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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의 음식 이야기

오병이어, 예수 시대의 음식

by nasica-old 2008.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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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장 7절 ~ 15절 (아가페 출판사 쉬운 성경) ----------------------------

 

빌립이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여기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빵을 한 입씩만 먹는다고 해도, 그 빵을 사려면 이백 데나리온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가 말했습니다.
“여기 사내아이 하나가 가지고 온 작은 보리 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이렇게 많은 사람을 어떻게 먹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앉으라고 하여라.” 그 곳은 풀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거기에 앉은 남자 어른의 수는 약 오천 명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신 후, 그 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만큼 나눠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를 가지고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실컷 먹었습니다. 식사가 끝났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먹고 남은 빵과 물고기를 다 모으고 하나도 버리지 마라.”
그래서 제자들은 남은 음식들을 모았습니다. 보리 빵 다섯 개로 사람들이 먹고 남은 조각들이 큰 광주리로 열두 개나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말했습니다. “이분은 세상에 오실 그 예언자가 틀림없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자기를 강제로 데려다가 그들의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 곳을 떠나 혼자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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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신약성경에서도 아주 유명한 장면인, 예수가 오병이어, 즉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5천명을 먹인 사건에 대한 묘사입니다.

 

종교 문제는 무척 껄끄러운 것이라서, 먼저 저 자신의 종교부터 밝히는 것이 낫겠네요.  저는 와이프 때문에 교회는 다니는데, 솔직히 믿는 마음은 별로 없습니다.  특히 현대 한국 개신교에 대해서는 무척 회의적입니다.

예수의 오병이어 기적을 제가 믿느냐 안믿느냐는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저 때 예수가 나누어준 빵과 물고기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지요.

 

저 물고기 요리에 대해서는 사실 별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구운 건지 튀긴 건지, 아니면 그냥 말린 건지...  예수가 부활한 뒤에 제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 제자들이 대접한 음식도 '구운 생선 한토막'이었던 것으로 보아, 저 물고기 두마리도 구운 것 아니었을까 합니다.  어떤 책을 보니, 저 당시에 유대에서 유행했던 음식이, 달걀을 입혀 튀긴 물고기, 즉 우리나라의 생선전 같은 것이었다고 하고, 또 예수도 그 음식을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  책에 그에 대한 설명은 없더군요.)

 

저 당시 유대인들이 먹었던 빵은 어떤 모양일까요 ?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 다른 이견이 없나봅니다.  현재도 중동에서 많이들 먹고 있는 피타(pita)라는, 인도의 난 빵과 비슷한 모양의 납작하고 둥근 빵을 먹었다고 합니다.  가장 최근에 TV에서 이 피타 빵을 본 것은, 작년에 샘물교회 선교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되었을 때 자료 화면으로 보여주던 것에서였습니다.  그 화면 속에서, 아프간 전사들이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는데, 누군가가 우리 나라 빈대떡만한 피타 빵을 한장씩 나누어 주더군요.  화면에서 본 피타 빵은 축 늘어져 있는 것이, 별로 맛은 없어 보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중동 지방에서는 전통적으로 스푼이나 젓가락같은 식기를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도 스푼이나 포크같은 것 없이 손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국물있는 음식을 먹었을까요 ?  차라리 묽은 국같은 것은 (일본 사람들이 하듯) 그릇을 들고 마시면 되겠지만, 스튜같은 어정쩡한 음식은 스푼이 없다면 정말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  예수가 손에 소스를 잔뜩 묻힌 채로 손가락을 쪽쪽 빨아가며 스튜를 먹었다 ?  이건... 성경에 몰입이 되지 않는 장면이네요.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즉, 당시 사람들은 스푼없이도, 우아하게 스튜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즉, 저 피타 빵이 스푼 대용 역할도 했습니다.  피타 빵을 뜯어서, 알맞게 접으면 스푼처럼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빵에 국물을 묻혀서 먹어야 피타도 먹을 만 했다고 하네요.  스튜같은 국물있는 음식이 없을 때도, 피타에 하다못해 물이라도 꼭 찍어서 먹었답니다.  생각해보니 멜 깁슨 주연의 스코틀랜드 독립 투쟁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도, 치마(퀼트)를 입은 멜 깁슨과 그 일당이 들판에서 그런 식으로 뻑뻑한 빵을 주걱 삼아 뭔가 스튜 같은 음식을 퍼먹던 장면이 나왔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다른 민족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빵은 무척 소중한 음식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대규모 방앗간보다는, 집집마다 가진 작은 수제 맷돌을 이용해서 밀가루를 만들었는데, 날마다 이렇게 맷돌로 밀을 갈아 빵을 만드는 소리가 난다는 것은 풍요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특히 코셔(kosher)라고 해서, 먹는 것에 대한 규정도 따로 복잡하게 두지 않습니까 ?  그 중 하나가, 시체를 만진 사람은 부정을 탄 것이 되어, 그 사람은 절대 음식을 만들어서는 안되었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나올 수 있지요.  집에 초상이 나면, 당연히 그 집 식구들이 시신에 손을 안댈 수가 없는데, 그러면 음식은 누가 만드나요 ?  굶나요 ?  아닙니다.  이럴 경우는, 옆집에서 음식을 해서 갖다주었다고 합니다.  옆집이 없으면 ?  글쎄요, 역시 그에 대한 설명은 못들어보았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성경에 한가지 더 인용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9절 ~ 37절 (아가페 출판사 쉬운 성경) --------------------------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제 이웃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은 이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은 채로 버려 두고 갔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을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길 반대편으로 피해서 지나갔다.
어떤 레위인도 그 곳에 와서 그 사람을 보고는 길 반대편으로 피해서 지나갔다.
이번에는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그 길을 여행하다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보고 불쌍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의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붕대로 감쌌다. 그리고 그를 자기의 짐승에 태우고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정성껏 보살펴 주었다.
다음 날, 그는 은화 두 개를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 사람을 잘 보살펴 주세요. 만일 돈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겠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들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
율법학자가 대답했습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준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똑같이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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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렸을 때 저 성경 구절에 나온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심술장이라서 부상당한 사람을 보고도 그냥 가버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유대인들에게 시신은 매우 부정한 것으로서, 특히 제사장이나 레위인같은 성직자 계급은 절대 시신에 손을 대서는 안된다고 하더군요.  즉, 저 위 이야기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비양심적인 사람이라서 부상자를 그냥 지나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사람들은 혹시 죽었을지도 모르는 사람 근처에 가서는 안되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혹시라도 만져보았더니, 죽은 시체더라 하면, 그 제사장은 그 날로 자격을 박탈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원래 유대인의 제사장이라는 것은, 자격 요건이 까다롭더라고요.  심지어, 신체가 완전해야 한다는 조건도 있습니다.  가령, 사고나 전쟁 등으로 몸의 일부가 불구가 되거나, 심지어 대머리가 된다고 하면, 제사장 지위를 박탈당했습니다.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기'를 읽어보면, 로마군의 도움으로 라이벌 제사장을 사로잡은 유대인 하나가, 직접 그 라이벌의 귀를 물어 뜯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렇게 귀를 망가뜨려 놓으면, 설령 나중에 자기가 권력을 잃는다고 해도, 그 라이벌은 신체가 완전하지 않으므로 다시는 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저 위의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예수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웃이라는 사람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이민족이라 풍습이 다른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인도주의적인 선행을 베푸는 사람이 바로 너의 이웃이라는 것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전에 다니던 감리교 교회 목사님께서는 신도들에게 당부하시길, 주일에도 일을 해야 하는 군인이나 소방관, 경찰관 같은 일은, 주일을 성수해야 하는 크리스천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므로 가급적 하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자, 그런 말씀을 하시는 목사님이 여러분의 이웃입니까, 아니면 일요일에 여러분의 집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달려와서 불을 꺼주는 소방관이 여러분의 이웃입니까 ?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감히 말할 부분은 아닌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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