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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의 음식 이야기

스코틀랜드의 용맹, 그리고 삶은 고기

by nasica-old 2008.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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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연대기, 프롸싸르 작 (배경 : 1327년 영국) ----------------


스코틀랜드인들은 용감하고 강인한 민족으로서, 전쟁 경험도 풍부하다. 


당시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인들과 무척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스코틀랜드인들이 국경을 넘어 진격할 때는 하루에 60~70 마일 (96~112km)나 전진하는데, 이들의 풍습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놀라운 행군 속도이다. 


이들의 행군 속도가 빠른 것은, 스코틀랜드인들이 잉글랜드에 쳐들어갈 때는 일부 비정규 보병을 제외한 전원이 말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기사나 보조기사(squire)들은 튼튼하고 훌륭한 말을 타고, 일반 병사들은 조랑말을 탄다.  이들은 노썸버랜드의 거친 언덕들을 건너야 하므로, 짐마차를 끌고 올 수 없고, 따라서 빵이나 포도주같은 보급품도 가져올 수 없다.  이들은 전쟁 중에는 설익은 고기를, 빵이나 포도주도 없이 먹고, 그냥 강물을 길어마시면서 아주 긴 기간을 견딘다. 


이들에게는 냄비나 팬 같은 주방도구들이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이들은 가축을 잡아 고기를 익힐 때, 잡은 가축의 가죽을 벗겨내 그 가죽에 고기를 넣어 익히기 때문이다.  이들이 통과하는 잉글랜드 지방에는 가축이 아주 많으므로, 이들에게 필요한 유일한 군량 관련 물품은 말안장 밑에 넣어두는 커다랗고 평평한 돌 판 1개와, 말 안장 뒤에 붙들어 맨 귀리가루 1자루 뿐이다.


스코틀랜드인들이 오랫동안 설익은 고기만 먹어서 속이 좋지 않을 때는 안장 밑에 넣어두었던 돌 판을 불 위에 올려놓고, 가져온 귀리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뜨거운 돌 판에 그 반죽을 붓는다.  이렇게 해서 웨이퍼 같은 작은 과자를 만드는데, 이걸 먹으면서 소화를 돕는다.  그러므로 이들이 다른 군대에 비해 진격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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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좀더 과거로 되돌아가, 14세기 초의 영국입니다.

 

당시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백년전쟁을 치르느라 박터지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전세는 대략 잉글랜드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작아 보이는 잉글랜드가 면적이 훨씬 큰 프랑스를 유린할 수 있었던 것은 유명한 장궁(long bow) 덕택도 있었겠지만, 당시 잉글랜드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잉글랜드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오늘날은 프랑스 땅인 상당 부분이 당시는 잉글랜드 땅이었습니다.  가령 당시 유명했던 잉글랜드의 흑태자 에드워드의 영지는 잉글랜드 본토가 아니라 오늘날 프랑스 땅인 리모쥬였습니다.  당시 프랑스어를 쓰는 많은 기사들이 "나는 대대로 충성스러운 English"라고 자부하며 잉글랜드 왕을 위해 싸웠습니다.  오늘날의 민족 개념과는 많이 다르지요.

 

하지만 민족 개념이 당시에도 투철했던 사내들이 있었으니, 바로 스코틀랜드의 용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같은 좁은 섬에서 살면서도, 잉글랜드와는 철천지 원수였고 또 뿌리도 달랐습니다.  즉, 잉글랜드인들은 사실 게르만 대이동때 섬으로 몰려온 게르만족의 일파인 앵글로 족과 색슨 족이었던 것에 비해, 스코틀랜드인은 케사르의 브리튼 침공때부터 브리튼 섬에 살던 켈트 족이었습니다.  언어도 다르고, 역사도 다르고, 풍습도 달랐습니다.  무엇보다도, 잉글랜드인들에게 스코틀랜드가 많이 당했다는 뼈아픈 기억이 있었지요.

 

 

 


스코틀랜드인들이 맨날 당하기만 하고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력이 규합되는 대로, 잉글랜드에 보복 침공을 자주하여 작은 성공을 거둔 적도 많습니다.  위에 인용된 백년전쟁 연대기의 일부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피비린내나는 혈투에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 연대기를 쓴 프롸싸르는 프랑스 사람인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전쟁을 할 때는 프랑스에서보다 훨씬 더 격렬하고 무자비하게 싸웠다' 라고 써놓고 있습니다.

 

위에서보면, 스코틀랜드인들은 신속한 진격을 위해 식량 일체를 가져가지 않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잉글랜드의 목축지를 습격하여 가축들을 빼앗고, 그 가축을 잡아먹으며 전쟁을 수행하는데, 솥이나 팬도 없어 그냥 가축의 가죽에 물을 붓고 간이 솥을 만든 뒤 거기에 고기를 삶아먹는다고 나와있습니다.

이게 가능한가요 ?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가능하다고 합니다.  제가 초딩일 때 유행하던 아이디어 북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퀴즈 중에, 냄비가 없고 마분지만 있는데 라면을 끓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정답은, 마분지로 상자를 만들고, 상자 입구까지 물을 가득 채우고 불에 올리면, 물이 담긴 부분까지는 종이가 타지 않으므로 라면을 끓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실험은 해보지 않았습니다.)  종이도 되는데 뭐 설마 가죽이 안되겠습니까 ?

 

그런데 그럴바에야 차라리 고기를 그냥 불에 구워먹을 생각을 하지 왜 구태어 삶아먹으려 했을까요 ?  스코틀랜드에서는 구운 고기보다는 삶은 고기를 더 좋아했을까요 ?  잘 모르겠습니다.  바이킹들도 고기는 주로 삶아먹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19세기 후반까지 영국 육해군의 주식단도 삶은 염장 쇠고기였습니다.  구운 것이 아니고요. 

 

고기를 굽지 않고 삶아먹으면 좋은 점이 있습니다.  일단 그 국물을 다른 요리에 또 쓸 수 있다는 점 외에도, 결정적으로 요리가 쉽습니다.  고기를 불 위에서 구우려면, 특히 대량의 고기를 구우려면 태우지 않고 골고루 익히기 위해 손이 많이 갑니다. 오븐이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게다가 문제중년님의 말씀에 따르면, 삶는 것이 굽는 것에 비해 연료가 적게 든다고 하네요. 그래서 군대, 특히 18~19세기 영국 해군에서는 주로 삶은 고기를 많이 먹었나 봅니다.  

 

 

 


유명한 베트남전 영화, "아포칼립스 나우"라는 영화 아십니까 ?  그 바그너 작곡인 '발키리의 비행'을 틀어놓고 베트남 마을을 습격하던 헬티콥터 부대가 나오던 영화요.  거기서도 미군 주방에서 '엄청나게 좋은 고기를 그냥 물에 푹 삶아서 회색 덩어리를 만들어놓는다'면서 불평하는 어떤 요리사 지망생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기를 삶으면 고기의 영양소 중 많은 부분이 삶은 물로 빠져나옵니다.  따라서 고기 그 자체의 맛은 떨어지는 것이 상식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고기는 삶아서 고깃국을 끓여먹었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적은 재료로 여러명이 나누어 먹으려면 국을 끓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요리에서도 수프는 하급요리로 칩니다.  수프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불온한 생각, 즉 적은 재료로 여러명이 나누어 먹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호텔같은 곳에서 코스 요리를 먹을 때 보면, 수프가 딸린 코스는 거의 없습니다.

 

 

 

 

프랑스 요리 중에 국물이 있는 것 중 유일하게 '그나마' 고급으로 쳐주는 것은 coq au vin, 꼬꼬뱅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하면 rooster in wine, 즉 수탉을 포도주에 삶은 거지요.  고급으로 쳐주는 이유야 말로 불순합니다.  포도주가 비싸거든요.  소설에서는 안나옵니다만, TV 미니시리즈의 Sharpe 시리즈에서는 이 꼬꼬뱅이 등장합니다.  1814년 전쟁이 끝나고, 여차여차해서 프랑스 농가에서 부상을 치료 중인 샤프에게, 집주인인 미망인 루실이 '원하는 요리를 해주겠다, 뭐 먹고 싶냐' 하자, 샤프는 주저하지 않고 꼬꼬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루실은 '너 아는 프랑스 요리 이름이 꼬꼬뱅 뿐이지 ?'라고 비웃고, 샤프는 '아니야, 음식에 포도주가 들어가기 때문이야' 라며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진 속의 저 여자가 TV 미니시리즈 판에서 나온 루실 카스티노입니다)

 

저도 이 요리를 한번쯤은 먹어보려고 했는데 (당연히!)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베트남의 어떤 고급 호텔에서 한번 먹어봤습니다.  베트남은 아직도 프랑스 식민시대의 문화가 많이 남아있거든요.  글쎄요, 프랑스에서 먹는 꼬꼬뱅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야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만, 뭐 정말 맛있다는 생각은 안들던데요 ?  역시 닭은 BBQ가 최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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