없었지요.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저는 계몽 사상과, 그리고 그 계몽 사상을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한 인쇄술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나폴레옹도 아마 저와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집트까지 인쇄기를 들고 갔겠지요.

 

 

 

(당시 인쇄기가 가져온 변화는 월드와이드웹(www)이 가져온 변화보다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았습니다) 

 

 

정확한 통계치는 없습니다만, 일반적으로 18세기 초반 프랑스 성인 남성의 대략 25%만이 읽고 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던 18세기 말엽 즈음 그 비율은 50% (여자의 경우는 25%) 정도로 부쩍 높아집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출판업이 당시 경제의 가장 활발한 분야가 됩니다.  이건 20세기 말의 인터넷 혁명에 해당하는 정보 혁명이었습니다.  기껏해야 성경 정도나 인쇄하던 인쇄소가, 이제는 일반인들을 위한 정기 간행물, 주간지, 소식지 등을 활기차게 찍어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과거에는 지식인들의 사상이 몇몇 지식인들끼리 교환되다가 끝났지만, 이제는 일반 대중들에게 '여론'이라는 것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예전에는 왕이나 대신들이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여론'이라는 것이 정치 권력으로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1770년대 루이 16세의 재무 대신이었던 자크 네케르 ( 나폴레옹 시대의 말, 말, 말 http://blog.daum.net/nasica/6862350 편에 출연했던 스탈 부인의 아버지)가 이런 말을 남길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이 내 딸을 거부했어 ?  그런 십장생 호로병 자식을 봤나...) 

 

 

"여론은 보석도, 근위병도, 군대도 갖고 있지 않지만, 도시, 궁정, 심지어 국왕의 내각에 법령을 만들고 좌지우지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을 구성한다."

 

그 이전의 군주들은 이런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워섬겼습니다.

 

루이 15세 - 모든 공공질서는 짐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루이 16세 - 내 칙령은 합법적이다.  왜냐하면 짐이 그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이건 불법이다 !  이유는 짐이 이걸 전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  어..어...!) 

 

 

하지만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직전에는 이런 군주들의 선언은 그야말로 4가지 없는 망언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18세기 중엽부터의 계몽주의와, 그리고 그 계몽주의 사상이 일반 대중에게 퍼질 수 있도록 오늘날의 웹브라우저 역할을 해준 인쇄술 덕분이었습니다.

 

당연히 당시 왕들은 이런 인쇄물을 단속하고 검열하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이러한 검열 때문에, 당시 신문들에는 정치 뉴스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거의'라고 쓴 것은, 몇몇 어용 신문들이 정부와 국왕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 뉴스를 내보냈기 때문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조중동은 항상 존재했습니다.)  당시 계몽 사상가들은 신문 같은 곳에 기고를 한 것이 아니라, 검열관이 주목하지 않는 출판사를 통해 저술을 발표했고, 어용 신문의 '개소리'에 지긋지긋해하던 대중들은 이런 찌라시 출판물을 즐겨 읽었습니다.  말하자면 요즘 블로그나 토론게시판 같은 출판물이었지요.  (정말 당시의 인쇄술은 요즘 HTTP와 비슷한 기술 및 영향력을 가집니다.)

 

하지만 정부의 검열은 이런 찌라시 출판물도 단속했습니다.  최근 잡혀간 미네르바처럼요.  가령 계몽 사상가의 대표주자인 볼테르의 경우, 여러가지 풍자와 냉소가 가득찬 논평을 자주 냈고, 그 결과 감옥과 추방 생활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스위스 국경 근처에 살면서 자기 저술 때문에 '검은 양복 사나이들'이 올 것 같으면 냅다 스위스로 튀기도 했습니다. 

 

 

 

(나 살던 시대에도 DC 정사갤 같은 수구 꼴통들 많았어) 

 

 

나폴레옹이 한시대를 풍미한 영웅인지, 혹은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당대에는, 적어도 외국에서는, 나폴레옹이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로 인식되었습니다.  이유는 여러가지 있겠습니다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비밀경찰과 언론 검열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정말 권력이란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는지 (혹은 전혀 이해를 못했던 사람이었을까요 ?) 이런 말들을 남겼거든요.

 

"리옹에서 성난 노동자들 2천명과 상대하는 것보다는 전장에서 외국군대 2만명과 싸우는 것이 더 쉽다."

"언론을 장악하지 못하면 내 권력은 단 며칠도 지탱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프랑스 국내의 언론 및 여론 단속을 철저히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푸셰(Joseph Fouche)를 총수로 하는 비밀경찰을 광범위하게 운용하며 국민들의 여론과 주요 인사들의 거동을 면밀히 감찰했고, 특히 각 신문사들의 기사를 일일이 감시하고 참견했습니다.  그 결과, 혁명 초기 거의 1000개에 가깝던 각종 신문사는 겨우 4개로 '언론 통폐합'되었습니다. 

 

 

 

 

(내 이름은 푸셰, 히믈러는 내 후배뻘이야.  다만 난 나폴레옹 멸망 이후에도 잘먹고 잘살았지.) 

 

 

당시 영국인들이 나폴레옹에 대해 도덕적인 우월감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런 언론의 자유 덕분이 큽니다.  가령 다음 그림에 보이는 만평은 영국 신문에서만 볼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신문에서 나폴레옹을 우스꽝스럽게 그렸다가는 푸셔 휘하의 '검은 양복 입은 사람들'에게 끌려가서 '코로 설렁탕을 마시게' 되었거든요.

 

 

 

(영국 신문이니까 나폴레옹을 원숭이로 그린 것은 OK.  그런데 자국 수상인 John Bull을 불독으로 그려 ?) 

 

 

결국 독재자의 말로는 처참하다고, 나폴레옹은 엘바섬과 세인트헬레나에서 초라한 말년을 맞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를 평생 그리워하며 프랑스 소식에 목말라 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오는 신문들은 당시 복귀한 부르봉 왕가의 감독을 받고 있었으므로 제대로 된 파리 정세를 알려주지 않아, 나폴레옹은 프랑스 신문보다는 영국 신문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쟎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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